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거울속난새3.png

* 이 글은 우주최고 안예은님의 명곡 <경우의 수>에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입니다. 노래와 함께 들어주셔도 좋겠어요.

 

절류(折柳): 버드나무를 꺾다

노말시티

 


바람에 올라 탄 꽃잎이 나긋하게 휘어지며 류를 감아 돌았다. 발치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뼘 정도 솟아 오른 꽃잎은 맥없이 넘어가며 그대로 땅 위로 곤두박질쳤다. 무심한 바람이 바닥을 쓸자 꽃잎은 저 멀리 먼지 속으로 굴렀다. 꽃잎을 더듬던 류의 시선이 등 뒤에서 실려 온 목소리에 빙글 떨어졌다.

"어찌 그리 넋을 놓고 있느냐."

"꽃잎을 보고 있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구나."

"꽃잎이 가는 길을 본 것입니다."

연이 류의 옆에 걸터앉아 함께 하늘을 보았다. 제각기 흩날리는 꽃잎을 나른한 시선으로 따라가던 연이 무슨 생각인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류의 눈앞에서 팔랑이던 꽃잎 하나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비스듬히 솟아오르더니 제 집을 찾아가듯 연의 손바닥 위에 천연덕스럽게 내려앉았다. 연이 아이처럼 웃으며 류에게 꽃잎을 내밀었다.

"보아라. 이 꽃잎이 나를 찾아왔구나. 이 길도 보았느냐."

"꽃잎이 제가 본 길을 따라 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공기의 차고 더움과 바람의 주기를 익히면 꽃잎이 가는 길을 그려낼 수는 있습니다만 그 길은 수많은 경우 중 하나일 뿐이지요. 꽃잎이 정말로 그 길을 따라갈 확률은 극히 희박합니다."

"그럼 맞지도 않는 길을 뭐 하러 보고 있는단 말이냐."

"맞지 않는 게 좋아서 그렇습니다."

"대체 왜?"

"제 예상이 맞아서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는 걸 보며 류는 부러 환히 웃었다. 연이 따라 웃을 수밖에 없도록. 연은 걸터앉았던 돌에서 사뿐히 뛰어 일어섰다. 연의 손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이 힘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바람이 차구나. 이만 들어가거라."

바람은 차지 않았다. 류는 바람이 꽃잎대신 연의 옷자락을 흔드는 모습을 양껏 바라보았다.

 


연을 만나기 전에 류의 세상은 선명한 잿빛이었다. 상전의 뜻에 따라 몸을 놀리고 배 곪지 않을 끼니를 얻으면 그만인 천것의 눈에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보여 봐야 제 가슴만 긁어낼 뿐이었다. 바닥보다 더한 최악을 상상하고 그걸 비껴가는 데 안도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언젠가는 오게 될 마지막이 오늘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다 연을 만났다.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사람이었다. 그렇게 들었을 때는 그저 배알이 뒤틀렸다. 발이 접질린 사람을 대신해 고삐꾼으로 나서면서는 어디 그 면상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정작 연의 하얀 얼굴을 보았을 때 류는 저릿한 입가를 억지로 끌어 올려 벼락 맞은 듯 굳어버린 표정을 지워야 했다. 꾸물한 하늘에 눅진 바람이 불었다. 흰자위를 드러내며 연신 앞발로 땅을 긁는 말의 고삐를 류는 단단히 잡고 버티어 섰다. 연이 서늘한 눈빛으로 쏘아 붙였다.

"뭐하는 게냐! 어서 앞서 가지 않고."

"오늘은 아니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어라? 네가 누구기에 내 앞 길을 막는 것이냐."

"비록 지금은 해가 밝으나 바람이 서늘하고 눅눅한 것이 머지않아 동쪽 산마루 너머에서 먹구름이 몰려올 것이옵니다. 또한 이 말은 오늘 뼈마디가 쑤시는데다가 억지로 끌려 나와 기분 또한 좋지 않은지라 비가 오면 필시 난동을 부릴 터이니 이대로 나가시면 행여 횡액을 당하실까 두렵습니다. 그래 아니 가시는 게 좋겠다 말씀드렸습니다."

반쯤은 당황하여 술술 흘러나온 말이었다. 연이 크게 웃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류도 따라 웃었다. 그 사이 고삐를 나꿔챈 연이 홀로 말을 몰고 달려 나가는 모습을 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날 비바람 속을 달리던 연이 낙마하였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면하였다. 대신 고삐꾼 노릇을 하지 못한 류가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드려 맞아야 했다. 만신창이가 된 류가 연에게 불려갔다. 버드나무 가지가 길게 드리워진 정자에 걸터앉아 연은 이제 막 산 그늘 위로 고개를 내미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난동을 부릴 줄 어찌 알았느냐. 비가 올 줄은 또 어찌 알고."

"그저 되는 대로 지껄인 말이었사옵니다. 주제넘은 짓을 하여 연님을 다치시게 하였으니 차마 뵐 면목이 없습니다."

"나는 그리 아프지 않았다. 너는. 많이 아팠느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네가 고초를 겪은 뒤더구나."

류가 고개를 들어 연을 보았다. 달빛에 비친 미소가 해사했다. 두드려 맞은 가슴이 시큰하게 저렸다. 류는 자신이 천한 자리로 태어난 게 유난히 분했다.

"어찌 알았냐 하셨습니까."

류는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꺾었다. 푸르고 싱싱한 잎을 골라 하나씩 떼어내며 류가 말했다.

"지금껏 제게 좋은 일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천지신명께 아무리 빌어 봐야 소용이 없었지요. 하도 억울해 곰곰이 따져 보니 제 처지에 좋은 일이 생길 방도가 애초에 없더란 말입니다. 되지도 않을 일을 빌었던 거지요. 그래 그런 되도 않을 일들을 다 떼어 내고 나니 이렇게. 근심거리만 가득 달린 길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팔자가 꼬일 일을 미리 보는 재주가 좀 생겼지요."

류는 그렇게 말하며 누렇게 뜬 잎만 남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연이 크게 한 번 웃더니 반짝 빛나는 눈으로 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재밌구나. 네 이름을 류라 하여라. 버드나무 류. 내 너를 곁에 두고 좀 웃고 싶구나."

연은 이름을 묻지 않고 류라 불렀다. 류는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귀하다고 하여 인생이 그저 장밋빛이진 않다는 걸 류는 연을 보고 알았다. 세상이 썩었으니 눈 멀고 귀 멀지 않고서야 사는 게 흥이 날 도리가 없었다. 화려하고 요란한 잔치로 제 주위에 비단을 두르거나 독방에 홀로 앉아 깨끗한 옷 입고 고고하게 수발 받으며 살 수 있는 게 가진 자들의 복이었다. 연은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살려 했으나 힘에 부쳐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류를 불렀다.

"죄다 어리석은 놈들뿐이야.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천지 만물의 순리에 따라 사는 게 그다지도 어렵더냐. 생명을 보면 마음이 흡족하고 한 조각 햇살만 받아도 몸이 따뜻해지는 게 인간에게 족한 지복이 아니냔 말이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내 줘야 만물이 순환하여 거침이 없어지는 것이지 어찌하여 들어가지도 않을 목구녕에 시커먼 욕심을 쑤셔 넣느라 칼부림을 해대는지.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구나. 인간이란 죄다 어리석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허나. 너는 어리석지 않구나."

"그렇게 보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취해 기울어진 연의 몸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류의 얼굴이 정말로 붉어졌다. 류의 무릎을 베고 누운 연의 시선에 달아 오른 얼굴이 식지 않았다. 연이 재미있다는 듯 가느다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어떠냐. 이까짓 세상. 다 버리고 나와 함께 도망이라도 가지 않겠느냐."

심장이 턱 하고 막혔다. 단단히 굳은 가슴이 유리처럼 부서져 내릴까 류는 조심스레 심호흡을 했다. 연의 시선을 피하느라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비웠다. 세상이 빙글 돌았으나 야속하게도 흐려지지는 않았다.

"둘이 도망가면. 연님의 수발을 저 혼자 다 들라는 말입니까. 그리 하는 게 제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수발 들 것 없다. 하루는 네가 먹을 것을 구해오고 하루는 내가 불을 지펴 음식을 끓이면 되지 않겠느냐."

"음식을 끓여 본 적이나 있으십니까. 간이 조금만 달라도 수저를 놓으시는 연님의 입맛을 그 손이 어찌 맞추려 하십니까."

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류는 얼른 기다란 미소를 제 얼굴에 올렸다. 책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연의 손가락이 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동안 저릿한 번개가 등을 타고 내려오는 걸 겨우 참아냈다. 연이 말했다.

"류. 네 나이가 나와 같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넌 내게 이리 존대를 하고 나는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던지고 있구나."

"타고 난 자리가 다르지 않습니까. 외려 하도 격 없이 대해 주시니 자주 손발이 황망해집니다."

"너와 내가 다르더냐. 그래. 맞는 말이다. 만일 내가 나처럼 괴팍한 사람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면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가겠지. 네가 먹는 밥을 먹고 네가 신는 신발을 신으라 하면 나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세상만 썩은 것이 아니라 나도 썩었다. 그저 입만 살아서 순리를 떠들었구나. 곁에 있는 사람 하나 공평히 대하지를 못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논하였으니 네가 듣기에 얼마나 한심했겠느냐."

"저야 그 도리가 더 많이 내 놓으라는 것이니 품어 가지기 편하옵니다만 연님은 이미 가진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 도리이니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지요. 행하기 어렵다 하여 그 말마저 바꾸는 사람이 허다하니 연님이 오히려 대단한 것입니다."

"보아라. 세상을 보는 눈은 나보다 네가 더 높지 않느냐. 네가 나 대신 반가의 자제로 태어났다면 그 뜻을 원 없이 펼칠 수 있었을 것을."

"그러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 저를 거두어 이리 대접해 주시니 이 또한 연님이 쌓은 공덕입니다."

"하하하."

연이 웃었다. 연은 류를 곁에 두고 웃고 싶다 했다. 웃었으니 이제 연이 류에게 볼 일은 없었다. 연이 류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다. 오늘은 술이 좀 과했는지 류에게 기대는 몸이 더 바싹 붙었다. 겨우 중심을 잡은 연이 류의 팔을 놓고 혼자 걸었다. 달빛에 옷자락이 출렁였다.

연이 떠날 때마다 류는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빠짐없이 그랬다. 그 예상은 한 번도 빠짐없이 틀렸다. 그러니 오늘도 틀릴 것이다. 류가 상상한 최악의 상황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가 오는 계절에 연을 만나 눈이 오는 계절을 거쳐 계곡의 얼음이 녹을 때까지 류는 연과 다시 만나지 못하는 온갖 경우를 생각했다.

 


꽃잎이 날리는 계절이 되었다. 따뜻한 봄바람에 실려 연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연은 류에게 오기 전부터 술에 취해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연이 하는 말이 하나같이 가벼웠다. 먼지처럼 떠다니는 말들은 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입 꼬리가 버거워 류는 아예 미소 짓는 일도 놓아 버렸다. 연은 웃었으나 웃는 것이 아니었다.

"윤 판서 댁의 경이라고 들어 보았느냐."

"듣다 마다입니까. 소문이 자자한 걸요."

연이 류를 보았다. 류는 맥없는 표정이 떠오를까 두려워 얼굴을 굳혔다. 연의 입술이 멈춰 있는 동안 달그림자가 드리웠다. 연이 겨우 입을 떼었다.

"내겐 과분한 사람이다."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툭 흘러나온 목소리에 서리가 서려있어 류는 깜짝 놀랐다. 류는 황급히 말을 붙였다.

"인물과 학식을 겸비한데다 심성까지 바르다 들었습니다. 그 심성이 거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연님에게야 더할 나위 없는 배필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윤 판서 댁입니다. 연님이 장차 무슨 일을 하시든 든든한 기둥이 되겠지요. 뜻을 펴려 해도 힘이 미치지 않음을 얼마나 원통해 하셨습니까."

"이상하지 않느냐."

"무엇이 이상하십니까."

"아버님이 대체 내 어디를 어여삐 보아 그런 혼처를 마련해 주신단 말이냐. 행여 가문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눈에 가시처럼 여기지 않으셨느냐."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류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입에는 다른 말을 실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혼담이 왜 이리 급작스럽게 오가는지."

"그게 무슨 말이냐."

"대감 어르신께서 아신 게지요. 저 말입니다. 소문이 돌기 전에 싹을 자르시는 겁니다. 그러니 연님이 순순히 받아들일 혼처를 서둘러 마련하셨겠지요."

"내가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십니다."

"너의 뜻도 그러한 것이냐."

"제 뜻이 어찌 중요하십니까."

"류야."

바람이 달빛을 어지러이 흩었다. 류는 그만 쓰러질 것 같아 정자 기둥에 살짝 몸을 기대었다. 류의 머릿속에서 온갖 경우의 수가 뒤섞였다. 이건 아닐 것이다. 이것도 아닐 것이야. 류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상황들을 서둘러 짚어 내느라 분주했다.

"류야. 나는 네가 좋구나."

류의 심장이 덜컹하고 멎었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동안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말을 끄집어 올리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도..."

"진심이다."

연이 말했다. 류가 못 다한 말을 미처 다 끌어 모으기도 전에 연의 입술이 류의 입술을 막았다.

류가 미처 짚어내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바람에 꽃잎이 무수히 날리는 날 연은 경에게 떠났다. 연은 마지막으로 류의 곁에서 웃었다. 류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연이 건넌 다리에서 흘려보냈다. 그날 바람은 그다지 차지 않았다.

댓글 2
  • 위래 20.11.01 05:23 댓글

    잘 봤습니다. 트위터에 짧은 감상을 썼습니다. https://twitter.com/N91211/status/1322635126971326464

  • 위래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0.11.01 08:00 댓글

    감사합니다! 남겨 주신 멋진 감상도 잘 보았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노말시티 절류(折柳): 버드나무를 꺾다2 2020.11.01
pena 위화(衛華)3 2020.11.01
곽재식 이상한 녹정 이야기8 2020.10.31
해망재 원점으로 돌아가 2020.10.09
엄길윤 정신강탈자2 2020.10.01
노말시티 탈피 2020.10.01
곽재식 내 텅빈 마음이 있는 곳에2 2020.09.30
노말시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2020.09.01
전삼혜 지정석 크리티컬 슈퍼스타 2020.09.01
아이 고쿠라에서 J를 2020.08.31
곽재식 차세대 대형 로봇 플랫폼 구축 사업2 2020.08.31
노말시티 정의의 일격 2020.08.01
pilza2 실버 해머 2020.08.01
심너울 달동네에서 온 중력 조절자 2020.08.01
정도경 문어1 2020.08.01
곽재식 통곡왕6 2020.07.31
pena 유령도시의 서점 by pena 2020.07.01
노말시티 접근 한계선 2020.07.01
아이 집을 짓다가2 2020.07.01
곽재식 곰과 대통령과 나8 2020.06.30
Prev 1 2 3 4 5 6 7 8 9 10 ... 44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