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File 2.

  

사무실을 나선 병옥은 자신의 차를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가양동으로 가고 있었다. 대구에서 발생했던 한 청소년의 실종사건을 해결하기 이틀 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올해 4년 차가 된 김석현 형사로부터였다.



“형님이 좀 도와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김 형사가 너스레를 떨며 전화를 했었다.



그가 신참일 때 병옥에게 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병옥을 형님으로 부르며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원래부터 넉살 좋고 붙임성이 좋아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사람이었고 병옥도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다. 지금은 병옥이 그에게서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데다가 숙취까지 더해지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여전히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속도 쓰렸다.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않은 탓에 영양실조가 걸려 병원까지 실려가 링거를 맞은 적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옥은 쉬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옛날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안타까움, 후회 이런 감정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차라리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그 정신적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



한 달 전 가양동에서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병옥은 신문에서 그 사건을 처음 접했었다. 처음에 그는 성 범죄와 관련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경찰이 주변 인물을 탐문해 나가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병옥은 자신의 딸과 비슷한 연령대인 그 아이가 큰 탈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 해결될 줄 알았던 사건이 여전히 오리무중 이었다. 여자 아이의 흔적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고 처음엔 대대적으로 진행하던 경찰 수사도 진척이 없자 규모가 슬금슬금 축소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김 형사가 병옥에게 몰래 도움을 청해 온 것이다. 병옥은 3년 전 한 남자아이의 실종 사건을 극적으로 해결한 일로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정부로부터 민간 수사관 자격을 부여받았다.



이 민간 수사관이라는 생소한 직함 때문에 한동안 말이 많았었다. 경찰만으로 충분한데 뭣하러 그런 쓸데없는 걸 만들어서 경찰들 사기 떨어뜨리냐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들이 포기한 사건을 해결한 병옥에 대한 질투와 반감도 작용했을 터.



그러나 병옥을 두둔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김석현 형사도 그런 무리 중 한 명이었다. 가양동에서 병옥은 김 형사로부터 그동안 경찰이 수사해온 자료들의 복사본을 몰래 건네받기로 되어 있었다.

경찰 내부인이 아닌 제 3자에게 자료를 내어 준다는 것은 김 형사에게도 큰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약속 장소인 사거리에 가까워지자, 길가에 차를 대고 근처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김 형사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 서른 네 살인 그는 병옥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었다. 병옥 역시 차를 잠깐 길가에 대고 차에서 내렸다. 반 년 전 술 한 잔 마시고 헤어진 이 후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었다.



“형님, 오랜 만입니다.”

김 형사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낯으로 병옥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살은 좀 더 찐 거 같은데.”

병옥이 툭 튀어나온 배를 쳐다보면서 농담조로 말하며 벤치에 앉았다. 김 형사도 피식 웃으며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대구 사건 얘기는 어제 저녁에 뉴스로 봤습니다. 여전히 대단하시네요.”

김 형사의 칭찬에 병옥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범인은 간신히 잡았지만 실종 청소년은 죽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비관적입니다.”

김 형사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며 옆에 놓여있던 하얀 서류봉투를 병옥에게 불쑥 내밀었다.



“모두 쉬쉬하고는 있지만 여자 아이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김 형사는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내 병옥에게 내밀었다. 병옥은 한 개비 뽑아 입에 물었다. 김 형사도 착잡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자 한 쌍의 연기가 사이좋게 허공 속으로 피어올라 갔다.



“아마 뉴스나 신문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봅니다. 저는 이번에 다른 곳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때문에 빠지게 되는 바람에 더 이상 알 도리는 없지만.”

김 형사가 말을 끊고 담배 연기를 코와 입으로 길게 내뿜었다.



“솔직히 개판입니다. 처음에는 언론에다 밑밥 뿌리며 떠들어대더니 이제는 그냥 저냥 시간이나 때우고 있는 형편입니다.”

병옥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봉투 속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을 겁니다.”

김 형사가 손으로 서류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병옥은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병옥은 사진 속의 주인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40대에서 50대 정도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이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고 그의 머리위에는 한 여자 아이가 올라타 있었다.



“누구지?”



“실종된 여자아이의 큰아버지랍니다.”

병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 자가 무슨 상관인데?”



“죽었습니다.”

김 형사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옥을 바라보았다.



“같이 술 마실 때 저에게 보여 주었던 그 명함 혹시 아직도 갖고 있습니까?”

그 명함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병옥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인신......매매 쪽이라는 건가?”

병옥의 질문에 김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저에게만 보여주신 게 맞다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병옥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재가 스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병옥의 지갑 속에는 신분증과 만원 한 장, 신용 카드 한 장, 그리고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명함 한 장이 들어 있다. 병옥은 하얀 색 종이 위에 음산하게 새겨진 검은색 문양을 볼 때마다 항상 소름이 돋았다. 기분이 좋지 않은 물건임에도 항상 갖고 다니는 이유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3년 전 가까스로 꼬리를 잡은 한 집단이 있었다. 병옥은 그들을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불어오면 바람이란 걸 알 수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런 존재였다. 그들은 존재하고 행동하지만 볼 수는 없는 자들이었다.



병옥이 이 일을 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인간이 가장 무섭고 타락한 존재라는 거였다. 흔히 범죄자를 짐승에 비유하지만 사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 수단은 때에 따라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고 더럽고 추악하다.



이 명함은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물질만능주의와 더러운 쾌락주의가 만들어낸 검은 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열쇠였다. 병옥은 그 더러운 곳에 3년 전 딱 한 번 가 본 일이 있었다.



바람과도 같은 그 무서운 존재의 꼬리를 밟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접하게 된 검은 시장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을 선사한 곳이었다. 아시아 일대에서 실종된 수많은 사람들이 팔려나가는 그 거대한 노예시장은 지금도 성행하고 있다. 단지 일반 사람들은 모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장이 언제, 어디에서 열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처음 그 곳을 찾아낸 이 후, 그 더러운 연놈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몇 차례나 그 장소를 찾아갔지만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고 그 망령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명함과 관련된 일이었다면 나한테 즉시 알렸어야지.”

병옥이 상기된 얼굴로 힐난하듯 말했다.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정신이 없었습니다.”

김 형사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큰아버지가 차 안에서 자살로 죽은 채 발견된 게 나흘 전이었습니다. 혐의도 없는 사람이 생뚱맞게 자살하는 바람에 여자아이의 실종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게 저희 쪽 판단이었습니다.”

김 형사는 담배를 길바닥에 꾹 눌러 껐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주변을 조사하다가 조수석 시트 밑에서 그 명함을 발견한 겁니다. 6개월 전 술김에 잠깐 본 거라 가물가물 해서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검은색 문양이 계속 맘에 걸려 곰곰이 생각하다가 형님이 한 번 보여줬던 명함이라는 걸 알았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명함 얘기는 전화로는 곤란해서 만나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자네들 쪽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나?”

병옥의 질문에 김 형사는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대책이 없습니다. 그 명함도 별 거 아니라고 대충 보관했는지 다시 찾으러 증거품 보관소에 갔을 때에는 이미 없어진 뒤였습니다. 한심한 놈들!”



“없어져?”

병옥이 놀란 듯 물었다.



“아, 그게... 간혹 그런 일이 있기는 한데......”

병옥은 조용히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살한 큰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발견된 명함은 단순한 명함이 아니었다. 3년 전 병옥이 쫓다가 놓쳐버린 추악하고 무서운 존재들과 관련이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시신에서 그 명함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가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그 추악한 곳을 이용하는 구매자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밀접한 협력 관계에 있는 짝패일 수도 있었다.



여자아이가 실종된 지 이미 한 달 가까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지금 병옥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경찰이 초기에 발빠르게 대응해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병옥이 이번 일을 맡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병옥은 김 형사에게서 이번 사건을 부탁 받았을 때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과 관련이 있다면 얘기가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그들과 관련된 피해자가 자살로 발견되었다. 이미 예전에 그들의 능수능란한 수법을 본 적이 있었다. 교묘하게 남을 조종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들의 적을 제거하면서도 자살로 감쪽같이 위장시키는 놈들의 무서운 능력은 간담이 절로 서늘해질 정도였다.



병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답답한 느낌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전에도 한 번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뒤를 끝내 잡지 못하고 꼬리를 겨우 밟았다가 보기 좋게 놓친 지 3년. 가슴속에 기분 나쁜 응어리를 남긴 채 연기처럼 사라졌던 그들과 다시 조우하게 될 지도 몰랐다. 병옥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불끈 용솟음 치는 걸 느꼈다. 그것은 병옥이 사는 이유이기도 했으며 삶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일단 큰아버지이라는 사람의 유가족부터 만나봐야겠어.”

김 형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아이 가족은요?”

김 형사의 물음에 병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사건의 열쇠는 큰아버지가 쥐고 있어.”

병옥은 서류봉투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이 서류 안에 큰아버지 사건도 들어 있나?”



“일단 관련 사건이라서 뒤쪽에 따로 기록해 둔 서류가 있습니다.”

김 형사의 대답에 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자네는 정말 큰아버지가 자살했다고 생각하나?”

병옥은 김 형사를 뒤에 두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글쎄요”

김 형사는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도 그 명함은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조사한 바로는 별 다른 혐의도 없는데다가 평소에 우울증을 앓아서 전에도 자살기도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아마도 가장 아끼던 조카가 잘 못 된 걸 보고 충동적으로 자살한 게 아니냐는 게 저희 쪽 결론입니다만......”

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차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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