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스치듯 인연 <2>

2011.01.03 20:4501.03

2010.08.12

오전 1:10 핸드폰이 진동한다. 내일부터 오전에 무용연습을 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진형이 이 시간에 문자를 해온다. 또 술을 마시고 있다고. 엄청 짜증나는 일 때문에 지금까지 술을 마시고 있다고.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이 느껴지지만 묻지 않는다. 표피적인 위로로 내 진심을 다해본다.

오전 2:51. 진형은 세 시가 다 되 가도록 술을 마시고 있다. 그리고 간간히 내게 연락 해온다. 내가 잠들기 전에 연락을 달란다. 통화하자고. 낮과 같은 통화가 되려나.

오전 5:55에 전화가 오다니. 아 깜짝이야. 진형의 전화다.


만나러 가기 전의 기분은 좋은 쪽이다. 거의 일주일 만에 연락을 준 진형씨를 만나러 가기 전의 기분이 좋은 쪽이다. 네 시 영화 시간에 딱 맞춰 진형씨가 나타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형씨를 보자마자 숨이 약간 막히면서 잠시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진형씨에게 다가간다. 오늘도 진형씨는 약간 땀에 젖어 있다. 무용연습을 마치고 헐레벌떡 달려 온 것 같다. 얼굴이 상기되어 입술이 아주 빨갛게 달아올라있다.

"저 아침에 교통사고 났었어요. 집에서 약 먹고 자다가 늦을까봐 자전거 타고 얼른 오긴 했는데......”

“네?”

영화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진형씨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몸을 비틀고 있다. 많이 아픈데도 나와 약속을 지키려고 온 사람을 집에 들어가라고 하는 게 좋을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결정을 내리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시간을 오래 갖지 않기 위해서 일단 침착하게 영화나 감상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몸을 들썩이는 진형씨를 안 쳐다볼 수가 없다. 진형씨는 그런 나에게 살짝 웃어 보이는데 참 자연스럽지가 않다. 나의 걱정하는 마음을 칭찬해주는 미소 같아 갑자기 부자연스러운 공기로 휩싸이는 느낌이 든다.

결국 진형씬 그 다음 날 입원을 결정했다. 만약 사고도 없었고 입원도 하지 않았다면 진형씨는 매일같이 낮에는 무용연습,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교통사고와 입원을 계기로 진형씨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해졌다. 홍대 카페에서 작업을 마치고 나면 진형의 병원 근처로 걸었다. 그런 일은 이틀에 한 번 꼴로 일어났고 만나지 않는 날엔 빠지지 않고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 거지? 응. 아마도 이런 점이 진형씨의 특징이며 좋은 점이라 생각한다. 먼저 다가서는 것을 어색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다. 쓸데없이 겁먹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진형은 언제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와줬음 좋겠다는 말을 했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가고 싶은 마음보다 이렇게 서슴없이 상대에게 표현할 줄 아는, 할 수 있는 진형씨에 대한 호의가 생겨서 병원 근처로 몇 번이고 걸었다.

진형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 관심을 끌었다. 진형은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중학생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직업군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그 사이 세계여행도 했고 영국에서는 약 6개월 정도 살다 오기도 했다. 진형은 몸을 쓰는 사람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몸으로 체득한 것들에는 과도한 신비감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자체로 역동적이고 생생함이 있다. 진형은 직업군을 세 번이나 바꿀 만큼 가볍게 움직이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원래의 목적을 지나치면서까지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한 자리에만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런 것을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진형의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다.

“두 명의 그림을 봤을 때, 난 이 친구 그림이 더 좋더라. 우울한 느낌을 가지고 있고 시선을 먼저 끄는 게 분명히 있긴 있어. 그런데 내가 생각할 때는 밝다고 표현하는 건 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긍정적으로 보이는 이 친구 그림이, 뭐라고 해야 하지? 더 나아갔다는 느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난 이 친구 그림이 더 좋아.”

난 진형의 이야기에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진형에 대한 호의가 급작스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몸이 느꼈다. 진형은 바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고 무엇인가를 부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너무 많이 들었다.

“자, 이제 내 얘긴 다 들었잖아. 응?”

진형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생기는 정적의 순간에 이렇게 말을 했다.

“네 이야기 좀 해봐.”


아직까지 진형에게 싫은 느낌이 든 건 한 번뿐이다. 입원 후 처음 진형을 만난 날이었다. 다른 친구를 통해 이미 진형과 안면이 있는 친구 한 명과 아직 진형을 보지 못했지만 이야기만 들어서 알고 있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진형을 데리러 병원 앞에 차를 댔다. 다섯 명이 작은 차를 타기엔 꽤 좁았다. 뒷좌석에 나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진형이 앉았다. 진형은  나에게만 말을 했다. 친구들은 불편한 기운을 내뿜었다. 진형은 친구들에게 의례적인 인사만을 했고 나하고만 대화를 하겠다는 식이었다.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한 친구는 어느 순간 이후로는 진형이 같은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말했다. 친구와 진형 어느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진형씨에 대한 싫은 느낌이 일었다.

한강에 도착해서도 진형씨는 겉돌기만 했다. 아직 진형씨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적절히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나의 안절부절 하는 정도가 매우 심했다.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사람,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안 좋은 쪽으로 기울었다.

다음 날, 진형은 나에게 여러 사람,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 전에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맞아. 생각이 난다. 그래. 진형이 그렇게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진형이 그런 자신의 상태를 능수능란하게 감추지 못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진형의 혼란스런 그 상태, 연애도, 여자도 원하지 않는다고 내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는 진형의 그 태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진형씬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한다.

일주일 전, 진형이 나에게 화를 냈다.

“갈게. 가자.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침에 술이 깨서야 진형의 이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진형이 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으로 눈을 여러 번 굴리면서 되묻는다.

“너 지금 하는 말 기억해야 돼. 꼭. 그리고 니가 하고 있는 말은 지금 나를 부정하는 말이야.”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차가운 표정, 단절이라고 공표하는 차가운 표정을 보는 건 정말 무섭다. 진형씨의 표정이 떠오르는데 너무 무섭기만 하다.

내가 했던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진형의 입을 통해 내가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들었지만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말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싶어서 다시 듣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충의 내용은 이렇다. ‘넌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난 정체성이 확립된 사람과 만나고 싶다’. 진형이 이 말을 들려주면서 다른 이야기들도 덧붙이다가 나를 당황하게 하는 말을 한다.

“내가 너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근데 솔직히 말해도 되?”

아마 진형이 할 말은 날 당황하게 만들 것 같다. 난 절대로 당황하고 싶지 않고 숨 좀 돌리고 싶다.

“아니.”

진형이 말하려는 내용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당황하고 있고, 그 얘기를 직접 듣는다면 더 당활 할 것 같다. 그래서 추측하지 않고 진형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진형에게 말했다.

“아까 하려던 얘기, 해도 될 것 같아.”

“지금? 근데, 안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되는 거지?”

“뭐 그렇긴 하지만, 한다고 했으니까 하는 게 좋지. 뭔데?”

“뭐 중요한 건 아니야.”

“그래. 그러니까.”

그냥 할 수 있는 얘긴 아닌 것 같다면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 후 장소를 옮기자고 한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형이 하려던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주제로 다가설 수 있었다.

“근데 그냥, 지금 얘기 안 할래. 왜냐면, 번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다.

“지금 얘기하지 않는 게 더 좋은 건데? 왜냐면 얘기 하려던 건 좀 안 좋은 쪽 얘기였으니까.”

그 번복되는 말에 내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예상을 내가 아니라 왜 진형이 하고 있는지. 난 예상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받을 영향을 주조하고 있는 사람이 타인이라는 사실에 조금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 내 표정이 드러났다.

기분이 좋지 않다. 왜 아직 듣지도 못한 진형의 이야기의 예측된 결과를 통보받아야 하는지. 흥분할 것 같아 심호흡을 한다. 모든 일이란 건 그렇다. 어떤 일을 아주 심각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아주 가벼운 일로 만들 수도 있다.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만드는 건 내가 원치 않는다. 그래. 안 좋은 얘기라면 그래 하지마.

알쏭달쏭한가. 진형과 나의 관계는 어쩌면 알쏭달쏭하지 않다. 선택을 미루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나, 선택을 기다리고 있으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나?


2010.08.13

진형은 퇴원 후 첫 출근 날 설거지를 하다가 손가락이 찢어져 세 바늘을 꿰맸다. 오전 0시가 다 돼서야 병원에서 나온 모양이다. 마음이 쓰이지만 가볍게 넘겨 버리는 쪽이 나을 것 같다. 진형씨에게 연달아 사고가 나니까 마음이 쓰이지만 내가 그걸 가엾게 여기면 정말 가엾은 것이 될 테고 진형씨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될 테다. 그러니까 그냥 가볍게 여기는 편이 훨씬 낫다. 다만 춤 연습을 할 때 손을 쓰는 동작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그것이 걱정된다. 그래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  


진형씨는 기독교신자다. 그런데 술도 마시고 여자와 키스도 한다. 그래서 해당 교회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진형에겐 약간의 말초적인 감이 있는 것 같다. 그 점도 마음에 든다.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볼 때면, 어떤 장소를 볼 때면 대충 어떨 것이라는 게 그려진다고 하는데 그게 참말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자신의 신기 같은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진형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예상하기 힘든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얘기 다 했어. 자, 또 뭘 얘기해줄까? 응?”

웃어버렸지만 조금 당황하고 만다.

“뭐 할 말 없어? 네 얘기 좀 해봐.”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낯가림이 심하다는 게 들통 나버린 지는 오래다. 진형씨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곳,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안에서 일 하며 돈을 벌었다.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이후 성격이 급작스럽게 변해버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진형은 불특정다수의 관심과 시선을 즐기지만 일 하면서 만난 특정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길 수는 없었다. 이상했고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 본 경험으로 누구나에게 서슴없이 다가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 진 것 같다. 그러나 그와는 조금 다르게 누구나에게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누군가에게는 모두 다 털어 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다 얘기 한 거 아니야.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또 아니야. 그 사람한테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얘기의 정도가 있다고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진형씨에게 여자를 좋아하는지 묻는다. 그러면 진형씨는 그렇지는 않은데 그냥 연애를 못하는 성격이라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대답한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너무 얘기하고 싶었던 것 마냥 말한다. 그런데 진형씬 굳이 말 할 필요 없는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기도 한다. 여자를 만났던 것과 지금 만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진형씨는 산만한 사람이다. 난 너무 말이 없는 중이다. 할 얘기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진형씨가 건넨 말에도 대답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그래도 뭔가 얘기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본다. 그리고 막상 말을 하려고 하면 진형씨는 내 말을 끊고 자기 얘길 시작한다. 웃기다. 카페에 앉아서 자기 눈에 띄는 만화책이나 잡지가 있으면 몇 십 분이고 거기에 빠져든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성의 없게 묻고는 고개를 파묻는다. 난 상대가 있으면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다른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상대방이 그렇게 하는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그런 모습을 보면 배려를 잘 모르는 것 같단 생각을 하긴 한다. 그렇지만 그렇단 것뿐이지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물론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내 말을 끊고 진형씨는 또 이것저것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 진형은 얘기하는 걸 무지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나도 적당히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아직도 말문을 여는 게 쉽지 않다.

“생각은 깊은데 시야가 좁은 사람 있잖아. 넌 그냥 그렇지 않아 보였어. 뭔가 다른 사람들이랑은 다른 것처럼 행동하는 니 친구 있잖아.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모든 상황에서 다 중립인 것 같은 니 친구도 있고. 근데 넌 그러지 않은 것 같았어.”

진형은 내가 그래 보였나보다. 우연히, 갑자기 알게 된 이 사람과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를 모르겠다. 같이 작업을 하거나,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된다.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진형은 아직 내 작업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를 잘 알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고 만약 내 작업물을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예측불가능성 때문에 약간 불안하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은 내 작업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부족한 점, 잘한 점을 느낌으로 알아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술이 조금 취해서는 내가 진형씨와 있을 때 말이 없는 이유를 말하고 싶어졌다. 어떤 사람과 있을 때는 아주 말이 많은 편이다. 말이 없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첫마디를 꺼냈다가 다시 삼키고 다시 삼키고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너는 말을 못하는 것 같애. 아니, 그런 말을 못한다는 게 아니라 말을 거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거르지 마. 잘 거르지 못한 말도 내가 잘 받아들이면 되니까. 나 그런 정도는 되는 사람이야. 나를 못 믿어서 그런 거야? 믿어도 돼.”

이런 확신을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게 신기하다. 괜히 웃게 된다. 그래서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도 없고 내 말을 오해하지 않을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말을 시작한다. 그때는 술에 취해 있어서 작가 이름도, 책의 제목도 생각나지 않았다. 독일 작가 있잖아. 여자 주인공 이름이 니나. 진형이 이 책을 읽었을지 안 읽었을지도 모르는데 당연히 알고 있을 것 마냥 아니면 아는 게 당연하다는 것 마냥 말했다.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모를 거라 여기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니나를 사랑하는 남자 교수가 있다. 니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교수는 아직 니나의 글을 읽지 못했다. 니나는 자신의 글을 보여주기 조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니나가 자신의 글을 들고 교수를 찾는다. 자신이 쓴 시를 교수에게 내민다. 교수는 글을 받아들고는 니나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것이 나쁜 시 일까. 교수는 그녀, 니나가 나쁜 취미를 가졌고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도 사랑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있을 것인지를 자신에게 묻고 있다.

진형이 눈이 동그래져서 그 남자 참 바보다 라고 했나? 어리석다 라고 했나? 교수가 니나의 글을 받아들고 두려워했다는 말을 내뱉자마자 진형은 그렇게 말했다. 난 눈이 동그래졌다.

“왜? 난 그 교수한테 매우 동감하는데.”

진형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니나를 사랑한 그 교수는 아주 작은 그릇이라면서 답답해하고 조금은 흥분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모습이 꽤 좋아 보였다. 진형씨는 그렇게 또 내가 하려던 말을 끊어먹고 하고 싶은 말을 시작했다.


“언제한번 춤추는 거 보고 싶어요.”

라고 말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진형이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입원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술에 또 취했다. 진형이 아는 지하의 작은 바에 있다. 진형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춤을 추기 전 몸을 풀고 있다.

“춤 춰줘.”

“아, 그래 알았어. 아, 너 때문에 춘다. 기다려봐. 몸 좀 풀고.”

음악을 듣고 즉흥으로 몸이 반응한다. 비트를 몸이 쪼개고 몸으로 쪼갠 비트에 리듬을 준다. 진형의 춤은 좋은 느낌이다. 분명 좋은 실력일 것이다. 그 점 때문에 진형에 대한 좋은 느낌이 더 커진다.

멋지다. 비좁은 공간에서 슬리퍼를 신고 교통사고 후에 연습도 하지 못하고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춘 춤이다. 그것만이 아쉽다. 진형은 그러다가 담배를 꼬나물고 춤을 춘다. 실실 웃으면서 유머를 보여주길 바랐는데 그건 아니었다. 진지한 담배 춤이라. 담배에 대한 허상 때문에 진형의 춤이 일그러진다. 다음에 좋은 조건에서 진형의 담배 춤을 보면 다른 느낌이 들까?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 진형이 춤을 추는 사람이어서 진형의 춤을 내가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샘가에서 / 이성복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


작년 여름이다.

“와, 정말 비현실적이지 않니?”

교수님과 학교 운동장이 내다보이는 벤치에 앉아있는데 푸른 하늘이 너무나 뜨거운 온도로 우릴 내리쬐고 있다. 회색 시멘트로 된 너무나 큰 계단들 뒤로 초록색 이파리가 달린 나무들이 줄 서 있다. 태양이 바로 비추는 초록색 잎은 강한 빛 때문에 노란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용하고 뜨거웠다.

나란히 앉아 있는데 교수님이 가방을 터프하게 휘젓더니 작은 시집을 하나 꺼낸다. 예전에는 모더니즘 시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드니 이제 이런 시가 읽힌다고 이성복 시인에 대한 소개를 해대며 가방 속에서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내가 마치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듯 시인을 소개한다. 책갈피 하나 꽂혀 있지 않았고 나에게 전해주려던 시가 적혀 있는 페이지가 접혀 있지도 않았는데 바로 시집을 펼쳐내더니 "샘가에서"를 읊조린다.

제목.

그리고 시의 첫 행을 읽더니

"허허. 아이고. 내가 읽으려니까 이상하다. 너가 읽어라. 천천히 음미하면서......"
나는 마치 숫기 없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너그러이 시집을 받아든다.

이 순간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을 좋아했고 교수님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난 이성복 시인을 알지 못했다.

작년. 교수님은 진형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작업과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 남자 교수님은 나를 지지해주었다. 교수님을 처음만나고 첫 대화를 할 때 이상하게도 어색하지 않았고 낯설지도 않았다. 작업을 하면서 만난 교수님에 대해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업을 하는 와중에는 나 스스로 나의 개별성을 지울 수 있어서 인 것 같다. 그래서 교수님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 질 것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다. 작업에 몰입해 있었고 어쨌든 교수님은 교수이기 때문에 내 편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교수님은 나를 기대에 차서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님이 보고 있는 나는 나보다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성복 시인을 소개해주던 날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형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늘 어색하고 낯설다. 가끔 어색하지 않고 낯설지 않은 잠깐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의 개인적 특성들을 노력하여 드러낼 수밖에 없는 관계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형에게 아직까지 내 작업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한 적이 없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연발생적인 사건처럼 진형이 내 작업물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진형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 이상일 것이다. 진형은 내 작업에 대해 쓸데없이 기대감에 찬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은 코멘터로써 주변의 작업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줬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내 작업은 더 나아질 것이고 진형은 기대 이상의 작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10.08.14

오전 3:24 설마 이번에도 잠이 안 올까 싶어 커피를 마신 게 화근이다. 열두시쯤 진형에게 잔다고 해놓고는 지금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일 끝날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어본다.

“전화건거 맞지?”

“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전화 한 거야?”

“어? 응.”

일하고 있을 때 걸면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까.

“오 그래? 기분 괜찮은데?”

쑥스러워져버릴까 얼른 말을 돌리고 싶다.

“어디야?”



2010.08.15

오전 5:38 ‘보고 싶다’

라는 문자를 일곱 시 쯤 확인했다. 아직도 자지 않느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한다.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매일같이 만나다가 오 일 가까이 만나지 않고 있으니까 이상하다. 상황이 그렇게 됐다. 왜냐하면 난 집에서 작업하는 게 편해졌고 진형은 연습과 아르바이트로 시간이 빠듯하다. 보고 싶지 않냐고? 주 중에 한번 만나자고 답했다. 보고 싶은 거냐고 다시 물어온다. 술에 취해서 이러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니?

보고 싶다는 말에 기분이 좋지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형은 나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지금, 우리 관계를 정의해야한다면 진형은 도망치고 싶어 할게 분명하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냥 지금 이런 식으로 일직선을 그리는 관계가 될지도 모르겠다. 진형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망설이게 된다.


일요일. 진형이 유일하게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다. 당연히 우린 만나만 했다. 누구에 의해서 그것이 당연하게 됐는지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진형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그런데 혹시나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일요일에 시골에 갈 일정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전화가 왔다.

“내일 나 쉬는 날이잖아.”

“응. 난 내일 할머니 돌아가신 지 일 년 되는 기일이라 시골에 내려가.”

일요일에 만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일요일 약속을 정하는 건 우리 둘 다 그리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시골 외갓집에 와 있다. 집 앞에 100년 된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 엎드려서 책을 읽다가 진형씨 생각이 났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책 읽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쓰려는 글과 읽고 있는 글을 공존시키는 건 너무 어렵다. 시골에 온 김에 재빨리 읽어나갈 수 있는 읽다만 소설을 들고 갔다. 연애소설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요즘은 시집 하나를 들고 다닌다. 친구가 선물해 준 존 버거의 <아픔의 기록> 시 소묘 사진 1958-1996이다. 매우 사적인 시와 그림과 사진이 들어있다. 얇은 시집이지만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간다. 봤던 페이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같은 시를, 같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진형씨가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며 화를 낸 이튿날이었다. 이틀 전 일에 대한 대화가 대충 마무리됐다. 이제 진형은 아무렇지 않아진 듯 카페에 있는 만화책을 몇 권 골라냈다. 난 만화책은 잘 보지 않는다. 가방 속에서 존 버거 시집을 꺼냈다. 시간이 흘러 진형은 만화책을 다 읽었는지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나도 찬찬히 들여다보던 시집을 덮었다. 진형이 내 앞에 놓인 존 버거 시집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내가 듣기 좋아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기감정에 빠져 하는 이야기다.

죽음은 정말 무섭다며 인상을 찌푸린다. 시 끝자락에 써진 날짜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과거의 날짜, 그리고 이 글을 쓴 사람이 이제 없다는 게 슬프다고 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 좋다. 진형씨는 생, 삶을 사랑하고 있다. 열심히,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게 너무 과한 건 아닐까 고민스럽다고 한다. 정말 고민에 빠져있는 진형씨의 표정을 본다. 이 사람은 긍정이 무언지 아는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진형에게서 기쁨을 본 적 없는 것 같다. 정직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좋다. 진형이 그렇다. 긍정에 이르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예쁘다. 직관적이고 육체적인 사람이라는 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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