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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언니

2022.08.31 21:4408.31

 

 

나는 어린 계집애였는데, 안좋은 일을 겪은 후 남의 집에 맡겨 길러졌다. 또래의 딸이 있어 적응하기 쉬울 거라고 했다.

또래라고? 그녀는 나보다 3살이 많았다. 그 나이 때 3살이면 세대가 다른 거나 마찬가지다. 처음 와서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 무릎을 쓰다듬어 준, 언니.

 

몇 년이 지났다. 나는 내가 무슨 안좋은 일을 겪었는지 잊어버렸다. 그러면서 그 전의 인생까지 한꺼번에 잊어버렸다.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언니한테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웠다. 언니는 머리를 기르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단발을 유지했다. 언니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고 필요한 말만 했기 때문에 나도 과묵해졌다. 언니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는데, 그것만은 완벽하게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스무 살 때 다시 안좋은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었다. 야심가들이 나타났다.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사람들은 내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언니의 아버지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에겐 정부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다고 하셨다.

 

나는 위험이 싫었다.

나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곳에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기차가 도착했다. 역에 30분간 정차하기로 되어 있었다. 검은 쇳덩어리로 된 근육에서 아직도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옅고 파르스름한 새벽 공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언니가 나를 배웅 나왔다. 늘 그렇듯 단정히 머리가 짧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얼굴이라 사실 잘 모르겠다. 언니 얼굴은 그냥 언니 얼굴이다.

우리는 어쩐지 30분간 별 말 없이 그저 플랫폼에 서 있었다. 기차의 길다란 몸체를 바라보면서. 제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몸체에 난 구멍에서 끊임없이 들락날락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그들의 옷깃만큼이나 날카롭고 무감각했다.

 

기차가 기적소리를 뿜어올렸다. 더 이상 탑승을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나는 말했다.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실제로 말을 했는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언니는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니야. 왜 그런 말을 해. 다시 만날 수 있어."

 

하지만 점점 희박해지는 새벽만큼이나. 군인들의 총검을 식히는 여린 바람만큼이나. 결코 도망치지 않기로 한 언니와 언니 아버지의 차분한 눈빛만큼이나.

 

나는 잡고 있던 언니 손을 놓았다. 그러자 마지막 인사의 의미로 그녀가 나를 안았다. 포옹은 짧았고 나의 내부에 스며들었다. 나는 피난을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곳에서라면 내가 죽어도 좋을 유일한 안식처를 스스로 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적소리가 다시 울렸다. 군인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낡은 케이프를 여미고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꼭 잡으면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니의 단발머리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점점 멀어졌다. 이내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는 뒤섞인 빛의 형체가 되었다. 그런 후에도 나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내 손등에, 어깨에, 뺨에, 입술에, 아주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군부가 몇 번의 무력 시위를 했다. 그러나 정부와의 본격적인 충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신경은 잡아당겨질 대로 잡아당겨졌다가, 이내 느슨해지고 말았다.

 

여름이 되자 초현실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물놀이 유원지에 수백 수천의 사람이 들끓었다. 

 

내가 빌린 낡은 아파트는 냉방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유원지에 가서 야외 풀장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물소리, 살과 살이 부딪는 소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주변은 시끄러웠다. 그 소리가 한순간 더욱 높아지더니, 갑자기 고요해졌다. 탕! 총열이 총탄을 밀어올려 폭발시키는 소리가 난 직후였다.

녹색과 회색의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길고 검게 빛나는 총을 들이밀며 사람들을 몰아 댔다. 행락객들이 떨며 둥글게 몰려 서자 가슴에 황금색 별을 단 군인이 연단에 올라섰다. 짧은 연설. 군은 여러분을 해칠 생각이 없다. 무능한 정부로부터 보호해 주려는 것이다. 군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유원지 내에서 생활해주시기를 바란다. 이상.

군이 인질극을 시작한 것이었다.

 

군은 남녀와 연령에 따라 리조트 방을 분배했다. 단체생활이 시작되었다. 내키지 않는 아침식사, 불안한 눈빛의 교환, 더 불안한 점심식사. 시에스타.

 

나는 생각에 잠겨 터벅터벅 방을 향해 걸었다. 뜨거운 햇빛이 검은 머리칼을 갈색으로 바래는 오후. 흰색 타일이 달구어져 흰 불꽃처럼 보였다. 한 켤레뿐인 샌들이 낡아 발끝에서 간들거렸다.

 

위험을 피해 1,000킬로미터를 도망쳤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되고 말았다.

죽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일까.

 

함께 죽는 것과 혼자 사는 것 중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아니 나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그러나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파초가 심긴 모퉁이를 돌다가 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말소리였다. 그러나 잘못 들었을 리 없었다.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이미 내 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조금 빨라진 걸음걸이. 살짝 앞으로 내민 두 팔. 뺨에 번져 나가는 부드러운 홍조.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녀의 두 손이 나의 두 손을 잡았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완만한 동작으로.

 

"언니."

 

언니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편에서 걸어온 남자가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안색이었고, 안정된 눈빛이 언니를 닮았다. 나는 그와 악수했다.

 

"건강하지?"

 

군인 하나가 지나가다가 모자 챙을 어루만지며 멈추었다. 군은 인질들이 모여 있는 것을 싫어했다. 감시하고 방해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인 것처럼,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서로에게서 눈빛을 거두며 스쳐 지나갔다.

 

언니와 언니의 일행이 멀어진 후 나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모퉁이엔 여전히 파초가 한 주 서 있었다. 곧고 푸른 줄기. 태양빛을 받기 위해 잎사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왜 아까는 보지 못했을까?

꽃대가 찢어질 듯 부풀어 있다. 새빨갛고 커다란 꽃이 태어나려 하는 중이었다.

나는 살짝 비집고 나온 꽃잎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다가 제풀에 놀라 그만두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를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여기서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1주가 지났다. 

리조트는 객실이 100여 개. 방 하나에 5~6명 수용. 그러니 전체 인질 수는 500여명 정도였다. 군인들은? 내부 경비 인원은 일개 중대 150명 정도였다. 총기로 무장한 군인 150명을 500명의 일반인이 감당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인질들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혼자 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파초 아래서 잠깐 만날 때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혹시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위험해."

 

그녀는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겠어. 너야말로 조심해."

 

하지만 내가 아는 그녀는 멈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지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다. 산기슭의 수차처럼 규칙적인 물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알며, 자신이 대부분의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녀는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굽혀 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첫날 그녀와 함께 있던 남자는 누구일까. 어디 있을까. 동료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연인일지도 모른다. 그 중 무엇이라도 놀랍지는 않으리라.

 

방으로 돌아와 막 문 손잡이를 돌렸을 때였다. 갑자기 공기가 수선수선해지더니 밤하늘이 깨져 나가는 듯한 소음이 시작되었다. 쇳덩이를 두들기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점점 리듬을 갖추며 타악이 되어 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노래였다가, 곧 고함으로 변하며.

객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난간으로 몰려갔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노랫소리는 점점 커졌다. 가죽북 소리가 섞여 들었고, 류트 소리가 선율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머리 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그때,

 

탕!

 

총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총탄이 무언가를 꿰뚫는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모두가 불길한 예감 속에서 그 소리를 기다렸고, 총소리의 여운은 그만큼이나 오래 갔다.

노랫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쇳소리가 작아지고 현악기 소리가 분명해지며 오히려 점점 음악에 가까워졌다.

 

-오늘밤 나는 외롭고 그대는 아름다워

-어둔 밤하늘 아래 새빨갛게 핀 꽃봉오리여

 

-그대여 내 손을 잡아주오 그대여 나와 춤을 추어주오

-손을 잡아주오 손을 잡아주오 그대여 나의 손을

 

여러 목소리도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선창자 한 명의 목소리가 전면에 떠올랐다. 낮고 깊은 바리톤. 강렬한 울림을 가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대여 손을 잡아주오 그대여 그대여 나의 손을

 

탕! 탕! 탕!

 

사람들은 어깨를 떨며 난간에서 물러났다. 문들이 탁탁 닫혔다. 그러나 나는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들의 그림자가 내 모습을 감추어 주었다.

언니가 류트를 탈 줄 알던가?

가족 음악회에서 언니가 연주하곤 했던 악기가 뭐였지?

 

아직도 노래가 들려왔다. 물이 다 빠져 버린 야외 풀장과 먼지가 내려앉은 미끄럼틀을 지나 나는 점점 유원지의 출구 쪽으로 다가갔다. 한 남자가 안전 요원 조망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높이 타오르는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나는 간신히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탄식이 나왔다. 아아. 언니와 함께 있던 그 사람이다.

 

"멈춰."

 

차가운 총구가 내 가슴 한복판에 쿡 하고 와닿았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물러서."

 

총구만큼이나 어둡고 차가운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벌렸다. 잘못했다, 도망치려던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러서."

 

나는 물러섰다. 나를 리조트 안에 밀어넣고서야 군인은 돌아갔다. 나는 창문에 코를 누르며 어두운 창밖을 보려 애썼다. 희미한 노랫소리. 그 목소리 아래 잔잔히 깔리는 류트 소리.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아까 얼어붙었던 심장이 파삭파삭 얼음 깨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다.

 

모퉁이에 파초가 서 있었다. 새빨간 꽃이 하늘을 향해 온몸을 벌리고 피어 있다.

 

후텁지근한 여름 밤 공기 때문에 등과 머리칼이 땀에 흠뻑 젖었다. 나는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뛰었다. "거기 서라!" 외침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뜨거운 것이 귀와 어깨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야자수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횡단했다. 숨이 턱에 닿았을 때 밤하늘을 바라보자 안전 요원 조망대는 비어 있었다. 

 

"돌아서!"

 

나는 천천히 총구들을 향해 돌아섰다.

 

"손 들고 엎드려!"

 

이 명령에는 따르지 않았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군인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정부군이냐?"
 

나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군인들이 날카로운 얼굴로 내 행동을 살폈다. 나는 낡은 샌들을 벗었다. 두 짝 다 끈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대답해라. 3초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

 

나는 샌들 한 켤레를 발 앞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역시 양동 작전이었나?"

 

군인들의 잘못된 추측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함께 죽거나, 혼자 살거나. 

함께 살거나, 혼자 죽거나.

 

어느 쪽이든 혼자는 싫다. 나는 이다지도 외로움이 싫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총구가 내 가슴을 겨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을 흥건하게 적시던 땀은 흔적도 없이 식어 버렸다.

 

딩. 딩. 맑은 류트 소리가 현이 날아와 박히듯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여자의 노랫소리.

 

-오늘밤 별은 빛나고 노래는 가슴을 찢네

-석탄처럼 검은 가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그대여 노래를 멈추지 마오 나는 그대의

-그대의 노래를 듣고 있다오 나는 그대에게

 

-그대에게 가고 있소 이토록 아픈 가슴으로

-가고 있소 그대에게 나는 그대에게 나는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류트 소리, 노랫소리, 총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며 1초를 영원처럼 길게 만들었다. 나는 그제야 손을 들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군인들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쏘지 마세요! 정부 측이에요!"

 

 

 

 

 

연일 뉴스가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유원지에서의 대규모 인질극은 결국 정부 진압 작전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지직거리는 브라운관 티비 채널을 이곳저곳 돌려 보았지만 언니와 그 일행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그날 나는 몇 군데 상처를 입었다. 왼쪽 귓불이 날아갔고, 총탄이 오른쪽 옆구리와 갈비뼈 쪽을 찢고 지나가 피를 철철 흘리는 바람에 부상자 침대에 실려 나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말했다. 이만하길 천운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언니가 살아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환청이었는지 아닌지도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는 며칠이 지나 퇴원했다. 낡은 아파트로 돌아오자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땡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전 열한 시의 찬란한 햇살이었다. 한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며 내 거실에 앉아 있다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일어섰다. 그는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점잖게 밖에서 기다릴 처지가 못 되는 바람에."

"당신 얼굴 기억나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아니, 목소리였다.

 

"기억해 주시는군요. 오늘은 감사 인사를 겸하여 왔습니다."

"감사 인사요?"

"그날 당신이 중대 절반의 주의를 끌어 주지 않았더라면 작전은 실패했을 테니까요."

"......"

 

나는 이내 물었다.

 

"언니는요?"

 

그는 다시 모자를 쓰며 말했다.

 

"대장님은 곧 오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언니의 친구도, 동료도, 연인도 아니고 부하였던 것이다. 그가 다시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자매 분께서 시간을 보내시도록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네. 부탁합니다."

 

노랗게 니스를 칠한 나무 바닥에 거품처럼 햇빛이 끓고 있다. 규칙적인 발소리. 문고리 돌리는 소리.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는 삐걱 소리.

그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여전히 짧은 머리칼. 고요하여 한편으로는 무심해 보이는 얼굴.

언니는 내게 다가왔고, 우리는 포옹했다. 어깨 너머에서 파르스름하니 물기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쳤구나."

"별거 아니야."

 

그녀는 나를 안았던 팔을 풀고 가느다란 손끝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여기는 안전할 줄 알았는데. 고생이 많았어."

"언니야말로."

 

나는 따져 물었다. 언니처럼 곱게 자란 아가씨가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지. 아버지의 뜻인 건지. 앞으로도 이렇게 살 건지. 언니는 별 말 없이 내 질책을 들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손쉽게 침묵 뒤로 숨는다. 그녀의 침묵은 그림자 없는 모래사장처럼 희다.

수차처럼 끊임없이 쿨럭쿨럭 말이 쏟아져 나왔다. 돌아가라고, 아버지 곁으로 가서 안전하게 공부하다가 정부에서 자리를 찾는 게 좋겠다고, 류트는 총이 아니고 노래는 연설이 아니라고. 결국 군인이 되고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며,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언니의 눈동자는 저녁 바다에 잠겨드는 해 같았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부관이 네가 좋다는데."

"뭐?"

"너의 용기와 기지가 마음에 든대. 만나볼래?"
"무슨 소리야."

 

그녀의 눈매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내가 오고 싶었어."

"무슨......"

"항상 네가 내게 왔었지. 이번에는 내가."

 

무릎 위에 얹어 둔 손이 조금 떨렸다. 새털 같은 연청색 구름 더미를 뚫고 정오의 햇살이 마른 씨앗들처럼 흘러넘치고, 창밖 테라스에 내놓은 화분들에서는 황백색 꽃들이 피고 있었다. 누군가가 쓰다듬고 간 무릎에서 싹이 트는 것처럼 깊고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의자가 있어요 당신은 낡은 의자를

-저녁나절 테라스에 내놓았지요

 

-낡은 의자에 당신의 옷이 걸려 있어요

-돌아오기를 당신의 손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요 사랑은 낡은 의자에 피어오르는

-꽃만 같아요 이미 죽은 마음에 피어나는

 

나는 늘 언니의 손길과 관심이 그리웠다. 나는 내가 낡은 의자라고 생각했다.

낡은 의자를 찾아 여행하는 것은 누구일까. 꽃이 핀 테라스에서 쉬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일까. 익숙한 낡은 의자의 등받이에 자기 영혼을 걸어 놓은 것은 또 누구일까.

 

우리는 손을 잡고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거리로 걸어 나갔다. 건물에 기대 서 있던 남자가 노래를 멈추고 모자를 벗으며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여자아이 하나를 업고 들어와 네 동생이 될 거라고 말씀하시던 날 밤, 아버지는 친구 분들을 불러 거실에서 위스키 잔을 나누셨다.

 

"자넨 그 아이가 갱생될 거라고 보나?"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모르겠어. 그러나 애써 봐야지. 나는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물려진다고 보지 않네."

 

곧 설전이 벌어졌다. 나는 소파 한 귀퉁이에 끼어 앉아 오렌지 주스를 홀짝였다.

 

"어쨌든 자넨 대단해. 그 아이의 부모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서야 도무지......"

"그 아이에겐 부모의 정체를 가르쳐 주지 않을 거야. 알아서 좋을 게 없네."

"철저히, 교육으로?"

"교육으로 가능하리라 믿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열두 살 소녀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존재감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그 애는 실험 대상이 아니에요. 세상에 혼자 남은 가엾은 아이일 뿐이에요."

 

아버지의 얼굴에 당혹감과 노여움이 비쳤다.

 

"늦었다. 들어가서 자라."

 

나는 내 방으로 갔다가 흠칫 놀랐다. 그 애가 들어와 있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파묻혀, 두 눈이 두려움에 물든 채.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앙상한 무릎을 쓰다듬었다.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에겐 내가 무척 크게 보였을 것이다. 작은 입술 사이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니.

그때 나는 어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둠은 이 아이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 아이가 평생 도망쳐야 할 어둠이었다.

내가 그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자 어둠 속에서 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슬 끝의 고리가 철컥 채워지며 나와 그 아이를 연결했다.

 

나는 다짐했다. 좋은 언니가 되겠다고.

좋은 사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래서 꼭 너를 지켜줄게.

 

열두 살 소녀가 할 수 있는 가장 굳은 결심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결심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영향을 나와 그 아이에게 미치게 될지. 

 

방은 어둡고 고요했다. 나는 어리고 약해서 작은 빛도 불러올 수 없었지만 그 어둠을 따뜻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검은 창문 밖에 빛나는 별들과 그 아래 떠도는 풀꽃 향기를 이 아이와 나누고 싶었다.

잠옷 위에 입었던 겉옷을 벗어 걸쳐 주자 아이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기울어졌다.

그날 밤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가장 중요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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