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리 집은 6층이었다. 나는 항상 6층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5층에 멈춰 버리곤 했다. 생각보다 더 많이 올라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 또 다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5층은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장소였다. 내가 5층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아빠가 돌아오다가 나를 데리고 집에 들어갔다. 그때마다 난 별 저항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내가 7층에 가 있는 거였다. 7층은 한 10번 정도 자기 집 앞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자, 화를 내는 대신 걱정스런 얼굴로 우리 집엘 찾아왔다. 이 집 처자 좀 이상하니 치료를 받게 하라는 거였다. 내가 자기보고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항상 맞는 집 벨을 눌렀다. 눌러도 눌러도 아빠나 엄마가 나오지 않는 일이 잦았지만 성인답게 품위를 지키며 집앞에서 기다렸다. 간혹 어쩔 수 없는 서러움에 좀 울기도 했지만, 남 볼세라 얼른 눈물을 닦아내곤 했다.

아빠는 이제 7층에 먼저 와서 나를 기다렸다. 유난히 날씨가 좋던 4월의 어느 날,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7층에 가서 벨을 눌렀다.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내 손목을 잡고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분홍색 원피스 위에 눈물자국이 지기 시작했다.

"집에 가자. 대체 왜 이러니. 여긴 우리 집이 아니야."

아빠가 애타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으면서 물었다.

"넌 누구야?"

일이 시끄러워졌다. 엄마는 통곡을 했다. 나는 엄마에게도 물었다. "넌 또 누구야?" 나는 어려진 것 같았고, 보호자를 찾지 못해 불안했다. 7층으로 가서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곧 7층으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아빠와 엄마가 날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든 나가려 했다. 커튼으로 줄사다리를 만들어 창밖으로 늘어뜨리려다가 들키기도 했고, 식모가 밥을 들여오려고 방문을 여는 틈에 잽싸게 빠져나가려고도 해 봤다. 하지만 실패했다. 방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우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밥도 먹기 싫었고 잠도 자기 싫었다.

나와 엄마의 울음이 하루종일 이어진 날 밤 아빠는 나를 자동차에 싣고 달렸다. 아빠의 자동차는 반질반질한 검은색이었다.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신나게 밤길을 달려 닿은 곳은 장난감 같은 한옥집이었다.

"자, 이젠 여기서 살자. 여기서 좀 쉬면 다 괜찮아질 거야."

나는 쭈뼛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집은 작긴 해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아빠는 부자였다. 꽤 부자였다. 어디서 사업을 한다고 했다. 이런 집쯤은 금방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방은 오른쪽의 큰 방과 왼쪽의 작은 방 두 개였다. 두 방은 미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오른쪽 방을 쓰기로 했다. 한 칸짜리 별채가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거긴 왼쪽 방보다 더 작아서 가고 싶지 않았다. 남은 밤 나는 오른쪽 방에서, 아빠는 왼쪽 방에서 잠을 잤다. 흙벽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자장노래삼아 나는 울지 않고 잘 잤다.

날이 밝자 아빠는 아침을 차려주었다. 밥과 간장, 김치, 두부의 단촐한 아침 상이었다. 나는 맛있게 잘 먹었는데 아빠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상을 물리자마자 읍내로 간다며 나갔다. 아빠가 나갈 때 문을 걸어잠그는 걸 알았지만, 나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빠는 여기서 내가 나돌아다니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층도 아래층도 없었다. 한 층뿐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점심나절 아빠가 돌아왔을 때, 아빠는 혼자가 아니었다. 웬 남자 하나를 데리고 왔다. 나는 방바닥에 앉은 채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인사하렴. 심씨 청년이다."

그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내가 여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말이 없자 아빠는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둘 사이에 뭔가 내가 알지 못할 약속이 있는 것 같았다.

"오늘부터 너의 시중을 들어줄 거란다."

아빠는 내 옆에 앉으며 심씨 청년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다. 그는 얌전히 무릎을 접었다. 아빠는 심씨에게 하는지 내게 하는지 모를 말을 몇 마디 늘어놓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러니까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시대에 머슴이라니 당치 않은 말 같지만, 자네는 오늘 아침 인력 시장에 스스로를 머슴으로 팔았고 마침 내가 그 예스러운 머슴을 필요로 하니 내 집에 있어주면 고맙겠네, 아마도 피치 못할 안타까운 사정이 있겠지마는 묻지는 않겠네, 삯은 넉넉히 쳐줄 테니 일단 반 년만 이애를 돌보아주게, 먹을 것 챙겨주고 청소 좀 해주고, 이애애게서 눈을 떼지 말 것이며, 혹시,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애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짓을 하려 들거들랑 망설이지 말고 그러지 못하도록 해주게, 그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지만 영 안되겠다 싶으면 완력을, 에, 그러니까 힘을 써서라도 막아주고, 물론 상처를 입혀선 안되지만, 물론 나도 이애 옆에 있겠지만, 만약을 위해서 말일세...... 자네의 인상이 좋아 보이니 내 믿고 맡기겠네.

인상이 좋다고? 나는 아침에 먹다 남은 두부를 집어먹으면서 심씨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다. 첫인상은 검다는 것이었고, 두번째 인상은 말랐다는 것이었다. 코밑에 수염을 약간 기르고 있었는데, 그 수염은 그의 얼굴에 잘 어울리긴 했지만, 뭐랄까..... 글쎄. 어쨌든 특별히 착해 보이지는 않았다.

난 아빠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야?"

아빠는 참을성 있게 설명해 주었다.

"오늘부터 우리집 머슴인 심씨 청년이다. 우리 어머니, 그러니까 너의 할머님 대에는 우리집에 머슴이 여러 명 있었지. 너도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필요한 게 있으면 심씨 청년에게 말하렴."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벌떡 일어났다. 나가볼 시간이었다. 어디든지 가야 했다. 여기가 아닌 곳으로. 위층도 없고 아래층도 없으니 산이라도 넘고 개울이라도 건너야 했다. 그러나 아빠가 얼른 나를 붙잡았다. 심씨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직도 꿇어앉은 채였다. 나는 아빠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놔." 그러자 아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빠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어쩐지 나도 울고 싶어졌다. 우리가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하는 동안, 심씨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심씨의 음식 솜씨는 그럭저럭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보다 대단히 훌륭할 건 없다고 느꼈다. 반찬의 가짓수가 좀 는 정도였다. 심씨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 아빠와 나는 겸상하여 수저를 기울였고 심씨는 별채, 즉 사랑방으로 가서 자기 끼니를 챙겼다. 아빠는 내가 어디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데 제일 신경을 썼고, 두번째로는 나와 심씨가 단둘이 남지 않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 아빠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이란 대개 나를 지켜보는 것과 사업상의 전화를 받는 것이었는데, 가끔은 전화를 받고 급히 뛰쳐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방 문단속을 철저히하고 심씨에게는 읍내에 가 있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아빠는 뛰쳐나간 후 하룻밤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심씨가 먼저 돌아왔다.

나는 방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다. 밖엘 못 나가니 난 항상 시들시들하고 힘이 없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지만 몸은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누구야?"

"접니다."

"심가야?"

그는 대답 없이 달그락거리더니 문을 열었다. 그는 들어오지 않고 밥상만 들어왔다.

"드세요."

"싫어."

"그럼 잠깐 놔두겠습니다. 조금 후에 와서 내가죠."

심씨가 상만 놓아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30분쯤 후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마지막 밥술을 뜨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 서서 말했다.

"상을 이쪽으로 밀어주세요. 내가겠습니다."

내가 그 말대로 하자 그는 상을 대청에 올려놓고는 다시 내 쪽을 보았다.

"주무시기 전에 씻으시겠습니까?"

나는 문간에 주저앉아서 그냥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를 본 게 아니고 바깥을 보았다. 5월이었다. 봄기운과 여름 기운을 한꺼번에 머금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흙냄새가 났다. 꽃향기도 났다. 하늘은 검푸른 색으로 물들고 별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내가 바깥으로 돌진하기 전에 심씨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내게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나가시면 안 됩니다.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 열쇠로 안쪽에서 문을 잠그세요. 저는 문간에 앉아 있겠습니다."

문이 쾅 닫혔다. 나는 문을 마구 두드리며 내보내달라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그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힘으로 당할 수가 없자 약이 올랐다. 나는 열쇠로 문을 잠가버렸다. 커다랗게 소리질렀다. "나도 못 나가지만 너도 못 들어와! 못 들어온다고! 안 열어줘! 안 열어준다고!" 밤새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대꾸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지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아빠가 돌아와 심씨와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고맙다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앞으로도 자리를 비울 때면 부탁한다고.

"미친 딸이니까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거야."

나는 아침 밥술을 뜨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심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닙니다. 아버님은 아가씨를 무척 생각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남자랑 밤새도록 둘이만 놔 두잖아."

"제 이름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만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알 게 뭐야? 심가면 충분해."

'네."

심씨는 설거지 거리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나는 방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나의 여흥에 돌입했다. 무엇이든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다. 창밖은 봐봤자 속만 상하니까 방구석의 온갖 사물들을 관찰하였다. 작은 서랍장과 화장대, 장롱과 보료, 책 몇 권. 요강도 있었다.

"청소를 할 테니 잠깐만 나와 주시겠습니까?"

"싫어."

"건넌방에 들어가 계시면 됩니다."

"싫다니까!"

"그쪽에 좋아하실 만한 것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나는 건넌방에 가보고 조금 놀랐다. 심씨는 마을 여기저기에서 구한 잡동사니들을 제법 솜씨 좋게 매만져서 장난감 비슷한 것들로 만들어 놓았다. 돌멩이 바퀴가 달린 소주병 자동차를 밀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네."

"마음에 드세요?"

"너 솜씨좋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하지만 심씨의 목소리에는 기뻐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것도 아빠가 시킨 거지?"

"네."

그리고 그는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자동차 놀이에 전념했다. 부릉부릉. 길을 비켜라. 아가씨가 나가신다.

평화로웠다. 아빠는 이제 내 옆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서울에 가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해도 길어졌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가 없자 나의 '탈출'하고픈 욕망도 조금 줄어들었다. 나는 요즈음 잠깐이라면 그저 대청에 얌전히 앉아 하늘을 쳐다보다가 방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게 되었다. 두어 번 정도는 그대로 산 쪽으로 뛰어나간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심씨가 나를 쫓아와 팔을 붙잡고 집으로 데려다줬다. 그때마다 난 별 저항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그를 그냥 심가라고 불러야겠다. 심씨보다 어감이 나았다. 심가는 삼시 세끼 밥을 지어주고 빨래와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하는 것 외엔 별 일을 하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는 그도 그저 대청에 앉아서 하늘이나 쳐다보았다. 그림자 같은 남자였다. 꼭 필요하지 않은 한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가끔 기웃거렸다. 이 집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인적이 아예 없을 만큼 외딴집도 아니었다. 농번기라 바쁠 시골 사람들이었지만 아이들이 먼저 이 집과 나를 발견했고, 어른들이 아이들의 말에 이끌려 들여다보러 오곤 했다. 그렇지만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그들의 은밀한 표정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7층이 나를 보던 시선과 비슷했다.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얼굴들 위에 호기심과 경계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들. 내가 다가가면 얼른 도망쳐 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들도 심가와는 조금씩 의사소통을 했다. 심가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가끔 맘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들이 먹을 것을 주고 가기도 했다. 쯧쯧쯧. 사지멀쩡해서 이때까지 머슴으로 먹고사는 젊은이가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아빠 말처럼 분명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 심가가 그들에게 자기 사정을 설명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평화로운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늘었다. 아빠도 자주 안 오는 판국에 엄마를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엄마는 왜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일까? 엄마는 부잣집 마나님이었다. 시간도 많고 돈도 많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유한 부인'이었다. 하긴 그 유한 부인 마님에게 너는 누구냐고 소리 질러서 몇날 며칠을 울게 만든 게 나였다. 나는 몇 번이고 소리치고 싶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고! 우리 엄마는 어디 있어! 그러게 말이었다. 엄마는 어디 있을까? 아빠 옆에 있는 여자가 내 엄마인가? 아빠의 시앗이 아니고? 아빠가 출세하려고 버린 여자가 우리 엄마가 아니고? '회장 따님'이 우리 엄마라고?

그렇다. 회장 따님이 우리 엄마인 모양이었다. 엄마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단 하나 정신이 좀 아팠다. 아빠는 엄마를 고쳐 보려고 만방으로 애썼고, 그 결실을 좀 보긴 했지만, 엄마가 좀 괜찮아지자마자 딸년이 발병한 것이었다. 미친 딸년 옆에 뒀다가는 엄마가 재발할 것 같아서 아빠는 둘을 격리했다. 처음에는 엄마 아빠 사랑 못 받고 자란 딸이 불쌍해서 같이 있어 주다가, 지금은 부인을 달래주러 간 것이었다.

그런 걸로 하자.

나는 대청마루에 대자로 누워서 흥얼거렸다. 흰 치마저고리가 무릎 위까지 말려올라갔다. 시원했다. 동쪽 하늘에서 달이 머리를 내밀었다. 절로 노래가 나왔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심가가 내 옆에 식혜 한 사발을 놔두고 갔다. 

여름 해는 길었지만 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이 뜨는 반대편에서 화려하게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이 발가락 끝부터 석양에 불타도록 내버려두었다. 석양이 나의 반쯤 벌거벗은 다리를 붉게 비추고 흰 치마저고리를 월경 빛깔로 물들였다. 나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입을 벌렸다. 해가 나의 입 속에 떨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풀어헤친 머리카락 끝까지 시뻘겋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는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온몸으로 저녁나절을 흡수하였다. 벌컥벌컥 식혜를 마시자 몸 속에서 찬 것과 더운 것이 엉키면서 이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 필요 없어!" 나는 벌떡 일어나 대문을 밀어젖히고 뛰어나갔다. 그러나 어디선가 또 그림자처럼 심가가 나타났다.

"안 됩니다."

나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게 해줘.

"가지 마세요."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나를 막았다. 나는 붉은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가야 되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막는다.

더위는 급격히 왔던 것처럼 급격히 물러갔다. 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차려주는 밥이나 먹고 깔아주는 자리에 누워 잤다. 반찬 투정도 잠투정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돌봐주는 사람의 덕으로 살아가는 유한 부인의 삶이었다.

어느 날 누가 대문 안쪽에 햇밤 한 자루를 가져다놓고 갔다. 그날도 아빠가 없는 날이었다. 심가는 내가 낮잠 자는 틈을 타서 자리를 비운 차였다. 그런데 저녁이 다되어 내가 일어났는데도 심가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였다. 나는 그 밤 자루를 한참 노려보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길이 잘 든 칼과 대야를 들고 나왔다. 대야에 밤을 쏟아붓고 물을 채웠다. 잠시 후 나는 칼을 들고 생밤을 깎기 시작했다.

짧아진 해가 기울며 하늘이 검푸른 빛으로 변했을 때쯤 심가가 읍내에서 장을 봐 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 멈춰섰다.

"놔두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할래."

추석이면 항상 밤을 깎았다. 밤을 깎는 것은 내 일이었다. 심가는 잠깐 내 옆에 서 있다가 이윽고 부엌으로 들어와 다른 칼을 가지고 나왔다. 내 칼을 뺏는 건 포기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나란히 앉아서 밤을 깎았다. 놀라운 사실은 심가가 나보다 밤을 더 못 깎는다는 사실이었다. 머슴이 아가씨보다 일을 못하다니 참 별일이었다.

나는 툭 내뱉었다. "잘 못하네."

"네, 잘 못합니다. 밤은 별로 많이 깎아보질 않아서요."

"사실 다른 일도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진 않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미안해."

"네?"

"열심히 하는데 내가 타박하잖아?"

"네."

사각사각. 밤 깎는 소리가 푸른 밤 공기를 조금씩 오려내었다.

"나 먹을 건 내가 만들어 먹으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말야, 난 밤만 깎을 거야."

"네. 당연합니다. 저는 아가씨 생활을 돌봐드려서 제 생활을 꾸리니까요."

"아빠가 돈 많이 줘?"

"넉넉하게 주십니다."

"응. 추석이면 밤을 깎는 게 내 일이었지. 다른 건 안 했어. 밤만 깎았어. 그래서 난 밤 잘 깎아."

"네. 잘 깎으시네요."

심가는 잠깐 침묵하다가 쓸데없는 한 마디를 붙였다. "밤 깎는 게 아가씨께 퍽 의미 있는 일인가 보지요." 나는 곧바로 응징했다.

"그럴 리 없지."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밤을 이렇게도 깎아보고 저렇게도 깎아보았다. 하지만 결국은 다 똑같이 매끈매끈하고 둥글둥글한 깐밤이 남을 뿐이었다. 나는 실망했다. 밤조차도 예전과 같았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난 계속 이렇게 살 것이다. 아빠든 심가든 누구든 나의 생활을 챙겨주겠지. 뜻없는 소리나 시벌거리다가 밤 깎을 때에만 몇 마디 바른 소리를 하고 '똑똑하던 아가씨가 어쩌다....' 하는 소리나 꼬박꼬박 챙겨들으며 늙어 갈 것이다. 쭈글쭈글 늙고 나면 아무도 내게 신경을 쓰지 않겠지. 그럼 또 밤이나 깎다 죽어 갈 것이다.

"심가. 밤을 다 깎아 가네."

"그렇네요."

"나한테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밤 깎는 동안에만 대답할 거야."

"글쎄요. 하긴 아직 아가씨 이름을 모르는군요."

"내 이름? 아빠가 안 가르쳐 줬어? 내 이름은 말이야."

어? 내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은...... 순간 나는 공포를 느꼈다. 내가 허우적대고 있는 더럽고 따뜻한 웅덩이보다 더 깊은 심연이 내 눈 앞에 있었다. 내 인생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네."

"내 이름... 이름은...... 모르겠어. 내 이름이 뭐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가는 약간 당혹하여 나를 보았다. 나도 그를 보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보는 것처럼 보았다. 그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무잡잡하고 깡마른 남자였다. 하지만 내가 그때 못 본 것도 있었다. 그는 무척 단호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눈매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날카롭고, 높고 곧은 코에도 곡선이란 없었다. 가로로는 '원칙', 세로로는 '준수'라고 써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빠가 '인상이 좋다'고 했던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다만 그 콧수염, 콧수염이 조금 우습달까. 거듭 말하지만 안 어울리는 건 아니다. 그래...... 어쩌면 잘생긴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콧수염은 꼭 위장용 같았다.

"괜찮으세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대청마루를 짚었다.

"안 울어."

"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도 뭐 어때. 뭐 어떠냐고. 잘 살았잖아. 지금까지처럼 네가 날 돌봐주겠지."

나는 아빠와 심가가 6개월 계약을 맺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가는 아마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 내가 울고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다.

심가에게 나는 그저 '아가씨'였으므로, 그가 내 이름을 몰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나는 전혀 뛰쳐나가지 않게 되었다. 대신 멍하니 앉아 음울한 감정을 곱씹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빠는 내가 얌전해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곧 서울로 올라갈 수도 있겠다고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심지어 내가 나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안 나았다. 애초에 아픈 적도 없었다.

심가는 여전히 날 잘 챙겨주었다. 반찬 솜씨도 많이 늘었다. 말은 안 하지만 내가 밥공기를 비우면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는지, 우리는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고 말았다. 내가 주로 활동하는 시간이 저녁에서 밤이었으므로 심가는 자러 가기 전에 잠시 나와 이야기하는 일이 잦았다. 머슴 일에 말동무 일까지 떠맡았으니 삯을 올려주어야 마땅할 것인데 아빠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심가, 심가는 아빠가 없어?"

어느 날 저녁 심가는 낙엽을 모아 마당 한켠에서 태우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불타는 낙엽 더미를 쏘색이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저는 부모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런. 왜 아빠를 몰라? 사람은 다 아빠가 있어."

"저는 아가씨 말버릇이 더 궁금하군요. 어머님은 안 계시는가요? 왜 항상 아버님만 언급하시는지."

"나도 엄마는 있어. 엄마가 누군지 모를 뿐이지."

"그렇군요."

"엄마는 미쳤거든. 나처럼. 엄마도 내가 누군지 모를 거야."

낙엽 태우는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회색의 연기는 꼭 육신을 탈출하는 영혼 같았다.

"아가씨는 미치지 않았어요."

"왜?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심가뿐이야. 다들 날보고 미쳤다고 하잖아. 음. 뭐라더라. 유전병이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좋지 않은 일을 겪어서, 그걸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서 미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야."

"그런가요."

"그보다 얘기해 봐. 심가는 이 지방 출신이야? 이 집에 오기 전엔 뭘했어? 계속 머슴일을 헸어?"

낙엽 더미를 쑤시던 심가의 손길이 멈추었다. 불티들이 그의 발치로 날아올랐다.

"아가씬 저에 대해 알고 싶으세요?"

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알고 싶으냐고? 물론 알고 싶었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게 이상한가? 가을 밤은 추웠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끊일 듯 끊일 듯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응."

"왜요. 듣고 나면 잊으시겠지요."

"잊는 건 병 때문이야. 어쩔 수 없잖아."

심가는 갈쿠리를 놓고 내 쪽으로 돌아섰다. 막 중천으로 올라서려는 그믐 달빛이 약한 역광을 드리워, 윤곽이 뚜렷한 편인 그의 얼굴이 온통 어둠에 잠긴 듯 보였다. 불길이 사그라들며 그 어둠에 붉은 빛을 더했다.

"알고 싶다면 대답해 드리죠."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말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나는 흔해빠진 더러운 살인자야."

그는 불타는 낙엽 더미를 뒤로 한 채 내 옆으로 걸어와 앉았다.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등을 매우 꼿꼿이 세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양옆을 보지 않겠다는 듯한 단호한 태도로 눈앞의 허공에 시선을 꽂았다.

"아무도 당신의 말을 믿지 않겠지."

이건 내 말이 아니다. 그가 한 말이었다. 그것은 말해졌다기보다는 던져진 문장이었다.

나는 맞장구쳤다.

"맞아. 내 말은 아무도 안 믿어."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네 말도 거짓말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나?"

"아무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살인자같이 보이지 않는걸."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설령 정말 누군가를 죽였다고 하더라도, 뭐 부모의 원수였다든지 뭐라든지, 이유가 있지 않겠어?"

"이유에 상관없이 살인자는 더럽다. 죽어 마땅한 악당이지."

"더러워 보이지도 않는걸."

시간이 약간 흘렀다. 1분일 수도 있고 1시간일 수도 있다. 나는 기다렸다. 잔혹한 기대를 품고서. 모종의 위기에 처한 한 인간의 옆모습을 관찰하면서. 위기는 내게 익숙한 감각이었다.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균형이 어긋나는 아찔한 순간 영혼은 미련없이 부서진다. 부서지고 나면 알게 된다. 지금까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얼마나 기적 같은 시간들이었는지. 부서지기란 너무나 쉽고 또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모처 양반이 대대로 부리던 씨종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늦가을 밤의 스산한 공기 속에서 그의 말은 천천히 결정화되었다. 그의 말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말해본 것처럼 찬찬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용의주도하게까지 느껴졌다.

"양반은 이미 몰락한 뒤였다. 사실 양반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코미디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힘을 발휘하였다. 나는 그 집의 일을 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자라났고 나이가 들어서는 연로한 어머니 대신 내가 일을 했다."

"어느 날 내 또래인 그 집 아들이 나를 은밀히 불렀다. 한몫 잡고 싶지 않냐고 하더군. 그런 생각 없다고 했다. 나는 내 인생에 이미 큰 기대가 없었지만, 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짐을 지고 싶지는 않았지. 그는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더니 그럼 그냥 가라고 했다. 뒤통수에 혀 차는 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배포 없는 놈이라고. 그는 항상 종놈의 자식과도 배포 있게 어울리는 명문가의 자손을 연기하고 싶어했지만, 그런 연기에 속아 주기엔 나도 약은 놈이었지."

"몇 달이 지난 후 경찰서에서 나를 불렀다. 이미 10년 형 정도는 받은 것처럼 나를 다루더군. 수갑을 차고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설명을 들었다. 내가 사기를 쳤다는 것이었다. 고장의 수많은 유력자들이 넘어갔다고 했다. 내가 주인 집 아들의 이름과 신용을 내세워 거금을 빌리고는 갚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지. 그들은 내 눈앞에 내 필적으로 쓰여진 서류를 흔들면서 물증이니 유죄니 하였다. 그때쯤 사태를 파악했다. 나는 나를 지킬 만큼 충분히 약지 못했던 것이다."

"유치장에 갇혔다. 고약한 냄새와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재판정에 가기도 전에 죽을 거라 생각했지. 재판정에 보내 주긴 한다면 말이지만.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유치장 문 앞에서 울부짖었지. 그러나 나의 무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나는 면회 창구 반대편 벽에 난 작은 창문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지. 공허하더군. 어머니가 돌아간 후 나는 간수에게 말했다. 아직 그 돈을 쓰지 않았고, 어딘가에 숨겨 놓았으니 나를 하룻밤 동안만 꺼내주면 그 돈을 다 주겠다고. 하룻밤만 주면 슬퍼하는 어머니를 내 품안에 안고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 유치장이라 다른 죄수가 없었지. 간수는 두 시간을 허락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유치장에서 나와서 나는 달렸다. 집에 들르기는 했지만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낫을 꺼내들고 다시 달렸다. 주인 집은 멀지도 않았다. 나는 사랑방에서 자고 있던 주인 집 아들을 깨웠다. 그리고 약식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어렵지 않았다. 깊지도 얕지도 않게, 그저 사람의 멱을 딸 만큼만 낫질하였다. 유치장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부모님의 원수는 아니지만 원수네. 너를 자기 대신 희생시키려고 했다는 거 아니야?"

"그렇군. 어쩌면 사람을 죽이기에는 모자란 이유였는지도 모르지. 이건 어떨까. 도망친 나는 한동안은 멀리 가지도 못했다. 소식이 들려오더군. 3대 독자를 잃은 주인 집이 슬픔과 분노로 미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집에는 불이 났다. 타는 데 몇 분 걸리지도 않는 작은 초가집이었지. 자고 있던 어머니는 순식간에 타죽고 말았다. 방화죄나 살인죄로 잡혀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곧 알게 되었다."

"그럼 결국 부모님의 원수이기도 한 것이네?"

"확실치는 않다. 사건은 묻혀 버렸으니까. 사실 그 어머니는 내 친어머니가 아니다. 아버지가 말년에 본 시앗이었지. 종놈도 첩을 둘 수 있으니 좋은 세상이 왔다고 해야겠지. 새어머니와 나는 결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지. 아버진 자기가 첩을 봤다는 사실을 자기가 양반이나 된 듯 대단히 자랑스럽게 받아들였고, 나는 그 꼴을 보고 있기 어려웠다. 분노는 새어머니에게로 향하곤 했다. 그녀는 자기를 미워하는 의붓자식을 다감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고."

"하지만..... 네가 죽게 됐을 때 어머니가 슬퍼했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는 침묵했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추궁했다.

"그 거짓말 정말이야?"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가 쏟아놓은 말의 결정들이 순식간에 밤공기 속에 녹아 사라졌다.

"아닙니다. 정말일 리가 없지요. 아가씨께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달밤의 여흥으로 꾸며 본 겁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낙엽 무더기로 다가갔다. 불씨가 다 죽어 희미한 붉은 빛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낙엽도 거의 다 타서 일을 다시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는 갈쿠리를 집어들고 남은 재를 긁어모았다.

세계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짐짓 쓸쓸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너도 미치면 편한데!"

내가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잠들 때까지 그의 대꾸라든지 다른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김없이 다음 날 아침은 왔다. 나는 어쩐지 피곤해서 느지막히 일어났다. 심가는 이미 마당을 쓸어놓고 아침도 다 지어놓았다. 내가 일어난 기척을 보이자 그는 살짝 문을 두들겨 밥상을 문앞에 가져다 놓았음을 알려주었다.

난 눈을 비비며 문밖으로 나갔다. 별로 밥맛이 없었다. 하늘은 깨져나갈 듯이 파랬다. 고추잠자리들은 매우 분주하게 날고 있었다. 짝을 짓기 위해서는 오늘밖에 없다는 듯 결연한 비행이었다. 다른 집들처럼 정미한 노적가리들을 쌓아 두지도, 빨간 고추들을 펼쳐 두지도 않은 우리 집 마당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보는 마을 청년이 쭈뼛거리며 대문간으로 다가왔다. 원래는 심상히 걸어왔지만 내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걸음걸이가 급격히 느려졌다. 어쨌든 그의 볼일은 내가 아니라 심가에게 있는 모양이었다. 둘은 잠시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몇 마디 오간 후에 심가가 고개를 젓자 그는 돌아갔다.

"뭐래?"

"오늘 마을굿이 있는데 일손이 모자라니 좀 돕지 않겠냐는군요."

"흐음."

"거절했습니다. 아가씨를 두고 갈 수 없지요."

"내가 없었다면 가고 싶다는 거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나는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말했다.

"갔다 와. 도망 안 갈테니까. 더 자야겠어."

'네. 더 주무세요. 별채에 있겠습니다."

"갔다 오라니까?"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보군요. 아닙니다. 그런 굿에는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굿? 어떤 굿인데?"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간 것은 약간의 당황, 혹은 짜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가을이니까요. 추수가 끝났으니 1년 중 마을이 가장 풍요로울 때죠. 흥겨우니 한판 노는 겁니다. 쇠, 징, 북, 장구를 치고 채상을 돌리면서 마을을 돌죠. 오늘은 좀 시끄러울 겁니다. 사람들이 흥이 나면 패가 커질 테고, 여자들이 나와서 밥을 짓고 두부를 만들겠죠. 해지도록 놀고 나면 먹고 마시고 춤추고...... 정말 시끄러울 겁니다."

"그런 거구나. 그런데 왜 관심이 없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많이 봤으니까요."

"정말? 패에 끼어서 돌아도 봤어?"

그는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모호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마주 바라봐 주었다. 빨리 대답을 하란 말이야.

"관심 있으십니까?"

"아......니. 관심 없어."

"굿에 말입니다."

"관심 없다니까? 잘 거란 말야."

하지만 곤혹스럽게도, 나는 더 이상 졸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아가씨는 도시에서 오셨으니 그런 굿을 볼 일이 없었겠군요."

"말해 두겠는데, 난 절대 보러 가고 싶지 않아."

"......"

"그렇게 노려봐도 마찬가지야."

"노려본 게 아닙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가는 분명히 머슴인데, 요즈음 아가씨 앞에서 한숨이 늘었다.

"한번 보러 가보시겠습니까?"

"우와! 언제?"

"......"

정오의 햇살은 아직 따뜻했다. 나는 모처럼 아빠가 사다준 새옷으로 갈아입고 대문을 나섰다. 이 집에 온 지 다섯 달 만에 처음이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가을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춤추듯이 갈지자로 걷고 있으니 모범적인 미친년의 모습이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던 심가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조금 천천히 걸어주세요. 제가 아가씨 모습을 놓치지 않게요."

"그건 네 사정이지."

심가는 분명히 굿을 보러 가자고 한 걸 후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자고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귓전에 꽹과리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중앙 쪽이었다. 나는 두 팔을 휘두르며 뛰어갔고 그는 허겁지겁 나를 쫓아왔다.

장관이었다. 남자들이 붉고 푸른 옷을 걸쳐입고 한판 뛰며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원진 중심에서 춤추는 상쇠의 머리 위에서 개꼬리도 춤을 추었다. 섰다 누웠다 돌았다 섰다 누웠다 돌았다...... 나는 그 움직임에 정신을 빼앗겼다. 규칙적인 타악의 리듬을 따라 이쪽으로 저쪽으로...... 북과 장구는 경쾌하게 두마치로 걸으며 발림을 자랑했다. 그렇다. 아직은 뛴다기보다 걷는다에 가까운 속도였다. 마을 사람들이 패의 꼬리 쪽에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주로 아이들이었지만 꽤 나이먹은 떠꺼머리들도 보였다. 얼굴이 뻘개 가지고 제멋대로 떠드는 그들 틈에 나도 끼어들고 싶었지만 심가가 제지했다.

"안됩니다."

그래. 내가 가면 다들 도망치거나 어색해 하겠지. 나는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섰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던 게,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었던 것이다. 내 주변에는 동그랗게 공간이 생겼지만 그 공간은 자꾸자꾸 작아졌다. 상쇠가 춤을 추며 쇳소리가 커지자 콩 볶는 듯한 장구소리가 왁다그르르 뒤를 잇고 쿵, 쿵 북소리가 울리며 생피지 자락이 푸른 하늘에 원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굿 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매해 잡색질로 뼈가 굵은 마을 노인들과 흥 많은 여인네들이 얼쑤절쑤 어깨춤을 추며 패를 따랐다. 아이들은 폴짝폴짝 뛰어 행렬보다 앞서 갔다. 내가 아이들을 따라 뛰려고 하자 심가는 어쩔 수 없이 내 팔을 잡았다.

"가지 마시라니까요."

"왜? 딴데 안 갈께."

"여하튼...... 안됩니다."

내가 원망의 눈길로 심가를 째려보는 동안 행렬은 자꾸 멀어졌다. 사람들은 우리를 스쳐지나 패를 따라 가버렸다. 나는 애원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빨리 안 갈테니까, 안 뛸테니까, 최소한 저거 따라가기라도 하면 안돼? 끝까지 보고싶단 말야."

그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흐흠. 딱 잘라 거절하지 않는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네가 잘 감시하고 있으면 되잖아? 응? 안돼? 응?"

"아, 알겠습니다. 그럼 천천히 따라가시죠."

나는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환호성을 지르며 행렬을 좇아 뛰어갔다. 심가가 혀를 차며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곧 우렁찬 마을굿 소리에 묻혔다.

서울에 있을 때 나는 피아노를 쳤었다.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악기였다. 모차르트니 쇼팽이니 우아한 작곡가들의 곡을 손가락이 비꾀이도록 치는 바람에 내 머릿속도 배배 꼬여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피아노 선생은 내게 재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에 싫증이 나버렸고, 아빠는 피아노가 치기 싫으면 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피아노를 그만둔 지 얼마되지 않아 나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5층과 7층 사이를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나도 북이나 칠 걸 그랬나 싶었다. 손등에 정맥이 도드라지도록 북채를 꽉 쥐고, 있는 힘껏 가죽을 내리치고 싶었다. 아예 농촌 처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엄마라고 태어날 때부터 유한 부인, 아니, 유한 베이비였겠는가? 밭 갈고 소 먹이며 사는 것도 재밌을지 모른다. 하지만 심가라면 나를 요렇게 쳐다보다가 '그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라고 할 것 같았다.

행렬은 마을 중앙 공터에 다다랐다. 이미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몇몇은 좌판을 벌려놓고 엿이나 생과자 같은 주전부리를 팔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한구석의 커다란 솥들이었다. 솥에 담긴 두부국에서 김이 펄펄 나고, 남정네들이 죽 둘러앉아 대낮부터 막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부인네 몇 명도 거기 붙어앉아 '부르스타'에 파전을 부치고 있었다. 악은 절정으로 접어들어, 쉴새없이 몰아치는 쇠 소리에 나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오, 돈다! 돈다!'

"돌굿이란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닌 걸 알았는지 심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나도 모르게 판 안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는 어김없이 손을 뻗어 나를 제지했다.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술 먹고 나처럼 날뛰는 부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들 몸에 익은 손짓 발짓이 자연스러웠다. 나처럼 하얗게 도시 티가 나는 계집애가 맨정신에 난장을 떠니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아니지, 맨정신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야, 거기, 심씨 집에 미친년 아이가?"

"그라네. 저거, 왜 여기까지 나와 난리고?"

수군수군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 말에 신경쓸 내가 아니다.

"재수 없다 거, 썩 꺼지라!"

막걸리로 얼굴이 불콰해진 중늙은이가 소리질렀다. 맞아맞아 하며 그 패가 모두 내 쪽을 흘겨보았다. 나도 그에 맞서 그들을 노려봐 주었다.

"아니, 저게 눈깔을 흘겨?"

그 중 한 명이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험악하게 생겼다.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북도 맞아서 소리를 낸다. 나도 두 주먹을 꽉 쥐고 눈에서 불이 나올 듯이 눈싸움을 걸었다.

"이 년이?"

그놈이 손을 막 치켜들 때 눈앞에 두 팔을 펼치고 선 등이 나타났다. 심가가 그놈과 나 사이에 끼어든 것이었다. 그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둬요. 여자를 때릴 겁니까?"

"뭐, 이 새파란 새삥이가!"

그는 내게 휘두르려던 주먹을 그대로 심가에게 휘둘렀다. 심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휙 돌아갔다.

"으아, 쌈 났다!"

두부국을 끓이던 부인네들이 몰려오고 마을 젊은이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순식간에 술 취한 불한당을 질질 끌어냈다. "아, 거 승질 좀 죽이고 살라고 안 하요?" "사고 쳤네 또!" "왜 사람을 패고 그라요!" 듣자하니 마을에서도 내논 놈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놈이 우리 집 머슴을 쳤어? 나는 팔을 걷어붙이며 그놈을 쫓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한쪽 얼굴이 벌개진 심가가 나를 잡았다.

"집에 가시죠."

"하지만 저 놈이!"

"왜요, 때려 주시게요?"

"북 치듯이 작신작신 두들겨 줘야지!"

"됐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그냥 돌아가시죠."

딱히 네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나는 지금 누구라도 두들기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원독에 찬 시선을 불한당 쪽에 던지고 심가를 따라 얌전히 발걸음을 옮겼다.

"왜 말렸어? 놔뒀으면 내가 그 놈을 그냥......"

심가는 저녁상을 차리던 손길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맞은 흔적이야 사라지고 없었지만, 어쩐지 양심에 찔려서 나는 말을 못 맺고 말았다.

"그런 놈하고 싸울 것 없지 않습니까?"

"누구하고든 싸우고 싶었단 말이야."

"왜요?"

"그게......"

나는 힘없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잘 모르겠어. 풍악을 들으니까 난폭해졌나 봐."

"풍악을 들으면 즐거워지셔야죠."

"아냐. 즐거웠어. 그런데 화도 났어. 지금까지는 죽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다들 즐거운데, 나는!"

"아아."

"뭐가 '아아'야? 난 그래서 화가 나서 누구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단 말이야!"

나는 발끈해서 고개를 들고 심가를 쏘아보았다.심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즐거운 일이 생기신 거죠. 그건 좋은 일 아닌가요?" 별것 아니라는 듯한 그 말투에 나는 심통이 났다.

"참 늙은이같이도 말하네!"

그러자 그는 놀랍게도 피식 웃는 것이었다. "제가 아가씨보다 어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호라. 이제는 아가씨 앞에서 오빠 티를 다 낸다. 하지만 나는 그 화제를 더 이어가는 대신 그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웃네?"

"네?'
 
그는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본래 날카로운 눈매지만 그런 표정을 지으니 제법...... 멍청해 보였다.

"웃었잖아. 웃는 거 처음 봐!"

"제가요?"

그는 얼떨떨하여 자기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퍽 바보스러워 보인다는 걸 알았는지 다시 피식 웃었다. 흥. 나는 그렇게 어설프게 안 웃는다. 나는 깔깔 시원스럽게 웃어젖혔다.

"또 웃었다, 또!"

"제가 그렇게 안 웃나요?"

"어. 맨날 병정 같은 표정이야. 네, 아가씨. 그러시죠. 그러지 마시죠. 음. 웃겨."

"그런 줄은 몰랐네요."

나는 대청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마을굿 소리도 이젠 그쳤다. 오랜만의 외출이었고 참으로 활기찬 하루였다.

"더 웃었으면 좋겠어. 웃으니까 보기 좋아."

심가는 다시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햅쌀밥에 오이소박이, 그리고 마을굿 잔치에서 나오던 것과 같은 두부국과 파전이었다. 짧은 침묵이 있은 후 그가 상을 내 앞으로 밀어 주면서 말했다.

"아가씨는 꼭 나으실 겁니다."

"글쎄."

"그리고 나으신 후에도 그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 말야?"

"솔직한 거요."

"아? 하하하하하......"

나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도 소리 내어 웃었다. 나의 웃음은 점점 커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깔깔 시원한 웃음에서 숨이 넘어갈 듯한 꺽꺽대는 웃음으로 변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너무 웃어서 가슴이 다 아팠다. 날카로운 내 웃음소리가 파고들어 가슴속과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그래. 웃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솔직하다는 건, '솔직히' 좀 웃기는 얘기다. 머리도 가슴도 깨질 듯 아팠다. 왜 아빠는 오늘도 안 오는 걸까? 어느 때보다도 나는 잘 미쳐 있다. 내 웃음소리가 끝없이 울리며 내 의식을 뒤흔들었다.

"괜찮으세요?"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들여다본다. 이번에는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괜찮아. 그런데 넌 누구야?"

그의 표정이 굳었다.

"여긴 어디야? 왜 내가 여기 있어?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머리가 아파. 가슴도...... 아빠를 불러 줘. 나는......"

조금 전까지 웃음으로 넘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슬픔과 눈물로 바뀌었다. "아빠를 불러 줘, 괜찮지 않아. 아파......"

그리고 어떻게 되었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방에 누워 있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나는 아빠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빠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너무 추웠다. 내가 덜덜 떨고 있는데도 아빠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그는 아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빠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질책하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들리지를 않았다. 나는 없는 힘을 온통 쥐어짜 귀를 기울였다. 아빠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했다.

"...... 왜 이렇게까지 ...... 계약 기간이 끝나 ...... 열흘 후 ...... 그때까지는 ......"

갑자기 그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은 책임지고 아가씨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추위가 점점 심해졌다. 열이 끓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떨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무거운 어둠이 나를 감쌌다. 어둠 속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보았다. 둘 다 분노와 광기에 차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너는, 너는 내 딸이 아니야!

다시 눈을 뜨니 아빠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방에 혼자였다. 더 이상 춥거나 아프지는 않았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싫었다. 나는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대낮이었다. 심가가 혼이 나간 듯 별채 앞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가! 어떻게 됐어?"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대꾸했다. "뭐가 말입니까?"

"그러니까..... 기억이 안 나는데. 그동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안 나."

그는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와서는 딱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가씨가 편찮으신 것 같아서 아버님께 연락했었습니다. 아버님은 바로 오셨지만, 서울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아가씨를 잘 못 모신 것 같아서...... 기간은 아직 좀더 남았지만, 열흘 후에 아가씨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병원? 병원이 소용이 있을까."

"있겠지요."

"말투가 딱딱하네?"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방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힘이 없어서 일어나려다 이부자리에 다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누구라도 날 잘 모시진 못했을 거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꿈에서 엄마 얼굴을 봤어. 나는 엄마가 누군지 몰라. 두 명 중 누군지를 몰라. 제정신이 아냐, 두 사람 다. 누구의 딸이든 난 미칠 수밖에 없었어."

그는 별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개인적인 일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한 듯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어차피 열흘 후에는 헤어질 테니 무슨 이야기든 해도 괜찮겠지. 하지만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물건을 집어던지던 게 생각났다. "내 딸이 아냐, 내 딸이 아니라고!" 나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내 엄마일 확률은 반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확률보다는 그녀가 나를 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아빠는 엄마를 끌어안아 진정시키려고 한다. 엄마는 울면서 아빠에게 매달린다. 머릿속에 모차르트의 소나타가 울린다. 부드러운 선율이다. 나는 피아노 소나타의 발전부보다 격렬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는 아빠의 과잉 보호 속에 자라났다. TV드라마를 보며 나는 늘 꿈꾸었다. 두고 온 엄마, 어디에도 없는 엄마, 모차르트의 소나타 같은 아름다운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는 엄마를...... 내가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심가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별채로 들어가 버렸다. 대답이 없을 줄 알면서도 나는 물었다.

"아빠의 피치 못할 사정이란 엄마야? 엄마가 또 발작한 거야? 그런 거야?"

가을날 푸른 하늘에 무정한 햇살만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고추잠자리들이 부산하게 날아다녔다.

맥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일주일이 꼭 일 년 같았다. 심가가 해주는 아침을 먹고 낮잠을 자고, 역시 심가가 해주는 저녁을 먹고 저녁 내내 방안에 앉아서 하염없이 문밖을 바라보았다.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갈 힘이 없었다. 바깥에는 밝은 햇살도 있고 힘찬 북 소리도 있을 테지만 내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아빠는 열흘을 말했다. 열흘 중 7일이 지나갔으니 이제 사흘 후면 아빠가 나를 서울의 정신병원에 데려갈 것이었다. 난 내가 주변 사람들의 성의없는 도움을 받으며 늙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흰 벽 속에 갇혀서 '뭐가 기억납니까?' '아니요.' 같은 문답을 반복하며 시들어 가게 될 것이었다.

그게 싫은가?

싫었다. 하지만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운명이라니? 너무나 거창한 단어다. 미친 엄마-엄마들-의 딸로 태어나 미친 채 살아가야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인가? 나는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젠 그 사실이 심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일주일 전에 비해 너무 말라서 뼈가 다 드러나 있었다. 방에 거울이 없어 얼굴을 보진 못하지만 안색도 말이 아닐 게 분명했다. 사실 나는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망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는 내 인생의 무엇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열흘이라니, 누구 맘대로 열흘이란 말인가? 아빠가 엄마를 달래는 데 필요한 기간? 열흘이라고? 이제 사흘인가? 왜 3년이고 30년이고 이 아늑한 방에 나 혼자 뒹굴게 두지 못한 말인가? 아무것도 남길 생각이 없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은 생각도 없는 나를? 때때로 혼란스러운 기억에 고통스러울 때면 울거나 비명을 지르겠지. 왜 그렇게 살다 죽도록 내버려 두지 못한단 말인가?

죽더라도 왜 혼자 죽도록 내버려 두지 못한단 말인가? 눈물이 건조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금세 말라 버렸다. 스스로를 연민하지는 말자. 이제 있는 힘껏 북채를 내리칠 때이다. 나는 살금살금 문간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심가는 뒤란에서 장이라도 뜨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한쪽 발을 바깥으로 내딛었다. 맨발에 와닿는 흙의 감촉이 짜릿했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의 나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지르며 뛰쳐나갔다가 심가에게 질질 끌려왔으리라. 하!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할 것 같으냐! 나는 입술을 모아 뾰족하게 만든 후 소리없이 소곤거렸다. '말했지. 누구라도 나를 잘 모실 수는 없었을 거라고.'

나는 마치 지렁이처럼 움직였다. 한 손을 앞으로 쭈욱 뻗어 반대쪽 다리를 잡아당기며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천천히. 소리 없이. 어느 새 삽작문 바깥에 이르렀다. 뻣뻣한 목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심가가 나타날 것 같았다. 몇 발자국을 더 움직여 담장에 몸을 숨겼다. 몇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숨이 찼다. 살갗에 와닿는 바람은 차갑고, 이마에 떨어지는 햇빛은 뜨거웠다.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참으며,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새벽녘 산길을 달려갔다.

아빠, 이제 안녕. 이젠 잊을래. 아빠가 엄마들을 잊어버린 것처럼 나도 아빠를 잊을래. 나는 아빠의 눈물에 보답할 수 없어. 나는 그 눈물을 믿을 수가 없어. 아빠가 누군지 알면 믿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내 인생은 지금까지도 너무 길었어.

나는 산길이나 강가를 헤매다가 그냥 엎어질 생각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내가 인식도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바보스럽게도 조금씩 다리가 무거워졌다. 다리를 질질 끌며 산기슭을 헤매다가 배가 고파지자 나는 나도 모르게 젖은 풀들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꽃 하나를 따서 물었다. 달다기보다는 시큼한 꿀 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그 맛에 집중하며 발을 주물렀다. 맨땅을 밟고 몇 시간이나 달려온 탓에 발은 걸레가 다 되어 있었다. 갑자기 만사 우스워졌다. 스스로를 아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동시에 절대 다시 못 일어날 것 같았다. 두 다리를 뻗고 잠시 쉬었다.

심가가 나를 찾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를 발견한다 해도 업고 가지 않는 한 어떻게 못할 것이다. 나는 천천히 등을 기울여 소나무 둥치에 몸을 기댔다.

"나는 민폐 아가씨야."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안 그러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는데? 다르게는 어떻게 하는데?"

머릿속이 흐려지며 기억들도 다시 희미해져 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어떤 기반 같은 것이 없다.

"거기 뉘쇼?"

갑자기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뱀이 머리를 들듯 발딱 일어서며 도망갈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가 기대고 있던 소나무 뒤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다. 내가 뛰려고 하자 그는 내 팔을 덥석 잡았다.

"처잔 뭐여?"

그는 나만큼이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거무스름하게 탄 전형적인 시골 아저씨 얼굴 위에 파란색 삼각 모자가 얹혀 있었다.

"아저씬 뭐야?"

나의 앙칼진 목소리에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순경이여." 그리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는데, '이 미친년은 뭐야?' 라는 말이 육성으로 들리는 듯했다. 내 몰골이 어떤가 하면, 나뭇가지에 걸리고 찢어져 흰 잠옷은 누더기이고 머리카락은 있는 대로 헝클어졌으며 몸 곳곳에 빨갛게 핏물이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훌륭한 미친년의 눈빛인 것이다. 순경 아저씨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가야것네. 좀 갑시다."

"내가 누군지 안 물어봐요?"

"아니 그래, 대체 뉘여?"

"알 게 뭐야?"

순경 아저씨는 입을 딱 벌렸다. 이후 내 손목을 붙잡고 서까지 끌고 가는 동안,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가출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말이 '서'지 읍단위 마을의 조그만 파출소에 도착하여 파출소장 맞은편 의자에 앉혀질 때까지 나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파출소장은 두 손을 깍지껴 머리를 받친 채 재미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강자의 시선이었다.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듯했고, 말씨가 매우 또렷했다.

"그래, 아가씬 어디 뭐 하는 처자인겨?"

"......"

"대답 안 할랑가?"

나를 끌고 온 순경 아저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파출소장에게 말했다.

"뉜지 빤한 거 아잉교? 생각해 보니께니 요새 외지 사람 들어온 집은 하나 밖에 없다 이기 아뇨."

"아니, 확실히 해 둬야지."

"그 집 처자," 순경 아저씨는 머리 옆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 보였다. "이래 됐단 말은 내 들었소."

"흐흠."

"어케 하오?"

"어짜긴 어짜요? 집에 전화해서 데려 가라 캐야지."

"저 처자가 집주소를 알 거 같지 않소."

"이 동네에 사는 집이 있을 거 아니오."

"그 집에는 머슴 하나 사오."

이렇게 해서 순경 아저씨가 심가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나는 멍청하게 벽을 노려보고 앉아 있게 되었고. 나에 대한 처리방법이 결정되자 파출소장은 내게 관심을 끊었다. 나는 집에서 하던 것처럼 이런저런 물건들을 노려보면서 시간을 보냈고, 호시탐탐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순경 아저씨가 문간에 버티고 앉아서 구두를 닦고 있는 바람에 별수가 없었다.

파출소는 낡은 건물이었지만 안쪽 벽은 깨끗하게 회칠이 되어 있었다. 제법 넓기도 했다. 한쪽에 전단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전단지를 집어들어 살펴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현상수배 전단지였다. 막 인쇄되었는지 빳빳했다. 나는 별 흥미없이 흉악범들의 몽타주와 신상명세를 읽어내려갔다. 그러다가 숨이 막힐 만큼 놀랐다. 내가 꺽 하고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몇 번이나 거듭해서 읽어 보았으나 틀림없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잘못 볼 리 없는 심가의 얼굴이 전단지 위에 프린트되어 있었다.

죄명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전단지를 구겨 쥔 내 손이 떨리는 것을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지난 며칠간 마치 멈춘 것처럼 느리게 가던 시간이 그 순간부터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파출소 문을 밀며 심가가 들어왔다. 전화로 서울 집 전화번호만 가르쳐 줘도 될 텐데 굳이 직접 왔다. 나는 그를 보지 않으려 했으나 그는 똑바로 내게 다가왔다.

"꼴이 이게 뭡니......"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파출소장이 그와 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오, 자네가 이 집 머슴인가?"

"네. 그렇습니다. 제가 신경을 못 쓰는 사이에 가출을 하셔서."

"쯧쯧. 잘 보고 있어야지. 성치 않은 듯한데."

"죄송합니다."

"아녀, 나한테 사과할 거 없지. 어여 저 처자 집 번호 불러 봐."

심가와 파출소장은 나란히 맞은편 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 전화기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가는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저 다이얼 너머에 아빠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파출소장이 물었다.

"어쩌기로 했는가?"

"아가씨 아버님께서 데리러 오신답니다. 그런데 당장은 안 되고......"

"그렇겠지."

"내일 새벽에 오신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여? 파출소에 데리고 있는 게 낫겠지?"

"네.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군요."

"음. 알았어. 숙직이 있으닝께."

파출소장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의 눈빛이 일순간 반짝 빛났다.

"그런데 자네는 어디 출신인 것이여? 아따, 그거참 서울말이 똑부러지는구만."

심가는 그 질문을 슬쩍 회피했다. 내 눈에는 회피하는 것으로 보였다. 파출소장의 미심쩍은 얼굴을 뒤로하고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별 표정 없는 얼굴과 정중한 말투로 그가 내게 말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님께서 내일 새벽에 오셔서 아가씨를 서울로 데려가실 겁니다. 돌아가서 기다리기엔 시간도 애매하니 여기서 밤을 보내시지요.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벌린 입술 사이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10여 초 간 노력한 끝에 나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안 돼..." 그의 대답은 너무 빨랐다. "안 된다고요?" 젠장, 파출소장하고 순경이 듣는단 말야. 그 사람들은 대충이라도 그 전단지를 봤을 거란 말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내 손 아래에서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그의 팔 근육이 느껴졌다. 나는 그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영문을 모르고 무릎을 꿇어 의자에 앉은 나와 눈높이를 맞추게 되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소곤거렸다.

"널 의심하잖아."

전단지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쯤 알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여기서 심가를 내보내야 했다. 머릿속에, 온 몸에, 혼란이 휘몰아쳤다. 나는 범죄자를 옹호하고 싶지 않다.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항상 그랬듯 다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현실감각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망치로 계속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이렇게 강렬한 감각이었나? 그의 팔을 잡고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깨달았다.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무수히 파헤쳐지고 어설프게 덮인 기억들의 진실과 한때 내가 꿈꾸었던 돌파구, 신경질적이거나 무기력한 두 엄마의 얼굴과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는 아빠의 무감각한 얼굴. 그들이 지어 준 내 이름.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나는 입모양에 주의하며 소곤거리기를 계속했다.

"가. 빨리. 도망쳐. 멀리. 돌아오지 말고."

참으로 힘든 일이었으나 나는 천천히 그를 놓아주었다. "지금 당장."

그는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쳐다보면 사람들이 의심할지도 모른다. 긴지 짧은지도 알 수 없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러면 가 보겠습니다."

나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미친년의 자세를 취하기 위해 고개를 더 옆으로 비틀었다.

"가겠습니다."

그래. 빨리 가. 인사는 집어치워.

"간다구요."

길게 끄는 듯한 문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갔다. 신발과 옷은 파출소에서 빌렸다. 순경 아저씨가 초롱불을 들고 앞장섰다. 내가 꼭 집에 가 있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자, 그는 좀 투덜거린 후에 길잡이를 맡아주었다. 파출소라고 해 봤자 순경 몇 명 없는데, 숙직 서며 미친년 하나까지 건사하느니 그냥 집에 데려다 놓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꽤 제정신인 것처럼 똑바르게 말하기 시작한 탓도 있었다. 순경 아저씨는 집에 심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는 도망쳤을 테니 집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혼자 있고 싶었다. 문을 잠그고 불도 꺼놓고 새로 만난 나의 사랑과 고독에 푹 빠져 있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산길의 어둠이 진흙처럼 몸속에 스며들어 수분을 강탈하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옷을 찢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덤덤한 얼굴로 순경 아저씨를 따라 걸어갔다. 어리광은 충분히 부렸다. 아빠에게도. 심가에게도. 머리 한쪽이 간헐적으로 바늘에 찔리는 듯 아파왔지만 전반적으로 정신은 맑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오늘 밤만은......

하도 기가 막혀서 눈물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순경 아저씨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다. "그놈 야물어 보였는디. 머슴일 할 거 같지 않았는데." 혼잣말이었다. 나는 그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에 대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순경 아저씨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이런 상처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바람이 많이 부는 밤이었다. 높이 자란 풀들이 흔들리며 공허한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달도 흔들리고 있었다. 순경 아저씨만 태평했다.

"오. 어떻게 알고. 저짝에 마중 나오는디."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아서 더 이상 뭘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반갑게도, 길 맞은편에서 다른 초롱이 다가오고 있었다. 참으로 거리낌없이 쓱쓱 가까워지고 있었다. 높이 든 초롱 불빛에 얼굴도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미친 놈이, 죽으려고.

순경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여까지만 데려다 줘도 되겠지라?"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미친년이 얌전해지는 마법의 밤이었다.

나와 심가는 침묵 속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되밟아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전단지의 문구를 떠올렸다. '중키에 마른 체격, 가무잡잡한 얼굴에......' 얼른 고개를 흔들어 기억을 흩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토록 쉬웠던 망각이 도통 찾아오지 않았다.

재잘재잘 떠드는 건 항상 내 역할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뭐라도 말을 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뒤통수에는 입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을.

"왜 도망 안 갔어?"

내 목소리는 내 생각보다 훨씬 작고 갈라져서 나왔다.

"아직 이틀 남았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봤어. 며칠 안에 전단지가 붙어. 그럼 위험해!"

"......"

"왜 대답 안 해? 무시하는 거야? 내가 미쳤다고......"

"아니요, 무시하지 않았어요."

그는 무서우리만치 적요한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초롱을 대청에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빛이 자그마한 공간을 이루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어둠 속에 있었다. 두 눈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들어가시죠."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구도다. 나는 방 안에서 탈출을 꿈꾸고, 그는 바깥에서 갈 곳 없이 머물러 있다.

"내일...... 내일 아빠가 오기 전에는 갈 거지?"

"네. 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 어떻게 거, 걱정을 안 해. 걱정을 시켜놓고......"

"아가씨가 파출소를 안 가셨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뻔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좀더, 좀더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하지 않아? 방도를 강구해야 하지 않아? 응? 내 말이 틀려?"

늘 차갑던 그의 눈빛이 조금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잘못 본 것일까?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폐부를 다 뽑아 내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아냐.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너도 나도 세상에 다시 없는 바보들이야. 이래서는 안 돼. 좀더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열어 보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미로 속에서 이쪽으로 뛰고 저쪽으로 뛰면서 스스로를 감당하는 것도 힘들어 했지. 조금 정신이 들자마자 곧바로 상대방의 진심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일이다. 곧 영영 헤어져야 하는 경우에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도 된다. 상대방이 오랫동안 불안정한 나를 돌봐주고 다독여준 사람인 경우 심지어 파렴치한 일이기까지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가씨는 미치지 않았어요. 쭉 지켜본 결과 그렇습니다. 조금...... 힘든 일을 겪었을 뿐이에요."

"위로해 줄 필요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단해.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지? 나는, 나는 이제까지 살아 있었던 것을 후회해."

"그런 말씀 마세요. 살아 있어야 해요. 저절로 죽어질 때까지 살아도 삶은 길지 않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약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긴 제가 할 말은 아니군요. 살고는 싶습니다만, 누군가가 살지 말라고 한다면 그 말에 반박할 자격은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할 거야?"

"네?"

"곧 가야 하잖아. 어떻게 할 거야? 살아야지. 정말. 살아야 돼."

그는 미소 지었다. 내가 그에게 더 웃으라고 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얼굴선이 조금 부드럽게 변하면서 따뜻한 표정이 된다. 그 순간 그는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정하게 말하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아가씨 아버님이 주신 새경도 있지않습니까? 전 잡혀 죽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아. 습관이란.

"그런데 아직 잔금 못 받았잖아."

그는 쿡쿡 웃었다. "그건 얼마 안 됩니다."

"아. 다행이네."

좀 멍청한 대답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 멍청함을 수습하기 전에 그가 질문해 왔다.

"아가씨는 어쩌실 거죠? 서울 가서 입원하실 건가요?"

"모르겠어. 병원에는 안 가고 싶어. 엄마도 아빠도 필요 없어. 혼자 살고 싶어. 어떻게 혼자 살지?"

"혼자는 위험합니다."

"하지만 엄마나, 두 엄마 어느 쪽이든지 말이야, 아빠랑 같이 있으면 답답해. 아빠는 정말 사랑하지만, 그래도 역시 답답해. 미칠 것 같아."

'미칠 것 같아'라고 내뱉는 순간, 오래 된 광증이 다시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군. 이렇게 해서 나는 미친 것이다. 수많은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내가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의 억척스런 딸. 하지만 친딸이 아냐. 돈 때문에 배신한 남편이 낳아온 더러운 씨에 불과하지. 유한 부인의 귀한 외동딸. 하지만 친딸이 아냐. 남편이 천하고 가난한 여자에게서 낳아 데려온 혹덩어리에 불과하지. 재주 많고 똑똑한, 아빠의 사랑스러운 딸. 하지만 이젠 지쳤어. 왜냐하면 아빠는 미쳐 버린 두 아내로 충분해. 두 여자 모두 사랑하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딸이 아니야. 이젠 정신병원에 넣어야겠어.

나는 두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눈 속의 달도 데구르르 굴렀다. 이제 알았다. 나는 나약하다. 내겐 진실을 감당할 힘이 없다. 대청에 놓인 초롱의 소담한 불빛이 내 눈 속으로 크게 달려들었다. 가야 돼. 빛 속으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을 후회해. 아빠, 아빠. 정말 미안해.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방문을 벌컥 열려 했으나 방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아아. 순간 가슴 속이 환희로 가득 찼다. 탈출이다, 이제야!

하지만 심가가 나를 막았다. 늘 그렇듯이 방문 앞을 가로막고. 슬픈 눈으로. 그가 막을 때면 나는 항상 탈출을 보류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막무가내로 뛰쳐나갔다. 아니 뛰어들었다. 앞을 막아선 그에게 내가 닿는 순간 두 팔이 채찍처럼 내게 감겨들었다. 나를 가슴 속으로 집어넣거나 아니면 으스러뜨려 죽이려는 것처럼 격렬한 포옹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며 파고들었다. 그 안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나와의 합일을 열망하는 포옹 속에서 지금껏 몰랐던 온도와 압력을 느끼며, 몸 속에 오래도록 고여 있었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저녁 8시쯤 된 시간이었다. 낮시간은 매일 달라도 저녁 시간은 항상 비슷하다. 창문을 활짝 열자 가을날의 서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도심의 22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늘 그렇듯 화려했다. 거리의 네온 불빛들이 이미 번쩍번쩍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일부는 교회이고 일부는 모텔들이다. 21세기의 서울은 참으로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도시가 되었다. 나는 이 도시를 좋아한다.

블라우스를 벗고 브래지어마저 벗자 토플리스가 되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저녁 바람을 쐬는 것은 가을에만 가능한 호사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을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답답한 것을 싫어하고 바깥 공기를 좋아하는 것은 옛날 병의 흔적 같은 것인데, 어쩌면 병이 나기 전에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거기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활동적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직업을 택했다. 오늘도 건물에서 건물로 신나게 돌아다니며 상가의 연면적을 재고 가격을 매기며 두 발이 부르트도록 일한 참이다. 대도시 서울의 단물을 듬뿍 빨고 돌아왔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내 바지 정장도 벗고 은제 귀고리도 빼어버리고, 나체 상태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음. 뭐랄까. 미묘한 모양새야. 나야 예쁘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묘해. 하지만 뭐 어때. 볼 사람도 없는데.

나는 몇 가지 코드로 표현되는 전형적인 인간이다. 자기 밥벌이는 충분히 하는 독신 여성이고 앞으로도 결혼 생각은 없다. 성격이 어떤가 하면 부드럽고 여성적이기보다는 어그레시브하고 천방지축인 편이다. 누군가가 부모님은 뭐하세요? 하고 물으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다들 일찍 돌아가셔서요......'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그러면 더 묻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세련된 옷가지와 액세서리를 좋아하며, 상당한 수준의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통굿도 좋아하죠.' 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외네요' 하며 재미있어 한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창문을 계속 열어놓아 방안 공기는 바깥이나 다름없이 서늘했다. 어두운 방안에서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며 잠을 청할 때면 항상 생각이 난다. 그가 생각난다. 굉장히 오랫동안, 나는 국내외의 형사사건 뉴스를 한 건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일은 그만두었다.

아주 정확히는 아니지만, 그의 얼굴은 꽤 또렷하게 기억난다. 낮고 뚜렷하고 분명하던 그의 목소리도. '나가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그건 안 됩니다' 라고 주로 부정의 뜻을 말하던 강경한 태도도.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러면 다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해서 자다가도 일어났고 뭘 하다가도 뛰쳐나갔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특성들은 하나씩 분리되며 어쩔 수 없이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지나치게 또렷한 기억들이 주는 괴로움도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어떤 모종의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만나지 않아도 좋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기고 싶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가득한 불빛들을 하나씩 꺼뜨렸다. 화려한 도시의 등불들이 꺼지고 밤하늘의 달과 별들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캄캄한 시골 마을의 어둠 속에 구식 초롱의 다정한 불빛만이 남았다. 내가 천천히 잠 속으로 빠져들 때 그 불빛도 끝내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누군가의 눈빛만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만이 남아 어두운 불꽃처럼 타올랐다. 나는 무의식중에 돌아 누우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두 팔의 온기와 말로 다하지 못한 사랑이 부드럽게 나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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