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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실버 해머

2020.08.01 00:0008.01

실버 해머

pilza2


가장 난처한 상황이 스페이스 셔틀 옆자리에서 말을 걸어오는 경우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대화를 원치 않는다 해도 그 자리를 피할 방법은 없다. 심지어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도 없어졌으니, 전자두뇌가 보편화된 현대의 성인에게 생리현상 조절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육체가 언제 생리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는 사전에 측정하고 수치화하여 통제할 수 있으니까. 설령 다급한 일정 때문에 방광에 오줌이 찬 상태로 열차나 비행기나 우주선에 탑승한다 해도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육체의 통증과 마렵다는 생각을 차단하면 된다.

초면의 낯선 상대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않는 것이 현대인의 예의지만, 지금은 여행을 함께 하는 사이니 오히려 대화를 거부하는 쪽이 예의에 어긋하는 경우일 터. 그래서 율리는 난처했다.

두 사람은 약 20분 전 올드린 시티 우주공항에서 만났다. 상대는 약속한 시간과 좌표에 퀘스트를 주는 NPC처럼 정확하게 위치하여 율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며 상대를 스캔한다. 인공안구의 카메라를 줌인. 증강현실 안내창에 상대의 외모와 옷에 대한 정보가 출력된다. 남색 스리피스 정장. 뒤로 쓸어넘긴 황갈색 단발. 이마에는 인조상아로 만든 듯한 뿔 한 개. 뿔과 귀와 아랫입술에 달린 가느다란 피어스.

가죽장갑과 불룩 튀어나온 허리에 찬 파우치를 제외하면 평범한 회사원처럼도 보인다. 성별 불명, 연령 20대에서 30대 추정, 히스패닉 계열.

머리카락과 눈동자색은 의미없는 정보값이라 제외하고 ─각각 염색과 인공안구로 색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니까─ 율리의 전자두뇌는 피부색과 골격구조로 상대를 히스패닉으로 추정했지만, 전 인류가 혼혈이 되고 있는 추세를 생각하면 세대가 흐를수록 인종구분은 불필요해졌다.

15미터 정도 거리에 이르자 상대방도 율리에게로 몸을 돌린다. 알림음과 함께 상대가 보낸 전자명함이 율리에게 전송된다. 수신을 허락하고 출력. 정면 약간 왼쪽에 명함이 떠오른다. 이름은 모라. 민간군사경비기업 〈코브라 앤 스컬〉 소속 사설경호원. 정면 사진과 회사 대표 연락처. 그 외의 정보는 없다.

율리가 달에서 지구로 갔다 올 때까지 안내와 경호를 맡아줄 사람이다. 사설경호원을 고용해야 할 정도로 치안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 제아무리 GOU도 신은 아니다. 전쟁 직후의 혼란을 이 정도로 수습한 것만으로도 다행일 정도니까.

두 사람은 현대인의 예의와 전통에 따라 목소리를 내어 인사를 했고 이후로는 거추장스러운 의사소통이 필요없었다. 필요한 정보는 서로의 두뇌에 직접 메시지를 송수신하면 된다. 모라가 앞장섰고 율리는 따라갔다.

표를 발급받고 승선한 지구행 스페이스 셔틀은 얼핏 봤을 때 빈 공간이 많아 널찍해 보였다. 같은 부피의 항공기였다면 200명 이상은 수용 가능하겠지만 우주선이라면 객수가 50명 이하로 줄어든다.

자연히 요금은 더 비싸지겠지만 율리는 이러고도 우주항공사에 수익이 남는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둘러보니 자신들 말고 다른 승객은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혹시 시간을 착각했나 싶어 우측에 알림창을 띄워 출발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모라는 앞쪽 자리로 안내했다. 탁자를 두고 둘씩 마주하는 4인용 공간이다. 좌석은 앉는다기보다 기대야 할 정도로 엉덩이를 걸치는 부분이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고 등받이가 길다. 각 좌석에는 벌어진 침낭처럼 생긴 충격보호용 우주복이 달라붙어 있다. 율리가 창가에, 모라가 그 옆자리에 등을 기대자 우주복이 몸을 휘감았다. 두 사람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치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승무원 한 명이 가운데 통로를 따라 뒤에서 앞으로 걸어왔다. 통신알림이 들어왔고 항공기 소개, 경로와 도착예정시간, 이착륙시 주의사항 등을 담은 정보창이 차례로 뜨면서 율리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다 확인했다는 답신을 보내자 가만히 있던 승무원은 곧바로 승무원실로 들어갔다. 셔틀은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출발했다. 단 세 명의 승객만을 싣고.

이륙의 충격이 가시고 달의 중력에서 벗어나자 감쌌던 우주복의 압력이 느슨해졌다. 양옆과 아래쪽이 벌어져 팔과 다리를 밖으로 내밀어 움직일 수 있었지만 아기띠에 싸인 아기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옆에서 말을 걸었으니 율리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셔틀에서는 외부와 통신이 어려우니 저장해놓은 영상과 문서로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을 줄은 몰랐다.

“교수님은 지구에 오랜만에 가십니까?”

모라가 굳이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말을 건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율리는 당혹한 채로 대답했다.

“그래요. 사실은 지구를 떠난 이후로 처음이네요.”

“지구 출생이셨군요.”

“저 때는 모두가 지구에서 태어났으니까요. 월면도시가 준공된 지 60년 정도 되었나요? 거주위성은 그보다 짧겠지요.”

‘정도’ 같은 애매한 대답은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외부의 정보를 검색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 전자두뇌에 저장된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거주위성 자체는 달보다 오래 되었지만 민간인의 이주는 더 늦게 시작했죠. 처음엔 연구용과 군사용으로 쓰였으니까요.”

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대화를 끝내자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신호였다. 그럼에도 모라는 무심하게도 말을 이었다.

“이번 여행은 저 개인에게도 영광입니다. 세계통합 백주년 심포지엄에 초청받으신 석학을 안내하게 되었으니까요.”

“과찬의 말씀을. 그저 살아남은 백 살 노인이 몇 안 되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준 것이겠지요.”

“젊은 세대에게도 교수님은 꽤 인지도가 있습니다. 만화를 꾸준히 그리시지 않습니까? 제법 인기가 있거든요.”

“정말 반응이 있나요? 온라인이 아닌 곳에서는 좀처럼 듣지 못하는데. 모라님의 솔직한 감상을 듣고 싶네요.”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인지, 칭찬을 듣자 율리는 짜증과 거부감을 잊고 대화에 빠져들었다.

“제 취향의 그림체는 아닙니다만, 내용은 무척 흥미로워서 보고 있습니다. 독재자 시리즈라든지, 인류의 어리석은 발명품 시리즈 같은……”

“역시 『어리석은 발명품 박람회』를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연재할 때 반응도 제일 좋았지요. 결국 모든 잘못은 인간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총과 핵폭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요. 그걸 굳이 만들어서 같은 인간을 죽이고 환경을 오염시킨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을 꼬집고 싶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특히 과거의 권력자에 남성이 많은 것이 인류문명이 과오를 되풀이하는 원인이라는 교수님의 시각에 동의합니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의 권력에 대한 비판은 제 오랜 연구과제이기도 했지요. 실은 만화 그리는 취미를 살려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제 본업보다 더 널리 세상에 알려지고 말아서 이제는 그만둘 수도 없게 되었죠.”

“그만두다니요. 수십만의 독자가 매주 기다리고 있는데요.”

“취미가 일이 되니까 솔직히 싫증도 나서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었어요. 고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교수 체면이 있어 광고를 붙이지도 못했으니……. 그런데 교수 생활로는 꿈도 못 꿀 팬레터도 받아보고 인터뷰도 하고 강연도 하고 미디어에 불려다니며 인기를 얻다보니 지금은 그냥 일 반 취미 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율리는 인터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모라의 열의가 담긴 반응 덕분에 대화를 끊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하실 강연의 주제와도 연관이 있나요?”

“그렇네요. 있다고 하면 있을 수도 있겠죠. 지난 역사에서 보이는 권력자의 양상과 변화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이든 남성이 중심이었던 과거의 군주와 지도자와 정치가들을 돌아보며 침략과 정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인류의 역사를 반추해볼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씀은…… 아무래도 GOU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의미신지?”

“큰일날 소리를 하시네! 외부망이 차단된 셔틀 안이니까 망정이지, 다른 곳에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요.”

율리는 다시 대화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러나 모라는 상대를 붙잡고 흔드는 듯한 다급하고 거친 말투로 응수했다.

“아뇨, 교수님은 과거 공개적으로 GOU를 비판하는 말씀을 하신 진보적인 소장파 학자셨잖아요! 이후에는 독재자를 비판하는 만화를 그려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얻으셨고. 그런 상황에서 백주년 강연으로 늙은 지도자를 비판하겠다면, 당연히 GOU를 엿먹이고 싶다는 의도가 있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허허, 늙은이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신가? 과거에 내가 반GOU 성향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세계를 착실하게 재건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GOU를 지지하고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모라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율리를 바라보았다. 율리는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조금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야 교수님도 나이가 드셨다는 실감이 나는군요. GOU 덕분에 태평성대를 구가한다? 전형적인 노년층과 어용매체의 주장이잖아요. 온라인에서 만화를 올리고 독자와 소통할 때는 교수님과의 세대차이를 느낄 수 없었는데.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실망했다면 그만큼 기대를 했다는 말인데……. 모라님이 나에게 무슨 기대를 했는지 조금쯤 짐작이 되네요.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는 모라님이야 말로 반GOU 성향이 아니신지?”

슬쩍 떠보는 도발적인 질문. 미끼를 덥석 문 모라.

“저는 그저 젊은사람으로서 세상을 이렇게밖에 만들지 못하는지 기성세대에 분노할 뿐입니다. 막대한 유산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적어도 빚은 물려주지 말아야죠.”

“마치 영건(Young Gun)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교수님은 영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알고 계시죠?”

상대의 말을 가로막는 듯한 다급하고 신경질적인 반응. 경멸과 반항기가 섞인 눈빛. 노인을 바라보는 젊은이의 눈이다. 어쩌면. 율리는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렇게 많이 알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정도밖에는…….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반GOU 테러 단체. ‘유나바머의 아이들’, ‘현대판 러다이트’라고 불리기도 하고. 그저 무정부주의 갱단이라는 평판도 있는데…… 메시지가 세련되지 못해서 그렇지, 행위에 비해 조금 부당한 비난을 받는다는 느낌도 들긴 했습니다.”

“그렇죠? 영건이 반체제 단체이며 폭력을 수단으로 쓰는 것은 맞지만 그럴 만한 목표와 이상이 있기 때문이에요. 독재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랄까요. 대화만 해서 제대로 맞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에 대해 무엇을 독립하자는 거지요?”

“뻔하지 않습니까. GOU로부터 인류가 독립하는 거죠!”

율리는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확실해졌다. 옆에 있는 모라는 영건의 강력한 지지자임에 분명하다. 팬덤, 후원자, 추종자, 또 뭐라고 불릴지는 모르지만. 안 그러면 이렇게 준비했다는 듯이 즉각 영건을 옹호하는 발언이 쏟아질 리가.

잠깐의 웃음과 침묵만으로도 모라는 율리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이제 교수님도 솔직하게 털어놓으시죠……. 여기는 외부와 통신이 차단된, 날아가는 우주선 내부니까요.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어요. 감시와 해킹에게서 자유로운 지금 인정하시죠. 교수님이야말로 우리 영건에 찬동하여 뜻을 같이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교수님처럼 저명하고 젊은세대로부터 인기를 얻은 고령의 지식인이 영건을 공개지지하신다면 인식도 나아지고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부질없는 독립운동을 더 열심히 하시겠다고? 우습네요. GOU로부터, 달과 위성을 포함한 전지구권을 하나로 통합하여 관리하는 강대한 초지성체로부터 독립이라! 질 것이 뻔한 싸움에 뛰어드는 일이 젊음의 특권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영건이 지금껏 무사한 이유는 GOU가 봐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나요? 영건의 계획과 행동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을 겁니다. 언제든 짓눌러 죽일 수 있는 손바닥 위의 개미에 불과해요. 그럼에도 왜 지금까지 내버려두었냐고 하면 그럴 가치가 없을 정도로 가소롭거나 아니면 달리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아뇨, 교수님. 더 숨기실 생각 마세요. 이미 늦었으니까요.”

“늦었다니요?”

“교수님 친구가 확인해주었거든요.”

친구? 확인? 알 수 없는 말투성이다.

“수영. 저를 교수님에게 소개시켜준 분이죠.”

율리는 예상 못한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모라는 한 손을 들어 앞쪽 어딘가 애매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께 가고 있으니까요.”

그때까지도 율리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탄 셔틀이 제공된 항로정보와는 달리 지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스페이스 셔틀은 지구-달 궤도 라그랑주 점 L5 지점으로 날아갔다. L1, L2 지점은 통신, 관측 및 군사용 우주 정거장이 자리잡았고 L3은 현실적으로 쓰기 어려워 내버려두었기에 거주위성은 L4와 L5 지점에 있다. 비교적 정상적으로 운용된 L4 구역과 달리 L5 구역은 전쟁에 휘말려 피해를 입었다. 현재 7개의 거주위성 중에 3개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버려졌고 4개는 복구가 미진한 채로 방치되었다. 거주민은 누구나 여건만 되면 벗어나기를 바랄 정도로 불황과 자원고갈에 허덕이며 치안이 불안한 슬럼이 되었다.

망설임도 없이 셔틀은 곧장 그 4개 위성 중 하나인 코뉴코피아로 날아가, 원뿔 모양 거주위성의 뾰족한 끝부분에 위치한 우주 정거장에 도착했다.

율리는 그제야 알아차리고 놀랐다. 셔틀의 탑승인원은 자신을 포함하여 네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며, 모라를 제외하면 승객으로 위장했던 사람과 승무원 복장을 했던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을. 당연한 듯이 그들은 한패였고 분명 영건의 일원일 터다. 율리는 그들 중간에 끼어서 셔틀을 내렸다.

출입관리자는 모두 무장을 한 상태였다. 바퀴 달린 선풍기에 날개 대신 사람 키 정도 크기의 투명한 방패가 달린 경비로봇이 관리자 앞을 가로막듯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고 율리는 이곳의 치안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았다.

모라는 그에게 다가가 몇 마디 주고받더니 곧바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출입관리자가 손바닥을 피더니 손가락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광선을 받는 듯한 시늉을 했다. 저 신호는 분명 전자화폐를 주고받았다는 신호다.

경비로봇과 출입관리자 옆으로 비켜서자 모라는 일행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율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입장료일 리는 없고…… 뇌물인가요?”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들은 마음내키는 대로 우리의 출입을 막을 수도 체포할 수도 있죠. 이유는 나중에 멋대로 만들어내면 그만입니다. 반면에 적절한 대가만 지불하면 번거로운 출입절차를 생략해주기도 하지요.”

모라는 말을 하면서 허리에 찬 파우치에서 둥근 머리띠를 꺼내 내밀었다.

“정거장을 나가기 전에 착용하십시오.”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건네받은 순간 율리의 전자두뇌가 대상을 스캔하고 조사, 검색하여 답을 내놓았다. 전자두뇌 대상 스텔싱 디바이스. 앞뒤에 테러단체 조직원이 버티고 있는 이상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폭발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율리가 착용한 머리띠는 일종의 증강현실 투명 망토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인공안구와 전자두뇌를 장착한 사람 및 인공지능에게 율리의 모습은 인식되지 않는다. 원리는 가상의 네모난 상자 혹은 커다란 망토로 율리의 전신을 덮어 가린다. 가려진 부분은 주위 풍경 영상을 실시간으로 편집하여 보정한다. 마찬가지로 폐쇄회로 카메라의 녹화영상으로부터도 몸을 숨길 수 있다.

좀 더 고화질의 인공안구를 착용했거나 증강현실의 풍경 왜곡 및 오염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은폐된 대상이 움직일 때마다 가장자리에서 풍경이 일그러지는 미세한 왜곡 현상을 감지할 수 있다. 소수나마 존재하는 천연안구의 소유자나 전자두뇌의 증강현실 보정기능을 아예 꺼버린 사람이라면 율리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모라가 율리를 감추고 싶어하는 상대에게 그런 사람이나 기계는 없음이 분명했다.

율리는 거리에서 지나치는 주위 사람들의 표면적인 신원 스캔만으로도 전자두뇌가 없거나 파손되어 제 기능을 못하는 사람이 꽤 많음을 알아차렸다. 특히 거리에 쓰러진 거지나 노숙자로 보이는 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네 사람은 사거리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5분도 안 되어 12인승 승합차가 마중나왔다. 안에는 아무도 없어 자율주행 혹은 외부에서 조종하는 모양이었다. 뒷좌석에 앉은 율리가 머리띠를 벗으려 하자 모라가 팔을 들어 제지했다. 아직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인지. 창가로 시선을 돌리니 코뉴코피아에 구조상 10층 이상의 건물은 불가능한지 땅딸막하고 엇비슷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은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승합차는 어느 6층 건물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디든 마찬가지로 도로와 건물은 낡았고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모두 내리자 정거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라가 안내하고 셔틀에 탔던 두 사람이 율리 뒤를 가로막듯 따라가는 식으로 이동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렸다. 짧은 복도는 용접으로 금속을 덧댄 튼튼한 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모라는 손가락을 들어 손잡이 옆에 있는 패널에 댔다.

율리는 얼핏 보고 지문 인식 시건장치라고 추측했으나 아니었다. 지문처럼 채취·복제하기 쉬울 뿐더러 한 번 발각되면 바꾸기 어려운 생체 인증방식은 위험성이 크기에 영건은 쓰고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은 극히 원시적이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안전한 대화 방식을 쓰고 있다.

모라는 문 안쪽에 있는 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내용을 즉흥적으로 암구호처럼 주고받는다. 미리 문답내용을 정해놓으면 유출 가능성이 있어 피한다.

서로가 아는 상대임을 확인하자 문이 반쯤 열리고 소총을 든 동료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라와 손만 맞부딪칠 정도로 짧은 악수를 나누더니 뒤에 있는 율리를 흘깃 보고는 문을 활짝 열며 뒷걸음쳤다.

내부 공간은 마치 다른 건물인 것처럼 문 바깥쪽 벽 및 바닥과 재질이 달랐다. 대부분 금속이고 전파를 차단할 목적임이 분명해 보이는 장비나 소형 발전기, 전선다발 등이 보였다.

뒤따라오던 두 사람은 임무를 마쳤다는 듯 즉시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모라는 그제야 머리띠를 벗으라고 손짓하더니 긴 복도를 따라 나아갔다. 차를 탄 이후로 자신에게 말을 한 마디도 안 했음을 새삼 의아하게 느끼면서 율리는 순순히 따랐다. 점점 납치당했다는 실감이 들면서 주위의 침묵과 아울러 두려움도 한층 커졌다.


모라는 어느 방문을 노크하더니 대답은 필요없다는 듯이 곧바로 열고 들어갔다. 이사를 간 사무실처럼 먼지투성이 바닥인 빈 방 안에는 디귿자 모양 소파와 구석의 행거 하나만 남아 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지?”

그가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소파는 지금 없지만 원래 있었을 탁자를 중심으로 디귿자 모양으로 배치되었고 그는 지금 문을 바라보고 창문을 등지는 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율리는 말없이 인사를 하고 곧바로 방을 나가는 모라를 멀거니 보았다. 문이 닫히자 율리는 수영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알겠어. 너였구나.”

수영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치려는 듯이 율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영건의 보스지? 대표인지 두목인지, 명칭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을대로 생각해. 우리는 누군가 소수의 명령을 하달하는 수직적 조직체계는 아니지만, 일단 내가 대표자임은 분명하니까. 굳이 말하자면 탑다운보다는 바텀업, 상향식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말을 돌리기는. 용건부터 말해!”

율리가 소리를 지르자 수영은 정지된 영상처럼 입을 벌린 채로 멈췄다. 율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구질구질하다느니 하는 험담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다 도로 들어갔다. 짧은 심호흡. “이런 데 숨어 살았을 줄은 몰랐어. 날 납치한 이유가 뭔가?”

“모라가 어디까지 얘기해줬는지 모르겠는데……”

“하나도 안 했어. 엉뚱한 소리만 하며 말을 돌리고, 어설프게 날 띄워주며 구슬렸지. 무슨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내가 직접 추리를 해서 겨우 그 친구는 영건이라는 테러조직 일원이고 날 납치하여 두목인 너에게 데려왔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야.”

“말에 달린 가시가 너무 날카로운데. 이미지를 생각하셔야지. 친근하고 유머감각 풍부하기로 유명한 교수님 아니신가?”

“납치범에게까지 친근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

“매정하군. 우린 오랜 친구사이 아닌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할 친구를 납치하여 이런 위험한 곳에 가두는 친구도 다 있나? 난 바쁜 몸이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른 말해보시지.”

“마침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어. 초대받지 못한 마법사가 생일잔치를 망치고 싶어지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초대받지 못한 마법사, 생일잔치. 머릿속에서 검색해보니 하나의 답이 나온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여기선 백수(白壽) 잔치라고 해야 되겠지만.”

수영은 덧붙이며 자신의 말이 우스운지 살짝 웃었다. 율리는 그 미소를 보자 가시에 찔린 듯이 움찔 놀라며 응수했다.

“중요한 행사에 초청받지 못한 점은 유감이야. 그치만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다들 모르잖아? 나 역시 온라인에서만 만났으니……. 알았어, 날 만난 이유가 그거였나?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데려가주지.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어.”

테러 조직의 본거지에 들어왔다는 불안감으로 위축되었던 율리는 한시바삐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아무 근거도 없이 장담했다.

그러나 수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GOU가 장악한 지구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아.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수배를 당하고 있는 몸이기도 해서…….”

율리는 다시금 겁이 덜컥 났다. 가상현실에서 만났던 친한 상대라서 처음엔 허세를 부렸지만 상대는 테러리스트이며 그것도 조직의 두목이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율리는 수영이 말을 이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 부탁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해.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데. 네가 대독(代讀)해주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해.”

율리는 얼른 하겠다고 대답하려다 망설였다. 거듭 생각해보면 위험천만한 일. 반GOU 테러조직의 메시지라니, 무슨 내용일지 짐작하기도 싫어진다.

“겁 먹었나? 놀랄 것 없어. 나도 ‘희망둥이’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회를 밝히고 싶을 뿐이야.”

“그 창피한 이름을 잘도 입에 담는구나.”

“희망둥이가 어때서?”

“백 살 늙은이가 자칭할 별명은 아니지.”

율리는 진저리난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유전자 교정으로 태어난 첫 세대의 별칭 희망둥이. 전란을 안정시키고 세계를 통합한 GOU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3대 정책 중의 하나였다. 전자두뇌 임플란트를 포함한 인체개조와 맞춤DNA로 만드는 신인류는 국가와 민족 개념을 없애고 인류를 통합하며 우주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한 GOU의 미래 정책이었다. 환경회복, 우주개발, 신인류 3대 정책은 개별적인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해 동시에 수행되었다. 민족 개념이 없고 우주환경에 적응한 뛰어난 신체와 두뇌를 가진 신인류를 달과 거주위성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여 더 오랫동안 인류를 번영시킨다는 장대한 비전 아래 추진했던 것이다.

취지야 나무랄 데가 없었다. 최초의 유전자 완전 교정으로 탄생한 〈희망둥이 세대〉는 아름다운 외모와 우수한 신체능력, 암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은 물론 긴 텔로미어로 노화 억제와 긴 수명까지 갖춘 향상되고 강화된 인간이 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실제로 태어난 율리를 포함한 희망둥이들의 다수가 기형과 질병으로 조기에 사망했고 무사히 유아기를 지나 살아난 아이들은 절반 이하였다는 사실. 자연히 매년 규모를 늘릴 예정이었던 유전자 교정 계획은 미뤄졌고 희망둥이 생존자들은 정부의 보호라는 이름의 감시를 받으며 소중하게 자라났다.

“내겐 그 이름 자체가 존재의 의미라네. 희망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몸이라서……. 사실 지구에 못 가는 이유는 수배 말고도 있어.”

말을 마친 수영은 유난히 길고 두꺼워보였던 코트의 앞섶을 풀어 열어 보였다. 전선과 수액을 공급하는 호스가 몸에 여럿 꽂혀 있고 코트 안감에 부착된 의료장치에서 희미한 진동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율리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사실은 하루하루 억지로 연명하고 있어. 이 기계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나는 스위치를 내린 전등처럼 꺼질 거야. 전등이야 다시 켜면 살아나겠지만, 인간은 그러지 못하지. 일단 심장충격기 같은 것도 달고 있긴 한데,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겠어.”

“이게 네 희망인 건가……?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냐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말이 헛나왔군. 사과할게. 내 말은 이렇게까지 되면서도 영건이라는 위험한 조직을 이끌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싶어서. 치료에 전념하는 편이……”

“치료한다고 나아질 몸이 아니야. 우린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왔지? 그때부터 이미 약과 의료기계에 의지하던 내 모습을 봤잖아.”

“봤지…….”

율리는 한동안 서랍에 넣어둔 오랜 기억을 다시 꺼내는 기분이 들었다. 율리와 수영은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고, 내내 학교에서 둘뿐인 희망둥이였다. 부모도 없고 생식행위와 임신·출산의 과정 없이 순수하게 실험기구에서 태어난 아이들. 출생 직후 절반 이상의 아기들이 숨져서 중단되어버린 희망둥이 계획의 생존자. 이후로 GOU는 기존의 시험관 아기와 흡사하게 산모에게 수정란을 이식하여 출산하는 방식으로 회귀했고 기술적으로는 후퇴하여 유전자 완전 교정이 불가능한 대신 기형과 질병 확률이 비약적으로 낮아졌기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두의 관심어린 시선이 모이는 두 학생은 싫어도 서로를 의식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선천적인 천재라는 이미지와 재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미지를 함께 가진 채로. 더구나 주위에서 둘을 멋대로 라이벌 구도로 만들어 지켜보며 기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중학교 때는 두 사람이 시험에서 동시에 필기시험 전과목 만점을 받기도 했으니. 결과는 체육 실기를 치르지 못한 수영의 패배, 체육까지 만점을 받은 율리의 승리였다.

율리에게 수영의 첫인상은 약골 모범생이었다. 뒤통수와 심장 근처에 달린 호스가 늘 허리에 찬 의료장치에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체육활동은 열외였고 심지어 책걸상을 들거나 허리를 굽혀 빗자루질을 하는 작은 행동마저 못하게 했다. 수영이 정해진 시간마다 온갖 종류의 약을 한 움큼씩 집어마실 때면 교실 안의 아이들은 동물원에서 먹이를 받아먹는 짐승을 구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반면 율리는 어떻게든 평범한 학생처럼 지내려고 애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율리는 약과 보조기구 없이도 건강하게 살았고 매달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귀찮음 외에는 다른 아이와 똑같이 지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이 평범한 정상인이라 어필하려 애썼고, 일부러 밝은 표정과 태연한 목소리로 주위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 친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혹은 재난 생존자 같은 이미지를 지워내려는 노력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유지되었다. 끝내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율리의 잦은 성전환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영은 평생 태어났을 때 지정된 법적 성별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반면 율리는 몇 번이나 성별을 바꾸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율리는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남성이었다. 키가 작고 몸이 가늘어 귀엽다는 인상이었다. 그랬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젊을 때 놀아봐야 한다며 여성으로 전환하더니 머리카락을 금색, 분홍색으로 염색하고 전신에 헤나로 온갖 문양과 그림을 그렸다. 피부가 비치는 블라우스 등 개조한 교복을 입고 이른바 날라리로 살았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상대와 섹스를 하고 두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하는 전자마약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대학교에 입학하며 다시 남자로 전환하고 단정한 옷차림의 모범생으로 돌아갔다. 이후 월면도시로 이주하여 달에 처음 생긴 대학교의 교수로 정년퇴임 때까지 재직, 퇴임한 뒤부터 명예교수가 된 현재까지 다시 여자로 지내고 있다. 출생 특성상 존속(尊屬)은 없고 비혼·무자녀 독신. 결국 학창시절은 젊은 시절의 짧은 방황을 극복하고 학업에 매진하여 성공한 지식인이 되었다는, 화려한 경력에 이채로운 장식이 되었을 뿐이다.

“나 역시 늘 너를 봤어. 널 많이 생각했고…….”

어색한 침묵이 깨졌다. 수영이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말했다.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뿐이었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나…….”

“한창 놀았던 때였어. 그래도 전교에서 3등 안에는 들었지.”

율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하지만 실은 뻐기는 투로 말했다.

“난 체육 실기시험을 제외한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설마 율리 네가 공부로 성공할 줄이야.”

“유전자와 전자두뇌가 해준 일이야. 덕분에 학창시절엔 잘 놀았어.”

두 사람이 학교를 다닐 때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가 닥쳐오는 과도기였다. 오래지않아 공부가 의미를 잃어버리는 시대가 찾아왔다. 전자두뇌가 보급되자 학교는 붕괴되고 교수와 교사와 강사는 설자리를 잃어갔다. 두뇌에 삽입한 칩 임플란트는 지식과 정보의 다운로드로 암기의 필요를 없애주었다.

그래도 인류는 관성처럼 학교라는 체제를 이어갔다. GOU가 야심차게 추진하긴 했어도 세계인구 전체에게 동시에 전자두뇌를 보급하기란 힘들었고 자연히 정보격차가 생기면서 계급화가 이루어졌다. 과도기에는 지식을 간단하게 암기한 사람과 필사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같은 시험을 보는 불평등한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자연두뇌로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한 사람은 몇 초만에 지식을 전자두뇌에 다운로드한 사람과 경쟁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수영과 율리는 이런 과도기에 성장하여 전자두뇌 덕분에 공부를 하지 않아도 탁월한 학업능력을 발휘하여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대로 인생이 순탄하게 풀린 쪽은 율리지만, 수영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GOU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개개인의 의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먼 곳을 헤매던 수영의 시선이 율리에게로 돌아왔다. 짧은 틈을 두고 수영은 준비했던 용건처럼 놀라운 말을 했다.

“그런 너를 많이 좋아했어. 사랑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율리가 전혀 예상 못했던 발언이었다.

“무슨…… 말도 안 돼. 네가 나를 좋아했다고? 반대겠지. 하나도 티를 안 냈잖아.”

“성격 탓이야.”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해도…… 해도 돼?”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우린 이제 백 살이잖아? 세상에 눈치볼 것 없고 이제와서 부끄러워하거나 숨길 것도 없는 나이야.”

“내가 생각했던 백 살은 이런 게 아니었어. 주름진 얼굴에 낡은 옷을 입고 기침을 쿨럭이며 소설에나 나오는 문어체처럼 고풍스러운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직접 살아보니 어떠신가, 율리 교수님?”

“이렇게 뒤늦은 고백을 받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대답은?”

“정말 나를 좋아했던 게 맞아?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대체 언제부터? 난 중학교 때 남자였고 고등학교 때 여자였는데. 넌…… 대체 어떤 나를 좋아한 거야?”

“그게 상관있을까?”

하긴.

그들은 상관없는 세대였다. 전자두뇌화와 인체개조가 가속화된 이후로 성별은 여권을 새로 발급받는 만큼의 수고만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개념이 되었다. 물론 GOU가 다스리는 세계는 모든 국가 개념을 없앴고 국적도 함께 사라지면서 여권과 비자는 쓸모없어졌으니 올바른 비유는 아니다. 유전정보에 기반한 유일무이한 개인의 식별등록번호만으로 GOU는 인류가 어디로 이동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추적이 가능하니까. 

이런 사회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은 GOU가 금지하지 않은 이상 아무 문제없었다. 세상의 옳고 그름, 법과 규율은 GOU가 정한다. 기존 국가의 법률, 사회의 문화와 관습, 개별 종교의 교리, 인간의 윤리와 도덕까지 모두 하위개념에 불과하다.

그렇다 해도 율리의 당혹감은 가시지 않았다. 대체 수영은 언제, 어떤 모습의 자신을 좋아했다는 걸까. 이유는 뭘까. 궁금한 점이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율리는 당장 일어나 빠져나오고 싶었다. 애초에 이런 한가한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에게는 중요한 임무와 목표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납치당한 다급한 상황. 우선 위기를 모면할 방도를 찾는 쪽이 급선무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너도 희망둥이 생존자 중 한 사람으로 백 살을 기념하여 잔치에서 한 마디 하고 싶기는 하겠지. 아무리 반GOU 조직 두목이라고 해도 그럴 자격은 있어.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중고등학교 내내 모범생이었던 네가……”

“잘못되었다고? 후훗. 네 기준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 내가 볼 때는 GOU가,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자신이 반GOU 조직이 된 것은 GOU 탓이다? 선천적인 장애를 타고 났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수영에게 정신적인 문제는 없어 보였고, 좋은 대학에 갔다고 들었다. 그러다 얼마 전 온라인으로 연락이 될 때까지 연락이 끊어졌던 것이다.

전자두뇌와 인체개조 기술이 보급되던 과도기의 불공정한 경쟁과 그로 인한 계급화, 차별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GOU는 개개인의 진학과 취업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실은 GOU가 궁극적으로 추진하는 목표가 모든 인간의 직업과 인생까지 결정하는 것이니 이를 위한 적절한 구실에 불과했지만.

수영과 율리 세대부터 시작된 인류재배치 계획에 따라 GOU가 개별 학생의 성적, 소질, 적성 등을 분석하여 적절한 직업을 선정하게 된다. 동시에 기업 또한 분석하여 요구되는 일자리에 인원을 배치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위에서 정해주는 인생의 행로에 순응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전자두뇌가 없어서 성적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힘든 육체노동 쪽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위, 파업 등의 저항도 일어났지만 GOU는 부의 재분배도 동시에 추진해서 불만을 잠재우려 애썼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대부분 동의하듯 전 세계는 궁극적인 사회주의 낙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율리는 유명한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했고, 만화를 좋아하는 취미 같은 요소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듯했다. GOU는 율리를 정치 혹은 사회 분야의 학자, 연구자, 교수로 키울 의도였다.

반면 수영은 외과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의과대학으로 보내졌다. 마찬가지로 수학을 좋아하는 적성은 물론 선천적으로 병약한 신체와 주위의 시선으로 인해 대인관계를 싫어하게 된 성격까지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수영은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반발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의사? 네가?”

수영의 과거 이야기를 듣던 율리는 기가 차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봐도 네 모습은 환자에 더 어울리는데.”

“그러는 너는 GOU가 바라던 대로 잘 살지 않았어?”

“속사정을 알면 그렇지도 않아. 대학 때 역사에 흥미가 생겨서 복수전공으로 역사를 공부했지. 날 유명하게 해준 역사 만화는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야.”

“어쨌든 시키는 대로 교수까지 되지 않았나.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했어.”

“설마, 너 같은 모범생이…….”

“의과대학 생활은 힘들고 성격에도 맞지 않았지. 도저히 적응이 안 되니까 등교를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혔어. 제아무리 GOU라도 사람 하나하나를 조종하지는 못했어. 어쩌겠어, 사람을 시켜 내 등에 총을 겨누고 학교로 데려가겠어?

결국 몇 년 지나 제적이 되니까 GOU에서 제약회사 연구원 보조로 강제 취업을 시키더라고. 병원비랑 약값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은 했지만, 그것도 안 맞아서 몇 번이나 그만두기를 되풀이했어. GOU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잠적하고 싶었지만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진찰받고 약을 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몸이라 그럴 수도 없었지.

내가 누군데? GOU의 손상된 자존심, 희망둥이잖아. 희망둥이가 실패하고 폐인이 되는 꼴은 차마 용납할 수 없었을 거야. 포기도 안 하고 끝까지 나를 갱생시키려고 노력을 기울였지. 나한테는 족쇄를 채우고 열심히 채찍질을 하는 농장주로 보였지만…….”

“그럼 언제 GOU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어?”

“지구에선 못살겠다고 하니까 여기 코뉴코피아로 이주시켜주던데. 일손이 부족한 곳이었거든. 다행히도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구 본토와 연락이 다 끊어져버렸지. 이후 내 이력은 내전에 휘말려 실종, 생사불명 상태로 끝났어.”

“전쟁을 다행이라고 표현하다니, 너답다.”

“덕분에 이렇게 몸에 기계를 덕지덕지 달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대신 자유를 얻었지. 신체가 아닌 정신의 자유 말이야.”

“그걸 자유라고 표현하다니 안타까워. 지구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수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의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반GOU 조직의 두목이 된 인생을?”

“절대 GOU가 만들어줄 수 없는 인생이니까.”

“어휴, 말이 안 통하는구나.”

“마음속에 유일한 미련은 바로 너였어. 그러다 온라인에서 너의 만화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취했지. 만화에 담긴 권력자와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보고 반가웠어. 이렇게 애둘러서라도 GOU를 감히 비판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시대니까.”

“이런 사람일 줄 알았으면 교류하지 않았을 텐데……. 과거를 몰랐으니 그냥 오랜만에 본 동창으로만 여겼던 내 잘못이지. 맞아, 내 만화가 그렇게 해석되거나 인용되는 건 사실이야. 날 데려온 모라라는 청년도 완전히 그렇게 여기고 있던데.”

“그래서, 아니라고?”

“해석은 자유야. 착각도 자유고.”

슬슬 초조해진 율리는 다시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언제까지 원치 않는 상대와 대화를 이어가야 할까? 슬슬 끝낼 때가 됐다.

“알았어. 구구절절한 사연 잘 들었어. 곧 죽을 친구의 마지막 부탁이니 들어줘야지, 어쩌겠어.”

“고마워, 좋은 친구를 둬서 다행이야.”

수영은 한 손을 들어 검지를 귀에 댔다.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거나 정보를 주고받음을 주위에 알리는 행동이다.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고 모라가 들어와 율리에게 말했다.

“교수님, 회선을 열어주십시오.”

율리는 대답없이 즉시 모라가 보낸 메시지를 수신했다. 미리 준비해둔 수영의 메시지. 포맷을 보아 음성 녹음본인 것 같았다. 수배중인 몸이니 영상까지는 무리지 싶었다.

“강연 자료와 같은 폴더에 보관해두세요.”

율리는 모라의 말에 따랐다. 이 음성을 들려주려면 자신의 강연을 하기 전이 좋을지, 한 다음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내용을 미리 들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좋지 싶었다. 상대는 테러 조직의 보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그럼 용건은 끝났나?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

율리는 슬쩍 수영의 눈치를 보며 모라에게 말했다.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뿐이지 빨리 보내달라는 얘기였다. 모라는 지시를 기다리는 듯이 수영을 보았다. 그가 끄덕이자 문을 열고 옆에 섰다.

기쁜 마음에 얼른 일어나자 수영이 말했다.

“배웅을 못해줘서 미안해. 몸이 이래서……. 먼 길 조심해.”

“네 건강이나 신경 써. 그럼 다음에 또…….”

차마 만나자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말꼬리를 흐린 덕택에 율리는 다시 만날 일도 없고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자신의 마음이 충분히 상대에게 전해졌다고 믿었다. 수영은 입을 다물고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모라가 내민 스텔싱 디바이스를 낚아채듯 받아든 율리가 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나가자 모라가 뒤따라갔다. 문이 닫히자 수영은 참았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 덕분에 묻혔던 의료장비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느껴졌다. 미세한 진동과 모터가 돌아가거나 호스에 액체가 흐르며 나는 잡음. 생명을 억지로 붙잡고 씨근거리는 듯이.


방을 나온 이후로 지구까지 이어진 여정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빠르고 순탄했다. 모라도 수배를 받는 몸인지, 지구로 동행할 줄 알았건만 정거장까지만 안내했다. 코뉴코피아에는 지구행 여객기가 없어 선장과 선원에게 뇌물을 주고 화물우주선을 얻어 타야만 한다. 모라는 이렇게 비싼 지구행 편도 티켓을 끊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마무리하고 돌아갔다. 두 사람은 거의 아무런 말도 없이 헤어졌다. 수영을 만나게 해준 것으로 목적을 완수했다는 듯, 모라는 언어기능없이 정해진 동작만 반복하는 단순노동 로봇처럼 행동했다.

무사히 지구에 도착하여 약속장소인 글리타운에 위치한 호텔에서 하루 묵은 율리는 다음날 오전 연회에 참석해 생존한 희망둥이들과 만나 전자명함을 교환했다. 그날 오후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세계적인 석학이 된 희망둥이들이 각자의 전문분야에 따라 백 년에 걸친 세상의 변화와 발전상에 대한 의견과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자기 차례가 되자 율리는 연단에 올랐다. 등 뒤에 프레젠테이션 홀로그램 영상이 떠오른다. 어쩌면 모라와 수영도 영상으로 자신의 강연을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율리가 영건의 메시지를 전해주리라 믿으며 기다리고 있을 터.

웃기는 소리. 율리는 속으로 비웃었다. 누가 해줄까 보냐. 어젯밤 호텔에서 율리는 수영이 보낸 메시지를 재생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히는, 정말 희망둥이 동창의 안부인사 같았다. 그러나 금세 본색을 드러내고 영건의 반GOU 이념을 설파했다. 이렇게 위험한 선동을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백주년 심포지엄에서 들려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수영의 정체를 안 이후부터 율리는 그를 믿지 않았다. 자신을 속여 납치한 테러 조직의 두목이다. 옛 친구라고 덜컥 믿는 쪽이 오히려 정신이 이상한 사람 아닌가? 더구나 수영은 율리를 오해하고 있었다. 모라와 마찬가지로 만화의 내용을 멋대로 해석하고 그가 GOU를 비판한다고 지레짐작했다. 율리는 그저 코웃음쳐주고 싶을 뿐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초인적인 존재를 거스른다는 발상 자체가 우습다. 더구나 GOU는 외계인도 아니고 컴퓨터도 아니다. 실제 인간, 바로 과거 권력자들의 인격과 지성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인공지능이다. 즉 누군가는 언젠가 GOU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율리가 바라는 바. 그의 인생은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다. 역사 만화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함이고 안에 담긴 다소의 풍자와 비판은 진보적인 학자라는 명성을 얻기 위한 고도의 계산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GOU는 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지성을 추가하여 스스로를 보완하고 싶어할 테고, 자신이 바로 그 기준에 들어맞으리라고 추론했던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율리의 강연은 시작되었다. 결말은 이미 정해두었다. 과거의 과오를 극복하고 이루어낸 현재의 성과. 그리고 GOU가 만들어낼 찬란한 미래에 대한 축복.

‘미안하게 되었어, 이상에 빠진 어리석은 옛 친구여.’

수영과 모라의 실망한 표정이 궁금했으나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는 관여되고 싶지 않은 자들이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우주 한 구석에 숨어서 테러나 계속 이어가겠지.

슬라이드가 한 장씩 넘어가며 율리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일으킨 역사의 오점을 짚어나갔다. 십자군 전쟁, 제국주의 침략전쟁, 세 차례의 세계대전 등…….

“문제는 지도자에게 있었습니다.”

율리는 힘주어 강조했다.

“어리석고 불완전한 개인에게 지나치게 큰 권력을 주었던, 국가라는 제도 자체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디까지나 결론을 강조하기 위한 전제. 점점 그가 원하는 핵심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우리 인류가 얻어낸 마지막 결론은 개인과 국가라는 작고 이기적인 개념을 초월한 지구의 통합지배체제입니다. 인종, 국가, 종교,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인류의 공영을 추구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인 것입니다.

플라톤이 꿈꾼 철인왕(哲人王)이 무려 3,000년 가까이 흘러 첨단과학의 힘으로 구현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흥미롭게 여겨야 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인류의 문명은 시대와 역사 속에서 오직 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던 겁니다. 예, 그 결과가 바로 GOU입니다. GOU야말로 시대정신의 산물이며, 문명 진화의 정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팔을 살짝 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런 계산된 연극적인 행위에는 인간의 감정을 흔들고 설득하는 힘이 담겼다. 전자두뇌에 지식을 잔뜩 담는다 해도 인간은 감정에 좌우되는 동물임에 변함이 없었다.

이제 슬라이드는 두 장만 남았다. 맨 마지막장은 ‘감사합니다’라는 인삿말만 담겼으니 사실상 다음 장이 끝이다. GOU의 상징 로고인 지구를 움켜쥔 손, 그 아래에 배치한 실제 지구와 달, 거주위성을 합성한 사진.

그렇지만 기껏 준비한 마지막 슬라이드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앞장이 넘어가는 순간 날카로운 백색 소음과 함께 화면 노이즈가 발생했다.

율리는 황급히 돌아보며 생각했다. 파일이 깨졌나? 리허설을 할 때는 이상이 없었는데. 프로젝터로 파일을 전송할 때 문제가 생겼을까? 아니면……

늦었다. 원인을 짐작하기도 전에 훨씬 빨리 새로운 메시지가 인공안구를 통해 전자두뇌로 전달되었다. 화면에는 원래 만든 슬라이드 대신 산산조각으로 깨진 유리처럼 얇은 삼차원 구조물이 프랙탈 곡선을 그리며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율리를 포함하여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의 전자두뇌가 과부하를 일으켰다.

퍽, 퍽, 퍽. 둔탁한 폭발음이 이어졌다. 아주 작고 짧은 불꽃을 쏘아올리며 청중들의 머리가 여기저기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튀어오른 붉은 핏줄기 사이로 하얀 뇌수와 전자칩이 뒤섞인 채 솟아올랐다가 흩뿌려졌다.

아무런 개조를 거치지 않은 자연상태의 인간이 본다면 그저 꺼림칙하게 여길 삼차원 그림이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현기증이나 구토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모든 정보처리를 디지털로 수행하는 전자두뇌에게 이 그림은 고작 그 정도 영향에 그치지 않는다. 수학연산에 의해 엄밀하게 작동하는 폭탄의 뇌관으로 기능한다. 막대한 정보량이 홍수처럼 전자두뇌로 쏟아졌고, 삼차원 이미지를 해석하기 위해 과부하가 될 때까지 무리하게 연산을 거듭한 두뇌는 오류가 난 운영체제처럼 속 편하게 뻗지도 못하고 결국 회로가 과열되어 폭발에 이르게 된다.

율리는 두뇌가 멈추기 직전 0.3초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얻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뒤로 넘어지던 그의 시선은 강연장 옆면의 널찍한 통유리로 향했다. GOU가 이룩한 번영의 상징인 청결하고 질서정연한 도시 글리타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화려하고 깨끗한 시설은 강연장에서 이어진 도로와 근처의 건물 몇 채뿐, 그 너머로 시커멓게 그을리고 무너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잿더미 벌판이 펼쳐졌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콘크리트 더미와 갈라진 아스팔트, 뼈만 남은 짐승의 갈빗대처럼 비쭉 솟은 녹슨 철골들이 보였다.

단 0.3초 동안 율리의 전자두뇌가 역량을 총동원해서 추론한 결과는 이랬다. 메모리 부족으로 인공안구의 증강현실 기능이 꺼져버렸으니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은 실제다. 따라서 전란을 극복하고 지구를 부흥시켰다는 GOU의 주장은 거짓이었고, 재건된 지구의 모습 역시 증강현실로 위장시킨 거짓이었다고.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나, 누구를 믿어야 했을까.

대답을 찾기도 전에 율리의 전자두뇌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태풍에 꺾인 가로등처럼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CPU는 퍼붓는 정보량을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시뻘건 핏줄기를 쏘아올리고 쓰러진 율리의 시신은 코 윗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 영상은 세계 각지로 송출되고 있었고, 카메라에 찍힌 슬라이드를 본 전자두뇌 소유자들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차례로 폭발하며 쓰러졌다. 멀리 떨어진 거주위성 코뉴코피아에서 영건의 멤버들도 이 영상을 보고 있었다. 테러 조직원들은 묵념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모라는 자신의 몸에서 빼낸 전자칩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의 전자두뇌 기능은 꺼졌고 일그러진 화면은 그저 꿈틀대는 벌레 무리 정도로만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모라는 동료들 사이를 빠져나와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복도를 걸어 수영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었다. 수영은 율리와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굳게 감은 눈과 살짝 벌린 입. 빈 우주복처럼, 나비가 떠난 고치처럼 힘없이 수그린 채.

곧바로 다가가 코트를 열고 심전도와 뇌전도를 확인했다. 작고 검은 오실로스코프에 그려지는 파형은 양쪽 다 거의 직선이었다. 모라는 코트의 옷깃을 다시 여미고 일어나 수영의 뒤통수 소켓에서 전자칩을 빼냈다.

율리의 마지막을 보았을까, 아니면 그 전일까. 눈을 감으며 안도했을까, 슬퍼했을까. 영영 답을 알 수 없게 된 의문. 대신 모라는 율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죽기 직전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궁금하게 여겼을 터. 어쩌면 스스로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모라는 율리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했다. 슬라이드에 심어두었던 BLIT(BLIT is Langford’s Image Terror)를 본 전자두뇌가 폭발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길어야 0.8초. 그 사이에 율리가 원인을 찾는다면, 의심이 가는 부분은 하나밖에 없으리라. 그는 아마도 답에 도달했을 터다.

모라가 율리에게 전송한 음성 데이터.

‘안타깝군요, 교수님. 교수님은 우리를 믿지 못하셨겠지만 우리도 처음부터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율리가 그 음성을 미리 들어볼 것이라는 예상은 수영도 모라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율리가 절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내용의 일장연설을 녹음해두었다. 데이터 수신을 위해 율리가 회선을 열자 모라는 음성 파일에 맬웨어를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 정보를 특정 물체 혹은 디지털 파일에 숨기는 기법)로 첨부하여 전송했다. 가청 영역을 벗어난 주파수 대역에 은닉한 데이터는 그저 노이즈로 인식될 뿐이다.

음성을 재생한 순간 맬웨어는 우리에서 풀려난 굶주린 야생짐승처럼 날뛰었다. 율리의 강연자료를 해킹하고 내용 일부를 삭제한 후 미리 준비해둔 BLIT를 대신 끼워넣었다.

율리가 수영의 메시지를 강연 때 공개할지 하지 않을지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영건을, 그리고 수영을 믿지 못할 테니 미리 들어보고 지우거나 공개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욱 컸다. 재생시키기만 하면 목적은 이루는 것이니 삭제해도 상관은 없다. 어느 쪽이든 수영이 남긴 메시지는 성공적으로 전달된 셈. 이 모두가 그의 생각이었다.

BLIT는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했던 수영이 평생을 바쳐 만들어냈다. 반드시 백주년 기념식 이전에 완성시켜야 한다는 일념하에 안 그래도 약한 몸을 혹사하며 매달렸으니, 이렇게 소진되어 녹아버린 촛불처럼 힘없이 꺼져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라는 오랜만에 머릿속이 아니라 책 크기의 단말기를 써서 뉴스와 정보를 검색했다. 인류의 70% 이상이 사망했고 GOU가 회복 불가능한 괴멸 상태에 이르렀음을 확인한 다음, 수영에게 마지막으로 보고했다.

‘당신이 계획한 〈실버 해머 작전(Operation Silver Hammer)〉은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영건의 리더다운 최후의 작전이었죠. 이제 뒷일은 저희에게 맡기고 편히 쉬십시오.’

모라의 메시지는 수신자 불명으로 즉시 반송되었지만 상관없었다. 분명 승리를 확신한 채 세상을 떠났을 테니까. 모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의 살짝 오므린 손은 마치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망치자루 같은.

 

※ 작가 주(註)
BLIT는 데이비드 랭포드에게서 빌려왔지만, 완전히 같은 개념으로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20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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