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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스치듯 인연 <6>

2011.01.03 20:5001.03


2010.09.01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오전0시 33분. 진형에게 전화가 왔다. 자연스럽게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럼 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답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아깐 정말 미안했어.”

통화 초반에 사과를 하고는 연습실에 늦게 간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한다.

“정말 고마웠어. 와줘서 감동이었어. 미안해 아까는. 술에 취해서 잠만 자고.”

진형이 사과를 하고 있다.

“......근데 왜 지금도 그렇고 아까 아침에도 그렇고 전화로는 이렇게 잘 대해주면서 막상 만나니까...”

진형이 말을 가로챈다.

“얼굴 보면 틱틱 거리지? 히히.”

“응.”

“원래 내 스타일이야.”

“아, 정말?”

“어?...... 아니.”

나한테 화가 풀린 게 확실하다. 귀엽다. 다행이다.

“아, 지금 일해야겠다. 이따가.... 이따 안자면 전화할... 전화할게.”

이 말을 하기가 조금 어색했나보다. 오늘은 아마 늦게 잠이 들 것 같다.



2010.09.04

00:31. 전화가 왔다.


9월 1일 이후로 진형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

친구들을 만나 진형과의 관계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들이 많다.  

게이인 친구는 연애를 끝낸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연애포비아를 앓던 친구는 드디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일, 연애를 하기 위해 서로의 이해를 구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자친구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를 매우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관계를 좋은 쪽으로 유지하고 싶었던 내 친구는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대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 남자는 여우처럼 굴기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친구는 결국 끝내자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연애포비아에서 벗어나려던 찰나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내 친구는 상대 역시 예전의 자기처럼 연애포비아가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농담하듯 세상엔 이상하게 꼬인 사람이 많은 것 같다면서 혀를 찬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꼬여가고, 서로 다르게 꼬인 사람들이 만나 연애를 하고 헤어지게 될 땐 또 한 번 다른 식으로 꼬이게 되고 그렇게 또 꼬인 채로 꼬인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연애의 패턴인 것 같다고 한다.

게이 친구는 중간 중간 생략된 진형과 나의 스토리를 듣다가 화가 난다. 진형이 나를 구박하는 부분과 나에게 자기는 연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였던 것 같다. 내가 관계에 서툰 사람이라면 진형은 못된 사람이라고 한다. 만약에 자기가 진형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당연히 내가 말려줄 거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난, 진형이 나에게 못되게 군거라고, 그 사람이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현재 연락은 하지 않고 있고 그냥 시간을 두고 기다리고 있단 얘기도 한다. 친구는 그렇게 기다리는 게 영원히 끝일 수도 있다며 웃는다.

또 한 명의 게이 친구를 만났다. 한 번도 연애에 성공한 적 없던 이십대 후반의 이 친구는 올해 초 열 살 많은 애인을 만나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다. 타인에게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모든 관계를 밀고 당기기로만 유지하려고 하던 내 친구는 요즘 들어 넓은 아량을 가지게 되었다. 본인이 했던 이야기다. 친구는 우선 진형이 자기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연애, 그리고 여자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은 채 만나는 건 내가 힘들 거라고 한다. 그리고 진형은 아마도 애정결핍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많은 관계들을 회피를 통해 만드는 것도 같다고 한다. 현재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면 그냥 이대로 시간을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준다.


그런데 지금 진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00:31.

걸려온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 전화가 온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기는 무척 힘들다. 만약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상대는 얼마나 답답한 마음일까, 그렇게 답답함이 쌓이다보면 통화를 하면서 해결 될 것들도 묵혀지고 삭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화를 받고 싶다.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마음이 변하진 않았지만 일부 설득 됐었다.

그런데 진형과 통화를 한 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떠올렸던 진형의 상이 다시 원래대로, 좋은 느낌으로 변한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형체 없이 사라졌다.


“여보세요?”

“뭐 해?”



2010.09.26

새벽 두 시 반쯤이다. 진형의 전화다. 정말 오랜만이다. 걸려온 전화가 반갑다.

“여보세요?”

“뭐 해?”

“응. 그냥 있어.”

“집이야?”

“어?”

“집이냐고.”

“응. 집이야.”

“응. 조용하네.”

“뭐?”

“조용하다고.”

“응.”

“왜 이렇게 못 알아듣는 거야? 어? 괜히 전화했어.”

“하하하.”

“그냥 혼자 술 마시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응.”

“오늘 컨디션 되게 안 좋아. 요즘에 딱 술 한 잔씩 하면 잠도 잘 오고 다음 날 춤도 잘 춰져.”

“으응.”

“나 지금 뭐 마시게?”

“칵테일.”

“칵테일 뭐?”

“몰라.”

“아, 진짜. 좀 맞춰주면 안 돼? 센스가 없어. 내가 마시는 거 뻔하잖아.”

“아, 알았다.”

“아, 됐어. 내가 다 말했잖아.”

“아, 뭐지? 아, 하이볼.”

“아, 됐어.”

그러고 보니 진형이 ‘안녕’이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나보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쉬라고 얘기했는데 얼마 전부터 일요일도 일하는 거 모르냐며 진형이 툴툴거린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라고 말하는데 또 못 알아들었다. 그것 때문에 또 툴툴대는데 장난으로 그러는 것 같지만 실은 진심으로 서운했나보다. 뭔가 위로받고 싶은 건데 내가 그걸 하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생각이 들면서 난 긴장하고 만다. 자연스럽게 할 말이 생각나지 않고 무슨 말을 할지 고뇌하고 만다. 둘 다 말이 없이 조용하다. 그러다 진형이 말을 꺼내려 하는데 그때 마침 나도 말을 뱉어버려서 시작되려던 대화가 일시정지 됐다. 어쨌든 대화는 이어진다.

“입시 날짜는 나왔어?”

“아니, 아직. 정말 피 말린다.”

“또 너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니고?”

“아니야. 아, 너 뭐야. 아니라고.”

얼마 전에 진형이 지원하는 학교의 원서 접수가 시작됐다. 그런데 진형은 접수 기간이 언제인지 모르고 있다가 다행히 주변사람이 알려줘서 늦지 않게 지원서를 낼 수 있었다. 진형은 내 말이 거슬렸던 것 같다. 총체적으로 지금 하는 통화가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고 있다.

“아, 전화 끊을래. 진짜.”

“어?”

“아, 그냥 혼자 술 마실래. 정말”

진형과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 진형이 내는 짜증이나 툴툴거림 때문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그런데 그렇게 의사표현을 하는 진형이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든다. 나의 경우엔 대화가 잘 이어나가지지 않을 때 더 어색하지 않은 척, 다른 주제들을 마구 꺼내어 던져본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만다. 그렇게 되면 하느니 못한 대화를 하면서 우리의 만남이 잘못됐다는 확신만 하게 만든다. 진형은 그러지 않는다. 대화가 되고 있지 않다고 느껴지면 만족스럽지 않다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러면 물론 난 당황하게 된다. 그런데 거칠지만 그렇게 표출할 줄 아는 진형이 좋다.

진형은 농담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농담을 싫어하는 것 같다. 진형이 농담을 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농담을 즐기지 않는 것은 타당하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는 염려보다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것을 먼저 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농담은 은밀한 거짓의 기능을 도입할 때가 있다. 몇 년 전부터는 농담을 가려서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고 뱉은 농담에 진형이 화를 낸 적이 몇 번 있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진형은 키가 172cm로 꽤 큰 편이다. 스트릿댄스를 오랫동안 춰 와서 그런지 진형의 몸에서는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근래에 더 그렇지만 머리카락은 아주 짧다. 진형은 아는 사람과 있지 않을 땐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목소리는 허스키한 저음이다. 눈은 아주 동그랗다. 정확히 반달 모양의 쌍커플과 동그란 눈매가 만나 있다. 코는 아주 작다. 콧대는 높지 않고 작은 콧방울과 어울린다. 빨간 입술은 통통하게 벌어져 있는데 입술의 폭이 넓지 않고 눈처럼 아주 동그랗게 생겼다. 흰 피부에 눈 밑의 볼에 작게 나 있는 주근깨가 귀엽다. 이렇게 생긴 진형은 본인이 말한 것처럼 매니쉬하게 입길 즐긴다.

“난 얼굴이 예쁘게 생겨서 여성스러우니까 옷을 이렇게 매니쉬하게 입어도 남자처럼 안보여.”

큰 티셔츠를 사고 나온 진형이 귀여운 목소리로 말하는데 바로 이 타이밍이다. 농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인 것이다.

“하하하.”

일단은 웃으며 농담을 시작하기로 한다. 진형의 어디가 여성스럽다는 건지를 주제로 농담을 시작한다. 진형이 전에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다. 아는 오빠가 진형에게 여성스럽지 않아서 연애를 못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을 했는데 그 자리의 분위기상 그 농담이 매우 적절하지도 않았고 진형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해서 그 오빠와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난 진형에게 괜한 농담을 했다가 엄청난 화를 불러왔다.


투닥거리며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


10월 말까지만 진형을 기다릴 생각이다. 우리가 어떤 사이로 있을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 일부러라도 판단하는 것이 나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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