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초롱초롱 거미줄에 옥구슬

 

 

때는 4월. 한창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공업 도시인 서창시(市)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철저히 계획 하에 이루어진 곳이었다. 남쪽으로 바다가 접해 있는 이 도시는 1970년대에 경제 개발 붐이 한창일때 지어졌다. 우선 가장 큰 역할은 중공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시의 맨 남쪽, 바다가 면한 지역에 공업 단지들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제외한 중고등학교는 도시의 동쪽에 모여 있었다. 역시 197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마치 두부를 턱턱 얹어 놓은 것처럼 네모 반듯하게 생긴 하얀 건물이었다.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여느 도시보다 높았고, 이곳의 경제는 남편들이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 회사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면 아이를 깨워 학교에 보내고 난 주부들이 장을 보거나 티타임을 가지는 것으로 돌아갔다.

이 도시가 오래 오래 번창할 줄 알고 심은 것인지, 이곳의 가로수는 은행나무가 아닌 벚나무였다. 심은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이 벚나무들은 제법 크기가 컸고, 봄이 되면 따로 꽃구경을 가지 않아도 출퇴근길, 혹은 등하원길에 팝콘처럼 나무에 다닥다닥 매달린 벚꽃들을 볼 수 있었다.

자녀의 나이와 상관 없이 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어려서는 영어 유치원을 보내는 것은 물론, 아이가 좀 더 크면 입시 설명회가 있으면 단체로 기차표를 사서 서울까지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했다지만 내로라하는 유명 입시 학원들이 해마다 발표하는 대학 입학 전략과 방법을 알려주는 설명회를 듣냐 안 듣냐의 차이는 매우 컸다.

지금 자녀가 공부를 어느 정도 한다 하는 중학생 엄마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내년에 개관할 외국어고등학교에 자신의 자녀가 갈 수 있는지 없는지였다. 차마 아직 17살도 안 된 아이를 서울에 있는 외고에 유학을 보내기에는 겁이 났던 부모들은 드디어 집 근처에서 외고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서창외고의 첫회 입시 경쟁률은 1.25대 1이었고, 이는 서울의 유명한 외고 못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창시 인근의 다른 지방 도시에서도 시험을 치르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엄마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생겼다.

“아유, 다같이 들어가면 되지. 뭘 그리 경계하고 질투를 해.”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엄마 조차 같은 단체톡방에 있는 다른 엄마들은 누구에게 과외를 시키는지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그동안 필기를 정리해 놓은 노트를 도둑맞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누구는 일타 강사 출신의 과외 교사에게 그룹으로 수업을 받다가 엄마들의 눈밖에 나서 그룹에서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이 작은 공업 도시가 한바탕 들썩인 뒤에야 서창외고는 새 입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여느 학교와는 다르게, 노출 콘크리트로 지은 5층짜리 이 건물은 학교가 아니라 마치 컨벤션 센터 같았다. 유명 디자이너 김상봉이 디자인했다는, 검정색 바지와 흰색 셔츠, 그리고 파란색 타이가 이 학교의 교복이었다. 그것은 온통 카키색과 회색으로 된 교복들 사이에서 단연 튀었다. 이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차로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곤 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났다.

 

*********

 

채린은 졸음을 쫓아가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국어나 영어, 독일어 같은 언어 성적은 좋았지만 수학이 그에 따라주지 못했다. 이러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채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서창시에 그대로 남는 것이었다. 채린의 엄마와 아빠는 늘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 못 갈 바에야 그냥 여기서 사대나 다녀. 돈 아깝게시리 비싼 돈 주고 후진 대학을 왜 가니?”

과목마다 1등급을 받고 어쩌다 수학에서 2등급이 나오는 채린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몸을 떨었다. 채린의 부모가 말하는 ‘여기’란 서창대학교를 말하는 것으로, 전과목 커트라인이 9등급 정도 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채린의 생각이었다. 채린은 독일어로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die Unabhängigkeit(독립)! die Unabhängigkeit! die Unabhängigkeit!’

물론 채린이 말하는 독립이란 서울대를 가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따로 사는 것이었다. 설마 서울대를 못 갔다고 서창대학교에 보낼까 싶었지만, 채린의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부모가 언제까지나 네 미숙함을 참아줄 거라는 생각을 버려. 부모도 인간이야.”

전교에서 3등을 했을 때 채린이 들었던 말이었다.

“3등? 네 앞에 두 명 있는 것 같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한 사람마다 천 명씩 있는 거야. 넌 삼천 등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남의 뒤통수만 보고 살래?”

채린의 부모들은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는 기계공고를, 어머니는 상고를 나왔다. 채린의 아빠와 엄마는 언제나 더 많이 배워서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들은 방송통신대학으로 학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그것은 외동딸인 채린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네 사촌 오빠 영호 알지? 대학생인데도 공부를 못해서 과외는 못하고 편의점에서 물걸레로 바닥 닦는다더라. 너도 공부 안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나중에 늙어서 실버타운 같은 데 들어가면 자식이 판검사나 의사 정도가 안 되면 창피해서 대화에 끼지도 못한다더라.”

채린은 초조하면 손톱 주변의 살을 커터칼로 파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언제나 손끝은 벌겋게 진피가 드러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피부의 소금기 때문에 무척 따가웠다. 채린은 항상 마데카솔과 대일밴드를 가지고 다니며 상처에 마데카솔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였다. 열손가락 전부 그렇게 해야 될 때도 있었다. 밴드를 붙이지 않고 공부를 하다보면 책과 샤프 펜슬에 피가 묻었다. 그러면 또 채린의 아버지가 가만 있지 않았다.

“너 정신병 있니? 왜 손을 그렇게 뜯어? 일주일 시간을 줄 테니까 손 원래대로 안 해놓으면 그놈의 손톱 다 뽑아버릴 줄 알아.”

“일주일 안에 어떻게 다 나아요?”

“네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다 낫게 되어 있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채린은 열손가락에 밴드를 붙였다. 가뜩이나 친구가 없던 채린에게 아이들은 이렇게 속삭였다.

“쟤 자해하잖아. 저 밴드 붙이는 건 자해 방지 밴드고.”

그렇게 지긋지긋한 중학교 시절을 지내고, 외고 입시를 무사히 마쳤다. 서창 외고의 교복을 입고 열 손가락에는 아직도 밴드를 붙인 채린은 부모의 자랑거리였다. 채린은 이대로 서울대를 가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는 루트를 꿈꾸었다. 그것은 채린의 엄마의 오래된 소망이었다. 채린이 서창외고에 입학한 그날부터 엄마는 매일매일 성당에 나가서 청원기도를 했다. 기도 제목은 ‘김채린 소피아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이었다. 그 동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채린이 서울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채린은 쥐구멍에 들어가서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았다.

 

*********

 

채린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잠시 졸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머리가 헤드뱅잉하듯이 휙 아래로 꺾이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지루한 수학 시간. 제대로 수업을 들어야 점수가 잘 나올텐데 도저히 수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채린의 옆에 앉은 짝 예지는 졸음은 커녕 눈빛을 빛내며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아까 아침만 해도 사흘 밤을 못 잔 좀비처럼 멍하게 앉아 있던 예지였다.

“안 되겠어. 머리가 아파서 보건실에 좀 다녀와야겠어.”

예지는 체육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누워서 쉬는 것도 국어나 수학, 영어 같은 주요 과목 시간에는 하지 않는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참고 또 참다가 체육시간이나 되면 양호실에 가는 것이다. 채린 역시 머리가 아팠다. 마치 손오공이 긴고아를 낀 듯, 목덜미 뒤에서 시작한 두통은 채린의 머리통을 꽁꽁 감쌌다. 숨 쉬는 것 조차 힘들었다. 수학 시간 다음은 음악 시간이었다. 수학 시간만 견디고 가자, 조금만 더 버티자. 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 안에서 두통약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기실 보건실에 가는 학생들이 단지 아파서만 가는 건 아니었다. 생리통, 두통, 복통, 식체 등 원인은 달라도 가서 보건실만 다녀오면 싹 낫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보건실에서 한숨 자고 나오면 마치 프로포폴 주사라도 맞고 난 뒤 깬 것처럼 온 몸이 개운하고 가뿐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남은 시간은 졸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딱 하나 단점은, 온몸에 근육통이 생긴다는 점인데 모두들 잠 자는 자세가 잘못 되서 그런 걸 것이라 생각했다.

채린이 처음으로 보건실로 간 건 손에 붙일 밴드가 다 떨어졌을 때였다. 보건 선생은 잘해봐야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로, 짧은 단발 머리에 오른손에는 마치 할머니의 유품인 듯한 올드한 디자인의 루비 반지를 끼고 있었다. 투명한 피부색은 방금 세수를 하고 마스크팩을 붙였다 뗸 것처럼 반들반들 윤이 났다. 정석적인 미인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워낙 피부가 좋고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보기 좋게 자리잡은 얼굴이라 어떤 면에서는 아름다운 얼굴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청바지에 줄무늬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것이 그를 한층 경쾌하게 보이게 했다.

지금까지 매번 보건실에 밴드를 얻으러 갈 때마다 다른 보건 선생들은 짜증을 내곤 했다.

“또 왔니? 얘, 너처럼 하루에 열 개씩 매일 밴드를 가져가면 정작 다른 애들이 필요할 때 쓸 수 없잖아. 너 뭐 현악기 같은 거 전공하니?”

하지만 이 학교의 보건 선생은 밴드를 가져가는 것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채린의 벌겋게 껍질이 벗겨진 손끝을 보면서도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연고는 가지고 있니?”

“네.”

“연고 꼬박꼬박 바르고 밴드 붙여. 잠깐, 그 전에 너 상처 소독부터 해야겠다.”

그 순간 채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게 잘못 감염이라도 되면 수술해야 할 수도 있어. 항상 하루에 한 번은 소독 꼭 하고 밴드도 꼭 붙이고 다녀. 연고 바르는 것도 잊지 말고.”

“네.”

보건 선생은 탈지면에 소독약을 묻혀서 채린의 손가락을 꼭 감싸쥐었다. 너무나 따가워서 온몸이 불판에 놓은 오징어처럼 뒤틀렸다.

“조금만 참아. 이렇게 소독을 해놔야 덧나지 않지.”

“네.”

“참, 잠자기 직전에 침대에 누워서는 손에 붙인 밴드 전부 떼. 공기가 통해야 빨리 나아.”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채린의 상처를 가지고 짜증을 낸다든지 혹시 자해하는 거 아니냐고 묻지 않는 사람은 지금의 보건 선생이 처음이었다. 채린은 자신의 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밴드 열 개가 손가락을 각각 감싸고 있었다. 그 중 어떤 손가락은 피가 베어 나온 것도 있었다. 어차피 어제 밴드를 두 통이나 샀다. 오늘은 밴드를 얻으러 온 게 아니라 아파서 잠시 쉬러 온 것이다. 과연 자리가 있으려나.

똑똑.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 오세요.”

안에서 보건 선생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침대는 6개 남짓. 각 침대마다 커튼이 달려 있었다. 침대 두 개가 사용중인지 커튼이 쳐져 있었다. 흔히 보건실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 대신 라벤더 향이 약하게 났다.

“무슨 일로 왔니?”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머리가 어떻게 아픈데?”

“여기 목덜미 뒤에서부터 타고 와서 이마까지 마치 띠를 두른 것처럼 머리가 아파요.”

“따로 두통약 먹은 거 있니?”

“네.”

“뭐 먹었니?”

“타이레놀이요. 2알 먹었어요. 너무 두통이 심해서요.”

“그래, 저쪽 침대에 가서 누워 있어. 여기 이름이랑 학년, 반 적고.”

보건 교사가 엑셀 파일을 출력한 종이를 주며 말했다. 김채린, 1학년 3반.

“너 아까 타이레놀 먹었다고 했지?”

자리를 잡고 누운 채린에게 보건 교사가 다가와 물었다.

“네.”

“이 약도 먹어.”

보건 교사는 처음 보는 동그란 하얀색 알약 두 개를 내밀었다.

“아까 약 먹었는데요?”

“이건 그거랑 다른 거야.”

“약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지 않나요?”

“이건 천연 성분으로 만든 두통약이야. 너 순티라고 아니?”

“아뇨, 모르겠는데요.”

“인도의 생강 같은 건데, 그걸로 만든 약이야. 너처럼 편두통 심한 사람한테 좋으니까 먹어.”

채린은 보건 선생이 들고 있던 알약과 물컵을 받아서 약을 삼켰다. 보건 선생이 다시 컵을 받아가며 말했다.

“목덜미 뒤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네.”

“그건 스트레스 떄문인데. 벌써 네 나이에 고혈압일 리는 없고. 너 스트레스 많이 받니?”

말해 뭐할까. 하지만 그만 두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봤자,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먹고 앉아서 공부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맨날 아프대니?’ 라는 소리만 들어 왔다. 보건 선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가 컵을 들고 책상 쪽으로 가자 나는 자리에 똑바로 누웠다. 누워 있어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잠시 뒤 보건 선생이 다시 와서 커튼을 걷었다. 그는 작은 유리병와 아주 작은 베개 같이 생긴 뭔가를 들고 있었다.

“잠깐 머리카락 좀 위로 치워 봐.”

“왜요?”

“편두통이 심하다며. 이건 편두통에 좋은 아로마 오일이야.”

과연 유칼립투스와 뭔가가 섞인 것 같은 향이 났다. 나쁘지 않았다. 보건 선생은 손에 오일을 바르더니 채린의 뒷목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채린은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 보건 선생이 어디 있나.

“괜찮아요. 안 하셔도 돼요.”

채린이 말했지만 보건 선생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보건 선생의 손끝은 매웠다. 엄마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했을 때도 이 정도로 신경써서 지압해준 적이 없었다. 채린은 눈을 감고 보건 선생의 손길을 느꼈다. 뒷목을 밧줄로 꽉 묶은 것 같은 느낌이 조금씩 약해졌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채린의 관자놀이와 이마의 가운데 부분을 마사지한 보건 선생은 손을 떼고 내 눈에 작은 베개 같이 생긴 것을 올려 주었다.

“아이필로우라고 하는 거야. 편두통은 바깥이 밝으면 더 심해져. 잠깐 좀 자도록 해.”

채린이 뭐라고 했던가? 네, 감사합니다였나? 채린은 뭐라고 대답을 하기 전에 이미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온몸이 축 늘어져서 마치 침대에 파묻히는 것 같았다.

 

*****

 

얼마쯤 잤을까. 일어나보니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음악 시간 한 시간만 자려고 했건만. 그 다음 시간은 지구과학이었다. 어떻게든 예지의 노트를 빌려서 필기를 하면 되겠지. 그런데 몸이 이상하게 나른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마치 오랫동안 열병을 앓다가 회복기에 들어선 것 같았다. 두통은 흔적도 없이 싹 사라졌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채린은 늘 편두통이 심해서 6알 짜리 진통제를 일주일에 한 통씩 비우곤 했었다. 거북목에 좋다는 반원형 나무 베개로 목덜미를 마사지 해봐도 소용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뇌를 꺼내서 깨끗하고 차가운 계곡물에 씻었다가 다시 넣어 놓은 것처럼 상쾌했다. 늘 편두통을 달고 살던 채린이였다. 정형외과에서 엑스 레이를 찍어 봐도, 뇌 CT와 MRI를 찍어 봐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들 했다.

“진짜로 아픈 게 아니라, 아프다는 기분이 드는 거 아니니?”

유치원 때 채린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자, 난감한 표정으로 유치원 선생이 이렇게 되물었다. 그 뒤로 채린은 두통이 시작되면 이것이 정말 아픈 것인지, 아니면 아프다는 착각이 드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보건실에서 두 시간 자고 일어난 것으로 두통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 너무 신기했다. 이제는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프지 않다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

채린은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의 근육이 마치 오랫동안 한 자세로 묶여 있었던 듯 아팠지만 두통이 없는 지금, 근육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치 날아갈 것 같았다. 커튼을 열자 채린보다 먼저 와 있던 학생들은 이미 돌아가고 채린 혼자 남아 있었다.

“좀 괜찮니”

보건 선생이 다가왔다.

“네가 너무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 좀 어떠니?”

“우와, 신기해요. 머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

“잘 됐네. 이제 가서 공부해.”

“네. 감사합니다.”

 

 

*****

한동안 편두통은 잠잠했다. 가지고 다니던 약도 끊었다. 여전히 손은 물어 뜯었지만 두통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훨씬 살 만했다. 두통이 사라져서 그런가, 신기하게 성적도 올랐다. 모의고사에서 수학 만점을 받은 것이다.

“세상에, 이게 왠일이니?”

엄마가 채린의 수학 점수를 보며 말했다.

“몰라. 머리가 안 아프니까 머리가 잘 돌아갔나봐.”

채린은 더욱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번에는 내신 기간이었다. 언제나 쉬운 문제에서 실수로 틀리곤 하던 채린은 또다시 전과목 만 점을 받았다. 하지만 전과목 만 점을 받은 건 채린 뿐만이 아니었다. 예지 역시 전과목 만 점이었다. 전과목 만 점을 받은 아이들은 여느 때보다 많았다. 전부 쉬운 문제를 실수로 한 두 개씩 틀려 전교 10~20등 언저리에 있던 아이들이었다. 교사들은 문제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이 아니냐며 비상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친 모의고사에서도 아이들의 점수는 과목별로 평소보다 대략 10점 정도 올라 있었다. 선생들은 자신들이 잘 가르친 탓이라 생각했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한 결과라 생각했으며 그 아이들의 학원 선생들과 과외 선생들은 자신들이 잘 가르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창시 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사교육계와 학부모와 학교 교사 모두 만족했다. 남편이 중공업 회사를 다니면서 벌어 온 돈은 아내들에 의해 서창시의 사교육계로 흘러들어갔고, 사교육계로 들어간 돈은 다시 3차산업 종사자들에게로 들어갔다. 그렇게 서창시의 경제가 돌아갔다.

채린에게 다시 편두통이 찾아온 건 그 다음 중간고사때였다. 그동안 아픔 없이 지내와서 그런가, 이번 두통은 유독 끔찍했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뇌가 두개골 안쪽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목덜미 쪽에서 시작된 두통은 거대한 바오밥 나무처럼 머리 전체로 타고 올라갔다. 채린은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국어 시간.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파서 중간에 쉴 수 있는 시험은 모의고사밖에 없었다. 학종으로 입시를 치르는 것도 생각해야만 했다. 디 우나브행기그카이트! 디 우나브행기그카이트! 디 우나브행기그카이트! 독립! 독립! 서창대나 다니는 낙오자가 될 순 없었다. 어떻게 됐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집에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 정신 차리자. 조금만 더 버티면 곧 시험이 끝난다.

그 뒤로 기억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채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플리스 소재의 파란색 담요를 덮은 채 였다. 머리에서 은은하게 유칼립투스 냄새가 났다. 닫힌 커튼 너머로 보건 선생이 아주 약하게 틀어 놓은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이 흘러 나왔다.

“일어났니?”

채린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보건 선생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건 선생이 채린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보건 선생의 손에서도 약하게 유칼립투스 향이 났다. 아마 또 채린의 머리와 목덜미에 유칼립투스 오일을 바른 모양이었다.

“선생님, 지금 몇 시에요?”

“한 시쯤 됐어.”

“저, 시험은요?”

“채린아. 지금은 시험 같은 거 잊어버리고 푹 쉬어. 너 이래서는 수능은 커녕 기말고사도 다 못 봐.”

“그럼 오늘 시험은 망했다는 거잖아요?”

“아파서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더 자고도 안 일어나면 119 불러서 병원 데려가려고 했어. 지금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아니에요. 공부가 중요해요. 공부가 정말로 중요하다구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학생들을 이해하는 친절한 보건 교사인 척 하는 거 그만 둬요! 선생님은 안정적인 직장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그런 말 할 수 있는 거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지난 번에 유칼립투스 오일을 발랐을 땐 두통이 없어졌는데, 지금은 왜 계속 두통이 있지? 오늘 아침에 세수를 하고 난 뒤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오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 검지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피부를 잡아 뜯었다.

“너, 갑자기 쓰러졌었어. 기억 나니?”

“국어 시간에요?”

“그래.”

“몰라요.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요. 머리가 너무 아팠다는 거 말고는요.”

“혹시 생리통이 심하니?”

“아니오. 약간 배가 아프긴 한데 약 먹으면 금방 없어져요. 어차피 두통약을 매일 먹는걸요.”

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보건 선생이 채린의 어깨를 눌렀다.

“계속 누워 있어. 아직 시험 보려면 멀었어.”

“전 진짜 괜찮은데요.”

하지만 그렇게말하자마자 채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두통이 너무 심했다. 맥박이 뛸 때마다 강한 통증이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거 먹어.”

보건 교사가 정체 불명의 흰 알약 두 개를 내밀었다. 지난 번에 먹었던 그 약인 것 같았다.

“지난 번에 주신 건가요? 그 수……수피? 그런 걸로 만들었다는?”

“맞아. ‘순티’로 만든 거야. 도움이 될 테니까 먹고 좀 더 자.”

약을 먹고 눈에 아이필로우를 덮은 후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

 

자고 일어났을 때, 보건 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채린은 기지개를 켰다. 머리 아픈 것이 깨끗이 나아 있었다. 온몸에 근육통이 약하게 있는 것을 빼고는 멀쩡했다. 이럴 수가, 타이레놀을 아무리 먹어도 낫지 않은 두통이 보건실에서 잠만 자고 일어나면 씻은 듯이 낫는다. 유칼립투스 오일 때문일까. 하지만 아까 잠깐 깼을 때 유칼립투스 오일 냄새가 났지만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혹시 순티라는 약 때문에 그런 걸까? 채린은 침대에서 빠져 나와 이불을 정리해놓고 약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순티라고 적힌 약통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순티라고 했는데. 근데 이 이상한 이름의 약은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채린은 핸드폰을 열어 네이버 검색창에 ‘순티’라고 쳤다. 그런 단어는 뜨지 않았다. 영어로 철자가 어떻게 될까. sunti? soonti? 한글로 ‘순티’라고 구글창에 치자 다음과 같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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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티(생강)은 역사적으로 아유르베다에서는 소화를 돕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선하고 톡쏘는 향미로 인해 아시아 요리에서는 빠질수 없는 식자재입니다.

 

그 밑으로 계속 화면을 내려 봤지만 소화 불량에 좋다는 말만 적혀 있었다. 소화불량에 좋다는 약인데 어째서 머리 아픈 것이 나았을까? 플라시보 효과일까? 아니면 유칼립투스 오일을 바르고 먹으면 두통에 좋은 성분이 나오는 걸까? 채린은 순티를 파는 쇼핑몰 사이트의 화면을 캡쳐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해야지.

다음날은 수학과 과학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다른 과목은 철저히 준비했지만 수학이 항상 문제였다. 난 어째서 이과형 두뇌를 타고나지 않은 걸까. 공부를 계속 하는 수밖에 없었다. 편두통도 없어졌겠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듯, 두뇌가 아찔할 정도로 팽팽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맞히지 못하고 틀린 부분의 이해가 쏙쏙 되었다. 도형 문제를 풀 때는, 보이지 않는 보조선이 마치 빨간색 레이저 광선처럼 죽 그어진 것이 보였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새벽 두 시가 지났지만 전혀 졸리거나 피곤하지 안핬다. 밖에서 채린의 방문을 열고 누가 들어오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얘, 채린아, 엄마 말 안 들리니?”

“응? 왜?”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어서 자. 벌써 너무 늦었어.”

“하나도 안 졸려. 그리고 공부가 너무 잘 돼.”

“공부가 너무 잘 돼?”

“응. 아무래도 보건실에서 먹은 약 때문인가봐.”

“보건실에서 무슨 약을 먹었는데?”

채린은 핸드폰 캡쳐 화면을 보여주었다.

 

‘순티(생강) <소위, 건위> (100%천연허브/히말라야…-인도샵’

 

“이걸 보건 선생님이 줬다고?”

“응. 나 편두통 엄청 심하잖아. 타이레놀도 안 듣고 이지엔식스도 안 들었는데 순티 이거는 잘 듣더라고.”

“그래, 엄마한테 링크 보내. 사놓을게. 그리고 지금은 빨리 자. 어서.”

채린의 엄마는 채린이 침대에 눕는 걸 보고서야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채린의 정신은 또렷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숫자 열을 세는 동안 채린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꿈도 꾸지 않고 편안히 잠들었다.

다음날 채린은 다시 모든 과목에서 다 만 점을 받았다. 심지어 수학까지도! 그리고 이번에도 만 점을 받은 아이들이 꽤 있었다. 보통 최상위권 바로 아래 상위권 아이들은 성적 올리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 상위권 아이들이 대거 최상위권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학교 선생들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건지, 혹시 시험지가 유출된 건지에 대해 몇일을 회의를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험지를 빼돌렸다는 증거는 없었다.

아직 선생들은 물론 학생들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성적이 오늘 학생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을.

 

************

 

인도샵에서 주문한 순티 약은 사흘 만에 배송이 되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과연 보건 선생이 줬던 그 알약이 들어 있었다. 보건 선생은 한번에 두 알씩 줬지만 더 많이 먹으면 효과가 더 좋지 않을까? 채린은 순티 세 알을 먹고 눈썹뼈과 목덜미, 관자놀이에 유칼립투스 오일을 발랐다. 양호실에 한번 갔다오면 다 좋은데 한시간은 자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자지 않고 약만으로 편두통이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보건실에 다녀 오지 않고 그냥 약만 먹으니 편두통이 낫질 않았다. 공부는 점점 더 집중이 안 되었다. 채린은 계속해서 손 거스러미를 뜯었다. 피부란 어쩌면 이렇게 겹겹이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더 이상 벗겨질 것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시뻘건 속살도 커터칼로 파내면 벗겨졌다. 채린은 티슈 한장을 펼쳐서 뜯은 살 껍질을 하나씩 올려 놨다. 그렇게 해서 마치 오징어를 말리듯 뜯어낸 살갗을 말리고 나면 한 개씩 집어 씹어 먹었다. 그 누구도 채린의 이런 행동을 알지 못했다. 채린은 녹이 슨 커터칼로 손톱 주변의 살을 파낼 때마다 속이 후련해졌다. 머리가 너무 아프면 손을 뜯는 행동이 더욱 심해졌다. 열 손가락에 마데카솔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서 채린은 걱정이 되었다. 조금 있으면 주민등록증을 만들러 가야 했다. 먼저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온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열 손가락의 지문을 다 찍는다는 것이었다.

“너 주민센터 갈 때 손에 붙인 밴드 다 떼고 가야 돼. 지문 다 찍으니까.”

채린은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다. 수능을 보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했다. 지문이 없어서 신분증을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보다도 벌겋게 진피가 드러난 손가락에 검은 잉크를 묻히면 그 얼마나 비위생적일까.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점점 더 아파왔다. 할 수 없이 채린은 미술 시간에 보건실을 찾았다. 보건실에서 자고 나면 졸리지도 않고 아픈 것도 싹 사라진다는 소문이 퍼져서일까. 6개의 침대가 모두 차 있었다.

“어떡하니. 자리가 없는데.”

오늘도 여전히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보건 선생이 말했다. 채린은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얘,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선생님, 그게요.”

채린은 망설였다. 엄마 아빠 조차도 채린의 손을 물어 뜯는 버릇을 탓하기만 했다. 과연 보건 선생은 뭐라고 할 것인가.

“손을……가만히 못 놔두겠어요.”

채린이 열 손가락 끝에 붙은 밴드를 보여주며 말했다. 어떤 손가락은 피가 베어 나온 흔적이 있었다.

“집에서 엄마는 뭐라고 하시니?”

“엄마 아빠는 그냥 보기 싫다, 남들이 욕한다, 그런 말 밖에 안 해요. 저번에는 엄마가 너 매저키스트 아니냐며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한 게 다에요. 하지만 진짜로 절 정신과에는 안 보낼 거에요. 거기는 의지 박약인 사람만 간다고 생각하거든요.”

“네가 세 시간 동안 손을 물어 뜯지 않는다면 그걸 낫게 해줄 연고가 있어.”

“세 시간이요?”

“응. 세 시간 만에 다 나을 거야. 하지만 그동안 밴드 붙이면 안 되고 공기가 통하게 둬야 돼.”

“선생님은 어디서 그런 약들을 구하셨어요? 참, 그때 저한테 주신 순티 알약 저도 온라인에서 구매해서 먹어봤는데 여기서 먹은 것처럼 효과가 없더라구요. 유칼립투스 오일도 발라보고 먹고 잠도 자 봤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어요. 신기하게 여기서만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러니?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이구나. 편두통은 심리적인 요인이 커. 너희들이 아프다고 보건실 찾아 오는 것도 전부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그럴 거야. 너한테는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한 가보지.”

그 말은 맞았다. 채린에게 집은 또다른 직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엉망이 된 손끝을 숨기기 위해 언제나 주먹을 쥐고 있어야 했고 성적도 좋게 유지해야만 했다. 가끔 아빠가 채린이 주먹을 쥐고 다니는 걸 보며 또 이렇게 말했다.

“손을 왜 그따위로 하고 다니는 거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손가락 잘린 사람을 볼 거 아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목덜미와 뒤통수가 맞닿는 부분이 너무 아파서 반원형으로 잘린 나무 베개를 사서 목 뒤를 마사지했다. 그러면 잠깐 동안은 낫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머리가 너무 아팠다.

“너 머리도 아프지?”

“네.”

“그럼 온 김에 잠깐 누워서 자. 손에 바르는 약 줄테니까. 이불에 안 묻게 조심하면서 누워서 자.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정말요?”

“그럼.”

보건 교사는 흰색 알약 네 개를 내밀었다. 더 많이 자야 하니 약의 갯수도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이게 수면제에요?”

“아니. 내가 말했잖아. 인도 생강으로 만든 천연 약이라고. 중독 되고 그런 거 걱정할 필요 없어. 그냥 신경을 편안하게 해주는 거니까.”

“인터넷에서는 소화 불량에 좋다고 되어 있다던데요?”

“너, 소화 불량에 언제 걸리니?”

“네?”

“소화 불량에 언제 걸리냐고.”

“스트레스 받았을 때요.”

“그럼 머리는 언제 아프니?” ‘

“스트레스 받았을 때요.”

“거 봐. 우리 몸에는 미주신경이라는 게 있어서 체하면 머리가 아프게 되어 있어.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거야.”

“아, 네.”

“파티션 쳐줄 테니까 소파에서라도 좀 자. 담요 갖다 줄게.”

보건 선생은 푸른 천으로 된 파티션을 소파 옆에 놓았다. 그리고 채린이 눕자 베개와 담요를 가져왔다.

“손 좀 보자.”

채린은 남들 앞에 손을 내놓는 것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보건 선생 앞에서는 손을 내밀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보건 선생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채린의 손끝을 소독한 다음 엉망으로 뜯겨진 채린의 손끝에 연고를 발랐다. 슬쩍 연고를 봤지만 분홍색의 납작한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는 약이라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열 손가락 끝이 욱신욱신했다. 너무 아파서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자, 이제 누워서 좀 자.”

“네.”

그리고 채린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

 

일어나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정확히 세 시간만 자고 일어난 것이 무척 신기했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두통은 싹 사라져 있었다. 본래 두통 때문에 잠을 자다가도 깼을 정도로 두통이 심했는데, 보건실에서 자고 일어만 나면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하지만 더 신기한 것이 있었다. 손가락이 깨끗하게 나은 것이다!

“선생님! 선생님!”

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밖으로 나왔다. 보건 선생은 책상 앞에서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하고 있다가 채린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손가락이 다 나았어요!”

“어디 보자.”

채린이 엉망으로 시뻘겋게 벗겨져 있던 손가락을 내밀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피부로 덮여 있었다.

“선생님, 대체 무슨 약을 쓰신 거에요? 좀 알려 주세요.”

“알려 주면? 또 손 뜯고 약 바르고 하게?”

“아니오. 이제는 안 뜯을 거에요. 절대로요.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갖고 있으려구요.”

“이건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약이야. 혹시 손을 또 뜯으면 보건실로 와. 발라줄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채린이 으윽 하고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니?”

“또 근육통이 있어요. 이번에는 팔다리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요.”

“잠을 잘못 잤나 보네. 스트레칭 좀 해주면 나을 거야.”

“이상해요. 보건실에서 자면 두통은 낫는데 근육통이 생겨요.”

“침대 매트리스가 너무 딱딱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학교에서 쓰는 것들은 아무래도 여럿이 사용하니까 푹신한 걸 갖다놓긴 힘들거든.”

“네.”

“참, 그 손가락 말인데.”

보건 선생은 목소리를 낮췄다. 보건실에는 원래 누워 있던 아이들은 전부 교실로 돌아가고 채린과 보건 교사 둘만 남았는데도 보건 선생은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하면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세 시간 만에 다 나았다는 거,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

“왜요?”

“음, 이 약은 아직 임상 실험이 안 끝난 약이거든. 임상 3상 중에 있는 약이야. 그걸 학생들한테 썼다고 하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너는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네.”

“그럼 가 봐.”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채린의 손가락이 다 나았다는 사실은 금새 학교 안에 퍼졌다. 가뜩이나 보건실에서 주는 약을 먹고 자고 일어나면 졸리지도 않고 몸이 가뿐하면서 공부도 잘 된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있던 상태였다.

“야, 김채린, 너 어떻게 손이 그렇게 말짱해졌어?”

“이거? 보건실에서 선생님이 준 약 바른 거야.”

“약만 발랐어?”

“아니. 자기도 했지. 머리가 아팠으니까.”

“근데 다 나았다고?”

“응. 나도 신기해.”

이제 아이들은 조금만 배가 아프다거나, 엄마에게 혼나서 기분이 우울해졌다거나, 입시 때문에 불안하거나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보건실을 찾았다. 보건 선생은 그때마다 흰색 알약 두 개를 주었고 아이들에게 침대를 내주었다. 하도 많은 아이들이 보건실에 와서 이름을 적고 대기표를 받아가야 했다.

그러는 동안 보건 선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젊어지는 것 같았다. 피부는 더욱 맑아졌고 마치 고양이 발바닥의 젤리처럼 쫀득쫀득하면서도 부드러워졌다. 머리숱도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윤기가 반드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따로 펌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보기 좋은 곱슬기가 생겼다. 키도 조금 자란 것 같았다. 본래 160cm가 조금 넘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165cm는 되어 보였다. 그러자 손에 낀 오래된 디자인의 루비 반지가 더욱 도드라졌다.

“선생님, 요즘 키 커진 것 같아요.”

아이들이 말할 때면 보건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요가를 해서 그런가? 너희도 하루종일 책상 앞에만 있지 말고 스트레칭 좀 해. 그럼 구겨져 있던 몸이 펴져서 키가 커질 걸.”

“정말요?”

“내가 커진 걸 보면 모르겠니.”

하지만 보건실을 사용한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근육통이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꼭 어디 두들겨 맞은 것처럼 근육통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보건 선생은 채린에게 대답한 것과 똑같이 대답했다. 학교에서 공용으로 쓰는 매트리스다보니 딱딱한 걸 가져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근육통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그 설명에 납득했다. 그리고 온몸에 파스를 붙였다. 파스 냄새가 교실을 메우고 복도로 퍼져 나가서 온 학교가 파스 냄새로 진동했다. 심지어 교무 회의에서 이 문제가 대두되었다.

“아이들이 보건실에 너무 자주 가는 거 같은데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편두통이 있는 애들이 많습니다. 보건실에서 자고 일어나면 씻은 듯이 싹 낫는다고 하던데요.”

“그렇다고 보건실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들락거리면 안 되지요. 앞으로 보건실은 일주일에 한 번만 가도록 하세요.”

보건실의 알약과 수면에 중독된 아이들이 곧 항의를 했다.

“우리는 진짜 아파서 가는 거라구요. 아무리 약을 먹어도 안 듣는데 보건실만 다녀 오면 다 낫는다구요.”

항의한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우리 애가 머리가 아파서 공부를 못하다가 보건실만 다녀 오면 싹 나아서 공부도 더 잘하고 성적도 올랐는데, 아프다는 애를 왜 보건실에 못 가게 하나요?”

“보건 선생이 애들한테 준다는 약이 뭔가요? 그걸 사서 먹일테니까 알려 줘요.”

엄마들 사이의 단톡방 알림이 끊임없이 울렸다. 보건 선생이 준 알약 이름이 순티라고 하는 인도 생강으로 만든 약이라더라, 이것의 주 효능은 소화 불량이다, 어지럼증에 좋을 수도 있다, 등등의 정보가 오갔다. 하지만 국내에서 파는 쇼핑몰에서 산 순티 약은 모양과 크기는 똑같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두통약 대신 순티 알약을 먹고 잠을 자봐도 계속 졸리고 머리가 아팠다. 학생들은 집에서는 마음 편히 잘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보건실만 가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른해지면서 잠이 솔솔 오고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었다. 대체 학교에 딸린 조그만 보건실이 뭐 어떻길래.

그 중 시간이 많고 목소리가 크며 자녀 교육에 집착하는 엄마 한 명이 학교 보건실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갔다. 여느 보건실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보스 스피커로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이 작게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과, 곳곳에 라벤더 향초를 워머로 녹여서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라벤더가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거든요. 하지만 불을 붙여서 태우면 공기가 답답해지니까 워머로 태우고 있습니다.”

보건 선생이 침착하게 말했다.

“라벤더요? 이건 뭐 초 켜는 건가요?”

“불에 직접 붙이진 않고 워머로 녹이는 겁니다.

“무슨 오일을 발라줬다면서요? 맨날 손 물어 뜯는 애한테. 그건 뭔가요?”

“유칼립투스 오일입니다. 별 거 아니에요. 애가 편두통이 너무 심하길래 좀 시원한 느낌이 드는 유칼립투스 오일을 바른 거지요.”

“그건 따로 특별한 브랜드가 있나요? 아니면 시중에서 아무거나 사면 되나요?”

“저는 네이버 스토어팜에서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셀러님한테서 사는데, 사실 에센셜 오일이라면 어느 제품을 써도 상관 없습니다..”

“그, 아이디? 그게 뭔가요? 여기다 좀 적어주시겠어요? 판매자 이름이랑요.”

“네, 알겠습니다.”

보건 선생은 포스트잇을 꺼내 스토어팜의 주소와 셀러 아이디를 적어 주었다.

“저 라벤더 캔들은 어디서 사신 건가요?”

“제가 방금 적어드린 셀러에게서 산 겁니다.”

“아, 라벤더도 같이?”

아이 엄마는 포스트잇에 괄호를 치고 ‘라벤더 향초’라고 적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살짝 경계심을 띠고 아이 엄마가 물었다.

“선생님 혹시 요가 같은 거 하시나요?”

“네. 그건 왜 물으시죠?”

“설마, 애들한테 향 피우면서 이상한 거 가르치시는 건 아니죠? 저희집은 교회를 다니는데 요가 같은 거는 해선 안 된다고 목사님이 항상 얘기하시거든요.”

“아니오. 제가 요가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명상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근육 단련하고 체형을 바르게 하는 것 뿐이지요. 저도 명상의 세계까지는 파고 들 생각이 없습니다.”

“아, 그럼 다행이군요.”

아이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애가 선생님이 늘 음악 틀어 놓고 어떤 애한테는 오일 같은 거 발라준다고 해서요. 우리 애한테도 발라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애가 아프면 얼마든지요.”

“아유,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여기 오니까 확실히 마음이 편해지긴 하네요. 우리 애도 여기서 몇 번 자고 나더니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사라졌다면서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애들이 여기서 낫고 가는 게 제 보람이죠.”

“선생님은 어쩜 나이도 얼마 안 되어 보이는데 이렇게 침착하세요? 이제 막 대학교 졸업하고 바로 임용 되셨죠?”

“네.”

“어쩐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동안이시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그럼 우리 애 좀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릴게요. 그리고 저 과일 바구니 딱 4만 9천원에 맞춘 거니까 받으셔도 돼요.”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음 부터는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네, 네, 그럼요.”

 

*******

채린이 점점 보건실에 가는 빈도 수가 잦아졌다. 마치 산통처럼, 머리가 욱신욱신 수축되는 것 같은 느낌의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어떤 때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빗으로 머리를 때려 보기도 했고, 밤에 자다가 두통 때문에 깨서 냉동실에 머리를 집어 넣은 적도 있었다.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 보건실에 다녀올 때마다 온몸이 너무 아팠다. 처음 보건실에 갔을 때 느꼈던 푹 자고 일어난 느낌도 오래 가지 않았다. 채린은 아주 잠깐의 두통이 없는 상태라도 느끼기 위해 수박의 흰 껍질에 붙어 있는 붉은 과육 부분을 남김없이 핥아 먹듯 보건실에 드나들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채린의 담임이 채린을 불렀다.

“너 요새 왜 그리 보건실에 자주 가니? 학교가 자러 오는 곳이야?”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래요.”

두통이 다시 시작되면서 다시 손을 뜯기 시작한 채린이 벌게진 손끝을 얼른 주먹을 쥐어 가리며 말했다. 담임은 채린의 그런 모습을 못본 채 했다. 어느 반에나 손톱을 물어 뜯는 아이는 있었다. 칼로 자해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부모에게 말해서 문제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물론 채린은 칼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담임이 알지는 못했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굳이 채린의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 애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채린의 엄마를 몇 번 본 적이 있는 담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잔뜩 겁에 질린 몸집 작은 개처럼 채린의 엄마는 언제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말투도 톡 쏘는 듯 했고 누가 자기 애한테 해꼬지라도 하려고 드는 걸 막으려는 양 늘 공격적이면서 방어적이었다. 채린이 손을 뜯는다는 건 그 부모도 알고 있을 터였다. 부모도 알고도 내버려 두는 걸 학교 선생인 자신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일 년이 지나면 담임이 바뀔 테니까.

“넌 뭐 맨날 머리가 아프다 그래.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냐? 이번 달에 모의고사 성적 보니까 점수가 좀 떨어졌던데.”

“그게 머리가 너무 아파서 공부가 잘 안 되서 그래요. 보건실에만 가면 머리 아픈 게 싹 낫는 다구요.”

“진통제 먹으면 되잖아.”

“그냥 진통제로는 안 들어요. 보건 선생님이 주시는 약이 따로 있어요. 그걸 사서 집에서도 먹어 봤는데 보건실에서 먹는 것 같은 효과는 전혀 안 났다구요.”

안 그래도 채린의 담임은 아이들 사이에 퍼진 ‘보건실 소문’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게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자신의 업무 영역이 아닌 부분까지 괜히 기웃거리기 싫었다. 그것은 같은 동료 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채린이 이렇게까지 보건실에 집착하는 걸 보면 뭔가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네 말은 똑같은 약이라도 보건실에서 먹고 나오면 두통이 낫는데 집에서 먹으면 안 그렇다는 얘기야?”

“네.”

“그런 게 어디 있어.”

“못 믿겠으면 직접 한번 가 보세요. 선생님은 어디 아픈 데 없어요?”

“있지. 너네들 상대하느라 머리가 아파.”

“그럼 가 보세요. 제 말이 틀렸나 안 틀렸나.”

채린의 담임은 삼십대 중후반의 여자였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만나서 한번도 헤어지지 않고 쭉 만나온 지금의 남편과 이십대 후반에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툭하면 때리고 소리를 지르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대학에 가서도 폭력은 계속 되었다.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임용 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모를 만난 때는 바로 자신의 결혼식 때였다. 임용 시험에 붙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 만으로는 부모를 떠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평생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지만 오래 사귄 남자친구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 혹시나 남편이 아이가 없어서 자신을 떠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마치 조개 속 진주알처럼 품은 채로.

임용 첫 해에 채린의 담임은 수도 없이 교장실로 불려 다녔다. 떠드는 아이들을 컨트롤하지 못한다고, 진도를 너무 빨리 빼서 자기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못하겠다는 학부모의 항의 전화가 온다고, 심지어 카톡 사진으로 발리로 휴가를 가서 테이블 위에 칵테일이 놓인 사진을 올렸다고 또 학부모의 항의 전화가 와서 불려갔다. 그는 중장년의 남자에게 약했다. 그 나이 때쯤의 남자들은 전부 채린의 상사였다. 그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어린 시절 아버지한테 혼나면서 눈물을 흘리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지 못한다고 불려갔을 때 채린은 자신도 모르게 교장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결국은 대성통곡을 하고서야 울음이 그쳐졌다. 교장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는 표정이었다. 채린의 담임 자신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내가 왜 이럴까. 어째서 나이 많은 남자 앞에만 가면 이렇게 위축되는 걸까. 평소엔 잘 울지도 않는데 왜 나이 많은 남자 앞에만 서면 어린 아이처럼 되버리는 걸까. 채린의 담임이 교장실에서 울었다는 소식은 온 학교에 퍼졌고 채린의 담임은 학교를 옮겼다. 그리고 잠시 학교 일을 쉬었다. 그리고 대학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병명은 PTSD였다.

채린의 담임이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2년간의 휴직 끝에 다시 ‘사회 생활’을 하는 게 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서창외고의 교사가 되었다. 채린은 채린의 담임이 휴직이 끝나고 처음으로 맡은 반의 아이였다. 170이 넘는 큰 키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썹과 총명해보이는 이마. 한눈에 봐도 머리가 좋은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지 채린의 부모가 채린에게 과도하게 기대를 갖는 것이 담임의 눈에도 보였다.

“서울대 경영학과 갈 수 있겠죠? 거기 졸업하고 나면 로스쿨 가서 변호사 만드는 게 제 목표에요.”

마치 기획 상품을 만드는 듯 채린의 엄마가 말했다. 채린의 담임은 채린의 엄마와 면담을 하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채린의 담임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던 건 그의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스페인의 투우사처럼, 성난 황소가 기다리고 있는 경기장에 붉은색 천쪼가리 하나만 달랑 들고 칼도 없이 황소와 싸우는 것이 채린의 담임이 느끼는 ‘인생’이었다.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아서 ‘이 세상은 행복한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채린의 담임도 만으로 35세가 되던 해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노산(老産)의 나이였다. 병원 대기실에서 이름과 만 나이가 뜨는 전광판을 보는 순간 마치 쟁반으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했다. 최O희, 35세. 그것을 본 순간부터 일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채린의 담임은 이대로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해왔다. 매일 먹어야 하는 정신과 약은 30알 가까이 되었다.

“언제쯤 약을 줄일 수 있을까요?’

채린의 담임이 의사에게 물을 때마다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증상이 없어져야 약을 끊죠. 지금 억지로 약 끊고 아이 가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엄마가 불안하면 다 아이한테로 가요. 정서가 불안정한 아이를 낳고 싶으세요?”

그렇다고 무작정 억지로 약을 끊을 수도 없었다. 호흡 곤란, 자살 사고(思考), 불면증, 우울감 등 부작용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채린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채린의 말은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꼭 채린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도 너도나도 보건실에서 주는 약을 타먹고 자고 나면 공부가 더 잘 된다며 보건실로 출퇴근 하다시피 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채린의 담임은 자신이 직접 보건실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1퍼센트의 확률로라도 자신의 우울증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

 

“안녕하세요, 선생님.”

채린의 담임이 양호실 문을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여느 보건실과는 다르게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나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이 작게 흐르고 있었다.

“네, 선생님. 무스 일로 오셨나요?”

“제가 두통이 좀 심해서요. 두통약 좀 받으려구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보건 선생은 약장으로 가서 타이레놀을 꺼내왔다.

“그거 말고, 애들한테 주시는 약 저한테도 주실 수 있나요? 타이레놀은 먹어봤는데 효과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아 그거요? 그거 천연 식물로 만든 거라 약효는 타이레놀이 훨씬 강할 텐데요.”

“그래도 아이들이 그 약을 먹고 나았다고 하니까, 저도 좀 먹어 보려구요.”

“네, 알겠습니다.”

보건 교사는 약장에서 흰색 플라스틱 통에 초록색 뚜껑이 있는 약통을 가져 왔다. 영어로 ‘sunthi’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이 약은 먹고 잠을 자야 효과가 있어요. 선생님은 그러지 못하실 테니까 효과는 별로 없을 겁니다.”

“네, 일단 한 번 먹어 보죠.”

보건 선생이 알약 두 개와 물컵을 내밀었다. 채린의 담임은 그것을 받아 삼켰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좀 여쭤봐도 돼요?”

채린의 담임이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애들이 두통도 두통인데 체한 것도 보건실만 갔다 오면 낫는다 그러고 위염도 보건실만 다녀오면 낫는다고 하던데, 무슨 특별한 약이라도 쓰시는 건가요?”

“아니오. 제가 아이들에게 주는 건 방금 선생님이 드셨던 약과 같습니다. 이건 천연 물질로 만든 약인데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효과가 있지요. 애들이 아픈 이유가 다 입시 스트레스 때문이잖아요. 여기서는 시험 점수로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니 여기서 약을 먹고 쉬면 낫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채린의 담임은 순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까 생각을 했다. 제가 사실은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데 말이죠, 하고.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히 나중에 약점으로 잡힐 지도 모르는 일을 얘기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제가 생각해보니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되는 것 같아요. 잠깐 자고 가도 괜찮을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지금은 애들도 없으니까.”

보건 선생이 제일 안쪽에 위치한 침대로 채린의 담임을 안내했다. 이불을 덮고 눕자 아이들의 말처럼 과연 매트리스가 딱딱하긴 했다. 보건 선생이 침대에 딸린 커튼을 치면서 말했다.

“한 시간 뒤에 깨워 드릴게요.”

아이들의 말로는 눕자마자 잠이 온다고 했지만 채린의 담임은 눈만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보건 선생이 커튼을 치고 나가는 순간 혀 밑에 숨겨 두었던 알약을 꺼냈다. 이것은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을 때 어떤 환자가 약을 먹지 않으려고 혀 밑에 알약을 숨기던 것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결국 그 환자는 샤워실에서 수건으로 목을 매달고 죽었다. 그 뒤로 그 병원에서는 약을 먹을 때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들어 올려 입안에 약을 숨겨놓진 않았는지 검사하곤 했다.

채린의 담임은 미리 가져 온 작은 지퍼락에 약을 넣었다. 지퍼락을 주머니에 넣은 후 눈을 감고 잠을 자보려 했다. 라벤더 향 때문인지, 아니면 조용하게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 때문인지 살살 잠이 오려고 할 때 보건실 문이 열리고 아이들 네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채린의 담임은 눈을 뜨고 커튼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저 위가 너무 쓰려요.”

한 아이가 말했다.

“저는 두통이요.”

다른 아이가 말했다.

“저는 체한 것 같아요.”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저 생리통이 너무 심해요.”

이것은 채린의 목소리였다.

“알았어. 잠깐 기다려.”

약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거 마시고 각자 침대에 들어가서 자.”

“네.”

“선생님, 저 위가 너무 아픈데, 전에 주셨던 핫팩 주시면 안되요?”

“핫팩? 알았어, 잠깐 기다려.”

아이들이 각각 침대에 자리를 잡고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자렌지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1분쯤 지났을까.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렌지가 멈췄다. 커튼을 여는 소리가 났다.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잠이 든 것 같았다. 배에 핫팩을 댄 아이도 곧 잠이 들었다. 고요한 숨소리만이 잔잔하게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 사이로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 뭔가가 껍질을 탈피하고 나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아주 작지만 뭔가가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클래식 음악 때문에 가뜩이나 작은 소리는 더욱 잘 들리지 않았다. 채린의 담임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의 커튼을 걷지 않고 살짝 들어 올린 채 조심스럽게 빠져 나왔다. 발소리가 날까봐 슬리퍼는 신지 않고 양말 신은 발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보건 선생은 두번째 침대에 누운 학생 옆에 의자를 가져두고 앉아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걸까. 혹시 마술이라도 부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채린의 담임은 속으로 웃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마술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채린의 담임은 조심스럽게 보건 교사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을 홱 걷었다. 보건 교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신가요?”

“네, 아, 제가 좀……”

“뭐 필요한 거 있나요?”

“아뇨, 그러니까……”

채린의 담임이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보건 교사는 한 손에는 유칼립투스 오일 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잠이 든 채린의 이마에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채린의 담임이 물었다.

“아, 얘가 두통이 항상 심하다고 하는 애라, 지압 좀 해주고 있었어요. 아로마테라피라고 아시죠?”

“이상하다는 느낌이 가셔지지 않았다. 아무리 친절한 보건 선생이라도 저렇게까지?

“아, 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시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채린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전혀 깨거나 움직이지 않고 곤히 자고 있었다. 보건실에만 오면 이렇게 푹 잘 수 있다는 말인가?

“아, 제가 수업 준비를 해야 할 게 있다는 걸 깜빡해서요.”

“그럼 가보셔야겠네요.”

“아, 네. 갑자기 커튼을 열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머리가 아파서 정신이 없네요.”

“그러실 수도 있죠.”

그러더니 보건 선생은 채린의 이마를 다시 지압하기 시작했다.

‘저건 너무 과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채린의 담임은 일단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네.”

교무실로 돌아온 채린의 담임 선생은 주머니에 든 알약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는 친구에게 이 약이 대체 무슨 약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날 밤 집에 돌아와 가방 정리를 하던 채린의 담임은 깜짝 놀랐다. 분명히 흰 알약 두개가 들어있던 지퍼백에 오백원 짜리 동전 만한 거미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거미는 지퍼락 속에서 탈출하려는 듯 입을 꿈틀거리며 지퍼락을 찢기 시작했다. 마침 남편이 아직 퇴근하기 전이었다. 채린의 담임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마침 근처에 있던 두꺼운 책을 거미가 들어 있는 지퍼락 위에 힘껏 던졌다. 그리고 거미가 완전히 죽도록 책을 주먹으로 몇차례나 내려쳤다. 이것을 치우기에는 채린의 담임은 겁이 많았다. 그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걸 치워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이 돌아와 채린의 담임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들췄을 때, 거미는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흰색 약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채린의 담임의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왜 그래? 요새 또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약 더 달라고 할까?”

“아니, 괜찮아. 그런데 정말로 거미가 들어 있었단 말이야.”

“저기 있는 건 흰색 알약이잖아.”

“아, 사진을 찍어 놨으면 좋았을텐데……”

“요즘 많이 피곤한가 보네. 의사가 무리하지 말랬잖아. 잠깐 쉬어 볼래?”

“아니야.”

그러다 문득, 채린의 담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거미가 지퍼락을 물어 뜯으려고 했어! 지퍼락에 흔적이 있을 거야. 한 번 봐봐.”

“그건 자기가 책으로 지퍼락을 내리쳐서 찢어진 거잖아.”

아무리 해도 남편에게 자신의 말을 믿게 할 수 없었다.

“자, 어서 약 먹어. 약 먹을 시간이야.”

채린의 담임의 남편이 날짜별로 포장해 놓은 알약 중 저녁 약을 꺼내서 채린의 담임에게 내밀었다.

“이 지긋지긋한 약, 대체 언제쯤 끊게 될까?”

“그런 생각을 안할 때쯤 끊게 되겠지.”

약을 먹고 난 뒤에도 채린의 담임은 한참동안 생각했다. 분명히 알약을 넣었었고 그것이 거미로 바뀌어 있었다.   채린의 담임은 내일 다시 보건실에 가서 약을 받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교무 회의를 마치자마자 보건실로 간 그는 다시 한번 보건 선생에게 약을 청했다.

“지난 번에 먹은 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요. 조금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보건 교사는 앳된 얼굴에 미소를 살짝 띤 채 알약 두 개를 내밀었다. 채린의 담임은 이번에도 혀 안쪽에 약을 숨겼다가 보건실을 빠져 나오자 마자 약을 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미가 물어 뜯을 수 없도록 플라스틱 락앤락 통에 거미를 넣었다. 그리고 혹시 거미로 바뀌는 경우가 있을 까봐 가방 속에 넣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지켜보았지만 락앤락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설마 조현병이 발병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채린의 담임은 대학 병원의 약사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퇴근 후 병원 근처 까페로 갔다.

“그러니까, 보건 선생이 나눠주는 알약이 수상하다는 말이지?”

자초지종을 들은 채린의 담임의 친구가 물었다.

“응.”

약이 거미로 변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락앤락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악! 이게 뭐야!”

채린의 담임의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채린의 담임은 깜짝 놀랐다. 지퍼락 안에는 털이 숭숭한 타란튤라가 들어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로 어찌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 채린의 담임은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야, 분명히 약이 들어 있었다며!”

“맞아! 그런데 거미로 바뀌어 있잖아!”

“갖다 버려!”

“그럼 이게 산 채로 계속 돌아다닐 거 아냐!”

“집에 도로 가져가서 남편한테 처리해달라고 할 거야.”

“그동안 락앤락을 뚫고 나오면 어떡해?”

“편의점에서 박스 테이프 사서 칭칭 감아야겠다.”

채린의 담임은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박스 포장 테이프와 커터칼을 사서 락앤락 통을 테이프로 감았다. 어찌나 세게 감았는지 통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정도면 밖으로 못 나오겠지?”

“그럴 걸.”

“아아, 이걸 들고 어떻게 집까지 가.”

“죽이고 나서도 시체 치우려면 그것도 일이겠다.”

“으으.”

채린의 담임이 집으로 갔을 때 다행히 남편이 와 있었다. 채린은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락앤락 통을 꺼냈다.

“자기, 이것 좀 제발 처리해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 안에 타란튤라가 들어 있다고?”

“응.”

“원래는 알약을 먹었는데?”

“응.”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어?”

“거짓말이 아니야. 오늘 민영이도 같이 봤다고. 둘이 얼마나 놀랐는지 카페에서 소리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채린의 담임의 남편은 몇 겹으로 둘러 싼 박스 테이프를 군말 없이 칼로 잘라냈다. 채린의 담임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징그러운 것을 또 봐야 한다니. 하지만 테이프를 다 뜯었을 때 나타난 것은 평범한 흰색 알약 두 개였다.

“자기, 요즘에 진짜로 안 좋은 거 아냐? 다시 병원에 입원할까?”

“아니, 정말이라니까. 못 믿겠으면 민영이랑 잠깐 통화 해봐.”

채린의 담임이 전화기를 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영아. 응. 오늘 우리 만났었잖아. 응. 까페에서. 락앤락 통에 든 거. 뭐라고? 아니, 락앤락 통에 뭐가 들어 있는지 너도 같이 봤잖아.”

채린의 남편이 핸드폰을 가져갔다.

“네, 안녕하세요, 민영 씨. 오늘 제 와이프랑 만나셨다구요. 와이프가 락앤락 통에 타란튤라가 들어 있었다던데, 맞나요? 네. 네. 네네. 카페에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편이 채린의 담임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자기야, 오늘 민영 씨가 본 건 그냥 하얀 알약 두 개였대. 원래는 민영 씨한테 주기로 한 거였는데 갑자기 안 된다면서 편의점에 가서 박스 테이프를 사더니 막 락앤락에 휘감았다던데?”

“뭐라고? 아니, 같이 봐놓고 걔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한대? 둘 다 놀래서 소리지르고 커피 엎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못 믿겠으면 오늘 간 카페 CCTV 확인해봐.”

“자기야.”

채린의 담임의 남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병원 가는 날이 언제랬지?”

“3주 뒤에. 28일.”

“조금 더 일찍 가자. 내가 하루 휴가 내서 같이 가줄게. 내가 봤을 땐 약을 좀 조절해야 될 것 같아.”

“지금 내가 미쳤다는 거야? 정신병자라 이거야?”

“여보. 왜 그렇게 말을 해.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난 자기가 걱정되서 그래.”

“날 미친 사람 취급하지 마! 그것도 가스라이팅이야!”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던 채린의 담임이 소리를 질렀다.

 

*********

 

다음날, 채린의 담임은 미리 하루 휴가를 내고 새벽에 학교로 갔다. 보건실에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학교의 모든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3347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보건실 안으로 들어간 뒤 약장 뒤에 숨었다. 잠시 뒤 보건 교사가 출근을 해서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건 교사는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채널을 틀고 곳곳에 놔둔 라벤더 향초의 워머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마침 모리스 라벨의 다프네와 클로에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채린의 담임은 클래식은 잘 몰랐지만 이 곡 만큼은 좋아했다. 그렇게 음악에 한참 정신을 팔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보건실 문을 두드렸다.

“응. 들어와. 무슨 일로 왔니?”

“저 배가 너무 아파서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예준. 마침 채린의 담임 반 아이였다.

“어떻에 아파? 배꼽 위가 아프니 아래가 아프니?”

“배꼽 위요.”

“찌르는 것 처럼 아파? 아니면 속이 쓰려?”

“잘 모르겠어요. 둘 다 인것 같아요.”

“알았어. 우선 이 약을 먹고 누워 있어. 찜질팩 가져다 줄테니까.”

물을 삼키는 소리, 이불을 덮는 소리, 그리고 전자렌지에 찜질팩을 데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이는 잠들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약을 먹지 않고 침에 닿게 해서 거미로 변한 건가? 채린의 담임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리 들어봐도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 순간,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번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저번에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소리였다면 지금은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더 심했다. 무언가를 실로 꽁꽁 묶는 소리가 난 다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났다. 마치 사슴의 머리에 곧바로 빨대를 꽂고 피를 쪽쪽 빨아 먹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채린의 담임은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는 조심조심 빠르게 다가가 보건 교사가 앉아 있는 침대 커튼을 홱 걷었다.

그 순간, 채린의 담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보건 교사의 머리는 타란튤라의 머리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크기는 사람 머리 크키만큼 커서 너무나 징그럽고 무서웠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보건 교사는 날카로운 거미 이빨을 드러내며 마치 기계로 만든 것 같은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두 번씩이나 경고를 줬을 텐데.”

“이게 지금 뭐하는 거야?”

“나? 아침 식사 중이지.”

보건 교사가 타란튤라의 머리를 돌려서 침대에 누운 예준을 가리켰다. 예준은 투명하고 끈적끈적한 거미줄로 만든 고치 속에 들어 있어서 그 형체만 겨우 보였다. 보건 선생은 고치의 한 부분에 빨대를 꽂은 채 뭔가를 빨아 먹고 있었다.

“다, 당신 정체가 뭐야?”

“나? 실력 있는 보건 교사. 아이들이 다 나한테 오면 아픈 게 싹 낫는다는 얘기 못 들었어?”

“지금 그럼 여태까지 아이들에게 먹인 약은……”

“그거? 동물한테 쓰는 마취제야. 아세프로마질이지.”

“그럼 아이들을 재워 놓고 너는……”

“나? 아이들의 정기를 빨아 먹었지.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젊어지는 거야. 얘네들은 내가 빼먹은 시간만큼 노화가 진행되는 거고.”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그러면, 어떻게 할 참인데?”

보건 교사가 예준의 머리가 들어 있을 부분을 쓰다듬었다.

“걱정 마. 어차피 얘들은 성적도 올랐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야. 몇 시간 더 노화가 된다고 얘네들의 펅펄 끓는 젊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보내주었군.”

“그래. 너 같이 지치고 약 먹느라 축 늘어진 인간이 무슨 쌩쌩한 기운을 갖고 있겠어.”

인간의 머리 크기만한 타란튤라의 머리가 입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움직이며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채린의 담임은 기절할 것 같았다.

“내가 너는 건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

보건 선생, 아니, 거대한 타란튤라는 눈 깜짝할 새에 채린의 담임의 바로 코앞으로 와 입안에서 거미줄을 뿜어내 채린의 담임의 머리에 거미줄을 감았다. 채린의 담임은 빠져나오려 애썼지만 어찌나 거미줄이 끈적끈적하고 튼튼한지 미처 손을 댈 수 없었다. 채린의 담임이 당황하는 사이에 보건 선생, 아니, 타란튤라는 순시간에 채린의 담임의 몸을 거미줄로 칭칭 감은 뒤 고치로 만들었다. 채린의 담임은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감을 느꼈다. 여기서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고치 속에서 뭔가 깔짝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목덜미로 뭔가 뾰족한 물체가 콱 뚫고 들어왔다. 뭔가가 체액을 빨아들이는 느낌이 났다. 그렇게 채린의 담임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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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메르타 22.11.22 22:39 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주인공(관찰자?)이 중간에 바뀌는 점이 독특하네요.

  • 오메르타님께
    No Profile
    글쓴이 Victoria 22.11.23 05:20 댓글

    옴님 여기서 봬니 더 반갑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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