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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페 르상티망

2022.10.18 19:2810.18

사람 없는 테라스에 봄 끝물의 바람이 분다. 계절이 선회하기 전 특유의 긴장감과 보사노바가 공중에서 뒤섞인다. 아, 바람피우기 딱 좋은 날이다.

아직 젊은 축이라는 거 외엔 쓸 만한 카드가 전혀 없다. 예쁘지도, 마르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그리고 부끄럽지도 않다. 대체 왜 이런 일을 해? 라고 묻는 목소리는 마음에서 목 조른 지 오래. 자신을 동네 수영 센터 코치라고 밝힌 상대는 서른 셋 - 아주 크리티컬한 시기다. 서른 셋 이후 여자가 많았던 남자는 능글맞아서 재수없어지고 여자가 없었던 남자에게는 다정함이란 괴벽이 생긴다. 그러니까 나는 썩지도 과히 피가 뚝뚝 흐르지도 않는 고기를 앞에 둔 셈이다. 나도 그에게 고기인지 여부는 그닥 중요치 않다. 이 판에선 누가 먼저 목덜미를 낚아채는지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 전에 서로의 어디까지를 허용할지 알아차리는 게 순서겠지만.

연희동의 숨겨진 소개팅 성지인 카페 르상티망. 이 카페는 대학가에 산적한 성가신 대학생 무리를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적하다. 조금 더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가자고 그의 팔꿈치를 잡고 이끌었을 때 실감했다. 그의 팔이 한 손으로 안 쥐어 질 만큼 두껍고 단단하다는 걸.

유리문을 열었을 때 바로 보이는 건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의 정수리다. 얼굴도장 찍은 게 대학생부터니까 희재를 제외하면 바리스타는 내가 간지러움에 중독되었을 뿐이라는 걸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다. 만일 그가 셈을 하고 있었다면, 내가 백여 명 남짓 한 사람과 팔짱을 끼고 유리문을 통과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다.

이름을 모르는 바리스타는 어째서 이렇게나 자주 오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 오브제에 가깝다. 산뜻하지 않아? 관계는 왜 명명해야 할까. 무슨 내용인지 통 알아듣지 못하는 보사노바도 아름다운데. 어쩌면 나도 자기 작품을 오브제 0, 오브제 1, 이라고 명명하는 무책임한 현대미술가들과 함께 서야 하는 걸까.

-주문이요.

오늘 바리스타의 눈빛이 유난히 반항적인 건 기분 탓일까. 뭐 예전부터 마음껏 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왜 하필 오늘 신경쓰일까? 바리스타의 어리숙한 견제에는 비웃음이 나왔지만, 이건 곧 한 쪽으로 치워 버려도 상관없을 정보다. 내가 지갑을 찾는 시늉을 하자 팔뚝은 단호하고 젠틀하게 저지한다. 움직임이 시원스럽다. 짐짓 의뭉스럽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 어디서 읽었는데... 더치 하면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서요?

나는 씩 웃으며 지갑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팔뚝은 사양하는 척하면서 팔 안쪽 연한 살갗을 건드렸다. 엄지가 스치고 간 부분이 데인 것만 같다. 나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이것 좀 보게? 라고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이런 반칙 정도는 게임의 한 부분이므로.

우리는 카페를 휘 둘러보고 금붕어 수조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는 꽤나 산뜻하게 흘러갔다. 과한 농담도 빼고, 너무 예절 차리는 것도 빼고. 서로 잽을 날리는 탐색전이 이어졌다. 영 익숙해지지 않는 건 성격에 관한 직접적인 질문이다. 단점이 무엇인가요? 굳이 회사 면접자리 같이 까끌해질 필요가 있나. 하지만 이번 상대는 예의 그런 질문을 했고, 이쪽은 템플릿대로 받아치기로 한다.

- 좀, 글쎄요. 사람을 좀 많이 좋아한다고 할까요.

- 그러실 것 같지 않은데.

‘니가 놀아 봤자 얼마나 놀아 봤겠어’ 하는 저 눈망울을 볼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 나는 또 너스레를 떤다.

- 글쎄요. 남사친 좀 정리하라고 구박들은 게 한 두 번이 아닌 걸요.

- 아니, 구박이라니! 지은 씨처럼 귀여운 사람한테…

그의 아양을 날카롭게 자른 건 바리스타의 목소리였다.

- 카푸치노 한 잔, 플랫화이트 한 잔이요.

그가 쟁반에서 커피를 내려놓자 머그잔과 탁상 유리가 부딪혀 챙 소리를 냈다. 여기 원래 진동벨 시스템 아니었나? 바리스타는 발을 구르다시피 하며 사라졌다. 상대는 으쓱했다.

-좀 이상하네요, 여기 종업원. 빨리 나가라는 걸까요?

-우리 여기 돈 주고 들어왔는데요 뭐. 정당한 손님인데.

나는 다리를 꼬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정적이 테이블 사이에 낄 때마다 무릎 위 놓인 스마트폰을 뒤집었다. 그러길 한 시간 정도 했을까, 나는 스마트폰을 그만 핸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재와의 인연은 지난 주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 또 어떤 남자가 집까지 따라왔어. 못 참겠다. 어서 꺼져.

나는 잠자코 방에 들어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예상된 바였다. 희재는 계속 방문을 차고 두드리면서 성을 냈다. 음쓰 질질 흘리는 것처럼 여지도 질질 흘리고 다니냐, 무서워서 못 살겠다, 이제 2년짼데 내가 생불이 아니면 뭐냐. 이쪽도 울화가 치밀었다. 트렁크에 옷가지를 가득 담고 자물쇠까지 채웠는지 확인한 다음 현관까지 폭풍처럼 진격했다. 그러고 나서 휙 뒤돌아보곤 괴물같이 씩씩 성내는 희재한테 윽박질렀다.

-네가 내 엄마야? 아님 부러운 거야? 하나만 해.

-내가 너야? 난 칼 맞긴 싫어.

-칼 안 맞게 시간 관리 잘 하면 돼. 그게 비법이야.

-어? 야…

희재는 잠깐 입을 다물더니 중얼거렸다.

- 안 무서워?

-난 내가 더 무서워.

희재는 화내는 것도 잊고 파안대소했다. 그 웃음을 뒤로 하고 나도 만족스럽게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남을 웃기는 거 좋아. 남의 살에 닿는 것도 좋아. 근데 그냥 가능하면 오브제로 남아 줄 수 없을까?

 

- 무슨 생각 하세요?

- 아 잠깐… 죄송해요. 아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 댁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 감사하지만, 저 진짜 근처에 살아요. 한 이틀 전부터 혼자 살기 시작했나? 자취 라이프 시작이죠.

그는 거절에도 새로운 정보에도 당황한 낌새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뵐게요. 오늘 재미있었어요 하더니 어스름 속으로 매끄럽게 사라졌다. 나는 셔츠였던 흰색 점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곤 카페의 후미진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번 녀석은 꽤나 재미있네- 재미있다는 말은 몸도 좋고 티키타카 하는 맛도 있다는 거다. 아주 가끔 이런 운 좋은 경우가 있지. 최소 한 달짜리다- 라이터에 손톱이 걸려서 틱, 틱, 하는데 옆에서 불이 들어왔다.

-굉장히 여유로우시네요.

바리스타를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는 건 처음이다. 눈썹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 있고, 눈 밑에는 점이 하나… 몰랐네. 라이터에서 타오르는 불에 그의 코 끝이 벌개졌다.

-맨날 플랫화이트 시키시죠.

난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들이면서 중얼거렸다.

- 당신은 맨날 나 노려보잖아.

- 맞아요. 사람이 그러면 됩니까?

- 뭘.

- 몇 백명 정도 아니에요?

코웃음이 나온다.

- 세요? 그런 걸?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 저 주말 근문데, 이제 일한 지 4년 반 정도 됐거든요.

손길이 지나간 바리스타의 머리카락은 우스꽝스럽게 서 있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머리를 쥐어뜯은 게 아니라 모양을 낸 것 같다. 길게 한숨을 내쉬자 좁은 하늘 위로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상대는 골목 귀퉁이에 기대어 이쪽을 힐끔거렸다.

-자신감 넘쳐 보이시네요.

나는 대강 웃어주고 볼이 움푹해질 정도로 담배를 깊이 빨았다. 이런 남자에 공들일 시간은 없다. 이 사람만의 고민과 갈등, 내면의 복잡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게는.

- 저 고준명 형 알아요.

- 그래요?

- 애인이시잖아요?

- 지,지,지,지난 애인.

손가락을 까딱대며 친절히 정정해 주자 그는 주춤했다. 가로등이 점멸하더니 온 골목을 주홍빛으로 밝혔고, 그는 그것을 신호로 다시 덤벼들었다.

-외국인도 여러 번 만났죠?

-가깝게는 일본, 멀리는 쿠바. 자, 또 말할 거 있으면 해요. 다 피워가니까.

- 지금 애인은 누구에요?

뭔 흰소리를 하나 했다. 코를 먹듯이 끄헉 꺽 웃곤 말해 줬다.

-오희태.

- 아까 그 사람 아니죠.

- 응. 그 사람은 그냥 오늘 만난 사람.

- 잘 거에요? 그 사람이랑?

그만한 쌉소리는 오래간만이라서 또 웃었다. 내 앞의 사람도 벌쭉 따라 웃었다.

- 아--- 이런 참신한... 몇 살이예요?

- 저...저 스물 일곱이요.

- 난 서른 셋이야. 아까 그 사람한텐 스물 아홉이라고 했는데 사실 서른 셋이고, 지금 누구라도 낚아서 시집 가야 되는 건 아니지만 존나 심심해. 그냥 새로운 남자를 계속 구독할 수 있는 서비스나 나왔으면 좋겠어. 그게 진심이야.

- 진짜 좋은 남자 만나본 적 없는 거 아니에요? 누나?

이 새끼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 난 일회용이 맘이 편해서.

- 저도... 거기 들어가면 안 돼요?

-응?

-이번 형 다 쓰고 나 써줘요.

아, 제기랄 거. 순간 담뱃불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나는 황급히 꽁초를 떨어뜨렸고, 담뱃재를 밟으며 낄낄거렸다.

- 귀엽네, 너. 불 줘서 고맙다.


문을 나서자 바뀐 계절풍이 앞이마를 쓸고 갔다. 새로 뚫은 카페의 플랫화이트는 영 입맛에 안 맞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르상티망에 다시는 안 가기로 했다. 그 쪽이 마음 편하니까. 오브제로 남아 달라는 게 그렇게 힘든 부탁일까? 맛없는 커피를 먹어야 하는 내 신세에 억하심정이 치민다. 왜 멀쩡한 내가 옮겨 다녀야 하나. 그렇게 좋은 카페 어디서 다시 찾아, 아! 빡친다.

여름이 되면 아무나 만나고 싶어했던 기세도 사그러든다. 그런 못생긴 실감이 들 때마다 겁이 덜컥 난다. 나이 먹은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누구보다도 멀리 도망가야지 하고 주문을 걸고, 데이트 횟수를 늘린다. 알람이 2시간 단위로 생겼지만 아직은 칼 안 맞게 할 만하다. 외출 직전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려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 괜찮다. 그렇고 말고…

 

 

 

 

 

 

개인 블로그에 먼저 공개했던 글입니다.

댓글 2
  • No Profile
    정상훈 23.01.31 22:36 댓글

    생생하게 재밌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 정상훈님께
    No Profile
    글쓴이 scholasty 23.04.03 21:53 댓글

    정상훈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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