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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정의의 일격

2020.08.01 00:0008.01

정의의 일격

노말시티

우리는 어쩌면 지하철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정해진 목적지에 문제없이 도착하기엔 좋지만 그 중간에는 깜깜한 어둠 속을 달리는. 그렇게 점과 점 사이를 오가다가 가끔 합정역과 당산역 사이에서 지하철이 한강 위로 떠오르면 창 밖의 광경에 감동하며 작은 휴대폰 속에 담아 두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내 환승 거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출입문 위치를 외우거나 몇 분만 기다리면 다시 오는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거나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사람을 알아보는 노하우를 뿌듯해하는 삶으로 돌아간다.

그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또한 우리는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진화하는 진상들을 만나게 된다. 온 몸을 던져 세상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허락된 지적 능력을 낭비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토록 애쓰며 갈구하는 게 관심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그저 무시하고 못 본 체 하며 지나치려 한다. 그래. 사실은 무섭고 귀찮아서 그렇다. 세상의 문제를 나 혼자 짊어지는 것도 부당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몫의 불편을 참아내는 정도 아닐까.

오늘의 진상은 임산부 배려석에 떡 하니 앉아 있는 건장한 아저씨였다. 청바지에 검은색 반팔 티. 팔짱을 낀 데다가 쥐가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쩍 벌린 다리로 거의 자리 두 개를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인간은 자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라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좁은 열차 안에 빼곡히 몰려 있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힐끗거리던 시선을 감추기 바빴다.

어째서 인간의 해악은 퀴퀴한 냄새와 눅눅한 체온으로 끝나지 않는 걸까. 한 인간이 부당하게 점유하고 있는 공용 공간을 넘어 차량 안을 짓누르는 이 불편한 긴장감. 같은 남자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그리고 아직 미미하게 남아 있는 정의 비슷한 무언가를 슬그머니 눌러 넣어야 하는 열패감 등등. 내가 내려야 할 역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빠져나간 사람만큼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에는 누가봐도 힘들어 보이는 만삭의 임산부가 있었다. 일순 차량 안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예감했다. 이 일이 좋지 않은 쪽으로 진행되리라는 걸.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은 눈빛으로 좌석 쪽을 돌아본 임산부의 시선이 자신을 노려보는 아저씨와 마주쳤다. 그냥 광인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광인과 눈이 마주친 임산부는 흡 하고 짧게 신음을 내뱉으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광인을 피해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반대쪽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 경로에 내가 있었고 한 발자국 물러나며 길을 터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에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혀를 차는 소리는 광인이 눈을 부라리자 제대로 끝맺음도 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그리고는 또다시 정적이었다. 보다 못한 할아버지 한 분이 경로석에서 조용히 일어나며 임산부에게 손짓했다. 임산부는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그 상황이 또 다른 무게가 되어 차량 안을 짓눌렀다. 할아버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낭패한 표정을 지었고 임산부는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문 채 숨 죽여 심호흡을 했다. 그 팽팽한 긴장은 광인의 거친 외침으로 기어코 폭발해 버렸다.

“아줌마! 이리 와서 앉아요! 여기 아줌마 같은 사람들 앉으라고 만든 자리잖아!”

소스라치게 놀란 임산부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쳤다.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입을 틀어 막은 임산부를 본 광인이 미간을 찌푸치며 소리쳤다.

“에에? 일루 오라니까? 비켜 준다고오.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엉?”

“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광인이 욕을 내뱉으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 보았지만 광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씨… 내가 비켜 준다고 했잖아! 아줌마! 아줌마 빨리 이리 못 와? 아줌마 때문에 내가 나쁜 놈이 되잖아 지금!”

그렇게 말하는 광인의 엉덩이는 여전히 의자에 단단히 붙어 있다. 임산부 아닌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앞으로 나서지는 못할 거다. 저런 인간의 체온으로 덥혀진 의자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임산부의 눈이 저러다 큰일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흔들렸다.

그 순간 열차 안은 놀랍도록 고요해서 임산부의 밭은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렸고 광인의 시선에 닿을까 뒤로 물러선 사람들 때문에 임산부와 광인을 잇는 직선 상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임산부는 사냥감처럼 아니 악신에게 바치는 제물처럼 광인 앞에 내던져진 셈이었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그 방조자들에 살뜰히 동참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임산부가 도망칠 수 있도록 어서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기를 빌었다. 광인에게 맞서 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근데 이 아줌마가…”

드르륵. 임산부의 뒤편에서 차량 사이를 잇는 문이 열렸다. 역무원을 기대했지만 나타난 건 작은 키에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젊은 여자였다. 아마 환승 거리를 줄이기 위해 미리 계단 쪽 차량으로 이동하던 바쁜 직장인이겠지. 이 차량의 불편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얼른 문을 닫고 이전 차량으로 돌아가겠지. 그런 나의 예상은 그의 눈빛에서부터 깨졌다.

그 사람은 모든 상황을 알고 들어왔다는 듯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을 헤치며 광인을 향해 전진했다. 임산부와 광인 사이의 빈 공간을 마치 런웨이에 선 모델처럼 당당하게 걸어갔다. 내가 멈춰 서리라고 예상한 지점을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지나쳐 광인에게 바짝 다가 붙었다. 더욱 놀란 건 그 다음이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곡선은 본 적이 없다. 강속구를 뿌리는 투수처럼. 스파이크를 날리는 배구 선수처럼.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골퍼처럼. 그 사람의 오른팔은 성큼성큼 걸어온 몸의 속도와 잔뜩 꼬였다 풀리는 허리의 회전력을 고스란히 실은 채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비스듬하게 황금 비율의 나선을 그리며 날아가 광인의 왼쪽 아랫뺨에 자석이 달라붙듯 쩍 소리를 내며 명중했다. 손목의 스냅이 더해지자 광인의 얼굴은 목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게 홱 돌아가며 뒤쪽의 유리창에 패대기쳐졌다.

여기까지는 놀라웠고 믿기 힘든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작은 체구에 얼굴은 앳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여자가 다가와 뺨을 때렸으니 가뜩이나 시빗거리를 노리던 광인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유난히 당당해 보이는 태도나 현실에서 구현되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따귀 솜씨로 볼 때 어느 정도 격투기 실력을 갖추었을 수도 있겠지만 건장한 체구의 남자와 맞붙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일 터였다. 게다가 저런 광인이라면 어딘가에 칼 하나 정도는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불안했다.

불의를 보고도 참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겁쟁이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 대들었을 때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니까. 인류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서는 게 옳겠지만 당장은 내가 너무 힘드니까. 광인에게 따귀를 올려 붙이는 그 장면 하나는 진짜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하긴 했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을 과연 저 사람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만일 저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을까.

창문에 들러붙었던 광인의 얼굴이 떨어져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광인은 붉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뺨을 감싸쥐고는 어우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게 끝이었다.

광인은 여전히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여자에게 찰지게 뺨을 얻어 맞았다는 사실과 조금 전 까지 임산부를 협박하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째로 잊은 듯했다. 자신의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이유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연관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던 광인은 다음 역에서 문이 열리자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열차에서 내려 버렸다.

빈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자 멀리 서 있던 임산부는 역시 마찬가지로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자신을 위협하던 불량배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듯 걸어와서는 자리를 비워 둔 주변 사람들에게 작게 인사하며 천천히 앉았다. 한숨을 몰아 쉬는 임산부의 표정에는 두려움이나 긴장감 대신 겨우 지친 다리를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만이 떠올랐다.

그 뿐 아니었다. 차량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광인을 물리친 영웅을 향해 박수나 찬사를 보내지 않았다. 힐끗힐끗 바라보며 속닥거리지도 않았다. 불과 몇 분 전에 차량을 가득 채웠던 불편한 긴장과 화려한 응징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나를 제외하고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설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건가.

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그 사람은 어깨 너머로 나를 한 번 훑어보고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나는 홀린 듯 그 사람을 따라 내리고 나서야 원래 내가 내려야 할 역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에스컬레이터에 줄을 서지 않고 거침없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뒤를 쫓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시야에서 그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코너를 돌아 지상으로 올라가는 갈림길 앞에서 그가 멈추고 나도 멈췄다.

“왜 따라와요?”

“아 저… 저도 이쪽으로 가야 해서…”

얼른 변명했지만 누가 봐도 변명에 불과했다.

“따라오는 건 맞고. 이렇게 따라오는 거. 범죄라는 거 몰라요?”

“죄송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안 괜찮아요.”

“네…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꾸벅 인사하며 뒤로 물러나려는 나를 그 여자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잠까안.”

그는 멈춰선 나를 향해 아까 광인을 향해 다가갈 때와 같은 속도로 무섭게 접근했다.

“어. 어. 잠시만…”

내 바로 앞에서 그의 허리와 오른팔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돌았다. 나는 미처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눈을 질끈 감은 채 목을 잔뜩 움츠렸다. 저 따귀를 제대로 맞으면 진짜로 목이 부러질 지도 모른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니 오른팔은 허리께에서 멈춰 있었다.

“진짜 기억을 하는 건가. 그럴 만한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그 여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얼른 용기를 내 말했다.

“그렇죠? 뭔가 있는 거죠? 제가 잘못 본 게 아니죠?”

“오늘 본 거. 그냥 잊어요. 뭔지 알려고도 하지 말고. 당신 같은 사람이 알아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등을 돌려 걸어갔다. 내가 다급히 외쳤다.

“아까 정말! 정말 멋있었어요! 존경합니다. 정말로!”

그가 다시 돌아봤다. 나는 이번에는 진짜로 내 따귀를 때리더라도 한 대 맞아주고 말겠다는 각오로 용기를 쥐어 짜냈다.

“정말 멋있었어요. 아까 와… 진짜… 최고예요. 최고.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저도…”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는 건지. 그거. 이렇게 였나.”

내가 최선을 다해 그가 그렸던 궤적을 흉내내 오른팔을 휘둘러 보았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굳었던 표정이 풀리자 그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이 평범한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저 가느다란 팔에서 그 화려한 따귀가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증명을 해 봐요. 그럼. 자격이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만 말하고 그는 다시 돌아섰다. 더 이상 뒤따라오지 말라는 뜻으로 오른팔을 옆으로 뻗었다 내린 뒤 거침없이 멀어져 갔다.


그 사람을 지하철에서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 주일 후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진상과 함께였다.

“요즈음 것들은 말야! 우리가 어떻게 지킨 자유대한민국인데!”

딱 봐도 한 잔 진하게 걸친 노인이었다. 허름한 양복을 차려 입고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듯하다가 퍼뜩 고개를 들고 몇 마디 외친 뒤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귀찮고 시끄럽긴 하지만 지난번 임산부 배려석 광인처럼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멀찍이 떨어져 서서 귀에 이어폰을 꽂는 것으로 대응했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연령대로 보아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것은 분명하고 차림새로 보아 권력자들에게 부역하며 호의호식하지도 못한 듯하니 이 정도 소란은 참아 줄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재잘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면서 터졌다.

“요것들이! 얼른 집에 안 들어가고 뭐하는 거야!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아 깜짝이야. 죄송합니다아.”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며 우르르 반대쪽으로 몰려갔다. 노인은 이번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졸지 않았다. 눈을 번득거리며 벤치에서 일어나서는 휘청거리며 학생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 눈은 임산부를 보던 광인의 눈과 똑같았다. 그러니 노인도 그냥 광인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광인을 보며 아이들은 숙덕거리며 도망가려 했다.

“거기 서! 이 녀석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광인의 외침과 함께 아이들의 발이 멈췄다. 훨씬 더 빨리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도 학생들은 말을 잘 들었다. 그 중 제일 용감해 보이는 아이 하나가 광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기계같은 말투로 외쳤다.

“학원이 늦게 끝났습니다. 일찍 들어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학원? 그런 거 다 필요없어! 사람이 돼야지 사람이! 엉? 니들 부모는 어른을 보면 그렇게 슬금슬금 도망치라고 가르치디? 니들 내가 누군지 알아? 니들. 무슨 학교 다녀. 몇 학년 몇 반이야.”

“화선중이요. 이 학년…”

무심코 몇 반인지까지 말하려던 아이 하나를 옆에 있던 아이가 팔꿈치로 툭 쳤다.

“화선중.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거기 교감하고 내가 부랄 친구야. 부랄.”

광인이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더니 자신의 그곳을 손으로 두드렸다. 아이들은 기겁을 하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고 무슨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인 채 열차 상황을 나타내는 스크린만 힐끗거렸다.

“내가 말야. 니들 만할 때는…”

광인은 쉽게 학생들을 놓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일 분 후면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한다. 그래도 일 분 후에는 풀려날 수 있겠지. 조금만 참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 볼 때.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증명을 해 봐요. 자격이 있는지.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말한 증명이 뭔지 알았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의 험상궂은 광인에 비하면 노인을 제지하고 학생들이 도망칠 수 있게 해 주는 건 별로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 세상의 불의는 내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정도로 불편하고 내가 감히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두렵고 끼어들기엔 내가 너무 지쳤을 때만 눈에 띄는지. 누군가 나서 준다면 박수를 쳐줄 순 있지만 그 박수 조차 엮여 들지 않을 정도로 한 걸음 떨어져서 치게 되는지.

광인을 뜯어 말린다 치자. 괜히 그랬다가 날 계속 쫓아오며 소리를 지르면 어쩌지. 출퇴근하려면 매일 같은 시간에 이 역을 지나쳐야 하는데 그때마다 저 광인과 마주치면 어쩌지. 저 광인이 날 알아보고 매번 시비를 걸어오면 어쩌지. 그냥 저 학생들이 일 분만 더 참아 주면 안될까.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결국 열차가 들어왔다.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학생들은 서둘러 열차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딜 가! 요 녀석들!”

“꺄악!”

광인이 학생 하나의 가방을 붙잡고 늘어졌다. 열차 안으로 들어갔던 다른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들이 스크린 도어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왔다갔다 하자 그제야 멀리서 역무원이 다가왔다.

“거기! 노란선 밖으로 물러나세요! 위험합니다!”

열차 안에 타고 있던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저 역무원이 광인을 떼어내 줄 지도 모르지. 하지만 학생들은 이번 열차를 놓칠 거야. 오 분 후면 다음 열차가 오겠지만.

갑자기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에 오 분이면 총 이십 분이다. 환승 시간을 줄이기 위해 미리 최적의 출입문으로 이동하고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면서 버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저 광인이 자유대한민국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학원에서 시달리다 집으로 들어가는 죄 없는 학생들에게 이십 분을 빼앗을 권리는 없어. 그것도 귀에 담고 싶지도 않은 지저분한 설교를 들으면서.

문이 닫힌다는 경고 방송이 나왔다. 왠지 모르게 몸이 뜨거워진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광인을 향해 달렸다.

“그거 당장 놔!”

나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며 가방끈을 붙들고 있는 광인의 손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나를 보고 놀란 광인의 손에서 힘이 풀렸고 학생들은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열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손날은 광인의 손과 풀려난 가방끈 사이의 빈 공간을 갈랐고 중심을 잃은 내 몸은 광인과 부딪히며 함께 바닥으로 굴렀다.

“아이고. 아이고. 허리. 허리가아!”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역무원이 나에게 소리질렀다. 나는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넘어지면서 부딪혔는지 골반이 욱신거렸다. 광인은 역무원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려다 다시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이고오. 허리가 부러졌나보네. 아이고.”

역무원은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얼른 상황을 설명하려 더듬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이 분이 먼저 학생들을 붙잡고 안 놔 주셔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노인 분을 밀쳐서 넘어뜨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말로 하셔야죠. 말로. 아 나 참.”

“너 이 새끼. 내가 고소할꺼야! 너! 합의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 야! 뭐해! 빨리 구급차 불러!”

광인은 이제 아주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역무원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허리에 찬 무전기를 꺼내 들며 내게 말했다.

“아저씨. 빨리 사과하세요.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지. 일 커져 봐야 좋을 거 없어요.”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뭐? 너 아주 잘 걸렸다. 빨리 구급차 부르라니까! 찬 바닥에 쓰러져 있다 반신불수되면 니가 책임질거야? 엉?”

역무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뭐 하세요. 진짜. 병원가면. 노인 분들 무조건 전치 4주 이상 나와요. 합의 안 해주면 구속 수사도 가능한 거예요. 4주면. 아. 몰라. 맘대로 하세요. 전 그냥 규정대로 처리합니다.”

이게 뭐야. 괜히 나서서는. 그러게 참았어야 했는데. 진짜 무릎을 꿇어야 하나. 꿇어야지 뭐. 어떻게 하겠어. 그게 덜 귀찮겠지. 잠깐만 참으면.

그래도 이상하게 후회는 들지 않았다. 어쨌든 학생들은 열차를 안 놓쳤으니까. 그래. 똥 밟았다 치자. 똥 밟을 수도 있는 거지 뭐. 잘했어. 잘 한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광인 앞에 무릎을 꿇으려는 내 등을 누군가가 찰싹 때렸다. 그 여자였다. 그가 나를 제끼고 앞으로 나가더니 발을 높이 들어 쓰러져 있는 광인의 손을 마치 바퀴벌레라도 되는 듯 꾹 내리 밟고는 옆으로 한 번 문질러 틀었다. 아까 학생의 가방을 붙들었던 손이었다.

“아악! 아파!”

광인이 몸을 움츠리며 밟히지 않은 쪽 손으로 바닥을 쳤다. 그래도 그는 손을 밟은 발을 떼지 않았다. 아프다며 날뛰는 광인의 허리는 아무리 봐도 멀쩡했다. 그리고 역시 주변 사람들은 믿기 힘든 반응을 보였다.

역무원은 소리를 지르는 광인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정작 손을 밟고 있는 여자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손을 밟고 있는 사람이 이 소동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믿는 듯했다.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여자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정도로 하죠. 가요.”

한참을 밟고 있던 발을 떼자 광인은 술이 확 깼는지 신음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섰다. 손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허리는 멀쩡해 보였다. 광인은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역무원은 바닥에 흘린 피를 닦기 위해 청소 도구를 가지러 갔다. 다음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노란선 밖에 늘어섰다.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살짝 웃고는 잰 걸음으로 역을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뒤를 따라가는 나를 막지 않았다.


“백태희예요.”

“안기현입니다.”

둘은 오백씨씨 맥주잔을 마주쳤다. 태희가 숨도 안 쉬고 길게 한 모금 들이킨 반면 기현은 맥주잔에 살짝 입만 대고는 도로 내려 놓았다.

“아우. 시원하다. 뭐야. 술 못 마셔요?”

“믿기 힘든 얘기를 해 주실 거잖아요. 막 초자연적이고 그런. 마음을 열고 있어요. 내가 믿고 있던 모든 사실들이 거짓일지도 모르니까. 될 수 있으면 맨 정신에 듣고 싶어서요.”

“원래 그렇게 오버하는 성격인가. 과하게 감동하고. 내가 세계를 구해야 할 거 같고. 미리 말해두는데. 이거 그렇게 대단한 일 아니예요. 대단해서도 안 되고. 뭔가 큰 기대를 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접어요.”

“아닙니다. 저 대단한 거 안 좋아해요. 골치 아픈 거 딱 질색이고요.”

“그럼 왜 날 따라왔어요?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 지난 한 주 동안 내내 고민했던 일이다. 가장 확 와 닿는 이유는 태희의 따귀 스윙이 너무 멋져서다. 그건 진짜 그랬다. 그 따귀는 그동안 막혔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내 숨구멍 하나를 뻥 하고 뚫어 버렸다. 이제 다시는 그걸 틀어 막은 채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랬다.

“골치 아픈 게 싫어서요. 신경 쓰이는 것도 싫고. 불편한 상황을 훨씬 심플하게 해결할 수 있잖아요. 태희 씨 방식이. 그냥 꾹 참는 것 보다.”

태희는 잠시 실눈을 뜨고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상태로 맥주잔을 기울여 한 모금 더 들이키고 나서야 태희는 시선을 거뒀다.

“일단 먹죠. 이게.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플하지 않아. 칼로리 소비가 엄청나다니까. 살이 쪽쪽 빠져요. 이렇게 먹어주지 않으면.”

그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태희의 입 속으로 거침없이 치킨 조각이 빨려 들어갔다. 치킨 바구니 두 개와 맥주잔 네 개가 비워지고 나서야 태희는 만족한 듯 허리를 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어디까지 얘기했죠?”

“하나도 얘기 안 했는데요.”

“아. 그렇지. 칼로리. 자 봐요. 스트레스 받으면 배고프잖아요. 그쵸? 비슷해요.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집중을 해야 하니까. 그냥 내가 막 우주도 들어서 옮길 수 있다는 기분으로. 세상이 다 틀리다고 해도 내가 맞다면 맞는 거야. 뭐 그런 식으로. 그러니 얼마나 정신력 소모가 크겠어요. 안 그래요?”

“스트레스 먹는 걸로 풀면 살 찌는데.”

“누가 그걸…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아. 또 배고파지네. 우리 아까 뭐 안 시켰지? 스위트갈릭! 하나 더 시켜도 되죠?”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물어는 봐야지. 돈 낼 사람한테.”

“제가 내는 거였어요?”

“공짜로 배우려고 했어요?”

“시키세요.”

“여기요!”

태희의 말솜씨는 따귀 솜씨 보다는 깔끔하지 못했다. 치킨 한 바구니를 더 비우며 태희가 설명한 요지는 이랬다. 자신이 굳게 믿고 너무도 당연하게 하는 행동은 다른 사람 역시 당연하게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에이. 어떻게 그래도 눈앞에서 뻔히 일어나는 일을 못 봐요.”

“진짜라니까. 이거 과학이에요. 사이언스.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의 대부분은 그냥 버려진다고요. 변하지 않는 부분은 그냥 변화없음 한 마디로 땡 치고 변하는 부분만 잘라내서 그것도 멋대로 보기 좋게 주물러서 세 줄 요약으로 알려 주는 게 뇌라니까. 그날.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부 다 기억나요? 딱 하나만 기억나겠죠. 그 쓰레기가 임산부 괴롭히던 거. 만일 기현 씨 뇌가 그 일도 흔히 일어나는 평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면 어땠겠어요?”

“딱 보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았겠죠. 어떻게 그걸 평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심지어 따귀를 맞은 그 쓰레기도. 기현 씨만 빼고.”

“말도 안 돼.”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 사람 앞에 앉아 있는 거니까.

“좋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데요?”

“일단은. 자기 자신이 굳게 믿어야 해요. 이 일은 이 상황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숨쉬듯이 평범하게. 불을 보듯 뻔하게.”

“불량배에게 따귀를 올려 붙이는 일이?”

“으흥.”

태희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현실을 만드는 거예요. 정의로운 현실.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정의로운 일이 당연하게 일어나는 평행 우주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 우주를 잠시 우리 우주에 겹치는 거예요. 나의 강력한 의지로.”

“흐으음…”

정말일까. 정말 그런 게 가능할까. 난 이미 그걸 목격했고 내가 본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일말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태희의 말을 못 믿을 것도 없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다른 설명이 없으니까.

“오래는 안 돼요. 넓게도 힘들고. 아주 잠깐. 좁은 장소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딱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우린 그걸 정의의 일격이라고 불러요.”

정의의 일격.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그런 것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거겠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의 조금 다른 버전인가. 어쨌든 그걸 해내고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고. 그걸 배우는 게 가능만 하다면.

“그럼 그 따귀는 어디서 배워요? 아니. 마음만 있다면 동작 같은 건 상관 없는 건가.”

“매우 상관이 있죠. 정신 만큼이나 몸도 중요해요. 아무리 머릿속으로 자연스럽다고 되뇌어 봐야 움직이는 몸이 부자연스러우면 금방 티가 나고 집중도 깨지니까. 정의의 일격을 가할 때는 몸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돼요. 누가 가르쳐 줄 수는 없고. 스스로 터득해야 해요.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치킨 세 바구니와 맥주 삼 리터를 제공해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태희가 지닌 능력의 핵심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한 방으로 응징하고도 아무런 해코지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의 일격. 태희는 그 한 방을 그렇게 불렀다. 그건 그냥 기분이나 푸는 주먹질이 아니라 불의한 상황을 한 방에 종료시킬 수 있는 진짜 한 방이다.

그 일격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코지를 당하지도 않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 한다. 그건 상관 없다. 경찰서에서 무슨 시민상을 받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번거롭기만 하다. 사람들이 고마워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이 나와 마음이 맞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냥 깔끔하게 그 상황에서만 도와 주고 잊어 버리는 게 나도 편하다.

한 방 날려주고 싶은 사람에게 진짜로 한 방 날려줄 수 있다는 거. 그거면 충분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의 절반은 날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고 냉랭하게 말한 것에 비하면 태희는 꽤 공을 들여 내 일격을 다듬어 주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겠지만 일단은 일격의 동작에 눈에 띄는 부자연스러움은 없어야 했다.

“아무래도 실제 대상이 없으니 동작에 진실함이 실리지 않네. 때려주고 싶은 사람 없어요? 떠올리기만 해도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얼굴.”

“있죠. 박 대리.”

회사에서는 일만 하면 된다지만 아무리 착실하게 실적을 쌓고 통장에 월급이 입금돼도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허전하고 불안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필요한 일이라는 성취감. 내가 이 분야의 일원이라는 소속감.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채워져야 불필요하게 마음을 쓸 일이 적어진다.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식후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게 일종의 사회성 충전 타임이 되는데 복병이 바로 박 대리다.

업무적으로는 별로 문제가 없다. 나와 부딪힐 일도 적고. 나보다 몇 달 먼저 입사했고 수완도 딱 그만큼 미묘하게 좋은 편인데 입만 열면 불만이고 불평이고 혐오다. 아주 그냥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억울하고 다른 사람들은 죄다 멍청이들이다. 물론 그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남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신념 하에 철저하게 편을 들어주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은 별 거부감없이 크고 작은 혐오에 동참하곤 한다. 불편한 건 그저 오지랖 넓은 나 뿐이다.

박 대리의 비뚤어진 불만들을 듣고 있다보면 사회성이 채워지기는 커녕 인간 사회에 대한 환멸만 늘어난다. 가끔 못 참고 몇 마디 받아치고 나면 묘하게 불편한 쪽으로 상황이 정리되는데 숟가락으로 나만 폭 떠서 덜어내진 느낌이 들고 자리에 돌아오고 나면 내내 귀가 간지럽다.

“하 진짜. 그냥 그 입만 좀 다물었으면 좋겠는데. 안 만날 수도 없고.”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태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이렇게 하죠. 동작을 살짝 바꿔서. 뺨이 아니라 입을 때리는 거야. 요렇게.”

태희가 손바닥을 수직으로 세워서 마네킹의 입술을 찰지게 내리쳤다. 배구 스파이크와 좀 더 비슷해진 동작이고 역시나 간결하면서도 시원시원하다. 몇 번 동작을 따라해 봤지만 내 팔로는 아무래도 그 곡선이 나오지 않는다. 태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아니 로봇도 아니고 사람 팔이 왜 이렇게 움직이지? 노를 젓듯이 근육이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야죠. 자연스럽게. 풀고 조이고. 아니. 움츠리지 말고 뻗으면서. 쭉. 에헤이. 마음을 실어야죠. 봐요. 팔이 딱 이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각도 자체가 안 나온다니까. 일단 손이 돌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자동이어야죠.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듯이. 자석이 쇠에 달라 붙듯이.”

“아 좀. 자꾸 그러니까 더 정신 없잖아요. 그리고 이게. 주로 회의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데. 앉아서는 팔이 이 각도가 잘 안 나와요. 이거 봐. 어색하잖아.”

“앉아서. 앉아서라. 그래. 이게 젤 낫다. 동작도 하나고. 직선이고.”

“어떻게요?”

“목젖 촙. 간단해요.”

태희는 의자에 마네킹을 끌어다 놓고 그 옆에 앉아서는 살짝 몸을 푸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수평으로 팔을 뻗었다. 일격은 분명 간결했다. 가슴 쪽에 접고 있던 팔을 구십 도 옆으로 뻗어주는 한 동작이다. 따귀 스윙처럼 유려한 황금비율의 나선을 그리는 것도 아닌 그냥 각 잡힌 직선이고. 그래도 어깨가 벌어지는 속도와 팔꿈치가 펴지는 속도 그리고 곧게 뻗은 손날에 마지막 스냅이 들어가는 타이밍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퍽 소리가 나면서 마네킹은 그대로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자 여기 앉아서 해봐요. 그렇지. 아까보다 훨씬 낫네.”


며칠 간의 집중 훈련 끝에 태희는 일격 동작이 완성되었다고 평가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손날이 목젖을 치는 감각이 더 없이 경쾌했다. 용수철처럼 펴지는 팔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공기층 사이의 좁은 틈새로 빨려 들어가듯 정확한 경로로 목젖을 향해 날아간다. 빅뱅 이후 모든 별의 움직임은 오로지 이 일격으로 귀결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어이없는 기분에 휩싸일 정도다.

그런데 정말 이 일격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까. 만일 누군가가 기억한다면. 난 얼마나 정신 나간 놈이 되는 걸까.

“그건 순전히 기현 씨의 믿음에 달려 있어요. 이 일격이 얼마나 정당하고 당연하다고 믿는지. 마음 속에 한 점의 의심도 없다면 일격은 분명 성공할 거예요. 왜 지난번에 지하철에서 노인을 덮칠 때. 그때도 기세는 좋았어요. 동작이 엉망이어서 그랬지. 그런 마음가짐이면 돼요.”

“아 근데 아무래도. 차라리 지하철 역이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이게 직장이잖아요. 실패하면 난 끝이에요. 바로 잘린다고. 가뜩이나 요즘 이직할 곳 찾기도 힘든데. 백수되면 태희 씨가 먹여 살려 줄 것도 아니잖아요.”

“싫음 말고요. 기현 씨한테 이거 하라고 강요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기현 씨가 와서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지.”

“그건 그렇죠.”

그건 그랬다. 사실 내가 왜 그렇게 이걸 배우고 싶었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처음부터 박 대리의 목젖을 날리고 싶어서 애가 탔던 건 아니다. 어쩌면 지하철에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나만 태희의 일격을 알아보고 기억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체 왜 나만 태희 씨 일격을 기억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회사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으면. 아무리 내가 완벽하게 일격을 가해도 그 사람이 알아 볼 거잖아요.”

“이런 능력을 지닌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사실은 아주 드물고. 알아봐도 그 사람 주장이 먹히겠어요? 그때 지하철에서 내가 그 쓰레기 뺨을 때렸다는 걸 기현 씨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주변 사람들이 믿었겠어요?”

“제가 왜 그런 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해 봐야 나만 정신 나간 사람 취급 받았겠죠.”

“그래요.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요. 누군가 알아 봐도 기현 씨에게 해가 갈 일은 없으니까. 다만.”

“다만?”

태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사람에게 일격에 대해 알려줘서는 안 돼요. 가르쳐 줘서도 안 되고. 이 일. 이 능력. 기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에요. 비밀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태희는 정의의 일격에 대해 설명하면서 몇 번 우리라는 말을 썼었다. 캐묻지는 않았지만 태희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더 크고 더 골치 아픈 일에 얽히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태희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해서 나는 일부러 농담으로 받았다.

“뭐야. 그렇게 위험한 거였어요? 저 이거 배울 때 그런 약관에 서명한 적 없는데. 제가 죽기라도 하면 태희 씨가 책임져야 해요.”

“아뇨. 책임질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제가 죽일 거예요.”

“아니. 무슨 그런…”

내가 당황하자 태희는 금방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서 웃었다. 그래도 왠지 그 말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하. 진짜 걔네들은 왜 일을 이 따위로 하는 거야. 원칙대로 해야지. 원칙대로.”

박 대리의 불평불만은 항상 절반 정도의 진실에서 시작한다. 이번 타겟인 재무팀 역시 잘못한 부분이 있고 굳이 따지자면 그 쪽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니 이 정도 푸념이야 거슬릴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랜 경험으로 이 불만이 제멋대로 번져나가다가 결국은 편견으로 가득 찬 혐오로 귀결되리라고 예감했다.

“에휴. 뭐 맨날 그렇지. 말해 뭐해.”

그만 말하라는 뜻이었지만 물론 알아들을 리는 없다. 박 대리는 더 핏대를 세웠다.

“매 번 이 모양이잖아. 매 번. 점점 더 심해진다니까. 지들이 상전이야 아주.”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려고 한다니까요. 현장에선 한 시가 급해서 피가 마르는데. 저도 지난번에 아주 학을 뗐어요.”

박 대리와 가장 쿵짝이 잘 맞는 신입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박 대리의 눈에 들기 위해 기분을 맞춰 주는 건지는 아직 의문이다. 후자라면 아주 성공적이다.

“책임감이 없어서 그래 책임감이. 내가 사장이면 여직원은 절대 안 뽑아.”

시작이다. 신입은 눈치를 보며 낄낄 웃는다. 습관처럼 내뱉은 편견이지만 오늘은 테이블에 여직원이 한 명 앉아 있다. 신입보다 일 년 먼저 들어와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비정규직이다. 그제야 깨달았는지 박 대리가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세영 씨는 말고. 세영 씨 처럼만 일하면야 문제될 게 없지.”

그냥 거기서 멈췄으면 좋으련만 박 대리는 기어이 혐오를 계속하기 위해 선을 긋는다. 정말 지독한 집착이다.

“왜 대학 갓 졸업하고 들어와서 놀러다니듯 직장 다니다가 남자 하나 물어서 때려칠 생각만 하는 애들 있잖아. 남자들은 그래도 결혼하려면 직장도 탄탄하고 목돈도 좀 있어야 하니까. 아무래도 책임감이 다를 수밖에 없지. 직장에 목이 매이는 거지 뭐. 에휴. 그런 거 생각하면 불쌍해. 한국 남자들.”

세영이 허탈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이는 데도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박 대리는 평소보다 더 열을 올렸다.

“교육이 문제야 교육이. 힘든 일은 죄다 남자들한테 맡기고 꿀만 빨려고 하니. 군대도 안 가겠다. 애도 안 낳겠다.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그럼.”

날려야 하나. 나는 조용히 손날을 만져 보았다. 연습을 하긴 했지만 회사에서 정말로 일격을 날리는 건 망설여진다. 사실 일격을 연습한 것만으로도 이런 상황이 좀 더 견딜만 해졌다. 박 대리 같은 사람이 인내심을 시험하는 말을 할 때면 조용히 귀를 닫은 채 목젖에 손날을 날리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 앉는다.

“솔직히 우리나라처럼 여자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있어? 전 세계에서 산후조리원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어. 다른 나라 여자들은 펑펑 잘 낳는 애 하나 가지고 온갖 유세를 다 떨고. 입덧이다 몸조리다. 아주 평생을 울궈 먹어요. 애 낳는 거 하나로 그 난리를 치니 직장 생활이 감당이 되겠어? 이것도 못 버티고 나가서 몸 팔아 쉽게 돈 버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다며?”

박 대리의 시선은 남자 신입을 향하고 있었지만 이건 누가 봐도 세영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정규직 임용을 앞두고 있는 세영이 반발하지는 못할 거란 계산을 한 걸까. 아니. 박 대리라면 이걸 세영을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할 거다. 정규직이 되면 이런 말 끊임없이 들어야 할 테니 미리 각오해 두라고. 너도 이걸 깨달아야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세영이 쥐고 있던 종이컵이 와그작 찌그러졌다.

“그냥 좀 닥치라고!”

나도 모르게 외침이 터져 나오며 몸이 광인을 향해 달려들 때처럼 뜨거워졌다. 일격을 날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저절로 팔이 날아갔다. 공기를 가르며 뻗어나가는 팔의 느낌이 창공을 활강하는 새처럼 후련했다. 퍽 소리와 함께 박 대리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굴러가 벽에 부딪혔다.

“흑! 흐끄으… 흐…”

박 대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목을 붙들고 의자에 수그린 채 짐승같은 소리를 냈다. 죽으면 어떻하지.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그제서야 정말로 직장에서 일격을 날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건가.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신입은 눈앞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세영은 찌그러진 종이컵을 들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분리수거함에 종이컵을 버렸다. 박 대리는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박 대리. 괜찮아?”

“흐끄… 흐끄…”

그래도 조금씩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세영과 신입은 몇 마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 분 가까이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숨만 쉬던 박 대리가 겨우 말을 뱉었다.

“아우… 목이… 테이블… 에 찧었… 미끄러졌나…”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야겠는데…”

내가 때렸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성공인가. 성공인 모양이다.


박 대리에게의 일격 성공 이후로 나는 조금씩 대담해졌다. 다만 일격의 세기는 적당히 조절했다. 박 대리는 MRI에 신경 검사까지 마친 뒤 한 동안 깁스를 하고 다녀야 했다. 골절이 조금만 더 심했으면 죽었을 거라고 떠드는 게 그냥 허풍은 아닌 듯했다.

그에 더해 신기하게도 혐오 발언이 줄었다. 내가 때렸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 사건에 대한 무의식적인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편견에 가득 찬 말들을 쏟아냈을 상황에서 몇 번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그냥 넘어가고 마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잡담 시간이 전보다 쾌적해진 건 물론이다.

저질 농담을 즐기는 변태들. 험담과 이간질을 일삼는 기회주의자들. 멍청한데다 고집까지 센 상사들.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할 생각만 하는 이기주의자들. 그때마다 적절한 일격을 날리며 때로는 상황을 정리하고 때로는 분위기를 바꾸는 일에 슬슬 자신감이 생기고 재미까지 붙었다. 지하철에서도. 식당에서도. 내 주변은 조금씩 정의로워졌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런 노력이 쌓이면 정말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요. 진짜 내가 무슨 히어로가 된 느낌이라니까.”

나는 신나서 떠들었지만 태희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내 자신감이 올라갈수록 태희의 말수와 식욕은 줄어들었다. 내가 두 개의 치킨 바구니를 비우는 동안 태희는 반 바구니도 먹지 못하고 깨작거렸다. 오백씨씨 잔의 맥주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게 진짜. 태희 씨 말대로 일격이 칼로리 소모가 크긴 한가봐요. 요새 능력을 좀 자주 썼더니 어우. 식비가 감당이 안 돼. 근데… 태희 씨는 괜찮아요? 요새 영 활기가 없어 보여서.”

“뭐. 어느 분이 하도 활약을 하고 다니셔서 제가 할 일이 별로 없나보죠.”

“에이. 또 왜 그래요. 제가 뭘 해 봐야 얼마나 한다고. 사실 요새 그게 좀 고민이에요. 아무리 제가 제 주변에 정의의 일격을 날리고 다닌다고 해도 이 세상의 거대한 불의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냥 임시방편일 뿐이잖아요.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태희가 허리를 펴고 앉으며 정색했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는 입으로 가져가던 치킨 조각을 내려 놓고 맥주로 가볍게 입가심을 했다.

“내가 처음 여기 와서 기현 씨랑 치킨 먹으면서 말했던 거 기억나요? 우리가 하는 일. 대단하지도 않고 대단해서도 안 된다고.”

“기억나죠. 근데…”

“내가 책임질 일이 생기면… 아냐 그건 됐다. 하여튼. 그런 생각. 버려요. 세상을 바꾸겠다거나 하는. 우린 아직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냥 기현 씨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정말 피부에 와 닿는 분노가 느껴지는 일. 그런 일에만 써요.”

“그야 그렇죠. 근데 이왕이면…”

“아. 거 참 말 안 듣네. 기현 씨 고집 세죠? 남의 말 잘 안 듣고. 기현 씨 같은 타입. 처음부터 좀 불안하기는 했어.”

“왜요. 저 말 잘 들어요. 특히 태희 씨 말은. 말을 안 해 주니까 그렇지.”

“말을 해 주려고. 그래서.”

태희는 처음 이곳에 왔던 날처럼 실눈을 뜨고는 지그시 내 눈을 노려보았다. 눈을 떼지 않은 채 맥주를 들이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맥주잔을 내려 놓은 태희가 말했다.

“그 일격 말이에요. 반드시 정의로워야만 가능한 건 아니에요. 아니 그걸 떠나서. 애초에 보편적인 정의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람마다 다 다르고. 정의를 떠나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정의의 일격과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정의롭지 않아도요?”

“응. 정의롭지 않아도.”

“잠깐만요. 그럼… 만일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면. 일격으로 그 사람을 죽여도 아무도 모를 수 있다는 거예요?”

“예가 좀 극단적이지만. 네 그래요. 가능해요. 이론적으로는.”

“…그런데 그 얘기를 지금 하는 이유가…”

“기현 씨가 나쁜 의도로 일격을 쓸 거라곤 생각 안 해요. 그 정도는 믿지. 근데. 대의 같은 거. 보다 큰 목표를 생각하다 보면 말이에요. 사람이 좀. 이상해질 수가 있거든.”

“아 네…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기현 씨. 믿어요. 믿지 않았으면 시작도 안 했지. 이걸 말해 준 것도 믿어서 말해 준 거예요. 못 믿어서 말한 게 아니라.”

태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잔에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나는 물론 정의롭지 않은 일에 일격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일격이 정의로운 일에만 작동하는 편이 더 좋았다. 일격이란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인 만큼 그게 정의롭다는 인증마저 없다면 영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까.

사실 그런 인증은 없었던 셈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목에 날렸던 일격들은 모두 정의로웠을까. 태희의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어쩐지 일격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고 될 수 있으면 일격을 자제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게 나만의 정의였는지는 몰라도 내 주변은 상당히 정의로워졌고 일격을 쓰지 않고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건 내 주변일 뿐이었고 태희가 말한대로 효과의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세영은 우여곡절 끝에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다. 박 대리는 경력이 떨어지는 신입을 밀어 넣으려 꽤나 애를 쓴 모양이었지만 부장 선에서 막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영이 채용된 건 당연하고도 정의로운 일이었고 나는 그 결과에 주변에 뿌린 자잘한 정의의 씨앗들이 조금은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내심 뿌듯해했다. 현실은 반대였다.

퇴근길에 문자 하나를 받았다. 세영의 번호였고 다른 말 없이 세 자리 숫자만 적혀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게 소회의실 번호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지하철 역 계단을 올라가던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그대로 반대 방향 플랫폼으로 내려가 회사로 돌아갔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불이 켜져 있는 소회의실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 시간에 미팅이 있다는 공지는 보지 못했다. 노크를 하니 회의실 안에서 나던 소리가 멈췄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역시 안에는 세영이 있었다. 장 부장과 함께였다.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부장이 말했다.

“어. 안 대리? 아직 퇴근 안 했나?”

“깜박 잊고 간 게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야근 중이십니까? 급한 일이면 저도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냐. 별 건 아니고. 뭐 그냥 간단한 신입사원 교육이야. 신경 쓸 거 없네.”

“부장님이 직접요?”

“그래. 거의 끝났어. 얼른 가 봐.”

부장이 냉랭하게 말했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투가 역력했다. 세영은 내가 회의실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보지 않고도 들어온 게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다. 세영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분명했다. 그걸 알고도 그냥 뒤돌아 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의자를 당겨 부장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다 끝나면 같이 가시죠.”

“어허! 먼저 가라니… 까.”

부장은 울컥 목소리를 높였다가 얼굴이 벌개지며 말꼬리를 내렸다. 신입일 때 나 때문에 몇 억 짜리 계약이 날아갈 뻔하고 팀원 전체가 밤을 새야 했을 때도 부장이 날 그런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일종의. 그 뭐냐. 개인 면담 같은 거야. 안 대리가 낄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사람이 그렇게 눈치가 없나.”

부장의 눈빛에 나도 울컥 무언가가 치밀었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고 내일 팀장님에게 간단히 보고하겠습니다.”

“무슨! 보고를… 이걸 보고를 왜 해!”

“팀장님 몰래 하시는 개인 면담이었습니까?”

“안기현. 너 지금… 너 나하고 뭐하는 거야? 나 협박하는 거야? 내가 뭐. 여기서 한세영하고 뭐 이상한 일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뜻이야? 이 자식이 근데 건방지게. 너 요즘 그렇지 않아도 근무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 뺀질거리면서 분위기나 깨고. 뭐야 너. 이 회사에서 더 이상 일하기 싫어?”

되돌리기엔 너무 많이 나가버렸다. 이 자리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든 부장의 눈밖에 나는 건 피할 수 없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테이블 밑에서 손날을 만지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정의로운 일이다. 아니. 정의는 상관 없다고 했지. 그래. 여기서 부장에게 일격을 가하고 세영을 데리고 나가는 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다. 누구라도 그럴 거다. 의심할 여지도 없다.

“이 자식이 어디서 그딴 눈으로 꼬나봐? 뭐야? 한 판 붙자는 거야? 헙!”

동작은 정확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공기를 가르고 경쾌하게 목젖을 타격했다. 부장이 시뻘개진 얼굴로 목을 부여잡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영에게 말했다.

“일어나시죠. 세영 씨. 퇴근합시다.”

세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눈에는 살짝 핏발이 서려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 쉬는 부장을 잠시 바라보던 세영은 얼른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기혀… 너 이 개… 어디…”

부장이 턱턱 막히는 목으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제대로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부장은 내가 일격을 날린 걸 잊지 않았다. 설마.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부장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 마시더니 들고 있던 펜을 집어 던졌다. 근처에도 날아오지 않고 바닥을 굴렀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격은 실패했다.

겨우 숨을 돌렸는지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테이블을 붙잡고 일어선 부장이 내게 다가왔다. 퇴사에 더해 폭행으로 고소당하는 미래가 눈앞에 보였다. 그래선 안 돼. 그럴 순 없지. 일격이 어느 정도까지 기억을 지워 줄까. 내가 아는 한 일격의 능력은 그 어떤 해코지도 당하지 않는 거였다. 지금은 그걸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대리님… 어떻게 해요… 저 때문에…”

세영이 울먹이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부장이 세영을 붙들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 분명해. 난 그걸 막으려 한 거고. 당연히 그랬어야 해. 정신 똑바로 차리자. 나는 부장의 목이 사정 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번개같이 두 번째 촙을 날렸다. 세게 때릴 필요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순리대로. 의심할 필요도 없이.

“억! 너 이…”

부장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내게 다가오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나를 보는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역시 실패였다.

“뭐지. 아 진짜.”

이젠 나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부장에게 빌어야 할까.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고. 귀신에 홀렸다고 할까. 부장이 아니라 귀신으로 보였다고. 어느 쪽으로나 짤리는 건 확정이겠지. 퇴직금으로 합의금 주고 나면 얼마나 남을까.

문득 나는 왜 일격에 실패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난 지금 후회하고 있다. 일격을 날렸던 걸. 내 스스로도 완전히 믿지 않았던 거다. 그 상황에서 일격을 날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걸. 그때였다.

“야 이! 개자식아!”

세영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 지 몰랐다. 목소리 뿐이 아니었다. 세영은 마치 발레리나처럼 혹은 삼단뛰기 선수처럼 내 옆의 허공을 날았다. 발이 땅에 닿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바닥을 딛고 튀어나간 세영의 두 발이 앞뒤로 우아하게 벌어졌고 앞으로 뻗어나간 오른발은 정확하게 부장의 두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흐으으읍!”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 선 세영이 얼른 내 쪽으로 도망나왔다. 사타구니를 붙잡고 쓰러진 부장은 한동안 말도 제대로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겨우 기다시피해서 의자에 올라 앉았다. 테이블에 엎드린 채 고개만 겨우 돌려 우리를 본 부장이 말했다.

“어우… 자네들 아직… 퇴근 안 했나?”

“아 네… 이제 퇴근 하려고요.”

“일 끝났으면. 빨리 빨리들 들어 가.”

“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얼른 인사하고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세영도 바로 뒤따라나왔다. 당장이라도 기억이 되살아난 부장이 쫓아 나올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타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영이 물었다.

“된 거죠? 그쵸? 제가 한 게 된 거죠?”

“네? 세영 씨 그게 무슨…”

“왜 있잖아요. 안 대리님이 하는 거. 이렇게 팍 때리면 사람들이 맞은 것도 기억 못하고 그러는 거요.”

“세영 씨… 알고 있었어요? 언제부터?”

“몇 달 전엔가. 박 대리님 목을 치셨잖아요. 점심 먹고 커피 마시다가. 박 대리 그 인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 놓고 있었는데. 안 대리님이 갑자기 팍!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요. 근데. 다들 뭐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서. 처음엔 제가 꿈을 꾼 줄 알았지 뭐예요. 근데 목에 깁스하고 나타난 거 보면 그것도 아니고.”

한세영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백태희의 일격을 기억하듯이. 내가 그 동안 회사에서 날리는 일격들을 고스란히 보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거다. 아는 체를 하면 사라져 버릴까 겁이 났다고 했다. 내가 그런 작은 정의를 뿌리고 다니는 걸 보며 무척 속이 시원했다고. 하지만 내가 없는 곳에서는 전과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더 심해진 경우도 있다고 했다. 장 부장이 그런 경우였다.

“장 부장.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제 채용을 밀어 붙였다는 소문을 듣고 쎄한 느낌이 들었는데. 의외로 차별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 생각하려 했어요. 근데 역시나. 그걸 빌미로 은근히 수작을 걸어오더라고요. 자기가 부인하고 사이 안 좋다는 얘기를 대체 저한테 왜 하는 거예요? 지가 나한테 가르쳐 줄게 뭐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술을 사준대요?”

세영과 내 퇴근길이 갈라지는 환승역 근처 커피숍에서 세영은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한테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내가 와서 그 이상한 기술을 써서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면서.

“이번에는 제가 한 거죠? 제가 그 기술을 쓴 거죠? 제가 부장 사타구니를 걷어찼는데 부장 그거 기억 못한 거잖아요. 그렇죠?”

“네. 그럴 거예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된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내일 평소처럼 출근하시면 돼요.”

“가르쳐주세요.”

“네? 뭘요?”

“그 기술요. 이번에는 어쩌다 됐겠지만. 저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쵸?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제대로 배워서. 저도 안 대리님처럼 헛소리하는 인간들 정신 좀 차리게 해 주려고요.”

“안 돼요.”

“안 돼요? 왜요?”

“그게. 저도 잘은 몰라요. 배운 지도 얼마 안 됐고. 함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보다. 이거 엄청 위험해요. 아까 봤잖아요. 실패하면 수습이 안 되니까. 세영 씨가 마지막에 성공하지 않았으면 저 바로 짤렸겠죠.”

“그러니까. 안 대리님만으로는 너무 위험하잖아요. 전 상관없어요. 짤려도 상관없고. 뭐 폭행으로 구속되면 또 어때요. 제가 살면서 겪었던 끔찍한 인간들. 그 인간들을 걷어 차 줄 수만 있다면 전 아무래도 좋아요. 걱정마세요. 혹시 제가 잡혀가더라도 안 대리님 얘기는 절대 안 할 거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세영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나는 세영에게 정의의 일격에 대한 비밀을 털어 놓고 말았다. 정의롭지 않아도 효과가 있다는 말만 빼 놓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회사에서만 세 명의 직원이 사타구니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갔다. 한 명은 그 방면으로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가성비 좋은 유흥업소를 찾아 다니는 걸 일생의 사명으로 여기는 인간이었으니 차라리 그 편이 삶에 더 도움이 되리라 싶었다.

사람들은 각각의 사건에 대해 떠들었지만 그 세 사건에 연관성이 있을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발차기를 날린 게 한세영이라는 의심도 하지 않았다. 세영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실적을 올리며 극히 평범하게 회사를 다녔다. 내가 손날을 날리던 것처럼 자기 주변에 작은 정의를 구현하며 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영의 눈빛이 전과는 달랐다. 태희의 경고가 마음에 걸렸다. 세영에게 일격의 비밀을 알려주었다는 건 태희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 일로 무언가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냥 맘 편히 생각하며 넘길수는 없었다.

사타구니를 다친 사람들에 대한 뉴스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게 일격의 특징이니 당연했다. 고심 끝에 주변의 비뇨기과에 연락해 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환자를 가장해 넌즈시 물어본 결과 최근 들어 누군가에게 걷어차여 병원에 오는 환자가 급증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간호사는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열된 경우도 흔하고. 심지어는 사망한 케이스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전화를 하실 수 있는 상황이면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 예약해 주세요.”

“사망? 사망이요?”

“네. 출혈과다로. 저희 병원 케이스는 아니고요.”

사람이 죽었다. 정말 세영이 사람까지 죽였을까.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을까. 대체 어떤 진상을 부렸기에. 병원에서는 그 사람의 신상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옥상으로 세영을 불러냈다.

“세영 씨 요즘.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은 것 이상이죠.”

세영의 말투는 당당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한 점 망설임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세영 씨가 일격을 가한 사람 중에. 혹시 죽은 사람이 있어요?”

“글쎄요. 그것까지 확인해 보진 않았어요.”

“없다고 확신은 못하시나 보네요.”

“왜 없어야 하죠?”

“세영 씨는…”

정의롭지 않아도 일격을 가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할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 중에 죽어 마땅한 사람도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러니까. 세영 씨는 세영 씨가 한 모든 일격이 정의롭고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확신을 하냐구요.”

“전 제가 하는 일이 정의롭다고 확신해요. 물론. 완벽할 순 없겠죠.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요.”

“희생이요? 사람이 죽었다고요. 그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게. 세영 씨는 신경 안 쓰여요? 그 일격을 후회하지 않냐고요!”

“절대! 눈곱만큼도 후회하지 않아요. 억울이요? 그래요. 억울할 수도 있겠죠.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아세요? 안 대리님은 모르시겠죠. 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숨쉬듯이 억울한지. 얼마나 억울하게 죽고 있는지!”

세영은 옥상 난간을 주먹이 벌개질 정도로 퍽 하고 내리쳤다. 감히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나를 세영이 몰아 붙였다.

“죽고 있다고요! 지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절 살인자라고 욕해도 좋아요. 살인자 하죠 뭐. 그래도 전 확신해요. 제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고 있다는 걸. 제가 몇 명을 죽이든 그 죄는 제가 안고 갈 거예요. 후회요? 전혀요! 제가 죽인 사람보다 훨씬 억울한 사람을 훨씬 많이 살리게 될 거니까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정의예요.”

세영의 눈빛은 단단했다. 그래도 난 내가 해야 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영에게 세영의 정의가 있다면 내게도 나의 정의가 있으니까.

“그래도 전 알아야겠습니다. 세영 씨가 죽인 사람 중에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전 세영 씨를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정의예요. 저의 정의죠.”

세영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진심이 실려있었다. 세영은 고개를 숙이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나를 바라보는 세영의 눈에는 살짝 물빛이 어려 있었다.

“멋져요. 안 대리님. 멋진 사람이야. 세상에 안 대리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솔직히 좀 부러워요. 멋지게 살 수 있어서.”

세영이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스크롤을 올리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세영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세영의 휴대폰을 다시 집어 넣자 내 휴대폰의 알림음이 울렸다.

“우리 각자의 길을 가요. 응원할게요. 근데 안 대리님. 나 너무 미워는 하지 말아요. 그럼 나 좀 슬플 거 같아.”

세영이 옥상에서 내려가고 나서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세영이 보낸 문자에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안타깝게도 세영이 알려 준 사람은 세영의 일격을 받은 사망자가 맞았다. 구영호. 이십 대 미혼 직장인. 사망 장소는 모텔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이었다. 사망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의심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경찰 조사도 허술하게 마무리되었다. 사인은 단순히 사고사로만 적혀 있었다.

구영호는 그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돌아다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세 시간 뒤 골목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타구니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친구들에 따르면 구영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한 번 찍으면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말하는 투로 보아 그들이 세상을 얼마나 비뚤게 보고 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개념없고 문란한 삶을 산 건 분명하지만 과연 그게 죽어야 할 정도로 큰 죄였을까.

그날 구영호를 따라 갔던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쓰러져 있던 구영호를 신고한 건 지나가던 행인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나는 신문 기자를 사칭해 구영호의 가족과 만났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이 왜 취재 대상이 되는지 의아해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애달퍼 하면서도 왜 그런 일을 당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세영은 왜 구영호가 죽어 마땅한 사람 혹은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정말 그렇게 큰 잘못을 했을까. 세영은 자신이 사람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세영의 방식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세영을 그냥 내버려 둘 이유 정도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영호의 어머니를 보며 나는 분명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이유에 대해 온전히 알 권리가 있다. 만일 구영호가 죽을 죄를 지었다면. 그래서 죽였다면. 그 진실을 어머니는 알아야 한다. 일격의 능력으로 어머니의 눈을 가리고 평생 헛된 눈물을 흘리며 살게 만드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그게 세영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책임질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제가 죽일 거예요.

태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말로 경고를 해 봐야 소용 없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세영이 일격을 자주 쓰는 유흥가 일대를 돌아다녔다. 현장에서 직접 상황을 보고 이야기하면 말이 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러던 어느날 클럽으로 들어가는 세영을 발견했다. 뒤따라가던 내 앞을 건장한 사람이 막아섰다.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하던 나는 그 사람이 태희와 처음 만났을 때의 지하철 광인이라는 걸 알아 보았다.

“아저씨. 물 흐릴 생각 말고 딴데 가봐요.”

날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때 일을 기억조차 못할 테니 당연했다. 여기서 저 사람에게 일격을 날렸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흠씬 두들겨 맞는 정도겠지. 상관 없었다. 세영이 어떤 기준으로 응징할 목표를 고르는지 알아야 했다. 그 과정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막아야 했다. 세영을 따라 이 클럽에 들어가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누구나 그렇게 할 거다. 후회라는 단어를 떠올릴 이유조차 없다.

“흑!”

세게 때릴 필요는 없겠지. 나는 가볍게 남자의 목에 촙을 날렸다. 켁켁 거리는 사이 자연스럽게 옆을 지나쳐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목을 만지며 가래침을 내뱉은 그 사람은 날 내버려 둔 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문 앞을 막아섰다.

세영은 클럽 구석에 버티고 서서 번쩍이는 조명 사이로 사람들을 지켜 보았다. 춤을 추는 사람 보다는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사람에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그러다 몇 번이나 한 무리의 여자들을 따라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서라고 짐작되었다.

나는 반대편 구석에서 세영을 지켜보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목표를 정한 듯 세영은 팔짱을 끼고 나가는 남녀 한 쌍의 뒤를 따라갔다. 나도 들키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세영의 뒤를 쫓았다.

남자는 여자를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술에 꽤 취해 보였던 여자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정신을 차리고 남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세영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영은 남자와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언제든지 킥을 날릴 수 있는 위치였다. 남자는 세영이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죽을 지도 모른다. 결심을 한 나는 앞으로 나오며 세영을 향해 외쳤다.

“세영 씨! 그만 둬요.”

깜짝 놀란 세영이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짜증난다는 듯이 바닥에 침을 뱉었고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세영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안 대리님?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설마. 저 미행했어요?”

나는 세영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지금 저 사람에게 일격을 날리려는 거죠? 이유를 설명해 줘요. 납득이 가면 비켜드릴게요.”

“그럴 시간 없어요. 필요도 없고. 비키세요.”

“아 뭐하는 거야. 진짜아! 재수없게. 싸울려면 니들끼리 싸워! 야! 가자. 빨리. 괜찮다니까!”

남자가 짜증을 내뱉으며 여자의 팔목을 잡았다. 여자는 한 걸음 더 물러서며 팔을 빼려 했지만 남자는 놓아주지 않았다. 얼굴이 굳은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야 이게 정말. 쪽팔리게. 오빠 이거 놔. 나 갈래.”

“가긴 어딜 가. 잠깐만 있어 봐.”

“알았으니까 놓으라구. 좀.”

“놓을께. 놓는데. 너 알았다고 했다. 거기 그대로 있어.”

남자와 여자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내가 세영에게 다시 속삭였다.

“제가 할 게요. 저 여자 분만 무사히 보내 드리면 되잖아요. 그쵸? 세영 씨 대신 제가 하면 되잖아요.”

“안 대리님 정말. 안 대리님이 하긴 뭘 해요. 저 사람을 응징해야 한다는 확신이나 있으세요? 제가 할 일이에요. 비키세요. 경고예요.”

“니네들 뭐 하니 진짜. 하. 이렇게 남의 시간 뺏는 거 범죄예요. 알아? 나 아주 바쁜 사람이라고.”

남자가 세영의 등 뒤로 다가오며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세영은 날 노려보느라 남자를 알아채지 못했다.

“안 대리님. 당장 비키라고 했어요.”

“세영 씨 그게… 읍!”

세영의 무릎이 사타구니 사이로 날아왔다. 아주 세지는 않았지만 잠깐 동안 숨을 쉴 수 없었다. 흐려진 시야로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전기 충격기라는 걸 깨닫고는 세영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를 악무는 나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되돌아 선 세영의 목에 남자가 전기 충격기를 가져다 댔다. 파박 소리와 함께 세영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 명이 실랑이를 벌인 골목 입구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있고 차가 다니는 큰 길에서도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영의 일격이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전기 충격기에 세영이 쓰러진 것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이상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수군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여자 조차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자 또한 그런 주변의 무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쓰러진 세영을 발로 밀어 뒤집더니 얼굴 쪽에 쭈그리고 앉아 턱을 붙잡고는 이리저리 돌려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끌고 가려던 여자 대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세영을 들쳐 업고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거… 거기 서!”

내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남자의 발이 멈췄다. 세영을 내려 놓고 돌아 선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야 너. 내가 하는 일이 보이는 거야? 일격이 제대로 안 먹혔나. 느낌 괜찮았는데.”

“그 사람. 내버려 둬. 허튼 수작. 부리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무언가를 잡아 뽑은 듯한 고통이 가시지 않아 나는 겨우 숨을 돌리며 말했다. 놈은 내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다시 전기 충격기를 꺼내서는 몇 번 단검을 휘두르듯 내지르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했는데. 타격감이 이게.”

“대체 왜…”

놈은 재미있다는 듯 내게 충격기를 겨누고는 말했다.

“사회 정의 구현이다 새꺄.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힘이 곧 정의라고. 너네 같은 일반인들은 나같은 능력자들이 맛있게 냠냠 드시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 아니겠냐. 찐따 새꺄. 뭔 소린지 모르겠지? 여기 누워서 형님 말씀 잘 되새겨 봐. 기억이나 날 지 모르겠지만.”

전기 충격기가 내 목을 찔렀고 눈앞이 하얘지면서 몸이 제멋대로 뒤틀렸다.


겨우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을 때 주변에는 쓰러진 나를 둥글게 피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놈과 함께 있던 여자 그리고 세영도. 다급해진 나는 일단 태희에게 연락했다. 놈은 일격을 쓸 수 있는 능력자다. 경찰을 포함한 일반인들에게는 놈이 한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태희가 오는 동안 나는 놈이 사라진 골목 주변을 뒤졌다. 상가와 일반 주택이 혼재된 미로같은 골목길에서 그놈의 흔적을 찾는 불가능했다. 상점 직원이나 지나가던 사람에게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여자를 끌고 가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이것도 일격의 효과가 연장된 것일까.

생각보다 빨리 태희가 도착했다. 오는 도중 몇 번 전화 통화를 하며 자초지종은 설명을 한 상태였다. 태희는 만나자마자 내 등을 매섭게 후려쳤다.

“사고를 쳤으면 말을 해야지! 말을! 내가 이거 비밀이라고. 위험하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미안해요. 세영 씨가 눈치를 채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됐고. 아직 못 찾았어요?”

“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네요.”

“그 사람. 능력자라고 했죠? 인상착의를 확인해 봤는데. 최현철이라는 사람 같아요. 우리 조직에 등록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겼어요. 그리도 그 죽은 사람. 구영호. 그 사람도 능력자예요. 능력 믿고 설치는 놈들이 아무래도 따로 모여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나봐요.”

“그래요? 그럼 그 조직이라는 곳에서 지원을 나오나요? 여럿이 함께 찾으면…”

내 말을 듣던 태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직은 안 와요. 하. 그러니까. 걔네들 엄청 보수적이거든. 능력자들끼리 싸우는 걸 제일 싫어해요. 혹시라도 일반인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알려질까봐 겁이 나는 거지. 뭐 우리의 존재가 비밀로 유지되는 게 큰 틀에서 봤을 때 세계 평화 유지에 더 도움이 된다. 이딴 계산을 하고 있겠죠. 움직이더라도 극도로 조심하면서 움직일 거예요. 그거 기다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지금 사람 목숨이 위험한데! 그게 정의에요? 정의의 일격이라면서요. 우리가 하는 게. 지금 무슨 계산을 하고. 그 사람들이 그럴 자격이 있는 거예요?”

“말했지만. 정의는 사람마다 달라요. 심지어 정의로울 필요도 없다니까. 정의의 일격이라는 이름은 그냥 선언에 불과해요. 세영 씨. 휴대폰은 갖고 있어요?”

“그럴 거예요. 걸어 보진 않았지만.”

“왜?”

“도움이 안 되니까. 안전하게 받을 수 있는 상황이면 세영 씨가 먼저 걸겠죠. 이쪽에서 걸었다가 괜히 휴대폰을 들키거나 뺏겨서 좋을 거 없잖아요. 꺼버리면 추적도 안 되고.”

“흠. 기현 씨 생각보다 그런 판단은 빠르네요. 그 자식. 한세영도 능력자인거 모르죠?”

“그런 거 같아요. 우리가 능력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거 같았어요.”

“그럼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네. 한세영이라는 사람. 아무 정보도 없이 수상한 짓을 하는 능력자 둘을 콕 집어낸 거 보면 보통 눈썰미는 아니에요. 분명 기회를 잡을 거예요.”

그 말이 맞았다. 얼마 뒤 내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세영의 번호였고 숫자만 몇 개 찍혀 있었다. 3 45 3. 태희가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세영은 지난 번에도 회의실 번호만 찍힌 문자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의미임이 분명했다. 머릿속에 번개같이 생각 하나가 스쳤다.

“이거. 주소예요. 도로 번호. 건물 번호. 그리고… 층 수? 끌려가면서 주소판을 봤을 거예요.”

재빨리 지도 앱을 켠 나는 세영이 알려준 주소를 향해 뛰었다.


처음으로 찾아간 건물에는 3층이 없었다. 다른 층은 가정집이었고 수상한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도로로 찾아가자 상가 건물이 나타났다. 3층의 빼곡한 창문에는 하나같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지만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새어나오는 소리로 보아 안에는 대여섯 명 이상의 남녀가 함께 있는 걸로 보였다. 태희와 눈빛을 교환한 뒤 나는 천천히 철제 문을 당겨 열었다. 누군가 협박을 하고 있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대답해 봐. 여기 어떻게 왔어?”

“어… 제가 온 거 같아요.”

“나랑 놀고 싶어서 왔잖아. 그렇지?”

“…네. 네. 맞아요.”

“근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어?”

낮은 신음 소리와 몸이 부대끼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부는 조명까지 갖춘 스튜디오로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 쓰러진 여자를 남자 하나가 올라타고 있었고 그 주변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 몇 명이 둘러싼 채 낄낄대고 있었다.

말을 안 듣는다는 남자의 외침과는 달리 여자는 놀라울 정도로 순종적으로 남자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었다. 일격은 단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을 지워주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일어났던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기억할 필요 조차 없도록 만든다. 그 일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당한 일이 당연하다 믿는다.

여자를 올라타고 있는 사람은 아까 세영을 데려간 남자. 태희의 조사에 따르면 최현철이었다. 그 밑에 깔려있는 여자는 놈에게 몹쓸 짓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그게 최현철의 능력이었다. 정의로운 일에 써야 할 그 능력을 이 인간은 자신의 더러운 욕구를 해소하는데 쓰고 있었다. 강자인 자신이 약자들을 유린하는 게 정의라고 굳게 믿으며.

그리고 그걸 찍고 있는 인간들. 갑자기 나타난 기현과 태희를 보며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능력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저걸 찍어 협박하고.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지고. 그렇게 약자들을 린치하는 비겁하고 삐뚤어진 인간들의 군상이 눈에 선했다. 그제야 스튜디오 곳곳에 널린 끔찍한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피가 다 닦이지 않은 바닥. 날카로운 도구. 군데군데 붙어있는 역겹고도 끔찍한 사진.

세상은 그랬다. 약자에 속하지 않는 평범한 내가 느끼는 불의는 세상에 뿌려진 악행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의 일격이라는 힘을 얻은 이후로는 더더욱 주변에서 불의를 찾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약자의 자리를 배정받은 사람들. 빼앗기고 굴복하고 복종하는 역할을 강요받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숨쉬듯 당연하게 죽어갈 때 나는 그저 내 몫의 작은 불편을 참아내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고 믿었다. 오늘 하루도 내 삶에 감당할 수 없는 불의가 흘러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그런 삶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거대한 음모를 묵인하며.

그걸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겨우 뼛속 깊이 절감할 수 있었다. 우린 어쩌면 매일 누군가에게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으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세상 어딘가에서 뻔히 벌어지는 이런 불의에 눈 감으며. 어쩔 수 없다며. 심지어 그게 자연스러운 세상의 섭리라며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니네들 뭐…”

먼저 튀어나간 태희의 따귀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남자 하나의 왼쪽뺨을 날렸고 물흐르듯 회전한 왼쪽 주먹이 그 옆 남자의 명치에 꽂혔다. 나도 달려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손날을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의 목에 박아 넣었다. 최현철이 기겁을 하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다른 놈들은 죄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놈의 구속에서 풀려난 여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추스르며 구석으로 기어갔다.

“세영 씨는! 세영 씨는 어딨어!”

“읍! 읍!”

한쪽 구석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세영이었다. 입이 틀어 막히고 팔 다리가 테이프로 칭칭 감긴 채 의자에 묶여 있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세영을 풀어 주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세영은 불꽃이 튀는 눈으로 최현철을 노려보고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다리가 아직 덜 풀린 듯 휘청하며 비틀거렸다. 내가 부축하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세영 씨! 무사했네요. 저 녀석은 우리에게 맡기세요.”

그걸 본 최현철이 소리쳤다.

“아 씨. 뭐야. 너도 능력자였어? 오늘 재수 더럽게 없네. 썅. 이봐요. 같은 능력자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남의 영업장에서 지금 뭐 하는 거야아! 엉!”

놈이 우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거만한 말투와는 달리 발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세영이 노려보자 놈은 억울하다는 듯이 주절거렸다.

“나 진짜 너는 손 하나도 까딱 안 했잖아. 그치? 아 묶어 놓긴 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었고. 진짜 나는 능력자는 안 건드린다니까. 진짜야. 맹세할 게. 맹세.”

놈이 물러나는 방향에는 전기 충격기가 놓인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태희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달려 들어 양쪽 뺨에 따귀를 날린 태희는 쓰러지는 놈의 머릿카락을 움켜쥐고는 질질 끌고 와 방 한 가운데에 던졌다.

“아우. 선생님들.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이게. 나쁜 일이 아니라니까요? 지금 이 영상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그윽!”

어느새 빠져나간 세영이 기어이 놈의 사타구니에 킥을 날렸다. 콰직 하고 두꺼운 열매가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놈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고 꿈틀거렸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발을 치켜드는 세영에게 놈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안 돼! 안 돼요 제발. 난 그 놈하고는 달라요. 구영호 그 자식처럼 사람 안 죽인다고! 그냥 재미만 보는 거예요. 서로. 응? 알았어. 안 그럴께요. 안 한다고. 이제 다시는.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역시 이 녀석과 구영호는 한 패였다. 게다가 사람도 죽인 모양이었다. 사람을 죽여도 아무도 모르는 능력으로. 더 끔찍한 건. 이 녀석들은 그걸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세영은 이 녀석들을 어떻게 잡아낸 걸까.

아무리 그래도. 나는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그냥 지켜 볼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죽는 것보다는 세영이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이 더 끔찍하고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목을 내려 밟아 끝장을 내려는 세영을 내가 붙잡았다.

“세영 씨. 여기까지만. 나머지는 경찰에 넘겨도 되잖아요.”

“경찰? 법이 저 녀석을 처벌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직도 몰라요? 저 녀석이 한 짓. 일반인들은 죄다 당연하게 생각한다구요. 죽을 사람이 죽은 거라고. 그러게 왜 조심하지 않았냐고. 비켜요. 마음 같아서는 매일 한 꺼풀씩 껍질을 벗겨내 소금을 뿌리고 싶지만 꾹 참고 자비를 베푸는 거니까.”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끄윽. 숨죽이고 살테니까. 아니 숨도 안 쉬고 살게요. 제발요!”

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놈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태희가 머리를 짚으며 아까 녀석이 다가갔던 테이블을 뒤집었다. 아랫면에 빨간 색 비상 버튼이 하나 붙어 있었다. 아차 싶었던 나는 얼른 블라인드를 제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무리의 불량배들이 이 건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서너 명은 계단으로 들어선 뒤였다. 그걸 눈치 챈 최현철의 눈빛이 달라지며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히히히. 니네들은 끝났어. 능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지만. 일격이란 건 일단 동작을 성공시켜야 성립하는 거거든. 그치? 과연 저 형님들이 니네들한테 얌전히 처맞아 줄까? 어디 잘 해봐.”

“어떻게 하죠 태희 씨? 도망칠 길이 없어 보이는데. 맞붙어서 승산이 있을까요?”

“없죠. 정면으로는.”

“히히히히. 꼴 좋네. 너무 걱정 마. 죽이진 않을 테니까. 내가 또 같은 능력자는 끔찍하게 아끼잖아. 히히. 어어. 조심해. 니네들 목숨은 내 말 한 마디에 달려 있으니까.”

분하지만 놈의 말이 맞았다. 능력자의 힘은 일격의 효과에서 나오는 것이지 싸움 솜씨가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 자연스럽고 깔끔한 일격 동작을 연습한다고 해도 소설에 나오는 내공같은 게 쌓이진 않았다. 별 다른 무기도 없이 저 많은 덩치들과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 우리가 가진 능력을 백분 활용할 밖에요. 그러면 먼저 저 놈 입을 좀 다물게 만들어야겠는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녀석의 목에 손날을 날렸다. 빠직 소리와 함께 녀석이 피를 토했다. 죽지는 않겠지만 말을 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녀석은 얼굴이 벌개지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그 다음에는요?”

“숨어야죠. 기현 씨만 빼고.”

어리둥절해 하는 나와는 달리 세영은 태희의 계획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둘은 아까 구석으로 도망친 여자 옆으로 가서 함께 바닥에 웅크렸다. 동시에 스튜디오 안으로 열 명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불량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맨 앞으로 나선 건 아까 클럽 입구를 지키고 있던 녀석이었다.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뭐야. 한 놈이야? 한 놈을 못 당해서 이 난리가 나고 우리까지 부른 거야?”

최현철이 필사적으로 끅끅 댔지만 녀석은 비웃음을 날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번개같이 녀석의 목에 손날을 날렸다. 이게 적중하면 저 녀석은 나에게 맞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테니. 하지만 내 공격은 녀석의 두꺼운 팔에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 이미 내 공격을 예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필살기를 꽂아 넣을 무술 실력은 내게 없었다.

“아쭈? 요놈 재주 부리는 거 봐라. 귀엽네 요거.”

“우욱!”

녀석이 날린 주먹이 무겁게 배에 꽂혔다. 숨이 턱 막힌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실실 거리며 쓰러진 나를 붙잡아 올리려던 녀석의 다리 사이로 구둣발 하나가 올라와 박혔다. 세영이었다.

“흐윽! 뭐야. 이거…”

녀석은 신음을 내뱉고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겨우 다시 일어났다. 조폭들이 나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옆으로 물러나며 다음 목표를 노리는 세영을 주목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음으로 내게 달려 들려던 녀석은 태희의 따귀를 맞고 벽으로 날아갔다. 그 다음 녀석은 세영에게 정강이를 걷어 차이고 바닥을 굴렀다. 눈앞에서 뻔히 공격당하는 걸 보면서도 누구 하나 세영과 태희를 붙잡으려 들지 않았다.

“에이 씨. 전부 덤벼!”

남은 조폭들이 동시에 나에게 달려 들었다. 내 손날은 녀석들 중 몇의 어깨와 배와 옆구리를 찔렀지만 목에는 단 하나도 명중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대항을 포기하고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내 위로 쏟아지는 녀석들의 발길질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다.

“일어나요. 기현 씨. 수고했어요.”

성공이었다. 열 명이나 되는 불량배들은 죄다 어디 한 군데씩을 붙잡고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온 몸을 반죽처럼 얻어맞은 나는 태희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세영은 아직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세영 씨 뭐 해요? 얼른 여기서 나가요.”

“먼저 가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세영의 시선은 최현철을 향하고 있었다. 놈은 기겁을 하고는 꿈틀대며 벽 쪽으로 기어가려 애썼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꼭… 죽여야 할까요. 죽일 놈이지만. 그래도…”

“우리를 봤잖아요. 기억할 거고. 깔끔하게 죽여야죠. 싫으면 그냥 가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죽일 가치도 없어요. 다신 우리에게 덤비지 못할 거예요.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면 그땐 정말 죽여 버릴 거니까…”

“아. 답답해.”

세영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놈에게 다가가서는 그대로 목을 짓밟아 버렸다. 놈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사지를 쭉 뻗었다. 세영이 그늘진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말했죠. 죄는 다 내가 안고 간다고. 이게 내 정의에요. 안 대리님이 동의하든 안 하든.”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제 가요. 제발.”

“아직 안 끝났는데요. 저 녀석들.”

세영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까 카메라를 들고 낄낄대며 사진을 찍던 녀석들이었다. 설마. 저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내가 하얗게 질리며 외쳤다.

“그건… 그건 안 돼요! 그렇게 까지는 저도 그냥 두고 볼 순 없어요!”

“전 아직 화가 안 풀렸어요. 제 기준으로는. 아직 정의의 근처까지도 안 갔다구요. 저 쓰레기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야 할 응징이 아직 남았어요.”

지켜 보고 있던 태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직에선 그 정의를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 일은 보고하지 않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한다면 저도 끝까지 보호해 줄 수는 없어요.”

“보호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냥… 태희 씨라고 했죠? 가끔 만나서 맥주나 한 잔 할래요? 말이 좀 통할 거 같아서.”

세영이 반짝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를 볼 때의 그늘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태희도 같은 눈으로 화답했다.

“좋아요. 맥주는 세영 씨가 사요. 전 치킨을 살 테니. 다음에 봐요. 전 이 녀석 좀 챙겨야 겠어요. 생각보다 실하더라고. 맷집이 나쁘지 않아.”

“아우우우우…”

태희가 툭 친 주먹에 온 몸의 고통이 살아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며 신음을 흘려야 했다. 태희에게 끌려 나오며 겨우 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등 뒤에서 죄인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세영에게는 세영의 정의가. 태희에게는 태희의 정의가 있다면. 내게도 나의 정의가 있다. 무엇이 옳을까. 정답은 없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연관된 죽음에 대해 책임지고 싶었다.

“아드님과 관련된 자료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절대 좋은 내용은 아닙니다. 이걸 보신 걸 평생 후회하실 수도 있어요. 아드님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간직하시고 싶다면. 이건 보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아뇨. 알아아죠. 내 아들인데.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그렇게 말하고도 구영호의 어머니는 몇 번이나 봉투에 손을 댔다가 다시 떼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용기를 낸 어머니는 봉투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사진과 자료들을 하나씩 살펴 보았다. 아들이 죽은 이유. 아들이 하고 다닌 짓. 아들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자료를 한 장씩 넘기는 어머니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기어이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낸 어머니는 파래진 얼굴로 겨울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왜. 제가 죄인이죠. 제가 자식을…”

어머니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눈물을 억지로 참는 어머니의 심장에 점점이 가시가 들어 박히는 게 보였다. 내가 말했다.

“아드님을 죽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죄송하지만 드릴 수 없습니다.”

“됐습니다. 그건 알고 싶지 않아요. 제 아들이 더 죄를 짓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리고.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펼쳐진 자료를 다시 그러모아 봉투에 넣었다.

“이건 제가 태우겠습니다.”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죽음도 가벼워서는 안 되고 어떤 생명도 고귀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정의다. 내게 정의는 너무 무겁고 힘겹고 벅차고. 그래서 그저 내 주변을 둘러싼 한 꺼풀의 정의를 짊어지는 게 고작이다. 안전하고 편안하고 평범한 자리에서. 인간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으면서.

지하철을 타고 점과 점 사이의 어둠을 오가며 저녁에 먹을 메뉴를 고민하고 주말까지 남은 시간을 꼽는다. 그러다 가끔 광인을 만날 때나 나는 기꺼이 정의를 구현한다. 이번에 내게 주어진 불의가 너무 무겁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내 심장에 항상 박혀 있는 가시는 세영의 말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좀 부러워요. 멋지게 살 수 있어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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