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CHARACTER

2022.09.30 00:4409.30

 


닥터 슈미트는 기인이었다. 
옛 지구 기준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근대 우주 기준으로는- 글쎄, 그의 고독이 깊고 오래 되었다지만 성간(星間)을 헤매는 기사들의 냉혹하고 직업적인 단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문명을 전파하는 사명이나 종자를 보존하는 책무를 맡은 적이 없었다. 환경 붕괴나 종족 전쟁을 피해 이주선에 올라야 했던 적도 없었다. 그는 방해 없이 자기 자신의 시대를 살아갔다. 최근의 기준에 따르면 그 사실만으로도 평범한 인생의 범주에 속했다. 바이오(BiO)로서는 말이다.

닥터 슈미트는 안드로이드(Android) 디자이너였다. 루나 자치구와 이오 특별무역지구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뒤, 그의 재능이 기사들의 화물 목록에 오를 수 있는 수준임을 다수가 인정하게 되자 솔레일의 초청을 받았다. 이는 그가 유전적, 윤리적, 공리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갖춘 인간(Human BiO)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후 솔레일의 한 구석에 정착해서 살았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가끔 신작을 발표하긴 했지만 그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옛 지구 기준으로는. 
바이오로서는.


*


자동 택시가 나를 솔레일 남대륙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협곡 가이온에 내려놓았을 때, 나는 아직도 솔레일 입국관청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내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하고 유니버스-웹에 업로드된 나에 대한 모든 사항을 검토한 뒤(15초 정도 걸렸다) 그들은 내게 25시간의 솔레일 체류를 허가했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오만한 행성 같으니라고!

화를 식혀주듯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기지개를 쭉 폈다. 갈색과 녹색의 절벽이 평행선을 그리며 양옆으로 솟구쳐 달려갔다. 하늘은 흠결 없이 푸르른 빛깔이었다. 협곡의 넓은 입구에서 좁은 출구를 향해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 나갔다. 그 소리가 마치 순례자의 허밍 같았다.

나는 바이오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현혹된다. 저택 입구까지 가지 않고 협곡 입구에서 내린 것도 그런 특성 때문이었다. 솔레일 체류 종료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고 협곡을 거니는 데 25시간 중 0.5시간을 사용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말이다.

나는 일종의 프리랜서 공무원이다. 말이 이상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자칭 정부라 주장하는 조직들은 전 우주에 수없이 많지만, 영토와 재정과 국민을 가진 진짜 정부는 극히 드물다.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누구든,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연락할 정부가 하나도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면 간섭하는 정부가 너무 많아서 문제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정부끼리 싸워서 문제가 커질 것이다. 이 우주에서 분명한 사실은 그것뿐이다. 언제나 문제가 있다는 것.
그 문제가 무엇이든-어떻게든-해결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주 담당은 상속 및 관련 분쟁이었다. 피상속인의 의지와 상속인들의 욕망은 늘 불일치하기 마련이라, 일을 맡을 때마다 아주 재미있는(반어법이다) 꼴들을 많이 보게 된다. 기피 직무였다. 그래도 솔레일은 보수가 좋다. 

나는 메모리 수첩에서 닥터 슈미트의 3차원 초상화를 소환했다. 이 사람이 앞으로 25시간, 아니 24.5시간 동안 나의 의뢰인인 셈이었다.
그는 빛바랜 회색 머리칼에 성마른 얼굴 윤곽이 피곤한 인상을 자아내는 남자였다. 눈두덩 깊숙이 박힌 눈동자 역시 어두운 빛이었다. 인생의 각종 쓴맛은 다 보았고, 한때는 인생의 쾌락도 알았지만 이제는 잊었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월이 그의 이마와 뺨을 깊숙이 할퀴고 지나갔다. 
늙은이였다. 요즘은 바이오라도 이 정도까지 늙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확실히 독특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 새 저택의 대문에 도착했다. 옛 지구식의 고풍스러운 3층 저택이었다. 녹색과 회색의 석재로 지어져 협곡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담쟁이덩굴이 맵시 있게 청동 대문과 담장에 휘감겨 있고, 대문 안쪽의 정원에서 상쾌한 스프링클러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창문들마다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져 바람이 불 때마다 부드럽게 부풀어올랐다.
누군가 아직 집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닥터 슈미트가 사망한 후에도.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딩-동. 너무나도 고전적인 벨소리. 
옛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복고풍 드라마의 한 장면에 걸어 들어온 것만 같았다. 로맨틱하고 향수에 넘치는, 대체로 가슴 아픈 결말로 끝나는 드라마들 말이다.
청동 대문이 열리자 꽃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펼쳐졌고, 현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양손을 몸 앞에 모은 공손한 자세였다. 검은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흰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완벽한 좌우대칭의 자세를 보고 나는 그가 안드로이드(Human Android)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남자가 내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우아한 만남. 드라마의 서막인가? 

“안녕하십니까. 베커라고 합니다. 이 집의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듣기 좋은 울림의 테너였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하더라. 나도 정중하게 응답했다.

“안녕하세요. 연락 받으셨지요. 닥터 슈미트의 상속 건으로 왔습니다.”
“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휘익.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휘파람을 불던데. 
나는 안드로이드에게도 공평하게 매너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베커처럼 잘 만들어진 모델 앞에서는 말과 시선이 따로 놀게 된다. 나는 베커의 늘씬한 체격과 그 몸을 타고 흐르는 완벽한 양복 맵시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몸매뿐 아니었다. 그 위의 얼굴이야말로 명품이었다. 한쪽으로 쓸어 넘긴 회색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 회색이 도는 푸른 눈동자가 온화함과 중후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다. 근엄한 턱선과 부드럽게 미소 짓는 입술의 곡선의 대비라니. 약간 나이 들어 보이게 디자인한 것이 저 얼굴에는 오히려 잘 어울렸다.

베커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의아해졌다. 왜 나를 집안으로 안내하지 않는 거지? 
그는 이내 헛기침을 했다.

“실례지만 성함이?”

나는 그때까지도 베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턱에서 보조개를 발견했다. 그 보조개는 왼쪽에 치우쳐 있어서 얼굴의 완벽한 대칭을 무너뜨렸다. 그의 접대용 미소가 보조개를 따라 왼쪽으로 살짝 비틀렸다. 마치 그만 쳐다보라고 눈치 주는 것 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안드로이드가 아닌가? 

“어, 저는 린다마이어입니다. 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예. 린다마이어 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대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흘긋 뒤를 돌아보자, 그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약간 치켜든 자세로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칭이 완벽했다. 집사 안드로이드 광고에서 뽑아 온 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안드로이드겠지? 안드로이드일 수밖에 없어.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숨을 내쉬고 싶어질 정도였다. 휴우.  
그러자 베커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잔주름이 가득 잡혔다. 입꼬리도 살짝, 아주 살짝 올라갔다.

젠장, 망했어!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침착하자. 이제부터는 일을 해야 한다. 일만 하는 거다. 일하자, 린. 프로답게 말이야.
나는 바이오이고, 몇 군데 관절을 강화한 것 이외에는 어떤 시술도 받지 않은 오리지널이다. 두뇌의 기능에는 항상 자신이 있었다. 논리와 계산은 안드로이드만 못하더라도, 바이오에게는 바이오의 무기가 있는 법. 
지금 나의 두뇌는 민망한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맹렬하게 문제 해결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다.

-닥터 슈미트는 철저히 혼자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소문은 틀렸나?
-아까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고 하지 않았어?

나는 닥터 슈미트의 집에서 기껏해야 잔디 깎는 기계 수준의 가사 안드로이드(Android)들이나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솔레일 인구관리청에서는 닥터 슈미트에게 동거가족은 물론 동거인 자체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는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드로이드(Human Android)는 동거인으로 등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관청이나 병원에 보호자로 동행할 수 있고 범죄 및 사고에 대하여 법원에서 증언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인지세도 납부하여야 한다. 솔레일 민법은 이러한 안드로이드에게 상속인 자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물론 피상속인의 유언장이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바이오의 직관이 번뜩였다. 이번 일은 상당히 골치 아플 것이다. 
저택의 1층 홀로 들어섰을 때 나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 커다란 창문에서 협곡의 햇살이 한껏 쏟아져 들어와 홀은 마호가니의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이 홀은 내가 상상했던 외롭고 스산한 고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젯밤에도 무도회가 열렸을 것 같았다. 은근한 눈빛과 손길 아래 밀담과 유혹이 오갔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옛 지구 드라마에서처럼 말이다. 

2층으로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의 중간에, 한 여자가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풍성한 흑발이 상아를 깎아 만든 듯한 목덜미와 어깨를 따라 검은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녹색 새틴 드레스 자락이 굴곡이 분명한 몸매에 착 휘감겼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신 외의 모든 사람을 침입자로 간주하는 배타적인 눈빛이었다. 석탄처럼 검은 눈동자가 깎아지른 듯 날카로운 콧날 위에서 번쩍번쩍 빛났다. 스스로를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예민하고 위태로운 내면이 얼굴 윤곽과 표정에 뚜렷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나는 복고풍 드라마에서 빠져나와 고전 비극 무대의 1열에 앉은 기분을 느꼈다. 이 홀이 바로 비극의 무대이고, 그녀의 자기 파괴적 독백이 극의 대단원을 장식할 차례가 된 듯했다. 
요약하면, 너무나 안드로이드 같이 생겼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을 맞받아쳤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녀가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안젤라예요. 당신이 상속 담당관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이 몇 초 더 흘러갔다. 등 뒤에서 베커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나는 기다렸다.

“......”

안젤라 역시 표정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계단 중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는 확실하다. 안드로이드다. 

“네, 제가 상속 담당관 린다마이어입니다. 안젤라, 만나서 반가워요. 곧 업무에 착수하고 싶습니다만. 이 집에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이 더 있나요? 최대한 빨리 한 자리에서 만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젤라가 대답했다. “모두 응접실에 모이라고 하죠.”
나는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이러한 분위기 완급 조절이 소용없지만, 나는 바이오이기 때문에 내 감정 표현에 내 기분이 좌우될 때가 있다.

“모두 모이시면 닥터 슈미트의 유언장을 개봉하도록 하겠습니다.”


*


“닥터 슈미트는 생전 고독을 즐기셨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소문은 정정될 필요가 있겠네요.”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안젤라가 빨간 벨벳 소파에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쥔 채 앉아 있었다. 창백하리만큼 흰 얼굴의 남자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안젤라처럼 검은 머리에 눈은 색소가 옅은 푸른색이었고, 당당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지만 왠지 표정이 공허해 보였다. 이름은 프란츠라고 했다. 안젤라와는 외견적으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고전 비극에서 비운의 연인 역할을 맡기면 좋을 것 같다. 

두 남녀가 정물화처럼 응접실의 중앙을 차지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주변인을 자처하듯이 한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이쪽을 보는 대신 반대쪽 벽에 걸린 그림이며 조각품들을 훑고 있는 시선마저 삐딱했다.
프란츠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매에 셔츠와 바지를 딱 맞게 입은 모습이 맵시 있다. 새빨간 머리칼, 주근깨가 남아 있는 콧잔등, 반항적인 녹색 눈이 까탈스러운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이름을 물으니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엘리엇” 이라고만 대답했다.

셋 다 최고급 사양으로 보였다. 외모뿐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동작에서도 개별 모델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닥터 슈미트는 확실히 천재 디자이너가 맞았던 모양이다.

입안이 깔깔해졌다. 이제 닥터 슈미트의 유언장을 개봉할 차례였다. 천재 디자이너께서 과연 어떤 유언을 남기셨을까. 이 저택을 포함하여 그의 막대한 재산은 누구에게 갈 것인가. 바이오로서의 내 직관이 경고 메시지를 발했다. 결코 평범한 유언일 리가 없다고.
수년 간 솔레일 법원에 보관되어 있던 닥터 슈미트의 유언장은 지금 고전적인 문서 형태로 변환되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먼저 봉투의 겉면과 봉인을 들어 보였다. 개봉된 적이 없는 문서임을 모두가 확인한 뒤, 나는 나이프로 봉투를 자르고 유언장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마음은 협곡의 밤처럼 어둡다.
이 감정은 슬픔일까? 미련일까? 내 인생은 끝내 나를 배신하려는가? 아니면 이것이 나를 위해 준비된 소위 운명이라는 것일까?
혀끝이 차갑게 굳어간다.
나는 언제부터 이 독을 마셔 온 것일까?
이 독은 언제까지 나를 살려 둘 수 있을까?
너는 왜 나를 죽이려는가?
증오인가? 질투인가? 소유욕인가? 
이 오래된 독에서 나는 음습한 살의가 아니라 어둡고 통제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그것은 나의 감정이리라.

너희들 중 누군가의 손에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너희들 중 누구인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나는 미칠 것이다!

내 영감의 원천이자 그 산물인 안젤라. 너에게는 이 집을 남긴다. 이 집은 너를 여왕처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네가 범인이라면 너에게 남길 것은 뒤뜰의 묘비뿐이다.
나의 벗이고 연적이며 우울의 동지인 프란츠. 너에게는 내 현금성 자산과 보석류, 그림 등 내 수집품 일체를 남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너의 영혼에 그것들이 위안이 되기를. 
그러나 네가 이 독의 주인이라면 내가 읊어 줄 것은 저주의 시뿐이다.
재기 넘치는 엘리엇. 너와의 대화는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너의 즐거움은 사사건건 내게 반대하는 것이었겠지. 네게는 내 안드로이드들에게서 발생하는 수입에 대한 권리를 남긴다. 그것으로 너의 미래를 일구어 나가기를.
그러나 이 살의가 너에게서 비롯한 것이라면? 
너에게는 미래를 가질 자격이 없다!”

낭독을 마치자 응접실에는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젤라는 불안한 듯이 드레스 자락을 자꾸 잡아당겼고, 프란츠는 우울한 눈빛으로 자기 무릎만 내려다봤다. 엘리엇은 콧방귀를 뀌더니 시선을 더 먼 곳으로 향했다.
음. 자연스러워. 굉장히 바이오들 같네. 
일을 진행시키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유언장의 형식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습니다만, 피상속인의 의사는 명확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피상속인은 본인의 사인이 독살임을 주장했고, 여기 계신 세 분을 용의자이자 상속인으로 지정했습니다.”

안젤라와 프란츠는 동굴 속 같은 침묵을 지켰다. 엘리엇이 고개를 이쪽으로 홱 돌리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노망 난 늙은이의 헛소립니다! 독살은 무슨 독살! 정신과 치료나 받으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듣지 않더니!”

젊은이의 얼굴은 점점 더 시뻘게졌다. 그는 감정이 고조된 채 고함쳤다.

“유산 따윈 필요 없어요! 내가 용의자라고? 미래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마지막까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엘리엇 씨, 진정하세요. 피상속인은 당신이 미래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이 범인일 경우를 가정해서......”
“닥쳐요! 당신이 뭘 알아!”

안젤라가 갑자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악!” 프란츠는 폐부를 뽑아 낼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우우......” 그는 커다란 손으로 안젤라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닥터의 유언은......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그분의 사인은 독살이 아닙니다. 노환으로...... 평화롭게......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평화롭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최근 몇 년은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많이 괴로워하셨으니까요...... 살인이라니......?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안드로이드 상속인들을 모아 놓고 이 사단이 날 줄은 정말 몰랐다. 바이오들에게는 매번 있는 일이지만.
뭔가 사람들을 진정시킬 만한 말을 고심 중인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베커가 점잖은 얼굴로 은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음료라도 한 잔씩 하시지 않겠습니까?”

역시 안드로이드인가? 눈치 챙겨라. 지금 이 분위기 어쩔 거야.

그는 음료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 잔은 평범한 오렌지 주스였고, 나머지 세 잔은 벌꿀, 우유, 계란을 섞어 데운 음료였다. 이 집안 사람들은 저런 걸 좋아하나? 나는 눈치를 보다가 얼음을 넣은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베커가 점잖은 얼굴로 채근했다. “다들 안 드십니까?” 

엘리엇은 콧방귀를 팽 뀌었다. 안젤라는 마스카라가 번진 얼굴로 흐느낄 뿐이었다. 프란츠는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생각이 없군. 더구나...... 닥터께서 즐겨 드시던 음료 아닌가...... 조금 이따가 내주게.”

바이오의 직관이 맹렬하게 레드 라이트를 번쩍거렸다. 복고풍 로맨스 드라마에서 고전 비극으로, 이어서 미스터리 살인극으로 무대가 옮겨지며 물 흐르듯이 배경이 따라 변하고, 배우들은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가 음료를 거부하자 베커는 그 중 한 잔을 집어들었다. 다른 잔은 가득 찬 데 비해 그 잔은 약간 양이 부족해 보였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잔의 테두리를 어루만졌다. 듣기 좋은 테너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닥터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만 남긴 구두 유언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음료를 드리고 누가 거부하시는지 살펴보라고 하셨지요. 모두 거부하시는군요. 아시다시피, 닥터께서는 항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에그노그를 한 잔씩 드셨지요. 이 잔은 그저께 밤 돌아가시고 난 후 제가 그분의 방에서 들고 나온 그대로입니다.”

그는 검은 양복의 품속에 한쪽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서 은제 티스푼이 반짝거렸다. 안젤라도, 프란츠도, 엘리엇도, 그리고 나도 멍하니 그의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완만하며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티스푼이 계피를 뿌린 노르스름한 달걀 음료 속으로 살짝 머리를 감추었다. 
잠시 후 베커가 티스푼을 꺼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고, 불길한 재처럼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


협곡의 밤이 왔다. 내게는 20시간의 솔레일 체류기간이 남아 있었다. 
피상속인의 상속과 관련한 모든 사건은 나의 소관이었다. 솔레일 정부와 그런 계약을 했다. 솔레일에는 자아실현과 관계없는 업무를 처리할 사무인력이 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창밖에서 별들이 반짝거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닥터 슈미트의 심정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했던 것이 분명한 존재들 중 누군가에게 배반당한 심정을.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중독되며 내면이 먼저 무너지고 만 노인을. 초상화 속 늙고 지친 그의 얼굴을. 

닥터 슈미트의 심정이 어쨌든 간에 그것은 내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나는 바이오이기 때문에, 감정 이입을 통해 업무의욕이 고취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상상 속의 감정에 스스로 상처 입는다.

생각해보자. 나는 문제를 단순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살인에는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닥터 슈미트의 유언장에 그 단서가 있다.

‘너는 왜 나를 죽이려는가? 
증오인가? 질투인가? 소유욕인가?’

그는 이 살인의 동기를 감정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듯했다.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향하는 살의를 알면서도 그에 저항할 수 없었던 이유 역시 모종의 감정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이렇게 단순화해 볼 수 있다. ‘범인은 바이오이다’ 
뒤집으면, 안드로이드는 범인이 아닌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살의를 품을 수 없다. 아무리 고기능의 Human Android라 할지라도 Human을 해칠 수 없다는 대원칙에 구애받으며, 설령 그러한 대원칙이 입력되지 않은 불법 안드로이드라 하더라도, Human Android의 감정은 결국 어떠한-상황과-언어-대상-즉 액션에 대한 리액션으로 귀결될 뿐 스스로 사랑이나 증오와 같은 능동적 감정을 발현할 수 없다. 그로 인한 살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피해자가 특정한 용의자는 셋이었다. 안젤라, 프란츠, 엘리엇. 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보기로 했다.

응접실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엘리엇이었다. 그는 쿵쾅쿵쾅 걸어와 맞은편에 앉더니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불퉁스레 입을 열었다.

“전 할 말 없습니다. 범인도 아니고요!”
“네. 엘리엇 씨. 이건 전적으로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프리랜서 상속 담당관은 초동 수사관 역할도 해야 하거든요. 이야기나 좀 들어보고, 다들 혐의가 없으시다면 솔레일 정부에 그러한 의견을 전달하겠습니다. 피상속인이 살인을 주장한 이상 보고서가 있긴 있어야 하거든요.”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면담을 이어나갔다.

“닥터 슈미트와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나요? 그와는 어떤 관계인지요?”
“제 평생만큼 알고 지냈죠. 그가 저를 만들었으니까요. 한 20년 정도? 어떤 관계였냐고요? 별 관계 아니거든요? 늙은이가 협곡을 산책할 때면 제가 휠체어를 밀어줬죠. 이런저런 대화도 하고요. 그 정도죠.”
“본인이 등록되지 않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네. 늙은이가 워낙 폐쇄적인 성격이라서요.”
“그가 죽었으니 이제 스스로 등록할 수 있을 겁니다. 솔레일에서 Human Android는 대부분의 권리가 인정돼요. 무슨 직업이든 가질 수 있고, 결혼이나 입양도 할 수 있습니다. 어때요, 설레지 않나요?”
엘리엇의 녹색 눈동자가 그제야 내게 초점을 맞추었다. 청년-소년의 얼굴에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설레냐고요? 이 협곡에서 20년을 썩은 후에 말입니까? 평생 아는 사람이라고는 곰팡내 나는 치매 노인, 히스테리 퀸, 우울증 환자뿐이었는데요? 물론 설레죠! 너무 기뻐서 죽어 버리고 싶네요. 제 망한 인생을 보상해 줄 사람도 이젠 없는데!”

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엘리엇 씨, 당신은 안드로이드인가요?”“네, 물론입니다!”
“안드로이드도 자기혐오를 하나요?”
엘리엇은 칼에 찔린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모욕에 대한 당혹감과 불이해, 자기혐오라는 단어에 대한 명백한 적개심이 느껴졌다. 

“자기혐오뿐 아니죠. 안드로이드가 왜 자기 감정을 숨기려 하지요? 그럴 이유가 있나요? 당신의 자기방어의 기제는 무엇이죠?” 

엘리엇은 벌떡 일어났다. 새빨간 더벅머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반항하는 젊은이를 안드로이드로 표현하면 저런 모습이란 말인가? 감당되지 않는 젊음과 그로 인해 방황하는 영혼이 교과서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만들어진 지 20년 되었다고 했는데, 그의 외견과 행동 역시 딱 그 정도였다.

“이렇게 태어난 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닥터가...... 닥터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죠! 그는 내 캐릭터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썼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의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난 바이오가 아니니까요! 나를 지킬 건 나밖에 없는 거죠!”

나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엘리엇 씨,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내 말에 마음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닥터 슈미트의 유언장을 기억하나요? 당신과 대화하는 것은 그의 즐거움이라고 했죠. 그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가장 잘 알 겁니다.”

그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누르고, 후회하는 얼굴이 되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섬세한 감정 표현이라니. 안드로이드라면 정말 굉장하다. 나는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그 캐릭터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자세히 듣고 싶네요. 닥터 슈미트의 독점 기술인가요?”

엘리엇이 대답했다.

“Human Android는 필요에 따라 입력된 성격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죠. 임무에 대한 성실함이라든가, 주인에 대한 복종심이라든가, 적에 대한 투쟁심이라든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Human Android 중에서도 가장 고도화된 모델인 성간 기사들을 예로 들면, 그들은 문명 보존의 사명과 자부심을 짊어진 채 억겁의 시간 동안 별들 사이를 여행한다. 지능을 가진 Human으로서 그 스스로 문명의 대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고독으로 인한 고통이 입력되어 있지 않기에 기능을 멈추는 그 날까지 품위 있고 지적이며 매력적인 대화 상대이다. 
아, 성욕도 입력되어 있지 않다고 들었다.  

“닥터는 저를 가능한 한 모든 상황에 자율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특정한 인풋의 베리에이션에 대응하는 몇 가지 아웃풋 베리에이션 중에서 랜덤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을 스스로 코드화하여 판단한 후 저라는 캐릭터에게 가장 어울리는 ‘언어’와 ‘행동’을 도출하는 겁니다. 물론 참고할 수 있는 모범 시뮬레이션 몇 가지는 탑재되어 있습니다.”
“몇 가지인데요?”
“251개입니다. 빌어먹을 늙은이. 그걸 만드는 데 7년이나 걸렸다고 했어요.”

나는 안드로이드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엘리엇이 말한 캐릭터 시뮬레이션이 얼마나 고등 기술인지 판단할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엘리엇의 캐릭터는 알 것 같았다. 엘리엇은 닥터 슈미트에게 아버지로서의 양가감정을 느끼는 젊은 반항아였다. 젊기 때문에 매사 흥분을 잘하고 거칠지만, 속으로는 부족한 경험 때문에 실수할까 봐 겁에 질려 있다.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주면 의외로 쉽게 마음이 풀어진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늙은이라고 부르며 답답해하면서도 그가 없는 세상의 막막함에 짓눌려 있었다. 
닥터 슈미트의 251개 시뮬레이션 중에는 자신의 죽음도 있었을까? 그는 이 가엾은 젊은이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기를 바랐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시선이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쳤다. 나는 시럽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엇, 당신은 닥터 슈미트를 빌어먹을 늙은이라고 부르네요. 당신의 캐릭터는 그를 증오하나요? 당신을 속박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라서? 닥터 슈미트의 캐릭터 시뮬레이션은 증오를 살의로 연결할 수 있나요?”

엘리엇은 불타는 녹색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협박인가요?”
“협박이라면요?”

소년은 이를 갈며 말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 감옥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이 집이랑 다를 것도 없잖습니까!”
“아무래도 좋다고요?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이 되어도 상관없나요?”

그는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내게 보내는 눈빛 속의 감정이야말로 증오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내 손은 그의 뺨을 향해 서서히 가까워졌다. 이윽고 손끝이 닿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나의 입술 역시 그와 가까워져 더운 숨결이 서로 섞였다. 안드로이드다운 단정한 얼굴이 내 눈 속에 가득 담겼다. 
나는 바이오이기 때문에 언어가 아닌 몸짓과 표정으로도 말을 할 수 있다. 내 손이 내 혀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한다. 그러나 석고처럼 딱딱해진 엘리엇은 목소리로만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질문이든!”
“더 이상 질문은 필요 없어요. 당신은 닥터 슈미트를 증오하지 않아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당신을 의심했다는 배신감과 슬픔뿐이겠죠. 그 결과값이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내 손가락이 엘리엇의 뺨을 스쳤을 때, 그 뺨은 차가웠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유혹입니다. 당신은 바이오로서 어떤 생리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는군요. 여성에게 성적인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원치 않는 성적 접촉에 대해 응당 보여야 하는 불쾌감조차 관찰되지 않았어요.”
“그런 헛소리는......”
“당신 또래의 소년이라면 반응이 더욱 민감해야 정상이죠. 당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다른 사람을 만나 떠나갈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그런 상황은 생각도 못한 걸까요?”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고 했어......!”

나는 이 영원한 소년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하지만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신은 비언어적인 접촉보다는 언어적인 자극에 특화된 모델일지도 모르죠. 닥터 슈미트는 자극적인 말벗을 필요로 했던 것 같으니까요. 엘리엇, 이제 나가 봐도 좋습니다.”


*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나의 솔레일 체류는 16시간 남았다. 
다음 차례는 프란츠였다. 그는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상장을 달고 왔다. 사람이 아니라 시커먼 슬픔 덩어리처럼 보였다. 
세 명 중 나는 프란츠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살인범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역할이 의심스러웠다. 닥터 슈미트의 유언장에서는 그를 ‘나의 벗이고 연적이며 우울의 동지인 프란츠’라고 불렀다. 셋 중 하나만 했더라면 알기 쉬웠을 텐데.
그는 곰 같은 어깨를 움츠리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앉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데 나까지 우울해진다.

“많이 힘드신가요.”
“생에...... 의미가...... 없군요. 상실감의 무게만도 짓눌리는데...... 살인? 배신과 의심이라니......”

나는 사려 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형식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몇 가지 질문만 하고 바로 쉬도록 해 드리지요. 하지만 정 힘드시면 날이 밝은 후로 미루겠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하지요...... 제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으니......”

나도 빨리 끝내고 싶다. 저 느릿한 말투 좀 어떻게 해줬으면. 나는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닥터 슈미트와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죠? 그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15년쯤 되었습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프란츠가 엘리엇의 후배인 셈이었다. 나는 프란츠의 얼굴을 뜯어보며 그의 외적인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마흔보다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세월이 그 얼굴에 중후함을 부여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앗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와의 관계는...... 어렵군요. 우리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저는......”

날 새겠다. 답답한 나머지 나는 그의 말꼬리를 잡아챘다.

“유언장에는 벗, 연적, 우울의 동지라고 쓰여 있었지요? 너무 복잡한데요. 당신은 닥터 슈미트의 친구였습니까?”

프란츠의 입가에 천천히 쓰디쓴 미소가 새겨졌다. 그의 얼굴에 그 표정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순간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이 그의 배경으로 전락하는 듯했다. 그 표정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내면의 고통이 자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내면의 고통이란 Human BiO에게 국한된 개념이며, Human Android의 경우 고통의 표현만이 가능할 뿐이다.

“친구...... 그래요, 친구였겠지요. 우리는...... 함께 산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이면 함께 그림을 보면서...... 또다시 이야기를 하고......”
“엘리엇 씨도 닥터 슈미트의 이야기 상대였던데요.”

프란츠는 고개를 저었다.

“달라요. 엘리엇과의 대화는 닥터에게 즐거움이었지요...... 젊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밝아지니까...... 나는 아니었어요. 우리의 대화는......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그런 대화였으니까......”

나는 난무하는 말줄임표 사이에 나이프를 끼워 절단한다는 느낌으로 질문을 던졌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자극하는 관계였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런 걸 보통 친구라고 하죠. 그런데 그런 대화를 Human Android가 할 수 있을까요? 프란츠 씨, 당신은 바이오입니까?”
“아니요...... 저는 안드로이드입니다.”
“그림을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안드로이드이면서도 취향을 가졌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요즈음 저와 닥터는 필릭스 J.그렉슨의 세밀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정교하면서도 과장된 필치가 염세적인 주제와 잘 맞물리죠.”
“그러한 취향은 가지고 태어나신 것인가요? 그러니까, 입력된 것인지요?”
“그런 캐릭터로 시뮬레이션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세상을 밝게 보는 편은...... 그런 성격은 아니지요...... 닥터는 제 본성적인 우울을 달래기 위해서는 예술을 접하는 편이 좋을 거라 했고......”
“프란츠 씨는 닥터와의 대화를 통해 취향을 발전시키신 건가요? 두 분은 우울한 취향을 공유하셔서 ‘우울의 동지’인가요?”“타인의 감상은 언제나 흥미롭지요...... 추천, 대화, 평론...... 닥터와 저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그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주로 제가 듣는 편이었다 해도...... 우리가 더 좋아하는 작품들은 신기할 정도로 늘 일치했지요......”

예술을 감상하는 안드로이드가 가능할까? 
타인의 감상을 적당히 짜깁기하여 자신의 감상처럼 말하는 것은 ‘캐릭터 시뮬레이션’이 탑재된 닥터 슈미트의 고급 모델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프란츠가 ‘우울’, ‘고독’, ‘상실’ 등의 키워드를 적당히 포함시켜 필릭스 J.그렉슨의 그림에 대한 감상을 ‘조합’했다 치자. 내겐 그 독창성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프란츠가 그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 작품의 예술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닥터 슈미트가 좋아했기 때문인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예술 작품에 대한 프란츠의 취향이 전적으로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잘 알겠습니다. 프란츠 씨는 분명히 닥터의 벗이었고 감성을 공유하는 동지였군요. 그런데 두 분의 관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따로 있군요. ‘연적’이라고 하셨죠? 제가 추측하는 바가 맞을까요?”

프란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 생겼지만 연령으로 인해 눈매가 살짝 무너져 있었다. 슬프고 지쳤으며, 풍파에 시달린 얼굴이었다.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주된 감정은 상실감이었으나, 그것은 얼마 전 벗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라는 사람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처럼 보였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것은 검은 상복이 아니라 상실의 정조 그 자체였다.
나는 불행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유형이 아니므로 그에게 약간 심적인 거리를 두면서 물었다.

“안젤라 씨를......?”

그의 눈매가 희미하게 떨렸다. 엷은 푸른색 눈동자에 수막이 어리는 듯이 색채가 한 단계 흐려졌다. 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게 안드로이드라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절망이 수조 속의 물처럼 그를 가득 채우고 곧 흘러넘칠 듯이 찰랑거렸다. 말했듯이 나는 불행한 남자에게 매혹되는 유형이 아니지만, 바이오이기 때문에 타인의 슬픔에 젖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닥터 슈미트와 당신은 둘 다 그녀를......?”
“......”
“안젤라 씨에 대한 사랑은 닥터가 당신에게 입력한 것인가요? 그런 취향을 가지도록 만든 건가요? 그녀와 같은 외모나 성격에 대한?”
“......”
“제 추측이 맞군요. 잔혹하네요. 당신은 닥터를 질투하지는 않았나요? 당신의 캐릭터 시뮬레이션은 질투를 살의로 연결할 수 있나요?”
“......”
“당신은 그녀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려놓으려 해 본 적이 있나요?”

프란츠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는 친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무례한 질문은 그만둬 주십시오.”

너무나 또렷한 말투였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침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침묵을 흘려보내며 응접실을 서성대자니 이 방엔 새삼 그림이 많았다. 나는 벽난로 위에 걸린 그림 앞에 멈추었다. 군중을 세밀하게 표현한 그림이었는데, 그 그림 속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괴상하고, 보는 사람을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필릭스 J.그렉슨의 세밀화인 모양이었다. 기분 나쁜 그림이었다. 내 취향은 아니다. 내가 그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자, 등 뒤에 프란츠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림을 탁자 위로 가져왔다. 프란츠의 시선은 자석처럼 그 그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친구의 연인을 사랑하면서도 우정을 배신할 수 없는 운명이라니, 고전 비극의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설정이다. 우매한 자들에게서는 조롱을 받겠지만 비극적인 종말의 그 날까지 품위를 지켜야겠지.
나는 옷 안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닥터 슈미트의 유언장을 개봉할 때도 썼던 칼이었다. 나는 나이프의 날을 아래로 향하고 높이 치켜 올렸다.
망설임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 따위 재수없는 그림 알 게 뭐냐. 잠깐, 비싼 그림이면 어떡하지? 본건 수당으로 배상 가능할까?

뒤늦은 망설임은 칼날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칼끝이 번개처럼 화폭을 향해 내리꽂혔다. 

“......”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프란츠가 우울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이프 끄트머리가 그의 희고 핏줄이 두드러진 손등에 박혀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바이오의 피일까, 아니면 안드로이드의 유동액일까. 

그 눈 속의 견고한 우울감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탄식처럼 말했다.

“닥터 슈미트는 당신이 예술에 대해서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해서도 자신과 같은 취향을 지니도록 만들었으면서, 당신이 그 여자를 빼앗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나 보군요. 자신이 당신의 취향 중 가장 우선하도록, 영원히 충직한 벗이자 동지로 남도록, 자신을 배신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었군요.”
“......”
“당신은 다친 손등을 쳐다보지도 않는군요. 닥터의 그림이 자기 손보다 소중하군요. 바이오는 신체적 고통을 후순위로 조정할 수 없죠. 프란츠 씨, 당신은 안드로이드가 분명하네요. 상처는 죄송합니다.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


*


행성 솔레일이 어제의 자전을 마쳤다. 창문 틈으로 어슴푸레한 빛줄기가 뻗어 들어왔다. 협곡의 새벽이 찾아온 것이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피로했다. 나는 멍하니 새벽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인 사건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새벽이면 늘 그렇듯, 바로 어제의 기억보다도 지나간 추억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스러져 가는 달빛에 지난 세월을 비추어보며 나는 끝없이 새벽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깜짝 놀랐다. 추억의 바다가 순식간에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안젤라 씨. 아침 식사 후에 뵙기로 했었는데요.”
“지금은 안 되나요?”

그녀는 유령처럼 소리 없이 걸어왔다. 검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마구 흐트러졌고, 은회색 나이트가운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어제 오후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와는 달리 다소 푸석했다. 입술 색 역시 창백했다.
새벽빛 속에 먼지들이 반짝였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녀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고 작위적이었던 첫인상과는 달랐다. 너무나도 살아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 바이오 여성처럼 보인다고 해야 중립적인 표현이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내가 말이 없자 그녀도 말이 없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 말이 없으신 편인가요?”
“상대방을 관찰하는 편이죠.” 

그녀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제가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하셨죠?”
“예. 아닌가요?”
“당신이 생각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드로이드인가요?”

말문이 막혔다. 나는 어제 그녀의 외모와, 어색한 태도를 보고 그녀가 안드로이드라고 확신했었다. 

“안젤라 씨, 당신은 바이오인가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어요. 제가 바이오라면 첫 번째 용의자가 될 테니까.”“안드로이드라고 주장하시면 되잖습니까.”
“나는 바이오예요.” 
안젤라에 대해서는 방심했었다. 이상형의 안드로이드를 주문 제작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닥터 슈미트가 안드로이드 제작자이고, 안젤라가 뛰어난 미인이라는 점 때문에 그녀는 당연히 닥터 슈미트의 성적 환상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서 내면의 힘을 되돌리려 애썼다.

“좋습니다. 바이오라는 말씀이시죠. 안젤라 씨, 닥터 슈미트와 만난 지 얼마나 되셨죠? 그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10년 알고 지냈어요. 그는...... 저의 후원자였죠.”
“연인이 아닙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닥터의 유언장에는 ‘내 영감의 원천이자 그 산물인 안젤라’ 라고 쓰여 있더군요. 이건 당신이 그가 만든 안드로이드라는 뜻 아닌가요?”

안젤라의 아름다운 얼굴에 음영이 뚜렷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나라는 인간을 자신이 완성했다는 만족감에 취해 있었어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애송이 계집애였는데 이제는 늙어 가기 시작했죠. 내 젊은 시절에 그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죠.”
“실례지만 나이가?”
“보이는 그대로예요.”

안젤라는 인상이 강렬해서 연령을 추정하기 쉽지 않았지만, 대략 서른에서 마흔 사이로 보였다. 눈자위에 그림자가 졌고, 입을 꽉 다물 때면 피로감이 배어 나온다. 어깨와 무릎에는 젊은 활력이 남아 있지만 팔다리의 선은 날렵하다기보다는 부드러웠다. 
나의 시선을 느낀 안젤라의 미소는 슬쩍 조소로 바뀌었다. 표정 변화에서 일말의 어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엘리엇과 프란츠가 그러했듯이.

“의심하는군요?”
“그럴 리가요.”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로켓 목걸이를 풀어 건넸다. 그 속에는 닥터 슈미트와 안젤라, 프란츠, 엘리엇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보세요.”

나는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엘리엇과 프란츠는 지금과 똑같았다. 마치 어제 찍은 것 같았다. 그러나 닥터 슈미트는 내가 가진 사진보다 젊었다. 검은 머리칼이 회색 머리칼보다 많고 자세도 꼿꼿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어깨에 손을 짚고 선 안젤라였다. 지금보다 말랐고, 머리칼이 짧아 가느다란 목덜미와 팽팽한 핏줄이 드러났다. 입술을 앙다문 얼굴에 길들일 수 없는 반항기가 엿보였다.
젊어 보였다. 지금보다 10년쯤. 사진 속의 그녀는 남자들보다는 연하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스물다섯이 서른다섯이 되는 동안, 이목구비는 별로 변하지 않더라도 분위기는 변하는 법이다.

“안젤라 씨, 닥터를 만나기 전 당신은 어떻게 살아오셨나요? 솔레일 출신이신가요? 양친은요?”
“과거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닥터 슈미트와는 성적인 관계가 있으셨나요?”

안젤라는 깔깔 웃었다.

“설마 아니겠나요?”
“실례 되는 질문 죄송합니다. 성적인 관계에는 종종 소유욕이 개입하죠. 닥터가 유언장에서 소유욕을 언급했기에......”
“아예 더 직설적으로 묻지 그래요. 제가 닥터를 죽였느냐고.”“그래도 됩니까?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행성 솔레일은 오늘의 자전을 시작했다. 새로운 하루가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추억의 밤은 지나가고 현실의 태양이 떠오른다.
안젤라가 대답했다.

“소유욕 같은 건 없었어요. 오히려 그에게서 탈출하고 싶었어요. 나는 내 젊은 시절을 그에게 바친 걸 후회해요.” 
“그건 훌륭한 살인의 동기입니다.”
“안 죽였어요.”
“그렇다면 좀 더 자기변호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묻고 싶어요. 난 10년간 닥터의 집에서 닥터의 돈을 쓰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살았어요. 날 사랑하는 척하는 프란츠의 우울한 얼굴에도 질렸어요. 지난 10년간 난 계속해서 무기력해지기만 했어요. 닥터는 내 인생의 소유자이면서 내 보호자이기도 했어요. 내게 그럴 용기가 있었겠어요?”
“10년 전의 자신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의 나는 천방지축이고 철부지였지만, 영혼이 자유로웠어요. 지금의 나는...... 난 타락했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한 겹 레이스 커튼이 아침 햇살을 차단하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거침없이 커튼을 열어젖혔다. 촤악! 빛에도 소리가 있다면 폭포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크리스탈 같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 안의 그림자를 모조리 지웠다. 
나는 찬란한 빛을 등에 지고 돌아서서 말했다.

“이제는 진짜 인생을 사실 수 있겠군요.”

안젤라의 새하얀 얼굴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시 들여다보니 그것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평평하게 만드는 빛의 농간이었고, 그녀는 여전히 지친 듯한 무표정이었다.

“안젤라 씨, 솔직히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안드로이드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성장하는 안드로이드...... 시간과 경험에 의해 변화하는 캐릭터...... 굉장한 기술입니다. 닥터는 도대체 당신을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했을까요. 당신은 닥터의 최고작이지만, 너무나 훌륭한 나머지 실패작이 되고 말았군요. 당신은 닥터의 이상형의 여성이었을 테죠. 당신을 소유하고 싶었겠지요. 당신과 함께 늙어 가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같은 마음을 심어 주는 데는 실패했군요.”
“난 바이오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오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구분이 의미 있나 싶기까지 합니다. 당신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것 같으면서도 예측이 안 됩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또 변화하겠지요. 하지만 논리적인 허점이 있습니다. 당신보다 먼저 만들어진 프란츠 말이에요. 그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운명 지워졌죠. 닥터는 프란츠를 만들 때부터 당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이 바이오라면 그건 불가능하죠.”
“프란츠는 상관없어요!”
“안젤라 씨, 창밖을 보세요. 아침입니다. 기분이 어떤가요?”
“대체 무슨 소리죠?”

나는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엘리엇과 프란츠 때처럼 힘 있게 말하지 못했다. 내 목소리는 회한에 차 있었다.

“당신은 불행했을지도 모릅니다. 닥터와 함께 한 10년 뿐 아니라 그 전에도...... 당신에게 유년이 있었다면 말이지만요. 당신의 주장처럼 당신이 30년 넘게 이 빌어먹을 삶을 살아왔다면, 밤마다 찾아오는 고통을, 새벽이면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을 잘 알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도 알 겁니다. 이렇게 찬란한 햇빛을 보면 울고 싶어지지요. 어째서 아직도 세상에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 빌어먹을, 저는 언제 이렇게 늙어 버렸을까요?”
“......”
“시간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당신은 경험에 따라 성장하는 안드로이드인데, 아직 그런 경험이 부족해 보여요. 바이오이고 싶나요? 스스로를 직시하기란 어렵죠. 당신은 어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사실은 열 살인 거예요. 꼬마 안젤라. 가엾게도...... 이젠 괜찮아.”

나는 반신반의하며 두 손을 내밀어 안젤라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Human Android도 슬픈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 울 수 있다. 내가 눈물을 닦아 주자 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치 열 살짜리 아이처럼.


*


“식사를 준비할까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젯밤부터 굶었더니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 같았다.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다. 나의 솔레일 체류는 4시간 남았다. 출국장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2시간이었다. 
넓은 식당에는 나 혼자였다. 베커가 시중을 들어 주었다. 빵과 버터, 베이컨, 토마토, 스크램블 에그, 오렌지 주스가 날라져 왔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조사에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나는 버터 바른 빵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베커의 점잖고 침착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잘생겼네.

“베커 씨, 이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3년 되었습니다.”
“당신, 바이오죠?”

그는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솔레일에는 이런 일을 하는 바이오가 없지 않나요? 저는 안드로이드입니다.”
“맙소사. 이 집엔 안드로이드뿐인가요?”
“예. 모두 안드로이드이고, 동시에 닥터의 부인, 친구, 아드님이시죠.”“안드로이드잖아요.”
“안드로이드면 안 됩니까?”

나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베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뭔가 하나씩 빼먹었더군요. 독립할 수 없는 아들, 배신할 수 없는 친구, 함께 늙어갈 수 없는 부인.”
“그렇지만 친애와 우정과 사랑은 진짜랍니다.”
“닥터, 왜 그랬어요?”
나는 처음부터 베커를 의심했다. 그는 다른 세 명보다도 훨씬 더 바이오에 가까웠다. 유언장의 용의자에서 베커만 제외된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살인을 증명한 에그노그의 퍼포먼스는 완전히 엉터리였다. 그의 외모는 어떤가. 내 참고사진 속의 닥터 슈미트와 베커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한쪽은 피로에 찌든 늙은이지만 반대쪽은 여유롭고 멋진 중년이니까. 그러나 안젤라의 로켓 목걸이 속 닥터 슈미트라면? 더 젊고 힘이 있을 때의 닥터라면?
회색 머리, 파란 눈, 그리고 왼쪽 턱의 보조개.
신체를 젊게 만들거나 얼굴을 약간 바꾸는 것은 바이오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솔레일의 의료공학 수준에서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집을 통제하는 것은 베커였다. 닥터 슈미트 외에 누가 또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배우들의 연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연극의 막은 언젠가 내리게 마련이죠. 이 연극의 결말은 닥터의 죽음인가요? 연출자가 죽어야지만 등장인물들은 각본 없는 삶을 살 수 있겠죠. 그들이 닥터가 아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내 목소리는 격앙되었다. 그러나 베커는 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그들을 바이오처럼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히 그들에게 닥터는 소중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고통을 모릅니다. 울 수는 있지요. 슬퍼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오른손을 가슴 위에 가져다 댔다. 

“......여기가 아프지는 않은 법이지요.”

나는 말문이 막혔고, 베커는 침착하게 핵심을 저격했다.

“아픈 것은 당신의 마음이겠지요, 나이트...... 린다마이어 경.”
“......나를 아나요?”
“유니버스-웹에서 검색해 본 것뿐입니다. 당신은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바이오 기사 아닙니까. 22세기의 지구에서 시작해 수없는 시간대를 건너뛰며 수백 개의 문명을 지켜보신 분이잖습니까.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을 만나셨을 테지요. 그 경험에서 오는 직관이 당신의 무기이겠지요. 대단합니다. 어떻게 바이오가,”
“그 긴 시간을 견뎠느냐는 말이겠지요?”
“실례 되는 질문이었군요.”
“고독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열없이 끝을 흐리고 말았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관심 가져 주는 건가요? 멋진 남자가 관심 가져 주면, 저, 착각할지도 모르는데요.”
“하하.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되찾았다.

“당신은 닥터 슈미트가 아니군요. 안드로이드의 고통에 대한 냉정한 의견 잘 들었습니다. 닥터라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고 싶어 했겠지요.”
“닥터도 처음에는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요. 초연을 지휘하는 연출자처럼요. 하지만 고독은......”

베커는 말을 끊고 의미 있는 눈웃음을 보냈다. 
그렇다. 고독은 바이오의 판단력을 흐린다.

“그래서 저는 인간관계의 진흙탕 속을 찾아다니지요. 그러면 고독하지 않거든요. 어머, 내가 뭐라는 거야. 베커, 당신은 닥터의 모든 기억과 경험을 이어받은 그의 최후의 역작이군요. 그는 자신의 캐릭터를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군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군요. 어쩌면 자신이 실제보다 더 멋지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면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그토록 고독했던 것이군요.”

베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분의 뇌에서 그분의 기억과 성격을 전달받았습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커, 당신이 닥터 슈미트를 죽였나요? 그의 복제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 유일한 닥터 슈미트가 되기 위해?”
“그분의 죽음은 노화로 인한 자연사였습니다.”
“유언장은 어떻게 된 거죠?”

베커는 나의 빈 잔에 오렌지 주스를 가득 채워주었다. 나는 그 잔을 다시 비웠다. 그는 이번에는 잔을 반만 채웠다.

“살인 사건이 없었다면 당신이 보기에 우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안드로이드인지 바이오인지가 중요했을까요. 어딘가 캐릭터가 이상해 보인다 하더라도 별 신경 안 쓰지 않았을까요. 특이한 바이오도 많잖습니까. 린다마이어 경, 당신처럼요.”
“부정할 수 없네요.”

베커는 오렌지 주스 잔을 들어 올렸다. 잔은 그의 입술 앞에서 멈추었다. 안드로이드는 음식을 취식할 수 없다. 애초에 음료 쟁반 따위로는 안드로이드 중에서 살인범을 가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뭐 어떻습니까? 오히려 좋습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친구를 배신하고,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는 것으로 의심받는 편이 좋습니다. 그 편이 훨씬 인물에 깊이가 생기지요.”
“사실이 아니잖아요.”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요.”

나는 베커의 눈 속에서 오래된 영혼을 보았다. 인생의 쓴맛을 충분히 보았지만, 인생의 단맛 역시 기억하고 있다. 달콤한 열매를 향해 손을 뻗지만, 그 열매의 가시를 떠올리고 손을 움츠린다. 다시 손을 뻗느냐? 아니면 영원히 열매를 멀리하느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달린 것이지만, 반대로 그의 선택이 그라는 캐릭터를 완성하는 것이다. 

“린다마이어 경,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안드로이드에게는 마음이 없는데요?”
“보이는 만큼만 이해하려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저는 닥터 슈미트가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군요.”

나는 확인 사살을 위해 물었다.

“두 분은 어떤 관계였죠?”

베커가 대답했다.

“타인입니다.”


*


아름다운 가이온 협곡을 뒤로 하고 날아오르는 택시 안에서 나는 보고서의 서두를 작성했다. 

-닥터 슈미트의 사인은 독살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으나, 네 명의 용의자 중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음. 상속은 피상속인의 유언대로 집행코자 함.

엘리엇은 여성을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친구는 사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닥터 슈미트가 없으니 프란츠는 안젤라에게 사랑을 고백할지도 모른다. 안젤라는 그녀가 갖지 못했던 양친을 대신할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베커가 찬탄했던 나의 바이오로서의 직관이 갑자기 번쩍 하고 뇌리를 찔렀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닥터 슈미트가 구상한 나름의 해피엔딩이 아닐까? 복고풍 드라마도 고전 비극도 미스터리 살인극도 아닌, 어찌저찌 얼레벌레 계속되다 끝인 줄도 모르고 끝나는 부조리한 일상극이었던 건 아닐까? 

그러나 내가 닥터 슈미트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협곡이 점점 멀어졌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피곤했다. 우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둡고, 막막하며...... 불가해한...... 하지만 나는 늘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나의 잠이 우주보다 깊고, 타인의 마음은 다른 우주보다도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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