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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1987 - 5

2010.11.22 00:0411.22

5

인간의 눈은 밝은 빛에 익숙치 않은 것처럼 완벽한 암흑에도 익숙치 않다. 모체의 자궁에서 생성된 이래, 그리고 세상에 나오게 된 이래로 언제나 인간의 눈에는 빛이 있어왔다. 눈꺼풀 같은 얇은 고기 막으로 모든 빛을 차단한다는 건 불가능이니까.
처음에는 가벼운 멀미 증세가 일어난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코가 막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심장 박동이 이유 없이 빨라지고 느려지기를 반복한다. 한동안 그런 상태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적응단계가 시작된다. 몸의 감각이 무뎌지고 몽롱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가벼운 무기력 증세가 시작된다. 더불어 탈수 증상이 동반된다. 피부 표면에서 땀이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서서히 체온이 내려간다.
시간은 흐르고 있다. 내 눈 앞에 빨간 숫자로 표시되는 타이머가 붙어있다. 분명, 그 타이머의 숫자는 조금씩 줄고 있다.
대략 6시간에 한 번씩 희미한 빛이 켜진다. 쓰라린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면 밥이 놓여져 있고 변기가 보인다. 난 밥을 먹고 용변을 본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알아서 빛이 꺼진다. 분명, 날 보고 있다. 내가 똥을 싸고 휴지를 버리는 순간, 변기의 뚜껑을 덮는 순간 어김없이 빛이 꺼지니까.
3일째쯤 되는 날, 난 자위행위를 한다. 어둠 속에서의 자위행위는 무언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다. 내 위에 거대한 암흑 덩어리와 섹스를 하는 느낌. 섹스라기보다 몸이 빨려나가는 느낌에 가깝다.  

난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한다. 중간 중간 빛이 들어왔던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난 계속 희미한 상태를 떠다닌다.

난 꿈을 꾼다. 반쯤 귀가 잘려 덜렁거리는 병사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아파요, 귀가 아파요, 얼굴이 아파요.’ 병사는 나에게 속삭이며 다가온다. 병사는 갑자기 나에게 뛰어들어 내 귀를 물어뜯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얼굴을 씹어 먹어줄게, 우적우적 씹어 줄게.’ 병사는 계속해서 내 얼굴을 물어뜯는다.

잠시 후 병사는 사라진다. 대신 머리에 구멍이 뚫린 저격수가 나타난다. 바지를 벗고 피가 흐르는 음부를 내보이며 다가온다. ‘왜? 나하고 하고 싶니? 이리 와, 네 자지를 빨아줄게. 쭉 빨아먹어버려야지. 이리 와, 어서 바지 벗어.’ 저격수의 입 안에 톱니 같은 이들이 보인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그 이로 내 자지를 자르기 시작한다. 서서히, 내 자지를 자른다.

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난 잠들지 않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한다.

빛. 어둠. 빛. 어둠. 생성. 소멸. 자위. 암살. 죽인다. 마신다. 자른다. 강간한다. 쏜다. 터진다. 죽는다. 전쟁. 휴전. 씹는다. 평화. 협상. 수용소. 혁명. 씹한다. 쏜다. 뛴다. 걷는다. 쑤신다. 제주도. 바다. 먹는다. 굶는다. 폭탄. 기뢰. 달린다. 눕는다. 자른다. 자지. 보지. 개새끼.    

모든 단어를 곱씹는다. 그 의미와 느낌을 되새긴다. 되새기고 음미하고 빨아먹는다. 단어는 나에게 모두 빨리고 앙상한 뼈대만이 남는다.

7일째 되는 날, 문이 열리고 강한 빛이 들어온다. 난 눈을 가린다. 눈이 송곳에 찔리는 것처럼 아프다. 물을 끼얹는다. 나에게 묻은 정액과 오줌, 똥과 구토를 씻어 내린다. 난 비명을 지른다. 그들은 내 눈에 안대를 채운다. 그리고 날 어딘가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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