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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괴이한 거울

넷이 있었다

이시우

0

내가 겪었고, 시달리고 있는 일을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도, 어디에 올려야 할지도 마땅히 떠오르는 바가 없어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이곳에 남겨봅니다.

처음에는 해괴한 발상 같이 여겨졌었지만, 막상 힘겹게 내뱉은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문단으로 증식해 나아가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곳의 성격상 내 글을 접한 누군가는 이걸 제법 정교하게 지어내 가상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평생 일기 한번 꾸준히 써본 적이 없는 나의 조야한 문장 때문에라도 여러분은 내 글을 이야기의 형식을 갖추는데에도 실패한 조악한 거짓말 덩어리로 여기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에게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로 하여금 이글을 완성케 하는 동력은 가상의 (정말로 그런 게 존재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독자로부터 받을 격려나 위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기 힘든 끔찍한 경험이 내 가족에게, 내 영혼에 깊숙이 남긴 상처.. 그 상흔을 어루만질 때마다 내면이 아닌 아득히 먼 곳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끔찍한 동시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한 비명소리와 같은 고통의 감각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채찍질한다고나 할까요?

언제인가 누군가가 ‘이야기란 말하는 이의 입을 떠나고 나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해준 것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비명 소리의 주인이 잠결에 속삭여준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를 여러분을 향해 던진 이 글은 내 손을 떠날 때는 솔방울이었을지 몰라도 여러분의 머리에 내려 앉았을 때는 그게 돌멩이가 될지 수류탄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내 이야기가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기를 바라봅니다.

장황한 서두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고 본격적으로 이 일이 시작되었을 때를 되짚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인물과 사건이 있는 법이고 그 사건은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을지라도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되짚어 보면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었던 법이지요.

제 이야기의 시작은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이 된 제 아들로부터 시작됩니다.

1

“아빠!”

그게 제아무리 집이라도 밤 11시에 이제 막 변성기를 벗어난 아들이 굵직한 목소리를 드높여 ‘아빠’를 찾는 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섬뜩한 기분이 들것입니다.

특히나 방과 후 집에서는 일과를 물어보는 질문에 최소한의 단답식 대답만을 내뱉은 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게임을 하는지, 음악을 듣는지, 아니면 부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새로 발견한 놀이에 몰두하는지 알기 힘든 나잇대의 아들이라면 말이지요.

그 나잇대의 남자애들은 돌연 세상이 감추고 있던 비밀을 깨닫곤 하지요. 자기는 무적이라는걸, 자기를 두렵게 할 대상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말입니다.

제 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까지 제게 가지고 있던 존중과 두려움은 어느새 억눌린 조롱과 경멸로 뒤바뀌어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는 듯한 태도의 아들이 다급히 내지른 소리가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졌습니다.

분명히 안전한 집 안이고, 아들이 방 안에서 나를 다급히 찾아야 할 만큼 큰일을 당할 리는 없다는 걸 머리로는 깨닫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본능이 나를 아들의 방으로 뛰어가게 했습니다.

“왜 그래?!”

다급히 아들의 열린 방문으로 뛰어들어간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건 평소에 아들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몰두하던 게임 화면이 보이는 모니터 뒤로 활짝 열린 창문이었습니다.

나를 부른 아들이 좀 전까지 붙들고 있었을 게 분명한 마우스와 키보드에서 손을 뗀 채로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 창문 말이지요.

또다시 알 수 없는 본능이 내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하는 걸 막아섰습니다.

“뭔데 그래?”

애써 여전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 물어봤습니다.

“창문 밖… 저기 맞은편 동 베란다요.”

창문 밖을 가리키는 아들의 치켜든 손가락 끝을 바라보기가 왜 그리 두렵게 느껴지던지.

어쩌면 그때 본능을 따라 창문 밖을 외면한 채 커튼을 치고 아들에게는 잠이나 자라고 호통을 쳤더라면….

하지만 강력한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내 시선은 아들의 손끝을 따라 돌아갔습니다.

쌀쌀한 가을의 밤공기 넘어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불이 꺼진 베란다에 나란히 늘어선 네 명의 남자였습니다.

‘세상에, 다들 똑같이 생겼잖아?’

20층이 훌쩍 넘는 신축 아파트의 중간층 베란다에서 불을 끈 채로 우리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네 명의 남자를 발견한 제 머릿속을 처음으로 강타한 생각이 저거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집과 맞은편 동 사이에 두텁게 내리깔린 어둠 너머에서도 네 명의 얼굴이 똑같다는 게, 모두가 똑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게, 키도, 체형도 서 있는 자세도 똑같다는 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어쩌면 우습기까지 한 최초의 인상에 바로 뒤따라온 건 어깨 끝에서부터 팔 끝을 훑어 내려오는 듯한 서늘한 냉기와도 같은 감각이었습니다.

‘우리 집 바라보고 있잖아?’

아니. 사실 우리 집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건 그때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인정하는 순간 애써 억누르고 있던 내 감각을 사로잡으려 하는 압도적인 공포감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였을 것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징표도 보이지 않는 광경에서 그저 무작정 고개를 돌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리면 그들이 눈치를 챌 것만 같았습니다.

무엇을요? 제가 그들을 이제 막 발견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왜인지 그들이 그걸 알게 하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선험적인 깨달음이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밤늦었잖아. 게임 그만하고 얼른 씻고 자. 공부를 하든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시선을 방으로 돌려놓고 이미 나의 공포와 두려워해야 할 게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깨달음을 눈치챈 아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뱉었습니다.

아들의 얼굴에 처음 떠오른 표정은 당황이었습니다.

아빠가 왜? 저걸 못 본 척하지? 왜 아무런 말을 하지를 않지? 왜? 왜? 두려워해야 마땅한 것을 애써 외면하지?

하지만 사춘기의 소년에게는 어느 정도 어른의 노회함과 간교함이 깃들기 시작하는 법이지요.

이내 제 의중을 파악한 듯 작은 경멸과 분노와 그보다 더 큰 안도가 뒤섞인 감정을 내뿜으며 제게 동조했습니다.

“…알았어요.”

저는 아들의 대답에 화답하듯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뒤돌아 방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자석 같은 강렬한 끌림은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내 시야에 들어온 건 네 명 중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몸을 돌려 베란다 너머 집을 가득 메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었습니다.

2

마루에 불을 환히 켜놓고 멍하니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더군요.

스포츠 뉴스의 현란한 하이라이트 영상도 심야 뉴스 진행자의 분노한 목소리도 제 눈과 귀를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무얼 기다리는 줄도 모른 채로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꾸만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11시 10분을 넘어 15분 근처로 분침이 다가갔을 때 제가 기다리던 아들의 비명이 굳게 닫힌 방문을 뚫고 흘러나왔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아들이 조금더 어렸고, 말수도 많았고, 좀 더 쉽사리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던 시절의 높고 찢어지는 목소리였습니다.

잠깐, 아주 잠깐 다른 방에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딸아이가 깰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 뒤에 든 생각은… 부끄럽지만 소파에서 일어나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그냥 아들의 비명은 외면하고 해가 뜨면 밤에 무슨 일이었냐고? 모르는 척 물어보고 싶다….

어차피 대문은 굳게 닫혀있고 이 집안에서 우리 가족에게 해를 가할 건 아무것도 없다….

뭐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앞으로 내가 바라볼 광경에 대한 공포로 덜덜 떨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일어서는데 집안 기온이 순식간에 한 10도는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의식도 못 하는 사이에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갑작스러운 부끄러움과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닫힌 아들의 방문을 열고 뛰어들어가니 아들은 홀린 듯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습니다.

아들의 볼에도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흘러나온 눈물이 길게 자국을 남겨두었더군요.

쩍 벌린 입이 쉴 새 없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딱딱! 하는 불쾌한 리듬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와는 체격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아들을 품에 끌어안고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분노가 치밀더군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는 명확했습니다.

맞은편 동의 세 명은 여전히 우리 집을, 아들의 방 안을,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잠깐의 당혹감 뒤에 바로 시선을 맞은편 동과 우리 동 사이에 있는 단지 내 공원으로 돌렸습니다.

아까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남자가 은은한 방범등 불빛을 찢어발기며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동쪽으로 걸어오고 있더군요.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아파트 단지 안은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었지만, 남자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정적 속에서 유리를 때려대는 망치 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고 있어요! 오고 있어요! 이제 곧 우리 집으로 올 거예요!”

아니. 절대 못 들어올 거고, 들여보내지도 않을 거다.

아들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더라면 좋았을까요? 하지만 그건 단지 제 머릿속에 맴돌았던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저 자신도 믿지 못 할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있을까요?

사실 애써 용기를 내보려 해보았지만 나 역시 바로 아들과 비슷하게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 잡혀버렸습니다.

‘그들이 날 봤어! 나를 봤다는 걸 내가 알았다는걸 눈치챘어! 오고 있어! 계속 걸어올 거야!’

공포에 떠는 피붙이를 품에 안고 있을 때만 가능할 법한 의지력을 발휘해서 저는 우리 집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내 시선이 그 느리지만 단호한 발걸음을 가로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라도 되는 양 말이지요.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단지 내 공원을 걷고 있던 남자의 발걸음이 멈추어 섰습니다.

허공을 잠깐 부유하던 눈동자가 내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그 먼 거리 에서도, 그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작지만, 너무나 뚜렷한 파국에 대한 예감이 바로 뒤따라왔습니다.

시작되었다는걸, 절대 막을 수 없다는걸..

갑작스럽게 어처구니없게도 그들 네 명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다는 깨달음이 들더군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저와 눈싸움을 하던 남자의 입매가 작게 흔들렸습니다.

비웃음? 슬픔? 경멸?

그 무엇도 될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 해답을 결국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정적은 귀를 찢을 듯 요란하게 울리는 엔진 소리와 비명을 질러대는 타이어 소리에 갑작스럽게 깨어졌습니다.

소리를 낸 주범은 커다란 자동차였습니다.

눈 깜박할 새도 없이 숨 막히는 정적을 몰아내고 단지 내 공원으로 뛰쳐 들어온 자동차가 검은 옷의 남자를 덮쳐버리더군요.

비명 하나 없이 검은 옷의 남자는 보안등을 들이받고서야 멈춰선 시커먼 자동차의 형체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아들의 눈을 가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전에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맞은편 베란다를 보니 나머지 세 명의 표정이 뚜렷이 보이더군요.

커다란 만족감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을 띈 채로 그들은 등을 돌려 베란다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웅성거림과 함께 산발적인 불빛들이 아파트 단지 내 공원에 내리깔린 어둠을 군데군데 밝혀 주었습니다.

여태까지 죽은 괴수의 시체와도 같았던 신축 아파트가 갑작스럽게 생명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입주가 마무리되지 않아 군데군데 비어있는 아파트가 그때만은 사람들로 꽉 찬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갑작스럽게 현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안도가 되더군요. 좀 전까지 그토록 두려움에 떨던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래. 아파트 주민 한 명이 밤 산책을 나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거다.

아들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도 쉽사리 답해줄 수 없었던 모호한 질문에 대한 뚜렷한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경찰이나 병원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들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천천히 하지만 완강하게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물어보더군요.

아들의 얼굴에 평소의 오만하고 반항적인 표정이 되돌아온 게 무엇보다 안심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혼란과 부끄러움의 흔적이 작게 묻어나오고는 있었지만 이내 사라질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신고했을 거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 진짜 그만 자라.”

아들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눈앞에서 목도한 공포를 애써 외면하고 던져진 질문에서 도망갔습니다.

3

그날 밤 제가 쉽게 잠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악몽에 시달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지나가듯이 어젯밤에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더군요.

모든 게 평소와 똑같은 아침이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밥을 먹는 아들의 모습도 몇 주째 지저분하게 늘어지고 있는 시공업체의 인테리어 마무리 작업에 대한 아내의 불만도 여전했습니다.

평소라면 의미를 알기 힘든 질문을 엄마나 오빠에게 끝도 없이 늘어놓고 있을 딸아이만이 달랐습니다.

사실 그때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고 지금에 와서야 딸아이가 입을 굳게 다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 그런 딸 아이 옆에서 식탁에서 혹시라도 흘러내려 오는 음식이 없을까 눈빛을 빛내며 끙끙대고 있었어야 할 우리 집 강아지 해피가 위축된 자세로 얌전히 엎드려 있었던 게 떠오릅니다.

아니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절제된 식탁의 풍경이 만족스러웠던 것도 같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정이라는 것이 그토록 쉽게 변하고, 왜곡되고 잊히는 것이었던 건지….

하지만 딸아이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전날 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압도되었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의 여파였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4

평소와 다를 거 없는 하루가 끝나고 퇴근을 하는 그 시간까지도 전날 밤에 그토록 나를 두렵게 했던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고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빠르게 잊히는 악몽처럼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마음속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일말의 불안감이 나를 평소보다 이른 귀갓길에 오르게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서울의 직장에서 30여 분 정도 떨어져 있는 신도시에 있는 집이었지만 이른 퇴근길은 제 예상보다 더 막히더군요.

서둘러야 한다거나, 다급하다거나 하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어젯밤 사고의 흔적, 쓰러진 방범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공원을 지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의 지상층은 모두 공원이고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던 게 갑자기 떠올랐지만, 급발진 사고를 당했거나 음주 운전을 했거나.. 뭐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하고 스스로 납득해 버렸습니다.

현관문을 열려고 보안키 패드를 켰는데 그제야 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러니깐 그때까지 현관문은 닫혀만 있는 채로 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아파트인데도 말입니다.

아침에 아내가 인테리어 시공업체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던 게 떠오르더군요.

이 사람들 또 뭔가 이상하게 건드려 놓고 갔나 보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습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고 아파트 내에 입주해 있는 집들의 불은 모두 켜져 있었는데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더군요.

어둠에 집어 삼켜진 거실에는 이상하리만치 서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어젯밤의 일들이 묻어 두었던 꿈의 영역에서 되살아나 현실로 침범해 오는 듯했습니다.

“왜 문도 안 잠가두고.. 불은 또 다 꺼놨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부러 큰소리를 내었습니다.

대답 대신 섬뜩한 기운이 발치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억눌러 참아야만 했습니다.

작은 발소리를 내며 나를 스쳐 지나간 해피의 뒤를 무심코 따라갔습니다.

거실 한가운데에 딸아이가 서 있더군요.

반가운 표정도, 인사도, 평소의 뜻 모를 단어들의 폭격도 없었습니다.

딸아이는 대리석처럼 반들반들한 무표정의 가면을 쓴듯한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마른침을 삼키고 거실의 불부터 켰습니다.

무표정의 가면을 쓴 딸아이가 어느새 몸을 돌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딸아이의 시선에 잡아 먹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어디 갔니?”

굳게 닫힌 딸아이의 입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나를 쏘아만 보는 딸아이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몸을 돌려서 안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딸아이의 손이 치켜 올라가더니 아들의 방 쪽을 가리키더군요.

“저 밖에 있어요.”

“어디? 엄마 오빠 방에 있다고?”

딸아이의 입매가 누군가 위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활짝 올라가더니 경쾌한 웃음이 그 사이로 터져 나왔습니다.

“아니 거기 말고! 더 멀리! 어디 말하는지 아빠도 알잖아요?!”

아이의 천진한 질문에 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해피야. 아빠는 다 알고 있다니깐? 내가 아빠가 알고 있다는걸 알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

뭐가 그리 재미난지 딸 아이의 웃음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딸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기라도 한지 안방 문이 열리고 아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걸어 나오더군요.

순간 아내의 얼굴에도 딸 아이처럼 무표정의 가면이 씌워져 있을 거란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멍한 표정으로 나와 웃고 있는 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더군요.

낮 동안 시공업체에 시달려서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이 시간이 되었다는 둥….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한번 입이 열린 딸아이는 평소처럼 단어를 내 쏟기 시작했고 저녁 준비를 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아내가 주방에서 내는 소리가 작은 아이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화음이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냉기를 몰아내는 듯했습니다.

“유진이는 오늘 별일 없었어?”

“당신 출근하고 애가 평소답지 않게 창밖 구경을 하겠다고 떼를 쓰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열이 좀 올라서 병원 데려가려고 준비하는데 다시 멀쩡해져서 또 해피 괴롭히고 있더라고요.”

평소였다면 절대 내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을 성격의 질문이었지만 아내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해 보였습니다. 대답에 이어진 것은 또다시 시공업체에 대한 끝도 없는 불평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아내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해피의 앞다리를 붙든 채로 아내의 평소 행동을 흉내 낸 듯 근엄한 말투로 훈계를 늘어놓는 딸아이의 목소리에 손이 떨려와 그만 수저를 떨굴 뻔했거든요.

“그래. 아빠가 봤어. 그 아저씨도 아빠 봤고. 아빠는 아까부터 계속 그냥 모른 척하는 거라니까?”

5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와중에도 내 신경은 온통 딸아이의 방으로 쏠려 있었습니다. 안방 문을 닫은 채로 전화기를 잡고 누군가에게 끝없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아내의 목소리를 배경음으로 작은 아이가 강아지에게 늘어놓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딸아이의 등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딸아이가 내게 등을 돌린 채로도 나와 마찬가지로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거든요.

작은아이와 나 사이의 기묘한 신경전은 밤늦게 귀가한 아들과 아이를 맞이하러 나온 아내 간의 짜증스러운 대화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언제나처럼 상투적인 아내의 질문에 열의 없는 대답을 건성으로 늘어놓으면 아들은 방으로 향했습니다. 방문을 닫기전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에 무언의 고갯짓으로 대꾸를 해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이가 아닌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는 동지간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인사였다고나 할까요.

아들은 별다른 화답 없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아내는 무언가 불만을 늘어놓으면 또다시 안방으로 들어갔고요. 너무도 생경하게 변해 버린 딸아이의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기에 나는 TV에만 신경을 집중하였습니다.

결국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엇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계속 마음을 다잡고만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신호는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단호하게 찾아왔습니다.

“아빠.”

어제와는 달리 아들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달관의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어쩌면 나와 마찬가지로 결국엔 맞닿으려야 할 일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후련함도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와 같은 기나긴 질문과 대답은 필요 없었습니다.

옮기기 싫은 발걸음을 애써, 하지만 굳세게 한 걸음씩 내디뎌 아들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새 활짝 열린 아들의 창문 밖에 보이는 건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네 명이었던 검은 옷의 남자가 두 명으로 줄어있었다는 것뿐이었죠. 머리끝에서부터 얼음물을 끼얹은 듯 냉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려 왔습니다.

“한 명 어디 갔니? 움직이는 거 봤어?”

“아까 우리 집 바라보더니 집 안 쪽으로 사라졌어요.”

“그다음엔? 아파트 단지 건너오는 거 봤어? 아니! 그 사람이 널 봤니?”

다급한 내 추궁에 아들은 말문이 막힌 듯해 보였습니다.

“아악!!!”

말문이 막혀 당황하고, 두려워하다, 분노한 기색이 가득 한 체로 아들이 막 입을 열려 할 때 거실에서 아내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들과 나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거실로 뛰어나갔고요.

“무슨 일이야?”

아내는 거실에 붙은 방범 인터폰의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아니, 이거 시공업체… 아, 진짜, 오늘 낮에도 몇 번 이러더니…. 배선을 뭘 건드렸는지 자꾸 방범 화면이 켜지고 이래요. 아, 진짜!! 짜증나서….”

얼굴 끝까지 달아올라 거칠게 말을 내뱉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나는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인터폰의 방범 화면에 아파트 단지를 건너오는 검은 옷의 사람 형상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본 것도 같았지만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전날과 달리 아파트 단지 안은 평온했습니다. 급정거하는 자동차 바퀴의 스키드 음도, 창밖으로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 모든 촌극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듯 거실을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딸아이의 웃음소리만이 내 귀를 가득 메웠습니다.

6

나는 한동안 안방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나와 이야기를 더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난 애써 외면했습니다.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것처럼 보이는 아내가 늦게까지 자고 있지 않은 딸아이를 꾸짖고 방에 들여보낸 후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오는 걸 애써 외면하며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딸 사이에 어떤 밀담, 내가 들었다 할지라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 옮기기가 두려운 종류의, 이 오갔을까 두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내 감정, 내 두려움을 아내나 딸이 눈치 내는 순간 이제껏 감추고 있던 본색을 드러낼 거 같아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했습니다.

밤 1시가 넘고 아들의 방의 불이 마지막으로 꺼지고 나서야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불이 꺼진 방안에서 언제 나와 마찬가지로 등을 돌린 채로 잠들어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그 보상으로 이 모든 일의 비밀이 밝혀지기라도 하는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사람처럼 잠든 아내의 모습에서 평소와의 다른 점을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결국엔 제풀에 지쳐 이끌리듯 침대 위로 몸을 던졌고 평소처럼 이불을 끌어 올린 바로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옆에 누워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있는 아내가 수십 년을 한 침대를 나누어쓴 아내가 아니라는 것을요.

언제나 불규칙해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잡인 숨소리를 내쉬며 자는 아내와 달리 아내의 모습을 하고 아내의 자리를 차지한 낯선 이에게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작은 뒤척임도 돌발적인 잔기침도 없이 냉엄한 대리석 조각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낯선 이를 바라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닌 두려움이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잠들지 않은 채로 자기를 관찰하고 있다는걸 눈치챈다면…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면 내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애써 평소와 똑같이 잠든 척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 아니 그걸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고 표현해도 되는지조차 의문스럽군요―가 주는 기묘한 비존재 감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은 깨어만 갔습니다. 감각이 확장되면 설명할 수 없는 공포는 더더욱 커져 갔습니다. 어쩌면 아내의 자리를 차지한 낯선 이도 잠이 든 것을 가장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숨조차 쉬기 어려워졌습니다.

내가 잠이 들지 않았다는 걸 눈치챈다면… 어쩌면 이미 내가 잠이 들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점점 더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습니다.

마치 서로의 패를 들여다보며 애써 미소짓는 도박꾼들처럼 나는 더욱더 절박하게 잠이든 척을 하였습니다. 먼저 행동에 나선 건 낯선 이였습니다.

낯선 이는 도저히 가로누운 인간이 취할 수 없는 동작으로 유연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돌려서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습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그 모든 불경하고, 기이한 행동 하나하나가 똑똑히 그려졌습니다.

낯선 이의 입에서 새어 나온 숨결이 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향취도, 온기도, 그 어떤 감각을 자극할만한 정보도 없는 그 숨결에 내 몸의 잔털 하나하나가 다 일어서는 게 느껴졌습니다.

곧 낯선 이의 입이 열리고 들어서는 안 될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걸 듣게 되는 순간 지금껏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내 모든 이성과 결심과 감정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말들 말입니다.

내 기대와는 달리 낯선 이는 그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진짜로 잠이 들었는지, 잠을 가장하고 있다면 그걸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챘는지 재고하고 있는듯한 시선이었을 겁니다.

나는 더욱 숨소리와 몸의 뒤척임 하나까지 평소와 똑같이 내려 애를 썼습니다. 이 상황에 끝이라는 게 존재할까? 의심을 가지는 한편으로도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습니다. 해가 떠서 이 낯선 이가 내게 관심을 거두는 그 순간이 오기는 할까? 그전에 내 애쓴 위장이 무너져 낯선 이에게 들통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끊임없는 회의 속에서도 그저 애쓰고 애썼습니다.

어느 순간 낯선 이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온이라는 이름의 내 위장이 거짓이었음을 진즉에 눈치채고 내 모든 두려움과 회의와 번민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작은 숨 한번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매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일지라도 결국엔 지나가기 마련이었습니다.

잠깐 방심을 했다는 후회와 그 방심이 가져다줄 여파를 자각하며 비명을 내뱉으며 깨어보니 아침이었습니다. 평소보다 한참 늦은 기상이었기에 서두름을 가장하기는 좋았습니다. 낯선 이, 어쩌면 그때는 또다시 아내처럼 보이는 그 무언가의 변명과 위로를 건성으로 들으며 나는 대문을 나섰습니다. 그제야 아들에 대한 걱정이 들었지만, 아들은 언제나처럼 새벽같이 집을 나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자그마한 안도감을 가지고 대문을 나서는 내 뒤로 아내와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진아, 아빠 출근하시는데 인사해야지?”

7

대문을 닫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매 순간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두꺼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비정상적인 중력의 흐름이 날 땅으로 잡아끄는 게 느껴지자 깊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흉물스럽다고 애써 시선을 피하던 신축 아파트 특유의 명함으로 도배된 엘리베이터 벽이 든든한 방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인테리어 시공업체와 배달음식점의 명함 뭉치들 속에서 내 눈길을 끈 건 하얀색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쓰인 전단지였습니다.

[이 문구를 보고 있으면 도움이 필요한 분입니다. 연락주세요.]

전단지 아래에 10개로 나누어진 전화번호표는 아무도 떼어가지 않은 채 그대로였습니다. 아마 평소였다면 관심도 주지 않을 찌라시였지만 전단지에 쓰인 내용이 저를 강렬하게 유혹했습니다. 세상에 그때의 저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또 누가 있었을까요?

지하 주차장 한쪽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타 문을 닫고 나니 한결 더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을 한 낯선 이들에게서 멀어질수록 날뛰던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었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내와 딸아이의 행동이 기괴하고 이상해 보이는 것도 내 착각이 아닐까? 자동차의 유리창을 뚫고 내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맞고 있으니 며칠간의 일들이 모두 어처구니없는 꿈처럼만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전화 한 통 해본다고 손해 볼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일 터지고 며칠이나 지나서 연락한 거예요?”

몇 번이고 이미 들어보았던 거 같은 기본 통화 연결음이 몇 초나 재생되고 나서 들려온 목소리가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더군요. 차가운 아침 공기를 데우기 위해 히터를 틀어놓았음에도 온몸에 냉기가 흐르는걸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내가….”

“아니. 고객님 그거 전단지 보시고 먼저 연락해주신 거잖아요? 그럼 상황 어떻게 돌아가는지 뻔하고, 얼마나 심각한지도 뻔한 건데 왜 쓸데없이 간을 보고 그러세요. 그냥 전화 끊을까요?”

무언가 변명을 하거나 받아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느물거리는 목소리와 말투는 제게 기묘한 안도감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틀 전이었어요. 이틀 전 날밤.”

“직접 접촉하신 거예요? 아니면 멀리서 보기만?”

무엇을? 이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딸 아이의 모습을 한 낯선 이들을 말하는 걸까요? 결국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답을 골랐습니다.

“창밖에서… 창밖으로 보았습니다.”

“계좌 번호 불러 드릴 테니깐 일단 계약금 입금해 주시고요. 일 진행하려면 일단 길일부터 골라야 하니 고객님 신상정보 이 전화번호로 보내시고요.”

“아니! 아니, 잠깐만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설명도 안 듣고… 다짜고짜….”

“못 미더우시면 그냥 전화 끊으시면 되고요. 대신 다음번에 고객님 전화는 안 받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참 쓸데없는 고집 부리시네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나는 계약금을 입금하였습니다. 대신 당장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고 싶다고 우겼고 허락을 받아내었지요. 회사에는 딸 아이와 아내가 몸이 아파서 연차를 써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지요.

전화기의 목소리가 지정해준 장소는 집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 1층의 커피숍이었습니다.

약속 시각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었으나 딱히 갈 곳도 없었기에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그 안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했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집 안에 있고 아내와 딸이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만 떠오르는군요. 집 밖 어딘가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들이 나를 찾아 배회하고 있다는 것도요.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르는 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고 보니 약속 시각이 이미 10분도 넘게 지나 있었습니다. 다급하게 곧 가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에스컬레이터를 뛰듯이 올라갔습니다. 몇 개나 되는 테이블들이 있는 커다란 커피숍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덕분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금방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요란한 옷과 장신구를 찬 다부진 체형의 남자와 나른하게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는 평범한 인상의 30대 여자였습니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망감이 드는걸 억누를 수가 없더군요.

저를 먼저 발견한 건 남자 쪽이었습니다. 마치 반가운 지인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를 향해 몇 걸음을 옮겨 놓더군요.

“저리 가!! 저리 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여자가 나를 보며 내지른 외마디 비명소리가 남자의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습니다. 텅 비어있던 커피숍에서 계산대를 지키던 직원 몇 명이 웅성거리며 우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걸음을 멈추어선 남자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졌더군요. 두려운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고개를 떨구고 땅만 바라보는 남자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그냥 가주세요… 저희는… 못 합니다.. 제발… 가주세요….”

비명을 내질렀던 여자는 어느새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남자 역시 곧 울음을 터트릴듯한 목소리였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계약금까지 드렸잖아요? 나 도와줄 수 있다면서요?”

“계약금 당장 돌려드릴게요. 제발 가주세요. 저희가 감당할 일이 아니네요…. 죄송합니다… 제발 그냥 가주세요….”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은행 앱을 구동시켰습니다. 차마 내 쪽을 보기가 두렵다는 듯 핸드폰 화면만을 들여다보고 있더군요. 웅성거리던 직원들 몇 명이 계산대에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아니…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라도 해줘요! 네?”

“다 아시잖아요… 이미 보셨잖아요….”

“뭘요? 내가 뭘… 아니, 그럼 그것들!! 넘어 오는 거 막는 법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네?”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문자 수신을 알리는 진동이 울리더군요. 아마 계좌이체 안내 문자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커피숍 직원들이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네어 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손을 잡아챈 남자가 끝까지 내 시선을 외면한 채로 몸을 돌려 커피숍을 떠나며 말한 내용만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이미 왔어요…. 늦었어요…. 뭘 해야 하는지 아시잖아요….”

8

커피숍을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가는 길이 꼭 남의 몸을 빌려 억지로 걸어가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붕 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차 안에 들어가 운전석에 지친 몸을 주저앉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막연함이 밀려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회사를 가는 것도, 그렇다고 더 집처럼 여겨지지 않는 집으로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돌아가야 할 곳은 집뿐이지 않습니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간신히 움직여 명함으로 뒤덮인 엘리베이터에 또다시 몸을 실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아침에 보았던 전단지가 보이지 않더군요. 이 모든 게 지독한 악몽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어제와는 달리 현관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습니다. 한 켤레의 신발도 보이지 않는 현관이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지더군요.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는데도 집안은 어두웠습니다. 마치 집 전체가 해 질 녘의 그림자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빠 왔나 봐?”

딸아이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아저씨랑 같이 왔을 거야. 아빠 뒤에 따라 왔을 거야.”

애써 딸아이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아들의 방으로 향했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아들의 방에선 단조로운 기계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아들은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나는 무언가 말을 건네려다 입을 굳게 닫고 뒷걸음질로 아들의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언제라도 바로 아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말을 건넬 거 같아 두려웠습니다.

딸아이의 방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빠’… ‘아저씨’… ‘저쪽’….

집안에서 유일하게 내게 남은 장소인 거실의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습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문자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예상했던 입금문자가 아니라 아들에게서 온 문자였습니다.

[아빠. 그게 나 봤어. 점심에 불안해서 집에 잠깐 들르러 갔는데 우리 동 엘리베이터 타고 먼저 올라가고 있었어. 나 이제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아빠도 집에 가지만. 문자 보면 나한테 연락해줘.]

미안함인지 무엇인지 모를 이유 때문에 눈물이 터져 나올 거 같아 억지로 이를 꽉 깨물었지만, 어깨가 떨려오는걸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작게 삐걱거리는 소파의 소리에 화답하듯 안방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창 넘어 떨어지는 해가 안방 안에 있는 것의 그림자를 거실 너머로 기괴하게 길게 늘어트려 놓았습니다.

아내의 형상을 한 그림자는 그 존재감만을 과시하듯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머리카락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바람에 날리듯 끊임없이 넘실거렸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무얼 할 수 있었을까요? 무얼 하지 말았어야 할까요? 그때도 몰랐었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이 집의 정당한 주인으로서, 빼앗긴 가족들을 되찾아야만 하는 가장으로서 무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란다 창 너머로 노을이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거실 창 너머 맞은편 아파트에서 이른 퇴근을 하고 집에 막 들어선 가장을 반기는 가족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남편의 이른 귀가에 조금은 당황한 듯, 조금은 짜증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맞은편 아파트의 부부 사이에 서 있는 조그마한 아이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전하고 뒤틀리지 않고 빼앗기지 않은 온전한 집 안에 있는 작은 아이와 시선이 교차하는 그 짧은 순간에 제 결의는 굳어졌습니다.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짧은 묵례를 보내고 나는 발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곧 맞닥뜨릴 내 운명을 비웃는듯하기도 하고 조롱하는 듯하기도 한 웃음소리가 딸아이의 방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거실 바닥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단조로운 기계음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모든 걸 애써 외면하며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부엌으로 걸어갔습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건들이 위치가 모두 뒤죽박죽이었지만 내가 찾던 것은 금방 눈에 띄었습니다.

거실에 드리워진 아내의 모습을 한 그림자는 이제 온 집을 뒤덮을 듯 커져 있었습니다.

딸아이의 목소리는 쉴 새 없이 불경하고, 외설스럽고, 기이한 말들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아빠.”

물기 가득한 아들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나는 속지 않았습니다. 방금 찾아낸 부엌칼을 힘주어 쥐며 몇 번이고 짧은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왜 아까 나한테 연락 안 했어? 왜 나한테 그거 보게 했어?”

아들의 목소리에 가득한 원망의 기운이 나를 무너트렸습니다. 손에 힘이 풀려 더는 부엌칼을 쥐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미안해… 내가….”

억지로 울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않고 변명의 말을 늘어놓으며 뒤돌아보았지만, 집안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퉁명스러운 아들의 모습도, 해피를 괴롭히는 딸아이의 모습도, 이사 온 뒤로 언제나 예민해 보였던 아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부터 경찰이 날 발견하기까지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떠오르는 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뇌던 하나의 문장뿐입니다.

‘넷이었는데 하나만 남았다.’

9

가끔 좁은 창 너머로 온전한 가족들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후회가 밀려오곤 합니다. 내 시선이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행동들에서 지난날의 저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따위는 없었다고들 합니다. 내가 전화를 걸었던 전단지의 전화번호는 존재하지도 않는 번호라고도 했습니다.

그 말들이 절 혼란스럽게 하거나 화가 나게 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한 부당한 오명을 벗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일 것입니다. 단지 끔찍한 짓을 저질러서, 나쁜 짓을 저질러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해야만 했던 일을 하지 못해서, 일어날 비극을 막지 못해서 비난받아야 마땅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글이 우스꽝스러운 광인의 자기변명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제 정신상태를 고려해 보자면 이해 못 할 헛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우리 가족은 넷이었지만 저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창문 너머에서 저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검은 옷 남자의 뚜렷한 존재감만이 제게 남은 유일한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가정에는 평온과 안녕만이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너머에서 호시탐탐 엿보고 건너오려 애쓰는 모든 것들로부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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