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File 10.

  
"큰일 났습니다.“



차를 몰고 박제천의 집으로 향하던 병옥에게 김 형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무슨 일이야?”



“박성우 씨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부인이 갑자기 사라졌답니다.”



“박성우라면 은영이 아빠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소식이 병옥에게 날아왔다. 은영이 엄마인 김미나는 은영이를 찾기 위해 제대로 쉬지도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딸아이의 사진이 담긴 전단지를 나누어 주다가, 결국 탈진으로 쓰러져 병원에 며칠 간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지금 수사팀도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김미나 씨가 갑자기 사라져서?”



“아니오. 저도 방금 후배 녀석한테 들었는데 김미나 씨 병실에서 은영이의 사진이 나왔답니다.”



“사진이라면 평소 갖고 다니던 거 아냐?”



외동딸인 만큼 평소 애지중지하던 딸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진정도는 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일인데 왜 이리 호들갑인지 병옥은 약간 의아했다.



“아닙니다. 박성우 씨 얘기로는 부인이 평소 가지고 다니는 사진이 아니랍니다. 어제 저녁에 누군가가 김미나 씨 한테 그 사진을 편지로 부친 모양입니다.”



병옥은 결국 길가에 차를 댔다.



“어떤 사진인데?”



“수사팀에서 일단 전 빠진 상황이라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들은 바로는 어깨선이 노출된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랍니다.”



“그럼 그 사진이 어제 저녁에 김미나 씨에게 전해졌다는 건가?”



“편지 배달하는 사람이 직접 병원까지 찾아와서 건네줬다고 합니다.”



“김미나 씨는 그 사진을 받고 갑자기 사라진 건가?”



은영이가 실종된 지 한 달 가까이 돼가는 상황. 부모의 애절함이 극에 달해 있는 이 시점에서 누군가로부터 은영이의 최근 사진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졌답니다.”



“이상한 편지?”



“자신의 죄는 지옥에서 달게 받을 테니 은영이를 잘 부탁한다는 짧은 유서 비슷한 내용이었답니다.”



“지옥에서?”



병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은영이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소식 때문에 수사팀도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습니다. 지금 편지의 출처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병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끈적끈적한 이물질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 같은 불쾌함. 전에도 이런 짜증나는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혹시 김미나 씨 사진을 구할 수 있을까?”



“일단 김미나 씨는 수사팀에서 찾을 테니......”



“아냐.”



병옥이 단호하게 김 형사의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박성우 씨에게 전화해서 혹시 핸드폰에 김미나 씨 사진을 찍어놓은 게 있으면 내 핸드폰으로 좀 보내달라고 해 줘. 부탁한다.”



“뭐 생각나는 게 있습니까?”



갑자기 병옥의 목소리가 심각해지자, 김 형사도 덩달아 긴장했다.



“일단 내가 알아보고 다시 연락할게. 바쁠 텐데 미안하지만, 지금 꼭 해줘.”



“알겠습니다. 전화해서 박성우 씨에게 부탁할게요.”



김 형사와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병옥은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 달 가까이 딸아이의 생사조차 알지 못 해, 걱정과 불안, 초조함으로 가슴이 타 들어가는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미나.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딸아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날아든 것이다.



애끓는 모성애를 약점으로 잡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데 그녀를 이용하려는 이 잔인하고 비열한 수법 뒤에 그 무서운 집단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병옥은 두 팔로 강하게 핸들을 연달아 내려치며 괴성을 질렀다.



“이 개새끼들!!”



거친 욕설을 내뱉는 병옥의 두 눈이 토끼눈처럼 새빨갛게 충혈 됐다. 병옥은 어젯밤 박제천의 집을 방문한 건 분명 김미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끝마칠 때 박제천의 부인에게서 아무런 불안이나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미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 형사에게 김미나의 사진을 부탁한 건 박제천의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감시카메라 영상기록에 담겼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옥에서 자신의 죄를 달게 받겠다는 건 아마도 그녀가 박제천의 가족에게 저지를 죄악을 염두해 두고 남긴 글이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 시간에 박제천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김미나가 맞다면 아무리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결코 용서받지 못 할 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은영이가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 한들 자신의 엄마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안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파트 단지 한 켠에 깔끔한 외양으로 세워진 2층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출입문 옆에 서 있던 한 아가씨가 병옥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203동에서 발생했던 화재 사건 때문에 왔습니다.”



203동 4층에 박제천의 집이 있었다. 화재 사건이라는 말을 꺼내자 아가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조사할 게 있어서 왔는데 관리소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저, 잠시 만요.”



아가씨는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했다. 병옥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병옥에게 돌아왔다.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시면 휴게실이 따로 있거든요. 거기로 가시면 소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병옥이 2층으로 올라가자, 휴게실이라고 쓰여있는 표지판 아래 머리가 제법 많이 빠진 5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가 짙은 남색 점퍼를 입고 서 있었다.



“제가 이 아파트 관리소장입니다.”



병옥이 가까워지자 관리소장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일단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병옥은 관리소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휴게실 안에는 유리로 된 테이블 하나와 의자 서너 대가 한 묶음으로 여러 개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 벽에는 각종 음료수가 담긴 자판기와 커피 자판기가 나란히 설치돼 있었다.



관리소장은 휴게실 안에 들어간 다음, 다시 안에 닫혀 있는 문을 열고 작은 공간으로 병옥을 안내했다. 큼직한 휴게실과는 달리 이 작은 공간에는 갈색으로 코팅된 유리 테이블이 가운데에 놓여있었고, 검은색 가죽으로 된, 푹신해 보이는 한 쌍의 소파가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마주보고 놓여있었다.



“화재 사건 때문에 오셨다구요?”



자리에 앉자 관리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감시카메라 영상기록 좀 볼 수 있을까요?”



“실례지만 경찰이십니까?”



관리소장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으며 덧붙였다.



“아까 전에도 경찰이 왔다 갔는데.”



병옥은 언제나 그렇듯 품속에서 명예 수사관 자격증을 꺼내 보였다.



“필요하다면 경찰을 대동하고 올 수 있습니다.”



병옥이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자, 관리소장은 손사래를 쳤다.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이 아파트에서 화재가 난 건 처음이라 저희 쪽도 지금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아까 전에도 경찰이 왔었다구요?”



“화재를 진화한 소방서 측에서 방화라는 결론을 내려서 조사차 나왔다고 하더군요.”



관리소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화재로 인해 한밤중에 큰 소란이 일어난 데다가 이번 화재로 집값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이웃집 주민들의 항의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꽤나 골치를 썩은 그였다.



“방화라면?”



“조사하러 온 경찰들 얘기로는 소방대원이 화재를 진화하고 집 안에 들어갔을 때 강한 휘발유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고 있었답니다.”



“사망자도 있습니까?”



“사고 현장에서 불에 탄 시체가 두 구나 나왔습니다.”



“두 구라면?”



“처음에는 그 집 안주인과 아들인 줄 알았는데, 안주인은 아파트 잔디밭에 떨어졌는데 운이 좋았는지 죽지 않아 병원으로 이송됐어요. 작은 시체 한 구는 그 집 아들이라고 판단하고 있는데, 나머지 한 구는 누군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관리소장의 입에서 ‘아들’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병옥은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방에서 곤히 자고 있던 한 어린 영혼이 갑자기 자신을 덮친 화마 속에서 울부짖는 환영이 병옥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일단 감시카메라 영상기록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온 경찰들이 확인을 다 했는데......”



번거롭게 뭘 또 보려고 하냐는 투였지만, 병옥은 개의치 않았다.



“꼭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럽니다.”



하는 수없이 관리소장은 병옥을 데리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지하 1층에는 건물 내 시설을 관리하는 설비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 너 명의 사람이 자기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설비실 가운데에는 빨간 불빛과 연두색 불빛이 어지럽게 깜박거리고 ‘우웅’하는 중저음의 소리를 내며 일하고 있는 큰 기계장비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벽 쪽에는 철제 캐비넷, 각종 제본 서류와 기계관련 매뉴얼을 꽂아 놓은 철제 유리 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벽에는 대형 철제 유리 장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날짜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어제 날짜로 찍은 203동 엘리베이터 감시카메라 영상기록 좀 가져와봐.”



관리소장이 한 직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관리소장은 감시카메라 상황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안에는 하나의 대형 모니터가 수 십 개의 작은 모니터로 쪼개져 서로 다른 화면을 정신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대형 모니터 앞에는 긴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컴퓨터 모니터 한 대가 영어로 복잡하게 쓰여 있는 프로그램을 띄워 놓은 채 켜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남자 직원이 시디 한 장이 담긴 투명 케이스를 들고 와서 말했다.



“보고 싶은 시간대는 어디죠?”



“어제 오후 10시부터 11시 사이요.”



관리소장이 눈짓을 하자 남자 직원은 얼른 의자에 앉아 책상 밑에 있는 컴퓨터 본체 시디롬에 시디를 올려놓았다.



“여기 쯤 인가요?”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난 영상 미디어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남자 직원이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인 다음, 영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영상의 오른쪽 위에 나타난 시각이 오후 10시를 나타내고 있었다.



“빠르게 좀 돌려요.”



병옥의 핸드폰에 기록된 박제천 부인과의 통화시각은 오후 10시 40분 경. 속도를 빠르게 해달라는 병옥의 부탁에 남자 직원은 마우스를 연달아 클릭했다. 4배 속으로 영상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목표 시간까지 흐릿한 영상이 홱홱 지나갔다. 오후 10시 40분까지 열 명 정도의 사람이 번개처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여기서부터 정상 속도로 돌려요.”



오후 10시 40분이 다 돼가자, 병옥이 남자 직원에게 부탁했다. 눈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하던 영상의 시간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여자 얼굴을 좀 확대할 수 있나요?”



목표 시간이 거의 다 돼갈 무렵, 한 여성이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탔다. 병옥은 제발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며 남자 직원에게 부탁했다.



남자 직원이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엘리베이터 안에 탄 사람의 얼굴이 점점 커졌고, 얼굴이 커질 때마다 흐릿한 영상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하-”



병옥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은영이 아빠인 박성우가 보낸 김미나의 웃는 사진이 병옥의 핸드폰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감시카메라의 영상이 고화질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핸드폰 사진의 주인공과 비슷하다는 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우려하기는 했지만, 결국 병옥의 걱정대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에 탄 그녀의 손에 작고 하얀 통이 들려 있었는데, 아마도 그 통 안에는 박제천의 집을 불태우기 위한 휘발유가 가득 차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까지 병옥은 박제천과 그들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처음엔 그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무언가 은밀한 일을 해오던 짝패가 아닐까 의심을 했다.



공인중개사로서의 그 현실의 모습은 다소 이상한 면이 많았고, 그에 어울리지 않게 풍요롭게 사는 박제천의 모습은 분명 의심이 들 만 했다. 거기에 누군가 그의 사무실에 침입하여 컴퓨터 부품을 훔쳐간 사건, 3년 전 한 여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에 의한 박제천의 자살 등은 그들과 연관 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김 형사와의 대화로, 생각한 것보다 박제천은 상당한 수완가였음이 밝혀졌다. 미국에서 사업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조용히 돌아와 지금의 삶을 유지해 왔다.



풍족한 삶을 살았던 박제천은 그들의 구매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조용하고 은밀하면서도 치밀한 그들은 자신들의 돈줄을 관리하는 데에도 허점이 전혀 없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비밀스런 고객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할 리 없었고, 병옥 역시 은영이의 실종이 그들보다는 과거 박제천이 사업을 해오던 과정에서 원한을 산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박제천 부인의 사고와 그 아들의 죽음, 여기에 은영이 엄마인 김미나가 개입되면서 안개로 뿌옇게 가려졌던 길이 서서히 트이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았던 박제천은 2년 전 자신의 딸이 죽은 뒤 천벌을 받은 것이라며 자살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이번 은영이의 실종 이후에도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며 잠결에 병옥을 언급하기도 하고, 또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둥 헛소리를 해댔었다.



아마도 박제천은 어떤 계기로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박제천이 그들과 해야 했던 일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일들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던 양심은 그런 일들을 해야 했던 자신에게 몹시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런 갈등이 우울증을 낳기 시작했고 결국 자살시도까지 하게 만든 요인이 아니었을까. 자신들과 함께 배를 탄 박제천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결국 박제천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수법은 너무 잔인하고 몰인정했다. 박제천을 자살로 위장해 살해하고 자신들의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가족까지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은영이의 엄마인 김미나를 이용한 것이다.



그 결과, 하나 뿐인 박제천의 아들은 불길 속에서 산화돼 버렸고, 부인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였다. 박제천의 집에서 발견된 또 한 구의 시체는 십중팔구 은영이 엄마인 김미나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불길 속에 내던졌다.



참 무서운 자들이다. 이미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는 심정 하나만으로 버텨오던 김미나. 그런 그녀의 절절한 심정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그들은 은영이의 생명을 담보로 잔인한 제안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딸아이의 잠든 사진 앞에 이성을 잃고 만 그녀는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약자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신들의 도구로 삼는다. 차마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 앞에서 막다른 길에 몰린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행복 따윈 없었다.



병옥은 진이 빠진 듯 핸드폰을 들고 있던 오른손을 힘없이 푹 떨어뜨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병옥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리는 병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관리소장과 남자 직원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때는 겨울을 앞 둔 늦가을. 병옥은 관리사무소를 나와 햇볕이 내리쬐는 아파트 도로 한 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저긴가?’



바로 앞에 거대한 기둥처럼 서 있는 것이 203동 아파트였다. 깨진 유리창과 검게 그을린 주변 벽으로 보아 저 곳이 박제천의 집인 모양이었다.



불타 버린 박제천의 집을 바라보는 병옥의 두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만행을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속으로 한탄했다.



박제천이 그들과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검은 시장을 한 번 방문했던 병옥은 대충 어떤 일인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병옥이 짐작하는 것보다도 훨씬 추잡스러운 일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박제천은 처절한 대가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그 자신의 목숨은 물론, 딸을 잃고 하나 밖에 남지 않았던 외아들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했으니 말이다.



병옥은 품속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빼내어 입에 물었다. 이윽고 한 줄기 연기가 허공 위로 피어오르며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자, 도로가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정신없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병옥은 자신의 뺨을 세차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면서 여전히 담배를 꼬나문 채 박제천의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노에다 연민이 뒤섞이기 시작한 그의 두 눈이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불길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던 한 어린 영혼과 딸아이를 위해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키면서 죽음을 택해야만 했던 한 어머니의 슬픈 운명에서 오래 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겨울을 앞 둔 늦가을의 하늘이 파란 물감을 칠한 듯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도로가를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볕이 잔인할 정도로 따사로웠다. 병옥은 그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돌기둥처럼 우뚝 선 아파트를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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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진 11.09.20 21:58 댓글 수정 삭제
    출처 - HttP://blog.naver.com/chjhjin 현재 chapter 2. 39 편까지 연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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