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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유도선 by 이서영

2019.10.01 09:5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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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괴이한 거울

유도선

이서영

약간 검색했더니 사이트는 금방 나왔다. 뻔하게 떠 있는 사이트 주소와 이름 앞에서 나는 마우스 휠을 위 아래로 몇 번씩 굴렸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URL은 guideline.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어가는 곳. 당연히 나는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 삶은 언제나 고만고만하게 안정적이었다. 그렇게 잘 사는 집에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산더미 같은 빚을 지고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내진 않았다. 학창 시절에 따돌림을 주도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따돌림 당하는 친구를 앞장서서 구해준 적도 없었다. 서울대학교에 가지는 못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 정도엔 들어갔다. 모두가 뒤돌아 볼 정도의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못났다는 말을 들을 얼굴은 또 아니었다. 아주 인기가 많지는 않았지만, 서너 번의 연애는 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모든 사람들이 입사하고 싶어할만한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7할 정도의 한국인들이 이름을 말하면 알만한 회사였다. 어떤 사람한테는 뻔하고 재미없는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정도면 만족하고 살아왔다.

그럭저럭 친구들이 있고, 그럭저럭 모아놓은 돈도 있고. 엄청난 명예나 부도 바란 적이 없었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널브러져서 유튜브를 보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드는 삶. 한 달에 한 번 정도씩은 책을 사기도 하지만, 끝까지 읽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거기에 특별히 죄책감을 느끼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나는 직장에서도 초고속 승진을 하고 싶어 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적당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적당히 때 되면 승진하는 그만저만한 삶을 살면 되지 않겠나. 나이대가 잘 맞는 애인도 있으니,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결혼을 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람. 이 와중에 갑자기 자기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본 건, 역시 이 사이트 때문이다. guideline. 나는 2주일 전 까지만 해도 이런 사이트가 세상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대체 이 사이트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것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다음 카페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취미 모임 같은 것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2000년대 중후반에 사회적으로 한참 왈가왈부하던 ‘일베’ 같은 커뮤니티는 뉴스에서만 봤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선택지는 이것뿐이었다.

내가 대체 왜 그랬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그건 내가 평생 한 일들 중에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사춘기 때도 ‘나다운 게 뭔데!’ 같은 질풍노도의 대사는 뱉은 적이 없었다. 나는 ‘나다운’ 게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야망도 별로 없고 욕심도 별로 없었다. 주어진 상황을 극복할 생각도 잘 안 했다.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상황을 미끄러지는 게 가장 나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무엇이 나답지 않은지도 잘 알고 있다. 그 날 나는 정말로 나답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소명을 했다.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서도 열심히 했고, 인사부장과의 면담에서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내 소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회사는 당연히 날 쫓아낼 것이었다. 말하면서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회사 눈 밖에 나고 쫓겨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다른 변명을 할 여지도 없었다. 나는 열심히 내가 비열한 자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징계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이 나가는 길에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한 번 질문을 한 게 최대한의 수확이었다.

“학교 다닐 때 데모 좀 했었나봐?”

데모? 당연히 아니다. 학생회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대학교 1학년 때 학생회 선배들이 사 주는 술이나 좀 얻어먹었지. 내가 학생회와 연관되는 건 오로지 개강총회 뿐이었다. 매년 3월마다 하는 ‘등투’ 조차도 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위원만이 나를 가엾게 여긴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차라리 데모를 열심히 해서 이렇게 된 거라면 낫겠다.

처음에는 징계위원회가 결정을 내리는 동안 회사에 꼬박꼬박 나와 있으려고 했다. 아무리 누명을 뒤집어썼다고 해도, 그 누명에 굴하지 않는 근성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1주일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실 나한텐 그 정도의 근성은 없었다. 그런 근성이 없다는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 어제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농담을 건네던 사람들이 마치 내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업무 협조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래 내가 맡았던 일들을 그냥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 나눠가서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금요일 오후 5시, 나는 5일 간의 연차를 제출했다. 연차는 제출하기가 무섭게 승인되었다.

징계위원회 자리에서 징계위원회의 한 가운데 앉아있던 박 이사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펜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사실 뭐, 이건 소명을 들어보자는 것이고…… 알겠지만 우리가 소명을 듣는다고 해도 우리가 결정하는 거는 아니야. 지금 하는 말은 다 녹취가 되어서 매뉴얼로 들어가고 있거든. 윤 주임도 알지? 매뉴얼이야 윤 주임도 같이 만들었잖아.”

매뉴얼. 매뉴얼을 떠올리자 마음속에 실낱같은 희망이 되살아났다. 회사 측이야 당연히 날 쫓아내고 싶겠지만, 매뉴얼은 좀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해 줄 수도 있다. 여느 회사와 같이 우리 회사도 매뉴얼은 오픈소스였다. 처음 입사해서 매뉴얼을 읽어보았을 때, 오픈소스, A.I., 블록체인이 결합하면 이렇게 완벽한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데에 정말이지 감탄했었다. 매뉴얼은 회사 측의 입장과 노동자 측의 입장을 모두 적당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이 매뉴얼로 매사를 판단한다면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조항들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있었고, 아마도 그 세밀함이 갈등을 최소화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내 상황과 같은 조항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내가 입사한지도 벌써 6년째, 그 사이에 매뉴얼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연차가 승인되고 남은 한 시간 동안 나는 허겁지겁 매뉴얼을 찾아보았다. ‘직장 내 괴롭힘’ 조항만 48개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조항들을 재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의외로 직장 내 괴롭힘의 처벌 규정은 다양했다. 처벌당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게도 한 번도 매뉴얼에서 처벌 규정을 찾아본 일은 없었는데. 퇴사는 최고 수준의 처벌이었다. 회사에 만약 남고 싶다면 그 외의 다양한 처벌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작게는 근신부터 비교적 크게는 감봉까지 있었는데, 그 중 한 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피해자의 요청에 따라 가해자 교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직장 내 괴롭힘의 고통을 증강 감각을 통해 유사 경험하는 징계를 내릴 수 있다.’

아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이런 주장에 동의했던가? 고작 2개월 전에 등록된 조항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록을 뒤져보았더니, 맙소사, 내가 동의한 조항이었다. 누군가의 ID가 기록되어 있었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매뉴얼은 70% 이상이 동의하면 타당한 것으로 승인되어 조항에 기록되는 시스템이었다. 아마 A.I.는 늘 그렇듯 ‘평소에 나였으면 동의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같이 보여줬을 것이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왼쪽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조항을 제대로 읽기나 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그때는 읽으면서 직장 내 괴롭힘 같은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저런 일을 겪어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혹여나 같은 수준의 정신적 고통을 주겠다고 하면 어쩌지. 같은 수준이라면서 ‘피해자의 주장’에 상응하게 조정하면, 실제로는 같은 수준의 정신적 고통이 아닐 수도 있잖아. 머릿속으로 그 밉살스러운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 자식도 아마 소명을 했을 것이다. 그 자식이라면 고통을 얼마든지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서 말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이런 징계를 받느니 차라리 해고를 당하고 말지, 까지 생각했다가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어쨌든 해고만은 피해야 했다. 이깟 별 것 아닌 일로 갑자기 삶이 궤도에서 이탈해서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자식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계약직 직원들이 너무 월급을 많이 받는 것 같다면서 월급 인상률을 통계내서 들고 오는 놈이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 따위로 구는 게 예정되어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계약직 월급 깎는다고 지 월급 오르는 것도 아닌데 희한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도 나는 굳이 거기에 입을 대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건은 추석 선물 때문에 벌어졌다. 노동조합 추석 선물이 계약직에게 똑같이 나가는 게 말이 되냐고, 회식 자리에서 그 자식이 불평을 터뜨렸다.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그 분위기에서도 계속 못된 말을 이어나가던 그 인간에게 못 참고 한 마디하고 말았다.

“영주 씨는 자기가 계약직보다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래, 이것이야말로 정말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가만히 입 다물고 넘어갈 일을,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고 빈정대기까지 했던가. 영주 씨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탁자까지 주먹으로 두들겨대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정식 공채로 들어온 자신한테 모욕이라며 당장 사과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회식 자리는 삽시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씩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데도, 술이 얼근히 취한 그 자식은 내 앞만 만리장성마냥 가로막고 서서는 사과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고 패악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저러다 말겠거니 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끝까지 내 앞을 지켜주던 박 대리까지 미안하다며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나자 이러다가 이 자식이랑 새벽까지 식당에 남게 생겼다 싶었다. 내일 출근도 해야 되는데 이게 뭐하는 시간 낭빈가 하는 생각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잘못이었다. 앞을 가로막은 걸 밀치고 식당 밖으로 나간다는 게 너무 세게 밀치고 말았던 것이다.

녀석은 넘어지면서 소주병 상자들에 한 번 처박았고, 소주병 몇 개가 깨지면서 팔과 이마, 가슴팍에 상처를 남겼다. 그 자식이 피를 흘리며 일어나자 식당에서 몇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라서 상처를 보려고 영주 씨를 붙잡았는데, 영주 씨는 내가 손을 대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움츠러들었다. 나는 아니,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을 덜 망칠 수 있었다. 최소한 다가가지라도 말았어야 했다. 영주 씨는 날 피해 게걸음을 치다가 쌓아놓은 숯불 위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 날 회사에 가 보니, 나는 위협과 폭력에 얹어서 지속적으로 영주 씨를 괴롭혀 온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어떤 직원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때리는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했고, 영주 씨는 찰과상만이 아니라 화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만약 이 징계가 적용되면, 나는 화상 입는 아픔 같은 걸 겪게 되는 건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찰과상이야 내 실수가 맞다고 쳐도, 화상은 절대로 내가 입힌 게 아닌데.

해고도 피해야 했고, 다른 종류의 징계도 피해야 했다. 솔직하게 나는 근신도 억울했다. 이 사건에서 내가 잘못한 게 대체 뭐란 말이야. 내가 직급이 아주 조금 높은 게 문제인 건 알겠지만, 나는 아무 죄도 없었다. 매뉴얼과 A.I.가 나에게 어떤 판정을 내려줄지만 목 빠지게 기다리기엔 너무 억울했다. 연차를 내놓고 나는 야근을 시작했다. 아무도 내게 인사하지 않고 빠져나간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모니터와 씨름했다. 회사 매뉴얼을 해킹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런 컴퓨터 실력도 없었지만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대신 나는 이 매뉴얼이 대체 어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지 지금까지 내린 판정은 어떤 게 있었는지 뒤지기 시작했다. 밤 10시 42분쯤, 나는 guideline을 찾아냈다.

가이드라이너들이 하는 일은 단순했다. 단순했기 때문에 가이드라이너를 굳이 찾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가이드라이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기억도 났다. 인공지능의 오류를 찾아내는 사람들, 잘못 입력된 매뉴얼을 복구하는 사람들, 인공지능이 작동하는 법칙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완전해지면 그야 그 자리를 떠나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다. 가이드라인은 바로 그들을 모아놓은 거대한 인력시장이었다. 가이드라인의 시스템은 가볍고 단순했다.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이들이 필요할 때만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검수하고 확인하고 가이드라인에 입력된 구좌로 돈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청바지를 팔려고 플리마켓에 등록하는 사람처럼 우리 회사 매뉴얼을 비롯한 각종 시스템에 자기 ID를 등록했다.

이게 바로 내가 출근도 안 하고 집 모니터 앞에서 이렇게 마우스 휠을 굴리게 된 사연이란 것이다. 기껏해야 사이트 하나 들어가는 게 뭐가 그리 별 거겠느냐만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지금 여기 들어가서 뭘 하려고 하는 거지? 그야 내 징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거지. 그거 불법 아니야? 꼭 내가 직접 하라는 법도 없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잖아. 몇 번씩 자문자답을 반복하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빠르게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했다. guideline은 새 창으로 활짝 열렸다.

회원가입도 로그인도 필요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익명의 ID가 부여되었다. IP 주소 정도야 당연히 추적되겠지만, 지금 당장 내 ID로 일을 시작할 게 아니니까. guideline에는 서둘러서 각자 일을 주워가는 업무 게시판 말고도, 일할 때 정보를 주고받는 정보게시판도 있었다. 정보게시판에 들어가자 ‘한 ID 같이 쓰실 분 찾는다’는 게시물이 밑도 끝도 없이 많이 보였다. 정보게시판은 거의 동업자를 찾는 게시판이었다. 몇 개 글을 읽어보니, 한 ID를 같이 쓰는 게 기업 측에 걸리면 곧바로 잘리지만, 몇 사람이 한 ID를 같이 써서 나오는 처리 속도가 시스템에 쌓는 신용에 비하면 충분히 감내해 볼만한 모험인 모양이었다. 너무 여러 명으로 ID를 돌리다가, 잔뜩 벌어놓은 구좌에서 돈을 하나도 못 찾게 되어서 어쩌면 좋냐고 울부짖는 가이드라이너도 있긴 했지만.

찔러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여기였다. 정보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설마하니 회사에서 가이드라이너 게시판까지 하나하나 뒤지진 않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답변만 달리면 지울 생각이었다.

[한솔 매뉴얼 다뤄보신 분 찾음. 일 편한지, 시간 얼마나 걸리는지, 페이도 궁금합니다. 경험 있으신 분 ID 한 번 태워주시면 감사.]

글을 올려놓고 나서도 다른 글들을 몇 번씩 살펴보았다. 혹시나 이 회사 직원인 거 티가 나진 않는지, 아무도 의심하진 않을지 불안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안 때문에 이런 저런 호르몬이 솟구치는 감각이 손끝까지 느껴졌다. 손끝이 괜히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댓글이 달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댓글엔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줄이 달려 있었다.

[ㅋ fall_guideline]

그 한 줄이 달리자마자 다섯 명이 댓글에 하트를 박아댔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고민하다가 우선은 정보게시판에서 fall_guideline을 검색해 보았다. 당연히 글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사람을 찾고 나서는 글을 지우는 게 보통일 터였다. 일단 종이에 fall_guideline을 쓴 뒤 원글로 돌아갔다. 어느새 댓글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얼른 내 글도 지웠다. 이 이상의 정보를 얻기란 쉽지 않을 모양이었다.

전체 검색창에 fall_guideline을 쳤다. 한 명의 가이드라이너가 검색되었다. 지금껏 한 업무들을 살펴보자, 대체로 매뉴얼 작업이었다. 회사 매뉴얼 검수, 회사 매뉴얼 입력, 회사 이름은 다 가려져 있었지만, 글자 하나를 보고 등줄기에 전율이 오는 느낌이었다. 우리 회사에서만 사용되는 지출 은어였다. 같은 업종인 다른 회사에서도 이 은어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틀림없었다. 가려진 회사 이름이 우리 회사 이름이었다.

누군지 모를 가이드라이너는 6년 전부터 이 회사 매뉴얼을 중점적으로 검수하고 있었다. 월수입은 아마도 한 달에 120만 원 정도. 120만 원으로 생활이 되나, 잠깐 생각했지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정도는 감수하고 일하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다른 일이 있어서 부업으로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연극이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가이드라이너로 많이 일한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래, 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어. fall_guideline의 프로필 페이지를 띄워놓은 채 몇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뭐라고 말을 걸지 고민했다. 직원이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동업을 원하는 척 말을 거는 게 제일 안전할 것이다. 우리 회사 매뉴얼을 제일 많이 건드리는 fall_guideline의 ID라면 회사에서도 전혀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냥 현재 심의가 어떻게 진행 중인지만 확인해도 완전히 이득이다. 그때부터는 어떻게든 해 볼 여지가 생긴다.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결심을 했다면 한 번에 실행해야 한다. fall_guideline은 마침 접속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한솔 매뉴얼 많이 다루신다고 들었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안녕하세요. 한솔 직원이신가요?]

당황해서 화면을 꺼 버릴 뻔 했다. 여기서 로그아웃하면 한솔 직원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회사에서도 매번 우리 회사 관련한 일만 맡아서 하려고 하는 이 사람 한 명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혹시 회사 측에서 심어놓은 스파이 같은 존재는 아닐까. 일단 자연스럽게, 하지만 너무 뜸들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너무 뜸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생각보다는 조금 뜸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뇨, 한솔이 매뉴얼이 복잡하고 잘 되어 있다고 들어서 시범삼아 연습 좀 해 볼까 해서요. 앞으로 매뉴얼 쪽만 공략해서 일 좀 해보려고요. 혹시 ID 공유 받으시나요?]

[아, 그래요? 제가 글 안 올렸는데 저한테 먼저 이렇게 메시지 보내시는 분들 한솔 직원 분들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이라도 그냥 로그아웃하고 도망치는 게 나은가. 아니, 아직은 그렇게까지 의심을 안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냥 신기해서 말을 한 걸 수도 있잖아. 사실은 내가 누군지까지 다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역시 회사 쪽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함정수사 같은 건 아닐까? 지금까지 회사에서 징계받았던 사람들이 누구였지? A.I. 프로토콜이니까 다 잘 받았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혹시 함정수사에 걸려들었던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닐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동안 fall_guideline은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이 일을 오래해서 한솔에 대한 건 웬만하면 다 알거든요. 실제 직원 분들보다 더 많이 알지도 몰라요. 수입 지출이 어떤지 회사 전체에 공유 안 되잖아요. 근데 여기선 다 알 수 있어요. 데이터 관리도 A.I.로 하시니까. 윗선들에서 좀 수상한 움직임 있는 것도 알 수밖에 없고, 자금 흐름 좀 묘하게 흘러가서 살짝 떼먹고 있는 것 같은 이사님도 누군지 알고요. 이런 거 많이 알게 되면 실제로 그걸 써먹느냐 아니냐랑은 별개로 좀 힘이 생긴 것 같은 느낌도 들죠. 가이드라이너로 회사 매뉴얼 다루는 사람들이 그런 거 때문에 매뉴얼 다루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님도 약간 그런 건가요?]

[네네, 맞아요. 그런 거 많이 알면 나중에 취직하는 데도 도움 될 것 같고요. 이거 하면서 이런 저런 공부도 좀 될 것 같고요.]

싸늘하게 식었던 피가 다시 자기 온도를 찾는 느낌이었다. 날 의심한 건 아니었구나.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이런저런 정황도 알게 되면, 오히려 회사 안에서 입지가 탄탄해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회사 안의 다른 사람들도 가이드라이너로 일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가이드라이너는 계약직조차도 아니고 일용직인데.

[아, 취직 준비하시는구나. 가이드라이너 하면서 취준하시는 분들 있죠. 저는 우울증이 심해서 그건 좀 어렵지만……. 부럽네요.]

[그러시구나…….]

느닷없이 무거운 말이 날아왔다. 이 사람한테 잘 보여야 어떻게든 되는데. 나는 버벅거리며 뭐든 위로가 될 말을 마구 주워섬겼다.

[그래도 저보다 훨씬 나으시잖아요. 저는 아직 취준생인데, 여기에서 이렇게 돈도 버시고, 이력도 탄탄하시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회사 내부 사정도 많이 아시고.]

[맞아요. 정말 웃기죠. 그 회사에선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제가 뒤에서 회사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는 게요. 그래서 한솔 직원 분들 도와드린 적도 꽤 있어요. 3년 전에 회계 실수로 징계 받을 뻔한 오성희 과장님, 가이드라인 찾아오셔서 제가 미스 분량 맞춰 드린 적도 있고요.]

기억났다. 생각보다 시재가 많이 비었는데, 분량이 발견되어서 없었던 일이 되었다. 오성희 과장은 그 사이 그 부서 차장이 퇴사까지 해서, 이제 차장 대우로 회사 생활 멀쩡하게 잘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사람, 나도 도와줄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까 제가 도와줄 필요가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이정직 주임님.]

역시 이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진작에 내려놓고 말을 시작하는 게 나았을텐데. 나는 팔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끼면서 천천히 타자를 쳤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지금 저한테 말 걸어올 사람이 이정직 주임님 말고 더 있겠어요? 이정직 주임님 인사고과도 늘 무난하시고, 사내 관계도 다 무난하시고, 적당히 일찍 출근해서 적당히 늦게 퇴근하시고, 회사 생활 하시는 동안 정말 무탈하게 잘 지내오셨는데 갑자기 날벼락을 맞으셔서.]

글자를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도 몰라주는 걸 이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내 회사 생활을 같이 일한 동료들보다 더 꼼꼼하게 보고 있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감격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화 태도로서 엎드렸단 얘기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지금 fall_guideline이 눈앞에 있었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fall님.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영주 씨를 평소에 괴롭혔다는 건 완전히 모함이고요. 그 술자리에서도 제가 일부러 영주 씨를 때리거나 밀친 건 절대로 아니에요.]

[맞아요. 소명하신 것도 다 들었어요. 들었다기보단 A.I.가 문서화한 걸 본 거지만……. 그런데 정말로 평소에 영주 씨를 안 괴롭히신 거예요? 거기서도 그런 적 없다고 증언하시더라고요.]

[당연하죠. 제가 영주 씨를 대체 왜 괴롭히겠습니까.]

[영주 씨한테 보고서 줄 간격 틀렸다고 두 번 다시 쓰게 하셨죠.]

[그건 영주 씨가 입사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서……. 아직 회사 문서에서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질 잘 모르는구나 싶어서 그랬지요. 자기가 직접 해봐야 늘기도 하고…….]

[줄 간격이 틀렸다는 얘기도 안 해주시고 빠꾸하셨잖아요.]

[예? 제가…… 그랬나요? 전 얘기를 한 줄 알았는데…….]

[영주 씨만 빼놓고 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가신 적도 있잖아요. 이 주임님이야 다른 사람이 얘기할 때 딱히 뭐라고 안 하시는 분인 건 알지만, 영주 씨가 이 주임님 직속인데 영주 씨 좀 기다리자고 말할 수도 있지 않아요?]

[그때는 다들 기다리다가 나간 거라…….]

[10분도 아니고 딱 3분 기다리셨잖아요. 영주 씨 그날 화장실 갔다가 돌아와서 혼자 탕비실에서 삼각 김밥으로 때웠던데.]

가장 불안한 가능성이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이 fall_guideline이 영주 씨일 가능성. 만약 그렇다면 이것저것 다 끝장이다. 이 기록을 회사에 넘기면, 내가 가이드라이너를 사주해서 기록을 바꾸려고 했던 것까지 들킨다. 하지만 만약 영주 씨라면 직원이 뒤에서 회사 기밀을 캐내고 다닌 셈이니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이드라이너들은 아주 분절된 정보만 접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정보를 통합할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회사 내부 사람이 틀림없다. 영주 씨……. 나는 의혹에 차서 천천히 자판에 영ㅈ까지 쳤다. 그때 fall_guideline이 다시 말을 건네 왔다.

[믿든 안 믿든 상관은 없지만, 나는 영주 씨가 아니에요. 영주 씨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여기서 나가버리면 내가 손핸가, 이 주임님이 손해지. 그리고 아마 그것 때문에 겁내는 것 같은데. 2개월 전에 등록된 가해자 교화 프로그램, 그렇게 겁낼 것도 아니에요. 회사가 고문 같은 걸 하는 데가 아니잖아요. 상한선이 정해져 있고, 일반적인 직장 내 괴롭힘 평균의 스트레스를 교육차원에서 잠깐 주는 거예요. 영주 씨가 화상을 입었다고 증강 감각으로 화상을 전해준다거나 그러지 않아요.]

몰랐다. 매뉴얼에는 나와 있지 않았는데. 듣고 보니 fall_guideline의 말이 합리적이었다. 그렇지, 지금은 21세기고 나는 인권이라는 게 멀쩡하게 있는 문명국가에 사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깐 이성이 나갔었던 것인지.

[그리고 이 주임님 소명하는 거 들어보니까, 나도 도와주고 싶긴 하더라고. 내가 위에서 얘기한 건 영주 씨 입장에선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생각할 소지가 있었다는 거지, 이 주임님 괴롭히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영주 씨가 계약직 직원들 차별하고 그랬던 건 사실이니까. 근데 이 주임님, 이번에 노조에서 계약직도 노조로 받으려고 일부러 추석 선물 준 건 알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사진에서 그거 막으려고 난리잖아요.]

전혀 몰랐다. 그래서 인사부장이 그렇게 싸늘한 표정을 지었구나.

[그리고 영주 씨, 인사부장님 외조카잖아요. 그것도 모르셨어요? 주임님 과에서도 이제 3분의 2 정도는 다 아는 거 같던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모니터 앞에 굳어 있는 날 들여다보기라도 한 건지 fall_guideline은 나를 달래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괜찮아요. 인사부장이 뭐 회장도 아니고. 그런 걸로 더 징계하려고 하면 인사부장님이 문제인 거지. 저는 소명 들어보니까 이 주임님 편 안 들 수가 없겠던데요. 이 주임님 생각보다 되게 의식 있으신 분이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 같은 거 좀 하셨나 봐요?]

[아니오……. 그런 건 전혀 안 했는데, 하필 그 날 그 말을 들으니까 욱하더라고요.]

[맞아요. 이 주임님 학생운동 안 하셨죠. 저도 잘 알아요.]

회사 생활이 아니라 회사 바깥 생활까지 수집한다고? 그건 인공지능이 너무 월권인 거 아닌가? 아무리 정보라지만,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를 회사에다가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그런 정보까지 다 입력되어 있어요?]

[에이, 그럴 리가 없죠. 그렇게 되면 노동자 사찰이죠. 경찰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이 주임님, 심윤지라는 사람 기억하세요?]

[심윤지요……?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정말요? 서운해 하겠다. 심윤지 씨는 이 주임님 엄청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라고도 하던데요?]

그렇게 강렬한 마음을 나한테 품을만한 사람이 있었나? 아무리 헤어졌다고 하더라도 여자친구 이름을 기억 못 할 리는 없고, 나한테 짝사랑이라도 했던 사람이 있었나? 대학교 때라면 있을 법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어, 죄송한데…… 정말로 기억이 잘 안 나요. 죄송합니다. 심윤지 씨가 누구신지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혹시 fall_guideline 님이 심윤지 씬가요?]

[심윤지 씨는, 이 주임님 두 학번 아래 후배에요. 학교 다닐 때는 단과대 춤 동아리를 했었고요. 춤을 그렇게 잘 추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연을 하면서 여러 명이 합을 맞춰보는 걸 즐거워했어요.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무난하고 평범하게 산 이 주임님한테는 잘 기억이 안 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 주임님 친한 동기가 춤 동아리 했었던 건 기억하시죠?]

[네…… 승훈이가 했죠.]

[심윤지 씨는 이 주임님이 정승훈 씨 자취방에서 본 그 후배에요.]

기억이 났다. 동아리 하면 이런 애들이랑 이렇게 노는구나 부러워했던 생각도 났다. 1학년이라고 했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약간 번진 화장으로 승훈이 침대 위에서 일어난 그 애는, 이불로 몸을 덮고 있었지만 승훈이가 이불 좀 치워보라고 나한테 가슴 좀 보여주라고 하니 입술을 비죽이며 이불을 내렸다. 갑자기 눈앞에 여자 가슴이 드러난 게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그날 심윤지 씨는 정승훈 씨랑 술을 많이 마셨어요. 심윤지 씨가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동아리 선배였던 정승훈 씨를 좋아했거든요. 정승훈 씨가 술 취해서 몸을 잘 못 가누는 심윤지 씨를 업고 자취방에 들어갔을 때, 심윤지 씨는 가슴이 너무 뛰어서 몸 전체가 심장이 된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정승훈 씨가 심윤지 씨를 만지기 시작했을 때, 심윤지 씨는 조금 당황했었죠.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심윤지 씨는 정승훈 씨를 좋아했고, 정승훈 씨를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정승훈 씨는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심윤지 씨의 옷을 벗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죠. 그날의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침까지도 심윤지 씨는 잘 이해하질 못 했어요. 놀러온 친구에게 가슴 보여주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요.]

[그랬군요……. 저는 그런 상황인 줄은 잘 몰랐어요…….]

[네, 모르셨겠지요. 심지어 이 주임님은 심윤지 씨의 이름조차 모르셨으니까요. 이 주임님이 가슴 보여달라면 보여주는 여자애를 설명한 방식은 이름이 아니었어요. 왜, 그 춤 동아리 하는 키 작고 단발인 애. 이름은 몰라. 그냥 막 보여주더라고. 걔네들은 그러고 노나 봐. 신기하다. 이 주임님이야 그냥 신기해서 얘기하셨겠죠. 이 주임님한테 무슨 악의가 있었겠어요.]

[혹시 심윤지 씨신가요? 만약 심윤지 씨라면 제가……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많이 상처 받으셨겠어요.]

[이 주임님의 이야기를 들은 이 주임님의 동기, 후배, 선배들은 죄다 심윤지 씨를 찾아와서 괴롭히고, 만지려 들고, 왜 비싸게 구냐고 타박하고, 가슴 보여달라고 조르고, 그러다 멋대로 심윤지 씨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심윤지 씨에 대한 소문을 내고, 심윤지 씨가 우울증으로 자살시도를 하고, 학교를 자퇴할 때까지 그랬는데. 아마 그것도 모르셨겠지요?]

전혀 몰랐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 후배를 학교에서 마주친 기억조차 제대로 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기는 했다. 나는 자살시도를 하는 이상한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가슴을 보여주는 이상한 사람도 잠깐 신기해하고 주변에게 얘기하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극단적인 건 피하면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승훈 씨 소식은 들으셨어요?]

[아니오…….]

승훈이는 재작년까지도 한 해에 한두 번은 만나서 소주 한 잔씩은 하곤 했었다. 취직해서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오지 않길래 굳이 연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각자 취직해서 바쁘게 살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니까. 굳이 그걸 서운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정승훈 씨, 앞으로 만나기 어려울 거예요.]

fall_guideline은 웃는 이모티콘을 띄워 보였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하고 싶었던 것들은 모조리 다 포기해야만 했죠.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 종일 침대에 누워 있곤 해요. 긴 시간을 울면서 보내요. 잠드는 것 말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걸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요. 나는 선배들이 준 상처를 딛고 일어서지 못했어요. 계획했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어요.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이거였어요. 오래 일하지도 못해요. 선배들은 내 인생을 모조리 끝장냈어요. 그리고 자기들은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더라고요. 선배들의 학과와 동아리에도 매뉴얼이 있었어요. 그 매뉴얼은 나 같은 사람의 일상을 지키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었지요. 선배는 악의가 없었고, 나는 거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fall_guideline은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띄엄띄엄한 매뉴얼은 날 지켜주지 못했고, 아주 촘촘한 매뉴얼은 선배를 지켜줄 수 없네요. 아주 잘 된 일이죠. 다행히 선배네 회사는 증강 감각 경험에도 한계를 두고 있고, 선배는 경험하고 교육받고 적당히 근신하면 원래 자리로 복귀할 수 있을 거예요. 나랑은 다르게. 나는 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선배가 증강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어요. 선배한테 실행되기 전에 그 증강 감각은 회사가 설정한 내용일 거예요. 실행되는 순간 선배는 단 몇 분 동안 내가 겪은 몇 년의 고통을 통합적으로 겪을 수 있어요. 선배는 지금껏 아주 단선적으로 고만고만하게 살아왔잖아요. 이 깊은 고통이 선배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지 벌써 기대되지 않나요? 정말 길지 않아요, 아주 짧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선배는 그걸 피하겠다고 회사를 자기 발로 관둘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결혼도 해야죠. 그냥 잠깐 내가 느낀 고통도 느껴봐요. 정승훈은 나랑 똑같이 우울증에 PTSD를 겪으며 방구석 폐인이 되어 살고 있지만, 선배는 정승훈보다는 강인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fall_guideline의 접속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들렸다. 화면에는 ‘징계위원회’라는 다섯 글자가 보였다. 매뉴얼을 토대로 철저하게 구성한 징계 명령이 이제야 메일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내년에는 결혼도 하고, 차근차근히 안정적으로 살아야 되는데……. 내가 뭐 그렇게 큰 부나 명예를 탐내 본 적도 없는데……. 휴대폰 액정을 눌러 도착한 메일을 열었다.

댓글 2
  • 경희 19.10.02 23:11 댓글

    앞부분 완전 저희 회사 이야기인줄 알았어요...

  • 경희님께
    이서영 19.10.03 21:20 댓글

    회사가 무엇인지 상사가 무엇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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