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카페 플루이드

2022.10.27 19:2110.27

카페 플루이드




 

지원이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 딸이었다. 오후 세 시,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난 그의 인식표에는 분명하게 ‘여아’라고 적혀있었으며, 간호사가 기저귀를 채울 때까지만 해도 그 믿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간호사는 사색이 되었다. 지원의 기저귀 속에 없던 고추가 생겼다. 간호사는 허겁지겁 인식표를 확인했지만, 인식표가 끊어진 흔적은 없었다. 작은 시골 병원 신생아실이라 뒤바뀔 다른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CCTV도 확인했지만, 그 누구도 신생아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수련을 마친 지 1년도 되지 않은 초짜 간호사는 어쩔 줄 모르고 아이를 엄마에게 안겨주었으나, 지원의 엄마는 지원이 ‘바꿔치기’ 되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 경악스러웠던 건 오후였다. 이번에는 기저귀 속에 고추가 없었다. 간호사는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간호사는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무슨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 내내 침묵했다. 애초에 지금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을 파악한 것도 아니었다.

지원이 태어난 지 셋째 날이 되도록 간호사의 마음은 타들어 갔고, 부모가 지원을 안고 있을 때마다 전전긍긍했다. 셋째 날 오후, 지원의 엄마는 퇴원했고 지원은 처음으로 집에 왔다.

 

집에 온 지원은 아빠의 품에서 한가로이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지원의 부모도 간호사와 똑같은 일을 겪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없던 고추가 일어나니 생겨나 있었다. 지원의 부모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혼비백산했다. 병원에 전화를 해야 하나? 뭐라고 설명하지? 바꿔치기라도 된건가? 그 사이 누가 왔다 갔나? 아빠가 울기 시작하자 엄마도 울었다. 그 소리에 지원도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얼굴은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 난 방향마저도 똑같은데. 엄마의 코와 아빠의 입을 똑 닮아있는데도. 아기의 성별이 달랐다. 믿기지 않아 한 시간에 한 번씩은 지원의 기저귀 속을 확인하던 엄마는 오후 세 시 육분, 지원의 고추가 다시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안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두 사람은 종일 지원의 사타구니를 바라보기로 했다. 엄마는 체력이 떨어져 졸리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지원의 사타구니를 교대로 관찰하기로 했다. 오전 세 시, 지원의 엄마가 사타구니를 관찰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엄마는 소리를 질렀고 아빠도 지원도 깨어나 버렸다.

“다시 생겼어!”

두 사람은 사흘 밤낮 동안 지원의 사타구니를 관찰했다. 그 눈물겨운 노력 끝에 지원의 몸이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인지 약간은 밝혀졌다. 태어난 시간인 오후 세 시 정각에는 여자가 되고, 다시 열두시간이 지나서 오전 세 시가 되면 남자가 된다. 물론 신생아인 이상 생식기가 변하는 외의 차이가 없어 거창하게 성별이 바뀐다고 말해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부모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 패턴이 어릴 때만 이러다가 사춘기에는 멎는지, 성년이 되면 멎는지, 대체 언제까지 이 모양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간과 관련된 물음 외에도 여러 의문점이 남아있었지만, 체력이 모두 바닥난 부모는 스물네시간동안의 사이클만이라도 이해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원의 부모는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쓰다가, 뭔가가 어긋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민등록을 남자로 해야 하는지 여자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작성하던 서류를 들고 집에 돌아갔고, 다음날까지 틈틈이 회의했다. 고민한 결과, 남자 이름인지 여자 이름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도록 지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태어날 당시의 원래 성별’인 여자로 주민등록을 했다.

 

지원의 부모는 지원을 어떻게 길러야 할지 몰랐다. 나중에야 ‘성중립 육아’ 같은 단어도 생기지만 지원이 태어난 90년대 초반만 해도 그런 말은 있을 수 없었다. 지원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던 부모는 3시를 기준으로 딸과 아들이라는 호칭을 번갈아 사용했다. 지원에게 무슨 색 옷을 입힐지 몰라 고민하다 결국 하얀색과 검은색 옷으로 그의 서랍을 채워 넣었다. 텔레비전에서 무엇을 틀어줘야 할지도 몰랐다. 공주가 나오는 채널을 틀어줘야 하는지, 로봇이 나오는 채널을 틀어줘야 하는지, 이것도 세 시를 기준으로 바꿔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돌이 갓 지난 아기는 그런 게 아니라 점토로 만들어진 펭귄이 나오는 스톱모션 만화 정도면 족했다.

그리고 나서는 지원의 머리 길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자 모습일 때 머리를 짧게 잘랐더니 여자 모습일 때도 머리가 짧아져 있었다. “머리 짧은 여자는 괜찮아도 머리가 긴 남자는 보기 싫지 않아?”라는 아빠의 의견에 따라 지원의 머리는 짧기로 결정되었다. 같은 이유로 지원에게는 치마를 입히지 않았고 다행히도 지원이 치마를 입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지원은 무럭무럭 자라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지원이 남자 줄에 가서 서야 하는지 여자 줄에 가서 서야 하는지 고민하자, 부모는 여자 줄에 가서 서면 된다고 말했다. 법적인 성별에 맞춰 유치원에 여자로 등록되었기에 모두가 그를 여자로 대했다. 여자인 친구들을 사귀고, 여자아이들의 집에 가서 놀고, 여자아이들과 같이 목욕을 하곤 했다. 하원 후 목욕할 시간 정도가 되면 지원은 여자 모습이었기에 딱히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지원의 부모는 지원에게 고추가 생겨나도 없는 척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고, 지원은 그 말을 잘 따랐다. 지원은 친구들과 오줌싸는 자세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다른 아이들은 이렇게 고추가 생겼다 없어지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지원은 그날 엄마에게 물었다. 

“나는 왜 고추가 자꾸 없어져?”

지원의 부모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걱정을 하고 뭐라 변명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바쁜 세월을 보내왔기에, 지원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지원의 엄마는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듯 평온하게 말했다.

“응, 세 시가 되면 부끄러워서 숨는 거야. 그런데 친구들한테는 말하지 마.”

지원은 다행히도 그 대답에 만족했고, 비밀은 새어 나가지 않았다.

 

지원의 부모는 종교를 믿지 않았다. 그 흔한 혈액형 성격론, 별자리 점 따위의 미신도 믿지 않았다. 굿과 부적은 상술에 불과하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귀신과 외계인은 착시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갈 나이를 앞두고부터는 지원의 집에 온갖 성물이 늘고 있었다. 예수가 있는 십자가, 없는 십자가, 불상, 부적, 성서, 꾸란, 불경에 가네샤 조각상까지. 지원은 툭하면 점집에 불려갔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무서운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원의 상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이해하거나 믿지도 못했다. 지원은 부모가 자신을 붙잡고 하는 기도를 들으며 자신이 잘못된 존재라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기나긴 영적 여행이 지원에게 남긴 것은 상처뿐이었다.

 

*

 

지원이 첫 등교에 메고 간 책가방은 칙칙한 회색이었다. 분홍색과 파란색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부모에게 지원이 들이민 색이었다. 회색 가방을 들고 신나게 등교한 지원은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아이와 짝이 되었다.

“너는 팔이 왜 그래?”

아이들은 몰려와서 물었다. 아이들은 결국 그에게 미라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미라’는 속도 없이 웃기만 했다.

지원의 첫 하굣길,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데리러 왔지만, 지원과 집이 같은 방향인 몇몇은 떼를 지어 떠들며 걸어갔다.

“저거 봐 휠체어야.”

아이들은 꺄르르 웃으며 휠체어라는 단어를 이상하게 불러댔다. 지원은 회색 가방의 회색 가방끈을 꾹 쥐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는 회색을 좋아해?”

파란색과 분홍색 가방을 멘 아이들이 느닷없이 지원에게 물었다.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너는 남자야 여자야?”

지원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한 아이가 자기는 이쪽으로 가야 한다며 무리를 이탈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지원의 대답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듯 저녁에 보는 만화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원이 대답하지 못했던 질문은 저녁 내내 지원을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지원은 학교에서 남자 모습일 때 팔뚝에 묻은, 세 시가 지났는데도 아직 지워지지 않은 사인펜 자국을 지우며 내내 고민했다. 지원 자신은 자기 몸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대단한 차이를 느끼지도 못했으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지원의 성별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자국이 다 지워질 동안 답이 나지 않자, 결국 지원은 엄마에게 물었다.

“여자라고 해.”

엄마가 밥을 카레에 비벼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반쯤 거짓이라는 사실을 지원도, 엄마도, 출장 간 아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해지려면 어쩔 수 없었다. 팔에 붕대를 감아도, 휠체어를 타도 놀림과 꼬리표가 붙는 것을 지원은 보았다.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몸은 이상한 것이며, 그걸 평생 숨겨야만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지원은 그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남자 모습의 지원의 키가 조금씩 자라나는 동안 여자 모습 지원의 키는 훌쩍 자라났다. 그 키가 가장 큰 차이를 보였던 건 지원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였다.

“여자애들이 키가 빨리 자라기 시작한다며.”

아빠는 아침밥을 먹으며 말했다. 성장판이 열리는 시간에 여자 모습이라 그래. 어쩌고저쩌고. 지원의 아빠는 아무도 검증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이론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지원은 등교하자마자 칠판에 적혀있는 낙서를 지웠다. 지원과 대화를 나눴던 남자아이의 이름 옆에 하트, 그리고 지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이들은 체육 시간에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서로를 엮어댔고, 다른 아이들에 의해 엮였다. 흔한 낙서였다. 낙서를 지우는 지원의 표정도 별것 아니라는 듯 평온했다.

하지만 지원의 속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감기에 걸린 듯 거칠어진 목소리 때문에, 조금은 선이 뚜렷해진 얼굴 때문에 목소리도 얼굴도 조금 남자 같지 않냐는 말을 한 번씩 듣게 되었다. 

“지원이 여자 맞아. 우리 유치원 때 같이 목욕도 했었어. 그지 지원아?”

그의 유치원 시절부터 친구의 증언 덕에, 그는 여전히 여자였다. 지원은 아이들이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느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날 일찍 하교한 지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원의 부모는 아이를 남자로 등록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남자로 있는데, 서류상으로는 여자가 되어있으니 지원이 혼란스러울 것만 같았다. 게다가 턱과 이마 선이 어딘가 남자 같다고 엄마는 생각했다. 이 차이가 두드러지게 된다면 지원을 여자아이로 키우려는 전략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원의 부모는 불안했지만, 토로하거나 상담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엄마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세 시 알람을 듣고는, 훌쩍 키가 커진 지원에게 말했다.

“딸, 머리를 기르자.”

지원이 24시간 내내 딸이 된 순간이었다. 부모는 지원에게 집착적으로 분홍색 옷을 입혔다. 하지만 혹여나 치마가 들춰졌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바지만 입힐 수밖에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틀어놓고 여자아이들과 놀도록 유도했지만, 지원이 처음으로 집에 데려온 친구는 남자아이였고, 지원이 생일선물로 원했던 것은 로봇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겨울방학, 지원의 몸이 밤낮으로 정신없이 변했다. 털이 났다가, 갑자기 그 털이 얇아졌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굵어졌다. 남자 모습의 키는 꾸준히 자라 여자 모습 지원의 키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까지 자랐다. 밤에는 가슴이 간지러웠고 낮에는 괜찮았다. 간지럼이 멈출 때쯤 지원의 가슴은 다행히도 많이 나오지 않았고, 브라를 차지 않으면 그렇게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지원과 그 부모는 모두 안심했다.

한편 지원에게는 변성기가 제대로 왔다. 세 시를 기점으로 바뀌는 목소리 높낮이는 더 이상 감기에 걸려서, 목이 잠겨서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남자치고도 너무 낮은 목소리라서, 오후 세 시가 되었을 때 목소리가 높아지면 지원 자신이 항상 깜짝 놀랐다. 결국 지원은 자연히 말이 없어졌다.

두 지원의 머리카락 자라는 속도가 서로 달라 낮 세 시가 되면 머리카락이 미묘하게 길어졌다. 여자 모습일 때 다듬은 손톱은 남자 모습일 때도 여전히 단정했다. 몸이 바뀌어도 빠진 이의 개수는 같았고, 이에 낀 음식물도 그대로라 양치는 해야 했다.

그 모든 변화 중 가장 짜증 났던 부분은 겨울방학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생리였다. 생리통도 문제였지만, 생리를 하다 말고 남자 모습이 되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생리대는 느닷없는 신체 기관의 등장으로 틈이 벌어졌으며 반드시 생리가 샜다. 남자 모습에서 여자 모습으로 변하면 순식간에 생리가 터져 나오는 것도 짜증 났다. 지원은 한 달에 다섯 날, 오전과 오후 세 시마다 화장실에서 자기 사타구니를 노려보는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세 시마다 수업 중에 손을 들고 화장실을 갔고 밤에는 알람을 맞춰놓고 두 번에 걸쳐 수면시간을 가졌다.
지원은 자기 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냥 싫어하거나 거북해하지는 않았다. 봄방학이 시작되었을 때쯤, 마침내 모든 것에 적응해버린 지원은 어떻게든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하지만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비밀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가혹한 일이었다.

 

*

 

아빠의 승진으로 지원은 중학생이 되자마자 멀리 전학을 가게 되었다. 슬슬 남자 같다는 말에 스트레스가 주체할 수 없이 쌓이던 차였기에, 지원은 첫 등교부터 남자 교복을 입기로 했다. 학급 아이들은 지원이 남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원은 일부러 소변기를 쓸 때마다 자기 고추를 남이 슬쩍이라도 볼 수 있도록 쓸데없이 오래 서 있었다. 그때마다 지원은 이게 다 무슨 짓인지 싶다가도, 그래야만 한다는 묘한 확신이 차올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그 덕분인지, 세 시 이후에 갑자기 키가 미묘하게 커지고 가슴이 나오며 피부톤이 변하고 목소리가 많이 바뀐 지원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지원의 성별을 확인하지 않고 믿었다. 이렇게 되자 부모도 학교에 이야기하여 주민등록 과정에서 전산상의 실수가 있었다고 설명하며 지원을 남자로 취급하기를 요청했다.

 

지원은 과학 시간과 체육 시간과 가정 시간에 걸쳐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에 대해 배웠다. 그 외에도 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잡다한 영상 따위를 감상하기도 했다. 지원은 그 지식을 열심히 머릿속에 넣었고, 생김새를 관찰했다. 여성의 생식기 생김새는 교과서만 봐서는 외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원 자신도 자신의 질을 똑바로 본 적이 없어서 어차피 비교 같은 건 불가능했다. 지원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지원은 수업이 끝나고 과학, 체육, 가정, 성교육 선생님에게 조용히 다가가 똑같이 질문했다.

“생식기가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나요?”

아니, 무슨 소리니, 뭐 판타지 소설 내용이니. 그런 대답을 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으나, 가정 선생님만큼은 이렇게 대답했다.

“왔다 갔다는 아니고 둘 다 아닌 모양으로 생길 수는 있어, 간성이라고…”

지원이 처음으로 세상에 속할 기회를 잡은 순간이었다.

 

지원은 집에 돌아가 간성에 대해 한참을 검색했다. 간성, 인터섹스. 양성의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경우도, 성염색체의 이상에 관해 설명하는 경우도, 갖은 종류의 신드롬 이름을 대며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만큼 지원에게 와닿는 설명은 없었다.

 

‘비전형적인 성별 표현을 가지고 있는 신체.’

 

지원은 어딘가에 소속된 기분을 잠시나마 느꼈으나, 이렇게 열두시간마다 몸이 변하는 경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실망하였다.

 

“나는 정말로 혼자일까?”

지원이 매일 눈을 뜨자마자 첫 번째로 발음하는 문장이었다. 자기 몸이 어떻게 생겨먹었으며 왜 이래야만 하는지가 답답했으나 누굴 보여줄 수도, 어디 말해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하고는, 어렵사리 몸을 일으켜 가끔 면도를 했다. 베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남자 모습일 때 난 상처는 여자 모습일 때도 그대로 있으니까.

그날따라 가라앉은 기분으로 엎드려 잠이나 잤다. 생리할 때가 다가와서인지 가라앉은 기분은 남자 모습일 때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긴, 몸이 바뀐다고 감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비몽사몽한 틈새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의 연애 이야기. 누가 누굴 좋아한다느니, 오늘 고백할 거라느니. 지원에게는 그런 일들이 별나라 세상에서나 일어나는 듯 멀었다. 이런 몸인 나를 누가 좋아해. 아니, 나는 누굴 좋아해야 하지? 좋아하는 상대마저도 세 시를 기점으로 바꿔야 하는 건지, 지원과 똑같이 성별이 변하는 사람을 찾아내야 해결이 되는 건지, 대상의 성별을 따지지 않고 관계를 맺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건지. 고민이 깊어질수록 질문만 늘어 갔다. 

지원은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도서관을 찾았다. 지원은 일상이 마법 같은 탓인지 판타지 소설에 빠져 살았다. 그나마 인생에 걸려있는 마법이라는 게 아무 통제도 못 할 것이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마법을 쓰는 공상에 자주 잠겼다. 지원은 어느 소설에 나온 폴리주스라는 마법 약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곳에 머리카락 같은 신체 일부를 넣고 마시면 그 사람으로 변한다던데. 지원의 머리카락을 넣으면 그 약은 마신 사람을 어떤 성별로 만들어 줄까. 지원 자신이 그걸 마셔가며 살아간다면 또 어떨까. 지원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항상 멈추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꾸벅꾸벅 졸며 책을 읽던 지원의 몸은 오후에도 좋아지지 않았다. 두시 오십팔분이 되자 손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지원은, 화장실에 가기 전보다 조금 큰 키가 되어있었고, 가슴이 나와 있었고, 피부 결이 조금 밝아져 있었으며, 발사이즈가 20쯤 작아져 실내화가 헐렁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원은 신발이 헐렁거리는 느낌이 싫어 하교할 때마다 작은 신발로 갈아신었다. 어차피 같이 하교할 친구도 없었지만, 지원은 친구와 함께 하교하는 게 두려웠다. 자주 그런 상상을 했다. 같이 가던 친구가 느닷없이 멈춰서서 지원을 빤히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 뭔가 바뀐 것 같은데.”

아니면 좀 더 노골적으로.

“너 누구야?”

그다음에는 “너는 이상해.”, “너는 잘못됐어.”가 올지도 몰랐다. 지원은 그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가장 성별이 티 나는 요소인 목소리를 숨기려 세 시 이후론 말을 하지 않았고 하교는 항상 혼자 했다. 학기 초만 해도 쉬는 시간에는 잘 지내다가 하교만큼은 극구 거절하는 꼴도 아이들에게는 보기 좋지 않았는지, 친구들은 떨어져 나갔고 결국 남은 친구는 책뿐이었다.

“나를 왜 이렇게 낳았어?”

견딜 수 없는 고립감에 지친 지원은 저녁 식사 시간에 부모에게 따졌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어쩔 수 없잖니… 그래도 잘 사는 방법을 찾아보자. 응?”

지원은 식사가 끝나면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와 머리를 맞대고 ‘잘 사는 방법’ 따위를 찾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원망, 원망. 지원의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건 그뿐이었다. 

 

결국 지원은 고등학교에 가지 않기로 했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이 걱정이었고, 세 시마다 급격하게 변하는 몸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세 시를 기점으로 체모와 체취까지 변하는 바람에 남들이 못 알아챌 리가 없다는 걱정을 하며 불안에 떨었다.

 

검정고시 날, 지원은 고사장에서 쫓겨날 뻔했다. 수염 자국이 새파랗게 나 있는 장발의 남자아이가 여자라고 적혀있는 신분증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 지원의 부모는 조치를 미리 취해두었고, 잘못 매겨진 주민등록번호라는 결론과 함께 지원의 시험 응시는 허가되었다. 하지만 지원이 시험을 마치고 나갈 때쯤에는, 지원은 영락없는 여자 모습이었으므로 감독관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수능도 똑같았다. 지원은 이 짓거리를 다시 하지 않도록 한 번에 붙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시험을 쳤다.

 

대학에 간 지원은 오전 시간에 모든 수업을 듣고 집에 갔다. 수업을 짜 맞추느라 듣고 싶은 수업은 들을 수 없었고, 고학년 수업으로 시간표를 가득 채웠다. 수업은 따라가기 바빠 성적이 좋지 않았다. 교수님께 질문을 하러 가면 “5시 지나고 다시 오게”라는 답변이 돌아왔기에 결국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친구를 사귀는 건 사치였다. 과 행사에서는 집이 멀다고 거짓말을 하고 사라졌지만, 세 시가 되면 자취방에서 새 옷을 입고 돌아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과제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아무도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 세 시 이후 그들이 아는 지원이라는 남자애는 캠퍼스에 없을 터였으니. 이공계는 주말이나 저녁에 시험을 치는 일도 있다던데, 다행히도 지원은 수업 시간 외에 시험을 치는 과목은 수강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원이 내내 도서관에서만 지내지는 않았다. 낮 내내 비밀 하나를 꽁꽁 싸매고 다니는 지원은, 아무와도 마주칠 필요도, 애써 꾸밀 필요도 없는 저녁 시간대의 모습에서 안정을 찾았다. 촌스러운 옷을 걸치고 어설픈 화장과 함께 이방인이 되어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지원은 이따금 전시를 보았고, 멋진 거리를 걸었고, 유행하는 카페를 다니며 오후를 즐겼다. 

익명이라면 지원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지원은 인터넷에서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모르는 이들과 말을 섞고 적극적으로 친구 관계를 맺을 줄 알았다. SNS에서만 보는 사이인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몸에 대해 설명을 할 필요도, 오후 세 시마다 자신의 목소리가 왜 갑자기 높아졌는지를 설명할 일도 없었다. 지원이 사진을 올리지 않아도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직 지원의 일상만을 궁금해했다. 지원도 적당한 거리를 두며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그들의 하루가 어땠는지를 매일 나눌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지원은 성별을 떠나, 지원 자신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가끔은 저녁 시간에 인터넷에서 사귄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있었다. 직접 만난다고 해도 익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원은 그들에게 ‘그레이’님 이었고, 그가 처음 만난 친구는 ‘밤톨’, 가장 많이 교류한 친구는 ‘AAA’, 가장 마당발인 친구는 ‘뾰롱’이었다.

밤톨과 뾰롱은 지하철 환승 없이 지원과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살았다. 셋은 중간 어딘가에서 자주 술을 마셨고, 이따금 청주에 사는 AAA가 올라와 꼈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술을 마신다는 것은 지원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지원은 자신이 밀맥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길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원은 세 사람과 반말하는 사이까지 되었지만, 그때까지 그들의 나이도, 이름도 알지 못했다. 지원은 이름 모를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어디 사는지 모를 친구들과 먹은 음식들을 SNS에서 자랑하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청주에서 기껏 올라온 AAA는 지원의 집에서 묵고갈 수 없었다. 지원은 항상 가족과 같이 산다는 핑계를 댔고, 그를 챙기는 건 밤톨 몫이 되었다. 밤을 세워가며 술을 마시자거나, 방을 잡고 물놀이라도 가자는 뾰롱의 제안 앞에서도 지원은 통금 핑계를 대며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의 아쉬운 한숨은 점점 체념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지원이 집에 가는 걸 기점으로 다른 가게로 옮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지원에게는 묻지도 않고, 지원만 빼고 멀리 놀러 간 친구들의 사진이 SNS에 올라올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답답함과 질투심이 차올랐다.

 

고립감에 지친 지원은 자꾸 한숨을 쉬었고, 불을 끄고도 누워서 한참을 있다가 남자 모습이 될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불면, 무기력, 우울의 협공에 방학 내내 누워만 있던 지원은 방학이 끝날쯤에야 마침내 정신과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정신과를 처음 찾아간 건 오전이었기 때문에, 지원은 매번 남자 모습일 시간대에만 병원에 가야 했다. 어느 날은 수업 때문에 병원에 늦게 도착하니 이미 두시였고, 그날따라 길고 긴 줄은 줄어들지도 않았다. 지원의 이름이 불린 건 딱, 오후 세 시였다.

“아… 저 다음에 올게요.”

지원의 얇은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지원은 이런 이중생활이 너무도 버겁다고 생각했다. 이런 몸으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지? 지원은 졸업학기에 학교에서 열린 취업 박람회에서 묻고 다녔다.

“세 시 이전에 근무를 끝내거나 세 시 이후에 근무를 시작하는 회사 같은 게 있나요?” 

“그… 자율 출퇴근제를 하면 새벽 세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일해도 되나요?”

“아… 주말에는 저녁 근무 지원 나갈 때가 있다고요? 그거 안 하고 월급 덜받으면 안 돼요?”

기업에서 나온 사람들은 인상을 쓰며 표정으로 “굳이 왜…?”라고 말하고는 어떻게든 대답해 주었지만, 지원이 원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회사는 없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번역이나 그림이라도 배웠으면 나았을 텐데 하는 후회를 했으나 지원의 전공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졸업할 때 성적은 바닥이었고 머릿속에 남은 것도 없는 상태였다. 결국 지원은 인생을 완전히 분리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원은 오전 알바와 오후 알바를 번갈아 가며 두 인생을 따로 살기로 했다.

 

*

 

지원이 카페에 처음 가본 것은 중학교 삼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짝에게 노트를 보여준 보답으로 받았던 커피 무료 쿠폰을 들고 처음으로 가본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지원은 떨면서 드라마인가 영화에서 봤던 메뉴를 시켰다.

“마끼야또, 두유로 해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은 조심스레 말했다.

“좀 더 비싼 거 주문하셔도 되는데.”

“아, 그럼 뭐까지 주문할 수 있나요?”

지원의 머쓱한 대답에 아르바이트생은 친절하게 이것저것 소개를 해 주더니, 꽤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음료를 만들어주었다. 지원은 그 음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카페라는 곳의 친절한 인상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때 받아온 플라스틱 테이크아웃 잔은 한동안 지원의 물컵이었다. 아빠가 무신경하게 그걸 버리기 전까지는.

 

지원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본격적으로 카페를 독파했다. 저녁 시간에 홀로 다녔던 공간 중 도서관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카페였다. 카페는 지원에게 가히 생활공간이었다. 공부하거나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바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볼 때마다, 지원은 그 작업이 어딘가 의미 있다고 느꼈다. 타인이 만드는 음료를 정성스레 준비하는 일이 제법 근사해 보였다. 지원은 그런 기억들 때문에, 낮 아르바이트로 카페를 선택했다.

 

낮에 다니는 카페 앞에는 해바라기가 피어있었고, 장밋빛 벽돌과 연보랏빛 벽지가 인상 깊은 곳이었다. 지원은 또다시 ‘출생 신고가 잘못되어서'라는 변명을 덧붙이며 면접을 보았지만, 나이 지긋한 사장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주민등록증과 지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신분증이 필요한 상황은 보통 “출생신고가 잘못되어서”라는 말을 해야 할 때였기에 남자 사진을 넣어두었던 터였다. 사장은 아르바이트생이 구해지지 않아 곤란하던 차였고, 결국 지원은 채용되었다. 지원은 사장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싶어서, 그리고 자신이 남자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 힘쓰는 일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나섰다.

하지만 남자 모습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힘이 좋을 턱은 없었다. 그 결과, 지원은 헛된 힘자랑을 하다가 들고 있던 상자를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지원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대학생 때 품었던 카페 아르바이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현실의 피로감으로 덮어씌우며 뻐근한 팔을 주물렀다. 지원은 자기 힘의 수준을 깨닫고는 다시는 그런 과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지원의 근력이 썩 좋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원은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피트니스, 수영 등 탈의실을 이용해야 하는 운동을 하지 못했다. 시간을 엄격히 지켜 세 시 이후에만 운동한다거나 할 수도 있었지만, 세 시를 기준으로 탈의실을 바꾼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래도 되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어느 탈의실에 들어가도 그곳이 자신이 있어도 되는 공간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 분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대체 왜 어떤 몸은 볼 자격이 있고 어떤 몸은 볼 자격이 없는 건지, 낮에는 나에게도 달린 기관을 밤에는 왜 보고 비명을 질러야 마땅한 게 되는지, 지원은 항상 그 기준 어딘가를 헤매다가 길을 잃었다. 그렇다고 애써서 집이나 공원에서 운동을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운동이라고는 고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던 지원에게 근육이 붙을 리가 만무했다.

 

지원은 밤길을 걸어야 할 것을 감안하여 집 가까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하기로 했다. 초록색 벽에 노란 커튼이 달린 자리 여덟 개짜리 식당이었다. 레스토랑 면접은 훨씬 쉬웠다. 법적 성별대로 면접을 봤으니까. “사진 보곤 남잔 줄 알았어요.”라는 말로 면접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 외엔 별일 없이 끝났다. 왜 면접에 사진을 요구하는 건지, 이 정도로 의미가 없는데. 지원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카페에서 일하게 된 건 사진 덕이긴 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지원은 일을 마치면 한숨을 쉬며 가게 앞 붓꽃과 한 번씩 눈을 맞추고 집으로 갔다.


일을 시작하고서부터 지원은 머리를 좀체 자르지 않았다. 그에게 비어있는 시간은 어중간했고 세 시를 기점으로 머리 길이가 달라지는 지원이 미용실에서 오래 대기하다 세 시에 걸려버리기라도 하면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머리를 기른 채로 묘하게 성별 없이 행동하며 목소리는 굵은 그를 보면 카페 손님들은 다가와 한마디씩 했다.

“남자예요, 여자예요?”

그러면 지원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남자예요.”

지원은 이 질문이 성가시기만 해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러니 이제는 주말 저녁마다 서점에 갔다가 들른 화장실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저기, 여기 여자 화장실이에요.”

머리를 자르기 전에는 남자 화장실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아, 잘못 들어온 줄 알았네. 남자 맞지?”

지원은 스스로가 무엇으로 보이는지 항상 혼란스러웠다. 우선은 세 시 이전에는 남자 화장실, 세 시 이후에는 여자 화장실이라는 기존의 기준은 이제 버려야 했다. 어느 화장실을 들어가도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고, 사람들은 지원을 보고 일단은 자신과 다른 성별이라고 믿었다.

지원의 체감상 자신이 무엇으로 간주되는지는 머리 길이가 가장 큰 부분을 좌우했다. 머리만 짧으면 여자치고는 큰 키 때문인지 남자 취급을 쉽사리 받는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거기에 화장품을 조금 곁들이면 충분히 남자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남자로 쭉 살수도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이내 그렇게 사는 것은 지금 형태보다도 어색하고 불편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몸서리쳤지만 말이다. 고민 끝에 지원은 저녁 아르바이트 때 말고는 항상 남자 화장실만을 다니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성별 취급을 받는 일이 끝나지는 않았다. 저녁 아르바이트에서마저도 화장실에서 마주친 손님이 항의한 적도 있었다.

지원은 세 시 이후에 남자 화장실을 쓸 때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지는 않을지 항상 걱정했지만, 지원의 전략은 당당하게 빠르게 자신있게 대변기칸에 들어가 이용하고 재빨리 손을 씻고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남의 시선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다만 남자 화장실에서 생리대를 갈고 버릴 수가 없었으므로, 지원은 일 없는 날에 생리를 하면 세 시 이후 바깥에 멀리 나갈 수 없었다.

 

“나 너 주말에 봤어. 서점 남자 화장실에서.”

레스토랑 업무가 끝나고 사장이 영수증을 정리하는 동안, 같이 서빙하는 정선이 속삭였다. 정선은 장난기 있고 친화력 좋은 동갑내기였고, 밖에서 만나지는 않았지만, 지원이 친구라고 부를 만큼은 가까운 사이였다.

“근데 왠지 진짜 남자같이 생겼던 것 같아. 그래서 아닌 줄 알았는데 옷이 익숙하더라고.”

“아, 우리 쌍둥이 형… 아니 오빠일걸? 내 옷을 자꾸 훔쳐 입어.”

지원은 태연하게 말했다. 주말에 닮은 사람을 보았는데 성별이 다르더라, 하는 레퍼토리는 중학생 때부터 지겹게 들었으므로, 이미 익숙하던 차였다.

하지만 정선은 손에서 비장의 패라도 꺼내듯 지원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오빠가 떨어뜨린 것 같아. 네 옷에서 빠졌나 봐.”

지원의 주민등록증이었다. 여자 모습의 지원과 묘하게 다른, 남자 같은 사진이, 바로 그 ‘오빠'와 똑 닮은 사진이 박혀있는 바로 그 신분증이었다. 지원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달린 카드지갑을 뒤져보았다. 대체 어느새 빠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아…고마워.”

정선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장을 바라보았지만, 지원의 가슴은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레스토랑은 월요일마다 휴무였다. 지원은 그 틈을 타고 운전면허를 따기로 했다. 차를 사거나 유지할 돈은 없을지언정 어딘가엔 쓸모가 있을 터였다. 장내 기능시험부터 함께한 강사는 툭하면 지원의 성별을 들먹였다.

“여자가 1종은 오랜만에 보네…”

“요즘은 여자들도 운전을 잘해서…”

“아가씨가 운전을 험하게 하네…”

그놈의 여자, 여자. 지원은 그렇게 불리는 게 어딘가 어긋나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이 남자 모습으로 운전을 한다고 해서 특별히 운전을 더 잘하게 될 리는 없으므로, 그 문장들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침 장내 기능시험까지 통과한 상황에서, 카페 사장님에게 중요한 일이 생겼다며, 며칠간 연속으로 쉬는 날이 생겼다. 지원은 그 틈을 타 면허를 마저 따기로 했다. 강사진이 다르다는 말에 지원은 도로 주행 시험을 볼 때는 남자 모습으로 보았다. 운전실력은 물론 아무 차이가 없었다. 다만 강사가 지원의 성별에 대해 아무 평가도 없이 착실히 가르치기만 하는 것을 보며 지원은 허탈해했다.

임시 휴일의 마지막, 지원은 도로 주행 시험을 보았다. 시험은 2인 1조로 보게 되어 있었는데, 지원과 같은 차에 탄 것은 바로 정선이었다. 지원의 마음속에는 공포가 차올랐다. 정선이라면 지원의 주민등록증을 돌려주기 전에 한참을 보았을 것만 같았다. 바로 지금 지원의 얼굴과 완전히 똑같은 그 사진을. 게다가 그릇을 깨 먹어서 베인 왼손 검지의 상처를 정선이 보고 알아챌까 싶어 검지손가락을 주먹 속에 숨기고 한참을 모르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하지만 정선은 뭔가를 꺼내더니 지원에게 물었다. 

“껌 드릴까요?”

지원은 잔뜩 긴장한 채 일부러 목소리를 더 낮춰서 대답했다.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원은 다행히 먼저 시험을 쳤다. 지원이 목적지를 향해 가면, 정선은 그 길을 돌아오는 식이었다. 지원은 불안을 꾹꾹 억누르고 운전대를 잡았지만, 복병은 느닷없이 나타났다.

“지원 씨 81점으로 합격이요.”

감독관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긴 게 아무 의미가 없잖아. 쌍둥이라고 둘러댄 것도 아무 의미가 없고. 이름도 같은 쌍둥이가 어디있어. 하지만 정선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험 보는 동안 입을 멈추지 않고 감독관과 대화했고, 감독관은 내내 웃었다. 그리고 그사이, 지원은 머리가 복잡해져 입을 꾹 닫고 다리를 떨었다.

“지원 씨, 다리 그렇게 떠시지 마세요.”

다시 한번 이름이 불리자 지원은 화들짝 놀랐다. 진정, 진정하자. 명상이라도 하자. 할 줄은 모르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자니 정선의 시험도 끝이 났다. 다행히도 정선은 헤어질 때까지 대단한 말은 하지 않았다.

 

*

 

한편 지원은 카페 아르바이트에서 진솔이라는 아이와 가까워졌다. 같은 시간에 근무하고 같이 퇴근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점심을 자주 같이 먹었다. 진솔은 오전에 근무하고 오후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둘이 함께 근무한 기간은 두 달이 훌쩍 넘었지만, 지원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빠져 밥을 오래 먹다가도 세 시가 다가오면 집착적으로 도망쳤다.

진솔은 지원의 많은 것을 궁금해했다. 대학은 어디를 다녔는지, 고향은 어딘지, 주말에 무슨 드라마를 보았는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이고 어떤 로봇을 좋아하는지. 지원은 이렇게 관심과 애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지를 처음으로 깨달았고, 진솔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루는 정신없이 이야기하다가 너무 늦게 헤어지기도 했다.

“아, 나 저녁 알바 때문에.”

“응. 잘해.”

지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시간은 이미 두시 오십구분이었다. 문을 나서는 동안 느낌이 왔다. 아, 바뀌었다. 지원은 통유리 너머로 진솔을 힐끔 보았다. 진솔이 지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날도 진솔은 여전히 밝았고, 지원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어제의 변신에 관해 묻지는 않았다. 지원은 안도했다. 거리가 그래도 좀 있었으니까. 솔직히 뭐가 그렇게 크게 달라진다고. 좀처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지원에게, 진솔은 빈틈을 노리는 펜싱 선수처럼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일요일에 시간 돼?”

“아? 어…”

지원은 생각 없이 긍정해버리고는 당황해서 덧붙였다.

“그런데 세 시부터는 아르바이트가 있어…”

“조조 영화 보고 밥이라도 먹자.”

진솔이 웃으며 제안했다.

 

일요일이 되자 지원은 무심코 치마를 입곤 거울을 봤다. 아 맞다, 지금 남자 모습이지. 지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진솔이 고른 영화는 로맨스 영화도, 슈퍼히어로 영화도, 가족 영화도 아니었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눈물을 훔치며 위로받던 두 사람은 언제 울었냐는 듯 나와선 근처 채식 분식집에서 식사했다. 두시까지도 얼마 남지 않아서, 카페라도 가서 수다 떨 시간은 없었다. 진솔은 지원에게 커피를 들려주곤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 모레 보자.”

뒤돌아 떠나는 진솔의 뒷모습이 묘하게 쓸쓸해 보인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집에 잠시 들른 지원은 옷을 갈아입고 쉬다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남자라니까.”

“아니야, 여자야. 머리는 짧아도, 분명히 여자야. 요즘 그러고 다니는 여자들 얼마나 많은데.”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들어서며 옥신각신했다. 두 사람이 카운터에 도착하자마자, 지원에게 물었다.

“사장님, 남자예요 여자예요?”

“어… 여자요.”

지원은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는 안도했다. 얇은 목소리였으니 정답이었다. 지원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는 항상 고민이 컸고, 남자라고 대답할지 여자라고 대답할지 항상 헷갈렸다.

“아닌데… 낮에 저기 아래 커피숍에서 일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인가?”

지원은 행여나 누가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 쌍둥이 남동생일 거예요.”

두 사람은 손뼉을 치고 만족하여 주문을 넣었다.
“닮아도 너무 닮았네. 웃는 모습도 꼭 같고.”

그들은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지원은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어 화장실로 향했다. 무심코 남자 화장실 손잡이까지 잡았다가, 여자 화장실로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화장실 문을 닫는데 정선이 보였다. 내가 남자 화장실 문 잡은 걸 봤을까? 지원은 다시 한번 불안이 차올랐다.

 

정선이 지원의 비밀을 알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원은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소문이 날 거야. 레스토랑 주인을 거쳐서, 온 동네 가게 주인들에게. 레스토랑 사장님도 옆집이 왜 폐업했는지, 어디가 장사가 잘되는지, 사정 하나하나를 속속들이 알고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해주곤 했으니. 그러면 나는 이 동네에서 잘리고, 괴물로 낙인찍힐 테지.

불안이 머리끝까지 찬 지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진솔이었다. 그라면 지원이 힘들 때 기대도 될 사이라고 생각했다. 지원은 그날 밤에도 진솔을 생각했지만, 진솔이 지원의 비밀을 모르는 이상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진솔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메신져로 문자만을 주고받기보다는, 그 목소리를 들어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물론 전화는 걸 수 없었다. 밤 시간대 지원의 목소리는 진솔이 아는 목소리가 아니니까.

지원은 매번 성급히 자리를 뜨는 자신이, 상대를 버려두고 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죄책감에 항상 휩싸여있었다. 낮에 진솔을 두고 떠날 때는 죄책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었다. 네시에 아르바이트라고 솔직히 말하고 두시 오십구분까지는 같이, 아니, 오십 분이나 삼십 분까지라도 같이 있었으면 나았을까 하는 후회가 이어졌다.

이 모든 상황이 나 때문이야. 지원은 그렇게 자책했다. 생은 한 번뿐이고, 기회는 많지 않을 텐데. 샤워하던 지원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꼭꼭 숨기고만 살아야 할 이유는 또 뭔가 하는 의심의 싹이 텄고,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될까 한참씩을 고민하느라 손이 불었다.

 

아침마다 진솔을 보고, 집에서 쉬고, 정선 앞에서 불안에 떨다가 샤워 시간이 점점 길어진 지도 일주일이 지날 때쯤, 지원은 서점에서 정선과 마주쳤다.

“지원아 안녕?”

“어, 안녕…”

지원의 굵은 목소리가 서점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지원은 자신의 실수를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마음고생이 많지?”

정선의 목소리에 지원은 상황을 깨달았다. 지원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점심은 먹었니? 내가 쏠게.”

두 사람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파스타가 조리되는 동안, 지원은 갈라진 손톱 끝을 자꾸만 잠아 뜯었다. 정선은 태평하게 말했다.

“마실 것 안 시켰다! 뭐 마실래?”

“나는 사이다…”

지원의 목소리는 옅게 떨렸고, 정선은 그런 지원을 똑바로 바라보곤 말했다.

“혹시나 했어. 어쩐지 감이 왔거든. 아, 이 사람은 지원이다. 같은 사람이다. 너, 이거 누구한테 말해본 적 있어?”

지원이 고개를 젓자, 정선은 말했다.

“비밀을 숨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고 있어.”

정선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뜸을 들였다. 하기 어려운 말을 길어내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빠가 없거든? 성도 엄마 성을 쓰고. 어릴 땐 그게 대단한 흠이었어. 나한텐 엄청 대단한 사실도 아닌데, 괜히 숨겨야만 했거든. 그래서 네 맘을 알아.”

오른손 손톱을 긁고 있는 지원의 왼손을 떼어주며, 정선이 말했다.

“내가 아무리 모르는 척을 하고 시선을 피해도, 네 안에 있는 불안이 어디까지 커지는지도 알아. 이제야 말을 걸어서 미안. 괜찮아, 나한테는 안 숨겨도 돼. 어떤 모습이라도, 우리 가끔은, 레스토랑 밖에서도 보자.”

정선은 지원과 비밀을 공유하는 첫 친구가 되었다.

 

*

 

자신과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처음으로 생겼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원의 마음 한쪽은 타들어 갔다. 아직 진솔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아서였다. 진솔이 지원에게 뭐길래. 지원은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았다. 지원에게 진솔은 소중한 친구였고, 알 수 없이 강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저녁 시간 근무에서 만난 그 누구도, 그를 온전히 바라봐주기로 한 정선과도 그런 식으로 가깝지 않았고, SNS에서 만났던 친구들과도 이런 감정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매일 특정한 시간이 되면 도망치는 삶을 사는 지원에게 체념과 거리두기가 아니라 손을 내미는 반응을 보인 사람은 진솔이 두번째었다.

하지만 그 손을 내미는 일도 서서히 옛날이야기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함께였던 점심시간은 점점 드물어지고, 진솔은 무리해서 주말에 만나자는 약속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지원은 괜히 조바심이 나 먼저 말했다.

“우리 일요일에 점심 먹자. 이번엔 저녁 알바도 없고 종일 같이 있을래?”

진솔은 지원의 걱정과 달리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아직도 종종 인터넷으로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있지 않은지 찾아보았다. 그러다 수술로 생식기를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술만 하면 자기 몸을 ‘고칠' 수도 있는 걸까 생각하며 희망의 끈을 잡은 듯하다가도, 이 몸에 칼을 대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들뜬 가슴은 다시 가라앉았다. 머리카락 잘리는 것도 그렇고, 전에 면도하다 벤 상처가 몸이 바뀌어도 그대로 있던 것도 그렇고, 몸에 새겨진 흔적은 모습을 가로질러도 남는 것 같긴 했다. 아플 때는 몸이 바뀌어도 아팠고, 감기부터 왼쪽 엄지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마저도 모습이 변해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남자 모습일 때 뚫은 귀는 여자 모습일 때도 멀쩡하게 뚫려있었지만, 수술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생식기 하나 바꾼다고 해서 얼굴과 목소리가 바뀌는 것도 아니니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남자 모습의 자신과 여자 모습의 자신 중 어느 쪽으로 바꿀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원은 자기 삶이 쓸데없이 번거롭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둘 중 한 모습으로 고정된다는 상상을 해보니 낯설다 못해 두려움마저 차올랐다. 한 모습이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의 절반이 영영 죽는다는 말처럼 다가왔다.

 

지원은 머리를 싸맸다. 괜히 만나자고 한 걸까. 그냥 세 시에 또 칼같이 헤어질까. 지원은 이런 식으로 멀어진 수많은 인연을 떠올렸고, 그 때문에 고립되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이번에도 관계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지원은 정선을 찾았다.

“비밀 있는 사람의 특징. 주눅 들어있다. 네가 생각하는 최악은 오지 않을 거야.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너는 너와 맞지 않는 사람을 하나 걸러냈을 뿐인 거고.”

지원이 낮은 신음을 내며 칵테일만 홀짝이자, 정선이 말했다.

“나한테는 들켜버렸지만, 그게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잖아? 먼저 다가가도 돼. 주눅들 필요 없어. 너는 괜찮은 사람이고, 네가 너인 걸 밝혀도 널 좋아해 줄 사람은 세상에 넘칠 거야.”

지원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숨기지 말자. 뭐라도 해보자. 지원은 그냥 질러보기로 했다.

 

마침내 일요일이 되었고, 지원은 진솔을 불러내어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근처 궁궐에서 흐드러진 앵두꽃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지원이 친구삼았던 책 중에는 궁궐에 대한 책도 있었으므로, 궁궐의 구조에 대해 신이 나서 설명해주었다. 두시 오십 분이 되자 지원은 궁 깊은 곳 으슥한 장소를 찾았다. 토요일에 미리 답사까지 마쳐둔 곳이었다.

지원은 심호흡하고는 말했다.

“나, 세 시마다 모습이 바뀌어. 그래서 다른 성별로 보이게 돼.”

진솔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고 반문했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 사람이 세 시 이후면 메신저로밖에 연락이 닿지 않는 수상한 사람이고, 방금 설명한 사실을 가리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이라면 지금까지의 지원의 방어적 태도, 비밀을 숨기는 사람 특유의 불안함이 설명된다는 것을.

지원은 진솔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두시 오십구분이었다. 지원은 육십부터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 셋, 둘, 하나.” 지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땡.” 지원의 목소리가 얇아졌다. 진솔은 지원의 키가 미묘하게 커지고 얼굴이 조금 변했으며 피부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크기는 조금 변했지만, 진솔의 손과 포개진 지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이게 나야.”

지원은 가방에서 신발을 꺼내며 말했다.

진솔은 옅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잡았던 손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궁을 배회했다.

“누나라고 불러 언니라고 불러?”

진솔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맘대로 불러. 그냥 진솔이라고 불러도 되고.”

그것이 두 사람이 사귀기로 하고 입 밖에 낸 첫 대화였다.

 

두 사람은 저녁까지 시간을 같이 보냈다. 궁을 나서고는 전통 문양이 새겨진 공예품을 파는 가게와 전통찻집이 즐비한 거리를 걷고, 그 거리 끝에서 풍물패 공연을 보았다. 진솔은 지원의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라졌을 뿐, 말버릇도, 하는 생각도, 취향도, 성격도 같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여전히 걸음이 빨랐고, 한 번씩 고개를 까딱이는 버릇이 있었고, 녹차를 좋아했고, 목소리가 작고 말투가 조곤조곤했다. 고민할 때 천장을 쳐다보았고 웃을 때 보조개가 패였다. 겉보기가 달라졌을 뿐, 그걸 보고 “성별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을 정도로 두 지원은 일관되었다.

 

그날부터 지원에게 진솔은 보호막이었다. 진솔과 함께 있을 때는 자기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낮에는 진솔 곁에서 몸이 변해도 안전했다. 진솔의 존재 자체가, 지원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세 시 이후 진솔은 화장실에 갈 때 지원을 꼭 데려갔다. 혼자 들어섰을 때는 쏟아지던 시선은, 어떻게 봐도 여성으로 보이는 진솔 곁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를 화장실에 데려올 리가 없다는 생각들을 하는 걸까, 하고 지원은 짐작했다. 진솔은 지원에게 “여기 여자 화장실이에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불같이 화를 낼 준비를 하고 다녔지만, 다행히도 그렇게 화낼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 진솔은 고민했다. 세 시 이전에 옷을 갈아입으면, 화장실을 간다면, 그때는 지원과 거리를 뒀다가 딱, 세 시가 되자마자 무언가가 허용된다는 사실이 무슨 뜻일까. 그건 지원을 위한 것일까 진솔을 위한 것일까. 변신 전후로 지원이 바뀌어봤자 무엇이 바뀐다고.

 

“둘이 잘 만나나 봐. 좋아 보이네.”

정선이 하와이 여행에서 사 온 초콜릿을 내밀며 말했다.

“너희 여행은 안가? 너 해외 갈 수 있나?”

지원은 몇 년 전 가족여행으로 그리스를 다녀온 이야기를 해줬다. 시차 때문에 자신의 변신 시간이 오전 오후 아홉 시로 변한 일, 애초에 이방인이어서 눈치 보지 않고 맘 편히 돌아다닌 일에 대해 말하며, 그곳에서는 마음이 참 편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거기서 살지.”

“이민 갈 형편은 아니라서.”

지원은 다시 해외로 나갈 일이 있을지, 그렇게 편하게 시간이 흐르는 땅을 골라잡아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민은 아무리 봐도 무리고, 아르바이트를 번갈아 다니는 것이라도 어떻게 해결하고 싶었다. 마음 졸이지 않고 살려면 어떤 일을 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지원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 많은 사람이 카페라는 공간에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고민을 나누고, 쉬어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녹아들어 교류하는 공간을 차린다는 것이 제법 근사해 보였다. 대학생 때 품었던 카페 바 안쪽에 대한 낭만은 비록 고된 노동 끝에 산산이 조각났을지언정, 손님들의 공간에 대한 낭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카페라는 공간이 가진 공간 이상의 의미는 아직 충분했다. 이제껏 몇 년이고 일했던 장소이자, 진솔과, 정선과, 그 이전에는 SNS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툭하면 가던 공간. 혼자만의 공간이기도 하고, 많은 추억이 서려 있던 공간이기도 한 것이 바로 카페였다.

 

“나이도 많이 찼고, 이제 슬슬 가게를 내놓으려고. 오래 일했는데, 미안하게 됐네.”

낮에 일하는 카페 주인이 진솔과 지원을 모아놓고 말했다. 지원은 이 상황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진솔에게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진솔은 창업을 도와주겠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본업에선 좀 잘나가거든.”

정선도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원은 친구도 별로 없고 움직이기도 어려운데다가, 프라모델 외엔 대단히 돈 나갈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 역시 모아둔 돈은 많이 있었다.

세 사람은 지원과 진솔이 낮에 일하던 카페를 인수하여 새로 꾸몄다. 도화지처럼 하얀 벽에 무지갯빛 간판, 그리고 가게 안팎에는 지원과 진솔이 좋아하는 식물들로 가득한 동네 카페. ‘플루이드’라는 이름의 카페는 그렇게 생겨났다. 플루이드는 유동적이라는 뜻이었고, 지원은 이 모습과 저 모습을 오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마침내 안주하기 위해 이 카페를 차렸기에, 그보다 적합한 이름은 없었다.

 

*

 

“뭐, 대충 그렇게 해서 이 카페를 차렸어요.”

지원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세 시 이십 분이었다. 지원의 말을 듣고 있던 손님 ‘담’은 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당당하게 살고 계시고요?”

지원은 홀짝이던 찻잔을 내려놓고 인상을 썼다.

“당당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직도 여기저기서 주눅 들거든요.”

“어떤 때인지 물어도 될까요?”

“손님 중에도 가끔 있어요. 저보고 신기하다며 ‘그럼 원래는 남자인 거예요 여자인 거예요?’하는 사람들.”

담이 질색하며 반응했다.

“진짜 이상한 질문이네요.”

“그 질문 할 때마다 진솔이가 달려와서 화내줘요. 그러면 그분들은 다시는 그런 소리 안 하시더라고요.”

이미 바닥난 커피잔을 홀짝이는 담에게, 지원은 계속해서 말했다.

“열어놓고 보니까 그랬어요. 제 몸이 뭐 비밀 실험실에서 잡아갈 정도로 유용한 능력도 아니고, 어디 누가 폭로한다고 해서 문제 생길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이대로 살아도 되겠다.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내 삶이 어딘가가 안전해졌다는 느낌도 들고.”

담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괜찮군요… 성별이 바뀌어도.”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한 번도 성별이 바뀐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매번 그렇게 말해요. 모습이 바뀐다고. 몸이 어떻게 된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지원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며 말했다.

“전화번호부에 언니, 오빠, 누나, 형이 섞여 있었어요. 이제는 이름으로만 저장해요. 그렇게 부르는 게 나한테도, 상대한테도 헷갈리는 일이니까요.”

지원은 몇 번인가 잠금해제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곤 말했다.

“아, 휴대전화를 어제 바꿨더니, 이 모습에서 지문등록이 안 되어있네요. 이런 건 또 깨알같이 귀찮아요.”

“저도 비밀이 하나 있어요. 지원 씨와는 나누고 싶은. 이곳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담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실은 저도…뭔가가 바뀌어요. 다섯 시마다.”

담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은 잠시 눈썹을 치켜뜨다가, 보조개 팬 미소를 지었다.

“들어줄게요. 당신의 삶은 어땠어요?”

댓글 1
  • No Profile
    정상훈 23.01.31 23:00 댓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원이 주어진 처지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된 것 같네요.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76 장편 몰락한 신, 1회 - 장군 소집 반신 2022.12.15 0
2775 단편 사과를 먹어봤어 김성호 2022.12.13 0
2774 단편 문이 없는 집 반신 2022.12.13 0
2773 단편 사랑, 미칠 것 같은, 심가와의, 끝내 죽지 않는 푸른발 2022.11.30 0
2772 단편 처음과 끝 이아람 2022.11.24 0
2771 단편 초롱초롱 거미줄에 옥구슬2 Victoria 2022.11.17 2
2770 단편 슈타겔의 남자들 김성호 2022.11.08 0
2769 단편 사람의 얼굴 해리쓴 2022.11.07 0
단편 카페 플루이드1 쟁뉴 2022.10.27 0
2767 단편 카페 르상티망2 scholasty 2022.10.18 0
2766 단편 최종악마의 최후 니그라토 2022.10.13 0
2765 단편 CHARACTER1 푸른발 2022.09.30 1
2764 단편 토끼와 가짜 달 거지깽깽이 2022.09.19 0
2763 단편 수박 거지깽깽이 2022.09.19 0
2762 단편 위(胃)의 붕괴 배추13잔 2022.09.17 0
2761 단편 모험은 영원히 헤이나 2022.09.13 0
2760 단편 찬이라고 불린 날들2 김성호 2022.09.12 1
2759 단편 어느 Z의 사랑4 사피엔스 2022.09.07 2
2758 단편 천하에 소용없는 노력과 망한 인생 대혐수 2022.09.03 4
2757 단편 언니 푸른발 2022.08.31 0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