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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학회 오감 by 남유하

2019.11.01 00:0111.01

5회차.jpg
[특집] 괴이한 거울

오감

남유하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비가 오려는지 공기에선 축축한 흙냄새가 풍겼고, 가끔씩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한나와 톰, 니콜라스, 에밀리, 그리고 에반. 숲속 마을에 사는 다섯 명의 아이들은 풀밭에 누워 톰이 나눠준 사탕을 입에 굴리며 달콤한 맛을 음미했다. 한나는 작은 손바닥에 비해 유난히 기다란 손가락으로 보드라운 들꽃잎을 어루만졌다.

“이제 그만 집에 갈까? 비가 올 거 같아.”

니콜라스가 약간 들려 올라간 코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봐. 비가 올 것 같지 않다는데.”

에밀리가 꿈을 꾸는 표정이었다. 니콜라스는 작은 소리로 바보, 라고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에반이 뭔가 떠오른 듯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 혹시 마녀의 집 이야기 들어봤어?”

“마녀의 집?”

한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응. 마을 경계에 있는 빨간 지붕 집을 지나서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던데.”

“거기 마녀가 사는 거야?”

톰이 사탕 하나를 입에 더 넣으며 우물거렸다.

“며칠 전에 마고 아줌마가 이웃 마을에 다녀오다 그 집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대.”

“비명? 마녀가 아니라 살인자가 사는 거 아니야?”

톰이 물었다.

“들어봐. 그래서 마고 아줌마가 보안관 아저씨를 데리고 그 집에 가봤대. 그런데 그 집은 오랫동안 버려진 폐가처럼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더래. 가구들은 전부 흰 천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고-”

“별로 재미없겠는데?”

에밀리가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그게 전부였다면 재미없겠지.”

에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또 뭐가 있는데?”

“우리 옆집에 사는 헨리 할아버지 알지?”

“그 괴팍한 장님 할아버지 말이야?”

“응. 헨리 할아버지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뭐든지 알고 있거든.”

“거짓말.”

“에밀리,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헨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그 집에는 소원을 이뤄주는 구슬이 있대.”

“거미줄이 쳐진 폐가라며.”

이번에는 니콜라스가 나섰다.

“마녀의 집은 아이들 눈에만 제 모습대로 보인다는 거야.”

“에이, 말도 안 돼.”

“그래, 말도 안 될 수도 있지. 하지만 가본다고 손해날 것도 없잖아? 어때, 가볼 사람 없어?”

“난 갈래. 소원을 이뤄주는 구슬한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피칸 파이를 달라고 할 거야.”

톰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까짓것, 나도 갈래.”

니콜라스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남은 건 에밀리와 한나였다.

“한나, 우린 집에 가자. 남자애들끼리 가라고 하고.”

“나는… 같이 갈래.”

한나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녀의 집이라니 무서웠지만, 한나는 자기 방에 둘 수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가 너무나 갖고 싶었다.

“뭐야, 그럼 나만 빠질 수 없잖아.”

에밀리가 말했다. 그렇게 다섯 아이는 마녀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 끝에 있는 빨간 지붕 집을 지나자, 길이 점점 좁아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딱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앞장설게.”

“잠깐, 에반. 마녀의 집이라고 했잖아. 소원의 구슬은 그렇다 치고 마녀가 있으면 어떡해?”

“도망 나오면 되지.”

“뭐? 말도 안 돼. 난 안 갈래.”

에반이 돌아서는 에밀리의 손을 잡았다.

“미안, 에밀리. 농담이야. 나도 헨리 할아버지한테 똑같이 물어봤지. 근데 할아버지가 마녀 같은 건 없다고 했어.”

“정말?”

“정말이라니까.”

하긴 그곳에 마녀가 살고 있다면, 아무도 보지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만약 마녀가 나타난다면… 마녀는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던데…. 아이들의 심장이 두려움과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가자.”

에반이 다시 앞장서 갔고, 그 뒤를 에밀리와 한나, 니콜라스와 톰이 순서대로 따라갔다. 숲이 이어졌고 마침내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게 사라졌다. 우거진 나무들은 아이들의 얼굴을 할퀴려 했고, 웃자란 잡초들은 아이들의 무릎을 간지럽혔다.

“뱀이 나올 것 같아.”

겁이 많은 한나가 울먹였다.

“에이 겁쟁이.”

니콜라스가 큰 소리로 한나를 놀렸지만, 다들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누구도 겁쟁이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을 꼭 다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야.”

맨 뒤에 오던 톰이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혔다. 하얀 볼 위로 빨간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괜찮아?”

에밀리가 다가와 소매로 톰의 피를 닦아주었다. 톰은 울음이 쏟아질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는 자꾸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의 집에 가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였다. 돌아가자고 할까? 한나에게만 말해볼까? 아니야, 한나는 피아노를 정말 갖고 싶어 하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늘이 온통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순식간에 밤이 된 것처럼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그것 봐. 비가 올 거라고 했잖아.”

니콜라스의 외침과 동시에 검은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 툭, 투두둑. 처음에는 간간이 떨어지던 물방울이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렸다. 에밀리가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눈앞에 검은 벽돌집이 나타났다.

“저기다. 마녀의 집이 있다!”

에반이 소리쳤다. 라푼젤이 갇힌 성처럼 뾰족한 첨탑과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양식의 지붕, 지붕 끄트머리의 무시무시한 가고일까지, 마녀의 집이 아니라 마녀들이 모여 사는 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한 집이었다.

“저 괴물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어.”

에밀리가 가고일을 보며 속삭였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데?”

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아이들도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마녀의 집에 온 걸 후회하고 있었다.

§

아이들이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마녀의 집으로 뛰어갔다. 나머지 아이들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이 에반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 문 앞에서 에반은 잔뜩 긴장했다.

“연다.”

손잡이를 꽉 쥔 손이 민망할 정도로 문은 쉽게 열렸다.

“들어가자.”

니콜라스가 에반보다 먼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뒤이어 톰이, 그다음에는 에밀리와 에반이 들어갔다. 맨 뒤에 있던 한나의 눈에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마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

한나는 에밀리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집 안에서 느껴지는 습한 기운에 한나는 제 손으로 팔을 감싸며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나가 들어오자마자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혔다. 한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끼룩, 하는 딸꾹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쉿! 에밀리가 뒤돌아보며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문은 동굴처럼 길고 어두운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다섯 아이 모두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이 보이는 작은 오두막에 살았다. 따뜻한 벽난로가 있고, 주방 앞의 테이블에는 엄마가 구워준 쿠키가 있고, 구석의 낡은 소파에는 아빠가 앉아 졸고 있는 그런 집 말이다. 그래서 이런 복도는 더욱 낯설었다. 아이들은 긴장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니콜라스가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벽에 있는 초상화 때문이었다. 뒤따라오던 에반이 얼른 니콜라스의 입을 막았다. 초상화 속의 창백한 얼굴들이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닥만 보고 걸어.”

에밀리가 겁에 질린 한나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삐걱삐걱. 아이들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룻바닥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이 복도가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에밀리가 조바심을 낼 때쯤 거실이 나타났다. 거실은 복도에 비해 지나치게 밝아서 아이들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거실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려 컴컴한데도 아이들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섬뜩한 집의 외관과 어두운 복도와 대비되는 화려한 거실에 반쯤 넋이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은 거실에는 상아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어, 피아노다!”

한나가 저도 모르게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건반에 손을 올리려다 움찔했다. 집 안에 누군가가, 정말 마녀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가하게 피아노를 칠 수는 없었다. 거실에는 그랜드 피아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선장이 꿈인 에반은 커다란 모형 함선에 시선을 빼앗겼고, 에밀리는 발레리나가 있는 오르골의 태엽을 돌렸다. 구슬프고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며 발레리나가 돌아갔다. 니콜라스는 장식장 위에 진열된 향수 냄새를 맡으며 감탄했다.

“이거 먹어도 될까?”

톰이 꽃 모양의 초콜릿 장식이 되어있는 컵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안 돼, 먹지 마.”

에반이 톰의 손에 들린 컵케이크를 뺏으려는데, 보라색 커튼 뒤에서 여자가 나타났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금발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여자였다. 너무나 소리 없이 유령처럼 아이들 앞에 다가오는 바람에 아이들은 놀라거나 두려워할 겨를도 없었다.

“우리 집에 꼬마 손님들이 오셨네.”

여자는 마녀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얼굴은 초상화 속의 사람들처럼 창백했지만, 언젠가 본 그림 속의 천사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여자의 미소에 경계심을 풀었다.

“안녕하세요.”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허락 없이 들어와서 죄송해요.”

“갑자기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변명을 했다. 한나만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하얀 피부, 은빛이 감도는 금발, 저 아줌마는 세바스찬과 닮았어. 한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너희들 어디에서 왔지?”

“빨간 지붕 집이 있는 아랫마을이요.”

“오, 멀리서 찾아온 귀한 손님들이로구나. 다들 지쳐 보이는데, 좀 앉으렴.”

여자가 거실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기하학무늬의 소파를 가리켰다. 톰은 컵케이크를 손바닥 위에 놓은 채 소파에 앉았다.

“아줌마가 마실 것 좀 줄까?”

아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 숲길을 걸어온 데다가 기나긴 복도를 지나오느라 긴장한 탓에 몹시 목이 말랐다.

“그럼 아줌마가 차를 끓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렴.”

여자가 주방 쪽으로 가고 난 후, 아이들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말했다.

“여기 계속 있어도 될까?”

“저 아줌마, 좀 무섭지 않아?”

“응. 어쩐지 세바스찬하고 닮은 것-”

“쉿, 그 애 이름은 꺼내지도 마!”

에반이 한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야, 싸우지 말고 너희들도 이거 먹어봐.”

컵케이크를 한입 가득 베어 문 톰이 입가에 분홍색 크림을 묻히고 말했다.

“넌 지금 그게 넘어가냐?”

니콜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팔꿈치로 톰의 옆구리를 쳤다.

“먹고 싶은 만큼 먹으렴. 우리 집에는 케이크와 쿠키가 아주 많이 있단다.”

그 사이 여자는 보라색 덩굴이 그려진 찻주전자와 찻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향긋한 차향이 거실에 퍼졌다. 여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에 차를 따라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찻잔을 받아든 아이들은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워낙 뜨거워서 마실 수가 없었다. 사실 아이들이 원한 건 시원한 주스였다.

“어서, 마셔보렴.”

여자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아이들은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면서 조금씩 마셨다. 차가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실에는 불온한 침묵이 감돌았다.

“앗, 뜨거워.”

본의 아니게 침묵을 깬 건 톰이었다. 컵케이크를 먹고 차를 급하게 들이켜다가 찻잔을 놓치고 만 것이다. 뜨거운 차가 톰의 반바지로 쏟아졌고, 잔은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순간 여자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톰의 허벅지는 벌겋게 부어올랐다. 찻잔이 비쌀 텐데, 물어내라고 하면 어쩌지? 톰은 아파하면서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여자의 눈치만 봤다.

“톰, 조심했어야지.”

여자가 고개를 꼿꼿이 든 채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방금 여자가 톰이라고 했어. 아이들의 팔뚝에 일제히 소름이 돋았다. 에밀리가 테이블 아래로 한나의 발을 건드렸다. 여기서 나가야 해. 에밀리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에밀리와 눈이 마주친 에반이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저희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반, 벌써 가려고? 너희들, 소원의 구슬을 보러 온 거 아니야?”

“소원의… 구슬이요?”

에반의 말투는 어눌했다. 에밀리도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찻잔 속에는 탁한 녹색의 회오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가장 먼저 쓰러진 건 니콜라스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지푸라기 인형처럼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너희들 때문에 불쌍한 헨리 영감은 하늘나라로 가게 됐지. 생각보다 목숨이 질긴 늙은이더구나.”

저 여자가 헨리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그럼 이 집에 소원의 구슬이 있다고 말해준 건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 여자였단 말이야? 왜 그렇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이곳으로…. 에반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건 눈을 부릅뜬 채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들이 깨어난 곳은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서는 눅눅한 곰팡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의자에 묶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철제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밀랍인형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창백한 아이가 누워 있었다. 세바스찬이었다. 그 아이를 본 다섯 아이 모두의 얼굴이 세바스찬보다 더 창백하게 질렸다. 세바스찬은 한 달 전, 죽었다. 다섯 아이가 목격하는 앞에서.

세바스찬이 마을에 온 건 석 달 전이었다. 은색에 가까운 금발 머리에 에메랄드빛 눈, 지나치게 흰 피부가 그 애를 신비하면서도 병약해 보이게 했다. 에밀리와 한나는 그런 모습을 귀족적이라며 감탄했다. 니콜라스와 톰도 세바스찬을 좋아했다. 오직 에반만이 그 애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붉은 머리, 푸른 눈의 에반은 세바스찬이 오기 전까지 가장 아름다운 아이였으니까.

세바스찬은 종종 커다란 파이를 가져와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아이들의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 파이나 사과 파이와는 차원이 다른 파이였다. 어쨌거나 시골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야. 에반은 그 애가 가져온 블루베리 파이를 입에 욱여넣으며 생각했다. 특히나 참을 수 없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에밀리가 세바스찬에게 귀엣말을 속살거릴 때였다.

“다섯 명일 때가 더 좋았어.”

세바스찬이 없는 어느 날, 에반이 넌지시 말해봤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에반은 세바스찬의 단점을 찾아내려 애썼지만, 세바스찬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아이였다.

§

한 달 전 그날, 아이들은 호숫가로 피크닉을 갔다. 여자애들은 샌드위치와 쿠키를, 남자애들은 돗자리와 주스, 우유 등을 가져왔다.

“세바스찬, 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어?”

“난, 저걸 가져왔어.”

세바스찬이 가리킨 것은, 호숫가에 매여 있는 하얀 조각배였다.

“우와, 배를 여기까지 어떻게 가져온 거야?”

에밀리의 물음에 세바스찬은 웃기만 했다. 건방진 녀석. 에반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유약한 세바스찬이 직접 끌고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 자기 아버지가 마차로 실어다주었겠지. 하인에게 시켰을 수도 있고. 에반과 아이들은 세바스찬의 부모가 누군지, 심지어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지만, 그 애가 부잣집 도련님일 거라 믿고 있었다.

배를 탈 순서를 정하느라 웅성거리는 아이들에게 에반이 숨바꼭질을 하자고 했다.

“내가 술래할게. 배는 점심 먹고 나서 타도 되잖아.”

에반이 선심 쓰듯 말했다. 아이들이 흩어진 사이, 에반은 배 밑창을 살폈다. 얇은 판자로 된 조각배는 에반이 발을 세게 구르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티가 날 것이다. 에반은 밑바닥에 깔린 판자의 틈새를 벌려놓았다. 물이 새서 타지 못하게 되면 고물 배를 가져왔다고 놀려줄 생각이었다.

숨바꼭질을 하고, 돗자리 위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에밀리와 니콜라스가 가장 먼저 배에 탔다. 니콜라스가 노를 저었고, 배는 무사히 호수 가운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한나와 톰이 탈 때까지도 배는 멀쩡했다. 에반은 공연히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반, 나랑 탈래?”

한나와 톰이 돌아오자 세바스찬이 물었다.

“난 별로.”

에반이 고개를 젓자 에밀리가 나섰다.

“그럼 내가 한 번 더 탈래.”

그 순간 에반은 안 좋은 예감을 받았지만, 둘은 가볍게 조각배에 올라탔다. 오후의 햇살이 호수 위를 금빛으로 물들였고 서늘한 바람이 잔잔한 물결을 만들었다. 에반은 호숫가에 누워, 에밀리의 풍성한 갈색 머리에 입을 맞추는 상상을 했다. 배가 호수 한가운데로 갔을 때였다. 에밀리가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물이 새고 있어!”

세바스찬이 부지런히 노를 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작은 배에 물이 차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배가 호수로 가라앉았고 물에 빠진 에밀리와 세바스찬이 허우적거렸다.

“살려줘, 살려줘!”

에반이 호수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단숨에 에밀리에게 헤엄쳐갔다. 그 사이 세바스찬은 물 위로 떠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나, 난 수영을 못하는데.”

톰이 벌벌 떨며 말했다.

“나도.”

한나와 니콜라스도 겁에 질려 떨기만 했다. 누구 하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호숫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내밀었다면 세바스찬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반은 에밀리를 호숫가에 눕혔다. 세바스찬은 더 이상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은 그날 일을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

여기서 도망가야 해. 에반은 의자 뒤로 묶인 손목의 매듭을 풀어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매듭 같은 건 없었다. 마녀의 주술로 손과 발이 묶여버렸으니까. 또각또각,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은 여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정신이 들었니? 다들 알아봤겠지만 이 애는 내 아들, 세바스찬이야. 오랜만이지?”

마녀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날카로운 치아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보였다. 꺅, 한나가 소리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마녀의 새빨간 눈동자가 한나를 쏘아보았다.

“걱정하지 마. 너희들은 내 아들을 죽였지만, 난 너희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마녀가 다섯 아이를 하나하나 돌아보며 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대신 너희에게 숙제를 내줄 거야.”

“어, 어떤 숙제 말이죠?”

에반이 간신히 대꾸했다. 다른 아이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희들의 오감 중 어떤 걸 포기할 건지 선택하는 숙제. 세바스찬을 되살리려면 그게 필요하거든.”

“오감이라니….”

“세바스찬을 내 힘으로 되살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아들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될 거야. 세바스찬이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는, 너희 다섯 명의 도움이 필요하단다. 그러니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중에서 너희가 포기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골라. 그럼 내가 그것만 가져갈 테니까. 단 너희들끼리 충분히 상의한 다음 의견일치를 봐야 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요?”

“글쎄, 어떻게 될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니? 하지만 내 말을 듣는 편이 좋을걸?”

까아아하하학, 마녀가 까마귀 우는 소리처럼 웃어댔다. 그러고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아이들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였다. 한나가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저요! 제 후각을 가져가세요!”

한나는 마녀의 말을 듣자마자 후각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피아노를 치려면 촉각과 시각이 꼭 필요했다. 소리를 들으려면 청각도 있어야 하고, 남은 건 미각과 후각인데, 냄새쯤이야 맡지 못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아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구나.”

“네?”

한나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마녀를 올려다봤다.

“난 분명히 너희들의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고 했어.”

“의견이요? 얘, 얘들아, 내가 후각을 포기해도 되겠지? 에밀리, 톰, 어때? 후각을 나한테 양보해주지 않겠어?”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한나의 눈을 피했다. 사실 냄새에 민감한 니콜라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후각을 잃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아이들은 네 생각이 마음에 안 든다는데?”

마녀가 검지로 한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한나가 의자에서 풀려나 공중으로 떠올랐다.

“에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봤었지? 이걸로 답을 대신해주마.”

마녀가 가슴 사이에서 단도를 꺼내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한나의 손가락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늘고 여린 손가락들이 더러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잘려나간 손가락 마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아아악! 한나가 소리를 지르다가 기절했다. 십자가 모양으로 허공에 박힌 채.

“이제 알겠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갈 거야.”

마녀가 검지를 위로 들고 동그라미를 그리자 한나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아이들도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네 명의 아이들이 깨어난 곳은 지하실이 아니었다. 위쪽에 창이 하나 나 있을 뿐, 밖으로 나가는 문도 없는 밀실이었다. 밀실은 아이들이 발을 뻗으면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좁았다. 비가 그쳤는지 창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에반은 굳이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첨탑의 꼭대기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딘가 비밀의 문이 있을 거야.”

니콜라스가 회색 벽돌로 된 벽을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물론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찾을 순 없을 거야.”

톰이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그래, 우리가 여기서 나가려면 마녀의 숙제를 하는 수밖에 없어.”

에밀리의 목소리에서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나가 촉각을 잃었으니까…. 남은 건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야.”

손가락을 꼽던 니콜라스는 피로 물든 한나의 손가락이 생각나 몸서리쳤다.

“우선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걸 한 가지씩 말하자.”

“시각.”

“나도.”

“나도.”

에반을 포함, 모두가 시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각을 제외하고 누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부터 정해야 했다.

“난 후각을 잃고 싶지 않아.”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럼 내가 후각을 포기할게. 난 청각을 잃고 싶지 않거든.”

에밀리가 뒤를 이었다.

“톰, 넌?”

에반의 물음에 주저하던 톰이 대답했다.

“난… 미각을 잃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럼 겹치는 게 없는 거 같은데, 니콜라스가 미각, 에밀리가 후각, 톰이 청각을 포기하는 걸로 하면 될까?”

그렇게 되면 에반은 시각을 포기해야 한다. 에반은 헨리 할아버지의 탁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난, 청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톰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어쩌라고? 네가 후각을 포기할래? 그럼 에밀리가 미각, 니콜라스가 청각을 포기해야 할 텐데….”

“나도 청각을 잃을 순 없어.”

니콜라스가 골이 난 얼굴로 말했다.

“나도 후각 말고는 양보하고 싶지 않아.”

에밀리가 톰을 노려봤다.

“여기서 누가 감각을 잃고 싶겠어? 하지만 우리가 의견일치를 보지 않으면, 마녀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갈 거야.”

“그럼 우리 모두 장님이 된다는 거야?”

에밀리가 말했다.

“아니, 마녀는 오감이 필요하다니까 그렇게는 안 되겠지. 아마 에밀리는 청각을 잃고… 톰은 미각을, 니콜라스는 후각을 잃게 되지 않을까?”

니콜라스는 한숨을 쉬며 창을 바라봤다. 모두가 옷을 벗어 밧줄처럼 만든다고 해도, 좁은 철창 사이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난 청각도 후각도 잃고 싶지 않아. 난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톰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리고 벽돌로 된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저 맛있는 피칸 파이가 먹고 싶었던 것뿐인데… 세바스찬의 엄마가 마녀일 줄이야…. 쿵, 톰은 한 번 더 머리를 박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톰, 정신 차려, 톰!”

니콜라스가 흔들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정신을 잃은 톰은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젠장, 니콜라스가 욕을 내뱉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합의를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린 가장 소중한 걸 잃게 될 거야.”

에밀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얘들아, 시간이 됐단다.

방 안에 마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녀의 주문 소리가 이어졌고, 벽돌로 만든 바닥이 푸딩처럼 물컹거리며 아이들을 빨아들였다. 으아아아악, 아이들은 나선형으로 돌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실 바닥에 내던져졌다. 지하실 구석의 화로에는 커다란 솥단지가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 장작에서는 새빨간 불꽃이 솟아올랐다. 에반은 도망치려 했지만 온몸이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지 이상하게 뒤틀린 자세로 굳어 있었다.

“안됐지만 더 이상 시간을 줄 수가 없구나. 물이 끓기 시작했거든.”

솥 앞에 선 마녀가 오므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닥에 떨어진 열 개의 손가락이 떠오르더니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단 듯 마녀의 손바닥 안에 들어갔다. 마녀는 손가락을 솥에 던져 넣으며 주문을 외웠다. 한나는 자신의 손가락이 익어가는 것도 모른 채 바닥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너희는 내가 내준 숙제를 하지 못했어. 가장 소중한 걸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지.”

“아니에요. 제가 청각을 포기할게요.”

톰이 다급하게 외쳤다.

“맞아요. 제가 후각을, 니콜라스가 미각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에밀리가 덧붙였다.

“맞아요. 맞아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럼 에반이 시각을 포기하는 거니? 에반에게 가장 소중한 걸 텐데?”

마녀가 에반을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내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고? 왜 나만 가장 소중한 걸 잃어야 해? 잘못은 모두 같이 했는데. 나는 헨리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 아무리 아는 게 많다고 해도 눈이 보이지 않으면, 배를 탈 수 없잖아.

“아니요, 전 시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에반이 신음하듯 말했다. 안 돼, 안 돼. 에반, 그러지 마. 나머지 아이들은 고개도 젓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마녀의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에반, 고맙다.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자, 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지켜볼 수 있게 넌 마지막 차례로 해주마.”

그제야 에반은 자신이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은 가장 소중한 걸 잃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에반이 시각을 잃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톰의 앞으로 간 마녀가 허리춤에서 길고 뾰족한 가위를 꺼냈다. 그리고 허공에 싹둑, 가위질을 했다.

“넌 앞으로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할 거야.”

톰의 혀가 잘려나갔고, 입안에서 폭포처럼 피가 쏟아져 내렸다. 마녀가 한나의 손가락처럼 바닥에 떨어진 톰의 혀를 끌어올려 솥에 넣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에반은 마비가 풀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마녀가 돌아서자 거짓말처럼 몸이 굳었다. 조금 전 그건 뭐였지? 에반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음은 니콜라스, 네 차례야. 너는 냄새 맡는 걸 아주 좋아했지. 우리 아들도 비 온 다음 날 풍기는 진한 풀냄새를 좋아했어.”

마녀가 한나의 손가락을 베어버린 단도를 세로로 휘두르자 니콜라스의 오뚝한 코가 단번에 잘려나갔다. 니콜라스는 코가 잘린 고통보다 콧속의 신경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몸부림치다가 정신을 잃었다. 마녀는 잘린 코를 끓는 솥에 넣었다. 그 순간 에반은 다시 마비 상태에서 벗어났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녀가 솥에 무언가를 넣으며 주문을 외우는 동안은 자신들을 옥조인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쿵쿵, 에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난 꼭 살아남을 거야.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이 될 거야.

마녀가 에밀리의 앞에 섰다.

“제발… 제발….”

에밀리가 애원했지만, 마녀는 다시 칼로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생선의 뼈를 발라내듯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에밀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귀가 멍한 느낌만 들었다. 혹시 아직 귀가 붙어 있나? 하지만 눈을 뜬 에밀리는 한나의 손가락처럼, 니콜라스의 코처럼 자신의 귀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에밀리는 귀를 집어 든 마녀를 올려다봤다. 마녀가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어? 안 들리잖아? 귀를 마개로 꽉 틀어막은 것처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아, 안 돼!

에밀리에게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녀는 노래를 부르는지 계속 입술을 달싹거리며 에밀리의 귀를 갖고 솥으로 갔다.

지금이야. 에반은 마녀가 솥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사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펄쩍 뛰어올라 마녀의 등을 있는 힘껏 밀었다. 중심을 잃은 마녀가 솥 위로 고꾸라졌고, 화로에 매달린 솥이 기우뚱하며 끓는 물을 뱉어냈다. 솥에 머리가 처박힌 마녀가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고, 에반은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미친 듯이 지하실 계단을 뛰어 올라가 문밖으로 나가니 거실이 나왔다.

§

복도가 어디지. 에반은 거실 구석구석을 둘러봤지만 그 길고 음산한 복도가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거실을 돌았지만 소용없었다. 피아노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복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에반은 휘청거리며 복도를 찾아 헤맸다. 거실에 있는 물건들이 추상화처럼 휘어지고 뒤틀려 보였다. 에반이 커튼을 젖히자 먼지가 부옇게 낀 창으로 새빨간 달이 보였다. 핏빛 달? 붉은 건 달만이 아니었다. 톰이 바닥에 떨어뜨린 깨진 찻잔도 붉은색이었다. 그제야 에반은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붉은 세상은 오래지 않아 온통 검게 변했다. 아무리 눈을 비벼봐도 깊고 깊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 내 눈, 내 눈이! 에반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비틀거렸다. 마녀의 집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손을 뻗어 습한 공기를 더듬었다.

또각또각, 마녀의 발소리가 들렸다. 에반이 검은 어둠을 가르며 뛰었다. 자기 앞에 거대한 장애물이 있다는 걸 알 수 없었던 에반의 몸이 그대로 쓰러졌다. 불과 몇 시간 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거대한 모형 함선 위로 넘어진 것이다. 무쇠로 만든 함선의 뾰족한 뱃머리에 에반의 가슴이 꽂혔다. 이미 마녀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에반의 폐에서 마지막 숨이 빠져나갔다.

끓는 물을 뒤집어쓴 마녀는 얼굴에서 붉은 살점을 뜯어내며 거실로 왔다. 그리고 에반의 두 눈을 길고 뾰족한 손톱으로 파냈다.

§

마녀는 거추장스러운 구두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계단을 내려갔다. 절룩거리며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아들 세바스찬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비록 자신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지만 상관없었다. 솥 앞에 선 마녀는 바닥에 남아 끓고 있는 수프에 에반의 파란 눈을 빠뜨리고 국자로 저었다. 마지막 주문을 외우자, 아이들의 영혼이 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애당초 아이들을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두려움과 고통을 주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세바스찬을 죽도록 내버려둔 것도 모자라, 차가운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녀에게 수정 구슬이 없었더라면 마녀조차 사랑하는 아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결코 알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제 괜찮아. 아이들은 죽었고, 내 아들은 살 테니까.

마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국물 한 국자를 떠서 침대에 누워 있는 세바스찬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그런 다음 아이의 눈과 코와 입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고, 양쪽 귀에 번갈아 무언가를 속삭였다.

시간이 흐르자 창백한 아이의 두 볼에 복숭앗빛이 깃들었고, 차디찬 아이의 몸에는 온기가 돌아왔다. 마녀가 아이의 손을 꼭 잡자, 아이는 마침내 감겨 있던 눈을 떴다.

“오, 내 아들.”

마녀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긴 잠에서 깨어난 듯 굳었던 팔을 서서히 뻗어 자신의 엄마를 안았다.

“사랑해요, 엄마.”

“내 아들, 엄마도 사랑해.”

마녀는 세바스찬을 안아 일으켰다. 아이는 막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불안하게 일어섰다.

“걸을 수 있겠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어서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키고, 갓 구워낸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아가, 잘 자렴.”

마녀가 세바스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실을 나갔다.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엄마와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쳤지만, 세바스찬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또다시 호수 밑으로 가라앉아버릴 것만 같아,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세바스찬, 세바스찬, 우리 목소리가 들리니?

난 에밀리, 넌 내 귀로 듣고 있어.

난 니콜라스, 넌 내 코로 냄새 맡고,

난 톰, 넌 내 혀로 크루아상을 맛보았지.

난 한나, 넌 내 손으로 네 엄마의, 아니 마녀의 손을 잡았어.

그리고 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겠지.

난 에반이란 걸, 넌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너는 우리의 감각으로 되살아났지.

그러니까 우린 바로 너야.

세바스찬, 세바스찬, 우리가 느껴지니?

다섯 아이의 합창 소리였다. 세바스찬은 손바닥을 펼쳐 귀를 막았다. 그래도 노랫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

세바스찬이 외쳤지만 노랫소리는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더욱더 커졌다. 세바스찬의 비명 소리에 마녀가 아이의 방으로 뛰어왔다.

“아가, 무슨 일이니? 잠이 오지 않아?”

여전히 울리는 노랫소리 때문에 아이는 엄마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글픈 얼굴로 엄마를 보는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 내 아가. 이제 괜찮아.”

마녀는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이 아이의 얼굴을 할퀴지 않도록 조심하며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그러니까 우린 바로 너야. 우린 바로 너야. 우린 바로 너야….

귓가에 반복되는 노랫소리, 세바스찬은 아이들의 영혼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잔인하게 죽인 마녀에게 복수하는 것. 그러나 그 사악한 마녀는, 세바스찬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였다. 세바스찬의 손가락이 멋대로 움찔거리더니, 마녀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위를 빼냈다.

“난, 절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을 거야.”

세바스찬은 마녀의 심장을 겨누는 가위 날을 돌려 잡고, 벌어진 날을 자신의 두 눈에 깊이 박아 넣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찌나 민첩했는지 마녀가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안 돼, 아가! 안 돼! 널 두 번은 살릴 수 없는데!”

마녀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뚝 끊어졌다.

어쩌지, 세바스찬?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결말인데?

세바스찬이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다섯 아이의 웃음소리는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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