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스치듯 인연 <3>

2011.01.03 20:4701.03


2010.08.16

진형은 매일 전화를 걸어온다.

난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는 스릴을 즐기지 않는다.  

친구와 술을 마셨다고 했다.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취한 친구를 챙겨서 자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취해서는 안기더라. 그래서 이상하게도 그 친구를 안고 자게 되었다. 싫은 느낌이었다고 진형이 내게 상황 설명을 해 온다. 진형의 친구 같은 사람들이 간혹 있기 때문에 상황을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어떻게 반응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도통 모르겠기에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진지하게 들리진 않고 진형도 해프닝을 들려주는 거라서 나도 그에 맞게 웃어 준다.

진형이 ‘나는 그냥 물 흘러가듯이’라고 하고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버무린 적이 있다. 우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말뜻을 알 것 같아서 우리 사이를 굳이 설명해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를 설명해보자고 나서지 않는다. 진형이 내는 속도를 넘어서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도 전화를 세 번째 걸어오고 있다. 낮. 날이 흐리고 연습도 하지 못해서 우울하다고 그래서 투정부리고만 싶다고 한다. 투정부리고 싶은 마음이 어떤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상대에게 괜히 툴툴거리고 싶다는 그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낮에 한 통화에서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진형이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말하는 것들을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해보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진형은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했고 내가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뭐지? 왜 그러는 거지? 왜? 나한테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한 두 시간이 지나서 또 전화가 왔다.  

“왜 답장 안 해 줘?”

“문자 보냈어? 몰랐어.”

“으응.”

“왜? 뭐라고 보냈는데?”

“아까 너한테 괜히 화낸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근데 답장이 없어서 혼자 되게 소심해 져 있었어.”

“하하하. 그래? 문자 못 봤던 거야.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 이런 게 투정이구나. 투정부리는 거 꽤 귀엽다. 놀랍다. 내가 이런 걸 귀여워하다니.

밤 열한시가 돼서 또 전화를 걸어온다.

“심심해. 놀아줘.”

심심하다며 자기 기분을 좋게 해달라는 주문을 해온다. 머리를 심하게 굴려 봐도 어떻게 해야 놀아 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진형에게는 아직 유머를 구사할 정도로 편하질 않다.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다가 최근에 본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의 이 장면을 보면서 잘 기억해뒀다가 누군가에게 말해줘야지 했었다. 펄프픽션의 우마서먼과 존 트라볼타 에피소드다. 조직원인 존 트라볼타는 보스의 애인인 우마서먼과 시간을 보내는 임무를 맡게 된다. 첫 만남. 우마서먼이 시트콤에서 연기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극 중 역할이 유머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여자였다고 한다. 그러자 존 트라볼타가 그 유머를 들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우마서먼이 출연한 그 시트콤은 일 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우마서먼은 아직 침묵이 어색한 사이에서 그런 유머를 구사하지 않겠다며 존 트라볼타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다.  

하루 새 둘은 많이 친해져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유명한 그 장면이다. 무대 위에서 그 격렬한 춤을 춰댄다. 그렇게 한껏 상기된 둘은 집에 돌아와 또 놀 궁리를 하는데 갑자기 우마서먼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마약과다복용이다. 존 트라볼타는 마약과다복용과 보스의 역정을 걱정하여 여자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이리저리 헤매며 갖은 고생을 하던 존 트라볼타는 응급처치 책 속에 적혀 있는 대로 직접 여자의 심장에 주사바늘을 꽂는다. 우마 서먼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다. 이제 이 둘에겐 공동의 비밀이 생겼다. 마약과다복용 사실을 애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우마서먼, 보스의 애인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 사실을 보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존 트라볼타. 침묵이 어색했던 사이를 넘어선다. 우마서먼은 자신을 데려다주고 떠나려는 존 트라볼타를 불러 세운다. 아까 하지 않았던 그 유머를 들려주겠다고 자청한다.

토마토 가족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 토마토가 뒤쳐지고 있었다. 그러자 아빠 토마토가 아기 토마토를 쥐고 이렇게 말했다. “Catch up!"

우마서먼이 했던 대사를 머릿속에서 재점검 하고 있다. 아, 그런데 진형에게 말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그 사이, 진형이 다른 말을 시작했다. 아쉽지만 진형이 하는 말을 듣는다. 진형이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대담하게 밝히고 있다. 요구사항은 이렇다.

“여기로 와주라.”

귀엽다. 약 삼 년 전의 나라면 이 늦은 시간에 대책도 없이 달려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귀여운 이 말을 듣고 그냥 웃어넘긴다.

“너가 와주면 기분이 좋아 질 것 같애.”

아, 귀엽다. 뭐라고 반응한담.

귀엽긴 하지만 현재 내가 추구하고 있는 태도로 반응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아무 대책도 없이? 아니야.”

“원래 대책 없이 그러는 거지.”

그때 마침 진형을 부르는 손님이 있었는지 진형이 “네-”하고 전화기 밖으로 사무적인 말투를 내서 말한다.

“일 해야겠다. 일 해.”

“싫어.”

이런 게 투정이구나. 귀엽다. 이따가 또 전화가 오면 달려가고 싶겠지만 짧은 시간의 기쁨을 위해서 많은 걸 감수하다간 결국 지치게 되더라. 상황이 맞아 떨어지고 조건이 될 때 달려가도 그 마음은 여전하더라. 택시비도 그렇고, 새벽에는 어디로 갈 것이며, 이렇게 졸립기 시작하는 상태로는 별로 좋지 않을 게 분명하다.
문자 연락을 계속 해온다. 재밌게 해달라는 말에 결국 우마서먼의 유머를 써먹기로 결심한다. 결심을 필요로 하는 유머다. 마치 우마서먼이 존 트라볼타와의 관계에서 진전이 생겼을 때야 비로소 그 썰렁한 유머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진형과의 관계의 진전을 느끼며 유머를 구사할 용기를 갖는다. 나도 해 볼 셈이다.

‘펄프픽션 혹시 봤어? 거기에 나오는 썰렁한 유머 하나를 할까해.’

진형은 펄프픽션을 보지 않았다. 영화를 봤지만 그 유머는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왜냐면 영화를 봤어야 우마서먼이 그런 유머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썰렁하지만 해버릴 이 유머가 어떤 의미인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화를 보고 이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 유머를 써먹을 기회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다행인 줄 알자. 나의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분명 이 유먼 재미가 없는 것임을 확실히 해둔다.


‘......Catch up.'

다 써내려간 유머를 전송한다.

‘아 케첩.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어.’

‘이 썰렁한 유머를 너에게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그래도 친해졌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나와.’

이렇게만 말하고 나니 굳이 우마서먼의 유머를 선택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왜 펄프픽션의 유머를 선택했는지, 우마서먼과 존 트라볼타의 에피소드 안에서 이 유머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고 싶다. 그런데 아직 진형이 편하지 않아서 장황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 있을 땐 긴장하고 당황하고 만다. 아직 여유로운 상태에서 의사를 전달하긴 역부족이다. 위에 쓴 내 글을 나중에 읽어 줄 기회가 있다면 내 의도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아직은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전달하기가 어색하기만 하다. 진형이 답장을 해 온다. 자기도 나에게 투정부리기 시작한 건 친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진형의 귀여운 문자를 확인한다.


2010.08.17

달력을 보니 두 번째로 모텔에 간 건 열흘 전, 8월 7일이었다. 그 날도 그랬고 그 다음 날도 너무 더웠다. 모텔에 나와서 걷는데 어지러울 정도로 햇살이 뜨거웠다. 실내에 들어가서도 햇살을 바라보는데 머리가 지끈거려서 진형한테 빨리 집에 가겠다고 했다. 열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날씨가 많이 바뀌었다. 낮 시간에 바람이 차서 창문을 이만큼이나 닫아 놓게 되다니. 어젯밤엔 귀뚜라미가 울었다. 이제 매미는 낮에만 울더라. 시간이 흐르는 건 신기하다. 얼른 10월이 됐음 좋겠다. 그때가 되면 진형의 집도 비게 된다. 날씨도 적당히 좋을 것 같다.

8월 7일 토요일 전 날, 진형이 카페에서 나에게 했던 말들이 무척 생경하고 싫었다. 진형은 심장이 안 좋다고 했었다. 카페에서 화이트러시안을 마시던 진형의 얼굴이 갑자기 붉으락푸르락되다가 금방 핏기가 사라졌다. 그런 상태가 반복되었다. 괜찮으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랬더니 신경 쓰지 말라고 신경 쓰면 자기가 더 진정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또 갑자기 진형의 얼굴빛이 아까와 같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하얘진다. 신경을 안 쓰기가 힘들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말도 해봤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어쩌라고”

웃어 넘겼지만 이 말은 좀 섬뜩했다. 그래서 8월 7일이 될 때까지 그 말을 되뇌게 됐다. 그리고 진형과 있을 때 그리 편하지 않은 내 모습을 계속 떠올리게 됐다. 진형이 연락을 해왔고 다음 날인, 8월 7일에 우린 또 만났다. 내 이 심정을 얘기해야겠다.

말했다.  

“우린 정말 안 맞는 것 같아. 예전에도 여러 번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거 실패했어. 결국 연락하는 사람이 없어.”

진형은 과정인 것 같다고 얘기한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 말을 하는 거냐고.


8월 7일, 이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하루는 모텔에서 함께 있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여느 날과 달리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진형은 술에 취하고 싶은지 짧은 시간 동안 칵테일을 세 잔씩이나 비워냈다. 그리고 나에게도 빨리 마시라고 독촉했다. 그래봤자 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주 앉는 자리에선 친구처럼 있었고 나란히 앉는 자리에선 연인처럼 있었다. 그렇게 하루 동안에도 어떤 사이인지 모를 경계들을 오갔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진형을 위해 노래방에 갔다. 노래방에 가서도 나란히 앉았고 조명이 밝지 않은 바에서도 나란히 앉았다. 시선에서 자유로운 곳이라고 여길 때면 그렇게 했다. 아마도 그런 장소에서만 우린 조금 편하게 서로의 피부를 만질 수 있었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앉았던 바의 사장님이 다음번에 갔을 때 “연인인 줄 알았어요.” 라고 말했다. 노래방은 우리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바는 그렇지 않다는 걸 쉽게 망각한 건 술에 흥건히 취했기 때문이다.

  새벽 네 시가 넘었다. 술에 취하지 않아서 더 그런 건지 피로가 몰려오고 있다. 진형은 기분 좋게 취해 있는데 이 상태로 병원에 가긴 무리라고 한다. 어떻게 하냐고? 토요일 밤 홍대의 모텔은 꽉 차 있을 것이고 홍대의 어디 외진 곳에 있던 모텔이 생각난다. 가물가물한 모텔의 위치를 되새기려 노력해본다. 습한 여름날의 새벽에 모텔을 찾아 거닌다. 사람들이 없는 틈에 우린 또 나란히 걸으며 연인처럼 서로를 만져본다. 후텁지근하고 끈적인다. 그런데 진형이 이상한 말을 한다.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자기가 누군가들과 모텔에 가긴 갔지만 간 적은 많이 없단 얘기를 계속 하고 있다. 그러고는 혼자 껄껄 웃더니 한 번은 술에 많이 취해서 어떤 사람과 단 둘이 모텔에 간 적이 있는데 미안하게도 바로 자버렸단 얘기를 한다.

빨리 가서 자고 싶다. 피곤하다. 더 피곤해졌다.  

난 취하지 않았다. 진형은 취하고 싶은지 술을 마시자고, 사자고 한다. 결국 진형만 맥주 두 캔을 계산했다. 모텔. 아마 둘 다 술에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시 키스를 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빛을 차단하는 커튼이나 블라인드 따윈 없는 온돌방의 아침은 너무 빨리 왔다. 둘 다 일찍 깼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바깥은 아침부터 30도를 웃도는 날씨인 것 같다. 끄면 덥고 틀면 한 방향으로 찬바람을 내뿜어서 춥게 만드는 에어컨을 켜놓을 수밖에 없었다. 추운 나는 이불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따뜻한 기운을 찾아 몸을 웅크린다. 어느새 우린 모텔의 연인이 되어 다정히 서로를 안았다. 별로 키스하고 싶지 않다. 아침의 입 냄새가 먼저 떠오른다. 게다가 담배피고 술 마시고 이를 닦고 자봤자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닐 게 분명하다.

진형이 방향을 틀어 똑바로 눕더니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뒹굴뒹굴 하더니 내 팔을 당겨 안는다. 내가 진형을 감싸 안게 된다. 진형이 몸을 내 쪽으로 다시 돌린다. 난 진형보다 낮은 위치에 누워 있고 진형은 나보다 높은 위치에 누워 있다. 얼굴이 맞닿아 있지 않아서 좋다. 아직까지 내 얼굴을 바라보는 진형의 눈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없을 것 같다. 왜 이렇게 방이 밝은 건지 빛이 너무 잘 들고 있다. 방 전체가 형광등을 켠 것보다 밝다. 잠에서 깬지는 오래지만 눈을 감고 한참을 누워 있는 중이다. 한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밝은 날, 맨 정신에 아침부터 서로를 붙들고 있는 게 아직 편할 리 없다. 그래서 그 지나는 시간들을 일일이 잴 수 있을 만큼 긴장이 되어 있다.

발끝이 서로 닿는다. 부드럽다. 오늘따라 왜 이런지 모르겠는데 계속 밑이 뜨끈해진다. 속으로 이 말을 열 번 넘게 해본다. 입 밖으로 낼 용기가 없는 건지, 지금은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인 건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속으로만 이 말을 반복한다.

‘너 만져도 돼?’

만지고 싶은데 만지려면 꼭 물어야 할 것 같다.

등의 옷자락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살결을 쓰다듬는다. 허리에서부터 어깨 쪽으로, 다시 어깨에서부터 허리 쪽으로. 내 손바닥과 진형의 등 사이에 작은 개미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만든다. 나와 진형만이 느낄 정도의 공간을 유지한 채 살을 쓰다듬는다. 완만한 등의 굴곡을 지나 갈비뼈를 지난다. 이번엔 손가락으로 뼈들을 스친다. 그리고 내 손이 가 닿길 바라는 곳은 가슴이다. 자기 전에 속옷을 벗어 놓은 진형의 가슴을 만지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진형에게 파고든다. 그리고 내 어깨에 닿은 진형의 가슴을 느낀다. 아주 작은 크기의 말랑한 가슴이 느껴진다. 어깨를 자연스럽게 둥그런 모양으로 움직여 가슴을 만져 본다. 진형은 느끼고 있을까?

우리가 잘 수 있을까? 진형은 여자랑 잔 적이 있을까? 내가 가슴을 만지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 만지고 싶다.


모텔비는 육 만원이었다. 내가 이 만원을 내고 진형이 사 만원을 냈다. 들어올 때 사온 술과 안주는 내가 계산했다. 더치페이가 익숙하다. 그런데 진형과 있을 땐 더치페이가 불가능할 때가 많다. 진형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돈을 쓴다. 진형이 통 크게 사는 술을 받아먹고 그만큼 되돌려 주지 못한다. 진형과 나의 소비행태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한 번은 진형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한 달에 얼마나 써? 집세 빼고.”

내 예상과 맞아 떨어진다.

“그럴 줄 알았어. 난 한 달 평균 삼십 만원 써.”

진형은 수입에 따라 소비가 달라진다고 한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진형은 번 돈을 모두 소비하기 때문에 마찬가지인 것만은 아니다. 이백 만원을 벌면 이백 만원을 다 쓴다고 했다.

“난 술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해. 그래서 돈이 많이 들지. 그런데 돈 때문에 신경 쓰는 건 정말 싫어.”

뭐랄까. 진형의 이 말은 정말 진형다운 느낌이다. 진형에게서는 별로 거를 거 없이 지내고 싶어 하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최근엔 일주일 동안 진형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 푼도 쓰지 않고 있다. 지난주에는 매일같이 만나면서 내 한 달 수입을 훨씬 뛰어 넘는 돈을 썼다. 좀 더 친해지면 진형에게 말 해야지. 그렇게 쓰면서 난 살 수 없다고. 적은 수입으로 적은 소비를 하는 게 익숙하다. 적은 일하면서 내 시간을 얻을 수 있어 좋다. 진형은 나와 다르다. 몇 개월을 힘들게 일을 해서 돈을 번다. 많이 일 할수록 놀 시간이 단축되면 더 좋다. 그럴수록 돈을 많이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몇 개월간의 여행을 떠난다. 진형은 십대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돈을 벌고 그렇게 돈을 써왔다. 나와 다르다.

과거엔 지금보다 돈을 많이 번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진형은 돈을 많이 벌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술을 사는 걸 즐기고 택시비 내주는 것에 멈칫하지 않는다. 하루에 술  값으로 십 만원을 모조리 써버린다니. 나에게 전화해서 전 날 밤에 쓴 돈이 얼마인지 얘기하는데 후회가 조금 엿보인다. 그렇지만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기도 한다. 앞으로 우린 더치페이를 하자고 했다. 그냥 농담처럼 들은 모양이다. 일주일 동안 만나지 않고 있으니 지난주의 지출을 만회하고 있기도 한데 아마 이번 일요일에 만나게 되면 또 얼마만큼의 지출이 발생할지 모르겠다. 진형이 돈을 내겠다고 하는 것도 싫다. 적당히 적은 돈을 쓰면서 즐겁게 놀 수 있을 텐데, 아직 진형에게 이런 말들을 할 수 없다. 조만간 시월이 되면 진형의 집이 빈다. 모텔에 두 번 간 비용만 해도 진형의 월 세 삼분의 일 가격이다. 어서 시월이 오면 좋겠다.

진형이 이 말을 세 번 정도 한 것 같다. 언니가 가고 나면 룸메이트를 구할까 한다고. 그렇게만 말했을 땐 내가 아무 반응하지 않았다. 진형이 다시 그 얘기를 꺼낸다. 룸메이트를 구할까 하는데 같이 살지 않겠냐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걸 늘 원하지만 혼자 월세를 낼 만큼 돈이 넉넉지 않다. 그런데 진형의 집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혼자 부담할 수 없는 월세를 나눠 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진형의 집은 방이 없다. 과연 살 수 있을까? 내가 얼마정도 월세를 내면 좋을까? 살게 되지 않더라도 자주 그 집에 들러서 이것저것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더운 여름이 가고 얼른 시월이 와주면 좋겠다.



2010.08.18

어제는 전화 한 통화만 하고 문자도 간단하게 두세 번 오고갔다. 문자는 내가 먼저 보냈다. 열한 시 반쯤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까지 한 통의 문자도 없었던 적은 최근 처음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연락할 요량으로 문자를 써내려가려고 하는데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하는 말들, 일상을 주고받는 느낌의 문자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서 어젠 화요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일요일 약속을 잡았다. 할 말이 있어서 연락을 하는 쪽이 그냥 연락을 하는 것보다 편하다. 일요일에 춤 연습 끝나고 시간이 괜찮으면 저녁도 먹고 놀자고 문자를 보냈다. 한 참 후 진형이 오랜만에 만나서 놀자고 답장을 해왔다. 진형이 쉬는 날엔 당연하게 만나는 것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확실하게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나니 안정된 기분이 든다.


5월. 점 집. 두 번째 방문이다. 친구가 점을 보러 들어간 사이 나는 보살님의 애인과 거실에 마주 앉아 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주로 보살님 애인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살님의 애인은 굵은 저음으로 조근조근 말한다. 첫 번째 왔을 땐 보살님에게 점을 봤기 때문에 보살님의 애인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보살님 애인은 처음 만난 거나 다름없는 나에게 아주 편안히 자신의 우여곡절 많은 인생사를 들려준다.

보살이 되기 위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의대를 다니다가 신기를 느끼고 이 일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보살님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난 날, 보살님은 현재의 애인이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보살님은 연애를 시작한 이후에도 애인을 결코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제 가슴이 여자라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자들 중에도 가슴이 조금 나온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정도로 생각하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리고 제가 생리를 하는 것도 피를 흘린다 이 정도로 생각하지 생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정말 이상하기도 한 게 저는 생리를 잘 안하기도 해요. 육 개월에 한 번 정도씩 하니까.”

어떻게 여자인 애인을 부정할 수가 있을까. 부정당하는 애인은 속상하겠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 남자한테 자격지심이 들어요. 내가 남자라면 이렇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저런 것도 해줄 수 있을 텐데 이런 거 있잖아요.”

보살님의 애인을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 보살님뿐만이 아니다. 보살님의 가족들, 동네 사람들도 보살님의 애인을 남자로 알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보살님 애인은 보살님의 언니 남편들과 남자들처럼 어울려 다니며 자주 술을 마시기도 한다. 어느 날, 둘이 연인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동네 미용실에 갔다. 미용실 사장님은 보살님 애인을 남자로 알고 있다. 그런데 미용실 사장님이 보살님 애인에게 점점 왜 이렇게 예뻐지냐는 말을 해서 기분이 묘했다고 한다. 어쩌면 보살님 애인도 주변에서 자신을 당연히 남자로 봐주는 거라 믿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보살님 애인은 보살님으로부터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은 긍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보살님의 애인은 남자에 대한 자격지심을 고백해왔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생각이다. 진형씨를 만나고 달라졌다.

진형씨는 여자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와의 사이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말들을 한다.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말 할 때도 있고 명백한 연인인 것처럼 굴 때도 있다. 처음 진형씨가 혼란에 빠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교육 부족의 문제라고 여겼다. 성숙할 수 있는 환경과 계기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진형씨가 나와의 관계를 부정할 땐, 다른 생각은 들지 않고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아 졌다. 내가 부정당하고 있다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부정에 대해서 아주 다른 생각을 한다.

부정한다고 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정하는 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부정하는 것, 부정당하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 무심해지기로 했다. 그 외의 긴 순간들에서 진형씨와 나는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지는 과정 속에서는 어떤 정의도 필요하지 않다. 의식적이지 않을 그 당시를 즐긴다.

결과를 두고 하는 부정이 아니다.

나 또한 진형씨를 만나는 중에 부정하는 찰나가 있었다. 그럴 줄 몰랐다. 초연할 줄 알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 성정체성을 물어올 땐 당황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은 충분히 무시당할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멸시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진형씨와 내가 함께 있을 때 누군가 우리 관계를 의심할까 불안해 할 때가 있다. 남 일에 관심 많은 사람을 멸시해버리고 말 수가 없는 불안감이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 진형씨가 놀러 오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 이게 부정하는 거라면 구태여 긍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불안요소와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다.

굳이 우리 사이를 밝히지도 않을 것이고 굳이 내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너무 설명할 것이 많다.  

그런데 진형은 처음 만나 술을 마실 때 이런 말을 했다. 연애를 한다면, 좋아하는 여자와 연애를 한다면 이곳저곳 자랑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많은 위험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454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7] 최현진 2011.05.29 0
453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6] 최현진 2011.02.13 0
452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5] 최현진 2011.02.13 0
451 장편 With 7 -01- 湛燐 2011.02.05 0
450 중편 스치듯 인연 <6> 김유리 2011.01.03 0
449 중편 스치듯 인연 <5> 김유리 2011.01.03 0
448 중편 스치듯 인연 <4> 김유리 2011.01.03 0
중편 스치듯 인연 <3> 김유리 2011.01.03 0
446 중편 스치듯 인연 <2> 김유리 2011.01.03 0
445 중편 스치듯 인연 <1> 김유리 2011.01.03 0
444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4] 최현진 2010.12.25 0
443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3] 최현진 2010.12.25 0
442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2] 최현진 2010.12.19 0
441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1] 최현진 2010.12.19 0
440 장편 1987 - 5 최창열 2010.11.22 0
439 장편 1987 - 4 최창열 2010.11.22 0
438 장편 1987 - 3 최창열 2010.11.22 0
437 장편 1987 - 2 최창열 2010.11.22 0
436 장편 1987 - 1 최창열 2010.11.21 0
435 중편 괴물 이야기 - 도플겡어 (10)1 Cosmiclatte 2010.09.1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