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녘으로 향하는 빛의 왕은 어두운 숲 속에도 깊게 햇살을 드리웠다. 나무에
매달려 낮잠을 청하던 박쥐는 빛을 피해 수풀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 우거진
수풀 사이로 한참 깊이 들어가면 언덕이 하나 나온다. 그 언덕에 지어진,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오두막에도 빛은 친절하게 스며들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 한 줄기는 소녀의 눈가를 스쳤다.
소녀는 눈을 떴다.
눈동자는 빠르게 위아래왼쪽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1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아, 정신이 들었나요?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0대 중후반 정도의 나긋한 미성의 남성 목소리
였다.
-여기는..어디죠?
소녀는 말했다. 그와 동시에 몸을 일으켜 목소리의 주인을 보려 했다.
하지만 몸은 일어나지지 않았다. 목과 턱을 무엇인가 짓누르고 있는 듯이
고개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요.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예요.
-어떻게 된 거죠?
하마터면 짐승 먹이가 될 뻔 했죠.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옮겨왔어요.
나긋한 미성은 기분을 편안하게 하고 있었지만 짐승 먹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묘한 웃음소리가 섞여 순간 소녀에게 약간의 불쾌감을
주었다. 하지만 소녀는 궁금한 것부터 일단 풀기로 했다.
-우리요?
-네, 우리요. 내가 주도했지만..
조금 있으면 다들 돌아올 거예요.
왜 거기에 있었죠?
-..기억이 나지 않아요.
소녀는 말했다.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긋한 미성은 다시 질문했다.
-이름은 기억 나요?
-..이름이..
내 이름..
..백설.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더듬거리며 말하는 순간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두 명의 것이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 하나가 가까워지더니 곧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나?
-네..정신은 돌아온 듯 하군요.
미성의 목소리가 답하고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모였군요.
일단 인사부터 나눌까요?
당신을 숲에서 여기로 옮겨오고 나서
지금까지 다들 당신이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소녀는 가만히 침만 삼켰다. 굵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리가 한 명씩 인사하도록 할까?
-그러시죠
어차피 아가씨는 몸을 못 움직이니
눈 앞으로 다가가서 숙이고 인사
하세요. 얼굴도 기억할 수 있게.
-그러면 나부터 하지.
나긋한 미성이 소녀를 대신해서 답했다. 호기롭게 그 말을 받은 굵은 목소리
가 들렸다. 소녀는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다음 순간 소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람이 아니다.
눈 위로 보이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림책에서 본 적이 있다.
갈기로 뒤덮인 얼굴에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 책의 표기대로라면 사자라고
불러야 할 생물의 얼굴이다. 사자는 소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두 엄니가 튀어나온 입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서 아까 들은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군.
내 이름은 '레오니다스'다.
팔라티뉴스 지방 출신이다.
짧게 자기 소개의 말을 마친 사자의 얼굴이 곧 치워졌다. 소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어떤 말도 못 한 채 가만히 있었다.
다음으로 다가온 얼굴은 또 달랐다. 이번에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피부는 약간 누렇고 눈동자도 짙은 흑갈색이었다.
검은 머리를 이상하게 매듭지어 뒤로 묶고 있는 이 이방인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삵'이다.
부여 족이다.
다음 사람이 다가왔을 때, 소녀는 이 이상한 인사의 시간에 더 이상 놀라지
않기로 했다. 얼굴부터 몸까지 가죽과 철판으로 된 갑옷으로 덮은 남자의
투구 속은 어두웠다. 눈동자도 코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
에 칠흑 같은 공허만이 채워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나는/'로트웡'/이라고/합니다.
프리츠랑/항성계에서/왔습/니다.
그 자의 목소리는 마치 숲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들렸기에
항성계 같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대한 의문은 금방 차치되었다.
다음으로 인사하러 온 자는 약간 멀쩡해보였다. 길게 기른 은발 덕분에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뮈르미돈 족인 '테리온'이라고 자신
을 밝혔다. 그의 입김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그 다음 인사하는 자는 가장 정상적인 외모였다. 어깨가 지나치게 넓고 긴
흑발을 아무 손질없이 늘어뜨린 것만 빼면 성 안에서 보던 병사들과 큰 차이
가 없었다.
거만하게 다가온 그 남자는 말도 없이 눈만 움직여 소녀를 훑어보더니 웃음
을 터뜨렸다. 감히 처녀의 몸을 살피다니..소녀는 그가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웃음을 일순에 멈추고 "'수르트', 딤무 보르기르 출신."
이라고 뱉듯이 말하더니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물러났다.
그 다음 다가온 자는 왜소한 체격이었다. 머리에 감은 천 장식은 터번이라고
불리는 이국의 것 같았다.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가죽이 붙은 뼈
와 같은 손가락으로 소녀의 얼굴선을 쓰다듬었다.
소녀는 그게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서웠다.
-제 이름을 말해드리죠. 공주님.
'아즈 아젤'입니다.
요단 강 너머에서 왔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가 손가락을 치웠을 때에야 소녀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짧으면서 긴 인사가 마쳤다고 생각할 때, 얼굴 하나가 다가왔다. 외알의
돋보기를 코에 얹은 남자의 피부는 창백한 편이었지만 아즈 아젤에 비하면
훨씬 건강해보였다. 남자가 입을 열 때에, 소녀는 아까 들은 나긋한 음성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제 이름은 '허버트 웨스튼'
입니다.
-허...헤르베르트?
-아니죠. 허버트. 아캄에서는
허버트라고 읽어요.
제가 당신을 치료하고 있죠.
-혼자서 치료하는 건 아니잖아.
퉁명스럽게 들려온 목소리는 테리온의 것이었다. 허버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소녀에게 말했다.
-치료는 오래 걸릴 테니 마음을
편하게 하고 푹 쉬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녀는 갑자기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나..나, 성에서..
-성에 대해 기억나십니까?
아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데일란트의 하나뿐인 공주,
모든 백성의 추앙을 받는 백설님.
-데일란트? 데일란트라고?
-그것을 왜 이제 말하나?
아즈의 말에 삵과 레오니다스가 동요했다. 소녀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의아
했지만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내가..어떻게 된..거죠?
소녀의 말에 허버트는 예의 나긋한 미성으로 답했다.
-죽었었죠.
당신의 몸은 12조각으로
흩어져 있었어요.
-네?..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살려냈죠.
그래서 지금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예요. 다 붙은지 얼마 안 됐거든요.
허버트의 말에 반발하려던 소녀의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쫓아오던 사람들.
그 중에 한 명..검은 망토를 걸친 자가 꺼내어 든..
-편하게 쉬어요.
눈물 한 줄기를 흘리며 다시 잠든 소녀의 얼굴을 보며 허버트는 조용히
말했다.
<To Next Time?>
With 7
남녘으로 향하는 빛의 왕은 어두운 숲 속에도 깊게 햇살을 드리웠다. 나무에
매달려 낮잠을 청하던 박쥐는 빛을 피해 수풀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 우거진
수풀 사이로 한참 깊이 들어가면 언덕이 하나 나온다. 그 언덕에 지어진,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오두막에도 빛은 친절하게 스며들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 한 줄기는 소녀의 눈가를 스쳤다.
소녀는 눈을 떴다.
눈동자는 빠르게 위아래왼쪽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1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아, 정신이 들었나요?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0대 중후반 정도의 나긋한 미성의 남성 목소리
였다.
-여기는..어디죠?
소녀는 말했다. 그와 동시에 몸을 일으켜 목소리의 주인을 보려 했다.
하지만 몸은 일어나지지 않았다. 목과 턱을 무엇인가 짓누르고 있는 듯이
고개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요.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예요.
-어떻게 된 거죠?
하마터면 짐승 먹이가 될 뻔 했죠.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옮겨왔어요.
나긋한 미성은 기분을 편안하게 하고 있었지만 짐승 먹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묘한 웃음소리가 섞여 순간 소녀에게 약간의 불쾌감을
주었다. 하지만 소녀는 궁금한 것부터 일단 풀기로 했다.
-우리요?
-네, 우리요. 내가 주도했지만..
조금 있으면 다들 돌아올 거예요.
왜 거기에 있었죠?
-..기억이 나지 않아요.
소녀는 말했다.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긋한 미성은 다시 질문했다.
-이름은 기억 나요?
-..이름이..
내 이름..
..백설.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더듬거리며 말하는 순간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두 명의 것이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 하나가 가까워지더니 곧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나?
-네..정신은 돌아온 듯 하군요.
미성의 목소리가 답하고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모였군요.
일단 인사부터 나눌까요?
당신을 숲에서 여기로 옮겨오고 나서
지금까지 다들 당신이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소녀는 가만히 침만 삼켰다. 굵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리가 한 명씩 인사하도록 할까?
-그러시죠
어차피 아가씨는 몸을 못 움직이니
눈 앞으로 다가가서 숙이고 인사
하세요. 얼굴도 기억할 수 있게.
-그러면 나부터 하지.
나긋한 미성이 소녀를 대신해서 답했다. 호기롭게 그 말을 받은 굵은 목소리
가 들렸다. 소녀는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다음 순간 소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람이 아니다.
눈 위로 보이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림책에서 본 적이 있다.
갈기로 뒤덮인 얼굴에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 책의 표기대로라면 사자라고
불러야 할 생물의 얼굴이다. 사자는 소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두 엄니가 튀어나온 입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서 아까 들은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군.
내 이름은 '레오니다스'다.
팔라티뉴스 지방 출신이다.
짧게 자기 소개의 말을 마친 사자의 얼굴이 곧 치워졌다. 소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어떤 말도 못 한 채 가만히 있었다.
다음으로 다가온 얼굴은 또 달랐다. 이번에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피부는 약간 누렇고 눈동자도 짙은 흑갈색이었다.
검은 머리를 이상하게 매듭지어 뒤로 묶고 있는 이 이방인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삵'이다.
부여 족이다.
다음 사람이 다가왔을 때, 소녀는 이 이상한 인사의 시간에 더 이상 놀라지
않기로 했다. 얼굴부터 몸까지 가죽과 철판으로 된 갑옷으로 덮은 남자의
투구 속은 어두웠다. 눈동자도 코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
에 칠흑 같은 공허만이 채워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나는/'로트웡'/이라고/합니다.
프리츠랑/항성계에서/왔습/니다.
그 자의 목소리는 마치 숲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들렸기에
항성계 같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대한 의문은 금방 차치되었다.
다음으로 인사하러 온 자는 약간 멀쩡해보였다. 길게 기른 은발 덕분에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뮈르미돈 족인 '테리온'이라고 자신
을 밝혔다. 그의 입김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그 다음 인사하는 자는 가장 정상적인 외모였다. 어깨가 지나치게 넓고 긴
흑발을 아무 손질없이 늘어뜨린 것만 빼면 성 안에서 보던 병사들과 큰 차이
가 없었다.
거만하게 다가온 그 남자는 말도 없이 눈만 움직여 소녀를 훑어보더니 웃음
을 터뜨렸다. 감히 처녀의 몸을 살피다니..소녀는 그가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웃음을 일순에 멈추고 "'수르트', 딤무 보르기르 출신."
이라고 뱉듯이 말하더니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물러났다.
그 다음 다가온 자는 왜소한 체격이었다. 머리에 감은 천 장식은 터번이라고
불리는 이국의 것 같았다.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가죽이 붙은 뼈
와 같은 손가락으로 소녀의 얼굴선을 쓰다듬었다.
소녀는 그게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서웠다.
-제 이름을 말해드리죠. 공주님.
'아즈 아젤'입니다.
요단 강 너머에서 왔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가 손가락을 치웠을 때에야 소녀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짧으면서 긴 인사가 마쳤다고 생각할 때, 얼굴 하나가 다가왔다. 외알의
돋보기를 코에 얹은 남자의 피부는 창백한 편이었지만 아즈 아젤에 비하면
훨씬 건강해보였다. 남자가 입을 열 때에, 소녀는 아까 들은 나긋한 음성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제 이름은 '허버트 웨스튼'
입니다.
-허...헤르베르트?
-아니죠. 허버트. 아캄에서는
허버트라고 읽어요.
제가 당신을 치료하고 있죠.
-혼자서 치료하는 건 아니잖아.
퉁명스럽게 들려온 목소리는 테리온의 것이었다. 허버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소녀에게 말했다.
-치료는 오래 걸릴 테니 마음을
편하게 하고 푹 쉬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녀는 갑자기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나..나, 성에서..
-성에 대해 기억나십니까?
아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데일란트의 하나뿐인 공주,
모든 백성의 추앙을 받는 백설님.
-데일란트? 데일란트라고?
-그것을 왜 이제 말하나?
아즈의 말에 삵과 레오니다스가 동요했다. 소녀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의아
했지만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내가..어떻게 된..거죠?
소녀의 말에 허버트는 예의 나긋한 미성으로 답했다.
-죽었었죠.
당신의 몸은 12조각으로
흩어져 있었어요.
-네?..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살려냈죠.
그래서 지금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예요. 다 붙은지 얼마 안 됐거든요.
허버트의 말에 반발하려던 소녀의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쫓아오던 사람들.
그 중에 한 명..검은 망토를 걸친 자가 꺼내어 든..
-편하게 쉬어요.
눈물 한 줄기를 흘리며 다시 잠든 소녀의 얼굴을 보며 허버트는 조용히
말했다.
<To Next Time?>
With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