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File 9.

  

“혹시 최병옥 씨가 맞나요?”



처음 듣는 목소리의 여자가 병옥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 건 다음 날 오전 7시 경이었다. 병옥은 부인의 전화를 기다리다 자신도 모르게 앉은 채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동안 제대로 풀지 못한 피로 때문인지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버린 병옥이었다.



그런 병옥을 깨운 건 전혀 뜻밖의 전화였다.



“예, 맞는데요.”

꿀맛 같은 단잠에서 겨우 깨어난 병옥이 한껏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창문을 굳게 가린 블라인드가 일하기 시작한 아침햇살 때문에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컴컴했던 사무실 안은 덕분에 주변을 구별하기 쉬울 정도로 한결 밝아져 있었다.



“여기는 대전종합병원입니다.”



상대방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병원이요?”



병원이라는 말에 병옥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고혈압이신 장모님이 또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병원에서 무슨 일로?”



병옥은 자세를 바로 하고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늘 새벽에 여자 한 분이 크게 다쳐서 저희 병원에 실려 왔어요. 그 분 바지에서 핸드폰이 나왔는데, 어젯밤에 최병옥이라는 분과 통화한 내역이 있더라구요. 혹시 이 여자분과 잘 아는 분인가 해서 전화한 거에요.”



어젯밤 자신과 통화한 여자라면 박제천의 부인밖에 없었다.



“크게 다치다니요?”



“화재가 난 아파트에서 추락한 분인데, 새벽에 응급 수술을 받고 지금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입원해 있어요. 가족에게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지금 환자분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상황이라, 혹시 환자분을 잘 아시는 분인가 해서 전화했어요.”



병옥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자신과 얘기를 나누었던 박제천의 부인이 지금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고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에 병옥은 머리가 멍 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까?”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난 상태에요. 깨어나기만 하면 되는데, 언제 깨어날지는 저희도 잘 몰라요. 혹시 가족이나 친척이세요?”



“아니오.”



병옥은 난감했다. 병옥도 어제 처음 그녀를 만났다. 당연히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핸드폰 전화부에 가족이나 지인들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지 않나요?”



“핸드폰 전화부에다가 암호를 걸어 놔서, 지금 통화기록에 나온 전화번호를 차례로 걸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일단 제가 그분을 아는 사람을 아니까 대신 연락해 드릴게요. 그곳이 정확히 어디죠?”



“저희 병원은 대덕구 읍내동에 있어요. 병원 건물이 커서 근처에 오시면 보일 거에요. 지금 중환자실에 있는데 병원에 오면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물어보시면 될 거에요.”



“알았습니다.”



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 통화를 끝냈다. 병옥은 오른손으로 푸석푸석한 머리털을 벅벅 긁으며 소파에 등을 푹 기댔다.



“환장하겠네!”



병옥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멀쩡하던 박제천의 부인이 불과 밤사이에 큰 봉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누군가의 방문으로 대화를 중간에 끝내버렸다.



만약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거나 이상한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병옥에게 도움을 청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화를 끝낼 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불안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사람은 그녀가 잘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병원에서 전화한 여자의 말로는 화재가 난 아파트에서 추락했다고 한다. 아마 부인의 집에서 화재가 났고 그 불길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밖으로 몸을 던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집에 그런 큰일이 왜 일어난 것일까.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그녀에게서 박제천의 우울증이 시작되었던 시기에 관해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그녀의 사고는 가뜩이나 난관에 봉착한 병옥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 나야.”



병옥이 전화를 건 사람은 김석현 형사였다.



“이른 시간에 전화를 다 하시고, 무슨 일입니까?”



“박제천 씨 부인이 지금 중환자실에 입원했대.”



“예?”



김 형사도 뜻밖의 소식에 놀란 모양이었다.



“지금 병원에서 가족을 찾는 모양인데, 난 잘 모르잖아. 박제천 씨 동생인 은영이 아빠라면 잘 알 것 같으니까, 네가 좀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알려주라고 전화했어.”



“흠, 알았습니다.”



병옥은 김 형사에게 부탁하고 나서 소파 아래에 내팽겨 쳐 있던 얇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갑자기 그녀에게 그런 큰 사고가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병옥은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우선 박제천의 부인이 어떤 지경에 처해 있는지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급박한 사태를 대변하듯 병옥은 쏜살같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병옥이 나가고 난 사무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오늘 새벽에 응급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여자분 때문에 왔는데......”



대전종합병원에 들어선 병옥이 안내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한 아가씨에게 용건을 말했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그러고 보니 병옥은 박제천의 부인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



병옥은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글쎄요. 저도 잘 아는 분은 아니라, 조사할 게 있어서 온 겁니다.”



“경찰이신가요?”



천천히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찰이냐고 묻는 아가씨에게 병옥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실제 공권력을 가진 경찰 같은 존재는 아니었지만, 엄연히 국가에서 유일하게 인정한 명예 수사관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었다.



“오늘 새벽에 응급수술을 받은 여자분은 딱 한 분입니다. 현재 5층 중환자실 5호실에 입원해 있어요. 유리창을 통해 환자분을 보실 수는 있지만 현재 면회는 하실 수 없어요.”



병옥이 내민 신분증을 살핀, 약간 콧대가 높아 보이는 아가씨는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더니, 무감정한 목소리로 병옥에게 설명했다.



“허휴-”



안내 데스크에서 발길을 돌린 병옥의 눈에 1층을 가득 메우고 있는 환자들과 방문객들이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1층 로비를 보자, 병옥은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접수 대기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 뒤로 링거를 꽂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환자들, 징징거리는 아이를 챙기느라 짜증이 얼굴에 잔뜩 배어있는 아줌마들,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젊은 아가씨들, 그리고 그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간호사들...... 1층 로비의 규모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크기인데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사람들이 꽉 들어차 붐비고 있었다.



병옥은 번잡한 1층 로비를 가로질러 겨우 엘리베이터를 붙잡아 탔다. 병옥은 사람이 많은 장소를 아주 싫어했다. 그저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안은 여러 사람과 살을 맞대야 할 정도로 꽉 들어찼다.



숨이 턱 막혔고, 내뿜는 숨 때문이지 체열 때문인지 짧은 시간인데도 이마에 한 방울 두 방울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서로 다 모르는 사이인지라 안은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 차 있었고, 모두들 엘리베이터 층수를 나타내는 빨간 숫자가 변하는 것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에요.”



중환자실 층을 맡고 있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병옥은 다친 부인이 누워있는 병실 창문 앞에 섰다. 안에는 그녀 말고도 서 너 명의 환자가 산소마스크를 쓴 채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병옥은 부인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옆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어요. 하지만 언제 깨어날지는 담당의사 선생님한테 직접 물어봐야 합니다.”



병옥은 간호사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도 아닌 그가 딱히 이곳에서 할 일은 없었지만, 그녀의 사고가 단순한 사고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이곳까지 직접 찾아왔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각종 의료기기에 의지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아내의 얼굴이 겹쳐졌다.



병옥의 아내는 딸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고 난 뒤 정신적 충격 때문에 그만 정신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7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그녀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 한 채 정신병원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 생각이 나자, 병옥의 눈가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혹시 가족이십니까?”



중환자실에서 회진을 끝내고 나오던 담당의사가 간호사에게 귀띔을 받고 병옥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닙니다.”



병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담당의사는 흘러내린 안경을 살짝 손가락으로 들어올리며,



“운이 좋았습니다.”



병옥과 나란히 서서 다친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부상이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금방 깨어날 수 있는 겁니까?”



“떨어지다가 나뭇가지에 부딪치면서 충격이 많이 감소했어요. 갈비뼈 세 대가 부러져 내장을 찌르는 바람에 수술이 좀 힘들었지요.”



담당의사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 새벽에 깨어날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상처가 있더군요.”



“이상한 상처요?”



병옥은 의사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후두부에 맞은 상처가 있더군요.”



“후두부라면 뒤통수를 말하는 겁니까?”



담당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락할 때 난 상처는 아닙니다. 아마 뭐로 맞았나 보던데. 출혈은 있었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습니다. 아마 그 정도 상처라면 맞은 뒤 잠깐 기절했을 수도 있습니다.”



병옥은 담당의사의 말을 듣고 어젯밤 그녀의 집을 찾았던 한 방문자에게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그녀는 그 방문자에게 봉변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마지막 통화를 할 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이 병원으로 후송되어 온 시각은 새벽 2시 20분이었다고 한다. 병옥의 핸드폰에 그녀의 핸드폰 전화번호가 기록된 시각은 오후 10시 40분이었다. 대화는 길어야 5분도 되지 않았다. 방문자에 의해 범행이 이루어졌다면 그녀가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 오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많이 비었다. 게다가 화재까지 발생했다고 하니, 어쩌면 그녀가 잘 아는 방문자는 대화를 끝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제 3자에 의해 범행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일단 병옥은 그녀가 사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 병옥은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봤었다. 그 감시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을 통해 그 시간에 그녀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또 그 방문자가 떠난 뒤에 다시 출입한 사람이 있는지도 살펴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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