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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스치듯 인연 <4>

2011.01.03 20:4901.03


2010.08.19

안 만난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연락도 더뎌 졌다.

저녁 여섯시쯤 전화가 왔었다. 몸이 아파 춤이 춰지질 않아서 연습실에서 울어 버렸다고 했다. 진형은 몸이 성할 날이 없는 것 같다. 몸을 쓰는 사람한테 이런 일들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일까. 춤 연습을 포기하고 밖에 나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 길에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너무 아프다. 계속 식은 땀 나고 목이 찢어 질것 같아 내일 꼭 병원가야지’ 열시 쯤 문자가 왔다. 걱정이 된다. 새벽 두 시까지 일을 어떻게 하나 싶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일하고 있어? 내일은 정말 낮에 몸조리 해야겠다’

답장이 없다.

‘손님 많은 거야?’

답장, ‘만석’

‘조퇴도 안 될테고 힘들겠다’

무슨 말을 할지 고민에 빠지기 싫어서 빠르게 문자를 적고 전송을 누른다.

예전의 나는 상대가 감기몸살에 걸렸다고 하면 나 혼자 응급상황이라며 난리를 쳤었을 거다. 전에 사귀는 사람에게 그랬었다. 새벽, 그 친구가 몸살에 걸려 열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너가 와도 난 계속 아플 텐데 안와도 돼.”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낫잖아. 갈께. 조금만 기다려.”

수중에 있는 돈이 없다. 안방에서 잠든 부모님의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택시를 잡고 헐레벌떡 그 친구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도움이 하나도 안됐다.

우선 그 친구 집에 들어가기 전에 먹을거리를 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좋아할 만한 음식도 모르겠고 감기에 좋은 음식도 모르겠고 마음만 급해서 빠른 걸음으로 몇 바퀴를 뱅뱅 돌기만 했다. 뭘 사갈지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들은 많았지만 뭐 하나 명확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용기를 내서 콩나물 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포장이 안 된다며 사 갈 수 없다고 했다. 고민 고민하다가 고른 것이 고작 인스턴트 미역국, 햇반 그리고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말도 안 되는 과자부스러기들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당시의 내 마음만은 참 예뻤다. 마음만. 나의 경우, 긴장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면 늘 순발력이 발휘 되지 않는다.

그 친구 집에 있는 내내 오히려 내가 더 아픈 것 같았다. 왜냐면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내가 사간 것들, 친구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 친구가 예상하지 못한 정도의 배려가 묻어나며 실용적이고 괜찮은 것들이었음 좋았겠지만 단지 예쁜 마음만 담긴 것들뿐이었다. 친구는 이것저것 싸들고 들어온 나를 그저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친구는 내가 사가지만 않았어도 먹지 않았을 인스턴트 미역국과 햇반을 먹어 치웠다. 친구는 귀여운 너 때문에 이 미역국도 귀여워 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다. 곤욕스럽다.  

우왕좌왕할거면 아예 하지를 말자. 그때 이후로 든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감기몸살은 큰 병도 아니고 괜히 걱정하지 말자. 침착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를 하자.

위로 같은 거 참 젬병이다. 그나마 조금 친한 사이에선 긴장하지 않고 위로하는 것 같은데 조금만 긴장관계가 있어도 어쩔 줄 몰라 한다. 문제다.


“내일은 연습 하루 쉬려고. 몸이 안 될 것 같애.”

이 말은 진형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 때 쓰는 화법이다. 내일은 연습이 없다. 학원이 문을 닫는다. 아르바이트 하는 사장님이 휴가를 간다. 그러면 나는 내일 우리 만날래? 라고 묻고 우리는 약속을 잡게 된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도 진형의 의도가 그러리란 법은 없다.  

“그래. 내일 낮엔 좀 쉬어.”


새벽 두 시, 알람을 맞춘다. 요즘 열두 시만 되도 잠이 든다. 그래서 최근엔 진형과 새벽에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일찍 잠이 들것 같다. 진형이 일을 마치는 시간에 전화를 걸려면 알람을 맞춰야 할 것 같다.

어느 새 잠이 들었나보다. 벌써 새벽 두시, 알람이 울린다. 바로 눈을 떴지만 전화를 걸지 못했다. 아파서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한테 전화를 걸어서 딱히 뭐라 말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목감기로 고생하는데 괜히 전화를 걸면 힘들게 목을 쓰게 만드는 꼴이 될 것 같다. 또 이런저런 고민 앞에 서 버렸다. 우왕좌왕할 거면 아예 하지를 말자.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다가 내려놓고는 바로 잠이 든다.


2010.08.20

차라리 나한테 와달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런 부탁 들어 주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다. 어제 밤에 내가 보낸 문자에 답장이 없는 채로 오늘 정오다. 전화를 걸까 했지만 혹시나 잠든 사람을 깨우게 될까봐 문자를 보낸다.

‘자고 있으려나? 몸은 좀 어때?’

‘병원가려고 잠을 못 잤어’

‘또 못 잤구나. 약 먹으면 좀 잘 수 있겠지. 그래. 병원 잘 다녀 와’

‘그래’

지금은 약 먹고 자고 있겠지? 근데 혹시 내가 너무 걱정하지 않아서 좀 그런가? 근데 사실 우린 연애하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또 너무 걱정하는 것도 어쩌면 이상할거야. 만약에 와달라고 했으면 갔을 텐데...... 이런 생각들, 이런 생각들로 다른 일을 하지 못하거나, 집중하지 못하거나 하진 않았다. 진형이 떠올랐을 때에만 아주 짧게 이런 생각들을 했다.

이따가 진형이 아르바이트 시작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2010.08.21

오전 4:24. ‘취한다. 보고 싶네’

진형은 술에 취할 때면 진정 연인이 되고 싶어 한다.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말이라는 빌미로 이런 문자를 보내는 사람일리는 없다.
  
어찌됐든 취한 사람에게 진지하게 답하는 건 좀 바보짓을 하고 마는 것 같다. 따로 답장하지 않는다. 정오에 문자를 보냈다. 일어났는지, 몸은 좀 어떤지 물었는데 저녁이 다 되도록 답장은 없다. 이따가 아르바이트 시작하기 전 시간에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 내일 몇 시에 만날지도 정해야지.


거의 2주 만에 보는 거다. 그런데 2년 동안 앓고 있는 얼굴의 피부병이 도대체 낫질 않는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만큼 피부가 안정을 취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가보다. 더운 것도 한결 가시고 피부도 좋아지면 진형을 만날 때 더 즐거울 것 같다. 안 만난 사이, 머리도 잘랐고 안경도 바꿨다. 요 근래 생리 전이라 몸이 붓고 가슴도 커지고 배도 더부룩하다. 내일 만나는 날인데 하필 이런다.


저녁 여덟 시, 이제 진형이 일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해도 답이 없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연락이 되지 않으니 괜히 불안하다. 혹시 내가 ‘보고 싶다’는 진형의 말에 반응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는 걸까. 새벽 세 시 이전까지, 아니면 내일 이른 오후까지는 연락이 닿겠지. 그러고 나면 내 불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으로 판명 날 것이다.

열 시가 다 되서 전화가 걸려온다. 긴장이 이제야 좀 풀린다.

“전화가 되니까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왜?”

“아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연락이 안 되니까 무슨 일인가 싶었어.”

“전화 한 번 밖에 안했던데?”

“응. 전화 안 받는데 여러 번 하기도 좀 그렇잖아.”

몸이 좋지 않아서 연락할 정신도 없었다고 한다. 잠을 몇 시간 밖에 못 잤는지 몸이 안 좋아서 얼마나 힘든지 끊임없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얼마나 아픈지를 아주 세세하게 설명해준다. 한 시간밖에 못 잤는데 본인도 모르게 세 시간이라고 말을 해버리자 한 시간밖에 못 잔 건데 말실수를 했다면서 재차 강조한다. 진형의 지금 심정을 알 것 같다. 여기저기 아프고 힘들다는 진형을 걱정해주고 싶다.  

“몸이 그래서 내일 쉬어야 되는 거 아닐까?”

“약속했잖아. 저녁에 만나는 걸로 생각하고 낮에 몸 상태를 봐서 연습을 하고 나서 만날지 어떻게 할지 연락을 할게.”

연락이 되기 전 까지 이런저런 망상을 했던 내가 좀 우습다. 이 글을 일찍 마무리 짓게 될 것 같단 생각에까지 이르렀던 건 정말 우습다.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해서 보여 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하는 진형과 통화를 하고 나니 안심이다. 전화 통화 후에 마음이 놓여서 일찍 잠든 사이, 진형에게 두 통의 문자가 와 있다. 아프고 지치고 심심하다고, 시간이 너무 안 간다고. 문자가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는데 답장이 없어서 답답했는지 자고 있는 나를 깨운다.

“어? 여보세요?”

“자고 있었지?”

“어. 자려고......”

“답장이 없는 거 보면 자고 있었던 거야. 헤헤. 일부러 깨웠어.”

“아, 문자 보냈어?”

잠깐 눈을 붙였나 싶었는데 문자가 온 줄도 모르고 잠들었나보다. 토요일이라 격분한 손님들의 목소리가 진형의 목소리만큼 크게 들린다. 무슨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힘들지? 힘들겠다. 어떡해 라는 말을 주로 했다. 내일 보자면서 전화를 끊었다. 진형이 이렇게 또 여러 번 문자하고 전화해오니까 귀엽다.



2010.08.22

진형의 연락을 받고 출발 할 건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다가 먼저 전화를 했다.

만나자마자 진형은 무례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아, 이 날 역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시 생각하자니 기분이 별로다. 정리가 필요하다.



2010.08.23

진형에게 보여 줄 수 없을 것 같던 내 작업을 보여주고 싶고 지지받고 싶다. DVD를 구워 놓는다. 연필로 글씨를 쓰고,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해도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기도 하면서 DVD를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는 일기 사이 틈에 껴 넣는다.


정리가 벌써 다 되지는 않았다. 어제, 진형에게 사과했다. 얼른 사과를 하고 싶어서 전화 했지만 몇 통째 받지 않는다. 사과는 기다렸다가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문자로 편지를 썼다.

‘전화가 안 돼서 할 말, 문자로 보낼게. 사과 하려고. 너랑 안 맞다고 하면서 했던 말들 미안. 사람 사귀는 걸 되게 어려워하다가 그 날 너한테 못된 말들 한 것 같아. 물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어려우면 어려운 데로 해보고 해야 되는데 뭔가 오차가 생기면 지레짐작해서 판단하고 그런 것 같아. 몰랐었네. 안 맞는다기보다 각자 살아오다가 만난 거니까 다른 점들이 많을 텐데 나는 도대체 왜 다른 거지? 역시 달라서 안 돼. 이런 식이었나봐. 이제 알게 됐어. 미안. 지리지리했겠다. 어제 사과 안한 것 같아서 지금에서야 사과하고 싶었고. 음 내가 좀 더디고 느리고 그러네. 음 사과가 늦어서 효능이 있을런지. 앞으로 어떤 기회와 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야. 너는 어떨지 모르겠어서 어떻게 될지. 뒤틀린 배려 같은 거 안 하려고 노력하려고. 이 정도로 내가 풋내기일 줄 몰랐네. 답장 기다릴게’

미천해지고 있다. 난 내가 풋내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진형씨를 만나면서 어수룩한 모습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런 모습에 대한 기록은 피해왔다. 그런데 지금 내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부분이 나의 풋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천함을 밝혀내고 적어 내려가야겠다. 아, 정말 하기 싫었는데......

저런 장문의 편지를 쓰고야 말았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삼십 분 후, 진형이 문자를 보내왔다. ‘나 자전거타고 종로삼가 가서 레오타드 사왔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난 약간의 하자가 있는 사람이다. 이제 앞으로 주구장창 그 얘기를 할 예정인데 진형씨가 보내 온 문자는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진형씨의 마음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진형씨가 몇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말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난 대답한다. 응, 모르겠어. 일단, 진형씨의 저 답장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해보기로 한다. 내 사과를 받은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완전하지도 않다. 미안하다고 하는데 딱히 뭐라고 답변할 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문제됐던 일을 재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 도통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 사과 받은 거야? 라고 물으면 안 될 것 같다.

내가 진형씨에게 잘못한 게 뭐냐면......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배려한답시고 결국은 배려가 아닌 행동을 하곤 한다. 이 두 장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그 날 진형씨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난 김배려다. 그런데 김배려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배려하는 게 힘들어서, 그리고 나와 맞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됐다. 진형씨랑 만나면서는 진형씨가 원하는 장소, 할 거리들에 대부분 동의해줬다. 맞춰줬다. 김배려다운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진형씨랑 친해질 수 없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절대 말하지 않으니까 진형씨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패턴으로 진형씨와 만나다가 결국 이런 생각에 이른다. 내가 이렇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상대한테 이런 사실을 감추고 계속 만나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결국 이러다가 난 또다시 이 사람과 친해지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는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까 현 상황에 대한 내 생각을 진형씨에게 말해주는 게 나을 것 같다. 혼자만 이런 생각하는 건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진형씨를 속이는 것과 같다.

뭐라고 말 할지 고민에 빠진다. 아, 이 심각한 이야기를 언제 이야기해야 할까?

“우린 정말 안 맞는 것 같아. 예전에도 여러 번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거 실패했어. 결국 연락하는 사람이 없어.”

정말로 미안해하며 말했다. 내 장애는 이런 식으로 발휘된다.

이와 같은 전적들이 좀 있다. 너라는 사람한테 관심이 사라지고 있어. 너랑 나는 정말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했던 말들이다.

진형씨에게 우리가 안 맞는다는 말을 한 건 거의 한 달 전쯤이다. 지난 일요일, 22일 진형이 나에게 이 얘기를 다시 꺼내기 전 까지 내가 했던 말을 회자한 적이 없다. 고민스러워서 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게 어떤 파급력을 가진 말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길래 이런 상태가 된 건지 참 총체적 난국이란 생각만 든다.


22일 일요일, 또 술에 취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진형이 이런 말을 시작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너가 나랑 안 맞는다고 말하고 연락이 끊길 거라는 식으로 말한 이후론 그 전처럼 널 생각하지 못하겠더라.”

진형씨 집에 갔다. 오늘 진형씨 언니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진형이 계속해서 너 어떻게 갈 거야? 라고 물었지만 당연하게도 재워주겠지 싶어서 진형의 집에 간 거다. 그렇게 술에 취해 난 침대에서 진형은 바닥 매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다. 몹시도 더운 옥탑방에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술이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 나왔다.

“정말 너 말 대로 이렇게 연락을 안 하게 되는 건 가봐.”

“내가 언제 또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했어.”

그때 진형이 이렇게 말 할 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웃으면서 넘겼다.

“잘 잤어.”

“내 집이 무슨 여관이냐?”


점을 보러 가든가 해야겠다. 그런데 진형씨와 관계회복을 위해 점을 보는 건 비겁한 것 같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다시 가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오늘 당장, 지금 당장 점을 보러 가고 싶었는데 당일예약이 안 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점을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형과 난 어떻게 될까? 홍대로 나오는 길에 시간되면 차 마시러 오라는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장애를 극복하고 달라지고 싶다. 진형이 도와줬으면 좋겠다. 근데 이미 나에게서 돌아서 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걱정되는 건 내가 워낙 적정선이 어딘지를 모르기 때문에 뒤틀린 배려와 재빨리 단정 짓기를 않겠답시고 무례해지거나 판단자체를 안하게 돼버릴까 하는 점이다. 오늘 진형씨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오늘 볼 수 없으려나? 이제 김배려는 죽었으니까 오늘 꼭 보자고, 그게 몇 시가 됐든, 어디에서든 꼭 보자고 봐야만 한다고 말해도 될까? 어렵다.

김배려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엔 그 외의 또 다른 사건들이 많았고 아무래도 진형이 나에게 나쁜 방향으로 대하고 있는 것 같다.


진형의 무례함은 내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 날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하단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례함이었다. 진형이 간혹 가다가 무서운 동네 좀 노는 언니 같은 말투를 쓸 때가 있긴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날을 잡은 것 같다. 아, 근데 지금 이렇게 쓰려고 하는 와중에 조금 생각이 바뀌고 있다. 별로 무례하지도 않았던 것 같고, 거친 장난정도였던 것 같다. 만약에 무례하다고 느끼면 그 순간에 드는 내 기분을 말해줘야지. 예전 같았으면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과는 절대 친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거다.

“머리 왜 잘랐어. 다시 붙이고 와. 이 머리가 지금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만 좀 하지 싶다. 자른 머리가 아무래도 멍청이 같아 보여서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쓸데없이 머리에 마음 쓰다가 진형을 만나 즐겁게 놀지 못할 것 같아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잔뜩 건 상태다. 괜찮아. 머리카락은 자라기 마련이다. 이상하긴 해도 그렇게 이상하진 않아. 곧 나아질 거야. 나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 머리가 어떻든 중요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진형은 새로운 머리에 대한 비난으로 쉬지 않고 입을 놀리고 있다. 오늘따라 진형이 왜 이렇게 굴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건 무례함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적이 있었다. 전에 좋아하던 남자애 머리가 바뀌었을 때 거의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게 될 뻔 했다. 미모가 좀 되는 남자애였는데 아주 짧게 삭발에 가까운 머리를 그대로 한 달 동안 기른 모습이 정말 촌스러워 보였다. 그 남자애와 한 달 만에 만났는데도 전혀 반갑지 않았고 하는 얘기들은 모두 지루하게 느껴졌다. 같이 있는 내내 별로 웃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그 애에게 결국 머리가 이상하단 말을 에둘러 하고야 말았다.

“너 머리가 이러니까 약간 사이코 살인자 같애.”

진형은 무례하게 굴었던 게 아니다. 진형은 에둘러서 싫은 내색을 하면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이게 바로 진형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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