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File 8.

  
“술 그만 드시고, 냉장고에 김밥하고 생수 사다가 넣어 놨으니까, 그거 꼭 챙겨 드세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처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병옥에게 신신당부했다. 땅거미가 짙게 깔린 저녁 즈음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병옥의 안부를 챙기는 것이 처제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빈속에 그저 술만 들이키다가 처제의 전화를 받고, 조촐한 저녁 식사를 끝낸 병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무념의 상태로, 실로 오랜만에 꿀맛 같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며 요란스럽게 떨어대기 시작했다.



- 타다닥 타다닥 -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둘째 치더라도, 테이블 위에 깔린 유리판을 방정맞게 두들겨 대는 요란한 소리에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병옥이라 해도 억지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 여보세요?”



잠에 취한 채 비몽사몽인 병옥은 테이블 위에서 난리를 치는 핸드폰을 찾으려 한참 더듬거리다가 겨우 자신의 귀에 핸드폰을 갖다 대었다.



“저-”



짧지만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저-”



상대방은 선뜻 용건을 말하지 못하고 짤막한 ‘저’만 연발하더니,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전화를 하셨으면 용건을 말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꿀맛 같은 단잠에 빠져 있던 병옥은 예상치 못한 전화에 짜증이 홍수처럼 확 밀려왔다. 그러면서 진즉에 핸드폰을 꺼버리지 않은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저, 박제천 씨 부인되는 사람입니다. 오늘 오전에 저희 집에 잠깐 들르셨잖아요.”



병옥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는지, 상대방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아-”



병옥은 젖은 걸레처럼 축 늘어진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워 소파에 바로 앉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깬 탓인지 잠에 취한 그의 머릿속은 누가 도끼로 난도질한 것 마냥 심한 통증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확 솟구쳤다.



“무, 무슨 일이시죠?”



약을 먹고 겨우 가라앉았던 두통이 굶주린 악귀처럼 다시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하자, 병옥은 왼손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최병옥 씨가 정말 맞나요?”



“맞아요.”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냐는 듯 병옥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늦은 시간인데 정말 죄송해요.”



병옥의 말투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부인이 정중히 사과했다. 병옥은 핸드폰을 잠시 눈앞으로 옮겼다. 가물가물 흐릿하게 보이는, 핸드폰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시계는 이미 오후 10시가 훌쩍 넘어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이런 늦은 시간에 자신에게 전화를 했다는 건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듯 싶었다. 병옥은 자신과 헤어지기 전 ‘최병옥’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순간 당황해하던 부인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그게......”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부인은 또다시 망설였다. 자다 깬 병옥 입장에서는 다시 짜증날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짜증이 밀려오기 보다는 뭔가 중요한 얘기가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망설이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병옥은 망설이는 부인에게 다독이듯 말했다.



“은영이가 실종되고 나서 남편이 많이 불안해했었다고 말했었잖아요.”



“예.”



병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안 하던 술을 갑자기 마시고 동네에 난리를 피운 적도 있다고 하셨죠.”



“맞아요. 그런데 그이가 잠을 자다가 몇 번 헛소리를 한 적이 있었어요.”



“헛소리요?”



병옥은 자세를 바로 잡고, 깨질듯 한 두통과 단잠의 여운을 뒤로 하고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부인에게서 중대한 실마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이가 잠꼬대를 하면서 ‘최병옥에게 부탁해야해.’ 이런 말을 몇 차례 했었어요.”



“저한테 말입니까?”



병옥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박제천과 자신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박제천은 병옥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실종관련 민간 수사관이라는 생소한 직함이 대중에게 잠깐 알려졌던 적은 있었다. 박제천은 잡지나 신문 한 귀퉁이에 소개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명성을 보고 은영이의 실종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던 건가.



“그이가 제정신일 때 최병옥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저보고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묻더군요.”



병옥은 잠자코 부인의 말에 집중했다.



“그래서 당신이 자면서 최병옥이라는 사람을 막 찾아서 물어보는 거라고 했더니, 그냥 피곤해서 헛소리 하는 거야 하더니 당황해 하면서 밖으로 나가 버리더라구요.”



“그 후에도 계속 자면서 제 이름을 부르던가요?”



“서너 번 더 그랬어요. 휴-”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자다가 그런 헛소리를 하질 않나, 천벌을 받을 거라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해대질 않나.”



“그러니까 그런 말들을 은영이가 실종된 이후에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부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최병옥이라는 사람을 언급한 건 은영이가 실종된 이후에 하기 시작한 건 맞지만, 예전에도 그런 이상한 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게 언젠데요?”



병옥의 질문에 부인은 잠시 침묵했다.



“2년 전에 딸아이가 죽고 나서에요. 그이는 딸아이를 끔찍이 아꼈죠. 하지만 딸아이가 그만 병으로......”



부인은 슬픔이 북 받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따님이 죽고 난 후에 천벌을 받을 거라는 그런 소리를 한 거군요.”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둥 한동안 자기를 많이 책망하다가 자살까지 시도했었죠.”



병옥은 기름을 두른 듯 번들번들 거리는 이마를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남편분께서 그런 소리를 할 정도로 평소에 평판이 안 좋았나요?”



민감한 질문인 만큼 병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부인은 천만에 말씀이라는 듯 단호히 대답했다.



“옆에서 지켜봐온 저는 알아요. 그이는 절대로 남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부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전부터 앓아왔던 우울증 때문에 그런 것뿐이에요.”



“굉장히 잘 사시는 것 같고, 남편분도 상당히 능력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까지 우울증을 앓아야 했을 정도로 남편분이 힘들어 했나요?”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유지해 온 박제천이 천벌 운운할 정도로 자신을 비관하게 만든 우울증을 앓은 이유가 무엇인지 병옥은 궁금했다.



“한 번 망했던 적이 있었어요.”



가라앉은 부인의 목소리에 진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잠깐만요. 누구지 이런 시간에......”



누군가 찾아온 듯 부인은 잠시 대화를 중단했다.



“제가 있다가 다시 걸게요.”



1분 정도 흐른 뒤, 다시 입을 연 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뭔가 건질만한 게 나오는가 싶던 찰나에 대화가 중단되자, 병옥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박제천은 자신의 딸을 잃고 난 뒤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했다. 이는 김 형사가 건네준 서류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박제천은 친딸의 죽음을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탓했던 것일까?



부인은 박제천이 한 번 망했다고 했다. 아마도 잘 나갔던 그에게도 모진 시련의 시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중간에 대화가 끊기고 말았지만, 아마도 그의 우울증은 그 망했던 시기에 생겨난 모양이다.



박제천의 우울증은 오랜 기간 지속된 상태였고, 은영이가 실종된 이후 심한 괴로움에 시달렸다. 여기에는 약간 지나친 감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은영이가 비록 동생의 딸이고 자신이 무척 아끼던 아이라고는 하지만, 은영이의 실종을 자기 탓으로 자책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박제천은 2년 전 자신의 친딸이 죽은 이후 천벌 운운하며 자살을 시도했었다. 이번에 은영이가 실종되고 난 후에도 그는 자신이 천벌을 받아야 한다는 둥 이상한 잠꼬대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아무리 박제천이 잘못된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자책을 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것은 사업을 번창시키는 과정에 뭔가 도덕적으로 크게 엇나간 일을 했었던 탓일 수도 있었고, 그 추잡한 존재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은영이의 실종이 과연 박제천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번 은영이의 실종은 박제천을 향한 누군가의 복수일수도 있었다. 사업을 해오면서 원한을 산 누군가가 저지른 짓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제천에게 직접 복수하려면 박제천의 외아들을 납치하는 게 더 그럴 듯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실타래는 더욱 꼬이기만 했다. 은영이의 실종이 복수 때문이든 단순히 돈 때문이든 어떤 이유에서 발생하였든 간에 적어도 박제천이나 은영이 부모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접근해 왔어야 했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 돼가는 지금까지 그 어떤 이상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 수사팀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한밤중에 걸려운 부인의 전화는 가뜩이나 뒤죽박죽인 병옥의 머릿속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어 버렸다. 병옥은 컴컴한 사무실 소파에 앉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며, 부인이 다시 전화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다시 전화를 하겠다던 부인은 끝내 전화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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