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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 외시경 by 아밀

2019.11.15 00:0511.15

6회차.jpg
[특집] 괴이한 거울

외시경

아밀

* 주의

폭력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명, 사건, 이야기는 모두 허구입니다.

1. 드레스룸

“이런 새 아파트에 한 번 살아보면 옛날 집에선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싶을 거야.”

남편은 내게 말한다. 자못 확신에 찬 말투다. 남편도 신축 아파트에 살아보는 것은 처음인데도.

“이것 봐. 방 각각의 전력을 이 스마트패드 하나로 조절할 수 있어.”

“밖에 있는 무인 택배함에 택배가 도착하면 알림이 들어오게 되어 있네. 이거 좋네.”

“홈 시스템을 스마트폰으로 연동할 수도 있어. 이것 좀 봐.”

벽에 박힌 화면과 자기 스마트폰을 번갈아 터치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남편은 마치 소년 같다. 나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데도 남편은 흥분할 때는 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나는 옷을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남편이 보여주는 스마트폰 화면에 눈길을 돌린다. 푸른 집 모양의 아이콘이 떠 있다.

“만약 가스를 켜놓은 채 깜빡하고 외출했다고 쳐. 그러면 이 앱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이렇게. 간단히 확인하고 끌 수 있어. 어때, 편하겠지? 너같은 덜렁이에게는 아주 유용하겠지.”

나는 나를 보며 짓궂게 웃는 남편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그의 얼굴이 보기 좋다. 남편은 진심으로 미래를 낙관하고 있다. 이 집에서의 삶이 잘 풀릴 것이라고. 우리 부부의 일상이 바뀔 것이라고,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거라고. 그리고 그 믿음을 내게도 심어주려 애쓰고 있다. 나는 남편의 그런 노력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 정말 좋네. 안전 문제는 전혀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나는 대답한다. 물론 집 밖에서 스마트폰으로 집 안의 가스를 끄고 켜는 일은 남편이 할 것이다. 내게는 스마트폰이 없다. 긴 시간 혼자서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다. 남편은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 사실을 잠시 잊어버린 모양이다.

심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앓는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극도의 무기력에 빠져서 보낸다. 외출할 에너지도 없을 뿐더러, 밖에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이 내게는 너무 두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다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엿한 정상인이자 사회인으로서 저마다의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데 나만 쓸모라고는 조금도 없는 한심한 인간 쓰레기인 것 같다. 결혼한 지 6년째인데 아직 아이를 가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맞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도 만나지 않고, 온종일 집에서 넷플릭스나 책만 보고 홈쇼핑으로 돈이나 쓰면서 남편의 삶에 부담만 주는 인간. 너무 멍해서 집 안에서도 물건을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가스불이나 냉난방 단속도 제대로 못할 정도이니, 그런 나를 혼자 두고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얼마나 불안할까. 내가 늘 어두운 표정으로 유령처럼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남편은 얼마나 울적할까.

집을 고를 때 남편은 나를 위한 여러 조건을 신중히 고려했다. 번화가에 가깝지 않아 조용하고 나를 자극할 요인이 별로 없는 곳. 공원이 가까이에 있어 내가 산책이나 조깅을 하기에 좋은 곳. 내가 혼자 있어도 안전할 만큼 보안이 확실한 곳.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는 곳.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바로 이 신도시의 신축 아파트 단지였다.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한 지역이라서 주변 일대가 휑했다. 카페나 대형 마트나 꽃집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편의점보다 부동산이, 분식집보다 함바집이 더 많다. 갓 심은 앙상한 어린 나무들이 가지런히 늘어서서 겨울 바람을 맞고 있는 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는 공터에 가까웠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떤 업체가 들어설지 알 수 없는 상가들의 1층 전면 유리창들이 물을 다 뺀 텅 빈 수족관처럼 길거리에 늘어선 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서는 길 어귀에서는 도배업체나 입주청소업체에서 나온 사람들이 ‘입주를 축하합니다’라거나 ‘대박 나세요’ 같은 문구가 적힌 전단지를 돌리곤 한다. 새로운 땅, 새로운 삶. 이전의 누추했던 삶은 모두 지우고, 마치 그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눈부신 삶을 살라는 축복의 말들. 신도시가 구도시를 지웠듯이, 이곳에 발 붙이고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애고 이렇게나 번쩍이는 새 아파트와 새 오피스텔과 새 빌딩을 지었듯이.

아니, 이것은 너무 시니컬하고 과장스러운 비유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남편도 내가 비유를 지나치게 많이 쓴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결혼하기 전, 강의실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만났을 때부터 그랬었다.

현재에 집중하자.

과거의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라고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조언했다.

지금 우리는 집을 정리하고 있다. 남편이 이 집의 최첨단 시스템을 살피는 동안, 나는 이삿짐 센터 사람들이 벽장에 되는 대로 욱여넣은 옷 꾸러미들을 풀고 계절과 종류에 맞게 정돈하는 중이다. 이 방은 드레스룸이다. 드레스룸이라는 것이 있는 집에 살아보는 것 또한 난생 처음이다. 드레스룸에는 거대한 전신거울과 더불어 방의 삼면을 둘러싸는 옷장과 행거, 그리고 에어드레서가 마련되어 있다. 남편은 옷차림에 신경을 꽤 쓴다. 문인이라고 해서 담배와 소주 찌든내를 풍기는 후줄근한 남방 차림으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고 남편은 늘 말한다. 사람은 옷차림이 멀끔해야 강단에서도 학생들에게 자연스러운 권위와 신뢰를 얻을 수 있고, 동료 교수들이나 출판업계 사람들이나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무시받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남편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연애 시절 남편에게 느꼈던 호감의 이유 중 하나도 그 차림새였으니까. 나는 남편의 셔츠, 넥타이, 장갑, 양말, 손수건을 그가 자주 쓰는 순서대로 서랍장이며 벽장 문고리에 정렬한다. 그이의 매끄러운 실크 넥타이의 촉감과 장갑에서 풍기는 가죽과 향수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내 옷은 남편의 옷보다 훨씬 적다. 나야 사회 생활을 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 옷차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는 종종 주말에 나를 백화점으로 데려가서 주로 아이보리색, 베이지색, 검정색, 회색 등의 색깔로 된 격조 있는 옷을 사주고 그에 짝이 맞는 구두나 단화를 사준다.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때는 값비싼 브랜드의 손목시계 같은 것을 사주기도 한다. 남편과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자리가 아니면 잘 차려입고 나갈 일이 별로 없는데도 남편이 내 차림새에 그렇게 신경 써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잘 차려입히지 않으면 내 몰골이 같이 다니기 창피할 만큼 추레한가 싶어서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남편이 사주는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남편은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저것 봐, 저 꼴에 반 클리프 앤 아펠 시계라니, 저게 바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아니고 뭐겠어?’ 이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리 고상한 척해봤자 본성이 어디 가려지나.’ 이렇게들 생각하는 것도 같다. ‘아이보리색 재킷을 입으니 가뜩이나 큰 가슴이 더 커 보이는군.’ ‘둔해 보여.’ 이렇게들 생각하는 것도 같다.

“여보, 이리 와봐. 이것 좀 봐.”

거실에서 남편이 부른다. 나는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밖으로 나간다.

남편은 거실의 대리석 벽 한편에 박혀 있는 커다란 스마트패드 앞에 서 있다. 스마트패드에는 조그맣고 어둑한 화상 하나가 떠 있다.

“이게 지금 우리 집 현관 밖이야. 집 안에서 현관문 밖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거야.”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화면을 들여다본다. 작은 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집의 현관문이 보인다. 왼편에 있을 엘리베이터와 오른편에 있을 계단참과 창문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맞은편 집 현관문만 덩그마니 보인다.

“밖에서 누구 수상쩍은 사람이 기웃거리는 것 같거나,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나 하면, 이걸 이렇게 켜서 확인하면 돼. 옆에 있는 이 버튼을 누르면 녹화도 할 수 있어. 굉장하지?”

나는 그다지 굉장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기능을 쓸 일이 있겠는가 싶다. 어차피 현관문에는 외시경이 달려 있지 않은가. 밖에 누가 오면 현관으로 가서 일단 외시경으로 밖을 본 다음 열어줘야 할 사람이면 문을 직접 열어주는 것이 편하다.

“신기해라. 기술이 정말 많이 발전했나봐요.”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밖을 확인한 다음 문을 열어주려면 현관까지 나가긴 해야겠네요. 나 대신 문을 열어주고 손님을 거실까지 모셔줄 집사 로봇 같은 것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농담을 던진다. 하지만 남편은 내 농담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그는 눈을 약간 찌푸리며 웃는 둥 마는 둥하더니 스마트패드의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 또 다른 기능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혀끝을 살짝 깨문다. 나는 이렇게 주변머리가 없다. 상대방이 즐거워할 만한 농담 한 마디 자연스럽게 할 줄 모른다.

남편은 나의 안전을 위해준다.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타인들로부터 상처 받지 않기를 원한다. 내가 불행하거나 슬프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내 삶에서 나의 안위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다. 나와 나 사이에는 방범 카메라도, 두껍고 튼튼한 현관문도, 잠금 장치도 없다. 나로부터 나를 쫓아낼 수는 없다. 나는 시도때도 없이 나를 침범한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2. 서재

남편은 수도권에 있는 국립대 문예창작과의 전임교수로 일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론가로서 거둔 성과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맥과 집안의 힘이 컸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국문학자이자 시인이고, 외조부가 문체부 차관을 지냈으며(당시에는 ‘문화부’였다지만) 어머니가 피아니스트다. 굉장한 엘리트 가문이다. 그런 집에서 자라는 것은 어떤 경험일지 나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집 안에 책이 가득하고, 오후에는 클래식 음악이 울려퍼지고, 식사 자리에서는 와인 한 잔과 함께 유럽의 최신 미학 이론을 토론하는 그런 분위기였을까. 시댁 식구들은 나를 만날 때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내가 있는 자리라서 나를 배려하느라 말을 골라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분들은 교양인이니까 말이다.

남편의 서재는 시댁에서 언뜻 본 시아버지의 오래된 원목 서재와는 사뭇 다르다. 모던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던 남편의 요청에 따라 인테리어 업자들은 책장과 책상 일습을 블랙 앤 화이트의 철과 대리석으로 꾸며놓았다. 바닥에는 헤링본 무늬의 회색 러그가 깔려 있고 그 위에 커다란 책상과 데스크톱 컴퓨터가 자리잡았다. 책상 위에는 남편이 요즘 보는 책과 학술지, 그리고 후배나 출판사 들이 보내온 증정 도서들이 널려 있다.

오늘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그런 밤이 잦다--나는 서재에 들어와 시간을 보내곤 한다. 남편은 내가 서재에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밤에 텔레비전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남편의 잠을 깨우면 안 되니 큰 소리가 나는 활동은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잠이 안 오면 그저 힘을 빼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조언하지만, 나는 그러고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도리어 자꾸 나쁜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남편이 깊이 잠든 틈을 타 슬쩍 침대를 빠져나오고 마는 것이다.

나는 썰렁한 공기 속에서 가디건을 바투 여미고, 어제 읽다 말았던 브라질 현대 작가의 소설집을 꺼내들고 안락의자로 걸어간다. 그런데 안락의자 앞 다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스탠드 불빛 아래 분홍색과 먹색으로 된 표지가 이 서재와 어울리지 않는 소품처럼 도드라진다. <잘 자, 나의 아침>이라는 낭만적인 제목도. 나는 책을 펼쳐본다. 면지에 반듯한 글씨체로 “스승님께, 존경을 담아”라는 문구와 함께 여자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다.

종종 있는 일이다. 남편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등단하고 첫 작품집을 낸 뒤 고맙다며 책을 보내온 것이다. 헌사에는 다른 말은 적혀 있지 않지만 물론 이 책을 잘 읽어주고 좋은 비평을 써주시면 좋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소설집의 목차를 살피고, 뒤표지의 추천사를 살핀다. 책장을 손끝으로 훑어본다. 종이가 깨끗하다. 남편은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았거나, 만약 읽었다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 듯하다.

나는 이 학생이 남편을 좋아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요즘은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나 말고도 많았다. 하기야 일반 여성 독자층 가운데서도 그는 인기가 있는 축이었다. 문필가로서 남편은 날카로운 독설로 무장한 칼럼에서부터 로맨틱한 고백의 어조가 깔린 에세이까지, 대중에 호소할 만한 언어를 유려하게 구사했다. 미남이라고까지 할 만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훤칠한 체격과 세련된 옷차림은 어디에서나 그를 돋보이게 했다.

그와 나의 연애는 문학계에 터진 하나의 스캔들이었다. 나이 차이라든지 선생과 학생이라는 관계도 관계였지만, 일단 나는 타고난 근본부터가 그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아빠가 없고 엄마는 호프집을 하고 오빠가 가출해버린 콩가루 집안에서 자랐다. 보고 배운 게 없으니 취향이랄 것도 없었다. 책은 기준 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고, 옷은 그때그때 유행에 따라 인터넷 쇼핑몰이나 로드샵에서 사 입었다. 그리고 술과 담배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 학창 시절은 명료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나날이 별로 없다. 온통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동기들과 선배들과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실없는 농담과 누군가에 대한 험담과 문단에 대한 욕과 아이돌 얘기와 영화 얘기와 남의 연애 얘기를 하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런 험담과 욕설과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잔뜩 취한 채 동기와 같이 노래방에 가서 누가 더 노래를 많이 부르나 내기를 하다가 그만 섹스를 해버렸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내가 그와 섹스했다는 소문이 과 안에 퍼졌다. 그러자 나와 사귀던 선배는 준비하고 있던 문집에서 내 원고를 빼버리고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휴학계를 내고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자 내가 사귀었던 선배와 친한 다른 선배가 매일같이 도서관에 찾아와 자기랑 사귀자고 했다. 나는 그 선배와 사귀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내 현남친이 전남친에게 카톡으로 나를 ‘젖통 크고 잘 대주는 년’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어디선가 내 섹스 영상이 나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다시 휴학계를 냈다.

그대로 다시는 학교에 돌아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그때 내게 보낸 문자 한 통이, “네 글이 보고 싶다. 수업 때 보자.”라던 그 문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불현듯 정신을 차린다.

또 과거에 대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현재에 집중하자.

나는 책을 탁자에 내려놓고 주위에 귀를 기울인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웅 하는 진동음 같은 것이. 어딘가 아래쪽에서, 발밑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니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나는 이곳이 새 아파트임을, 내가 이사를 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러고 보니 저 소리가 무엇인지 알겠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였다. 서재는 엘리베이터실과 가까이 붙어 있는 방이고, 안락의자와 탁자가 있는 이 위치는 특히 가장 가깝다. 게다가 입주민이 아직 별로 없어서 아파트 전체가 조용하니, 깊은 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이토록 크게 들리는 것도 당연하다. 마치 거대한 크레인이 움직이는 소리 같다.

나는 벽에 대고 귀를 기울인다. 엘리베이터를 연결한 줄이 도르래를 스치는 소리까지 생생히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대강 몇 층쯤에 있는지도 알 것 같다. 남편은 이 집이 좋은 자재를 써서 방음도 잘 된다고 했는데. 바깥 소리가 이렇게까지 잘 들리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누가 이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쓰고 있는 것일까. 이 동에 입주한 세대는 우리 부부를 빼면 두세 집밖에 없댔는데. 여기는 19층, 꼭대기층이다.

엘리베이터는 꼭대기층에서 멈춘다.

땡 하고 경쾌한 신호음이 울린 순간 나는 서재 밖으로 나간다.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다. 잰걸음으로 살금살금 현관까지 가서 외시경에 눈을 댄다. 동그랗게 만곡된 렌즈 너머로 맞은편 집 현관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어떤 젊은 여자의 뒷모습이 나타난다.

여자는 긴 머리를 묶었고, 자주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다. 어두침침한 홀에서 그 선명한 자주색 드레스는 비현실적일 만큼 강렬해 보인다. 여자는 도어락을 누르지도 않고,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넣지도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다.

2초쯤 지났을까, 맞은편 집의 현관문이 열린다.

여자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현관문이 닫힌다.

고요해진다.

3. 식당

“저기, 여보.”

망설임 끝에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말을 꺼낸다. 남편은 스마트폰으로 신문을 보면서 입에 시래깃국을 밀어넣고 있다.

“응?”

“우리 앞집 말이에요. 거기 이미 입주했던가?”

“아니. 빈 집이지.”

남편은 무신경하게 대답하고 밥을 떠서 입에 밀어넣는다.

“그런데 어젯밤에 누가 들어가던데.”

남편이 숟가락을 멈칫한다.

“누가? 언제?”

“당신 자고 있을 때. 나 잠이 안 와서 누워 있다가 잠깐 화장실에 갔는데... 밖에서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길래. 궁금해서 현관 외시경으로 봤더니, 어떤 여자가 그 집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어떤 여자?”

“몰라요. 젊은 여자. 난 뒷모습만 봤어. 무슨...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 실크 드레스.”

남편이 미간을 찡그린다.

“실크 드레스? 이 날씨에?”

나는 어깨를 움츠린다.

“그러게요. 이상하지. 추울 텐데 코트도 없이... 그리고 그 드레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어요. 정말 낯이 익었는데, 당신이 혹시 알까? 아주 진한 자주색에, 등이 많이 파인... 홀터넥 같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잘못 봤겠지.”

남편이 딱 잘라서, 그러나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그는 수업에서 학생의 발표를 듣다가 잘못된 내용이 나오면 꼭 저런 말투로 제지하곤 했다. 나는 순간 그의 지적이 드레스가 홀터넥이었다는 내 관찰에 대한 반론인 줄 착각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내가 보았다는 젊은 여자의 존재 자체를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집은 빈 집이야.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고.”

남편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말하듯 선언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남편에게 어쩐지 화가 난다. 하지만 내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남편이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한다.

“자다가 꿈꾼 거 아니야?”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어제 약 안 먹었지?”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한다. 기억을 돌이켜본다. 어제 저녁약을 빠뜨렸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듯하다.

“약통에 약이 그대로 있더라고. 그러면 안 돼. 약을 잘 먹어야지. 그래야 잠도 잘 자고.”

“...난 환각 증상은 아직까지 겪어본 적 없어요.”

“알아, 알아. 내 말은, 네가 환각을 봤다는 게 아니라, 비몽사몽간에 착각한 것 같다는 얘기야. 꿈자리도 사납고. 새 집이라 어수선하고. 그렇잖아.”

남편은 다시 젓가락을 움직인다. 이번에는 장조림을 집어서 입에 넣는다. 그 다음으로는 콩나물을 먹는다. 남편은 아침을 한식으로 꼭 챙겨먹기 때문에 기본적인 반찬이 냉장고에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침에는 식욕이 전혀 없지만. 그나저나 이 근처에 반찬 가게가 있던가, 궁금해진다.

“아니면 귀신인가 보지.”

남편이 짓궂게 덧붙인다.

나는 소리내어 웃는다.

4. 안방

내가 쓴 소설에 강간 판타지가 들어 있다고 남편은 말했다.

그건 내 등단작이었다. 문제작이기도 했다. 나쁜 의미로. 나는 젊은 여자의 성경험을 가감없이 다루는 소설을 썼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소설을 내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읽으려 들었지만 나는 그런 오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오해를 살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이야기를 꼭 했어야만 했고, 그래서 했다. 왜 꼭 그래야만 했는지 이제 와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남편은, 그러니까 그 당시의 내 스승이자 애인은, 그 글이 좋으니 신인상에 내보라고 했다. 나는 응모했고, 붙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수상을 둘러싼 구설은 없었다. 남편은 그 문예지의 심사위원이 아니었고 우리 관계는 대외적으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나와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결혼 준비를 시작한 것은 내가 등단을 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뒤의 일이었다. 현명한 처사였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남편의 친한 친구가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음을 떠올렸고, 남편이 그에게 나를 잘 봐달라고 부탁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정도의 의혹이 수상의 정당성에 흠을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수상의 정당성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내가 등단하기 위해 남편을 어떻게 유혹했을지, 혹은 남편이 등단시켜주겠다는 빌미로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를 어떻게 유혹했을지를 궁금해했을 뿐이다. 내 외모와 몸매, 내 문란한 학교 생활, 내 전 남자친구들의 목록, 강의실에서 나와 남편 사이에 오고 갔던 은밀한 징후들과 교내 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등단에 실패한 지망생들은 나처럼 얼굴 반반하고 줄 잘 서는 애들 때문에 자신들이 미끄러진다고 불평을 늘어놓는가 하면, 나 같은 애는 등단해봤자 금방 밑천이 바닥날 거라고 저주 섞인 예언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그 소문들을 그저 무시했다. 내 소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아무 평가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남편이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내 소설에 대해 무어라 말해주고 자신의 진심을 누설하기를 기대했지만 남편은 그런 기대에 섣불리 휘둘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점잖게 행동했다.

그리고 침대에서만 내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잡년 같으니.”

남편이 나를 침대에 엎어뜨리며 말한다.

나는 일어나서 도망치는 시늉을 한다.

남편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다시 침대에 모로 내던진다.

“가만 있어, 씨발. 확 목 따버리는 수가 있어.”

남편이 말한다. 언뜻 들으면 진담이라고 믿을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가만히 순응하면 그건 강간이 아니니까. 강간을 연기하기 위해 나는 저항하는 척해야 한다. 몸부림치고, 싫다고 말하고, 그만해달라고 애원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울기도 해야 한다. 어쩌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 남편은 나를 아주 애틋해한다. 미안하다며 아주 상냥하게 사과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아주 깊고 캄캄하고 뜨뜻미지근한 욕조 물 속에 한없이 빠져드는 듯이 나른한 기분이 든다. 내게는 그런 것이 오르가즘인 것 같다.

나는 침대 밑 마루에 깔린 러그 위를 기어간다. 남편이 내 등을 발로 찍어누른다. 숨이 탁 막힌다. 남편의 발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버둥거린다. 팔꿈치가 욱신거린다.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어딘가에 찧은 것 같다. 남편이 내 위에 올라타서 성기를 삽입한다. 나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는다.

가끔 헷갈린다. 정말로 강간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이 행위는 우리가 합의 하에 하는 것이니 당연히 강간이 아니다.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잘 아는데도. 내가 어떻게 해도 남편이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나는 저항하다가 실패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저항에 실패하고 있으며, 이러다가 언젠가는 그가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거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설령 그런대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내 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우울한 생각을 그만둬야 한다. 이러다 울어버릴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울어야 하나? 소리내어 울며 비명 질러야 하나? 그게 배역에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면 남편이 당황하지 않을까? 산통 깨는 반응이 아닐까?

“조용히 해.”

남편이 말한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흘린다.

나는 주의를 딴데로 돌리기로 한다. 지금이 아닌 다른 때를. 과거를 생각한다.

그랬다, 내가 쓴 소설에 강간 판타지가 들어 있다고 남편은 말했다. 그 소설의 화자는 여주인공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남자들의 폭력성을 문제시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 자체를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라캉의 무슨 이론을 언급하면서 내 소설의 화자의 서술 기법을 논했고, 섹스 판타지가 왜곡되어 나타나는 유럽의 문학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 소설이 그런 작품들에 견줄 만큼 파격적이고 흥미롭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내가 스스로 의식한 적도, 의도한 적도 없는 의미들을 그가 발견해내다니 신기했다. 그것도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내 소설을 그렇게 특별하게 봐준다니 우쭐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손길이 황홀했다. 그곳은 선생님의 연구실이었고, 나는 선생님의 책들에 둘러싸여 선생님과 단 둘이 있었다.

“나는 비평이 본질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해. 어떤 작품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행위 말이야. 하지만 네게는 이렇게 고백으로써만 사랑하는 것이 부족해. 너에게는 더 큰 사랑을 주고 싶어.”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책상 위에 눕혔다. 그리고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나는 문득 눈을 뜬다.

섹스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보다. 아니면 기절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나는 러그 위에 엎어져 있던, 싸늘하게 식은 내 몸을 떼어낸다. 너무 춥다. 난방은 되고 있는 건가?

나는 배스로브를 주워 입고 부엌으로 나간다. 아직 커튼을 달지 않은 거실 유리창으로 살풍경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건물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어서 어둠에 묻힌 거대한 비석들처럼 보인다. 나는 정수기로 컵에 온수를 따라 조금씩 마시면서 몸을 데운다. 손이 덜덜 떨린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 약을 먹었던가? 약, 약을 먹어야겠다. 그래야 다시 잘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부엌에 약통이 놓인 선반으로 걸어간다.

그때 그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 웅 하고 울리는 진동음. 여기는 서재가 아닌데도 그 소리는 여전히 바로 귓가에서 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나는 살금살금 현관으로 걸어간다.

땡 하는 신호음이 울린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두세 번 나더니 외시경 렌즈 안으로 한 여자가 걸어들어온다.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자주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

나는 그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목덜미를 가로지르는 끈과 리본이 보인다. 홀터넥 드레스가 맞다. 목의 리본은 등까지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리본 끝에는 무언가 반짝이는 금속이 달려 있다. 확실히 낯이 익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드레스다. 어디서 봤더라? 앞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앞집 현관문이 열리고 여자는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나는 어느새 몸의 떨림이 멎었다.

5. 욕실

나는 간밤의 일에 대해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김치를 썰어서 타파통에 담다가도, 빤 이불을 건조기에 넣다가도, 욕실 변기 테두리에 붙은 남편의 음모와 오줌 자국을 닦다가도, 문득문득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머리를 감고 있노라니 그 생각이 더욱 강하게 머리를 사로잡는다.

그 드레스를 어디서 보았을까. 쇼윈도 속 마네킹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속 배우가 입은 것을 보았던 걸까. 그때는 무심히 보아 넘기고 잊었던 기억이 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불현듯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 친숙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언뜻 보고 지나친 옷 같지 않았다.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또는 나 자신이 그런 옷을 입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옷과 얽힌 개인적인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샴푸를 헹구고 린스를 손에 짠다. 어제 침대 틀에 부딪힌 팔꿈치가 자꾸만 얼얼하다. 나는 냉수를 틀고 그 부위에 샤워기 분사구를 갖다대 열을 식혀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그럴 리가 없었다. 그 드레스는 연예인이 칵테일 파티 같은 데에나 입고 나갈 법한 야회복이었다. 나는 그런 옷차림이 어울릴 만한 곳을 다녀본 적이 없다. 그런 옷을 입은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본 적도 없다. 게다가 그 옷은 남편이 내게 사줄 법한 옷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지나치게 현란한 색깔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소재와 등이 훤히 노출되는 디자인까지. 남편은 가끔 텔레비전으로 연말 시상식을 보다가 그런 드레스를 입은 배우들이 스틸레토힐을 신고 위태롭게 레드카펫을 걷는 것을 보면 조소를 흘리곤 했다. “여배우라는 직업은 사실 오늘날의 고급 기생 같은 거야. 저 천박한 옷차림 좀 봐.”라면서, 그 여자들의 가슴골에 눈길을 던졌다.

나는 린스를 머리에 바른 채로 샤워젤을 스펀지에 짜내 거품을 낸다. 그러다가 내 몸을 내려다본다. 배를 손으로 쥐어본다. 혹시 군살이 붙었을까 싶어서 샤워할 때마다 내 몸을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꼿꼿하게 일어선 상태에서 옆구리에 한 손을 붙이고,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끔 둔 상태에서 엄지와 검지로 뱃살을 쥐었을 때 살집이 확실히 잡힌다면 그건 뱃살이 지나치게 쪘다는 뜻이라고 들었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편은 내가 정신 건강이 안 좋을수록 일상과 자기 몸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우울하다고 늦잠을 자고, 폭식을 하고, 살이 찌고, 안 씻고, 청소도 안 하고 살다 보면 더욱 불행해지게 되어 있다고. 맞는 말인 것 같다. 내 생활에는 규칙이 필요하다. 나는 최소한 남편이 내게 사주는 옷들이 잘 맞을 만큼의 몸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옷을 생각하니 다시 자주색 실크 드레스 생각이 난다.

나는 돌이켜본다. 혹시 학생 시절에 잠깐 미쳐서, 또는 술김에 그런 옷을 샀던 적이 있었을까. 그때의 나야 워낙 돈을 무계획적으로 쓰고 살았으니 아르바이트 급여를 몽땅 털어서 저런 황당무계한 물건을 사들였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저 옷은 남편과 결혼하고 나서 버려진 헌옷 보따리에 가장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남편은 내가 그동안 친구들과 하우스 쉐어를 하며 엉망진창으로 꾸려왔던 세간붙이며 질 나쁜 옷, 낡은 속옷, 쓸데없는 책과 오래된 일기장과 편지 묶음 따위를 싹 버렸다. “이런 걸 다 끌어안고 살다 보면 귀신 나온다.”라면서. 나는 남편과 살림을 합치기 전에 이런 것들을 스스로 버리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비누 거품을 물로 씻고 있는데 욕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난다. 나는 수도꼭지를 잠근다.

“여보, 왜?”

내 머리카락에서 똑똑 흐르는 물소리 너머로 욕실 문 밖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빨리 하고 나와봐. 할 얘기 있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나는 허겁지겁 린스를 헹궈내고 수건으로 대강 물기를 훔친 뒤 배스로브를 걸친다. 욕실 문을 연다.

남편이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다.

“따라와.”

나는 배스로브의 허리띠를 여미고, 머리를 수건으로 틀어올려 휘감고, 슬리퍼를 신는 동작을 한 번에 하면서 남편의 뒤를 따라간다. 그의 걸음이 빠르다. 복도 바닥에 물이 뚝뚝 흘러내려 내 발걸음을 따라 흔적을 남긴다. 남편은 서재로 들어가 안락의자에 앉는다.

“너, 요즘 또 내 서재 드나들어?”

나는 선 채로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본다. 남편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분홍색과 먹색 표지의 소설집 한 권을 집어든다. <잘 자, 나의 아침>. 그는 책을 펼치고 책장이 구겨지고 찢어진 부분들을 내게 보여준다. 누가 일부러 책을 망가뜨리려고 한 듯 너덜너덜해진 종이들이 반듯한 종이들 사이에 끼어 있다.

“네가 이랬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네가 아니면 누가 이랬겠어. 이 집에서.”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내 서재 물건은 청소할 때 아니면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특히 책은.”

“미안해요.”

“책 같은 건 네 정신 건강에 안 좋다고. 더구나 요즘 책들은 이상한 내용이 얼마나 많은데. 등장인물들이 죄다 미친 소리를 지껄여대고, 자해하고 자살하고. 너 그런 것 읽다 보면 나쁜 생각 들게 되어 있어.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알아요.”

“혹시 또 글 쓰고 싶은 건 아니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편은 한숨을 쉰다.

“너 아직 문단에 얼굴 내밀 준비 안 된 거 알잖아. 그 멘탈로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서려고 해. 가게 직원하고 대화 한 마디 하기도 힘들어하면서. 하물며 그 잔인한,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네 글을 내민다니. 인터넷에 댓글들은 또 어떻고. 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알아요.”

나는 내 발치에 떨어진 동그란 물방울들을 내려다보다가 덧붙인다.

“지금 써놓고 모아뒀다가 나중에 발표할 수도 있잖아요.”

“지금? 쓰긴 뭘 써. 요새 트렌드라는 게 있는데, 너는 요즘 소설 동향이 어떤지도 모르잖아. 쓸 만한 이야깃거리도 주변에 없고.”

남편이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그러다 내 손을 끌어 잡고 나와 눈을 맞추더니, 한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우리 잘 이겨내보자. 여기로 이사도 왔잖아. 나 이번에 승진해서 연봉도 올랐고. 다 괜찮아질 거야. 점점 나아질 일만 남았어.”

나는 남편의 손에 쥐인 손가락에 살짝 힘을 준다. 남편의 따뜻하고 커다란 손바닥에 새겨진 깊은 주름들이 느껴진다. 나는 그 주름이 이루는 선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아직 겨울이고 입주도 이제 시작돼서 분위기가 썰렁하지만, 곧 사람이 많아지고 날도 풀리고 하면 활기가 생길 거야. 여기 공원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 시에서 신경을 정말 많이 썼다나봐. 봄에 벚꽃길이 기가 막힐 거래.”

“그래요.”

나는 남편이 내 표정을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이고 배스로브의 허리띠를 다시 묶는 척한다.

남편의 말이 다 맞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암담한지 모를 일이다. 남편은 저렇게 나를 걱정하고 보살펴주는데, 나는 왜 이렇게 남편이 미운 걸까. 나는 글을 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감히 그런 작심을 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는 저런 말을 하지. 나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게는 재능이 없다. 나는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등단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가망 없는 일에 파고들어 나 자신을 소모할 생각은 없다. 없는데. 그런데 왜.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건너가더니 무언가를 가져온다. 물 한 컵과 약통이다. 남편은 건망증이 심한 내가 시간에 맞춰 약을 먹는 것을 잊어버릴까봐 아예 아침약 통, 저녁약 통을 마련해두고 그날그날 내가 먹어야 할 약을 채워둔다. 그 통이 비어 있으면 약을 먹은 것이고, 약이 들어 있으면 안 먹은 것이다. 남편은 내 눈앞에서 저녁약이라는 라벨이 붙은 통의 뚜껑을 열어 보인다. 안에 크고 작은 알약 다섯 개가 들어 있다.

“자, 약 먹자. 약 먹고, 머리 말리고, 푹 자자.”

나는 남편의 눈앞에서 약을 입 안에 털어넣고 물을 들이켜 그것들을 식도로 내려보낸다.

약 먹기가 왜 이렇게 싫은지 모르겠다.

6. 거실

증세가 심해졌다. 소파에 누워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힘이 없다. 청소기를 돌리는 것조차 힘에 부쳐서 마루에 널브러져 있기 일쑤이고,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길은 위험천만한 용암 지대처럼 느껴진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운 채,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내용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눈을 감고 있다. 어느 집엔가 이삿짐이 들어오는 소리, 건너편 오피스텔 공사 현장에서 나는 중장비 소음, 노동자들이 서로에게 고함 지르는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진다. 그러다가 좀 조용해졌다 싶으면 금세 해가 저물고 밤이 된다.

남편은 나아질 거라고 하는데. 이대로 점점 나빠지기만 하면 어쩌지. 나는 내가 정말로 환각을 보는 것일까봐 매우 우려스럽다. 남편은 내가 지나가듯 한 말을 잊어버렸는지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한 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 눈을 떠도, 감아도 그 여자의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아무리 따져봐도 환각이 맞는 것 같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그 집은 빈 집이다. 사람이 이 추운 겨울에 그렇게 얇은 원피스 한 장만 걸치고 다닐 리도 없거니와, 매일 똑같은 옷만 입을 리도 없다. 아무리 조용한 밤이라도 그렇지 엘리베이터 소리가 그토록 크게 들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내가 밤에 보고 듣는 것은 모두 현실이 아니다.

나는 다음 주에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둔다--일어나서 종이와 펜을 꺼내 메모할 힘조차 없다. 이러저러한 환각이 보여요. 환각까지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건망증도 점점 심해져요. 감정이 자꾸 요동치고 별 뜻 없는 말에도 비참해져요. 선생님, 무서워요. 약은 잘 챙겨먹고 있어요. 남편이 제가 잊지 않도록 약을 관리해주니까요. 깜빡하고 저녁약을 안 먹은 날에는 환각이 보여서...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저녁약을 먹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앉는다. 벌써 자정이 넘었다. 남편은 오늘 집에 안 들어온다고 했다. 지방에서 열리는 무슨 학회에 간다고. 남편이 없으니 시간 감각이 더 무뎌진 것 같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여태 밥도 안 챙겨먹었다.

나는 맨발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딛고 부엌으로 건너간다. 냉동실에 얼려둔 통식빵을 꺼내 살짝 해동한 다음, 날이 잘 선 커다란 빵칼로 두툼하게 두 장을 썬다. 토스트기에 식빵 두 조각을 넣는다. 냉장실에서 딸기잼과 땅콩 버터를 꺼내고 흰 우유를 꺼낸다. 나는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에 땅콩 버터와 잼을 치덕치덕 발라 샌드위치를 만든 다음, 조리대 앞에 선 채로 그것을 들고 꾸역꾸역 먹는다. 우유 팩을 입에 대고 들이마신다. 우유를 이렇게 팩째로 마시는 건 오랜만이다. 우유 배급을 받아 먹던 초등학교 때가 떠오른다. 갑자기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통을 가지고 거실 소파로 돌아온다. 아이스크림을 밥숟가락으로 퍼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공중파 방송으로 돌린다. 여행 프로그램이 한창 나오고 있다. 한 무리의 연예인들이 해외의 관광지에 놀러 가서 한정된 돈만 가지고 최대한 알뜰하게 여행을 즐겨보자는 내용이다. 그들이 베네치아의 무슨 유명한 티라미수 가게 앞에서 동전을 헤아리는 것을 나는 골똘히 지켜본다.

그러다 깜빡 잠들었던 것 같다.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나는 퍼뜩 깬다. 깨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녁약을 빠뜨렸다는 생각이다. 자기 전에 약을 먹어야 하는데. 나는 소파에서 일어선다. 그러고 나니 다시 그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린다.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저건 환청이야.’ 내가 아무리 그렇게 되뇌어도, 소리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점점 더 크고 또렷하게 들려온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내가 외면하더라도 그 소리는 사라질 성싶지 않다.

나는 덜덜 떨면서 현관문 앞으로 걸어간다. 외시경에 눈을 대본다.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를 내며 멈추고,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사람이 아니다. 또각또각하는 구둣발 소리 말고도, 다른 발소리가 섞여 있다. 좀 더 무겁고, 좀 더 나지막한...

이윽고 시야에 자주색 드레스의 여자가 나타난다.

그 옆에 한 남자가 다가선다.

키가 큰 정장 차림의 남자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여자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어서 넥타이는 보인다. 나는 저 넥타이를 잘 안다. 다이아몬드 무늬가 박힌 감청색의 실크 넥타이. 그 넥타이에서 어떤 향수 냄새가 나는지까지도 알고 있다. 내가 뿌렸으니까.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맞은편 집 현관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몇 분이, 혹은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살짝 열고서 맞은편 집으로 다가가본다. 그 집 현관문의 외시경에 눈을 대본다. 하지만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7. 베란다

남편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나를 속이고 바람을 피우는 것일까. 맞은편 집 여자랑. 아니면 무슨 편법을 써서 그 빈 집을 아지트로 이용하면서. 나와 같이 사는 이 집 바로 앞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일까. 고급 기생 같은 자주색 실크 드레스를 입는 여자와. 분홍색과 먹색이 섞인 흐리멍텅한 표지의 소설집 따위를 내는 여자와. 나보다 어리고, 참신하고, 재능있고, 아름다운 여자와.

남편은 그 여자의 소설에서 어떤 성적 판타지를 읽어냈다고 했을까.

나도 안다. 이 모든 게 과대망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내가 어제 외시경으로 목격한 장면은 그저 환각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의 환상에 스스로 속아넘어간 나머지 머릿속에 점점 더 큰 망상을 키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라고 추측하면 모든 정황이 아귀가 맞는다. 여자가 자주색 드레스만 입는 것도. 섹스할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나오라고 남편이 요구했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다. 남편이 자꾸 내게 약을 먹이고 재우려 하는 것도. 남편이 <잘 자, 나의 아침>이라는 책을 내가 조금 들춰봤다고 해서 과민하게 화를 냈던 것도. 그런 뒤에는 또 나를 달래주었던 것도. 그리고 또...

골똘히 생각하며 허공을 내다보던 나는 베란다 난간에 이마를 기댄다. 난간 위에 얇게 쌓인 눈이 순식간에 녹으면서 이마를 적신다. 과열되었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식는 기분이 든다. 난간 저 아래로 펼쳐진 설원이 보인다. 건물들과 어린 나무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 황폐한 신도시도 눈에 뒤덮이니 구시가지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아이들 두세 명이 눈밭을 뛰어다니며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 뒤에서 아이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부모들도 보인다. 처음 우리 부부가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입주민들 중 아이 있는 가족은 하나도 없었는데. 근처에 새로 지은 초등학교가 연초에 개교를 한다더니, 이곳도 조만간 아이들이 복작거릴 모양이다. 정상적인 부부들이, 사랑도 하고 싸움도 하고 화해도 하고 타협도 하는 그런 부부들이 저마다 아이를 몰고 올 모양이다.

나는 눈물을 흘린다. 우는 것은 오랜만이다. 긴 우울에 짓눌려 있는 동안에는 정작 울 기력조차 없었는데. 가슴이 아프다. 왜 가슴이 아픈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인정하기가 어렵다.

내 마음속에서 또 다른 내가, 엄격하고 객관적인 내가, 남편에 대한 내 생각들은 과대망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그 주장에 반쯤 수긍한다. 남편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집착하고, 의심하고, 혼자만의 망상을 근거로 원망하기까지 하다니. 정말 나쁜 년이구나. 역시 나는 인간 쓰레기다. 최악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건 적어도 너무나 익숙한 감각이니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하지만 설령 다 내 탓이 맞다고 치고 모든 것을 잊고자 한대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있다. 남편에 대한 신뢰. 남편이 나를 속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일단 한 번 생각하고 나니 남편에 대한 모든 관점이 달라져버렸다. 남편을 처음 만나고 지난 10년 동안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했던 말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했던 수많은 행동들. 침대에서 나를 다루던 난폭한 방식들. 내게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들을 끊어주겠다며 온갖 물건과 인간관계를 내게서 떨어트렸던 것. 술과 담배와 SNS에 대한 중독을 고쳐주겠다며 내게서 그 모든 것을 빼앗았던 것. 내가 신경정신과에서 받아오는 한 달치의 약을 자칫 남용할까 봐 걱정된다는 이유로 모두 가져가서는, 마치 키우는 개에게 사료 주듯 하루하루 배급했던 것.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런 허허벌판으로 이사를 온 것까지도. 그 모든 것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 의미들을 한 번 인지한 이상 잊어버릴 수가 없다. 나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부터가 비현실인지 모르겠다. 무엇을 신뢰할 수 있고 무엇은 믿어선 안 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모르겠다.

나는 한참을 운다. 눈이 주변의 모든 소리를 흡수해주어서 평소보다 더 조용하게 느껴진다.

해가 질 무렵 나는 거실로 돌아와 베란다 문을 닫는다. 그리고 부엌 선반에 놓인 약통으로 다가간다. 마치 소금통과 후추통처럼, 플라스틱으로 된 아침약 통과 저녁약 통 한 쌍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그 안에 든 알약들을 모두 한 손에 털어낸다.

그리고 욕실로 가서 변기에 약을 넣고 물을 내린다.

8. 복도

남편이 내게 화를 내고 있다. 드레스룸과 거실 사이의 복도에 서서, 벽을 손으로 쾅쾅 두드리며, 드레스룸 안에 서 있는 내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러면 내 체면이 뭐가 되냐고!”

나는 남편의 말을 반쯤 듣고 반쯤 흘리며 스타킹을 벗고 있다. 진주 귀고리를 빼서 서랍장 위에 놓고, 손목 시계를 끄른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나는 요즘 여러 가지 일에 주의를 분산시키기가 힘들다. 약을 안 먹은 지 사흘째가 되니 정신이 산만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다.

“...그때 차 교수님 표정 봤어? 주변 사람들 표정이 어땠는지 봤어? 신인 작가들은 대놓고 널 쳐다보면서 수군덕거리던데. 그렇게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차 교수님이 누구더라. 신인 작가들... 나는 느릿느릿 트위드 재킷과 스커트를 벗고 실내복 원피스로 갈아입으며 기억을 돌이켜본다. 아까까지 내가 있었던 곳. 시내 호텔의 큰 볼룸이었다. 넓은 홀에 원탁들이 여럿 배치되어 있고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차나 샴페인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던 곳.

그랬다, 오늘 나는 남편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다. 무슨 큰 문학상 시상식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남편이 선택한 격조 있는 옷들을 입고, 정성들여 화장을 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사하고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데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그들과 긴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으므로 이름을 몰라도 별 문제는 없었다. 남자들은 내가 눈앞에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질문을 남편에게 던지곤 했다. 여자들은 나를 흘끔거리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거리를 두거나, 나이가 많은 여자들의 경우에는 “아유, 참 좋겠어요, 이렇게 멋있는 남편을 둬서. 애는 언제 낳을 거야?” 같은 질문만 하고 마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금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하, 얼굴이 뻘개지네. 부끄러운 줄은 아나본데.”

남편의 목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온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의 얼굴도 불그죽죽하고, 목에는 핏대가 서 있다.

“당연히 부끄러운 일이지. 다 큰 성인이 남들 앞에서 울기나 하고. 덜떨어진 어린애 같이. 사람들이 너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겠어? 대체 그게 무슨 짓이야?”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조그맣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곤란하게 했으니까.”

“뭐?”

“당신이 먼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잖아.”

“내가 언제.”

나는 남편이 그때 했던 말을 그대로 입으로 옮기려다가 그만둔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생생하게 난다. 내가 등단한 문예지의 새 편집위원이 된 차 교수가 내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을 때, “그런데 요즘은 집필 안 하세요? 맞다, 우리 다다음호에 원고 한 편 실으시는 건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남편이 웃으면서 했던 말을.

“에이, 막나가는 문학 소녀 시절이야 한때였죠. 집사람 흑역사 괜히 건드리지 마세요. 오늘 밤 자다가 자꾸 이불 차고 그러면 저만 힘들어요.”

남편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던 것도 기억난다. 잔잔한 웃음이 좌중에 2, 3초쯤 번진 후, 사람들이 즉시 화제를 바꾸었던 것도.

그때 내가 울었던 것은 사람들의 웃음이 가혹해서가 아니었다. 모처럼의 청탁 기회를, 비록 인사치레였을 뿐이라 해도, 눈앞에서 놓쳤다는 게 서러워서도 아니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을 ‘흑역사’라고 남들 앞에서 정의 내린 사람이 다름아닌 내 남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내가 무엇보다도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사람이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만해요. 민망하게 했던 건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

나는 남편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드레스룸 문밖으로 나간다. 내가 남편을 그대로 지나쳐 묵묵히 복도를 걸어가려 하자, 씩씩거리던 남편이 내 머리 위 허공에 손을 번쩍 치켜든다.

나는 놀라서 남편의 눈을 올려다본다.

남편은 내 눈을 내려다본다.

그 순간 우리 사이를 이어주던 작고도 확실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줄곧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마침내 이해한다. 아니면 지난 10년을 거쳐 내가 천천히 이해해왔던 것이 그 순간에 비로소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으로 현화된 듯도 하다. 나는 남편의 연약한 맨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남편은 내 원시적인 공포를 마주한다. 우리 둘이 그토록 초라하고 단순해진 자리에서 말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또 비유를 과용하고 있다.

9. 앞집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러 갔겠거니 했는데 삼십 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거실을 서성거리며 이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돌아오는가 보다.

아니, 남편이 아니라 자주색 드레스의 여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이 함께일 수도 있겠다.

나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주위를 살핀다. 무언가 의지할 만한 것을 본능적으로 찾는다. 그러던 내 눈에 거실 벽의 스마트패드가 들어온다. 불현듯 남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스마트패드로 현관 밖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으며, 녹화도 할 수 있다던.

나는 부리나케 스마트패드로 뛰어가 남편이 가르쳐준 대로 현관 밖 CCTV 화면을 켜고 녹화 버튼을 누른다. 그런 다음 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열어젖힌다. 저 안에서 무엇이 나오든 나는 대면할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카메라가 증명할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19층에서 멈춘다. 나는 그 앞에 정면으로 마주선다. 한 쌍의 여닫이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내린다.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다.

여자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나오다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나는 멍하니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여자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 이제야 기억이 난다.

“무슨 일이세요?”

여자가 묻는다. 나는 허둥지둥 되는 대로 말을 꺼낸다.

“저, 아, 궁금한 게 있어서요. 우린 이웃지간이잖아요. 가끔 그쪽을 봤는데, 그,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생겨서.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네... 말씀하세요.”

여자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린다. 나는 그 얼굴에 알록달록 칠해진 서툰 화장을 본다. 인터넷 공구샵에서 샀을 법한 로즈골드 색깔의 도금 귀고리를 본다. 그리고 홀터넥 드레스를 본다. 네크라인이 일자로 가슴 위를 가르고, 어깨 끈이 쇄골과 목을 향해 뻗어올라가면서 어깨 선과 가슴 라인을 강조한다. 슬릿이 깊게 들어간 랩스커트 같은 디자인의 치맛자락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내려가 복숭아뼈 바로 위에 떨어진다. 자주색 실크는 가까이에서 보니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붓꽃처럼 살짝 어두운 보랏빛이 돌기도 하고 화사한 핑크색이 돌기도 한다. 한눈에 봐도 비싼 드레스다. 그에 비해 아무런 액세서리도 걸치지 않은 두 팔은 허전해 보이고, 구두는 면접 때나 신을 법한 4센티미터 굽의 검정색 하이힐이어서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다.

“드레스가 너무 예뻐서요. 어디서 사셨나 궁금해서.”

내 말에 여자가 대번에 경계를 늦추고 얼굴에 화색을 띤다.

“아, 이거요? 빈티지 숍에서 산 건데요. 진짜 디자이너 브랜드 드레스인데, 그냥 오래돼서 조금 싸게 나온 거래요.”

그리고 여자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덧붙인다.

“그러니까 지금은 보통 매장에서는 살 수 없어요. 미안해요. 제가 도움이 못 돼서...”

“아, 아니에요. 그래도 비쌌을 텐데, 돈이 많이 들었겠어요.”

“좀 무리했죠.”

여자가 밝게 웃는다. 그는 자신이 스폰을 받아서 옷이나 가방을 산다는 소문이 학내에 돌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불과 1년 뒤에 돈이 필요해서 그 옷을 훨씬 싼 값으로 급하게 처분하게 되리라는 것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옷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게 되리라는 것도 모른다. 그건 모두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다.

“그래도 꼭 사고 싶었거든요.”

“일상적으로 입기는 어려울 텐데...”

“이거 외출복 아니에요. 저 글 쓸 때 입는 옷이에요. 아, 제가 소설을 쓰거든요. 그런데 어떤 유명한 작가가, 자기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글을 써야 영감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특이한 버릇 같은 거죠 뭐. 그래서 저도 작업복을 하나 장만했어요. 내 작품인데 이 정도 투자는 할 수 있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설명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들린다.

“요즘도 글 쓰고 있는 거예요?”

내 질문에 여자는 더더욱 신이 나는 듯, 그러면서도 조금 난처한 듯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두 손을 맞잡는다.

“이건 비밀인데... 음... 혹시 시간 나시면 읽어보실래요? 아직 초고라서 많이 고쳐야 하지만... 저희 집에 들어가시면 보여드릴 수도 있는데.”

여자가 현관문 쪽을 손짓하며 말한다.

나는 그가 타인을 지나치게 쉽게 집에 들이는 것이 안타깝다. 아무나 쉽게 믿고 좋아하고 사랑할 것이 안타깝다. 그가 앞으로 맺게 될 인간관계들이 유감스럽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여자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여자는 무언가 다른, 내가 생각지도 못한 데에 가치를 두고 있을 수도 있다.

“좋아요. 나 시간 많아요. 장편인가요? 단편? 어떤 이야기인데요?”

여자는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홀을 자못 진지하게 둘러본다. 그러더니 내 귀에 입술을 가져와서 속삭인다.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는 이야기인데요...”

10. 부엌

나는 열린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다. 자동으로 센서등이 켜지고 실내가 불그스름한 빛에 물든다. 현관을 내려다보니 남편의 슬리퍼가 삐뚜름히 놓여 있다. 욕실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씻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 벽의 스마트패드로 다가간다. 지금까지 녹화가 돌아가고 있다. 나는 중지 버튼을 누른 뒤 지금까지 찍힌 영상을 돌려본다.

끝까지 보고 나서야, 사실 돌려볼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영상을 삭제한다. 역시 이런 기능 따위는 쓸모가 없었다.

나는 부엌으로 건너가 하부 식기장을 연다. 식기장에 부착된 컨테이너에 여러 종류의 칼이 꽂혀 있다. 커다란 고기칼. 주로 김치나 채소를 썰 때 쓰는 중간 크기의 칼. 가장자리가 오돌토돌한 톱니로 되어 있는 빵칼. 작고 가벼운 과도까지. 그중에서 나는 이사 오고 난 뒤로 한 번도 쓰지 않은, 날이 잘 갈린 고기칼 한 자루를 골라내고서 컨테이너를 밀어넣는다. 확실히 이 집은 최신식이라 무언가 달라도 다르다. 주방도 훨씬 사용자의 편의에 맞게끔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서랍장이나 찬장 문이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고, 손 닿는 곳에 꼭 필요한 것들을 둘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나는 어느 블라인드 설치업자에게서 받아온, 홍보 전단지에 끼워져 있던 새 걸레를 물에 적신다. 걸레에는 “입주를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어김없이 박혀 있다.

신도시에 세워진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는 모두가 미래를 낙관한다. 이곳에서의 삶이 잘 풀릴 것이라고. 우리의 일상이 뒤바뀔 것이라고.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거라고. 그리고 그 믿음을 당신에게도 심어주려 애쓴다. 과연 그렇다. 남편의 말이 옳았다. 누구든지 새 아파트에 한 번 살아보면 옛날 집에선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싶을 것이다.

나는 칼과 걸레를 가지고 욕실로 걸어간다.

오늘은 욕실 청소를 제대로 할 작정이다.

댓글 2
  • No Profile
    미로냥 19.12.02 10:51 댓글

    어휴...ㅠㅠ 보는 내내 어휴어휴 ㅠㅠ 하면서 봤어요.

    굉장히 강렬하고 센데 그런데도 묘하게(?) 모든 것이 절도있는 느낌... 이야기가 아무리 피가 튀어도 단정하네요.

  • 미로냥님께
    No Profile
    아밀 19.12.02 19:02 댓글

    단정한 얼굴을 한 광기야말로 진정 무서운 것이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댓글 감사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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