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사람의 얼굴

2022.11.07 16:3011.07

 

 

이곳은 경비실이다. 공진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응시한다. 발밑에는 전기난로가 켜져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문에서 덜컥거리는 소리가 난다. 모니터에 뜬 CCTV 화면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는다. 오전 세 시 십삼 분, 주민들이 잠든 시각이다. 사방은 바닷속처럼 어둡고, 가로등과 불이 꺼지지 않은 몇몇 집들만 순수하리만치 환하다.

공진은 책을 펼쳐 든다. 『老子 道德經』이다. 가 없어지자 이니 니 하는 것이 있게 되고, 인간에게 지혜라는 것이 생기자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그는 눈에 들어온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여기 앉아있다 보면 꼭 도 닦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예전에 덕천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가 떠난 후, 불현듯 공진은 도덕경이 읽고 싶어졌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심오하고도 모호한 경구들은 밤에 홀로 깨어있는 심사와도 썩 잘 맞았다. 책을 읽는 데 다른 이유도 있다. 스마트폰은 눈이 부셔 오래 보기 힘들고, 티브이는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그 시간대에는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다. 공진에게는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대로라면 경비실 구석에 마련된 평상에서 커튼을 치고 잠깐 눈을 붙였을 테지만, 얼마 전 사건 하나가 터진 후로는 통 잠들지 못했다. 공진이 근무하던 날, 자정을 넘어 귀가하던 여고생이 아파트 근처의 풀숲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단지 외부에서 벌어진 일이고, 범행 장소는 CCTV가 설치되지 않은 사각지대였지만 공진은 문책 아닌 문책을 받았다. 좀 더 순찰에 신경 썼으면 예방할 수도 있던 거 아닙니까. 관리소장 앞에서 그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근무 태만이라 할 수는 없었다. 야간 근무를 서는 경비원은 한 명뿐이며, 그 시간대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엄연한 휴게시간이다. 설령 공진이 깨어있거나 순찰을 했다고 해도, 단지 바깥까지 살피기는 지난한 노릇이다. 그러나 공진은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뜨거운 돌덩어리를 삼킨 듯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자신이 지키는 공간에서, 누구도 당해서는 안 될 일이 태연자약하게 벌어졌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게다가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눈이 가려진 탓에 피해자는 범인을 보지 못했고, 목격자도 없었다. 수사가 지지부진한 사이 피해자와 그 가족은 자취를 감췄고, 집을 내놨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그 후로 공진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 시작했다.

공진은 십 분 정도 책을 읽다가 향초에 불을 붙인다. 라벤더 향이 경비실 내부를 가득 메운다. 유리병에 담긴 향초는 주민이 선물로 준 것이다. 공진은 과하다 싶을 만치 선명한 그 향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자신들까지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기꺼이 받았다. 경비실에서 노인네 냄새가 지독했던 모양이지. 덕천은 이죽거렸다. 공진은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나무랐지만, 그 뒤로 밤이면 향초를 한 시간씩 켜둔다. 그러고 나서 환기를 시키면 냄새가 한결 맑아진 느낌이 든다.

그때 단지 입구로 불빛이 쏟아진다. 택시 한 대가 들어서고 있다. 느릿느릿 단지를 선회한 택시는 102동의 3-4라인 입구에 멈춰 선다. 차 문이 열리면서, 모직 코트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내린다. 택시는 떠나고, 남자는 3-4라인 입구를 향해 갈지자로 걷는다. 심상한 풍경이다. 거기까지는. 출입구에서 남자는 장갑을 벗고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순간, 화단 근처에 켜켜이 쌓인 어둠이 꿈틀거린다. 스르륵, 유리문이 열린다. 남자가 들어간 뒤에도, 문은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다. 화단의 어둠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형체 하나가 튀어나와 날파람처럼 보도블록을 가로지르고, 계단을 뛰어올라 유리문을 통과한다.

뭐지?

공진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속도가 워낙 빨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으나, 그 형체는 사람이 분명했다. 자동문이 열린 틈을 타 숨어드는 걸 보면 주민은 아닌 듯하다. 도둑인가? 공진은 서둘러 파카를 걸치고 3-4라인 출입구를 향해 달려간다. 엘리베이터 홀에는 모직 코트의 사내뿐이다. 비상계단을 지하실과 3층까지 신속히 훑어보지만, 인적은 없다. 그사이 더 높은 층까지 올라간 걸까? 공진은 밖으로 나와 계단의 비상등을 살피지만, 불이 켜진 층은 한 곳도 없다. 자동문을 몰래 들어왔는데 세대 현관문을 열었을 리는 없다. 옥상도 잠겨 있으니, 비상계단 어딘가에 숨었을 가능성이 컸다. 공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 후, 한 층씩 내려오며 로비와 비상계단을 살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찾을 수 없다.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마침내 1층까지 내려온 공진은 하릴없이 경비실로 돌아간다. 셔츠가 땀으로 질척거리고, 무릎이 시큰거린다. 나쁜 목적으로 들어온 밤손님이라면 언제가 됐든 출입구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진은 3-4라인 출입구를 지켜보기로 한다. 한편으로, 이런 식이라면 자동문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회의감이 밀려든다.

자동문이 설치된 건 두 달 전이다. 오래 계류되어 오던 안건이었으나, 새로 부임한 동대표가 의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마침내 통과되었다. 고령자가 이용하기 불편하다는 점, 추가로 비용이 든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자동문과 도어락이 아파트 시세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더 힘이 실렸다. 요새 자동문 없는 아파트가 어딨어요? 아침부터 트럭을 몰고 나타난 인부들이 기존 여닫이문을 떼어내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드릴 소리가 단지 내부를 성마르게 두드려대자, 몇몇 주민들이 뒤늦게 세대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달려왔다.

“저런 걸 왜 다는지 모르겠어요. 매번 번호 누르기 귀찮은데.”

꼬마가 종알거렸다. 공진은 귤을 건넸고, 꼬마는 공진과 덕천 사이에 앉아 귤을 까먹었다. 한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에는 새 모양의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학원 버스를 기다릴 때 경비실 안에 들어와 있곤 하는 아이였는데, 태도가 올차고 또랑또랑 말을 잘해 모두가 귀여워했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땐 저런 거 없었죠? 옛날에는 열쇠도 없고, 이웃끼리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았다던데요.”

“글쎄.” 덕천은 귤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옛날이라고 해서 딱히 서로를 더 믿었던 건 아니란다.”

작업은 이주 만에 끝이 났다. 모든 세대의 현관문은 잠금장치가 도어락으로 바뀌었고, 각 동의 출입구에는 자동문이 들어섰다. 사람들의 주머니에서는 열쇠가 사라졌고, 한 조에 두 명씩이던 경비원은 한 조에 한 명씩으로 줄었다. 덕천은 사직서를 냈다. 안 그래도 좀 쉬려던 참이었어. 연신 고맙다고 말하는 공진에게 덕천은 담담히 대꾸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늦도록 소주를 마셨다.

동이 틀 때까지, 공진은 3-4라인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출근하는 주민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지만 그중 낯설거나 수상쩍은 사람은 없다. 공진은 깊게 한숨을 내쉰다.

 

헛것을 봤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씩 악화하는 백내장이 빚어낸 왜곡일 수도 있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기에 공진은 그렇게 눙치고 넘어가려 했다. 나흘 후, 공진은 다시 그 형체와 마주하게 된다.

오전 한 시가 넘어 귀가하던 젊은 부부가 출입구를 통과할 때, 예의 그 불청객이 숨어든다. 공진은 사람의 팔과 다리, 후드를 눌러쓴 뒤통수를 똑똑히 분간한다. 틀림없다. 그때 그놈이야. 이번에는 성급히 쫓아가는 대신, 출입구 앞에 서서 아파트 외관을 살핀다. 2층의 비상등이 켜지고, 뒤이어 3층의 비상등이 켜진다. 4층, 5층, 6층… 놀라운 속도다. 거의 날아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도미노처럼 켜지던 비상등은 9층에서 멈춘다. 공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향한다. 어쩌면 범인은 저놈이 아닐까. 공진은 생각한다.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몸속에 잠재된 어떤 감각이 끊어질 듯 팽팽해진다. 아니라 해도, 수상한 사람은 일단 쫓는 게 맞다. 그러라고 월급을 줘가며 이 시간까지 사람을 두는 게 아니겠는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공진은 빠르게 홀과 계단을 훑는다. 아무도 없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 있다면 숨소리든 발소리든 들릴 것이다. 혹시라도 903호나 904호에서 어떤 소음이 들린다면, 다음 날 아침 인터폰으로 자초지종을 물을 정도의 근거는 될 것이다. 그러나 음 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센서등이 꺼지면서 공진은 묵직한 어둠에 잠겨 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사이 벌써 사라져 버린 듯하다. 방금 그 속도라면,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가 아파트를 빠져나가고도 남았다.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냄새다. 콘크리트와 페인트 냄새가 희미하게 감도는 평소의 공기가 아니다. 한참 코를 킁킁거린 끝에 공진은 냄새의 정체를 파악한다. 약간의 진흙 냄새가 뒤섞인, 쌉싸래한 풀 냄새다. 외부에서 유입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들뜨고 생생한 향이 내부를 떠돌고 있다. 누가 오긴 왔었어. 공진은 확신한다. 하지만 침입자가 어떤 목적으로 이 아파트에 침입한 것인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도둑인가? 아니면 주민인가? 떳떳하게 집으로 들어오지 못할 사연을 가진?

그 후로도 공진은 두 번 더 그 광경을 목격한다. 심야에 들어오는 주민을 따라 자동문을 통과하고, 9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강도가 침입했다거나, 무언가 도난당했다는 신고는 접수되지 않았다. “아니, 본 적 없는데.” “글쎄. 뭔 일이라도 있나?” 다른 조의 경비들에게도 물어보지만, 대답은 한결같다. 공진은 혼란스러워진다. 정말 헛것을 보는 것인가? 헛것이 아니라면, 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가? 어째서 이 아파트에 침입하는가? 그저 보통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일 뿐인데… 의기소침해지는 대신, 공진은 마음을 다잡는다. 헛것을 볼 정도로 노쇠하지는 않았다. 동료들이 보지 못한 건 그때가 휴게시간이기 때문이다. 숨어드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대로 놔둘 수 없다고 공진은 생각한다. 결국,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공진은 9층의 비상계단에 잠복하기로 한다. 3-4라인에는 금요일이면 두어 시쯤 귀가하는 대학생이 있다. 불청객이 그 틈을 놓칠 리 없다고 그는 예상한다. 경비실에 비치된 단봉을 꺼내 품속에 넣고, 공진은 9층과 10층 사이 계단에 쭈그리고 앉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가늠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 창문 밖으로 컴컴한 101동 건물과 샛노란 반달이 보인다. 턱없이 옛 노래가 의식을 비집고 나온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공진의 맥박 소리와 구별되지 않을 만큼 미약했으나, 반복될수록 조금씩 커진다. 소리의 정체는 명확하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다. 공진은 이를 앙다물고, 품속에 손을 넣어 단봉을 쥔다.

불청객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키는 백칠십 센티미터 정도. 낡은 후드티와 청바지 차림이다. 얼굴은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바싹 마른 데다 볼품없는 체형이지만, 움직임은 어찌나 날랜지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는 것만 같다. 9층으로 올라서기 직전, 불청객은 흠칫 멈춰 선다.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9층의 비상등이 켜지지만, 불청객은 이미 등을 돌리는 중이다.

“너, 뭐 하는 놈이냐?”

공진은 몸을 일으키며 나직하게 묻는다. 행여나 주민들이 깨어날까 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다. 침입자는 대답 없이 계단을 내려간다. 쫓아가려 하지만, 오래 쪼그려 앉아있던 탓에 다리에 쥐가 올라온다. 공진은 신음을 흘리며 난간을 부여잡는다. 그 사이 발소리는 멀어지고, 옅어져 간다. 어차피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진은 일흔이 넘은 나이고, 과체중이며, 무릎도 시원치 않다. 이렇게 경고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공진이 느낀 감정은 뿌듯함이 아니라 당혹스러움이었다.

침입자가 등을 돌리던 찰나, 막 뻗어 나온 비상등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슬쩍 긁어냈을 때, 공진은 똑똑히 보았다. 북슬북슬, 무성히 뒤덮인 노란 빛의 털을.

경비실로 복귀하고도 공진의 가슴은 두방망이질 친다. 혹 부정맥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수염인가? 아니면 염색한 머리칼이 삐져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순간 뇌리를 타고 흐른 찌릿한 감각은,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고 목청껏 외치고 있다. CCTV를 돌려보고 싶지만, 지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이 공진에게 없다. 공진은 보온병에서 둥굴레차를 따라 한잔 마시고, 향초를 켠다. 그리고 여러 번 심호흡 한다. 날이 밝으면, 관리소장이 출근하는 대로 이것을 보고하리라.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공진은 책을 펴든다. 모든 사물은 지나치게 왕성하면 곧 쇠퇴하게 마련이다. 이런 것을 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한다. 에 어긋나는 일은 오래가지 못한다. 몇 구절을 중얼거리던 공진은, 문득 한쪽 뺨에 열기가 쏟아지는 듯한 괴이한 느낌에 고개를 돌린다.

널찍한 유리창 한구석에 무언가가 들러붙어 있다. 그 무언가는 공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것은 고양이의 얼굴이다. 단지 내에는 저들끼리 살아가는 길고양이가 몇 마리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온 것이겠거니 생각했으나, 공진은 이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고양이의 얼굴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삵의 얼굴이다.

고양이보다는 골격이 크고, 생김새도 더 사납다. 둥근 귀와 눈 위부터 코까지 내려오는 11자 무늬는 분명 삵의 특징이다. 공진은 살면서 삵을 여러 번 보아왔다. 어릴 때는 들과 냇가에서, 젊을 적 장교로 복무할 때는 산에서 종종 마주쳤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야외에서 종종 마주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얼어붙은 냇가에서 삵이 오리를 뜯어먹던 광경이 떠오른다. 뜨끈히 피어오르는 김, 바닥을 나뒹구는 깃털, 정적 속에 흐르던 날개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씹히던 소리. 공진과 삵의 시선이 엇갈린다. 세로로 길쭉한 동공, 피투성이가 된 입가와, 달빛 아래 서늘히 빛나던 수염.

삵을 본 지도 오래됐어. 요새도 돌아다니는가? 삵은 미동 없이 공진을 노려본다. 그런데… 공진은 의아해진다. 어떻게 저기서 날 보고 있는 거지? 경비실의 창문은 사람의 허리께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삵의 얼굴이 들러붙은 위치는 창문의 중간쯤이다. 삵의 키로는 저 높이에 있을 수 없다. 발을 디딜만한 받침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공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러자 삵의 얼굴이 사라진다. 공진은 경비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경비실 앞에는 아무것도 없고, 멀리서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후드티와 청바지 차림의 뒷모습이, 공진의 시야에 사진처럼 찍힌다.

 

반장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중년의 부인이 비닐봉지를 건넨다. 공진은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한 후 그것을 받아 책상 위에 놓는다. 봉지 안에는 인절미가 들어 있다.

“저… 102동 사시지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러세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9층에 사는 분들을 아시나요? 9층요? 네. 글쎄요… 아랫집 사람도 잘 모르는걸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어서요.

부인이 돌아가고, 공진은 봉지를 열어 인절미의 상태를 확인한다. 아직 말랑말랑하고, 쉰내도 나지 않는다. 공진은 다시 봉지를 여민 후 사물함 안에 넣어 둔다. 이따금 주민들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간혹 못 먹을 것들이 들어올 때도 있었다. 유통기한이 보름은 지난 요구르트나 곰팡이가 허옇게 핀 초콜릿과 같은. 한번은 그런 것을 모르고 먹었다가 단단히 탈이 난 적이 있었다. 다 알고 그런 거야. 버리기 아까우니 경비나 갖다주자, 그런 심보라고요. 딸은 금방이라도 아파트를 뒤집어놓을 듯 화를 냈지만 공진은 손사래를 쳤다. 대부분 좋은 음식이다. 공연히 소란 일으키지 마라.

공진은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102동 9층에 관해 묻는다. 대개 고개를 젓지만, 이따금 아는 체를 하는 사람도 있다. 903호는 비어 있어요. 집주인이 팔려고 내놔서 세입자를 안 받는다고 그러더라고요. 906호는 살고 있긴 한데… 그냥 빤한 사람들인데? 전기 주임의 말이다.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좀 시끄러웠지. 재산 다툼을 하는지 허구한 날 형제들이 몰려와 쌈박질을 했거든. 경찰도 몇 번 들락날락했지. 자식 놈이 애미를 두드려 팼단 얘기도 있던걸?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올 때마다 경비실에 들러 수다를 떨고 가는 노파의 말이다. 그 집에 자살한 사람이 있었대요. 어떤 아주머니였는데, 남편이 바람도 나고 애도 가출해서 홧김에… 부녀회 총무의 말이다. 흠, 905호였나. 거기 자식이 좀 이상해요. 그 집 아저씨하고 안면이 좀 있거든요. 자세히는 모르는데, 히키코모리 기질도 있고… 아, 밖에 안 나가고 집에만 박혀 있는 애들 말하는 거예요. 여튼… 옷도 희한하게 입고 다니고. 정상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반바지에 패딩만 걸치고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십 대 남자의 말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듯하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한 지 의심스럽다. 공진을 질문하기를 그만둔다.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진정으로 그가 하고 싶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삵의 얼굴을 한 인간을 본 적 있습니까?’ 하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보지 못한다. 누가 이 말을 믿어줄 것인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모두가 경비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파트의 안전을 맡기기에 공진이 너무 늙고 오락가락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그럴 바에는 혼자서 조용히 알아보는 게 낫다. 외롭고 막막해도 그편이 낫다. 이럴 때 덕천이 같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 흉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공진은 자신을 노려보던 삵의 얼굴과, 달아나던 인간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어쩌면 요괴가 아닐까? 시체를 뜯어먹은 삵이 인간으로 둔갑하여 온갖 협잡질을 저지른다는 옛이야기가,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부옇게 떠오른다. 정말 옛날이야기로군, 하고 공진은 생각한다. 그때는 모두가 삵을 미워했다. 밤에 축사로 숨어들어 닭을 물어가던 놈, 강아지를 물어 죽이고 때로 사람에게도 발톱을 드러내던 놈. 그래, 이 아파트에는 뭐가 있어 이리 기어드는가?

멀리서 꼬마가 오는 것이 보인다. 패딩 점퍼를 걸치고 귀마개를 한 아이 뒤로 길고양이 두 마리가 졸졸 따른다. 아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자, 고양이들이 다가와 그것을 핥는다. 고양이용 간식인 듯하다. 꼬마는 공진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공진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이가 경비실 안으로 들어오자, 공진은 인절미가 든 봉지를 꺼내며 먹겠냐고 묻는다. 아이는 냉큼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손가락과 입가에 누런 콩고물이 묻는다.

“얘야.”

“네, 경비 할아버지.”

“혹시 요새 여기서 수상한 사람 본 적 있니?”

“수상한 사람이요?”

“음, 여기 사는 사람 같지 않고… 뭐랄까. 좀 이상해 뵌다거나, 하는 짓이 괴이쩍다던가… 평소 같지 않은 일도 좋다.”

꼬마는 고개를 까닥거리다가, 검지로 창밖을 가리킨다. 꼬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경비실 쪽을 흘금거리고 있다.

“쟤들이 좀 이상하긴 해요.”

“고양이들?”

“네. 요새 잘 보이지도 않고, 마주쳐도 예전 같지 않아요. 기운도 없고, 풀도 죽어 있고… 좀 슬퍼 보여요.”

“슬퍼?”

“네. 꼭 괴롭힘당하는 애들 같아요.”

공진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고양이는 고개를 떨구더니 몸을 돌려 화단 쪽으로 호다닥 달아난다. 털은 곤두서있고, 꼬리는 바닥에 끌릴 듯 처져 있다. 괴롭힘당하는 애들 같다, 고 공진은 되뇌어본다.

 

자네를 자네 머릿속에 있는 고놈으로 생각하지 말게. 그 친구는 이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니까. 공진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낙엽을 치우거나 눈을 쓸 때면 덕천은 그렇게 나무라곤 했다. 사실 그 말이 맞다. 공진의 육체는 동적인 작업을 감당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 젊었을 적 그는 어깨가 벌어지고 근육량이 많은 몸을 갖고 있었다. 체중도 필요 이상으로 나간 적이 없다. 그러나 오십 대 중반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급속도로 몸이 허물어졌다. 그전까지는 젊은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체력이라 자부했는데, 환갑이 지나고 나자 누가 봐도 볼품없는 노인의 몸이 되었다. 재작년에는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는 수술을 받았고, 통풍은 만성인지 오래다. 육체의 거의 모든 부위가 삐걱거리고 있다.

그러나 물러설 생각은 없다. 삵의 음험한 얼굴을 떠올릴 때면, 공진은 뱃속에 든 뜨거운 돌멩이가 요동치는 기분이 든다. 그런 괴물이 아파트 근처를 어슬렁거리게 놔둘 수 없다. 만약, 죄를 지은 놈이라면 반드시 잡아서 벌을 받게 해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공진은 파카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단봉과 전기충격기를 챙긴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가죽 장갑을 낀다.

경비실을 나서자, 차디찬 공기가 옷 사이를 파고들어 메마른 피부를 감싼다. 흘러나온 입김만 포근하다. 공진은 손전등을 켜고 단지 내부를 오래 순찰한다. 화단, 울타리, 주차장 구석 등 불빛과 CCTV가 닿지 않는 곳들을 꼼꼼히 훑는다. 조금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달려가 한참을 살핀다. 102동의 3-4라인을 지날 무렵, 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경비실에 달린 전등 앞에 누가 서 있다. 광원을 짊어진 채로, 그는 뚜벅뚜벅 공진 쪽으로 걸어온다. 공진의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 온다.

“너, 거기 서라.”

공진은 3-4라인 출입구를 가로막고 선다. 상대방도 멈춰 선다. 푹 눌러쓴 후드 사이로 털북숭이 얼굴과 형형한 눈동자가 보인다. 샛노란 칼 눈은 역시나 인간의 것이 아니다.

“못 들어온다.”

공진은 단봉을 꺼낸다. 저놈을 제압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계단을 훨훨 날 듯 올라오던 모습을 생각하면, 저 괴물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힘도 세고 날랜 게 분명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공진을 시체로 만드는 데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격투를 벌이게 된다면, 공진은 최대한 버티면서 소란을 일으킬 셈이다. 누군가 달려와서 현장을 확인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쓰러지기 전에.

삵 얼굴은 쉽사리 달려들지 않는다.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긴장이 다소 누그러지자, 공진은 적을 살필 여유가 생긴다. 생각만큼 흉포한 기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위축되어 보이기도 하다. 공진을 공격할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뭐 하는 거지? 공진은 의아해진다. 삵 얼굴은 천천히 오른손을 든다. 그의 손가락이, 인간의 것과 다를 바 없는 검지가 자동문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맞붙인다.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닫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린다.

“들여보내 달라고?”

삵 얼굴은 대답 없이 두 가지 행동만 반복한다. 공진은 고개를 젓는다.

“안 된다, 이놈. 말을 해라. 네가 누구인지부터 밝혀.”

공진이 단봉을 거며 쥐고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삵 얼굴은 흠칫 뒤로 물러난다. 어쩐지 맥 빠지는 기분이 든다. 공진이 달려들자 삵 얼굴은 아예 등을 돌려 후다닥 달아나 버린다. 뭐야, 이거. 공진은 중얼거린다. 이런 결말은 예상 못했는데.

그 후로는 삵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밤마다 공진은 경계를 늦추지 않지만 더는 자동문에 숨어드는 자도, 수상한 기미도 없다. 묘한 승리감이 피어오른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란 말이지. 나 아직 안 죽었어. 삵 얼굴을 몰아붙여 성폭행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추궁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한 번 더 나타나면 요절을 내고 말리라고 공진은 다짐한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세상일이 대개 그러하듯이. 어느 순간부터, 습격이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외부 차량 단속을 하던 공진은 차량 사이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덩어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으악! 공진의 손등과 팔목에 네 줄의 기다란 생채기가 남는다. 공진은 고함을 질러보지만, 그것은 바람같이 차량 사이로 사라져 버린다. 어찌나 잽싼지 그 뒷모습조차 보지 못한다. 공진은 경비실로 돌아와 일단 티슈로 피를 닦아내지만, 갈라진 살갗이 이상할 정도로 쓰리고 욱신거린다. 구급함을 여기 어디에 뒀던 것 같은데. 책상과 서랍을 뒤지는데 창문이 툭, 하고 울린다. 노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둔중한 울림이다. 공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에 핏자국이 묻어 있다.

경비실 앞에는 고양이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다.

숨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몸은 따뜻하다. 목덜미와 어깨 부근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데, 깊숙한 잇자국이 어지러이 나 있다. 누구의 짓인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도. 먹지도 않을 동물을 죽이는 데 힘을 낭비하는 포식자는 없다. 그런 짓은 대개 인간의 소행이다.

습격은 교묘하고도 집요하다. 아파트 분리수거 날 공진은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박스를 집다가 고함을 지른다. 빈 과자 상자와 종이 뭉치 사이에 과도가 빼꼼히 숨어 있다. 다행히 크게 베이지는 않았으나, 엄지손가락에서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온다. 어머, 큰일 날 뻔했네요. 누가 이런 짓을? 고함을 듣고 달려온 젊은 여자가 혀를 찬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공진은 의자 한 가운데 박힌 못을 본다.

음식물쓰레기 수거함에서 악취가 난다는 민원이 접수된다. 수거함을 열어보니, 부패한 산비둘기의 사체가 그득 쌓여 있다.

순찰 도중 나무 위에서 쏟아진 액체를 공진은 엉겁결에 몸을 굴려 피한다. 액체를 맞은 아스팔트에서 흰 연기가 맹렬히 피어오른다.

날 없애려 드는군. 정면으로 상대할 자신이 없으니, 온갖 비열한 수법만 동원하는 거야. 공진은 잔뜩 신경이 곤두선 채로 주변을 살피고 또 살핀다. 차츰 눈에 핏발이 선다. 그런 긴장 상태를 오래 버텨낼 여력이 그에게는 없다. 자정이 넘자, 수마가 덮친다. 그게… 그런… 자리에 앉은 채로 몇 시간 동안 그는 혼곤히 잠든다. 그날 밤, 두 번째 사건이 터진다. 오전 두 시경, 취한 채로 귀가하던 중년의 남자가 퍽치기를 당한다. 지갑에 있던 현금, 시계, 반지, 스마트폰은 깡그리 탈취되고, 남자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발견된다. 이번에도 단지 바깥, CCTV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다.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다.

 

공진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평생 고향을 떠난 일 없이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산 친구다. 공진의 부탁을 들은 친구는 놀란 듯 말이 없다가, 일단 알아보겠다고 답한 후 전화를 끊는다. 며칠 후, 공진은 친구로부터 택배를 하나 받는다. 공진이 부탁한 물건은 누에고치처럼 두꺼운 천으로 꽁꽁 싸여 있다.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친구는 뭉친 신문지까지 가득 채워 넣었다.

무슨 일에 쓰려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해라. 이거 불법이야. 친구는 당부의 문자까지 덧붙인다. 공진은 가위로 포장을 잘라낸다. 물건은 바로 덫이다. 재질은 무쇠이고, 지름은 삼십 센티미터, 표면은 검게 타르 칠이 되어 있다. 삐죽빼죽한 턱의 이빨은 날이 서 있고, 이리저리 얽힌 굵은 스프링과 철사는 더없이 억세 보인다. 주로 밀렵에 쓰이는 물건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사용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럼 괴물에게는 어떤가. 공진은 혼잣말로 묻는다. 그런 건 법에 나와 있지 않겠지.

공진은 퇴사를 권유받았다. 요즘 몸도 많이 안 좋아지신 듯한데, 좀 쉬시는 게 어떨까 해요. 경비지도사는 완곡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의 책임이라 보기 어려웠으나, 사람들은 누구에게든 책임을 묻고 싶어 했다. 경비실 CCTV에는 공진의 잠든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고,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유가족들은 관리실로 몰려와 거세게 항의했다. 공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공진은 그달 말일까지만 근무하고 계약을 해지하기로 경비업체 측과 합의를 보았다.

공진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직 나약하고 칠칠맞은 자신을 탓했을 뿐이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죄책감에 밥을 넘기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순순히 옷을 벗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야간 근무 때 다시 3-4라인 출입구로 숨어드는 형체를 발견하자, 그의 눈빛이 하얗게 타올랐다.

공진은 3-4라인 출입구 옆 화단에 덫을 설치한다. 오래 관찰한 덕에, 삵 얼굴이 아파트로 숨어들 때 화단의 어느 지점에서 튀어나오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자네, 제정신인가? 덕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이 야심한 시각에 화단을 거니는 주민은 없을 테지만, 끔찍한 우연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다. 애먼 길고양이가 걸려들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공진 자신이 다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떤 위험의 소지도 공진의 완강한 결단을 뚫지 못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일념만이 들끓는다. 놈을 죽인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그 악당을 처치하고 그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공진은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믿는다.

공진은 출입구 자동문과 센서등의 전원을 내린다. 어둠이 3-4라인 출입구를 집어삼키고, 자동문은 입을 벌린 채 굳어져 버린다. 경비실로 돌아온 공진은 그곳의 불마저 끈다. 그리고 책상에 가만히 엎드린다. 이 모든 게 투항의 의미로 비치기를 공진은 바란다. 늙은 경비는 너무도 지쳐버렸고, 더 이상 싸울 기력 같은 건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엎드린 상태에서도 시선은 3-4라인 출입구로 향해 있다. 삭풍이 불자 화단의 나무들이 몸을 떨고, 그림자들도 일렁이며 화단을 쓸어내린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겠지. 그러면 저 화단과 나무들에서 꽃이 필 거야. 목련도 피고, 벚꽃도 피고, 개나리도 피겠지. 여기서 꽃을 몇 번이나 봤던가? 문득 공진은 자신이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덕천 뿐만이 아닐지 모른다. 정말로 그는 지쳐버렸고, 싸울 기력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순간 내려앉은 눈꺼풀에 그는 깜짝 놀란다. 깨어있는 상태인지, 잠든 상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게 흐릿하고 창백하기만 하다. 잠깐, 내가 무엇을…

무참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공진은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온다. 다행히 밖은 아직 어둡다. 누군가가 다리를 쩔뚝이며 달아나고 있다. 아스팔트 위에 핏자국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 덫은 오른쪽 발목에 물려 있고, 바짓단은 피에 젖었다. 익숙한 후드티와 청바지를 확인하고서 공진은 환호한다. 됐다, 이놈. 잡았어! 그는 한 손에 단봉을 거며 쥐고, 한 손에 전기충격기를 들고 삵 얼굴에게 달려간다.

공진을 본 삵 얼굴은 인간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모를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속력을 높인다. 그러나 살 속을 파고드는 덫 때문에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넌 이제 끝장이다. 공진은 중얼거린다. 전기로 지지고, 죽기 직전까지 단봉으로 두드려 팰 것이다. 너에게 당한 사람들의 고통이 천분의 일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삵 얼굴은 다리를 끌며 기어가고 있지만, 어림없는 속도다. 괴물이 코앞에 있다. 공진이 팔을 치켜들려는 찰나, 화단이 꿈틀거리더니 무언가가 튀어나와 먼저 삵 얼굴을 덮친다. 공진은 우뚝 멈춰 선다.

고양이보다는 크지만 맹수는 아닌, 네발 달린 짐승이 삵 얼굴을 공격한다. 삵 얼굴은 팔을 휘저어 막으려 해보지만, 덫에 걸린 발 때문에 방어가 여의찮다. 짐승은 노련하면서도 침착하게, 앞발로 삵 얼굴의 몸통을 할퀴고 이빨로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금세 후드티가 너덜너덜해지고 피에 젖는다. 천과 살점이 뜯겨나가는 지독한 소음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이게 어찌 된 상황인가. 공진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짐승의 몸짓이 너무도 사납고 맹렬해 차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공격, 아니 일방적인 폭력은 한참 뒤에 끝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여전히 다리에 덫을 단 채로 삵 얼굴은 엉금엉금 기어 아파트를 벗어난다. 짐승은 그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며, 한 발씩 따라간다. 급할 게 뭐가 있냐는 듯한 자세다. 벌레를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실컷 데리고 놀다가 숨을 끊어버릴 작정으로 보인다. 어쩌면 삵 얼굴의 죽음을 위해 따로 준비해둔 장소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진은 홀린 듯 그 뒤를 따라간다. 무슨 행동을 어떻게 취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공진의 발소리를 들은 짐승이 공진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헉, 하고 짧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그는 뒤로 주저앉는다. 검고 짙은 눈썹, 동그란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불그스름한 입술. 그리고 털 없이 매끈한 피부.

짐승의 몸통에는 사람의 얼굴이 붙어 있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대체… 공진의 손에서 단봉과 전기충격기가 힘없이 굴러떨어진다. 짐승은 피 묻은 앞발을 혀로 슥 핥은 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손등과 팔목의 생채기가 벌겋게 부어오른다. 견디기 힘들 만큼 욱신거리고, 온몸이 열로 펄펄 끓어오른다. 공진은 상처 속에 병균이 우글거리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에게서 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균들이, 빠르게 공진의 육체를 잠식하고 있다. 어차피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로 우글거리지 않는가. 공진은 홀로 탄식한다.

아침이 밝자, 혈투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다. 아스팔트의 핏자국도, 삵 얼굴의 시체도 없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누군가 치운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미친 것인가? 공진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스스로가 제정신이라는 믿음은, 이해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크게 균열이 난다. 사라진 덫도, 상처의 고통도 믿음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괴로운 사실은 이런 것이다. 설령 내가 제정신이고, 간밤에 벌어진 일들이 현실이라 해도, 내가 행동으로 옮긴 선택은 어떤 결과를 초래한 것인가. 혹시 나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고 만 것이 아닐까. 상처를 소독할 생각도, 붕대를 감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공진은 허공만 응시한다.

그는 책을 펴든다. 무엇이든 매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도 잡지 않는다면, 공진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말 것만 같다. 는 만물의 은신처이다. 그곳은 착한 사람은 보물로 삼는 곳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보호되는 곳이다. 그때 누가 경비실의 문을 두드린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젊은 남자다.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미소가 정답다. 수고하십니다. 이것 좀 드셔보시라고 가져왔어요. 남자가 들고 있는 건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커다란 호두파이다. 공진은 음식을 받는다. 손에 닿은 접시의 밑바닥이 따뜻하다. 재료가 남아서 여러 개 구웠거든요. 달지 않아서 입맛에 맞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하고 공진은 꾸벅 인사를 한다.

음식을 받고 나자, 공진은 더욱 참담해진다. 나는 일을 망친 사람이다. 이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공진은 머리를 감싸 쥔 채로 고개를 숙인다.

“경비 할아버지, 어디 아프세요?”

눈을 뜨니 꼬마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공진을 살피고 있다. 공진은 애써 미소를 짓는다.

“학교 다녀오는 길이니?”

“네. 근데 할아버지, 혹시 그만두세요?”

“그래. 이번 달까지만 여기 있을 거란다. 어디서 들었니?”

“엄마가 옆집 아줌마하고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너무 늙어서 통 일을 시킬 수가 없대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잖아요. 힘도 세고 말씀도 잘하시잖아요. 억지로 관두는 거면 제가 엄마한테 가서 얘기할게요.”

공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몸이 좋지 않아서 쉬는 거라고 대답한다. 꼬마는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이지만 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공진은 꼬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빵 먹을래? 하고 묻는다. 접시의 비닐랩을 벗기자 아이는 금세 헤헤 웃는다. 와, 우유하고 같이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요. 공진은 은박접시를 꺼내고, 파이를 큼지막하게 한 조각 잘라 담는다. 그리고 비닐랩을 빙 둘러 꼬마에게 건넨다.

“저하고 꼭 인사하고 가셔야 해요?”

꼬마를 향해 공진은 손을 흔든다.

이번 달 말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떠나야 할 순간은 바로 지금 같다고, 공진은 생각한다. 공진은 주섬주섬 자신의 짐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꼬마를 제외하고는, 오늘 관둔다 해서 아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업체에서는 즉각 내일부터 새 인원을 투입할 것이다. 문밖에서 컹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열어보니, 웬 개 한 마리가 앉아있다. 온몸이 꼬질꼬질한 잡종견이다. 주인을 놓쳤거나 유기된 지 오래된 듯하다. 그 초라한 몰골을 보자 공진은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그는 파이 한 조각을 떼어 개에게 던져 준다. 개는 냉큼 받아 먹어 치운다. 두 조각 째도, 세 조각 째도 순식간 사라진다. 꽤 오래 굶은 모양이다.

다를 게 없구나. 네 처지나, 내 처지나. 공진은 가방의 지퍼를 닫고, 경비모를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그때 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개가 픽 쓰러진다. 입에 거품을 문 채 바들바들 떨던 개는 이내 숨을 거둔다. 공진은 놀라 개를 살핀다. 혀를 길게 빼문 개의 입에서 끈적한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다. 왜 갑자기… 순간, 공진은 호두파이를 가져다줬던 남자가 일전에 본 적 없는, 몹시도 낯선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안 돼. 한 줄기 절망이 공진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문을 박차고 나오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길이 없다. 꼬마가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모른다. 하지만 찾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먹지 마라, 하고 공진은 고함친다. 몸속의 것들을 죄다 토해낼 듯한 기세로, 공진은 소리를 지르고 또 지른다. 먹지 마라… 먹지 마라… 먹지 마라… 공진의 몸에서 뻗어 나온 소리는 우뚝 선 콘크리트 몸뚱이들에 부딪히며, 오래도록 허공을 떠돈다.

 

 

*인용한 도덕경의 구절은 『노자 도덕경』(범우사, 2001)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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