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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생명은 별의 씨앗

2020.12.01 00:0012.01

생명은 별의 씨앗

pilza2


자기 나라의 문화재를 머나먼 외국 박물관에서 보게 되는 심정이 어떠한지 아마 그 친구는 모를 거다.
나는 지구 출신 연방 자유민을 딱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다. 직접은 아니고 정보-의식 네트워크 상에서 지나가는 데이터로서 의식을 교환해봤을 뿐인데, 우리는 동향에게 가지는 본능적인 친근감뿐만 아니라 은하계에서 몇 명이 있는지 모를 전설 같은 희귀종이라는 동지의식으로 인해 짧은 시간이나마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생전에 ─지구에서 살던 때를 전생처럼 여기고 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강대국에서 살고 있었으며 식민지로 진출한 조상의 후예라는 자부심에 가득했다. 그러니까 자신도 은하계로, 우주로 진출한 일종의 개척자라는 태도였다.
반면 나로 말하자면 바로 그런 족속들이 개척이란 미명하에 저지른 침략을 당한 식민지 출신이다. 국가의 재산이자 민족의 문화 예술품이 약탈당해 외국의 박물관에서 철통같은 보호 속에 전시되어 있는 광경을 보며 느끼는 안타깝고도 아이러니한 심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뼛속까지 제국주의 사고방식에 물든 그 친구는 자기 나라 박물관에 온통 외국의 문화재가 가득한 광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그렇담 상대를 이해 못한다는 점에서는 피차 마찬가지인가?
지금 문득 그가 생각난 이유는 마치 자연이 만든 거대 전시장 같은 행성 표면에서 낯설지만 반가운, 얼핏 모순적일 수도 있는 이중의 감정을 자아내는 독특한 전시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발단이자 핵심, 그 이름은 〈스카가돈 석상군(石像群)〉이라고 한다.


이미 대기권을 통과하기 전부터 조사가 끝나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육안으로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을 최대한 맛보기 위해 일부러 데이터를 상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할 리가 없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거나 그렇지 않다면 기적에 가까운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임이 분명했다.
기본적으로 행성 표면의 대부분은 황갈색과 암녹색 지층이 켜켜이 쌓인 장대한 계곡이다. 협곡 깊이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강물은 광물 성분이 짙어 옅은 녹색을 띠고 있다. 낮게 깔린 구름이 케이크를 장식한 크림처럼 암석을 감싼 풍경도 보인다.
이런 계곡에 둘러싸인 비교적 평평하고 너른 황무지 위에 길쭉한 물체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바위를 깎아서 만든 석상 같은데 약간 경사가 져서 기울어진 모습이다. 생긴 모습은…… 아무래도 우주선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투박한 외형을 보면 그렇게까지 고도의 문명이 만든 것 같지는 않아도 제법 유선형에 가깝긴 하다.
이런 우주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바닥에 깊이 박힌 자세로 선미를 하늘로 향하고 삐딱하게 서있다. 하나뿐이라면 어느 운 나쁜 우주선이 불시착한 광경이다 싶겠지만 이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놀랍단 말이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황무지 위에 똑같이 생긴 석조 우주선이 동서남북으로 쭉 늘어서 있다.
“선장님.”
브리지에서 나와 함께 이 장관을 구경하던 부관이 말했다.
“파악이 끝났습니다. 석상 하나의 크기는 지면에 돌출된 부위만 따져서 약 140m, 각각 자전축과 적도를 축으로 하여 210m의 간격을 두고 분포되어 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개수는 327개로군요.”
많기도 하다. 똑같은 석상을 300개도 넘게 만들다니, 여기 어디 공장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봤지만 황량한 들판 위에 늘어선 석상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돌과 바위, 모래와 흙만 있었다.
이런 석기시대 수준의 산물을 만들었다면 으레 주위에 늘어선 막사와 수많은 석공들, 나무 수레로 길쭉한 돌을 옮기는 인부들이 남게 마련인데.
이 많은 석상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여기에 꽂아놓았지?
가만히 지켜보면 볼수록 고즈넉하고 조금은 쓸쓸한 풍경이었다. 원래 목적이 어떻든 묘비가 연상되는 심정을 막을 길이 없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삐딱하게 기울어진 길쭉한 석상들. 황량한 행성 한복판에 있는 이름 모를 이들의 공동묘지. 혹은 먼 우주 너머로 떠난 동족들을 기다리는 망부석 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히 우울한 생각에 잠기고 싶진 않았기에 ─특히 그런 내 모습을 부관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고─ 나는 여느 때처럼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흠, 좋아. 일단 이 석상들에게 이름을 붙여야겠어. 최초 발견자의 고유권한이지! 아무렴.”
나는 당당하게 선언하고 옛 기억을 검색했다.
“또 이름입니까…….”
“넌 또 불평이냐? 선장인 나에게?”
쏘아붙이자 부관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표정만으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게 불만이다. 저 녀석은 지금쯤 한심하다거나 참아야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옛 기억 속에서 기울어진 건물을 찾아보니 피사의 사탑이 나왔다. 근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지? 피사가 지명이었던가? 이건 데이터에 없는 건데…….
부관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것도 떠올랐다. 영화와 소설에 나오는 하나의 석상(Monolith). 비록 생긴 것도 의미도 다르지만 어딘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고고하게 서있을 석상의 이미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다만 이쪽은 무수히 많다는 차이가 있지만.
“선장님,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이미 이 행성은 과거 은하 연방에 의해 이미 탐사 및 조사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저것들도 〈스카가돈 석상군〉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유산 등록이 되어 있고요. 즉 선장님은 최초 발견자가 아닙니다.”
“뭐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말도 못 꺼내게 하셨잖습니까. 더구나 선장님의 소소한 즐거움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면 아부인지 조롱인지 분간이 안 가지만 여기선 아량을 베풀어야겠지.
“과연 부관. 특별히 이번만 용서해주지.”
내가 단순한 녀석 같아? 뭐 어때, 유능한 부하를 위해서는 한 수 접어주는 상관이 유능하고 좋은 상사라는 말씀.
“이 거리에선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실은 다른 것들과 전혀 다른 단 한 개의 개체가 별도로 존재합니다. 이 경우는 원본이라고 불려야겠죠.”
326개의 복제품을 만들어낸 원본이 있다고? 그것도 오직 한 개?
“그렇담 당장 찾아봐야지!”
“좀 더 접근하면 구별이 갈 겁니다. 하나만 금속 반응이 있었거든요. 나머지 전부는 규소와 염소, 탄소 성분으로 이루어진 사암질인 반면 원본은 알루미늄, 철, 텅스텐, 구리, 다양한 반도체와 전도체, 플라스틱과 절연체로 이루어진 인공물로 추정됩니다.”
“추정이고 뭐고 한 마디로 진짜 우주선이란 말이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탄 우주선 임라나는 곧바로 원본을 향해 날아갔다. 임라나는 전장(全長) 24m짜리 소형 우주선이라 석상 사이의 공간도 착륙하기에 충분히 넉넉했다.
내려서 우뚝 솟은, 흙먼지에 뒤덮여 멀리에선 구별하기 힘들지만 가까이에선 금속제 우주선임이 분명한, 유일하게 튀는 원본을 보며 감격에 차서 소리쳤다.
“드디어 찾았다! 지구에서 온 우주선!”
우리의 이번 탐사의 목적이자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정도면 아주 수월하게 찾아낸 셈이다.
“이게 지구에서 만들어 보낸 우주선이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딱 보면 전체적으로 지구산이라는 느낌이 오잖아.”
“비논리적인 감정에 호소하시는군요.”
“너는 몰라. 이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지구인의 감성!”
“과학적 방법론을 송두리째 부정하시는 듯한 태도 잘 봤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제 차례겠군요.
표면 재질의 마모 및 방사능 물질의 감쇠량, 우주선(線) 충돌로 인한 선내외 피폭 상태를 확인하면 출발 시기와 비행시간을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항로까지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더구나 그런 조사를 당장 하려고 한다 해도 기술은 다운로드 가능하지만 장비는 조달해야 할 겁니다.
지구에서 만든 우주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는 얘기죠.”
“조사야 간단하지. 눈앞에 실체가 있는데. 뚜껑 열어보고 안에 지구인이 있거나 지구의 언어가 적혀 있거나 하면 확실한 거 아냐?”
“이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볼프립님은 이 우주선의 현황과 위치를 언제 어떻게 다 입수하고 우리에게 제보한 것일까요?”
“원래부터 대단한 친구였어. 능력을 의심할 필요가 없잖아? 여기 이렇게 결과가 있는데.”
“이번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시는군요.”
마땅히 대응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우주선은 이곳에 우연히 왔느냐 노리고 왔느냐는 얘기였다. 나는 단연 후자를 지지했다.
내려서 공기 성분을 조사해보니 산소 함유량이 제법 높고 탄소는 적은 편이었다.
“그 정도로 흡사한가요?”
“상대적으로 중력은 지구보다 약한데 대기 성분은 흡사해. 산소 함유량이 꽤 높고 탄소는 적은 편이지만. 이 정도면 지구 생물이 아무 보조 도구 없이 호흡해도 괜찮을 거야. 온도는 좀 낮군. 눈이나 얼음이 안 보여서 자각을 못했는데 지금 섭씨로 영하 42도네.”
“바람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부관 녀석은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우주선 해치를 끌어안듯 붙잡았다. 다음 순간 파도가 몰아치듯 강풍이 몸을 때렸다. 정말 아무 예고도 조짐도 없는 갑작스런 바람이었다.
몸이 붕 뜨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부관의 몸을 움켜잡았다. 신경이 없는 외부 활동용 육체니까 망정이지 진짜 육체였다면 아픔에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을 거다. 아니지, 부관은 자신의 육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 인공지능이니까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겠다.
부관이란 녀석은 태어난 이후로 아픔, 배고픔, 졸림, 가려움 같은 자잘한 육체의 증상이나 징후를 겪어본 적이 없다. 몸을 갖고 생물로 태어나 은하 연방에 소속되면서 기억을 디지털로 전이한 나 같은 경우라면 이걸 부러워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더 다양한 경험을 가져봤다고 우월함을 느껴야 할지 그냥 차이니까 존중해줘야 할지…….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만 나로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없다. 누구나 강풍이 온몸을 때려대면 마찬가지겠지만.
바람을 맞고 보니 아주 작은 얼음 조각들이 섞여 있음을 알았다. 일종의 우박인 것 같은데 돌이나 금속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단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외피의 파손 상태가 심해지는 바람에 우리는 더 버텨봐야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결국 도망치듯 우주선 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외부 활동을 피할 때라고 봅니다, 선장님.”
“동감이야. 딱 좋은 환경인 줄 알았는데 설마 이렇게 춥고 바람 부는 악천후일 줄 누가 알았냐…….”
“우주선이 추락한 채로 정지된 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추락시 충격으로 인한 고장이나 파손 때문이 아니고?”
“그건 직접 가서 살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고장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 우주선은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가진 행성을 찾아 다녔을 겁니다. 그러다 이 행성을 발견하고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도착한 거겠죠.”
그렇게 말하더니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우주선이 지구에서 왔다는 선장님의 가설이 맞다는 가정하의 이야기지만요.”
안 물어봤거든. 녀석은 내가 태클 걸 틈을 안 준다.
“기껏 목적지에 찾아왔는데 저렇게 멍청하게 다이빙을 해서 피사의 사탑처럼 대가리를 땅속에 처박았단 말이지……. 그런 점에서 지구산이 맞을지도.”
“선장님은 조금쯤 고향의 과학 기술을 신뢰해주시기 바랍니다.”
“뭐야, 뭐가 불만인데? 왜 네가 지구 편을 들어?”
“전 데이터에 입각한 추정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물론 추락시 충격으로 제어 장치가 고장이 나서 저 상태로 몇 백, 몇 천 년이 지난 걸지도 모르죠.
다만 가능성의 하나로 막상 와보니 행성의 실제 환경이 원거리에서의 추정 환경과 달랐다,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 라는 판단을 내렸기에 다음 행동을 유보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겠지만 연료가 바닥이 났거나 땅에 너무 깊이 박혀서 움직일 수 없다든지 하는 문제가 발생해서 행동에 옮기지 못한 거겠죠.”
다음 행동,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저 우주선의 용도와 목적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 지구에서 은하계 중심으로 쏘아 보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멀고 먼 옛날, 멸망 직전 지구인은 최후의 희망을 우주로 보냈다.
그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최소 인원을 먼저 출발시켜 이주 행성을 찾아내게 하는 프론티어 방식, 거대한 우주선 안에 충분한 개체수를 수용하고 사회를 유지하면서 이동하는 세대 우주선 방식, 정자와 난자만 싣고 생존에 적합한 행성에 도착하면 인공 수정으로 후손을 잉태시키는 스타시드 방식. 모두 우주 어딘가에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싶다는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저 우주선의 크기와 외견을 볼 때 세대 우주선은 절대 아니다. 탑승 인원이 20명은 넘기 힘들지 않을까? 냉동시켜서 관에 담아서 쌓는다고 해도 100명은 힘들 거다. 즉 프론티어 아니면 스타시드 둘 중의 하나란 얘기.
그렇담 저 우주선 안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탈출하려고 용을 쓰고 있든지 냉동이 되어 자고 있든지 정자와 난자 상태로 태어날 날을 꿈꾸고 있든지 할 텐데. 역시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우리 기술로도 금속제 우주선 내부를 투시하는 건 힘드니까.
“저런 불명예스러운 불시착 광경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야? 300개의 복제품은 무얼 의미하는 거고?”
“326개입니다. 이에 대한 연방의 과거 조사 자료를 찾았습니다. 오래 전 데이터라서 석상이 약 190개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번에 갱신하면 되는 문제죠.”
“그새 새끼라도 쳤나? 석상끼리 몸이라도 비비면 떨어진 돌가루가 뭉쳐지며 응애 하고 울음을 터뜨리나봐?”
부관은 농담에 낯빛 하나 안 바뀌고 하던 말을 이어갔다.
“이 행성에는 고도의 지능과 뛰어난 감각 및 이를 바탕으로 높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신체를 갖춘 지성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안 그랬으면 석상 번식설이나 행성의 의지설을 믿어야 할 위기에 처했겠지.”
“두 번째는 아직 안 들은 것 같습니다만.”
“웃어주지도 않는 주제에! 말 안 할래.”
“선장님이 원하신다면 웃을 자신은 없지만 흡사한 반응은 보여드리겠습니다.”
“행성이 하나의 생명체라서 자기 몸에 박힌 우주선을 처음엔 이물질로 여기겠지만 이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똑같이 생긴 석상을 알을 낳듯 씀풍씀풍 낳아서 몸을 장식한다…… 뭐 이런 시시한 망상이야.”
부관이 침묵을 지키자 더 부끄러워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반응을 보여준다면서!”
“죄송합니다. 대꾸할 가치가 없는 발언을 무시하는 습관이 들어서.”
“누가 나 몰래 상관을 무시해도 된다는 프로그램이라도 짜 넣었냐?”
“그보다 차라리 외부인이 와서 만들어놓고 떠났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싫어. 그런 사이비 종교는 지구에선 지겨울 정도로 널리 퍼졌거든.”
“제가 괜히 아픈 옛 기억을 건드린 게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요.”
“그건 걱정 마. 감상에 젖기엔 너무 낡은 기억이니까. 그보다 이 날씨가 언제쯤 풀릴지나 좀 알아봐.”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행성의 공전 궤도가 상당히 납작한 타원형이라서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특성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이제 14일만 지나면 바람도 멎고 온도도 올라가서 지구인 정도의 포유동물이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질 것으로 추정됩니다.”
14일쯤이야 잠깐이지! 눈만 감았다 뜨면 그만이다. 육체를 벗어나서 좋은 건 아까 말했듯 배가 고프거나 똥이 마려운 등 자잘하고 번거로운 일들이 다 사라졌다는 점도 있지만 개중의 최고는 원할 때 잠이 들었다 깰 수 있고 그 기간은 정해놓기만 하면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하루도 좋고 10년도 좋고 500년이라도 문제없다. 불면증이니 늦잠이니 잠이 부족하니 이런 건 우리에게 존재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부관만 믿고 우박을 맞아 해진 육체를 창고에 처박아놓고 데이터 상태로 돌아가 바로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부관이 깨워주자 새 육체로 갈아입고 우주선 밖으로 나왔다.
“이럴 수가! 완전 화창하잖아!”
햇볕은 따뜻하고 공기는 맑았다. 지구인이 곧바로 벌거벗고 뛰어놀아도 되는 안락한 환경이었다.
“2주만에 겨울에서 여름이 되다니 아무리 외계 행성이라지만 변화가 너무 심한 거 아냐?”
“단위 변환을 깜박했군요. 선장님에게 익숙한 태양-지구력으로는 600일 정도 지났습니다만. 정확히는 613일 7시간 32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뭐야? 어쩐지! 왜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거짓을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이 행성의 자전 시간으로 14일이란 얘기죠. 지구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느려서 그만큼 낮과 밤도 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름이 지구에서 2년에 맞먹는다 이거야? 지구인이 여기서 산다면 늘 백야 현상을 볼지도 모르겠군.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갑작스레 닥친 새로운 변화 때문에 더는 시간에 대해 신경을 쓰질 못했다.
가볍게 땅이 흔들려서 지진인가 싶었는데 지평선 부근에서 모래먼지가 일어나면서 지각의 일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뾰족한 산은 이내 모래로 흩어져 무너져 내렸고, 산이 있던 자리에는 금속으로 만든 꽃봉오리가 꽃잎 여섯 장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차라리 금속 뱀이 여섯 갈래로 갈라진 입을 벌렸다고 표현해야 더 적절할까. 커다란 목구멍에서 길쭉한 물체가 기어 나왔다. 재질은 돌인데 생김새나 유연한 움직임은 지네를 닮았다. 배율을 높여서 표면을 관찰하면 미세하게 조립한 정교한 석재 기계장치임을 알 수 있고 조종석과 창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길쭉한 차량 뒤에 얹힌 화물은 바로 땅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것과 똑같이 생긴 새로운 석상이었다.
“찾아다닐 수고를 덜었군요. 저들이 이곳 아즈라칸 행성의 지배자인 아즈라크입니다. 인사할 준비를 하시죠, 선장님.”
나는 어쨌든 은하 연방 소속의 우주선 임라나호 선장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솔직히 속마음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들끓고 있었지만 말이다.


원만한 외교 활동을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해 최대한 파악해두는 것이 기본이자 예의인 법. 아즈라칸(이들의 언어로 아즈라크는 사람, 아즈라칸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자 별 자체를 의미)은 이미 연방의 과거 한 차례 조사를 통해 가입 자격을 얻지 못한 중급 수준의 문명으로 등록된 상태였다.
우선 생물학적 특성부터 보자. 성인 아즈라크의 평균키는 7m 정도지만 활동할 때는 허리를 구부리고 배를 접어 바닥에 붙여 아라비아 숫자 ‘2’와 흡사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므로 실제 키는 3m 정도로 보인다. 몸통은 머리, 가슴, 배, 꼬리로 나뉘고 등은 새우와 흡사한 갑각(甲殼)에 싸여 있다. 배에 달린 작은 다리 세 쌍은 이동에 사용하고 가슴에 달린 긴 팔 두 쌍은 물건을 들거나 쥘 수 있다. 머리에는 더듬이, 집게처럼 생긴 커다란 턱, 눈 네 개, 감각기관으로 쓰이는 중요한 기관인 털이 있다.
다음으로 문화적인 특징을 보면 우선 한랭기가 길고 온난기가 짧은 특성 때문인지 지하에서 서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행성 표면이 황량하게 보인 건 속임수고 땅 밑에 거대한 도시와 통로, 농장과 공장이 있다는 얘기다. 저들은 천부적인 목수이자 석공이다. 날카로운 칼이자 끌 역할을 하는 두 개의 턱으로 도구 없이도 물체를 깎고 자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즈라크는 석기 문명을 극도로 발달시킨 종족이 되었다. 돌을 주요한 재료로 써서 건물과 기계, 차량과 무기까지 만들어냈다.
잠시 저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편의상 돌지네라고 부르면 좋을 듯한 길쭉한 차량은 황야 위를 유유히 나아가더니 늘어선 석상 대열의 빈자리에 가서 멈췄다. 거기서 관절을 접어 수축하니 자연스레 가운데 부분이 위로 솟아올랐다. 뒤편에 실은 석상은 그 서슬에 기울어지며 지면에 닿았다. 돌지네의 앞부분에서 인부들이 밖으로 나와 도구를 이용해 땅을 파 석상 끝부분을 꽂고 고정시켰다.
이런 식으로 새끼를 치고 있었군.
우리는 직접 접근할지 저들을 부를지를 놓고 고민하다 연방의 조사 기록을 참조하여 50m까지 접근한 다음 소리가 큰 신호탄을 쏴서 상대에게 우리의 위치를 알렸다. 박쥐 비슷한 날짐승이 날아왔다. 펼친 날개에 비해 몸집은 매우 작고 가까이에서 보니 동물보다 곤충에 가까운 생김새다. 입이 아니라 둥글고 구멍이 잔뜩 난 배에서 소리가 나왔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우리 두뇌에서 즉시 통역되었다.
“너희들 누구? 우주에서 왔습니까? 멀리서 온 마음은 차갑고 뾰족해?”
나는 부관에게 무선통신으로 말했다.
“번역기 성능이 영 개판인데. 뒤로 갈수록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겠다, 야.”
“연방이 조사한 후로 시간이 흘렀습니다. 번역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죠. 저들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개선될 테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쩔 수 없이 나도 번역기를 통해 저들의 언어로 대답했다.
“우리는 우주에서 온 착한 사람들.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친하게 지냅시다.”
“너희들 윈?”
우리는 연방의 지침에 따라 삼각형 머리, 긴 팔 둘과 짧은 다리 넷을 가진 육체를 만들어 입고 윈 종족으로 행세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윈은 은하 연방이 만든 가짜 종족. 아즈라크와 흡사한 외형으로 만든 육체를 입은 연방 조사관들이 아즈라칸에서 육안으로 식별이 되는 이웃 행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만든 거짓 신분이다.
본래 육체가 없는 정보의식 생명체가 지구를 조사할 때 지구인을 속이기 위해 인간과 닮은 녹색 탈을 쓰고 달에서 온 외계인 행세를 한 꼴이라고 비유하면 이해가 빠르려나. 다행히 순박한 아즈라크는 완전히 속아 넘어가서 지금도 이웃 행성에 윈 종족이 살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방은 아즈라크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적어도 이들이 우주선이나 우주 망원경을 만들고 행성 바깥으로 탐사에 나서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윈으로 가장하고 접촉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조언을 남겼다.
“맞아.”
“너희를 환영한다! 우리에게로 오라.”
잠시 말이 없었다. 부관은 이들의 통신방법을 알아냈다.
“두뇌 크기와 행동을 보고 짐작했습니다만 저 생물이 직접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아즈라크가 이 비행생물에게 직접 주파수 5㎒ 안팎의 음파를 보내고 있습니다. 육체 자체가 일종의 무전기 역할을 하고 있군요. 복강(腹腔)을 통해 증폭된 음파가 배에 붙인 스피커를 통해 가청 대역폭으로 출력되는 구조입니다.”
날짐승은 즉시 돌지네로 돌아갔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과연 고도의 석기시대다웠다. 차량의 외견은 물론이고 얼핏 보이는 엔진까지 대부분의 부품은 돌을 깎아서 만들었다. 바퀴가 없는 이유는 초전도체를 깎아 만든 자기부상 차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행성에는 자석이 무진장 널려 있고 이를 이용해 이동한다는 얘기.
우리는 조종실로 들어가 대표자로 보이는 아즈라크를 만났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료에 의하면 웃는 얼굴 같으니 일단 안심했다.
“윈을 만나서 따뜻한 마음! 둥글고 축축하게 땅속으로 가라앉아!”
당최 반갑다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속으로 번역기를 원망하며 우리는 무릎을 꿇고 뒤로 누워 배를 드러내는 인사를 했다. 상대는 목에서 그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리 인사 다름! 옛날 인사는 창자가 뒤틀린다.”
그들이 모두 머리를 땅에 처박는 식으로 인사를 하길래 얼른 따라했다. 시행착오가 이어져서 당황하긴 했으나 그럭저럭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낡은 번역기를 거친 우리의 옛날식 말투와 번역기에는 없는 새로운 낱말이 원활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우주 공용어인 바디 랭귀지까지 동원해서 우리는 윈 행성에서 온 평화로운 사절단이며 추락한 우주선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는 내용을 겨우 이해시켰다. 대표자는 집게 턱을 한참 움직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일한다. 밑에서 화려하게 꾸미고 깊숙하게 생각한다.”
아즈라크의 지성을 너무 높게 평가했나보다. 여기 있는 자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인부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시 노력 끝에 이 일을 하라고 시킨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다행히 무식하긴 해도 성격은 친절한 아즈라크 한 명이 안내해주겠다며 선뜻 나섰다. 우리는 함께 돌지네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꽃봉오리 혹은 뱀의 입이 다시 닫히며 땅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안내한 아즈라크의 이름은 다이세맛이라고 했다. 운이 따랐는지 다이세맛은 착하고 활기차며 매우 수다스러운 젊은이였다. 연방 조사에 의하면 아즈라크는 활동이 적고 은둔을 좋아하는 조용한 종족이라던데. 하여간 우리가 묻거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잠시도 쉬지 않고 온갖 말을 쏟아내는 덕분에 지하를 내려가면서 번역기가 빠르게 개선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기차에서 내려 긴 플랫폼을 지나 돌로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문도 없이 한쪽 면이 완전히 개방된 육면체 상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대편이 지하로 내려가는 거대한 벽면과 거의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 역시 자기부상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창자가 뒤틀리도록 웃었죠. 두 분을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고 싶네요. 할머니도 안 쓰는 고리타분한 말투잖아요. 연극에서나 들어본 적 있는데.”
어느새 ‘고리타분’까지 번역이 될 정도에 이르렀다. 다이세맛 덕분에 창자가 뒤틀린다는 표현이 무척이나 웃기다는 의미란 것도 알았다. 그리고 둥글고 따뜻한 게 착하고 좋은 것이며 뾰족하고 차가운 게 악하고 나쁘다는 의미도 알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에 땅 위에서 살았대요. 늘 춥다가 잠깐 따뜻하니까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어요? 처음엔 산에 굴을 파고 살다가 땅속이 따뜻하고 축축하다는 걸 깨닫고 점점 아래로 깊이 내려가게 된 거죠. 그게 백 년 전의 일이에요.”
이들에게 100년이라면 지구에서 5,000년 정도 흘렀다는 얘기다.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자기부상 문명을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빛이 안 닿는 도시의 풍광은 야경을 닮았다. 그래도 완전한 어둠은 아니고 황갈색 어스름 속에서 수직과 수평으로 이어진 굵은 기둥이 빽빽하게 교차하며 이어져 있다. 기둥은 단순한 파이프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지름 100m가 넘는 일종의 건물이었다. 기둥에 난 무수한 창문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고 외벽에는 긴 도로가 이어져 있어 꼬리를 문 차량과 긴 열차가 기둥의 외벽을 타고 이동했다. 애초에 바퀴가 없는 자기부상 차량에게 중력의 얽매임은 거의 없는 듯이 느껴졌다. 차량은 원통형 건물을 수평으로도 수직으로도 자유로이 이동했으니까. 까마득한 지하에는 빛의 바다가 일렁였다. 자극이 강하지 않은 부드러운 노란색이었다. 액체 같지는 않은데 용암일까.
다이세맛은 우리를 외교 사무국으로 안내했다. 부관의 자료에 따르면 아즈라크는 각각의 도시가 곧 독립된 국가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도시국가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독립된 기구를 두었다고 한다. 다만 은하 연방처럼 개별적인 행성 문명권을 포괄하고 통치하는 상위 개념이 아니라 그저 외교적 마찰이나 무역상의 분쟁을 중재하는 정도의 작은 관청에 불과했다. 그래도 우리가 찾는 종족의 대표에는 제일 걸맞았다.
왜 우리가 아즈라칸의 외교국을 찾아가느냐고? 모든 일은 절차에 맞게 처리해야 하는 법. 다른 종족, 다른 문명과의 충돌을 막고 은하계의 평화 유지를 핵심 가치로 삼는 연방의 일원이라면 더욱 그래야 했다. 아직 까닭은 알아내지 못했으나 수많은 복제품으로 행성 표면을 장식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이상 우주선을 우리 멋대로 함부로 조사해선 안 된다. 연방 규약에도 행성 주인에 대한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가장 높은 이를 ─아즈라크식 표현이라면 위가 아닌 아랫사람이 되겠지만─ 만나 허락을 받고 협조를 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외교관을 만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으나 그저 잠을 잤을 뿐이므로 생략하겠다. 아즈라크는 긴 동면으로 추위를 견뎠던 조상들의 영향으로 일하거나 활동하는 이상으로 잠을 자는 시간이 긴 종족이다. 고도의 문명을 일군 종족 대다수가 부지런한 성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이하다고 할까.
자료를 살펴보니 이들 문화에서는 근무나 학업 중에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보통 자거나 쉬다가 가끔 깨어 일이나 공부를 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사무국 관청 로비에 늘어선 침대에 웅크린 아즈라크들 사이에 누워서 잠을 자다가 근무시간이 되자 담당자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면담시간은 기다린 시간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자기들은 〈스카가돈 석상군〉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나 권한이 없고 요데스라 불리는 종교단체가 관리하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라는 짧고 명료한 답변만을 얻었다.
착할 뿐더러 오지랖까지 넓은 다이세맛의 안내로 우리는 요데스교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에게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어차피 오늘 일해서 앞으로 사흘은 쉴 테니까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게으른데 잘도 먹고 사는구나 싶었다.
요데스는 아즈라크가 숭배하는 유일신으로 모든 이들이 믿는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방의 조사 때와 현재의 종교 상황은 변함이 없는 대신 사회구조가 대폭 바뀐 상태였다. 당시 복수의 도시국가로 나뉘어 각기 집단지도에 의한 대의민주제를 유지했던 아즈라크 문명은 지금 종교 지도자들이 다스리는 제정일치 신권정치 체제를 가진 하나의 국가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정교는 분리하는 편이 좋을 텐데.
다만 의식주를 국가가 제공하는 잘 발달된 사회주의 체제라는 점은 연방의 조사 때와 마찬가지임은 물론이고 훨씬 더 철두철미하게 실천되고 있었다. 종교가 국가를 장악한 대신 교리에 따라 기본적인 의식주는 모두 국가에서 제공해주고 있었기에 아즈라크는 마음껏 게으른 삶을 향유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다이세맛이 일을 하는 이유는 자가용을 마련하고 자식에게 선물을 사주기 위함이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부존자원이 풍족하여 굳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낙천적이고 이타적인 국민성과 교리에 대한 무한한 복종 덕분에 한정된 부를 차지하려는 다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생물학적 특성상 인구증가율이 낮아 자원이 부족해질 가능성도 아직 없었다. 여러 유리한 조건이 맞아떨어진 덕분에 실현된 사회주의 낙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아즈라크는 기본적으로 여성이고 짧은 번식기에만 소수가 남성 역할을 하는 성전환이 발생한다. 이때 알을 최대한 많이 낳아도 부화율은 낮다고 한다. 다이세맛의 경우 지금껏 알 17개를 낳았는데 4개만 부화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셋은 출생 직후 사망하고 지금 자식은 한 명뿐이라나.
예상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종교 지도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오늘은 그저 신전에 가서 면담을 신청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여기 시간으로 무려 닷새나 기다려야 한단다. 만날 잠만 처자면서 귀한 손님은 좀 만나주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은 당연히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신전 관계자가 하는 말이 그래도 윈 종족이니까 특별히 빨리 만나준다며 고마워 하랍신다.
그렇다면 닷새 동안 무엇을 할까. 도로 땅 위로 올라가 우주선에서 잠을 자는 편이 가장 쉽고 빠른 해결책이지만 이왕 방문한 외계문명을 경험하고 싶은 호기심을 달래주지는 못할 터였다.
고민하던 차에 친절한 다이세맛이 또 나섰다.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선뜻 해준 것이다. 우리는 예의상 겸양의 뜻을 표하다가 마지 못하는 척 다이세맛의 집으로 따라갔다.
다이세맛의 집은 아즈라크의 주택 대부분이 그렇듯 석재 기둥 건물 한편에 있는 공동주택이었다. 잘 짜인 천으로 덮인 바닥과 벽, 음식을 담은 커다란 항아리가 가득한 지하실도 구경했다. 고운 모래를 담은 항아리가 놓인 화장실이 인상적이었다. 책은 직물로 만든 두루마리 형태고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는 있으나 TV처럼 영상을 출력하는 기계는 아직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손에 쥐는 작은 크기의 휴대용 음성 재생장치와 애완동물처럼 기르는 날짐승을 통해 멀리 떨어진 상대와도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과학기술을 보유했다.
참고로 다이세맛은 연극을 좋아하여 보기만 할 뿐 아니라 출연도 한단다. 영화나 TV가 없는 사회니만큼 연극과 합창이 인기임은 이해가 가는 반면 육체의 문제인지 무용이나 체조는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하긴 인생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이들에게 뭘 바라랴. 이러한 연극과 합창을 직업으로 삼은 이는 없고 일종의 동호회나 봉사활동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보수는 관람객의 자발적인 선물로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다이세맛의 아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성체가 아닌 아즈라크와 만났다. 아이는 2m 정도 키에 늘 엎드린 자세였는데 아직 외골격이 다 굳지 않아 몸뚱이가 젤리처럼 촉촉하고 보드라우며 짧은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는 귀여운 애벌레였다. 몸은 작고 미숙하지만 정신은 꽤 성숙한지 아이도 엄마만큼 수다스러웠다. 이들 가족 덕분에 번역기의 단어장은 충실해졌고 거의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하고 계신 일은 어떤 거예요?”
나는 우선 다이세맛이 가진 석상군에 대한 지식이라도 최대한 알아내고 싶었기에 식사를 마치고 곧장 잠들 준비를 하는 그를 붙잡고 대화를 청했다.
“만든 석상을 땅 위에 설치하는 일이죠. 전 토지 실측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럼 석상은 여기 지하 어딘가에서 만들고 있는 거로군요?”
“네. 예전에는 장인들이 일일이 돌을 깎아 만들었는데 지금은 거푸집에 골재를 부어 굳혀서 만드니까 시간도 품도 덜 들지요.”
“만드는 목적은 뭡니까?”
“그야 교리에 따른 것이죠.”
종교를 이유로 드는데 더 따질 건덕지도 없었다.
다이세맛을 비롯해 모든 아즈라크가 믿고 따르는 신 요데스는 지핵신(地核神)이라 번역할 수 있다. 그러니까 행성 중심부의 핵을 의인화하여 숭배한다는 얘기다. 지구의 고대 종교에서 태양과 별을 신으로 믿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까.
아즈라크의 세계관에서 세상의 중심은 땅속이다. 이 핵을 중심으로 세상과 우주가 회전을 하는 천동설을 믿고 있다. 따라서 외부 행성에서 온 윈 종족은 이들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온 존재라는 얘기가 된다. 은연중 자신들보다 못한 미천한 종족이라는 인식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일단 아직까지는 다들 친절하게 대하고 있지만…….
“저게 우주선이란 걸 알고 있나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안에 누가 타고 있지는 않잖아요?”
다이세맛이 돌연 네 개의 눈을 번뜩이며 나를 보았다. 원래 위쪽에 있는 두 눈으로만 상대를 마주보고 아래쪽 눈 두 개로는 보지 않는 게 아즈라크 사이의 예의였다. 눈 넷으로 상대를 볼 때는 크게 놀랐거나 화가 났음을 의미한다.
“저 안에 여러분 동료가 타고 있다는 뜻이에요? 윈 종족이 만든 우주선인가요? 과거에 윈 종족은 별 사이에 흐르는 바람을 타고 왔다고 했어요. 여러분이 타고 온 우주선도 그렇게 왔잖아요? 아닌가요?”
“마, 맞아요. 우리 우주선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누군가가 있을 가능성은 있죠. 우린 조사를 하러 왔을 뿐이고, 결정은 위…… 아니 아래에서 합니다. 저건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주로 보낸 우주선인데……”
“우주로 보내요? 무엇 때문에?”
“당시 지구를 지배하던 종족은 멸망 위기였습니다. 뭐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요. 아무튼 그래서 다른 별로 생명을 보내어 후손을 남기려 했죠.”
다이세맛은 턱 가장자리의 잔털을 부르르 떨었다. 고민하거나 혼란스러운 감정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행성 내부가 낙원인 아즈라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발상임이 분명했다. 왜 어둡고 위험한 별 바깥으로 가려는 걸까? 땅속으로 들어가야 밝고 따뜻하고 안락할 텐데?
“아직 추측 단계지만 저 우주선 안에는 지구인이 존재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또한 아래에서 결정하겠죠.”
다만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왜 그렇냐면 전쟁으로 자멸한 종족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규약이 있어서…… 소급적용은 아니지만 지구를 떠난 시기와 우주선 내부의 생명체 탄생 시기를 알아야 대처가 가능하다는 얘기.
소급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지구 출신이지만 연방의 일원인 거다. 따라서 저 우주선이 전쟁 이전에 지구를 떠났다면 승무원들은 구제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 된다면 나는 지구 출신 동료들을 얻게 되는 셈이고.
다이세맛은 턱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어려운 이야기네요. 저 우주선은 추락한 이래 몇 년이나 저 모습 그대로 있었어요. 처음 봤을 때가 눈에 선하네요. 우주선 안에 승무원이 있었다 하더라도 추락할 때 충격으로 죽지 않았을까요? 생존자가 있다면 진작 밖으로 나왔겠죠. 우주선 안에서 아직도 살아 있다니…… 지구인은 우리보다 오래 사는 생물인가요? 그보다 지구인이 아즈라칸에서 생존이 가능할까요?”
“그건 확실해요. 조사해본 결과 지구와 아즈라칸의 자연 환경은 꽤 흡사해요. 겨울이 무지하게 길고 여름이 무척 짧긴 하지만 공기나 중력은 보조기구 없이도 생존이 가능할 정도로 닮았어요.”
“그럼 더더욱 생존자가 없겠네요. 환경이 비슷하다면 진작 밖으로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충격으로 고장이 나서 문조차 열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결국 굶어 죽었을 거예요.”
나는 더 말을 못했다. 어차피 머잖아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이지만 막상 들어간 우주선 내부에 부패한 시신이나 앙상한 해골들이 우리를 맞으리라 생각하니…… 음, 후각기관은 미리 차단해두는 편이 좋겠어.


다이세맛의 집에서 안전하지만 지루한 닷새를 지낸 뒤 나와 부관은 아즈라칸에서 제일 큰 신전에서 고위 사제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육체 표면을 통해 빛에서 직접 전기 에너지를 얻으므로 식사와 화장실이 필요 없다. 즉 누울 수 있는 공간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최고의 손님인 셈인데, 그럼에도 다이세맛은 우리에게 자기네 음식을 대접하지 못해 아쉬운 눈치였다. 우주의 많은 종족은 자신들의 문화, 특히 음식 맛을 최고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가 출연한 연극을 한 편 구경했다는 수확을 얻었다. 우리의 정보-의식 네트워크에 아즈라크의 예술 활동이라는 진귀한 데이터가 추가되었다는 성과가 남았다고 할까. 연극에 함께 출연한 다이세맛의 친구들과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우주를 건너 온 이웃 행성 주민을 반갑게, 속이는 게 미안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긴 기다림 끝에 만난 사제는 갑각에 화려한 문양이 그려져 있고 술이 달린 고급스런 장식을 붙였다. 옷이란 개념이 없는 아즈라크는 이렇게 등딱지에 그림이나 장식으로 직업과 신분, 개성을 드러냈다.
인사와 예의상 나눈 덕담,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거짓 설명을 마친 후 겨우 본론에 들어가자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그 혜성 말이지요. 우리는 혜성의 추락에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혜성이 아니라 우주선인데요.”
내 지적에도 아랑곳없이 사제는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건 요데스께서 올려주신 선물이죠. 하지만 혜성은 땅속에서 온 게 아니라 저 어둡고 추운 세상 바깥에서 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의 선물’. 그게 바로 저 혜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교리문답과 사제단 회의를 거친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신께서 뿌리신 새로운 씨앗이다.’
우리의 문명은 요데스께서 땅속에서 올려주신 겁니다. 식량, 연료, 집 모두가 풍족하게 나오고 있지요. 덕분에 우리는 생존의 역경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요데스께서는 우리에게 미지의 세상, 저 어두운 우주 바깥을 돌아보도록 신호를 보내신 겁니다.”
“그건 여러분 생각일 뿐이죠. 실제로는 지구에서 보낸 우주선이라고요.”
그리고 은하 연방은 이들이 생각하는 수억 배 이상으로 거대하고 발달된 문명이다. 어두운 미지의 세상이라니 실례도 분수가 있지.
사제는 자꾸 내가 자기 말에 토를 다니까 아니꼬운지 네 눈으로 쏘아보다가 더듬이를 문지르고 턱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도 당신들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고 있소이다. 우리가 아즈라칸 내부에서 안주하고 있는 동안 윈 종족이 저 거친 우주를 더 많이 왕래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겠지요.”
뭐지,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자기들이 우주로 진출만 하면 금방 우리와 맞장을 뜰 수 있을 거라는 의미인가?
“우리가 똑같은 모양의 혜성을 만들어 땅에 늘어놓은 이유는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를 향한 답신. 요데스께서 주신 씨앗이 자라나 숲을 이루기를 바라는 기원입니다.”
이게 저 300개 넘는 석상의 진실이었나? 진짜 답답하네. 우주선의 외양만 베낀 돌덩어리를 잔뜩 만들어서 뭘할 수 있다고? 하여간 세상 어디나 종교쟁이들이 문제라니까!
“지금 그 말씀이 혜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의미는 아니겠죠?”
답답만 마음에 속으로만 투덜거리고 있을 때 돌연 부관이 끼어들었다. 사제는 가까운 쪽 눈을 굴려서 부관을 보았다.
“요데스께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죠.”
“하지만 우주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이 뿌린 씨앗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주장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야……”
“만약 저것이 혜성도 씨앗도 아닌 다른 행성에서 다른 목적으로 만든 물체임이 증명된다면, 또한 저 안에 이 행성과 관계가 없는 생명체가 있다면 양쪽 다 당신 종족의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시겠습니까?”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나왔다, 전형적인 발 빼기 발언! 이 사제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설명을 늘어놓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얼른 자기는 결정권자가 아니고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뭐, 나도 잘 쓰는 수법이니까 남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면 결정할 권한이 있는 아즈라크와 만나게 해주십시오.”
부관이 당당하게 나서자 사제는 턱을 떨고 더듬이를 접으며 난처함을 표했다.
“누구 하나가 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모든 사제들의 총의를 모아야 할 문제가 아닐지요. 다음에 열리는 사제단 회의에서 안건으로 다루겠습니다. 비공개로 참석하실 수 있도록 주선해드리지요. 다만 거기서 일어난 일체의 내용에 대해선 함구하셔야 합니다.”
부관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상관인 나에게 결정을 맡긴 것이다. 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일단 회의에 참석해서 그쪽의 의견을 들어보죠.”


역시나 길고 긴 시간이 흘러 우리는 사제단 회의에 윈 종족의 특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사제들 중 일부는 각 도시국가의 수장이기도 했으므로 명실공히 아즈라크의 최고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갑각에 그린 문양과 달린 장식이 너무나 화려해서 패션쇼에 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우주선이 추락한 직후 열린 회의 이후에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 회의였다고 한다. 원리주의 사제들은 요데스가 유일하며 전능한 신이니까 우주선이 여기로 온 것도 신의 뜻이며 따라서 자기네 소유라고 주장했다. 반면 예나 지금이나 소수파인 개혁주의 사제들은 당시부터 줄곧 우주선과 요데스는 관계가 없다고 맞섰다. 그 외에 중립이라 해야 할지 모를 성향의 사제들은 행성 외부의 일은 불가지라며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일단 자신들의 세계 내부로 들어온 존재는 자기네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며 원리주의쪽 손을 들어주었다.
재미있는 건 저들이 우리를 각자 자기들에게 유리한 증인으로 써먹으려 한다는 점이었다. 원리파는 요데스가 가져온 우주선이니 외부인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며 우리를 질책했다. 즉 우주선이 오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우리보다 자기네 신이 더 세니까 뺏긴 놈은 입 다물고 있으란 얘기다. 저들은 종교적인 수사로 고상하고 현란하게 표현했지만 내용의 핵심만 뽑아보면 결국 이런 말이 된다. ‘이게 네 거라고? 내 땅에 들어왔으니 내 거야.’
반면 개혁파는 요데스는 행성 내부만을 주관하는 신이니 행성 외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먼 우주를 자유로이 이동한 우리를 보면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는 대목에선 절로 찬성이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중립파는 우주선이 추락한 사건이 신의 뜻이면 원리파가 옳고 그에 반대되는 증거가 있다면 개혁파가 옳다며 갈팡질팡했다.
참다못한 내가 결국 나섰다.
“조사를 해보면 알 일이죠. 우주선 안에 생존자가 있고 그가 이 행성이나 신과 무관하다면 그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까?”
물론 원리파는 반발했으나 중립파가 내 의견에 손을 들어줘서 결국 조사를 마친 뒤 다시 회의를 통해 최종 결론을 내자는 합의에 이르렀다. 역시나 이번에도 중간에 회의보다 긴 휴식을 취하는 등 쓸데없이 소모된 시간을 생략하면 결과는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겠다.
“제가 파악하기로 총 참석 인원 28명 중에서 원리파가 13, 개혁파가 5, 중립파가 9명인 것 같습니다. 최고 사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알 수가 없지만요.”
회의를 마친 후 부관이 나름의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즉 중립파를 모두 우리 의견에 동조시킬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다는 얘기로군. 것도 아슬아슬하게 말이야. 쉽지 않은 싸움인데.”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두 파벌과 달리 중립파는 굳은 신념이 없어 상황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계속 원리파의 의견을 따르다가 조사를 해보고 결정하자는 선장님의 의견에는 개혁파 쪽으로 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조사 결과가 우리 바람대로 된다면 우주선과 승무원을 연방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고, 자칫 저들이 소유권을 굳히는 결과가 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연방과의 외교 마찰까지 빚어질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이거 꽤나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모든 건 결국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같은 그놈의 우주선 문을 따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서 고민만 하고 있어도 답은 나오지 않는지라 우리는 회의를 마친 즉시 추락한 우주선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사제가 포함된 아즈라크 참관인이 동행해야 된다는 이유로 또 한참 자고 난 다음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아즈라크들은 다들 감시와 감찰이 목적일 뿐 직접 조사에 동참할 기색은 없는 듯했다. 유일하게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통역을 자처하며 따라오는 다이세맛만이 들뜬 기색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주선의 문은 고장 나지 않았다. 그저 열리지 않았을 뿐. 아즈라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이 우주선의 문을 찾아서 열 수 없었던 것이다. 부관에게는 광합성하기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문이 열리자 다이세맛과 의심 많은 원리파 사제 둘만이 우리를 따라 들어왔고 나머지는 우주선 아래에서 기다렸다.
자,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정말로 썩은 시체와 백골이 나뒹굴고 있을까. 일단 열반응이 감지된다. 움직인다. 생명체가 있다!
좁은 복도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고 좌우로는 좀 더 넓은 복도가 이어졌다. 부관이 문 주위를 조사하여 조작 패널을 찾아냈다. 내부 문도 간단하게 열렸다. 다음 순간 사람처럼 보이는 형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께에엑!”
뒤에 있던 아즈라크 사제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긴 지구인을 처음 볼 테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데 어라? 부관이 옆으로 피하자 상대는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닮게 만들어진 로봇이었다. 그것도 부서진 잔해.
으깨진 머리에서 붉은 피가 아니라 기계 부속과 갈색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목구비나 피부 등 전체적인 외모나 옷차림을 보면 마네킹 이상으로 인간과 닮았다.
부관은 몸을 낮추고 잔해를 살펴보았다.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부러졌으며 팔다리도 뽑힌 처참한 모습을 잠시 보더니 이내 일어나 나를 보았다.
“상당히 저급한 성능의 인공 생명체로 보입니다. 이런 수준으로 고도의 지성체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지구인은 꽤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아냐, 이 녀석들은 그저 조종을 담당하는 우주선의 일부에 불과해. 진짜 지구인은 따로 보존되어 있을 거야.”
나는 근거도 없이 변호했다. 지구인 욕은 해도 내가 해야지. 설마 이런 조잡한 로봇을 지구인이 후손으로 삼았을 리는 없어.
문 안쪽은 브리지 혹은 조종실로 보였다. 로봇 하나가 더 있었는데 의자에 앉은 채로 머리를 계기판에 처박은 채 미동도 없었다. 역시나 몸 곳곳이 박살나서 정지된 채 먼지에 덮인 모습이었다.
항행장치가 무사하다면 언제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떤 경로로 왔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조사해볼까 생각하는데 부관의 말에 정신을 그쪽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생명 반응이 감지됩니다. 움직이고 있군요. 산소 호흡, 이산화탄소 배출. 온도 섭씨 약 40도……”
“그건 지구인이잖아!”
나는 깜짝 놀라 부관을 재촉해 추적에 나섰다. 우주선은 거꾸로 바닥에 처박힌 상태라서 경사가 심해 발바닥에 흡착막을 붙여야 이동이 가능했다. 아즈라크는 작은 다리들을 이용해 경사면을 비교적 수월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복도에도 간간이 부서진 로봇이 널브러져 있었다. 전체 구조를 보니 대충 아이를 만들어 기르는 곳, 적당히 자라난 아이가 지내는 곳, 기타 우주선의 제어와 관리를 담당하는 곳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통로와 문에는 고대 지구 언어가 적혀 있었다. 부관이 가리키며 물었다.
“읽으실 수 있겠죠, 선장님?”
“읽는 건 문제가 없는데 흔히 보는 단어는 아닌 것 같아. ……맞아! 이건 신들의 이름이야.”
“신? 그럼 이 우주선도 종교적 목적으로 만든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 지구에는 수많은 신화와 종교가 있었는데 이건 우주선을 만들 때쯤엔 사라진 지 오래된 종교의 신들이거든.”
무슨 의미로 붙인 거냐고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아문, 토트, 메스케네트, 타와레트, 아누비스…… 이름만 알아도 각 방의 목적을 대강 알 수 있어. 각 신에게 상징하는 의미가 있거든.”
이집트 신화에 대한 정보를 전송해주자 부관도 납득한 듯 말했다.
“출산을 주관하는 신의 이름을 딴 방이라면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있겠군요. 죽음의 신 아누비스의 방이라면 출생 전의 실수나 후의 사고 등으로 사망한 시신을 보관하거나 처리하는 용도일 테고요.”
“그렇지.”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어서 우리는 실제로 각 방을 돌아다니며 정말 이름에 어울리는지 어떤지 살펴보았다. 메스케네트는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켜 생명을 잉태하는 공간이고 바스테트는 영아기까지 기르고 돌봐주는 공간이다. 생후 약 1년이 경과하여 언어와 행동이 가능해지면 토트, 마트, 세스헤트 등으로 옮겨져 교육을 받는다. 세르케트는 병든 아이를 돌보는 방이고 아누비스는 죽은 아이를 보관하는 공간이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스타시드 방식의 우주선이었다.
방을 돌아다녀도 생체 반응의 주인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부관 말로는 계속 이동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는데…… 술래잡기도 아니고 어서 나오렴, 응?
개별 방은 육각형 공간이며 복수의 문으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아즈라크 일행과 자연스레 헤어지며 아누비스로 들어갔다. 실험에 실패했든 출생 후 사고로 죽었든 언젠가는 발생할 죽음을 이 우주선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여기에도 로봇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머리가 완전 박살이 났는데 몸은 비교적 멀쩡했다. 냉동 보관소의 서랍을 열어보니 수정을 시켰으나 생명체를 잉태시키지 못한 인공 자궁 몇 개가 보관된 상태였다.
설마 전부 실패했을 리는 없다. 그랬다면 우주선에 로봇과 인간의 씨앗을 실어 보낸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부관의 보고를 봐도 그렇고 특히 실패작이 여기에 있다는 말은 훨씬 더 많은 시도가 있었음을 의미했다. 아직 확인이 안 되어서 그렇지 성공작도 많이 있을 거란 얘기가 된다.
저 로봇들은 비행중 이 행성의 자연조건이 인간 생존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임무는 우주선을 여기까지 몰고 오는 것, 그리고 지구인의 후손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면 그들을 기르고 교육시키는 일까지 포함된다. 아기들을 온갖 지식을 가르치는 TV 앞에 멍하니 앉혀놓기만 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은 이 로봇들이 거의 인간에 필적하는 능력을 갖추었을 거란 얘기다. 부관은 저급하다며 비웃었지만 ─하긴 녀석의 능력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어린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젖을 먹이고 걸음마를 시키고 말을 가르치고 지구의 기억과 지식을 가르쳐 이상적인 지구인의 후손으로 키운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만약 지구인들이 그 정도 능력이 되는 로봇을 만들었다면 연방에서도 무시 못했을 텐데.
그때 두뇌에 위험신호가 들어왔다. 잠시 생각하는 동안 부관이 옆방으로 이동해서 아누비스 안에는 나밖에 없는 때였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머리 부위에 강한 타격이 전해졌다. 신경이 없으니 고통 따위는 없으나 피해상태가 즉시 전해졌다. 갑작스런 충격에 육체가 자동적으로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시각기관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원래 전방위를 볼 수 있는 렌즈여서 공격자의 정체를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한손에 길쭉한 무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 위에서 이어진 긴 전선을 쥔 상대방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알몸에 작은 머리,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씻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짐작이 안 될 정도로 지저분한 피부. 한 마디로 벌거벗은 어린 야만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무례한 후손을 봤나. 족보를 따지고 들면 내가 먼 조상님뻘일 텐데…… 아니, 이젠 내가 지구인이라는 증거는 오래된 기억 데이터밖에 없으니 외계인이라 여겨도 무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기껏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거칠게 대해도 되는 거야?
“선장님 육체에 손상이 생겼다는 신호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대처할까요?”
부관이 두뇌에 직접 연락을 해왔다. 음성으로 대화하면 상대가 알아차릴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 녀석이 우리 언어를 알아들을 것 같진 않지만 일단 소리를 내면 놀라게 할 우려가 있어서 무선통신으로 응답했다.
“이상이 없는지 걱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알고 있습니다. 외피와 시각기관에 경미한 피해가 생겼죠. 두뇌만 무사하다면 문제될 일이 있겠습니까.”
“이런 매정한 녀석 같으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일단 전기나 가스 공격을 가하지는 마. 다치지 않게 사로잡아야 해. 아주 약한 아이니까 조심해서 다루라고. 물리적 공격도 자제해.”
“하지 말라는 얘기뿐이군요. 그럼 어떻게 제압하란 말씀입니까?”
“얘는 지금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내 외모를 살펴보고 있어. 호흡을 안 하니까 죽었다고 여기겠지. 소리를 내지 말고 뒤로 접근해서 양팔을 붙잡고 들어올려. 할 수 있겠지?”
“문제없습니다. 추정 신장 140㎝, 체중 30㎏. 부드러운 외피에 손발톱과 이빨도 약한 편. 무기는 금속제 공구와 이동에 쓰이는 밧줄. 말씀대로 극도로 연약한 생명체입니다.”
부관은 곧바로 살금살금 이동해 뒤에서 다가왔다. 아이는 은색 피부에 키가 크고 다리가 넷인 내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우주선 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만난 사람이라곤 또래 어린애와 사람 분장을 한 로봇밖에 없겠지.
아이가 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부관이 간단히 양팔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아이는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으나 바위를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즉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일단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몽키 스패너였다.
다른 손에 쥔 밧줄은 전선을 꼬아서 만들었고 끝에는 어떤 기계의 부속인 듯한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이걸 이용해서 심하게 기울어진 공간을 이동했다는 얘기다. 과연 지구인의 후예답게 도구를 잘 쓰는군.
“반가워, 꼬마 아가씨.”
지구 말로 인사를 건넸으나 아이는 그저 우워어, 으아앙, 그으으 등 짐승 비슷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애가 인사를 안 받아주네. 아직 예의범절이란 걸 안 배웠나? 아무리 부모 없이 자랐다고 해도 그렇지!”
“그보다 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보시죠.”
데이터를 뒤져서 아는 지구의 언어를 총동원해봤지만 무리였다.
“말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모양입니다.”
부관은 아이가 기진맥진해서 늘어지자 일단 발이 땅에 닿도록 내려놓았다. 얌전해 보였던 아이는 돌연 발을 짓밟으며 도망치려 했으나 무의미한 시도였다. 얘야, 우리에겐 통증이란 감각이 없단다.
나는 모처럼 지구식 훈육을 가르치려는 생각에 무릎 위에 엎드리게 해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몇 대 때린 다음 부관에게 업고 있으라고 시켰다. 아이는 양손으로 부관의 얼굴이며 목을 꼬집고 할퀴며 꿈틀거렸다.
“숲에서 자란 들짐승 같은 아이로구만.”
“아마도 가르쳐야 했을 자들이 저 꼴이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죠.”
부관과 나는 거의 동시에 복도에 널브러진 로봇을 바라보았다.
우린 잠시 말없이 다른 방을 돌아다녔다. 아즈라크들과 합류한 결과 다른 사람이나 로봇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반항하던 아이는 아즈라크를 보더니 처음일 텐데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는지 얼굴이 새파래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안고 어르자 겨우 울음을 그치고 축 늘어졌다. 덕분에 얌전해져서 다행이지만 다이세맛은 끈질기게 아이의 반응이 기쁨인지 슬픔인지를 물어보며 귀찮게 굴었다.
이제 떠오른 의문은 이거다. 이 아이 혼자서 로봇을 다 때려 부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동안 뭘 먹고 지냈는지? 말이 없던 원리파 사제가 모처럼 중얼대며 고민하던 내게 한 마디를 건넸다.
“진실은 본인만이 알고 있을 거요.”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진실도 있는 법이다. 이시스라 이름 붙인 방에 들어간 후에야 절감할 수 있었다. 부엌이나 식료품 저장고가 용도였을 이시스는 지금 만들어질 당시 상상도 못했을 식료품을 다루고 있었다.
오래 전에 인연을 끊었다 해도 동족의 시신을 보는 일은 여전히 심리적인 거부감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부패하고 있는 유기물에 감정이입을 하는 건 인공지능의 관점에서는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반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단순한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자기만족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불순물을 말이다.
부관은 부서진 로봇을 볼 때와 다를 바 없이 시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유아기 지구인의 사체 일부가 뒤섞여 있군요. 일부는 냉동처리되었고 일부는 냉장보관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릇에 담긴 시신 일부는 요리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군요.”
“나도 아니까 굳이 말로 설명해서 불쾌감을 돋우지 말아줄래?”
“지구인도 나름의 문명을 쌓았으니 식인 풍습에 대한 금지나 거부감이 있겠죠?”
“당연하지.”
“그럼 답은 간단하군요. 이 아이는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이고, 비상시를 대비해 선내에 비축한 식량은 오래지 않아 다 떨어졌을 겁니다. 원래 임시로 육아기에만 여기서 지내고 곧 밖으로 내보낼 목적이었으니까요.”
“추락과 함께 고장이 나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니까 먹을 게 떨어진 아이가 이런 참극을 일으켰단 말이야?”
“이미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우주선은 큰 이상 없습니다. 문도 열리고 운행도 가능했죠. 행성 표면의 경도는 우주선을 파손시킬 정도로 높지 않습니다. 땅에 파묻힌 부분도 외부만 일부 파손되었을 뿐 작동엔 이상이 없고요.”
“그럼 왜 삐딱하게 땅에 꽂힌 채로 긴 세월을 보낸 걸까?”
“답을 아는 유일한 상대에게 의사소통 능력이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죠. 일단 블랙박스를 조사해보겠습니다. 연방 표준 포맷이 아니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래, 저급한 문명의 기술이니까?”
빈정대듯 쏘아붙였지만 부관은 아이를 내게 넘기고 도망치듯 조종실로 가버렸다. 나는 양팔로 아이를 안아들고 꺼림칙한 이시스를 나왔다.
토트는 일종의 학교에 해당하는 방이었다. 유치원을 닮은 내부공간은 바닥이 푹신하고 벽과 천장이 거대한 모니터 역할을 했다. 작동방법만 알아내면 내가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지도……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육아에 소모할 시간은 없다. 한시바삐 회의를 재개시켜서 저 속 터지게 느릿느릿한 아즈라크 사제들에게서 우주선과 생존자의 소유권을 넘겨받는 일이 급선무 아닌가.
문득 이 아이를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된다면 내가 가진 지식과 정보, 기억을 단숨에 전달할 수 있다. 지구인이라면 수십, 수백 년 걸릴 교육을 몇 분 만에 끝낼 수 있을 거다.
물론 결정권은 나에게 없다. 이 아이는 연방에서 거부당한 종족의 후예. 나를 포함해 먼저 지구를 탈출한 운좋은 몇 명을 제외하면, 전쟁으로 자멸한 부도덕한 지구인은 연방 가입이 불가하다는 결론이 나오겠지.
일단 아이를 기울어진 소파 팔걸이 위에 앉혔으나 기운을 차렸는지 앙탈을 부려대서 양 발목을 붙잡아야만 했다.
“너 이름이 뭐니? 언제 태어났어?”
애초에 들을 거란 기대도 없는 물음이었다. 돌아온 건 얼굴을 할퀴는 손톱 공격뿐. 아무렇게나 이빨로 물어뜯은 들쭉날쭉한 손톱이었다.
부관이 돌아와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항해를 재개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우주선은 부관의 추측대로 파손된 게 아니었다. 블랙박스 및 선내 녹화영상 등을 찾아본 결과 이유가 드러났다.
우주선의 이름은 〈태양의 돛단배〉호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가 은하수와 사후세계를 이동하며 탄 배에게서 딴 이름이다. 인류의 후손을 다른 별에 정착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스타시드 우주선으로 냉동보존된 정자와 난자, 이를 수정 및 배양시키는 인공자궁 등의 설비는 물론 직접 살펴본 대로 출생한 태아를 기르고 교육시킬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었다. 우주선을 조종하고 모든 시설을 관리하는 역할은 인간과 닮게 만든 로봇이 맡았다. 굳이 인간처럼 생긴 이유는 태어날 아이들이 거부감 없이 유사 부모로 여기고 자라날 수 있기 위함이었다.
〈태양의 돛단배〉는 이 행성 아즈라칸을 발견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우리의 생각대로 그들은 이곳이 지구인도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짧은 온난기가 끝나고 긴 한랭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갑작스런 우박 폭풍을 맞아 지금과 같은 꼴사나운 모습으로 불시착한 우주선은 이 상태로 한랭기를 보낸 뒤 다른 행성을 찾아 재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선내에 보관해둔 정자와 난자가 인공 자궁에 착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우주선은 아즈라칸에 착륙 및 정착 결정을 내렸고 그에 따라 자동적으로 아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로봇에게는 인간의 출생을 막거나 태어난 아기를 제거할 권한이 없었다. 그들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고 만들어진 존재. 인간에게 충성하고 복종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로봇은 황급히 정착 계획을 취소하고 태아 생산을 정지시켰으나 이미 착상된 아이만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아즈라칸에 불시착한 〈태양의 돛단배〉 안에서 6명이 태어났다. 로봇은 최선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본래는 열 살까지 선내에서 교육을 한 뒤 행성으로 내보낼 계획이지만 아즈라칸의 환경에서 가능할지 로봇도 확신하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상태로 5년 정도 지났다. 심하게 기울어진데다가 비좁은 공간에서 살아가며 본능적인 불안과 애정 결핍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로봇의 단순 반복적인 육아를 견디지 못하고 반항을 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우주선 밖에 너른 세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로봇에게 나가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거절당하자 결국 로봇을 공격하여 때려 부쉈다. 선내에서만 활동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에게 공격은 물론 방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아이들이 뒷일을 생각조차 안 했음은 명백한 사실. 로봇이 없으니 우주선을 조종하기는커녕 출입문을 여는 방법도 몰라서 갇힌 상태로 몇 년을 더 보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예닐곱 살의 아이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상상하긴 힘들다. 다만 우연히 사고로 한 아이가 죽자 우주선은 자동으로 아이를 한 명 생산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시험 삼아 가장 어린 이 아이를 폭행했고 그가 숨지자 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전혀 교육되지 않고 평균수명이 10살도 안 될 정도로 극도로 짧은, 구성원 6명으로 이루어진 야만사회가 이루어진 셈이다.
저장해둔 식료품이 다 떨어졌고 합성음식을 만드는 기계가 비치되어 있었으나 이들의 지능으로는 작동시킬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연스레 가장 약한 아이를 식량으로 삼았다. 그조차 귀찮아지자 새로 태어나는 아이를 잡아먹는 흐름이 이어졌다.
이런 사회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이유 모를 질병으로 전원이 사망하여 다시 태아 6명으로 시작된 때도 있었고, 둘이서 힘을 합쳐 오래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봐야 10년 이상 생존한 경우를 찾기 힘들었다.
이런 식으로 〈태양의 돛단배〉는 아즈라칸에서 태양-지구력으로 몇 백 년을 보냈다. 아즈라크가 주위에 닮은꼴 석상을 잔뜩 세우는 것도 모른 채 내부에선 어린 아이들이 펼치는 야만과 야생의 왕국이 수십 수백 년 동안 중간에 수차례 대가 끊어지면서도 끈질기게 6명을 유지하며 이어져 왔다.
그 와중에 기적적으로 지금 이 아이가 살아남았다. 이 시기 5명은 비교적 사이가 좋았고 불완전하게나마 합성음식을 만드는 법을 익혔으나 양과 맛, 영양분 모두 만족스럽지 않자 여섯 번째 아기를 적절하게 살찌운 뒤 잡아먹으며 지냈다. 이는 그들 사이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는 일종의 종교적 의식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태어난 한 아이는 아기 때부터 동물적인 본능과 비상하게 빠른 눈치로 먹지 않으면 먹히는 운명에 처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는 살을 찌우기 위해 주는 사료 같은 맛없는 음식을 먹고 자랐다. 어느 날 다른 아이들이 잘 때 몰래 주은 쇳조각으로 발목에 묶인 줄을 끊고 탈출했다. 이 좁은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공격이 최선의 수단이었다. 자신보다 덩치도 크고 머리도 좋은 상대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기습 뿐. 결과적으로 이 아이가 이 전쟁의 유일한 승리자이자 생존자가 되었다.
이후 태어나는 아기 5명은 즉시 잡아먹었다.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살을 찌우니 뭐니 하며 상대에게 힘을 키울 틈을 줘선 안 된다는 사실을 터득한 것이다. 이렇게 이 아이는 8년을 살았다.
“새로이 알아낸 사실이라도 있습니까?”
부관이 물었다. 한때 인류의 일원으로써 이 짧고 비극적인 〈태양의 돛단배〉의 역사에 잠시 애도를 보냈지만, 부관에게 침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 때문에 억지로 뻔한 레퍼토리를 끄집어냈다.
“이 아이에게 붙일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지. 잠깐! 너 또 날 한심하다는 듯이 보려고 했지? 얘와 처음 만난 것도 나고 형식상 보호자도 나야. 엄연히 나에게 명명의 권리가 있단 말이지.”
“알겠습니다. 알았으니까 얼른 이름이나 붙이시죠. 저도 선장님을 따라 이애, 그애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적당한 이름이 없어서 껄끄럽던 차였습니다.”
“〈태양의 돛단배〉는 이름부터 내부 선실까지 이집트 신화에서 따서 붙였어. 그렇다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이 아이에게는 유대교 신화에서 따온 이름을 붙여줘야지. 마침 이집트가 싫어서 탈출한 유명한 사람이 있거든. ‘모세’라고 하는데, 어때?”
“어떤 과정으로 생겨난 이름인지 딱히 알고 싶지 않습니다만, 저야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부를 이름만 있으면.”
“좋아, 네 이름은 모세야. 마음에 안 들지? 네가 좀 더 크면 스스로 마음에 드는 이름을 붙이렴. 그때까지는 내가 보호자니까 내 맘대로 할 거야.”
나는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모세에게 말했다. 이젠 한쪽 손목만 살짝 잡고 있어도 되었다.
“것보다 그, 모세를 아즈라칸에선 어떻게 생각할까요?”
“신이 보낸 씨앗이라고 여기겠지, 뭐.”
“소유권을 주장할 것 같습니까?”
“싸워봐야지. 그래도 말은 통하는 지성체니까 잘 설득해보는 수밖에.”


우리가 모세를 데리고 돌아가자 즉시 사제단 회의가 재개되었다. 아즈라크치고는 ‘즉시’라는 말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제법 빠른 대응이었다. 연방에서라면 늦장 대응이라며 적잖은 관료들이 문책을 당하고도 남을 수준이지만.
덕분에 딱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모세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급한 대로 거친 성질을 좀 죽여서 회의에 참석시켜도 괜찮을 정도로 교육시킬 수 있었다는 정도랄까. 다만 아직 말을 가르칠 여유는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예상대로 그들은 자기네 별에 찾아온 불청객을 호의적으로 대하려 들지 않았다. 지성체는 무슨, 책상 위에 금을 그어놓고 넘어간 지우개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애들 수준의 지성인데.
이런 자들을 설득한다니 너무 안일하고 낙관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사실 달리 아무 대책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라고는 몰래 데리고 도망치는 길밖에 없었다. 아직 아즈라크는 자기네 행성 대기권 위로 올라갈 기술과 능력이 없으니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고. 자기부상 기술은 은하권에서도 수준급이겠지만 천혜의 재료가 즐비한 덕분이지 스스로의 능력으로 바퀴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만들어낸 건 아니었다.
애초부터 원리파는 우주선 안에 누가 있든 없든 계속 소유권을 주장해왔으니 설득의 대상이 아니었고, 행성과 우주를 명백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개혁파는 이 행성의 어떤 생물과도 닮지 않은 지구인 아이는 연방에 맡기는 편이 낫다며 우리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문제는 이 중립파에 속하는 사제들인데, 이 아이가 요데스의 뜻으로 여기에 왔느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며 하나의 의견으로 뭉쳐지지 못했다. 사실상 중립파는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원리파도 개혁파도 아닌 나머지 이들을 편의상 뭉뚱그렸을 뿐인지라 통일된 견해는 없었다. 다섯을 개혁파로 끌어들였으나 여전히 원리파에게 셋이 밀리는 상태. 남은 넷이 문제였다.
그래도 아즈라크는 성급하고 단순히 다수결로 정하는 종족은 아니었다. 끝까지 토론하고 반대의견을 들었다. 대신 최종 결정은 지금껏 한 마디도 안 한 최고 사제가 내렸다. 사실상 다수결에 반하는 판결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요식행위이긴 했지만 어쨌든 절차가 그랬다.
긴 침묵을 지키던 최고 사제가 자신의 발언권을 행사했다. 격론을 벌이던 사제들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최고 사제는 아이를 업은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외곽에 나이테가 짙게 새겨진 커다란 눈 네 개가 연륜과 지혜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 생존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가?”
“아뇨, 없습니다. 지적인 능력도 떨어지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언어능력도 갖추지 못했죠.”
대답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긴 했어도 금방 들킬 게 빤한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사안은 명백합니다, 최고 사제님.”
그때 부관이 입을 열었다. 사제들은 감히 먼저 말을 거는 무례한 외계인을 네 눈으로 쏘아보았으나 차마 나서진 못하고 도둑놈 개 쫓듯이 사나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네 개의 구슬처럼 동그랗고 빛나는 눈은 꽤나 위협적으로 보였다. 아즈라크에게 눈에서 광선을 쏘거나 염력을 발동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모세는 지구에서 나고 자란 지구인과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동일합니다. 원하시면 증거 자료를 드리죠. 이 아이의 생체 조건으로는 여기 아즈라칸에서 장기간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대기와 중력은 적합하지만 온도가 낮은 기간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지요. 먹을 수 있는 식량도 부족합니다. 여러분이 드시는 음식은 맛과 영양의 균형 측면에서 지구인에게 적합하지 않아요.
요데스의 사제인 여러분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요데스는 여러분에게 알맞은 안락한 환경을 제공해주셨다는 사실을요. 그렇다면 왜 요데스가 굳이 여기서 살기 적합하지 않은 생물을 데려왔을까요?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부관답게 논리적인 발언이었다. 약간의 술렁임이 사제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나 발언을 마치지 않은 최고 사제의 눈치를 보느라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듯했다.
“모세가 이 행성에서 살아야 한다면 저 우주선 밖을 나가지 못할 겁니다. 먹을 식량은 우주선이 계속 만들어내는 동족의 시체밖에는 없어요. 여러분도 은하계 어디와 비해서 뒤지지 않을 발달된 문명과 우수한 문화를 갖춘 종족입니다. 동족을 잡아먹고 살아가는 생명을 용인하실 수 있겠습니까?”
부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즈라크는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다. 연방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종족 특유의 자부심이 있다. 독실한 종교를 가졌고 동족 살해를 금지하는 윤리와 법률을 갖추고 있다.
“일부 원리주의 사제께서는 우주선이 신의 뜻으로 이곳에 왔다고 주장하십니다만, 이렇게 모세가 내부에서 고통을 당하며 비윤리적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자애로운 요데스께서 모세의 고통스런 삶을 허락하실까요?”
신의 권위까지 끌어들이는데 신앙심 깊은 사제들이 반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부관의 목적은 분명했다. 최고 사제를 설득시키는 일이다. 무슨 말을 하든 원리파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다수결에서 지더라도 종교의 상징이며 신의 대리인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부관의 발언은 상당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최고 사제가 〈태양의 돛단배〉와 모세를 신의 뜻이자 자신들의 것으로 선언한다면 곧 요데스가 모세의 고통스런 삶을 조장했다는 결론이 되고 만다. 사제들 중에는 외계인 아이 하나쯤이라고 여길 몰인정한 아즈라크도 있을지 모르지만 과연 최고 사제가 그런 부류일까? 부관은 그렇지 않다는 데에 가진 패를 모두 걸고 도박을 한 셈이었다.
마침내 최고 사제는 보석으로 장식한 끌 비슷하게 생긴 도구를 치켜들며 선언했다.
“요데스는 우리에게 사랑과 따뜻함을 올려주시는 분이다. 그 사랑이 땅 안과 밖에서 다를 리가 없다. 우리 사는 별의 안과 밖에서도 다르지 않으리라. 따라서 우리는 요데스께서 우리에게 그러셨듯 이 외계종족 아이에게도 똑같이 사랑과 따뜻함을 주어야만 한다. 모세 또한 신이 올린 씨앗이니 따뜻하게 자라나야만 한다. 허나 모세는 어리고 의사를 전달할 능력이 없으며 우리 또한 모세가 속한 종족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따라서 요데스의 대리인인 최고 사제의 이름으로 선언하노라. 무엇이 모세가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길인지 윈에서 온 두 사자(使者)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다. 이들은 뛰어난 지식을 가졌고 우리보다 모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둘에게 모세와 〈태양의 돛단배〉를 맡기되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는지를 우리가 확인할 것이니라.”
판결이 내려지자 사제들은 언제 논쟁을 했냐는 듯 곧바로 순종했다. 유일신 종교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까. 신의 대리인이 하는 말이니 토를 달 생각도 못하는 거다. 지금처럼 옳은 판단이라면 좋겠지만 그게 사악한 의도와 탐욕을 위한 결정이라면? 여태껏 용케도 이런 느슨한 제정일치 사회주의 낙원이 유지되고 있군. 우리야 아즈라크 사회를 조사하러 온 게 아니니까 더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의 목적은 이뤘다. 〈태양의 돛단배〉와 모세 수거에 성공했으니 됐다. 한시바삐 여길 빠져나가자.
회의를 마치자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턱이 유달리 발달한 호위병이 가로막았다.
그 뒤로 사제 몇 명이 다가왔다.
“어딜 가려고 그러나?”
“회의 끝났잖아요? 더 머물 필요도 없으니 곧바로 떠나겠어요.”
“가다니, 어딜! 최고 사제님의 판결을 못 들었나?”
“들었으니까 가려는 거잖아요!”
뭔가 제대로 대화가 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짜증이 확 치밀었다. 사제들도 답답하다는 듯 더듬이를 휘둘렀다.
“너희들은 그 아이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줄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이 별을 떠나겠다는 거 아녜요.”
“그건 안 돼. 너희들은 이 별 안에서 그 아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해. 그게 최고 사제님의 결정이야.”
“거짓말!”
돌아보니 부관도 허를 찔렸다는 듯이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이건 해석의 문제입니다. 모세를 우리에게 맡기되 자신들이 확인하겠다고 했으니……”
그랬나? 아까 괜히 좋아했잖아! 최고 사제의 생각도 원리주의자들의 의견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가?
간단히 해피 엔딩을 맞이하긴 글렀군.
나는 입을 다물고 부관에게 무선으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들고 튀자.”
“쉽지 않을 겁니다.”
“우주선은 버리고 모세만 데리고 임라나로 도망치면 돼.”
“원래 저희 목적은 우주선 수거일 텐데요.”
“걱정 마. 이렇게 행성 안에 무사히 수거되었잖아. 얘네들 표현으로는 씨앗이 되어 뿌려진 거지. 벌써 싹도 어마어마하게 틔웠는데 뭘.”
부관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달리 해답이 없다는 결론은 녀석도 이미 내렸을 터다. 몸에서 긴 촉수를 하나 뽑고 끝에 전기 충격기를 가동시켜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생명의 위험 없이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을지 계산했다. 나름 숨 막히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 사이에 나섰다.
“그들을 보내주세요.”
익숙한 목소리라서 돌아보니 〈태양의 돛단배〉 내부로 따라 들어왔던 원리파 사제였다.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우리를 감시하던 그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 편을 들다니, 적응이 안 되는데.
다른 사제들도 당연히 반발하자 그는 모세를 가리켰다.
“최고 사제님께선 이 아이를 씨앗이라 칭하셨습니다. 씨앗에겐 나고 자라날 권리가 있지요. 나는 직접 그 우주선 안과 이 아이를 보고 깨달았던 겁니다. 이 씨앗은 잘못 뿌려졌다는 사실을요.”
“잘못? 설마 요데스께서 잘못을 저지르셨다는 의미요? 감히 사제가 할 소리인가?”
한 사제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는 더듬이를 흔들어 부정의 뜻을 표했다.
“제 발언을 이해 못하셨군요. 요데스께서 여기 두 사람을 보내신 겁니다. 모르시겠어요? 우리가 받은 선물은 우주선이지 이 아이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애로운 요데스께서 윈 종족을 보내어 잘못 보내진 지구 아이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려 하신 겁니다. 당신이야말로 사제라면 신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십시오.”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사제들은 턱을 닫았고 호위병은 마법에 걸린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신전을 나와 임라나로 돌아갔다. 신전 입구에서 기다리던 ─사실은 잠을 자고 있다가 용케도 알아차리고 깨어난─ 다이세맛이 배웅해주겠다며 한사코 따라왔다. 지상으로 올라와 임라나에 탈 때 다이세맛은 아즈라크식으로 고개를 숙이고 더듬이를 흔들며 인사를 보냈다. 적어도 저런 이들이 많이 있다면 아즈라칸의 미래도 지금보다는 밝을 텐데.


임라나는 곧장 솟아올라 행성의 얇은 대기층을 지났다.
문득 내려다보면 땅 위에는 300개가 넘는 우주선 모양의 석상이 늘어서 있다. 단 한 개의 진짜와 수많은 모조품으로 이루어진…… 전에 묘지 같다고 생각했었나? 지금 보니 모내기를 끝낸 논처럼 보였다. 식물이 아니라 돌이 가득한 바짝 마른 황야긴 하지만…….
저것들은 그러니까 모두 아즈라크가 직접 심은 모였다.
다만 모두 생명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일 뿐. 진짜 씨앗은 우리가 품고 있다.
아주 작지만 단 하나의 생명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런 생명이 모여서 종족이 되고 수많은 종족의 문명이 모여서 은하 연방을 이루지 않는가. 생명은 곧 우주를 이루는 씨앗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이 모세를 반드시 연방의 일원으로 들여보내고 싶었다.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이라고 여겨도 상관없다. 동기야 어떻든 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니까.
“어허, 얘 좀 봐.”
나는 친척 아이의 재롱을 보고 웃는 아줌마 혹은 아저씨처럼 흐뭇한 목소리로 부관을 불렀다.
“선장님의 몸을 깨물고 있군요. 배가 고픈 걸까요?”
“끔찍한 소리 하지도 마. 어차피 먹지도 못할 텐데. 나름대로 감정의 표현일 거야.”
“좋은 감정으로 보이진 않습니다만.”
“네가 지구인에 대해 뭘 알아? 이건 젖을 물어본 적 없는 아이의 애정표현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보다 저는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해야 되니까 당분간 말을 걸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외부 통신 접속을 끊어버렸다. 부관 주제에 건방지다니까.
하긴 우리는 하나를 얻었지만 하나를 잃었다. 모세를 데려온 대신 〈태양의 돛단배〉는 앞으로도 저들의 종교적 기념물로 남아 있겠지.
내 짐작이 맞는 걸까? 모세는 내 육체에서 손가락처럼 생긴 돌출부를 입에 물더니 씹히질 않자 쭉쭉 빨아대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침이 표면 위로 흘러내렸지만 기분이 좋았다.
봐, 생명이란 이토록 경이로운 존재라니까.

 

(2017.10.24.)

댓글 1
  • 글쓴이 pilza2 20.12.01 18:40 댓글

    〈우주선 임라나 시리즈〉에 속하는 단편이며 2020년 11월 출간한 장편소설 『레일월드』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시리즈 정보 ☞ http://www.pilza2.com/novel/imran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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