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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위화(衛華)

2020.11.01 00:0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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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단편은 가수 안예은 님의 작품을 테마로 소설을 쓰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창작되었습니다. 

 

위화(衛華)

pena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전 생부터, 그 전의 전부터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나는 그대의 모든 관계와 모든 감정을 갖고 싶어서 죄를 지었고, 그대와 함께 이 한숨 같은 세상에 떨어졌지. 그대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몰라도 항상 날 받아주고 곁에 두어주었고 우리는 떨어진 적이 없어. 이번 생에도 그리 해줘. 그대 곁에 있겠어. 그대를 지키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겠어.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대도, 그 무엇이라도 감수하겠어.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나의 하늘, 나의 모든 것인 그이가 어릴 적에 나는 이리 속삭였다. 비겁하고 간교하게도, 아직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이인 그이에게 딱 한 번 진실을 고하였다. 그이는 큰 눈으로 뜻모를 내 말을 가만히 듣다가, 웃으며 나를 껴안아주었다. 나는 내 머리통보다 조금 큰 그이를 안아 들고 자장가를 불러주었고, 그날의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다시 돌고 돌아 다음 생이 오기 전까지는 그러려 하였다. 어차피 그이는 모르고 나만 아는 일이니 생에 단 한 번쯤은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이가 걸음마를 걷고, 온갖 것에 호기심이 일어 무엇이든 손대봐야 하고, 손대면 입에 넣어야 하고, 입에 넣지 못하게 하면 그 대신에 울던 두 살. 잠이 들지 않으면 등에 업고 알아듣는지도 모를 옛날이야기들을 줄줄이 내뱉었다. 그예 버릇이 되었는지, 일곱 살이 되어도 그걸 기다렸다. 하루 종일 말썽을 부리다가도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우면 얌전한 척 들뜬 얼굴로 졸랐다.

“옛날이야기해줘.”

“무슨 이야기 해줄까.”

“너하고 나하고 전생 이야기.”

“지난번에 들은 것하고 다른 이야기로?”

“응, 다른 걸로!”

“눈을 감으셔야 이야기를 할 터인데.”

존대까지 섞어 넌지시 말하면, 금세 눈을 부러 꼬옥 감고 보란 듯이 턱을 드는 얼굴이 해사하기도 하다. 몇 생을 보아도 질리지 않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가슴께를 토닥여 어서 주무시라 격려해 가며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어.”

“우와, 어떻게 결혼했어?”

“집안끼리 정해진 결혼이었어. 너는 정략혼 같은 건 하기 싫다고, 혼인하는 날 직전까지도 파혼하고 싶어서 온갖 말썽을 일으켰는데…….”

“정략혼이 뭐야? 파혼이 뭐야? 다 결혼이야?”

“정략혼은 집안 어르신들끼리만 이야기하고 결혼하는 사람들 뜻은 생각하지 않은 결혼이야. 그리고……”

그이 질문에 답하다 보면 이리저리 한참을 뺑 돌아 가게 되는 게 다반사이나, 결국은 큰 줄기를 향해 이야기가 절로 달린다. 나는 기억하는 것과 읽은 것을 합쳐서 그이가 재미있어 하는 대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사이가 좋았냐고? 좋았다가 나빴다가 했지. 한날한시에 죽자고 했는데, 당연히 그러진 못했고, 그래도 재혼은 안 했어. 평생 같이 살았어. 너 하나였어.”

왜인지 모르지만 그이는 항상 이렇게 묻는다.

“누가 먼저 죽었어?”

“나.”

그리 답하면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이 되니, 달래느라 한참을 보낸다. 그 질문을 하지 않아주었으면 했는데, 빠뜨리는 법이 없다. 기이한 일이다.

어찌 그리 묻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답하기를, “그냥 그게 제일 궁금해.”라고만 하니 더 물을 수도 없다. 나는 그저 그이 우는 얼굴이 싫어 거짓을 고할까 고민도 했으나, 한 번 그리했다가 들킨 후엔 날 원망하며 대성통곡을 하여, 이후로 포기하였다.

 

우리는 전생에 형제였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그대를 키우다시피 했어. 다 크고 나니, 다들 그런 것은 모르고 그저 그대가 우애가 깊고 내게 복종하는 착한 동생인 줄 알았지. 우리끼리만 알았어. 그대가 얼마나 마음놓고 내게 어리광을 부리고, 악마처럼 부려먹는지.

 

이번 생에 그이 난 집안은 권세가 꽤나 높은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몸종 하나 곁에 두는 것은 일도 아니나, 그 몸종이 귀한 몸에게 너너 부르고 반말을 하는 것은 경을 칠 일이었다. 그나마 그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는 먼 곳에서 키우라는 점괘를 흘려보냈더니 둘만 있을 수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도성에 있는 본가에 들어가고 학당도 다녀야 했다.

하여 근 한 달쯤은 말버릇을 고치느라 고생하였다. 그이는 어느 생에도 항시 고집이 세고 생각을 고치지 않는 성정이나,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설득하면 의외로 쉽게 고치는 사람인데도 그러했다.

일단 그이와 나 사이의 말버릇을 고치는 일에 대하여 합리적인 근거를 드는 것부터 길이 멀고 험난하였다. 권세가 집안에서 난, 그것도 황족의 방계 일족인 그이와 한낱 몸종 사이의 신분 차이에 대하여 알려야 했고, 내가 말버릇 달리해 그이에게 존대하고 깍듯이 하지 않으면 맞거나 내쳐지는 것은 나임을 주지시켜야 했다. 또한 그이의 위치와 나이로는 신분 차이를 없애기는커녕 그 집안 안에서 날 감싸거나 내 신분을 바꿔주는 일도 여의치 않음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이는 울었다가, 노했다가, 몇 날 며칠을 외면했다가, 곡기를 끊었다가, 그이 방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안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통곡을 하고는 내 청을 들어주었다. 어린 몸에서 물이 다 빠질라 걱정스러웠고, 그리 잃기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지난 생들을 기억하지 못하니, 그이 입장에서는 어릴 적부터 흉금을 터놓은 친우를 잃는다 여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늘의 벌을 받으며 그이와 떨어질 수 없음을 아는 나 혼자만 태평하고 단호하고 엄격하였구나, 그리 생각하니 뒤늦게 미안했다. 그러나 사과를 할 수 없는 깨달음이었기에, 그저 단것처럼 타협안을 내밀어보았다.

“아무도 없을 때에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 하시면, 그때에는 예전처럼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이 표정이 좀 나아지니, 그제야 꽉 막혔던 가슴이 좀 잠잠해진다. 이상한 일이다. 이전 생에서는 아예 원수였던 적도, 원수가 아니라도 끝끝내 나를 싫어하고 밀쳐내는 일도 많았고 그 모든 감정 또한 내 것이라 기꺼웠는데, 이제 와서 그이 우는 얼굴이 무어라고 가슴을 잡아뜯는가. 아직 이 생의 목적도 알아내지 못하였는데 섣불리 어느 쪽으로 기울어선 안 된다 다짐했다.

그이와 함께한 여러 번의 생은 매번 선명한 관계와 목적이 주어졌다. 그이와 어떤 관계인지 확정되고, 그이가 그 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몸을 던졌고, 때로는 이루지 못하고 그저 내 생명만 내던지기도 하였다. 처음 실패하였을 때에는 긴장하였으나, 몇 번인가 실패 후 비슷한 생을 다시 살게 되자 깨달았다. 원하는 대로 조절되는 것은 아니라도, 어쨌든 성공할 때까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하늘이 원하는 바를 내가 이룰 때까지 몇 번이고. 그것은 아주 결정적인 깨달음이어서, 이후로 나는 매사에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었다. 세다가 잊었을 만큼 여러 번, 나는 그이가 생을 얻을 때 함께 세상에 나와, 그이와 매번 다른 관계가 되어서 평생을 살고 죽었다. 그이가 먼저 죽는 날에는 바로 따라서 자진했다.

이번 생은 아직 목적을 알 수 없었고, 관계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 무엇도 확정하지 않은 채로 두고 보아야 했다. 하나, 무언가 틀어진 것 같아 초조했다.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전생에 친구였어. 처음에는 그냥 같은 학당에서 만난 친구였고, 나중에는 같이 전쟁에 나갔어. 그대와 나는 생각이 달라서 항상 싸웠기 때문에 다들 우리가 원수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것 말고 우리는 친했어. 아니, 그럴 때조차도 우리는 친하고 가까웠어. 모두가 오해했던 게 안타까워. 그러나 오해란 걸 바로잡기가 그리도 어렵더라. 세상이 쓰는 이야기란 진실보다는 그들이 믿고 싶은 것에 가깝다지만 그걸 그리도 선명하게 안 건 그 생에서뿐이었어.

 

그이가 사춘기를 막 지나칠 무렵, 학당에서 연모하는 이가 생겼다. 그리하여 이번 생의 나는 그이의 연인이 아닐 것임을, 적어도 첫사랑은 아닐 것임을 알았다.

그이와 그 상대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이 때로는 순진해 보이고 때로는 품위 있게 빛나는 것이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말이 없다가도 좋아하는 것을 화제로 올리면 더없이 수다스러워지는 성정이며 예와 악을 좋아하는 취향까지도 찰떡처럼 잘 맞았다. 이제껏 이전 생에서 그이가 다른 이와 맺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으나, 그중에서도 손꼽을 만치 잘 어울리고 보기 좋은 조합인지라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게 되었다.

그이는 학당을 오가는 길에 아이와 손 잡고 걸었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틀에 한 번은 떨어지기 싫어 다시금 아이의 집까지 걸어갔다. 발이 아프면 마차를 불러 그 안에서 내도록 웃고 이야기하고 만지고 입을 맞췄다. 나는 보통은 누군가가 오지 않도록 지켰고, 이야기 도중 날아오는 질문에 답하고, 심부름을 하거나 그이가 손대지 못하는 아이 몸에 손을 대서 데려다주거나 했다.

그이가 나보다 그 아이를 우선시하더라도, 나를 시켜 그 아이에게 봉사하게 하더라도 괜찮았다. 그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그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나의 본분이매, 그런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태도가 애매한 것은 도리어 그이였다. 그이는 기껏 나를 시켜놓고는 항시 보상이라도 하는 듯이 불러들여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거듭 인사를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계속 그리했고, 그러면 내가 불편하다고 했을 때에야 그 인사를 멈추었다. 그러고는 이번엔 그 아이와 함께한 것을 나와도 함께하려 드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찌 그러시느냐는 물음에, 어떤 소중한 것이 생겨도 네가 가장 앞이고, 내 가장 가까운 자리는 네 것이라 말씀하시니, 못내 설레면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말을 하면서 쳐다보는 눈이 꼭, 전생을 기억하는 것 같아서. 아무리 어릴 적부터 내내 보아왔다고 해도 그 너머를 보는 듯해서.

애초에 기억하는 것은 나뿐인 반복이고 윤회였다. 그이는 매번 새로이 태어나고,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전생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로 남았다. 그래야 했고, 그래왔다. 그런데 그이가 가끔씩 첫 생을 사는 자가 아닌 눈빛으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거나 내 존재에 집착을 드러내고 나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고 이미 많은 일을 겪어온 전우처럼 대하는 것이 불안했다. 드러날 만큼 뚜렷한 증거는 없었으나 수없는 생 동안 그이를 지켜본 감이 그러했다. 이번 생의 그이는 아무 기억 없이 태어난 사람이 아닌 듯이 굴었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 사이였어. 한 번은 내가 아비였고, 또 한 번은 내가 어미였고, 또 한 번은 그대가 아비를 하고 어미도 하고. 나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까지 너무 지루하고 심심하게 보냈어. 그러나 지나고 나니 기억도 안 나는 과거로 집어뭉쳐졌지. 그대가 태어난 이후에는 어찌 되든 그대가 원하는 대로 살 것을 알아서 내버려두었더니, 너무 방임한다고 서러워했고, 다음 생에 이것저것 챙기고 돌봤더니 숨이 막히다고 짜증 냈어. 효성에 매이지도 않고 할 말은 다 하니 주변인들은 그대를 아주 불효자라고 비난했더랬어.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자식일 때에 그대도 방임하더라. 나중에 내가 다 커서야, 어째야 하는지 모르겠고 내가 저절로 크는 것 같아서 그랬다며 혼자 사과하길래 속으로 웃었어.

 

학당을 졸업하기까지 한결같이 다정하던 그 시절은 그이가 연모하는 아이가 갑작스레 왕이 되고 이웃 제국의 황녀를 왕후로 맞아들이며 더없이 억지로 깨어졌다.

나는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그이가 사랑을 빼앗겨서 좋은 게 아니라, 이루어질 수 없어졌으므로 더욱 연정이 불탈 것이라 생각하여서 좋았다. 내가 평범한 부모나 가족이었다면 그이가 그대로 결핍 없이 사이 좋게 지내다가 혼약으로 맺어지고 백년해로 하는 것을 원하였겠으나, 거듭된 생을 돌이켜 보면 그이는 그런 식의 인연을 끝까지 맺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평탄한 인연은 평탄하게 끊어냈고, 어렵사리 이어져야 그나마 질기게 달라붙고 지켜냈다. 본디 사랑에는 장애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버린바, 지금의 상황이 더 나았다.

그이는 처음에는 그저 왕의 곁에 설 수 있을 정도의 무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은 왕의 반려였으나, 그이에게는 신분과 배경은 있어도 공적이 없었다. 신분과 배경만으로도 궁에 드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뒷말이나 모함이 들이칠 것이므로, 공을 세우고 제 편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이는 판단하였다. 나 또한 그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기실 틀린 판단을 했더라도 상관없기는 하였다. 무엇을 택하든 나는 그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니.

다른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왕과 이야기하고 돌아온 그이가 고민이 깊은 눈을 하기에 물었더니, 왕후를 맞이할 때에 다른 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기로 약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였다. 속국까지는 아니나, 작은 나라의 왕실에 제국이 영향력을 미치는 그나마 온건한 방식이었다. 누군가를 후궁으로 들인다 해도 왕은 절대로 눈길도 주어서는 안 되고 합방도 치를 수 없고, 그저 내명부에 들어와 왕후를 보필하고 복종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그이가 말하기를, 그저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라 그 황녀가 왕을 마음에 품어 그리 완고하게 금하는 것 같다 하였다. 기운 없이 떨군 고개를 당장이라도 받쳐 들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이가 내게 물었다. 이 상황을 어찌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두 나라 사이의 역학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제국이 절대적인 우위에 서지 못하면 제국을 등에 업은 왕후의 조건도 누그러질 것이라 고하니, 그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의 깊이에 등이 저렸다. 저 한숨이 땅을 파고들고도 넘을 만치 깊은 것은 앞에 놓인 숙원이 너무 큰 탓이라. 원하는 것을 이루어드려야 하는데 바로 덜어줄 수가 없음에 오는 고통이었다.

내가 아무리 하늘의 가호를 받아 본신의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한 나라를 상대할 만한 무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이 외에 아무도 믿지 않으므로 암투를 할 수도 없었다.

정치적인 싸움이라면 그이가 주도했던 적이 이전 생에 있었으나, 그때의 경험은 기이하고 불쾌하고 내 성정에 맞지 않아 기억에도 그다지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때에 그이의 충실한 꼭두각시이자 단 하나 믿을 구석으로 사는 것만도 벅차고 버거웠다. 그이가 내게 원한 것은 함께 대국을 그리며 보아줄 동료가 아니라, 맡긴 바를 한 치도 틀림없이 생각도 하지 않고 실현시키는 대리인이었으므로 늘 그러했듯이 그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변명이다. 그때 익혀두었어야 했다. 다시 같은 상황이 오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데, 안이하게 흘려보낸 내 탓이다.

내게 남은 길은 첩자뿐이었다. 그것도 장기간 잠복하는 유가 아니라 훔쳐 오는 유의 첩자. 다행히 그런 유의 정보를 수집하고 경비가 삼엄한 곳에 침입하는 것에는 경험이 있었다. 내가 머무른 속세의 장치들로는 내 능력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이에게 한동안 시간을 달라 청하였을 때, 그 반응이 지나치게 격렬하여 다시금 놀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가지 말라고, 곁을 비우지 말라 했다. 제 소원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그 소원을 단념하겠다고까지 하는 말에 너무 놀라 제발 그러지 마시라 내 쪽에서 매달려야 했다. 연모하는 이는 따로이 있으면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물을 수는 없었다.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서.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라면, 내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다시 말해서 정말로 예전 기억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지는 않을 거라는 부분이었다. 걱정하지 마시라, 꼭 돌아오겠다 거듭 약조하는 내게 그이가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다시금 의심이 고개를 들었고, 그렇다고 정말로 물을 수도 없어 침묵했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니, 그이가 일어서 뒤돌았다.

“안녕, 잘 있어.”

그이가 이 생에서 처음 하는 인사였다. 언제나 떠나거나 다녀오는 것은 내 몫이었기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인사였다. 불안감에 사로잡혔으나 그이를 다시 잡지는 못하였던 것이 아마도 내 한계였으리라.

 

우리는 전생에 원수였어. 그대가 한 짓은 아니지만 그대의 아버지가 우리 집안을 몰살시켰어. 그래서 나는 복수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해서 그대의 집안을 쳤어. 그러기 위해 처음에는 그대한테 접근했고, 그대는 나중에 많이 울었어. 온전히 나를 미워할 수가 없다고, 기실 내게 일부러 손을 빌려준 것이라고, 그대도 죄인이라고. 내가 무어라고 답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생의 끝이 어땠는지도.

 

잘못된 것 같다는 걸 느낌이 아니라 몸으로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때였다. 어둠 속에 젖어드는 능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았을 때. 하필 제국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잠복하려던 때였다. 하마터면 그때 바로 들켜서 아무것도 못할 뻔했는데, 우연히 다른 소리가 간섭해서 들키지는 않았다. 나는 그 자리를 피한 후 혼자서 시험해보았다. 팔에 생채기를 냈는데, 바로 아물지 않았다. 피가 계속 흐르고 상처 부위가 따끔했다. 하늘에서 준 능력이, 적어도 육체적인 능력이 사라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다시 한 번 시험해보기 위해서 며칠을 더 제국에서 머물렀다. 예전이라면 신경을 쓰지도 않았을 신경을 다 써 가며 꼬리를 밟히지 않고 정보를 모으려 해보았으나, 이제껏 쌓지도 않은 기량은 알량한 수준인지라 금세 누군가의 손에 잡혀 눈을 가리고 끌려갔다.

그리고 날 잡아간 자는 그이의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께서 어찌 이런 일을 하셨소, 응?”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우리는 전생에 연인이었어. 부부는 아니었어. 신분도, 성별도, 나이도, 심지어 종족도 맞지 않았거든. 혼인은 사회제도잖아, 뭇사람들에게서 증표를 받아야 하지. 아무에게서도 인정을 받을 수 없으니, 증표를 받고 혼인할 수는 없었어. 하지만 아주아주 사랑했어. 서로가 서로에게 첫 번째였고, 마지막이었어.

 

무얼 해보려다 잡힌 것이지, 실제로 손에 쥔 건 없었기에 나는 아무 해도 입지 않고 그저 가벼운 경고만 받고 풀려났다. 나는 그 경고 때문이 아니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그리고 내게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낌이 아니라 몸으로 알게 되었다.

그이를 기억하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집은 나의 것이 되어 있었고, 장군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던 방계 황족의 이름을 가진 것도 나였다. 그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탈바꿈된 대신, 나의 존재는 사라졌다. 몸종이었던 그자는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기록에도 남들 기억에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아닌 그이가 완전히 지워졌다.

제국에 갔던 나의 행적 또한 그이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기에, 왕에게서 걱정 어린 서신이 내려와 있었다. 그 일 관련하여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들라 하기에 궁에 들었더니 왕이 말했다. 비록 제국의 황녀로서 정략적으로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온 왕후이나 그를 진심으로 아끼며 연모한다고, 가망 없는 연심을 쟁취하고자 목숨을 던지지 말라고. 그이의 목적이자 주군이자 은애하는 자가 그리 하명하였다. 이대로도 제국과 이 나라의 사이는 서서히 괜찮아질 것이고, 앞으로 도리어 애정과 기대로 인한 환난이 닥쳐올지라도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왕의 몫이지 네 몫은 아니라고.

어명을 빙자한 축객령을 들은, 내가 정말로 그이였다면 실연을 겪는다 일러야 할 그 자리에서 나 또한 내 처지를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존재를 지우고 세상에서 없었던 듯 만들 수 있는 것은 인세의 영역은 아니었으므로, 지금 벌어지는 이 일은 모두 하늘의 짓이어야 마땅했다.

그이의 모든 관계와 모든 감정을 가진다니, 죄인에게 누가 그리 달콤한 벌을 내린다던가. 남들 눈에는 벌이고 내게만 상이겠는가, 하물며 하늘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는가. 내가 해온 일은 업보에서 비롯한 것이긴 하되 죄업이 아니라 과업에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천선의 혼백을 모은다고. 죄인이어서였는지, 어떤 일에 희생당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이의 혼백이 갈가리 찢어 떨어졌을 때 그것을 모으고 복원하기 위한 길에 동행하게 된 것이 나라는 것이 더 이해가 가는 추측이었다. 어째서 벌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본디는 벌이었는데 내가 마음을 달리 품은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알지 못해도 괜찮다. 어차피 어찌하라는지,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하늘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 내가 깨달았듯이 피할 수 없이 겪게 될 일이란 뜻이었다.

그이가 사라지고, 그이의 자리를 내가 맡고, 하늘의 능력을 잃어 인간이 된 몸으로 산다는 것은 기실 내게는 첫 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살면서 겪을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아니면 혹, 인간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과업인가도 생각해보았으나, 그이가 천선인 자기 자신의 정체도 모르고 몇 번이고 생을 살았는데 이제 와서 그럴 필요가 있는가 싶기도 하였다.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 알려주지 않은 것은 필연코 겪을 일이라 그럴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다독여야 하였다. 그이가 없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장 따라갈 수도 없이 이어가는 삶이란 외롭고 비루하기 그지없었으므로. 나는 따뜻한 물에 머리까지 기분 좋게 잠겨 있었던 걸 물 밖으로 끌려 나와서야 안 어린아이처럼, 뭍으로 나왔다가 미처 제 처지를 깨닫기도 전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 물고기처럼 살았다. 과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당장 죽을 수도 없었다. 혹여나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포기하였다고 하늘의 진노를 사서 다시는 그이와 만날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이전 생에서는 그이가 먼저 죽더라도 다음 생을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알 수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건만, 이제 그런 걸 알 수도 없었다. 알 필요도 없기는 하였다, 천선이 갈 곳이란 하늘뿐일 테니.

부재를 곱씹으며, 미래도 알 수 없고 이루어야 할 과업도 알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를 넘기며, 이것이 인간의 삶인가, 이것이 필멸자의 한계인가 하였다.

그이는 이런 삶을 어떻게 그렇게 거듭 견뎠을까. 알지 못하여서 가능했을까, 그이여서 가능했을까?

쓸데없어도 그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우리는 사제지간이었어. 당연히 내가 스승이었지. 그대는 말썽쟁이 막내 제자였고. 그런 주제에 가장 나랑 맞먹는 애였어. 모두가 그대를 아꼈어. 그리고 물론 내가 가장 아꼈지. 그대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고, 그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을 치워주려고 했어. 세상 모든 것에게서 그대를 지켜주려고 했어. 그런데 내가 먼저 떠날 수밖에 없었어. 날 던져넣지 않으면 막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후회했지만, 그대에게 더 빨리 많은 것을 주지 못한 걸 후회한 거였어. 그때 그리 하지 않았으면 그대가 죽었을 터이니 그것은 선택조차 아니었어. 필연이고 당위였지. 이런 식으로 먼저 떠나고 난 뒤에 그대가 살아내야 했던 시간이 궁금했었는데 볼 수도 물을 수도 없으니 그저 아쉬워할 수밖에.

 

인간으로 살아야 하기에 혼자 살 수 없었다. 그이가 있을 적에 이미 만들어진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단번에 끊어낼 수도 없었다. 일상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절반을 넘어가자, 위기감을 느꼈다. 그이를 생각하고 기억을 담아내는 것이 전부였던 머리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욱여넣느라 정말로 중요한 것이 사라질지 몰라 두려웠다.

이후로 나는 매일 그이하고 있었던 일을 적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그이에게 잠들기 전 이야기해주었던 것처럼.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적었다. 붓을 들고 졸다가 종이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시간을 쪼개어 써내렸다. 그 기억들을 잊으면 정말로 그이가 사라질 것 같아서, 덩달아 나 자신도 사라질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이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마음이 저미는 듯 아프다가 언 듯 시리다가 데인 듯 쓰라린 것 모두 처음 겪는 일이라 생소했다. 이것을 무어라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자각한 날, 손에 붓을 쥔 채로 또 하염없이 앉아만 있었다. 흘러 넘치는 이것을 어쩌지 못해, 처음으로 붓을 놓고 넋을 놓았을 때, 붓이 홀로 일어나 종이 위로 움직였다.

  한 걸음 남았다.

  그것에 놀라움을 느끼기도 전에 질문부터 튀어나왔다.

“하늘이시여. 오셨다면 자비를 베풀어 이것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이것이 무엇이기에 제 과업이었나이까?”

  그것은 그리움이다.

  알고 나니 기가 막혔다. 그 많은 생 동안 그리움을 배우지 못했다니. 그이를 향하여 끊임없이 온몸과 마음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리움이 아니었던가 보다. 그리움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고서 주제 넘게 모든 관계와 모든 감정을 가지겠다고 호언장담했구나. 그이를 아끼므로 그이와 함께 하는 나날의 꽃만이 아니라 가지도 뿌리도 줄기도, 모든 것을 통틀어 가지겠다고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기다림과 그리움에 얼마나 내 자신이 시들었는지를 느꼈다.

붓이 내 앞에서 다시 움직여 무심하게 전했다.

  마지막 과업을 내리겠다.

  이번에는 자비롭게도 알려주시는구나, 했던 감상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망각하라.

 

우리는 예인과 후원자였어. 내가 예인이고 그대가 후원자. 그대는 정말 아무것도 쥐고 태어난 게 없었으면서 날 처음 본 날 이후로 이를 악물고 돈을 벌고 지위를 높여서 날 보러 왔어. 그리고 날 사려고 했는데 내가 친구가 되자고 했어. 그 생에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도 아직도 몰라. 아마도 다른 생에서 그런 식으로 그대의 것이 된 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천한 취급 받는 예인이 건방지게도 친구 하자고 해도 그대는 기꺼이 받아들여주었어. 결국 그대의 집에 머물게 되었지만, 끝까지 내가 정해둔 선을 넘지 않아주어서 내가…….

 

이 과업 또한 내가 애써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필연코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전생의 기억을 쓰다가 아무리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무너질 세상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있었다.

이렇게 조각난 기억은 망각했다는 걸 알아챌 수라도 있으나, 아예 사라진 기억은 잊었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불안해, 모든 자리를 작파하고 집에 틀어박혔다.

 

우리는 주인과 노예였어. 그때는 내가 주인이고 그대가 노예였지. 내가 그대를 손에 넣기 전까지 다른 주인이 있어서 그대가 고생을 많이 했어. 다행히 죽기 전에 구했지만, 이미 그대는 많이 상처받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어. 잘해줘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남들에게보다는 내게 더 빨리 마음을 열어주었지. 그리고 내 생각보다도 더 많이 열어주었던 것을, 누구도 생각 못했을 만큼 나를 소중히 여겼던 것을 뒤늦게 알았어. 그대의 죽음으로. 내게 오는 화살을 홀로 다 맞고도 바로 숨을 거두지 못하며 나를 보던 그 눈길로.

 

써내리고 써내리다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인간은 먹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굳는다는 것을 굳이 체험해야 했다. 뼈아픈 실수로 며칠을 날려 먹고 나서 최소한 먹고 마시고 팔다리를 움직이게 되었다.

가끔씩 붓이 혼자 움직이면, 다시금 하늘의 말이 들릴 것을 알아 물었다.

“천선께서는 잘 계십니까?”

이런 건 답을 해주지 않았다. 가만 보면 하늘은 참으로 치사하다.

“제가 망각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천선도 망각을 배우지 못하리라.

  이러한 것에는 재깍 답을 내려주어 절망케 했다.

나는 잊고 싶지 않았다. 이 기억들이 내게 남은 그이의 전부였다. 과업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잊었고 그이가 잊었는데 둘 사이에 무엇이 남겠는가? 그리움은 고통스러웠고, 그리움에 끝을 내는 것은 망각일 것이나, 잊느니 고통스럽고 싶었다.

그러나 망각을 배우지 못한 천선은 완전하지 않다. 그이를 위한다면 서슴 없이 모든 걸 지워냈어야 옳다. 그럼에도 잊지 못하겠다 하는 것은 내 욕심이고, 내가 그이에게 품은 감정의 본질이 욕심이었음을 드러내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이를 가지고 싶었다. 지금 가질 수 있는 것이 기억뿐이라면, 하나도 놓을 수 없었다. 이렇듯 전생을 써내리는 것도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서였는데, 하늘은 그마저도 내게서 뺏어 가려고 한다.

나를 둘로 나누어 잊고, 잊지 않고 싶다.

 

우리는 사냥꾼과 사냥감이었어. 사실 그렇게 말하자면 그대가 하찮은 사냥꾼이고 내가 위대한 신수였는데 말이야. 겁도 없이 날뛰는 그대가 꽤나 흥미로워서 잠시 어울려주려고 했는데, 어느샌가 그대의 손아귀에 잡혀 있더군.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신수가 그대의 존재를 기억하고 가까이 여기고 감정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 처지를 달리 어떻게 이르겠나. 그대는 향기롭고 눈부시고 잔혹했어. 신수를 잡아놓았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할 것을, 어느 세상인가를 구하겠다고 제 혼백을 갈가리 찢기며 나를 떠나니, 내가 어찌 해야 하겠나. 뒤늦게 할 수 있는 것을 구할 수밖에.

 

써내리고 써내리다 마지막, 최초의 기억에 닿았다. 다행히도 다 쓸 때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 기억을 꺼내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종이뭉치를 쥔 채로 과업이고 하늘이고 불응하였을 테다. 처음을 떠올리니, 내 욕심이 오랜 세월과 약간의 망각과 그리움에 변색되었음을 알았다.

내 진짜 소망은 그이가 다시 온전히 사는 것이다.

그다음이 있다면, 이 과업을 완수하는 동안 그랬듯이 곁에서 그이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이란 언제나 지금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아마도 모든 걸 망각하고 과업을 완수하면, 최악의 경우 그이와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연이 갈라질 것이고, 최선의 경우 다시 만나 내 바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최악이 적어도 그이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니, 축복받은 삶이구나.

다 쓴 종이뭉치를 품고 강가로 간다. 탁 트인 하늘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 나는 종이뭉치들, 내 기억들을 하늘로 흩뿌렸다.

그대여, 잊음이 그대를 지키는 길이었음만은 잊지 말아주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나, 그조차 잊었을 나를.

그럼에도 다시 만난다면, 이제야말로 그대를.

그대를.

댓글 3
  • 위래 20.11.01 02:24 댓글

    잘 읽었습니다. 짧은 감상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https://twitter.com/N91211/status/1322589560568569857

  • 위래님께
    No Profile
    글쓴이 pena 20.11.01 02:26 댓글

    감사합니다! 그 해석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No Profile
    글쓴이 pena 20.11.01 02:25 댓글

    참, 위화는 이 노래입니다. 앞에 삽입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https://youtu.be/cHMknTJAX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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