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File 3.

  
“이 곳 어디 쯤인데......”

병옥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가양동에서 30여분을 달려 신탄진의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서류에 기록된 큰아버지의 신상기록에 따르면 이 아파트 203동에 그의 집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매우 커서 203동을 찾는데 한참이나 애먹은 병옥은 단지에 들어선지 15분이 지나서야 겨우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일단 큰아버지라는 사람의 유가족을 만나기 전에 병옥은 다시 한 번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일이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갖고 전부를 판단하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



큰아버지라는 사람이 품속에 갖고 있던 그 명함이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명함과 분명 같은 것이라면 그는 깨끗한 양복 속에 자신의 더럽고 추악한 본성을 감추고 살았던 인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의 직업은 공인 중개사였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 왔으나, 둘째 딸이 죽은 뒤에는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진 모양이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에게는 열 살이나 어린 젊은 부인과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있었다.



그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사망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등산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연탄불을 피워 자살을 했다고 쓰여 있었다. 발견한 시각은 나흘 전 오전 6시 정도. 이른 등산을 하려던 한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류에는 사망자의 모습과 차 안의 주변 사진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함과 비슷하게 보이는 물체가 다른 소지품들과 뒤섞여 찍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기면서 병옥은 사건의 개요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병옥이 바람과도 같은 존재라고 평하는 그 집단은 검은 시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병옥은 전국에서 발생한 적지 않은 수의 실종사건이 이 집단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작은 단서조차 남기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실종자들을 보면서 새삼 그들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병옥 자신도 그들의 능력을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병옥은 큰아버지라는 사람이 정말 자살한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을 김 형사와 대화한 뒤부터 계속 품고 있었다.



진실은 만들어 질 수 있다. 그게 그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전개로 인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그들의 능력이었다.



우울증, 과거에 자살기도를 한 전력, 사랑스러운 조카딸의 실종......그래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자살했다? 그것은 앞뒤가 잘 들어맞는다. 경찰 또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 명함의 존재 때문에 과민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병옥은 그 명함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면 좀 더 나은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누구세요?”

초인종을 누른 사실도 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인터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흔들어 깨웠다.



“아, 저는 얼마 전에 죽은 부군의 일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이어진 깊은 정적......



“이미 화장까지 다 했는데 왜 또 이러세요! 저희 좀 내버려 두세요!”

아마도 부인인 모양이었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보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했다. 집안을 이끌었던 한 가장이 자살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으니 유가족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부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 물어보려고 온 겁니다.”

다시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화장을 안 한, 서른 살 초반으로 보이는 미인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처음 보는 분인데 형사 맞나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병옥을 쏘아보며 물었다.



“아, 그 친구들은 조카 분 실종사건 때문에 안 오고 제가 마지막 확인 차 온 겁니다.”

여기서 경찰이 아니라고 얘기했다간 큰일 날 것 같아 병옥은 거짓말로 일단 둘러댔다.



“일단 들어오세요.”

부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다행히도 집 안으로 병옥을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선 병옥은 집을 둘러보았다. 대충 보기에도 40평은 충분히 넘어 보이는 큰 집이었다. 큰 거실에는 그에 어울리는 큰 갈색 가죽소파가 벽에 걸린 대형 벽TV를 바라보며 놓여 있었고, 그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고인을 기리는 듯 새하얀 국화꽃이 꽂힌 화병 하나가 쓸쓸히 놓여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마실 걸 한 잔 드릴게요.”

슬픔이 드러나는 우울한 얼굴을 한 부인은 병옥이 말리기도 전에 부엌으로 가버렸다. 잠시 후 시원해 보이는 오렌지 주스가 담긴 잔을 쟁반에 담아들고 나왔다.



“허어, 이것 참.......잘 마시겠습니다.”

병옥은 부인이 건네준 잔을 들이키며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거실 벽 한가운데 걸린 대형 가족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저 분이 남편분이신가 보군요.”

병옥은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은 가족사진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형사에게서 건네받았던 사진이나 벽에 걸린 가족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에서 우울증 같은 어두운 그림자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오신 건가요?”

부인이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병옥에게 물었다.



“고인께서 조카딸의 실종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래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 딸아이가 하나 있었어요. 물론 그 전에도 우울증이 약간 있었는데 심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2년 전 딸아이가 병으로 갑자기 죽고 나서부터 심해졌어요. 그러다가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요.”

감정이 북 받친 듯 부인의 눈자위가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휴지통에서 휴지를 몇 장 뽑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병옥도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과거가 있는지라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고인이 정말 자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병옥은 민감한 질문인 만큼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근에 이상하긴 했어요.”



“이상했다니요?”



“그이가 집에서 나간 건 일주일 전이에요. 그리고 소식이 끊겼죠. 이이가 갑자기 실종되고 난 후부터 굉장히 불안해했어요.”



“평소 때와는 뭔가 달랐나 보죠?”

병옥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그렇게까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만취가 돼서 동네방네 떠나가도록 소리치면서 난리를 피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모습이 계속된 겁니까?”



“그이는 집에서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지요. 하지만 은영이가 실종된 이후 매일같이 소주 두 세병을 마셔댔지요. 그렇게 취하지 않고는 잠을 못 잤으니까요.”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조카딸을 걱정했다니 정말 아끼셨나 보군요.”

병옥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이가 은영이를 유별나게 아꼈지만, 솔직히 그이의 모습은 이해가 안 됐지요. 그이의 모습은 단순한 걱정을 넘어섰으니까요. 마치 앞으로 무슨 큰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미리 아는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 했어요.”



“흠...... 그러다가 일주일 전에 갑자기 집을 나간거군요.”

부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옥은 부인의 말을 되짚어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박제천의 자살은 우울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특히 조카딸이 실종된 이후에 그는 더욱 불안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 그가 일주일 전 갑자기 집을 떠나 버렸고, 사흘 뒤 죽은 채 발견되었다.



명함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박제천의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 박제천의 이용가치가 다 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박제천이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물주인 구매자들 중 하나였다면 그들이 박제천에게 어떠한 해를 끼칠 리 만무했다.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박제천의 자살이 정말 그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박제천은 그들의 구매자이기 보다는 한 패거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면 박제천과 그들의 갈등 사이에 조카딸의 실종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단순히 인신매매를 하는 싸구려 집단이 아니었다. 인간의 탐욕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지금껏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한 자들이었고 그런 만큼 막강했다. 병옥이 검은 시장이라고 부르는 그곳도 그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검은 시장은 사람을 필요에 의해 사고 파는 공간이 아닌 일반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더러운 욕망이 충족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추악한 욕망을 갈망하는 자들 중에서는 일반인들은 꿈도 못 꾸는 상당한 재물과 권력을 가진 자들도 속해 있었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더러운 치부가 그 집단에게 약점으로 잡히는 순간 꼼짝없이 그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 사회에 그 사실이 폭로되는 순간 자신들이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이 가진 힘은 강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 비밀스럽게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병옥은 바깥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를 밝혀내기 위해 3년 전부터 외로운 싸움을 해오고 있었다.



“혹시 집안에 컴퓨터가 있습니까?”

만약 그가 느낀 불안이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면 자신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무언가를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병옥은 추측했다. 그 중 컴퓨터는 가장 편한 수단이었다.



“있긴 있었는데 1년 전에 아들 녀석이 게임만 한다고 남편이 화가 나서 컴퓨터를 없애버렸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그래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묻는 건가요?”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이미 자살로 결론이 났는데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강경하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괴롭힐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고인의 죽음은 다소 극단적인 부분이 있어서 뭔가 참고할 만하게 있을까 해서 물어본 겁니다.”



“극단적이라니요?”

부인이 궁금한 듯 물었다.



“만약 조카딸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나서 자살을 선택한 거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조금 성급해 보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갑자기 집을 나간 것도 이상하군요.”



“하지만 이미 경찰에서는 자살로 판단하셨잖아요. 특별한 정황도 없다면서......”

부인의 반박에 병옥은 코를 긁적였다.



“뭐 그렇긴 하죠. 단지 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다른 시각이라뇨?”



“그건 그냥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일단 좀 더 알아보고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직 확실치 않은 내용을 부인에게 선뜻 말하기 곤란했던 병옥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사님, 명함 한 장 주실 수 있나요?”

현관문을 나서려는 병옥을 부인이 불러 세우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저는 명함 같은 건 안 갖고 다녀서요.”



“그럼 연락처라도...... 저도 그이가 그렇게 죽은 게 정말 괴로워요. 하지만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라면 꼭 저에게 알려주세요.”

병옥은 그녀가 내민 핸드폰에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런데 성함이?”



“최병옥이라고 합니다.”

병옥의 이름을 듣고 부인이 잠깐 움찔했다.



“병옥이라고요?”

부인이 되물었다.



“맞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에요.”

부인이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병옥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당황해 하는 부인의 모습이 매우 이상했지만 굳이 더 이상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456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9] 최현진 2011.06.12 0
455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8] 최현진 2011.05.29 0
454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7] 최현진 2011.05.29 0
453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6] 최현진 2011.02.13 0
452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5] 최현진 2011.02.13 0
451 장편 With 7 -01- 湛燐 2011.02.05 0
450 중편 스치듯 인연 <6> 김유리 2011.01.03 0
449 중편 스치듯 인연 <5> 김유리 2011.01.03 0
448 중편 스치듯 인연 <4> 김유리 2011.01.03 0
447 중편 스치듯 인연 <3> 김유리 2011.01.03 0
446 중편 스치듯 인연 <2> 김유리 2011.01.03 0
445 중편 스치듯 인연 <1> 김유리 2011.01.03 0
444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4] 최현진 2010.12.25 0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3] 최현진 2010.12.25 0
442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2] 최현진 2010.12.19 0
441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1] 최현진 2010.12.19 0
440 장편 1987 - 5 최창열 2010.11.22 0
439 장편 1987 - 4 최창열 2010.11.22 0
438 장편 1987 - 3 최창열 2010.11.22 0
437 장편 1987 - 2 최창열 2010.11.2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