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나. 쓰레기 더미에서 고리 하나를 찾았다. 어린이를 위한 행사에서 장식용으로 만든 것 같았는데 만듦새는 나쁘지 않았다. 크기는 자동차 핸들 정도였다. 그걸 무심코 목에 걸고 훌라후프처럼 돌려보았다.

누가 봤다면 푸핫 웃었거나, 어째선지 지켜보는 쪽에서 대리 부끄러움을 느꼈으련만, 나 자신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신념이 고압의 구토처럼 밀려 올라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고리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조급증이 든 나는 어떻게든 재료를 마련하여 고리를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 부족한 공작 실력으로 만들어진 「완성품」은, 한 쌍의 날개가 달린 고리였다. 나는 날개 달린 고리를 목에 걸고 돌려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의 일평생은 이것에 얽매이고 말리라는 것을.

그러나 내가 그런 걸 목에 걸고 돌리는 취미가 생겼단 걸, 친구들 말고는 몰랐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취미가 놀림거리가 될 거라는 건, 내 비밀을 알게 된 친구들의 난감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애들은 그래도 친구였으므로 비웃거나 경멸하는 건 잠시 유예하고 내게 물었다. 이게 뭔데?

그 대답을 들은 친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중 하나는 충격을 꽤 심하게 받아 일시적인 실어증까지 겪었을 정도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인간에게는 발음이 불가능한 이름을 말했다나. 내 발음을 우리말로 적어보려고 했더니, 정말로 글자로 적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것을 「됴…」 라고 해두자. 됴…는 그나마 옮겨 적을 수 있는 부분을 글로 적은 것이다.

됴…를 돌리고 싶다는 열정은 나를 강박처럼 사로잡았다. 수업 중에도 마치 도…가 목에 걸려있는 것처럼, 몸에 반동을 주어 움직이곤 했다. 교사들에게 몇 번 지적도 받았다. 수군거리는 애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학교가 강제하는 억압에서 풀려날 날만 기다렸다. 그날이 오면 나는 내 본연의 모습으로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 믿었다.

이 시절 학교 성적은 물론 나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렵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됴…를 향한 확고한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하무적의 수호신,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보물고가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준다는 신앙이 있었다.

 

그런 내게도 평범한 청춘은 있었다.

 

나도 아주 바보는 아니어서 됴…를 돌리는 모습을 들키거나, 함부로 자랑하거나 하면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된다는 정도는 알았다. 됴…를 잘 돌린다는 건 일반적으로 볼 때… 결코 인정받는 재능은 아니었다.

그래서 됴…를 돌릴 때는 누구와도 마주칠 일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갔다. 됴…를 돌리는 시간은 고독한 시간, 나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 나의 세계가 확고해지는 시간이었다.

중학교 3학년쯤엔 기술이 어느 정도 원숙해져서, 됴…를 도리면 강력한 돌풍이 일어나 주변 잔디나 나뭇잎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쓰레기가 휙 날아갔으며 흙먼지가 기둥처럼 솟구쳐오를 정도는 되었다. 그 정도 위력으로 됴…를 돌릴 때, 마치 연주에 심취한 바이올리니스트처럼, 물질로는 계량할 수 없는 상위의 차원으로 나의 정신이 상승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됴…를 돌리며 일으킨 풍파에, 나뭇가지와 잎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부수수수 쿠콰콰 큰 소란이 일어나게 했으니, 누군가 이 기현상을 목격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때는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뭐! 해 - !”

 

소녀가 외친 목소리는 됴…와 됴…가 일으킨 풍파를 뚫고 내 귀에 닿았다. 나는 로드킬 당하기 직전의 사슴처럼 굳어졌다. 내 목에 걸린 됴…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고, 여자아이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뭐 해?”

아까 외치며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아까와 달리 일상적인 톤으로 돌아온 그 목소리와 어조가, 그리고 조금 헐떡이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몸집도, 순간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날 아찔하게 했다. 내게 이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는 건 됴…뿐인데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그 여자애가 누구인지 알았다. 다른 여자애들이 정겹게 「슝」이라고 부르는 애였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슝에게 내가 하던 짓을 어떻게든 설명했다. 말이 너무 길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도 어쩌다 보니 꽤 길어지고 말았지만, 고맙게도 슝은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난 발음도 목소리도 형편없었는데도.

“너 좀 특이하다.”

 

그러고 웃더니,

 

내게 됴… 돌리는 걸 보여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나와 나의 됴…가 수치스러웠다. 나도 바보는 아니어서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멋져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됴…는 그런 것과 아무 상관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내 역량의 4%만 써서 됴…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슝의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 그 애의 깨끗하고 귀여운 이마가 드러날 정도였다.

“헬리콥터처럼 날아가버릴 것 같아.”

슝이 밝게 웃으며 말했고, 나는 머쓱해서 몸만 비틀고 있었다. 표정은 분명 한심하고 멍청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여자애들이 반하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슝의 웃는 얼굴은 정말 굉장했다. 빛나는 것 같았다. 슝은 됴…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슝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이후 나는 슝을 생각하며 됴…를 돌렸다. 슝이 나를 또 찾아오는 일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날 밤 슝은 나를 특이하다고 해주었다. 슝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슝이가 나에게서 느낀 그 「특이함」때문이길 바랐다. 지금 돌이켜보자면 좀 더 깔끔하게 씻고 성적이나 올리고 됴…는 그만 두는 편이 더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슝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애가 좋아하는 애는 따로 있었는데, 슝이네 커플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꽤 입소문 탈 정도로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거쳐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 영화가 정말 개봉한다면 나도 나올까? 됴…를 돌리는 모습으로 잠깐 나올 것 같다. 개그 장면이나 묘한 미장센을 위해서.

나는 그저, 너 좀 특이하다! 그 활기찬 한 마디만 곱씹으며 나머지 세월을 보냈다. 성적도 별로고, 교내에서 영향력도 없고, 사랑도 이루지 못한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해준 것은 물론 됴…였다. 어쩌면 그 어리석은 사춘기 시대, 궁지에 몰린 내겐 됴…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됴…를 새로 장만했다. 쓰레기장에서 주운 재료로 조잡하게 만든 됴…로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게 용돈을 주셨고, 나는 달리 쓸 데가 없어 그 돈을 모았다. 모은 돈 전부를 됴…를 새로 장만하는 데 소진했다. 목수를 섭외해, 오랜 시간 끈기 있게 됴…에 대해 설명했고 아주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와주었다.

새로 만든 됴…는 무게감도 돌리는 맛도 확연히 달랐다.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우선 부모님은 내가 이런 걸 장만하느라 저축을 탕진했다는 말에 뜨악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옷을 사고 놀러 다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는 됴…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구 어디에서도 됴…를 돌리는 재주는 쓸모가 전혀 없었다. 나는 형편없는 자식이었는데 됴… 때문에 더더욱 형편없어졌다. 부모님은 그 사실을 지적하며 최선을 다해 나의 자존감을 깎았다.

 

할아버지가 주신 용돈을 모아 마련했던 됴…는 어느 날인가 버려졌다. 나는 쓰레기를 뒤집어써 가면서 됴…를 찾아다녔고, 결국 찾아왔다. 그 일을 몇 번인가 반복하고 나서, 어느 날은 결국 됴…를 찾지 못한 채 돌아왔다.

결국엔 중학생 때까지 쓰던, 쓰레기를 재료로 엉성하게 만든 됴…를 다시 꺼내서 돌렸다. 그걸 다시 꺼내야 했을 정도로 나에겐 됴…밖에 없었다. 됴…를 빼앗기자 나를 나 자신으로 인식할 수가 없다 느낄 정도였다. 어느 날은 됴…를 돌리다가 “너 특이한 애다!”라는 기억 속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됴…를 마련했다.

그 시간에 공부나 했더라면.

부모님은 됴…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걸 포기했고… 엄밀히 말하면 내가 똑바른 인간이 되도록 하는 걸 포기한 것 같았다. 당시에 나는 그걸 해방처럼 여겼다. 됴…를 돌리는 데 온 힘 온 마음을 쏟게 되었다. 됴…를 돌리는 동안에 나는 외로워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됴…를 돌리며 정신이 고양되어, 급기야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신의 열락에 도달했다. 만약 그 때 내가, 내 발이 지면에서 한 뼘 이상 떠올라있던 걸 발견하고 놀라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높이 떠오를 수 있었을까? 우잇! 하고 놀란 나는 중심을 잃었는데, 미처 속도가 줄지 않은 됴…를 제어하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리다 콰직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그 한 마디가 내 인생을 극적으로 뒤바꾸었다. 나는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됴…가 나를 구속구처럼 눌러놓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흐에아악 비명을 지르고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놀라지 마라. 우린 수상한 자들이 아냐.”

하지만 인간 얼굴 가죽을 벗겨 만든 것 같은 공포스런 가면을 얼굴에 걸쳐놓고, 다리가 아니라 기이한 촉수로 서 있는 괴물을 보고 어떻게 수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냐. 나는 본능적으로 됴…를 휘둘러 그들을 공격하려 했다.

“후겨엇! 때리지 마! 더구나 그 됴…는 너에게 소중한 물건이잖아! 폭력을 행사하는 무기로 써도 괜찮겠냐?”

멈칫.

“됴…를 알아?”

“휴. 과연 인간. 우리가 관찰한 대로 폭력적인 종족이군. 그래! 알다마다. 모를 수가 없지. 됴…를 말이야.”

“됴…에 대해 어떻게 아는 거지?”

“차근차근 설명하지. 우린 「아투티테 오토티」라는 종족이다. 내 이름은 칵틱큭틱이야.”

츄-록. 자기소개를 하다 가면 뒷면을 축축하게 적신 타액을 털어내고는, 그가 말을 이었다.

“지구 용어를 써서 설명하자면 우린… 스카우터라고나 할까?”

“스카우터? 날 스카우트 한다고?”

“그 전에, 네가 됴…를 어째서 알고 있는지 먼저 확인 좀 하지. 혹시 우리보다 먼저 너를 만난 외계 종족이 있었나? 그들이 됴…에 대해 알려줬어? 그리고 너를 스카웃 하려고 했나?”

그런 일은 없었으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됴…는 어떻게 안 거지?”

“모르겠어.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았어.”

“흠. 어쩌면 어떤 외계 종족에게 납치되었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됴…를 돌리는 모습을 봤을지도 몰라. 마지막에 너를 지구에 되돌리며 납치된 기억을 지웠지만, 무의식 속에 됴…에 관한 기억만큼은 남았던 것이지. 그 기억이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떠 오른 걸지도 몰라.”

“…지구인 납치가 그렇게 흔한 일인가?”

“오해는 마. 우리 종족은 납치 실험 금지 조약에 가입해있으니까.”

“어차피 기억도 안 나니까 상관없어. 그보다 됴…는 뭐지?”

“우주 제일의 인기 스포츠.”

“스포츠?”

“너는 됴…의 진면목을 몰라. 무의식 속의 기억을 살려 됴…는 만들었지만, 이건 그것만으로 하는 스포츠는 아니거든. 반중력 보드가 필요해. 물론 지구인은 아직 반중력 기술을 개발하지 못했지.”

“그렇군! 반중력 보드로 떠 오른 다음, 됴…로 추진력을 일으켜 날아가는 거구나!”

“바로 그거야. 됴…는 목에 걸고 돌리는 장비 이름이고, 스포츠의 이름은 「됴… 쁳다…」이지.”

정신이 멍해졌다. 지구에서 됴…를 돌리는 건 천하에 개쓸데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우주에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됴… 쁳다…는 일정 주기로 행성 간 경기가 이루어지지. 그 열기는 실로 어마어마해. 영광의 크기도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런데 우리 종족은 좀, 약체 종족이라서.”

“그래서 나를 데려가겠다는 건가? 그런데 그래도 괜찮아? 난 지구인인데?”

“괜찮아. 관련 규정도 있으니까.”

하진, 한국 국가대표도 ‘순혈 한국인’같을 걸 따져대는 건 구식 관념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우주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한 외계 종족이라면 그보다 더 진보했을 터다.

흥분으로 벅차올랐다. 하지만, 이 작은 별 지구에도 사기꾼이 그렇게나 득시글한데, 우주에는 얼마나 많겠는가? 아투티테 오토티 인들은 내 의심을 이해해주고는, 그들이 타고 온 우주선과 여러 가지 진보된 과학기술을 보여주었다. 결정적으로, 됴… 쁳다…에 사용하는 반중력 보드가 결정적이었다. 반중력 보드에 올라 됴…를 돌리며 날아오르고 나서는, 더 이상 그들을 의심할 도리가 없었다. 나의 결심을 들은 칵틱큭틱이 말했다.

어쩌면 네가 됴…를 어느날 갑자기 알게 된 거, 정말로 신의 계시일지도 모르겠군.”

 

이제 지구를 떠날지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 결국 나는 부모님 앞에서 선언했다. 

 

“엄마, 아빠. 제겐 다른 지구인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가 있어요. 저는 제가 있을 곳을 찾아가기 위해 우주로 떠나겠어요!”

부모님은 입만 헤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좀 머쓱해서 큰절은 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나는 지구를 떠났다.

아투티테 오토티는 풍경도 본위기도 지구인인 내겐 너무나 낯설었지만, 다행히 여기는 행성 간 교류가 일반화된 세계였다. 지구인이 이곳에 있는 것이 신기한 일일 수는 있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칵틱큭틱은 내가 이 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복지에 무척 신경 써주었다. 적응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됴…가 있었고, 또 됴…를 잘 돌릴 수 있는 건 쓸데없는 능력도 아니었다.

 

내가 이곳 사람들보다 됴…를 잘 돌린다며 스카웃되긴 했지만, 처음엔 여느 입문자들과 똑같은 과정부터 시작했다. 반중력 보드 적응. 다른 입문자들과 인사하고 반중력 보드에 올라섰을 땐 드디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안도감, 내가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났다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일단은 반중력 보드에 적응해내야만 했다. 반중력 보드는 꽤나 민감했고 그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됴…로 추진력을 내는 가운데 반중력 보드를 정밀하게 조종하여 방향을 잡을 수도 있어야 했다.

행성간 대회에서 매번, 처참하게 패배했다던 선배들은 드디어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가 나타나자 흡족한 것 같았다. 그들에겐 겸손을 가장하며 의기양양하게 굴 기회가 생겼고, 친절하게 조언해줄 기회도 생겼으며, 때로는, 깔보고 비웃을 기회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지구인들은 아직 반중력 기술이 없거든요…” 라든가, “오옷! 이것이 반중력 보드!” 하고 오두방정을 떨면 그들은 아주 좋아서 죽으려고 할 지경이었다.

그런 선배들의 졸렬함을 비웃다가도(단순한 비웃음이 아니라, 우주여행을 하는 종족도 지구인보다 대단히 우월할 것도 없구나 하는 안도감도 섞여 있었음을 밝힌다), 반중력 보드 위에 선 선배들이 목에 건 됴…를 회전시키며 부아앙 날아오를 때, 가슴이 정말 벅차올랐다. 반중력 보드 위에서 비틀거리면서도 나 또한 힘차게 날아오를 때를 기대하고는 했다.

지구에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됴…를 돌려대던 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똑바로 하라는 부모님과 실랑를 벌이던 때, 그리고, 숑을 혼자 좋아하다 혼자 떠나보냈던 때…에 비하면, 이 시기는 내가 가장 충실하게 살았던 때였고, 보다 구체적인 꿈을 향해 노력할 수 있었던 때였다.

 

반중력 보드에 적응하는 건 아투티테 오토티 평균에 비교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상관없었다. 마침내 됴…를 돌려 날아오르는 날은 왔다. 고공에 올라 아래를 내려 보고 있으려니 신이라도 된 환희가 북받쳐 올랐다. 햇살 속에서 두 팔을 벌렸다. 나는 ‘바로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

선배, 동료들과 연습경기를 뛰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아투티테 오토티인들은 태생적으로 됴…를 돌리는 데 약점이 있는 것 같았다. 첫 시도부터 내 기록은 선배들을 압도했다. 선배 하나는 반중력 보드를 내팽개치며 “크윽, 노력은 역시 재능을 못 따라가는 건가?” 하고 한탄했는데, 나는 속으로 피식 웃기만 했다. 그 선배 앞에 멋있게 등장하고는 “재능? 내 노력의 크기를 알고서 재능 핑계를 대고 있는 거냐?”하는 잘난척은 꾹 참았다.

 

아투티테 오토티에서 나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도시 내 경기, 국내 경기(나는 긱각촉각믹삭익륵독식엑쏙늑이라는 국가의 소속이었다)에 이어 국제 경기까지. 압도적인 성적으로 평정하며 아투티테 오토티 행성 전체를 먹었다.

나는 스타가 되었고, 질시와 경계, 묘한 기대와 애정이 섞인 「수입품」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미디어 출연도 했다. 지구와 아투티테 오토티의 차이, 타향살이의 어려움 같은 것이 단골 질문이 되었다. 보통은 “지구는 이러저러한데, 아투티테 오토티는 저러저러해서 좋다”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아투티테 오토티 쪽을 은근히 띄워주는 식으로 대답해주면 진행자들도 시청자들도 좋아했다. 조금씩 강도를 올려서, “지구는 이러저러한 미개 행성인데 훨씬 진보하고 발전한 아투티테 오토티 대단해!”라는, 「지구혐」적인 태도를 취해보니 반응은 더욱 폭발적이었다. 특히 지구의 화장실이 엄청나게 더럽다고 욕하는 이야기가 인기가 좋았다(아투티테 오토티의 화장실이 좋기는 좋았다. 그건 인정). 전략이 맞아서 나를 부르는 방송이 조금 더 늘어났다. “지구에는 반중력 기술도 없고 됴…쁳다…도 없어서, 저는 혼자 됴…를 돌리며 바보 취급을 당해야 했죠. 여기에 와서 드디어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라고 할 땐 눈물을 훔치는 방청객도 있을 정도였다. 몇 광년의 거리를 건너왔어도 사람 정신머리는 비슷하구나 싶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저들은 이방인을 흘겨보듯이 나를 보았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건 외계 종족들도 인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의 성취가 곧 아투티테 오토티 종족의 성취”라고는 했던 칵틱큭킥의 말은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하긴 그러니까 성 간 경쟁 스포츠가 성립 가능하겠지.

별로 상관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너희들을 위해 날아오를 생각은 없었다. 나를 당신들의 인생 오점이라 여기며 낙담하던 부모님을 위해, 내가 좋아했던 소녀를 위해… 혹은 그 소녀를 좋아했던 추억을 위해 날아오를 참이었다.

 

행성간 경기는 규모나 장엄함부터 스케일이 달랐다. 우주적 규모의 행사에 참여했다는 영광만으로, 우주에 나오길 잘했다는 뿌듯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그 느낌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또한, 나를 환영하던 아투티테 오토티의 시선이 점점 나빠졌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진짜 이유는… 내게 실망해서. 내 실력으로는 행성 간 대회의 결과가 뻔했던 것이다.

내 최종 순위는 15위. 대회 일정 중후반부에는 관중석에서 상위권 선수들의 경기를 구경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거기서 소닉붐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상위권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았을 땐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진실을 마주한 충격 때문이었다. 잘못된 자리에 온 것 같았다. 

 

우주의 벽은 높았다…

 

이전까지 아투티테 오토티의 최대 기록은 80위. 내 덕분에 무려 65단계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80위와 15위는 “쩌~ 아래” 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65단계 상승에 오! 하고 놀라는 긍정적인 아투티테 오토티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수입품까지 데려왔는데도 쩌~ 아래라는 데에 절망한 이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5년 뒤 행성 간 경기에서는 좀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소닉붐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놈들을 무슨 수로 이기지? 훈련 도중 몇 분 간격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어차피 소용없는 짓 아닐까? 됴…를 돌리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겪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앴다. 늘 내게 희망을 주고, 늘 나를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주었던 됴…가 절망감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그 사이 국내, 국제 경기가 이어졌고 내 앞에 아투티테 오토티 선수들은 추풍낙엽으로 쓰러졌지만, 그래봤자 행성 간 대회에서는 별 변별력이 없다는 걸 이미 겪어봐서 안다.

회의감을 안은 채 훈련하는 데 지쳐, 칵틱큭틱에게 행성 간 대회 우승자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보았다.

“자리를 성사시키긴 어렵지 않을 거야. 지구 출신 선수라는 것만으로 너는 꽤 유명인이거든. 하지만 저쪽의 기술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왜?”

“그게 되었다면, 널 스카웃해오는 대신 우리가 가서 배웠겠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건가? 아무리 됴…쁳다… 경기가 중요해도 그렇지, 됴… 돌리는 기술이 무슨 극비사항이라도 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가르쳐달라고 해도 뭘 잘못하는 건 아니니까, 궁금하면 물어보긴 해봐.”

지난 대회 우승자인 「뱍빅뵥빅」행성의 「느가」는 나를 꽤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런저런 입에 발린 칭찬을 해주기도 했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돌이켜보면 씁쓸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들을 당시에는 아니었다. 내 활약이 인상적이었다느니 감동적이었다느니 하는 말을 들을 적엔 나도 꽤 나쁘지 않게 살아온 것 같았고, 조금은 더 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느가에게 됴…돌리는 법을 물어보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을 듣고 시범을 볼 때 칵틱큭틱의 ‘소용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수긍할 수 있었다. 뱍빅뵥빅 종족이 됴…를 돌릴 때는 인간에게 없는 근육과 골격을 이용했다. 그가 됴…를 돌리는 요령은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의 신체에 구속되어있는 이상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보라색 너머의 색깔처럼 상상할 수 없었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논증하는 철학책처럼 이해하기 난해했다.

느가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즈음에서 느가는 설명을 멈추고, (아마도) 조심스러운 어조를 골라 말했다.

“네가 노력파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지구에 있던 시절부터 혼자 됴…를 돌렸다지? 선생님도 없고 동료도 없고, 심지어 됴…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야.”

“응, 뭐…”

“워프 항행도, 반중력 기술도 없는 지구에서 혼자 그런 과정을 거쳤을 걸 생각하면 정말 존경스러워. 꿈을 이루기 위해 혈혈단신 우주로 나왔다는 이야기엔 절로 겸손해지더군. 그렇게 애썼는데도 지난 대회 성적은 성에 차지 않았을지도 몰라. 뭐라도 도움을 주고는 싶다만… 이미 잘 해내고 있는 너에게 함부로 참견해도 될지 모르겠어.”

“뭔가 조언해줄 말이 있다면 들려줘. 한 수 배우러 온 거니까.”

“그래. 그럼 이 한마디만 해주지. 노력하는 건 좋지만 소용없는 노력은 하지 마.”

“소용없는 노력?”

“그래. 노력은 정직하지만, 그렇기에 신중하게 해야 하는 면은 있어. 정직하다는 건, 투입한 대로 내놓는 함수와도 같다는 뜻이야. 무슨 뜻이냐면, 소용없는 변수를 투입하면 「정직하게」 실망스러운 결과를 내놓는다 이 말이야.”

“노력의 배신 같은 건가?”

“아니. 노력은 그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유효한 노력을 하면, 노력은 정직하게 결과를 내놓는다. 노력이 배신한다고 느낀다면, 실은 소용없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야. 소용없는 노력을 했는데도 유효한 결과를 내놓는다면 그건 노력이 거짓말을 한 것이지 않겠어?”

그의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느가는 나의 신체에는 없는 기관을 나에게 내밀어 광학적 일렁임을 일으켰다.

“이건 우리 종족이 소중한 사람을 격려하는 제스처다. 네가 노력하는 사람인 걸 아니까 하는 말인데, 노력을 할 때 지혜로운 노력을 하도록 해. 노력이 결과를 통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통해 노력이 평가받는 것이니까. 냉정하지만,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해야 하는 게 현실이야.”

느가와의 만남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자신이 없어져 버렸고 막막한 기분만 들었을 뿐이다. 다시 본성으로 돌아오는 우주선에서 칵틱큭틱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종족이 왜 널 데려왔는지 알겠어?”

“글쎄.”

내가 울적하게 대답했지만 칵틱큭틱은 별다른 어조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인간이 됴…를 돌리는 신체 작용과 우리 종족의 신체 작용은 거의 흡사해서, 네 요령은 우리가 습득할 수 있거든.”

생각해보니 칵틱큭틱과 일 관련 이야기는 긴밀하게 나누었지만, 감정적인 교류는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두 종족 각각의 표정과 동작에 담긴 의미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칵틱큭틱은 내 어조와 표정, 자세가 침울하게 내리깔려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 날 위로하는 어조로 말했을지 모르지만, 내가 듣기에 칵틱큭틱의 어조는 변화가 없었다.

하긴 뭐 지구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다는 기쁨은 별로 느껴보지 못했다. 슝이 날 좋아할지 모른다는 기대는 그냥 착각이었고, 슝은 내 마음을 몰랐거나 받아주지 않았으며, 나는 부모님의 걱정을 거부하기만 했고 부모님은 내 확고한 의지를 병신 취급하기만 했을 뿐이다. 지구에서든 우주에서든 나는 혼자 추운 공간을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두 번째로 도전한 됴…쁳다… 행성간 대회에서는 오히려 19위로 떨어졌다. 그나마 아투티테 오토티 인들을 기쁘게 해준 것이 있다면 계주 경기 성적이 지난번 41위에서 39위로 소폭 상승했다는 점이었다. 단지 순위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 처음으로 행성 간 대회에 참가한 신예 「쀠이이」가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었다. 나보다 한참 뒤떨어진 실력이었음에도 저들과 같은 종족이라 그런가, 쀠이이는 오히려 나보다도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실, 쀠이이는 내가 보더라도 잠재력과 성장성이 막강한 슈퍼루키였다.

 

이후에 내게 주어진 임무는 쀠이이의 실력을 키워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후진 양성이 아니었다. 현역으로서 뭔가 이뤄내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내가 나 자신에게 품었던 기대를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땀은 매일같이 흘렸다. 제일 어려운 싸움은 몸의 피로나 근육의 한계가 아니었다. 자꾸만 나를 좌절시키려 하는 고민이었다. 느가가 했던 조언은 자꾸 생각나는 공포영화 장면처럼 나를 괴롭혔다. 내가… 지금 하는 이 노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노력이면 어떻게 하지? 소용 없는 노력이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해봐야 하나? 그런데 그게 대체 뭐지?

 

지금 나에게 최선인 노력은…

 

시간은 속절없이 갔다. 세 번째 행성 간 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를 떠나온 지 벌써 14년. 나는 서른두 살이 되었다.

그 사이 쀠이이는 엄청난 성장을 했다. 수입품은 더 이상 아투티테 오토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수입품이 잘 해봐야 15위 언저리 수준이라는 건 이미 알려져 있었고 딱 그만큼의 기대만 받고 있었다.

내가 보더라도 쀠이이는 아투티테 오토티인들이 열광할 만한 녀석이었다. 수입품의 후배에서 라이벌로! 아투티테 오토티 행성 안에서 있던 국제대회에서 쀠이이의 활약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다 마침내, 행성 간 대회 직전 마지막 국제대회에서는 내가 쀠이이에게 졌다. 쀠이이는 무슨 스포츠만화 주인공처럼 무섭게 성장했다.

 

그를 보며, 바라던 것을 이루어내는 사람이란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행성 간 대회 준비 기간 나의 심리적 침체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쀠이이를 위시한 아투티테 오토티 선수들은 서로 교류하고 격려하고 경쟁했다. 곁에 누군가가 있는 그들이 부러웠던 것 같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던 나머지, 나는 그나마 대화라는 걸 할 수 있는 상대였던 칵틱큭틱에게 가서 털어놓았다. 해봤자 소용없는 짓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금껏 내가 한 짓이 대체 뭐였는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고.

나는 상담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한바탕 털어놓는 동안 칵틱큭틱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널 데려온 건, 지금 네가 말한 좌절감이 우리 종족 선수들에게 만연했기 때문이지. 이젠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군. 쀠이이 봤어?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가짐이 아주 단단하더라고. 녀석 덕분인지, 다행히 우리 종족 쪽에서는 분위기가 좀 바뀌고 있어. 노력과 자신감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어. 그게 스포츠 영웅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이지.”

그의 말투나 제스처를 해석해보려 애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를 동정하는지, 경멸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뭐 하러 속내를 털어놓은 건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쓸데없는 노력이었을까. 다만 내가 이제는… 아투티테 오토티 인들에게도 별 소용이 없는 인간이 된 것은 알 수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다.

 

세 번째 행성 간 대회에서 나는 13위, 쀠이이는 12위를 했다. 쀠이이는 고향행성의 대영웅이 되어 칭송받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서 깊이 생각했다. 더 이상 됴… 쁳다…에만 의지하며 살 수는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마, 더 하는 건 쓸모없는 노력일 것이었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30세를 넘어간 나이, 됴…를 목에 걸고 돌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인데, 그나마도 실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모아둔 돈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 아투티테 오토티의 스포츠 영웅이었고, 후진 양성에도 기여했던 내가, 어쩌다가 경제적으로도 몰락했는지 의아한 분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하기 싫은 수험공부만 억지로 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주로 나왔다. 그리고 됴… 쁳다…에 일생을 바쳤다. 고2 때부터 목에 뭘 걸고 빙빙 돌려대는 짓만 해왔으니, 내가 지구에 남았더라면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에 나왔기 때문에, 나는 우주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금융이란 걸 잘 이해를 못 하겠다. 지구의 금융도 복잡하지만, 여러 행성의 수십만 종족을, 수만의 사회들이 뒤엉켜 이루어낸 행성 간 금융은 내게 너무 버거웠다. 상업으로 수익을 내는 요령도 어마어마하게 고도화되어 있었다. 내가 보아하니 아투티테 오토티인들 대부분도 어쩔 줄 몰라 헤매기로는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게임 룰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이 사람 저 사람이 제안하는 말에 “그래요.” “그렇게 해요.”라고 대답하며, 단편적인 정보로 어설프게 재산을 관리해 나갔다. 많이 번다고 방심한 탓도 있었다. 내 인생 전반에 그랬듯이… 금융과 돈 관리에서도 잘못된 판단을 너무 많이 했다. 나의 재산은 점점 말라서, 물이 대기권 밖으로 증발해버린 별처럼 되었다. 그런 별은 회생 불능의 죽은 별이 된다. 우주로 증발한 물은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까.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푼돈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구로 돌아가는 우주선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 곳의 세상은 지구와 전혀 달랐다. 됴…쁳다…를 그만두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이러쿵 저러쿵하지만 나는 또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혼자서 고민하다 내리는 판단이니까.

 

지구로 가는 항로는 정규 항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귀향에 드는 비용은 적지 않았다. 거기에 남은 돈을 모두 쏟고, 나는 지구로 향했다.

자신만만해서 우주로 나왔다가 실패자가 되어 돌아가는 우주선 안.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해 도망치듯 선택한 귀향길. 내가 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 생각만 많아지고 있었다. 노력과 열정은 일단 긍정적인 성분으로 인식되긴 하지만, 사실 모든 노력이 동등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가령, 사기꾼이나 사이비에게 속아 온 재산과 온 마음을, 심지어 젊음까지도 열광적으로 바칠 수 있다. 희망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어딘가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으며 정진할 수 있다. 그들의 노력을 칭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인생을 내다 버리는 걸 가엾게 여기는 사람은 더러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은 속아 넘어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켜보며 타산지석으로 삼으려고만 할 것이다.

나를 속인 사기꾼은 없었다. 나를 홀린 사이비 교주는 없었다. 나를 속인 사기꾼은 내가 내 가슴에 스스로 심어넣은 꿈이었고, 나를 홀린 사이비 교주는 내가 신뢰했던 나 자신이었다. 나를 소용없는 노력으로 내몰았던 것은, 나다. 탓할 사람도 원망할 불운도 없었다.

 

나는 이제 서른이 넘어 지구에 왔다. 지구를 떠날 때도 지금도, 나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목에 됴…를 걸어 돌리는 것뿐이었다. 지구를 떠났을 때는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한 사람 몫을 해야 하는 어른이 되어있다는 점이 달라졌다.

고향 행성 표면에 혼자 서서 황망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나는 내 앞에 펼쳐진 길이 확연히 좁아져 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허비한 시간과 기회를 하릴없이 세어보기만 하며 낙담하다가, 이젠 정신 차리고 내게 어울리는… 성과도 없고 입증할 것도 없는 나이 먹은 사람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소임을 찾아야겠다는 생각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제 내가 바라던 삶을 추구하던 시대는 끝났단 걸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생각조차 못 했던 삶으로 뛰어들 용기가 필요했다.

이 와중에도 행성간 대회에 처음 참가했던 때의 영광이 떠올랐다. 그 거대하고 형이상학적이라고 밖엔 할 수 없던 놀라운 구조물들. 열광할 준비가 되어있던 어마어마한 군중들. 인간에겐 익숙하지 않은 스케일의 교향악. 그 교향악의 메아리. 그 때 내가 머물렀던 시공간은, 내가 혼자 뒷산에서 됴…를 돌리다 슝에게 들켰던 그 시절에 꿈꿨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 광경을 직접 겪어보았다는 벅차오름. 그 충족감. 꿈.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헛된 영광의 기억만 중독물질처럼 뇌수에 번져갔다. 꿈꾸던 순간의 겉껍질만 만져보고 돌아왔을 뿐이라는 탄식과 함께.

 

어쩌면 나는 또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도. 이젠 우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해온 선택이 모두 잘못이었는데 지금 이것도 잘못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여긴 지구지만 우주공간에 버려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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