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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홍연(紅縺)

2020.12.01 00:0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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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연(紅縺)

갈원경

 

이상도 하지, 이상도 하지.

어째 이 계절에 이렇게 눈이 끝도 없이 내릴까.

하영은 방 안에서 문을 빼꼼 열고 세상을 다 덮어버릴 듯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었다. 이리 눈이 와서야, 이리 눈이 와서야, 오라비가 오는 길이 막히는 게 아닐까. 눈이 내리면 강물도 얼어버리고 그 너른 폭 강을 걸어서 건널 만큼 얼음이 단단히 얼지 않는다면, 배가 뜨지 못하는 너른 강 저편에서 오라비는 소식도 전할 수 없는 집 쪽을 바라보면서 한숨만 쉬고 있는 게 아닐까.

 

오라비가 도읍으로 간 것은 벌써 세 해 전의 일이었다. 수상한 소문이 떠돌던 해였다. 나랏님이 사시는 곳에 벽을 쌓고 집을 지으러 간다고 떠난 사람들이 실은 집을 지으러 간 것이 아니라 사나운 북쪽 오랑캐와 전쟁을 하러 간 거라든가 그 집을 지으려는 터에 살던 지룡이 노해 집 짓는 일꾼들에게 불을 쏘아 대서 남아나는 일꾼이 없다던가 하는.

오라비는 담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집 짓는 재주와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오라비가 잘 하는 거라고는 현이 있는 악기를 켜는 일이었다. 거문고며 가야금이며 해금까지, 현이 있는 거라면 오라비는 꼭 제 손발처럼 금세 익혀선, 예전에 켰던 사람들이 그 악기가 맞냐고 할 정도로 모두들 놀라게 만들곤 했다. 그 재주를 살릴 수 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어미는 그리 한숨을 쉬었고 아비는 사내자식 하나 있는 것이 몸 쓰는 걸 할 줄 몰라서 장가라도 가겠냐며 투덜거렸다. 그 아비는 비가 많이 오던 날에 둑을 고치러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몸 쓰는 일이라면 뭐든 가리질 않는 사람이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집안 먹여살리기엔 끝인데다가 하영이도 제 몸 하나 간수하기가 고작인 몸이니 박복하기가 이를 데 없노라, 어미를 보고 사람들은 그리 말했다.

어미는, 박복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웃었다. 어찌하것소, 박복한 겐지 다복한 겐지 살다보면 답이 나것지. 사람 평생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터인데, 아직 사람 한몫 할 나이도 못 된 것들이 어떤 사람이 될지 어찌 알것소. 그저 지들 서로 다정하고 살가우니 그거면 된 게지. 어미는 바지런하단 말보다는 억척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저 어미에 저 아비 밑에 어째 자식이 저리 났을꼬. 아비가 딴 데서 낳아온 자식이래도 믿겠소. 사람들의 말이 때로 울타리를 넘어 쑥 들어오면 어미는 손사래를 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밥 세 끼 차려 먹였겠소? 당장 엉덩이를 차서 내쫓았지. 이미 없는 아비의 말을 어미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인 듯 말했고 어미가 아쉬웠던 마을 사람들이 앞서 입 험한 사람을 꾸짖곤 했다.

 

“하영아, 촌장 집에 웬 종이짝이 붙어 있는데, 좀 읽어 주련?”

어미의 말에 하영이 길을 나섰다. 언덕에 있는 하영의 집 근처에는 나무도 비만 많이 오면 뿌리를 내고 쓰러지는 곳이라 어미가 일하는 밭도 과수원도 멀리 있었고 볕 잘 드는 곳에 자리잡은 촌장의 집도 가깝지는 않았다. 하영은 어미의 손을 잡고 촌장 집까지 걸었다. 벽에는 다른 곳에서 온 소식이나 나랏님이나 벼슬아치들이 아래로 내린 말들이 붙어 있곤 했는데, 오늘 붙은 종이는 평소보다 퍽 길었다.

“집 짓는 일꾼이 더 필요하대요. 지난번에 간 사람들이 터를 잘 닦아서 새로 오는 사람들은 흙을 잘 다루는 사람이 좋겠다고요.”

“전번에 간 사람들이 언제 온다는 말은 없고?”

“그런 말은 없네요. 전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될 거라고 되어 있긴 해요.”

어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듯 말해도 삼 년이다. 오라비가 잘 있는지 언제쯤 돌아오는지 궁금한 게 하나둘이 아니지만 마을을 떠난 사람들에겐 아무 소식도 없고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말만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40살 아래의 사람이래요. 전에는 25살 아래라 그랬는데.”

“25살 아래 사람 중에 갈 사람은 다 갔지.”

하영은 어미를 보았다. 하영의 표정을 본 어미는 조금 웃더니 하영의 볼을 어루만졌다.

“눈이 내리니 얼굴이 더 꺼칠하네. 옥수수라도 구울까?”

“제가 구울게요.”

어미가 손사래쳤다.

“아서라, 불똥 튈라.”

어미는 앞서 집으로 향했고 하영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눈 때문인지 오가는 사람들이 없는 거리는 해가 떠 있어도 해가 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수확이 끝난 논밭에는 새들만이 떠돌아다녔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늦가을은 사철 중 가장 풍요로운 때라서 여기저기 집 굴뚝에는 연기가 올라오고 사람들은 문을 열고 음식 냄새를 밖으로 풍기며 이웃 누구든 환하게 반기곤 했었다. 적어도 하영이 기억하는 이곳은 그랬다.

 

“걱정 말고 엄니 모시고 기다려. 엄니, 하영이랑 몸 건강하게. 예?”

“네 몸이나 잘 챙겨라. 옷 단디 잘 여며 입고, 덥다고 훌렁훌렁 벗어젖히다 고뿔 걸리거나 하지 말고.”

“예에, 알죠 알죠.”

아비도 없는 집, 구구절절 글을 올리면 부역에서 빠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영이 말했지만 촌장은 그럴 수 있는 일이었으면 처음부터 그런 이들을 빼라고 말이 있었을 것이라 했다. 사람을 모으는 일에는 늘 곤란한 이가 없도록 살피는 것이 나랏님 넓은 뜻이라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다녀오란 말도 했다. 촌장의 두 아들 중 작은아들이 부역에 나갔다. 큰아들은 그해 막 스물여섯이 되었다. 마을에 스물여섯 된 청년이 그렇게나 있는지 하영은 처음 알았다. 씩씩하게 웃으며 오라비와 마을의 청년 여덟이 함께 떠났다. 하영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몸을 돌려 밭으로 향하는 어미를 따라 함께 밭으로 갔다. 오라비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고, 어미가 해가 더 들기 전에 밭으로 향할 것도 아는 사람이었다.

삼 년이나 델고 있을 거면, 편지라도 쓰게 해 줄 것이지.

어미는 그날 오라비의 뒷모습을 더 보고 있을 걸 그랬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해가 지나도 아무 기별이 없다는 말은 몇 번이나 했다. 하영은 오라비가 현을 켤 때의 공기의 떨림을, 사람들의 다채롭던 표정을, 종종 떠올렸다. 현으로 굳은살이 박였던 오라비의 손에는 다른 굳은살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먼 길을 가기에는 가늘어만 보였던 다리는 좀 더 여물었을까. 마을에서 가장 좁던 어깨는 여느 청년처럼 곧게 뻗었을까. 삼 년은 사람들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상상 속의 오라비는 매번 낯선 사람이 되어 하영의 꿈에 나타나곤 했다. 처음 떠날 때와는 너무 다른데도 하영은 꿈에서 한 번도 망설임 없이 오라비의 손을 잡았다. 오라비는 달라진 얼굴로 똑같이 웃었다. 나 왔어. 오라비의 입술이 움직이고, 웃음을 짓고, 오라비의 눈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것을 하영은 꿈에서만 보았다.

 

촌장의 큰아들이 막 걸음마를 뗀 아들을 두고 두 번째 부역길에 오르게 되었다. 백일. 스물아홉이 된 가장들은 백일이면 끝난다는 부역길이라 빠질 도리도 없이 짐을 꾸렸다. 농삿일 적은 겨울이니 백일이면 모를 심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며 아낙들을 달랬다. 하지만 하영도 알았다. 오라비가 떠날 때 누구도 삼 년이 걸릴 거라 하지 않았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부르는 부역이고 기간이 없으니 절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만 했다. 그 길이 삼 년이 되었다. 그들 중에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시 열둘이었다. 나랏님 계신 도읍에 뭔가 큰일이 터진 거라고, 흉한 소식을 전하면 누구도 오지 않으려 할 테니, 물정 없이 성을 쌓는다는 말로 사람들을 모으는 거라고, 마을에는 사람들의 불안한 말들이 글이 되어 떠돌았다.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글이 마을 한가운데 붙었다. 도읍 근처 사람들로 다 못 지을 정도로 큰 성을 왜 쌓는가. 성을 쌓는 것이 맞는가. 부역 간 사람을 돌려보내지도 않고 더 사람을 보내라는 것이 여태 있던 일인가. 모두 다 부역을 보내면 이른 봄 농사는 누가 짓고 지붕은 누가 올리며 아궁이는 누가 고치나. 노인들과 아낙들과 아이들만 남아서 내년 농사는 어쩌라고 이리 눈 내리는 길에 마을 장년들을 모두 데리고 가나.

“저도 갈게요, 어머니.”

하영은 부역길의 출발 전날 밤 어미에게 말했다. 어미는 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표정 많은 어미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다가, 이내 안쓰러운 표정이 얼굴을 덮었다.

“네가 가서 뭐 하려고. 성 쌓을 남자들 모은다는데, 네가 왜.”

“오라버니를 만나고 올게요. 사람들을 따라가면 오라버니가 계신 곳으로 갈 테니까요. 가서 오라버니 잘 계신지 뵙고 올게요.”

“갈 때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간다 쳐도, 올 때는 어찌 오려고. 도읍길이 얼만줄 알고. 신령님이 도우셔서 갈 때는 간다 쳐도, 너 혼자 그 먼 길을 어찌 돌아오려고.”

“공사 맡으신 분께 사정해 볼게요. 어머니와 저 단둘이 사는 집이라, 오라버니가 계셔야 한다고. 나랏님이 이러신 적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사람 하나 쓸 때도 사람 빈 자리 생각하고 거두신다고. 그러니 들어 주실 거에요.”

하영이 어미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영은 아비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지겹게 보며 살았고, 그만큼 제 뜻은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 어미가 두둔하면 더 죄송하다 고개를 숙였고 마을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자리를 피했다. 나랏님이 어떤 마음일지 어미는 몰랐지만 그래도 먼 길을 오라비를 보겠다고 올라온 하영을 보면 혼자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내가 자식 복이 없다고들 했다, 사람들이.”

어미가 말했다.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다고. 그럼 내가 그랬다. 자식 복이 없는지 어떻게 아냐고. 내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될지 당신들이 뭘 아냐고. 그러니까 하영아. 내가 박복한 사람이 되게 하지 마라.”

“네, 어머니.”

어미는 하영과 함께 짐을 꾸렸다. 추운 바람에 바람이 몸에 스밀까 솜을 두둑하게 넣은 겉옷을 챙겼다. 집 밖을 나가는 일이 별로 없어서 여문 옷 여문 신발이 하나 없다고 한숨을 쉬며 밤새워 발목 싸개를 기웠다. 눈길에 미끌어질라 설피도 넉넉히 만들었다. 사람 살피는 게 몸에 밴 아이라 옆 사람들에게 죄다 줘버리지 않을까 하다가도, 그러면 받은 이가 그냥 있지는 않을 테니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눈길을 더 주겠지. 마른 나뭇가지를 짚으로 꽁꽁 엮어서 설피를 엮었다. 낭군이란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숱하게 만들던 설피였다. 손이 매운 사람이라 설피 하나는 참 잘 만들었지. 자식이 제 좋은 건 하나도 안 닮았노라 투덜대던 이였어도 제 자식이 현을 켜면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그 재주가 돈이 되고 쌀이 되기만 했어도 더 예뻐했겠지만. 그래도 제 식구에게 손찌검하는 버릇도 없고, 바깥 여자들에게 눈 돌리는 버릇도 없었다. 그 정도면 된 거라고, 말이 앞서서 늘 험한 말만 쏟아냈어도, 그래도 집사람 하는 말에 혀는 차도 안된다 어깃장은 놓지 않았다. 그 정도면 괜찮은 이였지, 생각하다 피식 웃던 어미를 보고 하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생각 하셨어요?”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설피 신고 걸어본 적이 많이 없어서 어쩌나 했다.”

“단단히 잘 신고 걸을게요. 염려 마셔요.”

“암만.”

어미는 하영이 잠들고도 한참 더 짐에 넣을 것을 꾸리고는 거의 밤을 새워 아침을 맞았다. 하영이 무리 말미에 서고 어미는 무리의 선두에 가서 촌장의 아들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넣었다. 어미가 하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마을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무사히 부역장까지 데리고 가겠노라고, 제 피붙이처럼 챙기겠노라고, 어미가 쥐여주는 주먹밥이며 삶은 먹거리들을 받으며 촌장의 아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이 조금 잦아드나 싶더니 산길로 접어들자 바람이 더해 칼바람이 옷 속으로 스몄다. 눈이 나리니 적어도 눈먼 불은 일지 않겠구나 하영은 생각했다. 날선 바람이 나무를 다그치면 마른 기운에 불꽃이 일다가 큰불로 일어나는 일도 있었다. 기름을 먹인 쓰개옷이 눈을 막아 옷은 젖지 않았지만 바람에 스미는 한기는 예삿 기운이 아니었다. 농사철에는 하던 공사도 멈추는 법이니 겨울이 성을 쌓기에 좋을 수도 있겠지. 한창 바쁜 봄 여름에 장정들을 불러 모을 수는 없을 테니, 백일 겨울 동안 빠르게 성을 지어 올릴 수 있으면, 북쪽의 오랑캐를 막을 단단한 성벽을 올릴 수 있으면, 나랏님의 근심도 덜하고 농삿일도 안심할 수 있겠지. 그래, 그러면 될 터였지.

하지만 오라비가 간 것은 벌써 삼 년 전의 일. 오라비가 없이 어미는 남의 밭을 매었고 남의 모를 내었고 남의 이삭을 거뒀다. 하영은 주인 없는 방에 군불을 때고, 주인 없는 방 모퉁이에 앉아서 오지 않는 오라비를 기다렸다. 오라비의 방에 훈기가 돌아도 오라비가 켜는 현의 떨림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땅을 그리 다져야 했기에. 무슨 성을 쌓기에. 마을 하나 젊은이가 모두 떠난 걸 보면 그런 곳이 한두 곳도 아닐 터인데, 그 긴 세월 동안에 얼마나 큰 성을 쌓기에. 마음에 피어나는 불안을 누르며 하영은 설피를 신은 발에 힘을 주었다.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아야 했다. 삼 년을 참고 기다린 것은 제가 떠나겠다 하면 어미가 그 얼굴 가득 근심을 담을 것이여서. 오라비 없는 빈방에 귀한 장작을 때는 하영을 나무라지도 않은 어미가, 말하지 못하는 모든 근심을 얼굴에 담을 터여서. 그러니 이 길은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아야 하는 길. 오라비를 만나서 이 불안을 모두 거두어서,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러 가는 길.

밤이면 사람들은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 하영은 혼자 보초는 서지 못했지만 늘 편히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가장 말미에 서서 무리의 앞과 거리가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걷고 걸었다. 어미가 마을에서 궂은 일을 앞서서 하는 이였던 까닭에, 오라비의 현에 마음을 쉬지 않은 이가 없던 까닭에, 하영이 손보지 않은 마을의 옷이 없던 까닭에, 사람들은 하영을 제 깜냥만큼 챙겼다. 밥때가 되면 밥을 나눴고, 설피 끈이 느슨해지면 단단히 매어 주었다. 하영은 늘 그래왔듯이 무리 안에서 제 할 일을 먼저 찾아 해 냈고, 사람들의 걸음이 변하면 제일 먼저 눈치채고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 스물아홉 사내 중 한 명이 사흘째 되던 날에 발에 감각이 없어졌을 때, 하영의 발목싸개는 사내의 발싸개가 되었다. 여분으로 갖고 온 설피는 닷새째 낙엽에 미끌어지다 설피를 부러뜨린 이에게 갔다. 그렇게 하영의 것이 모두의 것이 되었으므로 하영을 짐이라 여기는 이는 없었다.

열흘 정도를 걷고 산을 몇 개를 넘어, 눈발이 더이상 날리지 않는 날에 모두는 도읍에 닿았다. 도성 문지기에게 부역 통지를 건네자 그가 모두의 인원을 세고, 하영을 보았다.

“이 아이는 먼저 부역으로 온 이를 만나러 왔습니다. 여기 이름자가 있습니다.”

촌장의 큰아들이 하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지기는 오라비의 이름자를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하영은 문지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지기의 표정이 무슨 뜻인지, 오라비에 대해 뭔가 말을 할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보자, 문지기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미르의 사람인데 어찌 만나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영이 말했다. 문지기가 놀라 촌장의 큰아들을 보았다.

“미르의 사람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아이가, 제 가족을 못 본다는 말씀입니까?”

“…현을 켜는 사람이지, 그렇지 않소? 이 길을 따라 한 번도 옆길로 들지 말고 그대로 곧장 가시오, 도성의 가장 북쪽에 문이 있소. 미르의 사람을 보러 왔다 하면 문을 열어 줄 거요. 문을 나가면 큰 강, 아니 호수가 있을게요.”

“도읍 북쪽에 호수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이제 호수가 있소. 나는 더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소. 아이 혼자 보내기 그러면 누가 같이 함께 가든가.”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하영이 말했다. 하영은 설피를 벗어 메고 온 짐에 묶고 짐을 바투 메고는 문지기를 지나 앞서 걸었다. ‘현을 켜는 사람’이라 했으니 오라비가 맞았다. ‘미르의 사람’이라는 말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오라비라면 하영은 가야 했다. 도읍의 공기는 마을의 공기와 달라서, 눈이 내리는 마을보다도 습기를 머금어 마치 이파리에 물기가 돌기 시작하는 봄날 같았다. 하영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면서 볼끼의 온기가 거북해졌고 하영은 볼끼를 풀어 팔에 감고 계속 걸었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하영을 쳐다보았고 하영의 뒤에는 촌장의 맏아들과 하영 때문에 동상을 면한 스물아홉 된 장정과, 또 하영 때문에 눈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던 장정이 따라 쫓아왔지만 하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영을, 촌장의 맏아들이 막아섰다.

“…가지 말아라, 하영아.”

“오라비를 만나러 왔어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하영아, ‘미르의 사람’이라는 건….”

하영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호수에 갈 거예요. 거기 오라비가 있어요.”

하영이 눈을 뜨자, 촌장의 맏아들이 길을 피해 주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영을, 마을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거리가 생긴 듯 둘러서서 보고 있었다.

도읍은 신기하기도 하지. 아무리 동쪽이래도, 아무리 마을보다 남쪽이래도, 바로 지척에는 눈이 끝없이 오는데 여기는 이리 따뜻할까. 볼끼며 발목싸개며 단단히 여미고 와도 그리 추웠는데, 밤이면 서로서로 바짝 붙어 앉아서 막 시작된 겨울이 왜 이리도 매섭냐고 그랬는데. 이 날씨면 꽃이 피어도 이상하지 않겠네. 어미 좋아하시는 살구꽃이 피어 있어도 그러려니 하겠네. 이런 날에는 동백이 아니라 벚꽃이 피어도 이상치 않겠네.

한참을 허위허위 걸어 북쪽 문에 닿았다. 눈을 피하려 입은 덧옷이 언제 벗겨졌는지 알 수 없었다. 팔목에 감은 볼끼도 이미 없었다. 어쩔까. 어미가 귀한 솜을 꼼꼼히 여며서 만들어준 귀한 것인데, 오라비를 만나고 오라고 밤새워 흐린 눈으로 기운 것인데. 허나 오라비를 만나러 가는 길이 더 급하지. 오라비가 이 문 너머에 있다는데.

“무슨 일이오? 이 문은 귀문이라, 항시 열 수 없는 문임을 모르오?”

북쪽의 문지기가 말했다.

“‘미르의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영이 말했다. 문지기가 놀라 하영을 보았다.

“이 아이는 그 사람의 가족입니다.”

촌장의 맏아들이 말했다. 문지기는 하영을 한 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두툼한 장갑을 낀 손에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포근한 습기가 번졌다. 가마솥 가득 물을 끓이는 정줏간 문을 연 것 같은, 온기가 없다는 점만 빼면 마치 밖에서 실내로 들어서는 문을 연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넓게 펼쳐진 먼 숲 아래에 갑자기, 그 숲과는 전혀 같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호수가, 흰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가며 자리하고 있었다.

이 어디에 오라비가 있을까. 하영은 호수 앞에 섰다. 안개가 부드럽게 퍼지며 하영의 주변을 감쌌다. 따스하다. 오라비가 하영을 토닥일 때, 오라비가 하영의 두 손을 꼬옥 붙들 때, 이렇게 따뜻한 온기가 있었더랬다. 그런데 오라비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문을 열면 오라비가 있을 터인데, 오라비가 있다고 해서 이 문을 열었는데.

“오라비, 오라비!”

하영이 오라비를 불렀다. 어딘가에서 공기가 떨려왔다. 하영이 기억하는 떨림이었다. 오라비가 현을 켜면 이렇게 공기가 떨렸다. 따사롭게 기분 좋게 간질거리는 느낌. 마음 언저리를 어루만지는 떨림. 하영은 고개를 돌리며 오라비를 찾았다, 오라비가 현을 켜고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오라비는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호수 한가운데에 모이고 있었다. 이 떨림이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하영은 치마를 걷어올리고 호수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호숫물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 걷어올린 치마단 끝이 물에 젖을 정도로 걸어 들어갔지만 살갗에 닿는 느낌은 기분 좋게 서늘할 뿐, 초겨울 물 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공기의 떨림은 여전히 호수 한가운데에서 오고 있었고, 물 안에서도 그 흔들림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갔을 때, 호수 한 가운데 안개가 걷혔다. 공기의 떨림이 멈췄다. 호수 한가운데, 떨림이 시작된 곳에, 오라비가 있었다. 처음 보는 감빛 두루마기에 소년처럼 감색 복건을 쓰고, 오라비가 하영을 보았다.

“하영아.”

오라비가 말했다. 아니, 오라비의 모습을 한 것이 말했다.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너는 혼자 돌아가렴. 나는 여기에 살 것이야.”

그것이 말했다. 하영은 뒷걸음질쳐 호수에서 나왔다. 감빛 두루마기에 감색 복건의 그것이 하영에게 다가와, 오라비의 얼굴을 하고 하영에게 부드럽게 웃었다. 오라비의 웃음이었다. 오라비가 하듯이 부드럽고 따뜻한 웃음으로 하영을 보았다. 하지만 오라비는 그렇게 하영을 부르지 않았다. 오라비는,

“오라비는 어디에 있어요?”

하영이 말했다. 그것이 놀라 하영을 보았다.

“……어째서 너는 그렇게 말하지?”

“오라비는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아. 너는 오라비가 아니야. 오라비는 어디에 있어?”

하영이 ‘말했다.’ 그것이 웃었다. 오라비의 웃음이 아닌 웃음을, 오라비의 얼굴로 웃었다.

하영이 털썩, 주저앉았다. 옷에 스민 강물이 돌연 차가워졌다. 이 계절의 온도로 차갑게 하영의 살갗을 때렸다. 안개가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더이상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싸늘한 안개가 하영을 밀어냈다. 하영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오라비의 얼굴이 저기 있는데 오라비가 저기 있지 않으면 어디서 오라비를 찾아야 하나. 한 번도 틀린 적 없었다. 오라비의 현이 만드는 울림을 하영은 언제나 구별할 줄 알았다. 오라비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라고,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그렇게 말해왔다. 어디에 있든 자신은 오라비를 찾을 수 있노라고.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소리를 냈지. 그 아이는.”

그것이 말했다. 하영은 그것을 노려보며 안개에 맞섰다. 이것은 오라비의 손길이 아니니까, 이길 수 있다. 오라비는, 하영에게 글 읽는 것을 가르쳐주고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준 오라비를 찾기 위해서라면, 오라비의 얼굴을 한 저것에게 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게 달라고 했다. 그 재주를 주면, 세상 누구도 두렵지 않을 부를 주겠다 했지. 그런데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를 위한 성을 쌓고 있는 것이. 나를 섬기는 왕을 섬기는 미물이. 그럼 왕이 되겠느냐 했다. 그도 싫다 했다. 한낱 미물이, 제가 섬기는 왕조차도 내게는 하찮은데. 감히, 그 소리가 무엇이기에.”

하영의 등 뒤에 문이 닿았다. 북쪽의 문. 귀문이라 함부로 열 수 없다는 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하영의 등에 닿았다. 이것은 겨울.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겨울의 냉기가 문으로 모여 있었다. 그래서 문지기는 두꺼운 장갑을 껴야 했던 거였다. 겨울에서 벗어난 성 안에서 성밖의 겨울을 만나기 위해서.

[ 오라비는 어떻게 그런 바람을 만들어요?] 

[…?] 

[ 현을 켜면 바람이 바뀌어요. 공기가 바뀌어요. 따뜻하게 여기를, 여기를 간질여요. ]

오라비는 그런 하영에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하영아, 내가 집을 떠났다 돌아올 때면 현을 켤게. 네게 바람이 먼저 닿도록. 오라비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라비와 어미만이 하영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가 느낄 수 있는 게 바람이라면 우리가 그 바람을 만들게. 네가 느낄 수 있는 게 온기라면 우리가 그 따뜻함을 만들지. 하영아. 너에게 우리의 말을 보여줄게. 우리의 마음을 보여줄게. 너의 말이 우리에게 닿도록, 너의 말이 우리의 말이 되도록.

그래서 오라비는 줄 수 없었던 것일까. 내게 약속한 것 때문에. 집으로 돌아올 때 하영이 알 수 있는 바람을 먼저 보내야 해서. 그래서 나랏님보다도 한참이 높은 이가 현의 소리를 내놓으라 했을 때 그럴 수 없다고 했던 것일까.

“오라비, 보고 있어요?”

하영이 말했다. 그것이 피식 웃었다.

“어리석구나. 아이야. 나는 ‘미르’, 물의 용. 세상 모든 물을 다스리는 자. 내게 거슬러 내게 속한 것이 된 네 오라비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오라비가 만드는 바람이 좋았어요. 하지만 오라비가 만드는 거라 좋았던 거예요. 오라비가 웃는 걸 닮아서. 오라비가 날 보는 표정을 닮아서. 그게 어떤 건지 오라비는 모르겠지만, 오라비, 나는, 오라비가 있어서, 어미가 있어서, 그래서 좋았어요. 내가 온 게 오라비의 집이라서, 어미의 집이라서 좋았어.”

아랑곳않고 하영이 말했다. 추위가 파고들었다. 오라비의 얼굴이 차갑게 하영을 보고 있었다. 이 겨울을 만드는 것이 저것이라서, 도읍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겨울은 점점 퍼져서 마을까지 닿아서 그렇게 눈이 계속해서 내렸겠지. 찢어지게 어려운 살림이라 외아들 배필로 고작 병약한 고아밖에 데려올 수 없어서 아비는 계속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머니 아버지를 잃고 제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어미와 오라비는, 아비는, 제 말을 익혀 주었다. 몇 번이고 다시 물어 주었다. 그래서 마을에 온 뒤로 하영은 조금 더 튼튼해졌고,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하영의 말을 익힌 오라비는 하영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고, 어미는 하영과 함께 마을 곳곳을 다녔다. 그래서 하영은, 마을에서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만드는 서로 다른 떨림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의 말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오라비가 그리 만들어주었다. 어미가 그리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각시로 왔지만 너는 내 딸이라고 말했던 어미가 그리 기다리는 오라비를, 데리고 갈 것이다.

“오라비, 오라비, 같이 돌아가요. 현은 평생 켜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오라비만 있으면 나는 다 괜찮으니까, 오라비, 오라비.”

하영이 말했다. ‘그것’이 하영을 보았다. 왜 삼 년이 된 지금에야 그리 눈이 내렸을까. 오라비가 길을 떠난 것이 삼 년 전인데, 물을 부린다는 이것은 왜 삼 년이 되어서야 온 세상에 겨울을, 눈을 뿌렸을까. 도읍 안은 왜 여전히 따스할까.

순간, 공기가 크게 울렸다. 하영이 움찔, 문에 몸을 기댄 순간 성문이 안쪽으로 열리며 하영이 성문 안쪽으로 쓰러졌다.

공기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떨림으로 울었다. 그리고, 성벽 위로 거대한 바위가, 흙무더기가 날았다. 하영은 뒤를 돌아 바위가 날아가기 시작한 곳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투석기 근처에 모여있었다. 촌장의 큰아들이, 마을의 스물아홉살 장정들이, 그리고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한 사람이 하영에게 달려와 하영을 잡아끌었다. 닫힌 눈 너머에서 땅이 울었다. 물이 일렁였다. 하영은 주저앉은 채로 계속해서 날아가는 돌무더기와 흙을 보았다.

“오라비, 오라비!”

하영이 일어나 문에 매달렸다. 냉기가, 얼음 같은 한기가 문에서 스몄다. 문지기가 하영을 뿌리치고 문을 지탱했다. 문이 흔들렸다. 문 너머에서 문을 두드리는 울림이 공기를 울렸다.

 

해가 저물 무렵에야 흙비가 멎었다. 문이 더이상 차갑지 않게 되었을 때, 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하영은 제일 먼저 문 안으로 들어섰다. 호수가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고 거기에는 거대한 흙과 바위가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안개도, 습기도 없이 먼 산 아래에 전쟁처럼 흙무덤이 두엇 쌓여 있을 뿐이었다. 하영에게 사람들은 두 번째 부역을 모은 이가 나랏님이 아니라는 말을, 삼 년을 무엇에 홀린 것 같던 나랏님이, 호수에 관한 일만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걸 전해 주었다. 갑자기 귀문 너머에 성을 쌓아야 하니 도읍 가까운 고장 장정들을 모으라는 명을 내린 일도, 부역 온 이들 중에 유독 그 마을 이들만 돌려보내지 않았던 일도, 갑자기 호수가 생겨났으니 조사를 해야 한다는 관리들의 청에도, 마을에서 온 이는 열둘인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도, 다 하늘의 뜻이니 그대로 두라 했던 것까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했다. 기약 없는 공사에 지친 이들을 위해서 해금을 켰던 소년이 돌연 사라졌던 일은,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숨겨 말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물을 부리는 이라면 흙으로 다스릴 밖에 없다고 한 이는 떠도는 여행자였다고 하는데, 그 여행자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하영에게는 그 무엇이든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되었다. 호수는 사라지고 도읍 안에는 반갑게도 계절다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마을에서 온 이들이 며칠을 호수 자리에 쌓인 흙과 돌을 다져 땅을 다듬는 동안에 하영은 공사터의 일손을 도우며 머물렀다. 사흘 후에 북문 근처 우물에서 한 사람이 물통에 올라왔다며 현을 들고 왔다. 오라비의 해금이었다. 하영은 아무 말 없이 물에 잠겨 다시는 소리를 못 낼 것 같은 현을 꼭 품어 안고,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 산길을 돌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어미는 오라비의 현과 하영을 보고 그저 하영을 끌어안았다. 하영은 소리를 잃은 현을 계속 오라비의 방에 두었다. 날이 차가워지면 군불을 때고 날이 더워지면 문을 활짝 열어 바람길을 냈다. 하영은 늘 그랬듯이 온 마을의 삯바느질을 하고 어미에게 글을 읽어 주고 그리 살았다. 물에 젖은 현은 다시는 울지 못했지만 현의 울림통도 소릿줄도 상하는 법 없이 물에서 빠지기 전과 똑같은 상태로 늘 그 방에 있었다. 어미가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치른 다음날, 하영은 현을 꼭 품에 안은 채로 잠든 듯이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집은 어느 큰물 내린 날에 무너져내려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는데 초겨울 이따금 바람 많은 날이면 집이 있던 곳에서 현의 소리를 듣는 이들이 있었다. 한 번도 원래 소리를 들은 적 없는 이조차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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