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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모험은 영원히

2022.09.13 13:1309.13

이걸로 이야기는 끝이 나. 그렇지만 나는, 가능하면 그들을 말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시간을 계속했으면 했어.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 이 장대한 이야기의 종막(終幕)은, 개개인인 나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무기력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 한 명일 뿐이야. 이름도 흔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백화점에서 고른 듯한 성격에 취향. 그런 내가 특별해질 수 있는 시간이, 이제 끝나가.

 

그러니까 혹시, 정말 만약에,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이 시간을 영원으로 해주면 안 될까…………


 

뉴로월드는 새로운 혁명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기존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었죠. 그걸 잡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영화감독 다이앤 뮐러, <모험은 영원히>의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미국에서 출발한 가상현실 세계, 뉴로월드가 한국에 정착한 이후로 많은 기업은 실험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서 특히 유행이었던 게임 소설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 모두가 ‘현실을 대체하는 가상’에 많은 자본을 들였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K사와 N사는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임원진을 필두로 ‘버추얼 월드 프로젝트’ ‘에이 월드’ 등의 고유 명사를 사용해가며 각자만의 초고도가상현실세계(超高度假想現實世界)를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대기업들은 휘황찬란한 세상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실제와 같은 모험.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욕망을 극도로 재현하는 서비스. 그런 것들은 주로 게임의 형태로 나타났고, 기존 게임 산업이 그랬듯이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에게,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갈린 평을 받았다. 한쪽에서는 어떤 기업의 성별 편향적인 마케팅을 비판했고, 다른 쪽에서는 높은 가격대로 인한 특정 연령대로 몰리는 유저층, 그로 인한 콘텐츠 편중을 비판했다.

 

그 외에도 게임 업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뉴로월드의 등장이 노인 요양 산업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다양한 갈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5차원 연애 게임은 수많은 방구석 오타쿠들을 낳을 것이다’는 걱정하는 어조의 신문 헤드라인이 그 시작이었지만, 2000년대 초반에 흥행했다가 2010년대 초반에 사그라든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흥행처럼 일시적이었다. 틀에 박힌 서사, 결국 대리만족에 지나지 않은 근본적인 구조는 게임이 얼마나 실감 난다 해도 지루할 뿐이다는 평을 받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대기업이 내놓은 가상현실 기반 MMORPG는, MMORPG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사망했다. 게임을 즐기려면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고, 퀄리티가 높은 만큼 유저에게서 돈을 많이 걷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유저는 직장을 다니는 성인밖에 없고, 그들은 시간이 없다. 뉴로월드가 한국에 정착하였을 때, 아직 전염병은 도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비대면 사회생활도 정착하지 않았다. 뉴로월드에서 출퇴근하고, 모든 생활을 가상현실에서 했다면 그 장르는 더 흥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실험은 잠깐 떠올랐다가, 지곤 했다. 그러는 와중에 마니아들을 양산했다. 몇 개의 히트작이 떠올랐다. 기존 프랜차이즈를 뉴로월드에 맞게 일신시킨 N사의 게임들이 초기 흥행을 주도했고, 그다음으로는 중소기업 위주의 개발자들이 힘을 모아 내놓은 소규모 타이틀이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상품이 쏟아지고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시장이 활성화되면, 사람들이 찾아들고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라스트 판타지는 그런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처럼 보인다.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설명해볼까.

 

“하누님 수고 많았어요! 이거만 하면 진짜 끝이다!”

 

파티에서 지능파라고 할 수 있는 유우 님이 그렇게 말했었어. 마지막 보스만 남겨둔 상황. 실제 시간으로는 약 밤 11시 정도 되었을까. 우리는 게임 스토리 때문에 게임을 끌 수 없었어. 어느 정도였냐면, 연속 8시간 동안 계속 캠페인 모드만 했고 더 신기한 점은 모두 후회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정말 많은 일이.

 

“흐엉…. 흐어어엉…. 진짜 재밌었어……. 최고다 진짜……. 나 이 게임에 뼈를 묻을래…. 좋아서 죽고 싶어….”

 

“대체 이 정도 되는 스토리의 게임을 한 번밖에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제작진들 좀 돌아버린 거 같아.”

 

“미치니까 이런 게임을 만들겠지! 진짜…어떻게 되먹은 창작력인지….”

 

유우 님도 룬 님도 파라 님도, 전부 감동에 북받쳐 올라 발걸음을 망설였어.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계속 향하고 있었고. 나도 그들을 뒤따랐어. 원래 파티에서 법사 캐릭터들이 제일 뒤에 있는 법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이번 맵에 대해서 설명해볼까. 우리는 앞으로의 전투에서 우주의 운명을 가로 짓게 돼. 그런 이야기를 형상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이 온통 까맸어. 그리고 실크처럼 생긴 아름다운 길을 우리가 걷고 있었지. 그동안 우리가 구해준 이 세상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별의 힘」이 되어 우리를 지지해주고 있는 거야.

 

주변에는 유리 조각 같은 것들이 부유하고 있어. 일종의 오브젝트(object)처럼 느껴져서, 난 그곳에 가서 상호작용을 했어. 그러자 그 속에는 나와 일행이 겪어왔던 내용이 움직이는 삽화처럼, 짧은 영상이 튀어 올랐어.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었으면 우리 마을은 멸망했을 거예요. 구해줘서 고마워, 형아! 형아들은 좋은 사람이구나? 여러분은 영웅이에요. 저희 속에서 영원히 영웅으로 기억되실 거예요.

 

그런 목소리들이 들려오니까,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

 

길게 했구나. 그리고,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복받쳐 오는 거야. 난 일행 중에서는 반응이 제일 적은 편이었지만, 아마 느끼고 있는 건 제일 크겠지. 표현은 잘 안 해도 계속 곱씹고 있었어.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구나. 이 모험이 가득한, 놀라움으로 가득 찬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라스트 보스를 이 상태로 어떻게 깨…. 내가 이 세계를 두고 어떻게 떠나냐고…!”

 

“진짜로.”

 

파티 중에서 가장 어른인 유우 님도 그렇게 말했다. 나도 동감했다.

 

이 세계는 떠나기에는 너무 사랑스럽고, 우리가 그려낸 이야기는 너무 소중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어.

 

우리가 모두 그런 마음으로 공통된 것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졌었어. 아무것도 없는, 거의 우주와도 같은, 형이상학적인 검은 공간이지만.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가득 부풀어 올랐어. 이 시간은 분명 계속될 거야. 영원할 거야.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잖아?”

 

“좋아! 마지막 보스 깨러 가자! 우리도 한번 보자, 스포일러에 가려진 그 녀석의 낯짝을!!”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어.

 

이 순간도.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걸.

 

 


 

뉴로월드 시대 최고의 RPG... 반드시 플레이 하길 권한다. 빚져가며 뉴로링커를 사서라도 해라!

   | GameNinja, <라스트 판타지>에 95/100을 수여하며

 

소규모 온라인 RPG 게임 「라스트 판타지」는 어떻게 보아도 실험적인 작품이다. 패키지만 보면, 단순한 판타지 RPG처럼 보인다. 운명을 받은 주인공들이 모여서 마을에서 실종된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실종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비밀, 그리고 세상을 삼키려는 마왕의 음모…. 오히려 너무 정석이라서, 이제는 오래된 스토리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라스트 판타지는 캐릭터가 정해져 있지 않고, 플레이어가 직접 커스터마이징한다. 사실 RPG니까 그럴 수 있다. 그리고 파티를 조직하여 던전을 탐험한다. 역시, 온라인 RPG니까 그럴 수 있다. 라스트 판타지의 진정한 특별한 점은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 이 게임은 처음 온라인으로 맺어진 소규모의 파티가 스토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며, 게임이 끝나면 파티가 해체됨과 동시에 게임에 다시 접속할 수 없게 된다.

 

이 파격적인 구조는 평론가들과 한창 신기한 걸 좋아할 나이인 10대 게이머들에게 화제를 몰았다. 메타픽션과 게임을 접목한 사례는 기존에도 매우 많았다. 언더테일, 스탠리 패러블, 원샷 등 수많은 게임이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라스트 판타지는 처음 시작한 파티가 끝까지 함께하며, 게임이 끝나는 순간 파티원들도 그 세계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고, 엔딩을 다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무후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뉴로월드 게임에서는, 처음이었다.

 

‘라스트 판타지는 특유의 감성적인 스토리로 인해 수많은 팬들을 낳았고, 차세대 RPG의 새로운 얼굴이 되었다. 모두가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그런 게임은 없을 것이다. 어떤 추종자들이 게임의 세상과 작별하기 싫어, 몇 시간이고 게임에 갇혀 살며 현실에 나오기를 거부하겠는가.’ ‘라스트 판타지 쇼크’라고 불리는 사건에 대한 모 신문의 단평이었다.

 

해당 사건을 조사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다이앤 뮐러의 다큐멘터리 '모험은 영원히'를 빼놓을 수 없다. ‘쇼크’가 끝난 뒤, 해외 OTT 회사 B사는 이를 주목하여 당시 깊은 각본과 고요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로 유명했던 다이앤 뮐러에게 메가폰을 맡겨,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문댄스 영화제 '올해의 주목할 만한 논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양가적인 의견을 영화 내에 한 번에 취합하는 동시에 결국 아이들과 온라인 문화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봉합해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으며 대중들에게 '라스트 판타지 쇼크'라는 말을 각인시켰다. 

'모험은 영원히'의 주인공은 15세 한국인 소년으로, 당시 사용했던 닉네임은 '하누'다. '하누'는 해당 게임에서 아슌타 족이었고, '라스트 판타지' 외부 SNS에서 독창적인 마도술사 운영 공략글로 인기를 얻었던 일종의 유명인이었다. 그는 라스트 판타지의 엔딩을 보기 전에 약 하루 동안 접속해서 게임 속에서 나가지 않았으며, 방문을 잠그고 식음전폐를 했다고 전해진다.

 

 


 

 

 

왜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려워질까. 난 일행들과는, 놀랍게도 온라인 매칭으로 만났었는데도. 그 사람들이 일생일대의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을까.

 

나는 같이 게임 할 친구가 현실에는 별로 없었어. 다행스럽게도, 너도 잘 알다시피, 라스트 판타지는 나처럼 혼자 게임하는 사람을 위해 매칭 기능을 만들어두었지. 그런 게 있을 바에는 난 차라리 솔로 플레이 기능을 추가해달라고 항의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재밌다니까 하는 수 없이 매칭을 돌렸지.

 

그럼,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면 어떡하지?

 

그러자 역할극 기능이 있다는 걸 떠올렸고, 다행스럽게도 난 캐릭터 설정 짜는 것도 좋아하고 연기에도 제법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어.

 

사람들이랑 교류를 최소화하는 마법사 컨셉, 뭐 대충 그런 거로 잡고 역할극 기능을 키면 아무도 말을 안 걸겠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 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매칭을 돌렸어.

 

“앗, 잡혔다! 안녕하세요~!”

 

…그때는, 내가 만난 파티가 하필이면 모르는 사람도 우리 친구도 만들어버리자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지닌 외향형 인간들이란 걸 아직 몰랐었어.

 

“법사다! 마침 마법 공격 포지션이 필요했는데. 잘 부탁해요! 닉네임이… 하누……님?”

 

“모델링 귀여워! 그리고 작아! 역시 리틀맨이 진짜 귀여운 거 같아!! 나도 저 종족 할걸!”

 

“저, 저희 3명끼리 지인이라서~! 만나서 잘 부탁해요!!”

 

유우 님이랑 룬 님, 파라 님은 모두 기존 세 명이 친한 친구였대. 유우 님과 룬 님이 처음 온라인에서 만났고, 룬 님과 파라 님은 실제 현실에서도 친구였어. 그렇게 해서 3인조였는데, 사람 한 명이 안 모여서 온라인 매칭을 돌리게 된 거야.

 

나는 그 사람들의 엄청난 텐션에 적응하지 못했어. 시작부터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떠들썩한 인사에….

 

정신을 못 차렸지. 그래도 일단 답은 해야 하잖아.

 

나는 그만 가면을 쓴다는 선택지를 택하고 말았어. 눈앞에 창을 띄워, 현재 상태 바꾸기에 들어가 ‘RP'라고 적혀 있는 버튼을 눌렀어.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해둔 설정대로, 캐릭터를 연기하기 시작했어.

 

“…… ………하누. 쓸 줄 아는 마법은 적어. 그렇지만… 잘 부탁해. 그리고, 아슌타 족을 ‘리틀맨’으로 부르는 건 실례야.”

 

심장이 터져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말한 것은, 뉴로월드의 필터를 거쳐 적절하게 탁하고 중성적인 목소리로 변조되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세계관 고유 용어를 듣자마자 잠시 얼어붙더니, 서로를 막 쳐다보았다.

 

“롤플레잉 유저인데 어떡해?”

 

“와, 신기하다! 대박!!”

 

“그럼 우리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RP 프로필 적어놨나? 와, 미친, 엄청 자세하잖아, 이 분….”

 

라스트 판타지는 소규모 온라인 RPG고,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당연히 역할극 기능을 게임에서 지원한다. 목소리를 바꾸는 기능도 탑재되어 있고, 게임 플레이어의 프로필과 캐릭터의 프로필을 따로 쓸 수도 있다. 난 그렇게, 가상의 캐릭터를 상상하는 걸 좋아해서 프로필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마지막 카드, 라고 생각해두고 롤플레잉은 꺼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외향적인 사람과 파티를 맺은 이상은….

 

그렇지만 저쪽은 그렇지 않았던 건지. 이내 한 명씩 RP를 하기 시작했다.

 

“미안!! 나는, 그러니까, 어, 저기 북쪽에 있는 마법 대학에서 왔는데! 너희 같은 애들을 처음 봐서! 좀 실례했어! 진짜 미안해!”

 

파라 님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어. 나는 그래서 그 이름을 가장 먼저 기억하게 됐어. 멀대같이 크고 떡대같이 큰 인간 종족이었고, 포지션도 앞에 서는 탱커였지만, 사람을 대하는 게 나처럼 어리숙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

 

“……괜찮아. 앞으로 주의해주면 돼. 너희들은 이름이 뭐야?”

 

“아, 나는….”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어. 흔한 판타지 소설의 도입부처럼, 얼렁뚱땅 만나서 얼레벌레 모험길을 떠났지.

 

 


 

'게임 폐인들이 결국에는 게임 속으로 들어가다'

   | 2042년 9월 10일 VBS 아침 9시 뉴스 헤드라인

‘라스트 판타지 쇼크’가 일어나자, 게임 언론도 커뮤니티도 개발사도 모두 이 사태에 대해 떠들썩하게 논했다. 대서특필하는 것은 뉴스와 게임 신문사였다. 커뮤니티의 눈치를 많이 보는 언론은 ‘게임 속에 갇힌 아이들, 개발자는 방관?’ 같은 제목으로 시선을 끌었고 뉴스는 이를 순화하여 중립적인 의견을 내놓는 데에 그쳤다. 반면, 이 게임을 직접 해 본 자칭 어른들과 청소년은 커뮤니티에 모여 각자의 소리를 냈다. '모험은 영원히'에서 이 장면은 짧게 넘어가지만, 우리들은 이미 그 커뮤니티에서 나온 내용들을 확실하게 보았다.

 

게임 속에 과몰입하는 애들이 또라이 과몰입충인건데 왜 개발자가 신경써야 됨? 자기 자식 관리 못하는 부모 탓 아니냐

 

진짜 가족들은 저 지경이 될 동안 뭐했음?

 

자식새끼가 게임폐인이 됐으면 꺼낼 생각부터 해야지

 

ㄴ 뉴로링커 특성상 유저가 직접 끄지 않으면 위험해서 그런건데 이 알못새끼는 뭐라는거임? 그리고 거기서도 게임 끌 수 있어

 

나 저녁 먹으러 갔다가 뉴로링커 배터리 없어서 꺼졌었는데, 파티랑 재연결 됐었다

 

ㄴㄴ 아무튼 개발사는 그걸 생각도 안하고 그 스테이지 그대로 그냥 출시한 거네? 이거 완전 미친새끼들이잖아

 

ㄴㄴ 강제종료가 아니라면 게임 마지막에 영원히 있을 수 있게 스테이지를 짜면 어떡해 그게 바로 레벨 디자인 실패 아니냐

 

개발자를 싫어하는 사람, 쇼크에 휘말린 플레이어를 싫어하는 사람, 그 플레이어의 부모님을 싫어하는 사람, 스토리 작가를 싫어하는 사람, 뉴로월드를 만든 사람, 뉴로월드를 하는 사람, 뭐든지 싫어할 수 있는 능력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 ‘싫어하는’ 의견들이 눈덩이가 되어 별로 싫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싫어하게 되어서 싫어함이 계속해서 제곱 되었다. 그건 말하자면 싫어함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그런 식으로밖에 작동하지 않았다. ‘라스트 판타지 쇼크’는, 평소와 같이 커뮤니티의 불타는 ‘떡밥’ 중 하나에 불과했다.

 

 


 

 

모험은 즐거웠어.

 

매칭으로 만났다고 해도 똑같은 걸 좋아하는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잡담하고, 다 함께 이야기에 몰입하고, 머리를 써서 퍼즐을 풀고, 난관을 헤쳐나가며 긴장하고, 결국 모든 게 잘 되어서 기뻐하거나 현실의 벽 같은 것에도 부딪히며 쓸쓸해 하는 그 모든 게,

 

재밌었어.

 

라스트 판타지에서는 마을에 들러서 무기를 사고, NPC라고 불리는 게임 속의 인물들과 대화하고, 던전까지 찾아가는 과정이 전부 구현되어 있어. 그래서 더 현실감이 났지. 그렇지만 게임 속 인물들이 직접 게임 용어를 써가며 이 세계를 모험하는 법을 알려준다거나, 지도가 의도적인 도트 그래픽으로 되어 있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게 현실이 아니다’라고 알려주었지. 그런 점이 좋았어. 언제든 게임을 끄면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 나는 파티원들과 친해져서 역할극 기능을 껐어. 물론 연기는 재밌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하려니까 좀 버겁더라고. 그리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도 필요해서, 우린 좀 더 개인적으로 알게 됐어.

 

“그러니까… 같은 중학교를 나온 거야?”

 

“응! 나랑 룬이가 중학교 동창이고 고등학교는 달라. 유우 님은 지금 직장 다니고.”

 

“아~ 회사 폭발시키고 싶다~”

 

“하누는 몇 살이야?”

 

난 나이를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중학생이라는 걸 말하게 됐지. 그러니까 다들 엄청 놀라더라고.

 

“너 진짜 말 잘하는 구나…….”

 

“…친구는 별로 없지만…….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파라가 하누 닮으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철 좀 들어라 녀석들아. 고등학생들이 어떻게 중학생보다 생각이 없냐.”

 

“아니, 저 양반은 대학생이면서도 중고딩이랑 놀면서 말이 많아!”

 

파라 님이 그렇게 시비를 걸기도 했었지.

 

우리는 그렇게 친해지면서 모험을 계속했어. 게임이 중후반쯤 접어들자 서로 접속하는 시간, 싫어하는 음식, 좋아하는 캐릭터의 유형, 가족이 찾아와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하는 시간, 모든 걸 공유하게 됐어.

 

난 학교에 있으면서도 뉴로월드를 킬 날만 계속해서 기다렸지. 파티와 이야기할 때를, 그리고 게임을 즐길 때만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말이야. 학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애들은 점점 적어졌고….

 

그래도 말이야, 좋았어. 이야기가 멋졌거든. 넌 알잖아. 우리가 펼쳐온 모험을.

 

“스토리 진짜 죽인다….”

 

파티 중에 룬 님은 스토리에 엄격한 편이었는데, 내내 감탄하면서 플레이한 것 같아.

 

“캐릭터도 다 알맞게 썼고, 감성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여운 있고, 클리셰지만 참신하고, 대체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쓰지? 제작진 약했나?”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어. 라스트 판타지는, 직접 경험하는 판타지 세계라는 홍보 문구가 어울릴 정도로 실감 났거든. 틀에 박힌 대사도 없고, 모두 다 자연스러워. 그것뿐만 아니야. 지역별로 존재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들. 예를 들면, 설산 마을에 숨겨진 설화의 비밀을 파헤친다거나, 사막에서 실종된 아이의 소문이 있어서 찾으러 갔는데 우리가 찾는 그 아이가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그 애도 구하게 된다거나. 바다에서 펼쳐지는 전투, 미로 같이 얽힌 미궁과 던전, 무서운 괴물들. 모든 게 다 적재적소에 있는 느낌이었어.

 

아무리 게임을 많이 하고. 아무리 이야기를 많이 읽어도. 이렇게까지 마음에 와닿은 이야기는 없었어. 그래서 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어.

 

아, 이 시간이 영원하다면, 내가 슬플 일도 없고 괴로울 일도 없을 텐데….

 

그런 심정으로 파티에서 도망쳤던 것 같아.

 

“진짜 괜찮겠어? 같이 나가는 게 더 의미 있을 텐데….”

 

유우 님이 가장 먼저 날 걱정했어. 어른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파티의 리더여서? 잘 모르겠지만, 스토리가 후반부에 접어들자 계속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거든. 난 아직 몰입이 덜 끝났다고, 마음속에서 정리할 게 있다고 변명했어.

 

“용두사미가 제일 최악인 거 알지? 마지막 장면에 너 없으면 진짜 슬플 거야. 빨리 나와!”

 

“알았어. 금방 갈게.”

 

그렇지만 그 마지막 장면에 내가 있을 일은 없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룬 님과 파라 님의 복잡한 표정을 보고, 웃었어.

 

“그냥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러면 안 됐는데. 난 결국 그랬어.

 

자꾸 날 뒤돌아보는 그들이 먼저 걸어가는 걸 배웅했어. 손을 흔들며. 더 보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왔어. 난 계속 울고 있었어. 이곳에 혼자 남겨지는 게 무서워서? 그러면 나가면 됐을 텐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이 시간이 끝날까 봐 두려웠던 거야. 이 즐거운 모험이, 결국에는 끝을 맞이해서, 우리가 이제는 이곳에 모이지 않을게 싫어서.

 


 

결국 정 많은 사람들이 기어코 세상을 구하고 마는 이야기에요.

   | 김진희, 팀 헬리오스의 총감독

개발사가 ‘쇼크’ 이후에 펼친 대처가 굉장히 독특했다. 그곳에서 게임을 만든 팀 헬리오스의 총감독 김진희 씨는, 다큐멘터리 속에서 다이앤 뮐러와의 인터뷰에 등장하여 상세히 그 개발 비화를 전했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좀 더 섬세하고 예민한 부류인 걸 진작 알았어요. 일단 만든 사람들부터가 그랬거든요. 다들 애니메이션에 심취했고, 게임을 밤새워가며 하고, 온라인으로 남들과 계속 연결되어 있는 감각에 익숙해 있는 오타쿠들이었죠.

 

<라스트 판타지>의 유저 비율을 보시면 청소년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해요. 70% 정도 되지요. 제가 모니터링한 결과로는, 이 애들은 뉴로월드 안이든 바깥이든, SNS를 통해서 비슷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교류하며 열광하는 아이들이에요.

 

타임머신을 타고 저희 스스로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기뻤어요. 우리 게임에 몰입해주니까. 그렇지만 정말 저희가 보내고 싶었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싶진 않았어요, 정말로.”

 

인터뷰는 길었다. 디렉터와 개발팀이 모두 비슷한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인터뷰 내용은 일관적이었다. 이 게임은 미래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해 바치는 거대한 동화와도 같았다. 그렇지만 결점이 있었다. 강제종료가 아니라면 마지막 엔딩 장면 직전의 스테이지에서 게임을 끌 수 없었다. 최종 스테이지의 디자이너인 박미영은 이렇게 말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면 게임이 끝났던 그 시절처럼, 어느 부분에서는 끝났으면 했어요. 요즘 게임들은 서비스가 길어지면서, 스토리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죠. 뉴로링커를 연결하면 그대로 세상과 단절되고, 자신이 원하는 세상과 계속 있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런 점을 주시하면서 스토리를 썼는데, 정작 개발 단계에서 실수를 범했어요. 마지막 스테이지를 들어가기 전에, 언제까지고 계속 그 공간에 있을 수 있게 한 건 고의에요. 마지막 결전 전에 최대한 그곳에서 그동안의 모험을 곱씹을 수 있게요. 그리고 롱테이크 영화처럼 장면의 호흡을 길게 해서, 가능한 한 몰입력을 지속시키고 싶었죠.

 

물론 강제로는 끌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희는 저희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과소평가했던 거죠. 그곳에서 곱씹을 수 있다는 건, 원한다면 그 문을 잠궈 버리고 계속 그 공간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뉴로링커의 특성상, 외부에서 끄기도 힘들죠. 이건 명백한 실수였어요.”

 

팀 헬리오스는 ‘라스트 판타지 쇼크’가 일어난 지 하루 만에 대처하기 시작했고, 서버를 일시적으로 종료시키거나 유저를 강제로 퇴장시키는 선택을 하리라는 커뮤니티의 예상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헬리오스 내부에서도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라스트 판타지>의 세계를 쓴 선우진은 그에 격하게 반대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작 캐릭터 커뮤니티에 심히 몰두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꽤 이상한 취미였지만, 전 그 사이버 인형 놀이를 제법 좋아했어요. 각자 만든 캐릭터를 가지고, 모두가 약속한 한 가지 세계관에 맞춰서 설정을 짜고, 그 캐릭터인 것처럼 역극을 하는 거예요.

 

<라스트 판타지>의 컨셉은 그곳에서 따왔고, 그래서 게임에 스스로 갇혀있는 걸 선택한 저희 유저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어요. 그 이야기와 캐릭터들을 너무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세상은 너무 험난하고요. 도망칠 곳이 이곳밖에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비록 즐기는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아마 각자의 도피처가 저희의 세계였던 거겠죠. 그런 애들이라면 조금 착하게 대하고 싶었어요. 어른이라면 그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디렉터 님이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그 애들은 저의, 저희의 과거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그들은 상담 AI 업체와 빠르게 제휴를 맺어, 그들의 인공지능 데이터베이스에 게임 NPC를 뒤집어씌워 직접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유저들이 직접 게임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유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상담 AI와 대화한 유저들은 대부분 스스로의 선택으로 엔딩을 보았다. 게임 캐릭터를 가장하고 유저들을 유도한 것이 성공적인 전략이었다고 업계는 평가했다. 그렇지만 결국 과격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결국 게임에서 강제 퇴장되었다. 그 일부 ‘과격파’들은 SNS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몰입을 방해했다’며 게임 제작사를 비난하는 반대파로 돌아서기도 했었지만, 결국 찻잔의 폭풍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남고, 승리한 것은 이야기였다. 팀 헬리오스의 각본가 선우진 씨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겠죠. 우린 모두 이야기를 사랑해요. 우리가 사람들을 아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보다 정이 많아요. 다만 연약해서 가짜 가면과 이야기의 막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는 거죠. 이건 예행연습이에요. 그런 연습을 거쳐 온 어른들이 주는, 새로운 시대의 연약한 아이들을 위한 발걸음이 되었으면 해요.” 

 


 

…그래서 내가 지금 너의 앞에 있게 된 거야.

 

이상하지? 그 사람들은 떠났는데, 난 지금 무릎을 껴안고 여기 혼자 남아 있어. 그 사람들은, 아직도 개인 메시지를 계속 보내. 그렇지만 난 두려워서 그걸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아직도 지금 내 머릿속에는 모험으로 생생해. 내가 구한 사람들 손을 잡으며 기뻐하던 아이들, 괴물에게 잡혀 있다가 극적으로 재회한 운명의 연인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 원수인 줄 알았지만 사실 서로를 좋아하던 남자와 여자. 사람들뿐일까? 광활한 바다, 드높은 산맥, 황량한 사막, 그리고 모든 것이 죽음으로 물들었던 땅들…

 

 

우리는 명백한 용사였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어. 그건 세상을 구하는 거였지. 마물을 물리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했어. 그리고 모두에게 우리가 필요했어.

 

 

이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뿐만 아니야.

 

여기는 남에게 베푸는 선의가 모두 돌아와. 그러니까 착하게 산다면, 상처받을 일이 없어.

 

그래서 여길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어.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해. 이곳의 사람들을 사랑해. 그리고 물론, 내 파티도 사랑해. 그 시간이 너무 소중했어. 함께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나 자신이 아닌 사람을 연기하고, 누군가가 만든 가상의 세상을 감각하는 게 좋아.

 

이곳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곳. 내가 의미 있는 세상이야. 그러니까 이곳이 아니라면 난 웃을 수 없어. 다른 곳에 있으면 괴로울 뿐이야.

 

이곳에 좀 더 있고 싶었어.

 

파티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어.

 

너희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곳을 영원으로 만들어주면 안 될까. 그 애들을 다시 불러주면 안 될까. 모험을, 조금 더 계속하면 안 될까. 현실에도 집중할게. 이 세상에 있기만 해준다면. 나는….

 


 

Special Thanks: 게임을 플레이 해준 당신.

   | <라스트 판타지>의 엔딩 크레딧.

 

그럼 그 '아이들'은 어떨까? 라스트 판타지 플레이어 중 한 사람인 김다빈 군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라스트 판타지 쇼크의 당사자이자, 주변에 직접 그 현상을 경험한 친구들을 둔 본인이었다. 

 

“‘라스트 판타지 쇼크’는 사실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그 쇼크는 사실, 애들이 배고파서 게임을 끄는 것에서 종식되기 시작했거든요. 다만 진짜로 거의 쓰러질 단계까지 가서 게임을 못 끄는 애들이 있었어요. 일단 제가 그랬고. 그렇지만 결국 현실로 돌아왔어요. 지금도 파티원들이랑 연락하고 지내요. 그때 좋았었지, 재밌었어. 그렇지만 과몰입이 좀 심했던 것 같아. 조절 좀 해야겠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요. 우린 회복될 수 있어요. 게임 안에서도 나오잖아요. ‘누구든지 실수를 한다면, 바로 잡을 기회는 항상 그곳에 있다’. 그 대사를 맡은 캐릭터가 저여서 행복했어요. 시나리오 라이터님한테 감사드리고 싶네요!” 

 

하누의 친구 유우 씨는 그가 나오기 전에 이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하누랑 만나서 기뻤어요. 사실, 그 애, 학교에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조금 가엾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어요. 파티를 그냥 나가도 됐었는데, 우리가 모두 그 애를 놓칠 수 없었어요. 함께 놀아보자. 하누가 우리랑 만나서 많이 밝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빨리 돌아오면 좋겠어요. 우리 파티 법사를 돌려주세요. 걔 없으면 우리 파티 딜 안 나온 단 말이야!” 

 

그리고 아이들만 그럴까? 어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스트 판타지의 최단 시간 클리어를 해낸 한이백 씨는, 자신의 파티원들도 그곳에 남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우리는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에요. 남들보다 더 감상적이면 뭐 어때요? 저는 그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 언제든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면 괜찮잖아요. 아예 거기로 가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린 남들과 다를 게 없어요. 어른이어도 이야기에 몰입하는 건 똑같아요. 다만, 현실로 돌아오는 능력이 좀 더 뛰어날 뿐이죠. 그리고 사실, 어른들 중에서도 청소년들보다 그 능력이 뒤떨어지는 사람이 많고요.”

 

'모험은 영원히'에서는 감독의 시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그건 사실 플레이어들의 여러 목소리가 감독의 목소리와 동일되어 굳이 다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감독 다이앤 뮐러는 출시 때부터 '라스트 판타지'의 팬이었다고 밝혀왔고, 그렇기에 해당 게임에 대해서는 전문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감독은 미사여구를 붙여 말로 설명하는 대신에, 그 아이들의 목소리를 취재하여 진정한 숨은 의미를 발견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두 가지 목소리로 장식된다. 하나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다.

 

'이 이야기는 영원히 마음에 남을 거예요. 이 게임을 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그리고 이 목소리에 대한 팀 헬리오스의 응답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저희의 다음 작품, 어쩌면 라스트 판타지의 후속작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나온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사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음 작품도 이런 플랫폼을 유지할 생각이거든요. 전에 했던 모험과 비슷하게, 그렇지만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요. 또다시 이런 쇼크가 일어날 것 같냐고요? 그건 저희야 모르죠. 저희가 좀 덜 끝내주는 이야기를 쓸 수도 있는 거고, 사람들이 게임에 덜 몰입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지키면서 이야기하려고 해요. 다음에는 정말 멋진 모험이 될 거에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럴 수는 없어.】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리고 너의 모습을 봐.

 

그래, 넌 네가 언젠가 구한 적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제일 마음을 주었던 NPC야. 너는, 가장 처음 마을에서 실종되었던 아이야. 그리고 실체가 없는 마왕에게 강림 되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처치했던 마지막 적이야. 최종 보스.

 

넌 가장 처음 모습으로 나타났어. 그렇지만, 보스로 나왔을 때 걸쳤던 망토와 룬 님과 칼을 맞댔던 그 보라색 칼도 들고 있었지. 눈은 새파랬어. 마치 네가 지금, 아주 제정신인 걸 나타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험은 끝났어. 이 세상의 평화는 너희들이 돌려줬고, 더는 악마들이 세상에 날뛸 일도 없어.】

 

【하누, 네가 구한 이 세계는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설령 벌어진다고 해도, 이곳 사람들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이겠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구나.

 

너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어. 나는 앉은 상태로, 너와 시선을 나누었어. 그 눈에는 내가 사랑한 세상이 앞으로도 계속 비추겠지. 그리고 그곳에 우리의 자리는 없을 거고. 그 사실이 왜 이렇게 슬플까.

 

나는 너에게 말해.

 

왜 이 순간은 영원할 수 없냐고.

 

이렇게 좋은 순간은 왜 항상 한순간이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인 거냐고. 이 시간을 계속 즐기고 싶은데, 나는 널 보내야만 하고 우리 파티를 보내기 싫은데, 왜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거냐고.

 

무서워.

 

세상은 이곳처럼 그렇게 다정하지 않아. 물론 이곳에는 더한 무서움도 있지. 그렇지만 그건 간단히 사랑과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걸. 그렇지만 그곳은 그런 거로는 해결할 수 없어. 난 계속해서, 주저앉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러다가 결국 나 자신을 잃고 남과 똑같이 변해 어느 곳의 전철에 실려 하루를 반복하게 될 거야.

 

그런 게 싫어. 두려워.

 

그렇게 계속 말했지만,

 

넌 웃었어.

 

마치 모든 답을 알기라도 하는 현자처럼.

 

【우리는 이미 이야기했어. 너에게. 알고 있지?】

 

……….

 

【세상은 드넓고, 만날 사람은 많아. 앞으로 벌어질 일도 무궁무진해.】

 

【이 밤하늘에 있는 별처럼.】

 

【그러니까 언젠가 헤어진다고 해도 외롭지 않아.】

 

【넌 그러니까, 마음속에 소중한 마법을 품고 살아가게 될 거야.】

 

【이건 우리가 너희에게 주는 선물.】

 

【너희가, 우리에게 평화롭고 멋진 세계를 선물해준 것처럼.】

 

【우린 너희에게 이야기를 줄 거야.】

 

넌 내게 손을 내밀어. 그곳에 뭔가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난 여러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어. 어서 오라고. 앞으로 펼쳐질 모험은 많다고. 그런 목소리인 것 같았어. 사실, 그건 메신저의 알림 소리였겠지만.

 

【두렵지 않을 거야. 너에게는 힘이 있으니까.】

 

사실 나에게 그런 건 없어.

 

마법도 역시 이 세계에서 받은 거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웃을 수 있었어.

 

조금 오래 굽힌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서. 너도 나와 함께 섰어. 네가 정말 현실의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비슷한 나이대에 비슷한 환경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어.

 

【그럼 마지막으로 물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사실 알고 있어.

 

이건 이미 본 스크립트잖아. 그냥 그렇게 예감이 되더라고.

 

그래도 넌 입을 열어.

 

【너희는 이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이제 앞으로는 모험도, 무서운 괴물도 없어.】

 

【평화로운 세상이야….】

 

【그렇지만 고난은 여전히 있어.】

 

【우리와 영영 헤어질지도 모르고, 네 안의 마법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길게 펼쳐진, 은하수의 길이 끝나가는 게 느껴져. 그리고 그건 하나의 문으로 나타났어.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었어. 거대한 빛을 받으며. 앞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 그래도.

 

해 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이 세상을 사랑해줘서 고마워!】

 

【너희 덕분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었어.】

 

【잘 가! 앞으로의 모험에, 마법과 행운이 가득하길!】

 

응. 잘 있어. 그렇게 말하고서 발을 내디뎠어.

 

앞으로의 약속이나, 언젠가 나올 라스트 판타지의 후속작. 뉴로월드에서 펼쳐질 즐거운 일들. 온라인에서 만날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현실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좋은 일들. 그런 걸 생각하면서 앞으로 계속, 걸어갔어.

 

고마워,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주어서. 다음에 올 때는 내가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이기를. 그리고 우리는 좀 더 어른이 되어 있기를. 나이가 아무리 많아져도,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우리의 생각이나 성격이 바뀌어도, 설령 뉴로월드가 언젠가 문이 닫혀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모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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