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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청포로62길 89 by 아이

2019.10.15 00:0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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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괴이한 거울

<수살우체국> 시리즈 - ⑤

청포로62길 89

아이

집배원은 정해진 시간 안에 담당 구역에 있는 우체통을 열어서, 반드시 그 안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우체통 안에 우편물이 들어 있으면, 반드시 수거해 와야 한다. 그 작업을 우체통 수집편찰이라고 한다. 만일 집배원이 정해진 시간 안에 수집편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중징계다.

주부길이 담당하는 시외7구에는 우체통이 하나 있다. 인간리 마을회관 옆에 있는 우체통. 이 우체통 일련번호는 11번이다.

11번 우체통 확인 시간은 오전 열시에서 열두시 사이다. 물론 우체통마다 확인 시간이 다 다르다. 담당 집배원 배달 경로에 맞춰서 시간을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11번 우체통 확인 시간은 오전 열시에서 열두시 사이. 그 시간 안에 우체통을 확인해야 한다. 열시 전에 확인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열두시 넘어서 확인해도 안 된다. 반드시 오전 열시에서 열두시 사이에 확인해야 한다.

11번 우체통에 보면 그렇게 안내문도 붙어 있다.

‘평일 오전 열시에서 열두시 사이에 한 번 수거함.’

그러니 우편물을 우체통에 넣는 사람도 참고하라는 뜻이다. 하루라도 빨리 우편물을 보내고 싶은 사람은 집배원이 우체통을 수거하기 전에, 그러니까 오전 열시 전에 넣으면 된다.

주부길은 오곡리까지 배달을 마치고 나서 오곡주유소에 들러 오토바이에 기름을 넣었다. 사장 엄범대는 기름 배달을 나가고 없었다. 그래서 아내 허지영이 대신 기름을 넣어주었다.

“혹시 우편물 보낼 거 없으세요?”

주부길이 허지영에게 우체국 법인카드를 건네면서 물었다.

“어머 참, 등기 하나 보낼 거 있어요. 잠깐만요, 얼른 갖다드릴게요.”

오곡주유소는 항상 일주일에 한두 번 우편물을 보낸다. 일반우편물을 보낼 때도 있고 등기우편물을 보낼 때도 있다. 간혹 소포를 보낼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오곡주유소 사장 엄범대가 기름 배달 나가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접수를 하고는 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안 주부길이 엄범대더러 직접 우체국까지 가지 말고 자기한테 주면 대신 접수해 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오곡주유소에 매일 들러 오토바이에 기름을 넣어야 하는 주부길로서는 주민과 친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친분을 쌓아놓으면 명절 전에 우체국으로부터 판매 할당을 받은 김을 몇 개라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주부길은 늘 오곡주유소에 들러 우편물을 받아갔다.

허지영이 카드단말기로 결재 작업을 마치고 나서 카드를 주부길한테 건넨 뒤 얼른 주유소 사무실로 달려갔다.

“이거 등기 한 통만 부탁드릴게요. 삼천 원 같이 드리면 되죠?”

“네, 삼천 원 좀 안 될 거예요. 거스름돈은 내일 갖다드릴게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주부길은 등기우편물을 받아서 오토바이 적재함에 집어넣은 뒤 헬멧을 고쳐썼다.

시간은 오전 열시 삼십분.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오곡주유소를 나와 주부길이 다음에 갈 마을은 인간리였다. 11번 우체통 수집편찰을 하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주부길은 곧장 오토바이에 올라타 스로틀을 감았다.

인간리 가는 길에 도로 오른쪽으로 다인모텔이 있던 자리가 보였다. 이미 모텔 철거 작업은 다 끝났지만, 아직 새로운 건물은 짓고 있지 않았다.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우체국 본부 지원13팀 허지원 팀장도 다인모텔이 있던 자리에 뭐가 생길지 모른다고 하니, 주부길로서도 궁금하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주부길은 다인모텔이 있던 곳을 지나자마자 더 힘 있게 오토바이 스로틀을 감았다.

오토바이가 마치 뱀처럼 꼬불꼬불한 청포로 길을 시속 70키로로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리고 잠시 뒤 청포로 2920 지점에서 왼쪽 청포로62길로 진입했다.

청포로62길로 진입하면서 주부길은 다음 우편물 배달 순서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떠올려 보았다.

마을회관까지는 중간에 배달할 우편물이 없다. 그러니 팔백 미터 가량은 신나게 질주해도 된다. 그리고 마을회관에서 우체통 수집편찰, 89호에 들러 우편물 전달, 인간교회에 들러 신문 배달, 90-39호에 들러 우편물 배달, 다시 돌아나와서 104-8호와 104-10호에 신문 배달, 길 따라 쭉 올라가서 135-5호에 우편물 배달. 그럼 청포로62길 배달은 끝이다. 다시 마을회관까지 돌아나와서, 왔던 길인 오른쪽 청포로62길로 조금 가다가 왼쪽 청포로62안길로 진입하면 된다. 청포로62안길 진입해서 21호와 23호에 각각 우편물 배달, 이때 23호에 사는 최상돈씨와 가급적 마주치지 않도록 하자.

참고로 최상돈은 나이는 60대인데 목소리는 지나치게 하이톤이다.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활기찬 30대 청년 같다. 우편물 온 게 있어서 집배원이 청포로62안길 23호에 들르면, 혼자 사는 최상돈이 신발도 안 신고 마당으로 나와서 우편물을 받는다.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꼭 집배원을 발견하면 신발도 안 신고 뛰어나온다.

60대라는 나이 때문에 맨발로 뛰는 모습이 조금은 위험해 보일 때도 있다. 게다가 집배원을 향해 “수고하십니다!” 하고 말할 때는 기분까지 으스스해진다. 목소리가 나이답지 않은 하이톤, 그것도 지나치게 하이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부길은 최상돈이 “수고하십니다!” 하고 말할 때마다 어딘가 부조화스러움을 느낀다.

23호까지 우편물 배달을 마치고 길 따라 계속 언덕을 올라가서 수살기도원에 들러 우편물 배달, 이번에는 왔던 길 반대 방향인 기도원 정문 쪽으로 내려가서 매실 마을로 넘어가면 된다.

주부길은 머릿속으로 인간리 배달 순서를 빠르게 떠올려본 뒤 스로틀을 힘차게 감았다.

팔백 미터 가량을 달리는 동안 주부길은 평소와 달리 오늘 따라 마을이 조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을길이나 오른쪽 논밭으로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였다. 심지어 마당에 묶여 있는 개들도 집안에 몸을 숨겼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평소라면 청포로62길 21호에 사는 50대 후반 이명진이 집 옆에 있는 작은 과수원에서 작업하다 주부길에게 아는 체를 했을 것이다.

서울에 살다가 올해 자광시 수살면으로 이사 온 이명진은 한창 농사에 열중이었다. 집앞 텃밭에는 토마토,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 등을 심었고, 집 옆 과수원에는 복숭아나무도 심었다. 요즘은 복숭아 따는 데 열중이라 하루 종일 과수원에서 일을 한다. 그래서 주부길이 지나가면 일하다 말고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외치는데, 오늘은 그런 이명진도 과수원에 없었다.

주부길은 21호를 지나면서 과수원을 한번 흘끗 쳐다본 뒤 곧이어 우측으로 휘어지는 길을 굳이 시티 100 시리즈인 배기량 110cc짜리 집배원용 오토바이를 탄 채 상체까지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이며 통과했다. 굴곡 코스를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마치 직선 코스 통과하듯 스무스하게 지나난 것이었다.

굴곡 코스를 통과한 뒤 주부길은 달리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루가 다르게 오토바이 실력이 늘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그래서 이 여세를 몰아 인간리 마을회관까지 오륙백 미터를 두 손 놓고 달릴까 하다가 말았다.

주부길은 마을회관에 있는 우체통 앞에서 오토바이를 멈췄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열시 사십분이 조금 넘었다.

인간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우체통의 수집편찰 시간은 오전 열시에서 열두시 사이. 그러니 지금 우체통을 확인해도 상관없었다.

간혹 인간리 마을회관까지 왔는데 시간이 오전 아홉시 사십분이나 오십분일 때가 있다. 그러면 아직 열시 전이라 우체통 수집편찰은 뒤로 미루고, 인간리 마을에 우편물 배달을 먼저 하기도 한다. 그런 뒤 배달을 마치고 마을회관 쪽으로 다시 나오면서 수집편찰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주부길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그리고 바지주머니를 뒤져 우체통 열쇠를 꺼냈다.

마을회관 안에서는 줄곧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 사이로 사람들 말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아주 형편없는 실력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같았다.

마을회관에서 오늘 잔치라도 하나 보네.

주부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체통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우편물은 한 통도 없었다.

자광시에도 사람이 많이 사는 시내가 아니면 수살면처럼 시골은 마을에 있는 우체통에 편지 넣는 사람이 거의 없다. 주부길도 일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11번 우체통을 수집편찰하는 동안 편지를 딱 한 통 발견했다. 그래서 우체국 내부에서는 전국에 설치한 우체통들 중 수살면 인간리처럼 주민들 이용이 거의 전무한 우체통들을 철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보편적 서비스를 추구하는 우체국이기에 철거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다. 그래서 쉽게 철거를 못 하고 있다.

주부길은 다시 한번 우체통 안에 우편물이 한 통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업무용 PDA를 이용해 우체통 안쪽에 있는 바코드를 읽었다.

11번 우체통의 고유 바코드로, 집배원은 반드시 지정된 시간에 업무용 PDA로 이 바코드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 담당 집배원이 11번 우체통을 수집편찰한 걸로 처리가 된다.

주부길은 업무용 PDA의 바뀐 화면에서 ‘0’을 입력해 우체통에 우편물이 한 통도 없음을 표시한 뒤, 다시 우체통을 닫았다.

인간리 마을회관 주소는 청포로62길 86. 청포로62길 시작 지점에서 86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짝수니까 길 오른쪽에 있다는 거고.

주부길은 수집편찰을 마치고 나서 곧장 청포로62길을 따라 올라갔다.

첫 번째로 들러야 할 집은 청포로62길 89호였다. 이 집엔 올해 85세인 장미옥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우편물이 한 통 온다. 보내는 곳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그곳에서 보내는 소식지다. 그리고 역시 장미옥 앞으로 오는 각종 공과금 고지서. 다른 우편물은 거의 안 온다.

주부길은 오토바이 운전대 앞에 매단 바구니에서 눈으로 소식지를 확인한 뒤 곧장 89호 마당으로 진입했다.

오늘도 현관문 옆에 있는 평상에 유기명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이제 갓 스물두세 살 된 앳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늘 낡은 군복 차림이라서 청년이라기보다는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은 이미지였다.

유기명은 늘 평상에 걸터앉아서 어깨도 축 늘어뜨린 채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가끔 주부길이 우편물 온 게 있어서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항상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물론 처음 주부길을 봤을 때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주부길이 먼저 아는 체를 했고, 그 뒤로는 항상 유기명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유기명은 오늘도 주부길이 오토바이에서 내리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 오늘 소식지 배달해주시는 날이네요.”

그리 활기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깨 축 늘어뜨린 채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기만 하는 자가 내기에 아주 적당한 목소리였다. 유기명의 목소리는 그렇게 늘 힘이 없었다.

“네.”

목소리에 활기가 없기는 주부길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오곡주유소에서 허지영과 대화를 나눌 때의 활기참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힘없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다른 말도 덧붙이지 않고 짧게 대답만 했다. 주부길답지 않았다. 원래 주부길이라면 ‘오늘 마을회관에서 무슨 잔치라도 하나 봐요?’ 하고 물어야 했다. 인사 겸 안부 겸, 마을에 무슨 일이 있나 관심도 보일 겸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을 건네야 했다. 하지만 주부길은 대답만 하고 말았다. 더 이상 유기명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유기명과 상대할 때 주부길은 늘 이런 식이었다. 유기명이 아는 체를 해오면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네’ 하고 짧게 대답만 하고 만다. 그러고는 우편물을 우체통에 넣은 뒤 마당을 빠져나간다. 물론 나갈 때도 주부길은 고개만 살짝 숙이고 만다. 불필요한 행동이나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주민들에게 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유기명도 그런 주부길의 행동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기분 나쁘다고 얼굴을 찡그리거나 하지 않는다. 다시 지평선 어딘가로 시선을 돌릴 뿐이다.

주부길은 소식지를 우체통에 넣은 뒤 평상에 걸터앉아 있는 유기명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다음 집으로 향했다.

다음 집은 인간교회였다. 주소는 90-7호. 90 지점에 있는 샛길로 진입해 약 70미터 가면 왼쪽에 있었다.

주부길이 담당하는 시외7구에는 교회가 두 개 있다. 이곳 인간리에 있는 인간교회, 그리고 또 하나는 상황리에 있는 상황교회. 두 군데 다 기독교 계열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일간지를 보기 때문에 매일 방문하고 있다.

인간교회에 일간지와 일반우편물을 놔둔 뒤 주부길은 바구니에서 다음에 갈 집 우편물을 눈으로 얼른 훑어보았다. 90-39호. 인간리 마을이장인 유병섭한테 온 우편물이었다.

확인이 끝난 주부길이 지체 없이 오토바이 스로틀을 감았다. 그리고 샛길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 90-27을 지난 뒤 90-31도 지나고 마침내 90-39호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90-39호 앞에 흰색 1톤 트럭이 길을 막고 세워져 있었다. 주부길이야 어차피 90-39호에 우편물을 배달한 뒤 다시 오토바이를 돌려 인간교회 쪽으로 나가야 해서 트럭이 길을 막고 있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길 한복판에 세워진 트럭이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은 주부길은 이미 89호에 우편물을 배달하고 나서 인간교회로 가기 위해 샛길로 들어설 때부터 겁에 질린 동물의 소변 냄새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90-27, 90-31 지점에서는 신경 쓰이는 걸 뛰어넘어 호흡이 불편할 정도로 냄새가 주부길을 괴롭혔다.

자광시가 아무리 형편없는 주차 매너로 주민들 민원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차량 통행을 아예 못 하게 길 한복판에 차를 세워두지는 않는다. 아무리 촌동네 수살면이라도 사람들이 그만큼 몰상식하지는 않다. 그러니 이런 경우 마을에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길을 막고서라도 차를 세워두었다는 뜻이다.

주부길은 우선 오토바이에서 내려 90-39호로 온 우편물을 우체통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트럭 짐칸 쪽으로 갔다. 별 다른 뜻이 있어서 간 건 아니었다. 그저 짐칸에 뭐가 있나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트럭 짐칸에는 주부길의 예상대로 몸집 큰 돼지 한 마리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보기에도 백 키로는 훌쩍 넘어보였다.

돼지는 주부길이 오기 전까지 겁에 질려 계속 울어댔으리라. 소변 지리면서 계속 울다가 지쳐서 쓰러졌으리라.

어쩌면 주부길이 아까 우체통 수집편찰을 할 때 회관 안에서 들렸던 아주 형편없는 노랫소리는 돼지 울음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주부길은 가만히 돼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다.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돼지는 온몸이 하얬다. 하얀색 돼지였다. 마치 평생을 햇빛 한 번 쬐지 못 하고 사육장 안에서 사육당한 탓에 하얀 건가 싶을 만큼 온몸이 하얬다.

하얀색 돼지는 옆으로 쓰러진 채 아무 소리도 내고 있지 않았다. 주부길이 앞에 서 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몸을 꿈틀거리지도 않았고, 소리 내 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주부길은 좀처럼 돼지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돼지는 소리 내 울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울고 있었다. 흰색 거품처럼 보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옆으로 쓰러져 트럭 짐칸 바닥에 시선을 떨군 채 울고 있었다. 주부길이 앞에 서 있는데도 살려달라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완전히 체념한 듯 흰색 거품처럼 보이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주부길은 계속 돼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품 섞인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돼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돼지는 운명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주부길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이제 곧 마을잔치의 하이라이트로 자신의 몸이 토막 난 채 뜨거운 물에 삶겨지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거품처럼 하얀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큰 몸집에 비해 돼지의 가느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돼지 다리가 원래 저렇게 가늘었나!

제대로 걷기도 힘들 것 같은 돼지의 가느다란 다리가 주부길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걸을 필요 없이 먹기만 하면 되는 돼지의 삶이 결국 저렇게 다리를 가늘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인간 때문에 저렇게 다리가 가늘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꾸에엑!”

돼지가 벌떡 일어나 마치 비명을 지르듯 울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돌연변이 죽이는 킬러인 주부길조차 놀라서 두세 걸음이나 뒤로 주춤할 정도였다. 그리고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품속에 있는 단도를 꺼내 돼지의 몸통에 날릴 뻔했다. 그것도 가슴에 두른 열두 자루 명품 수제 단도 중에서 무려 두 자루나 꺼내 돼지에게 날릴 뻔했다.

그럼 돼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겠지. 어쩌면 뜨거운 물에 삶겨지는 것보다 나을지 모른다.

몸집 크고 다리는 가늘어 전혀 위협적이지 못한 하얀색 돼지를 향해 단도를 날릴 뻔하다니, 그것도 하마터면 두 자루나 꺼내서 날릴 뻔하다니, 주부길은 생각만 해도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돼지는 그렇게 “꾸에엑!” 하고 단 한 번 울더니 다시 옆으로 쓰러졌다.

거품 섞인 눈물을 흘리다가 불현듯 자신에게 닥칠 죽음이 떠올라서 발악이라도 한 것일까.

주부길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옆으로 누운 채 배설물을 쏟아내는 돼지를 보면서,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돼지가 느끼는 공포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저 상태로 단 몇 분만 지나면 돼지는 쇼크사할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꾸에엑!” 하고 비명이라도 지르면, 그와 동시에 심장이 멎을 수도 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줄까!

주부길은 돼지의 눈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마치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주부길의 실력으로 지금 트럭 짐칸에 쓰러져 있는 돼지의 숨통을 끊는 건 말 그대로 숨 쉬는 것보다 쉽다. 고민할 건 오로지 시간을 얼마나 단축시킬 수 있느냐 하는 거다. 1초는 터무니없이 길고, 평소보다 더 집중하면 단도로 돼지의 숨통을 끊는 데 0.2초면 충분하겠지.

주부길은 돼지 죽이는 게 너무 간단한 일이라서 오히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그러면 정말로 품에서 단도를 꺼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체국 본부 지원과장 강학기가 한 말이 있다.

‘마을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마십시오.’

주부길이 집배원에 합격하자마자 우체국 본부 지원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지원과장 강학기라고 소개한 남자는 주부길한테 집배원이 된 걸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다른 말도 덧붙였다.

“마을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마십시오. 어떤 식으로든 주민들한테 주목을 받으면 곤란합니다.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주부길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강학기는 아마 지금 같은 상황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으리라. 우편물 배달 때문에 마을을 돌아다니다 혹시 돌연변이 능력을 이용해 무언가 돕고 싶다면, 그로 인해 주민들한테 주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애초에 돕지 말라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주부길은 이미 얼마 전에 강학기의 말을 어긴 적이 있다. 수확로29길 519-38에 사는 이보득이라는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다. 부모가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ASGO에서 온 우편물을 이보득의 어머니 조해정한테 건네며, 돌연변이 특유의 초월적인 감각을 이용해서 함께 살고 있는 아들 이보득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사람들 모르게 지하실에 가둔 아들에 대해 물었다.

그 일로 인해 이보득의 부모 이형대와 조해정은 주부길도 돌연변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결국 강학기의 우려대로 주부길은 주민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주부길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는 이상 본부의 명령을 계속 어길 수는 없었다.

주부길은 세차게 고개를 젓고 나서 서둘러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인간교회를 지나 청포로62길 90 지점까지 왔다. 그곳에서 주부길은 오토바이를 오른쪽 길로 몰았다.

104-8호와 104-10호는 두 집 다 농민신문을 본다. 얼마 전까지는 104-14호도 봤는데, 세대주 유창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지금은 농민신문을 안 보고 있다.

주부길은 농민신문 두 개를 꺼내 우체통에 하나씩 넣은 다음 길 따라 쭉 올라가서 135-5호에 우편물을 배달했다.

청포로62길 배달은 135-5호가 마지막이었다. 길 위쪽으로 집이 몇 채 더 있었지만, 오늘은 그중에 우편물 온 집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더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주부길은 다음 배달할 집이 있는 청포로62안길로 가기 위해 다시 마을회관 쪽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주부길이 막 마을회관을 지나치려는데, 마침 회관에서 나온 김장태가 주부길을 불러세웠다.

“우체부 아저씨, 잠깐만 기다려요!”

김장태는 방금 마지막으로 배달하고 온 청포로62길 135-5호에 산다. 세대주 이름은 김기병. 김장태는 김기병의 배우자다.

참고로 김기병과 김장태는 둘 다 사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매우 닮았다.

김장태가 손을 흔들면서 주부길한테 다가왔다.

“아이구,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

김장태는 혹시나 주부길이 오토바이를 몰고 휙 사라질까 봐 일부러 손도 흔들고 말까지 붙여가면서 다가왔다. 덕분에 주부길은 김장태가 다가올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아이구, 아까 마을 올라갈 때도 제가 우체부 아저씨 기척을 느끼기는 했는데, 원채 빨리 지나가시니까 나와 보지도 못했어요.”

김장태는 걸어오면서 바지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우편물이었다.

우편물 보낼 거라도 있나!

주부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토바이에서 내려 김장태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부길의 인사를 받으면서 김장태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요, 이거 드리려고요. 이건 우리집 게 아닌데 우체통에 있더라고요. 며칠 전에 넣고 가신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김장태가 주부길한테 우편물을 한 통 건넸다.

주부길이 받아서 주소를 확인해 보니 청포로62길 135-60이었다. 김장태가 사는 집 135-5에서 길을 따라 오륙백 미터 가면 오른쪽에 있는 집이었다.

봉투에 적힌 주소까지 다 확인해 놓고는 135-5호에 들러 배달을 한 모양이었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다. 우편물이 거의 오지 않는 집에 어쩌다 우편물이 오면, 배달하러 가다가도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엉뚱한 집에다 우편물을 배달하는 경우가 있다.

135-60 역시 우편물이 거의 안 오는 집이다. 그래서 아마 그 집까지 올라가는 게 습관이 안 돼서 도중에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 그만 자주 들르는 135-5호에다 배달을 했을 수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걸 왜 김장태님 집에다 갖다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주부길이 우편물을 확인하고 나서 김장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주부길의 행동에 김장태가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구, 아니에요. 죄송하긴 뭘, 우체부 아저씨가 이런 실수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 이 주소가 우리 윗집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잘못 온 우편물 있으면 그 집 갈 일 있을 때 몇 번 올라가서 대신 전해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 며칠 통 올라갈 일이 없어서요. 그래서 오늘은 회관에 온 김에 혹시나 우체부 아저씨 만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갖고 와 봤지요.”

본래 자기 집 우체통에 다른 집 우편물이 들어가 있으면, 대부분은 가져가지 않고 방치하거나 아니면 우체통 위에 올려놓는다. 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반송함에 넣어놓기도 하고. 그럼 담당 집배원이 우편물을 확인해 보고 수거해 간다. 하지만 수살면 같은 시골에서는 종종 이웃집 우편물이 잘못 왔으면 김장태처럼 본인이 직접 갔다주기도 한다.

“네, 거기 윗집은 통 우편물이 안 와서 그런가 번번이 실수를 하네요. 죄송해요. 이건 제가 가져가서 내일 배달할게요. 오늘은 저 위까지 벌써 갔다와서요. 다음부터는 좀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래야 김장태님이 저 때문에 고생을 안 하시죠.”

“아이구, 고생은 무슨, 괜찮아요.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갔다 오는 거죠. 그나저나 우체부 아저씨, 아직 점심 안 드셨을 것 같은데 회관 들어가서 식사 하고 가세요. 오늘 마을 잔치 있거든요. 좀 있으면 돼지도 잡을 건데요, 그럼 시간 늦어져서 안 될 것 같으니까, 지금 그냥 얼른 밥하고 반찬하고 해서 한술 뜨고 가세요.”

김장태가 주부길의 옷을 잡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시골에서는 마을 잔치 때 주민들이 회관에 모여서 함께 밥을 먹는다. 그리고 마을 대청소를 할 때나 한겨울 눈 내리고 그럴 때도 종종 회관에 모여서 밥을 먹는다. 한겨울에는 혹시나 노인만 있는 집에서 추위 때문에 끼니를 거르지나 않을까 싶어서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회관에 모여 음식을 해놓는다. 그럼 시간에 맞춰 아무나 와서 먹으면 된다.

인간리 역시 주민들이 자주 회관에 모여 밥을 해먹는다. 그리고 식사 시간에 우연히 집배원이 회관을 지나가면 꼭 밥 한술 뜨고 가라며 붙잡는다. 특히 김장태는 오토바이 소리만 들려도 회관에서 나와 집배원을 부른다. 하지만 웬만큼 넉살이 좋은 사람 아니라면 평생을 농사만 짓느라 투박한 손으로 말없이 밥을 먹는 노인들 틈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게 쉽지가 않다. 농담을 해도 웃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자니 숨이 막히고. 멋모르고 한두 번 회관에서 밥을 먹은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주민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시골사람들은 밥 먹고 가라는 게 그냥 인사치레일 때가 많아서, 진짜 먹고 가라는 건지 아니면 그냥 고생이 많다는 뜻인지 감을 못 잡을 때가 많다. 그래서 이제는 주부길도 주민이 밥 먹고 가라고 하면 무조건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다.

주부길은 이번에도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게다가 조금 전에 90-39 앞에서 트럭 짐칸에 쓰러져 있던 몸집 큰 흰색 돼지까지 봤던 터라 더 더욱 식욕이 당기지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좀 서둘러야 해서요, 다음에 기회 되면 먹을게요.”

그런 주부길의 말에 김장태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참 진짜, 우체부 아저씨 이상하시네요. 왜 매번 그렇게 밥 먹으라고 하면 싫다고 하세요? 거절도 한두 번 하고 말아야지 참. 우리가 뭐 못 먹을 거라도 줄까 봐서 그래요?”

김장태의 반응에 주부길이 당황해서 오토바이에 타려다 말고 얼른 헬멧부터 벗었다. 그러고는 세차게 손을 흔들면서 김장태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정말 서둘러야 해서 그래요. 오늘이 화요일이라 일주일 중에 우편물이 가장 많거든요. 택배도 많고요. 특히 저기 상황리 쪽으로 택배 온 게 많아서요, 그거 다 배달하자면 정말로 서둘러야 해요. 이따 오후 늦게 또 비 소식도 있잖아요. 비 오기 전에 배달 끝마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더 서두르는 중이에요.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 드린 거 아니에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주부길의 말에 김장태가 눈을 두세 번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주부길한테 준 우편물을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바쁘면 그럼 그 우편물은 내가 이따 집에 올라가는 길에 갖다줄 테니까 이리 주세요. 아니다, 또 싫다고 하겠지 뭐.”

그러면서 김장태가 주부길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우편물을 달라는 뜻이었다.

주부길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잠깐 고민했다. 우편물 배달은 어떤 상황에서든 집배원이 직접 하는 게 원칙이다. 그래야 만에 하나라도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부길이 싫다고 했다가는 이미 감정이 많이 상해 있는 김장태한테서 어떤 소리를 들을지 알 수가 없었다.

주부길은 하는 수 없이 우편물을 김장태에게 건넸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 그럼 오늘만 부탁을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네, 제가 이따 올라가는 길에 갖다줄게요. 그럼 바쁘시다니 얼른 가보세요.”

김장태는 우편물을 받아들고는 곧장 회관으로 향했다. 아직 화가 덜 풀린 듯했다.

어떡하지. 다음에는 점심을 먹어야 하나. 아, 큰일이네. 시골 어르신들하고 같이 밥 먹는 거 진짜 불편한데.

주부길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화요일이 일주일 중에 가장 바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밥도 못 먹고 배달해야 할 정도로 수살우체국이 물량이 많은 건 아니다. 택배도 대도시나 자광시 시내와 비교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적고. 게다가 주부길도 이제는 시외7구 배달에 제법 익숙해져서, 아무리 화요일이라고 해도 마음 조급하게 뛰어다니지는 않는다. ‘다 못 하면 내일 하면 되지 뭐!’ 그런 심정으로 일에 임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상황리 쪽으로 온 택배도 평소와 비슷했고.

주부길은 오토바이를 몰면서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어쩜 그렇게 거짓말이 술술 잘 나올까 싶어서 신기하기까지 했다.

주부길은 청포로62안길로 진입해서 21호와 23호에 각각 우편물을 배달했다. 다행히 오늘은 23호에 들러서 우편물을 배달할 때 최상돈과 마주치지 않았다.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수살우체국이 대도시나 자광시 시내에 비해서 물량이 많지 않다고는 하지만, 화요일은 화요일이다. 평소보다는 확실히 배달해야 할 우편물이 많았다. 그래서 주부길은 지체없이 청포로62안길을 달렸다.

청포로62안길 27-4에서 언덕 쪽으로 이어진 샛길을 달리면 청포로 2824 수살기도원 후문이 나온다.

평소 수살기도원으로 오는 우편물은 이런 경로로 배달을 하고 있다. 인간리 들렀다가 수살기도원으로 간다.

주소로만 보자면 청포로 2824라서 다인식당이 있는 청포로 2967을 지나 청포로 길을 1.5키로 정도 더 가서 수살기도원으로 가야 할 것 같지만, 그래서 종종 다인식당 갔다가 인간리 쪽으로 안 빠지고 곧장 수살기도원으로 갈 때도 있지만, 보통은 오늘처럼 수살기도원보다는 인간리 배달을 먼저 한다. 그러고 나서 수살기도원으로 간다. 왜냐하면 주소와 달리 수살기도원 위치는 청포로 2824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따지자면 아마 청포로 2824-30. 그러니까 2824 지점에서 샛길 따라 삼백 미터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그럼 올라갔으면 다시 내려와야 하니, 왕복으로 계산하면 육백 미터. 수살기도원 한 집 배달하기 위해서 육백 미터를 달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마침 인간리 마을길인 청포로62안길을 달리다 보면 27-4에서 수살기도원 후문으로 가는 샛길이 있고, 또 후문을 통과해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정문으로 빠져나가 삼백 미터 정도를 달리면, 앞에서 말한 청포로 2824 지점이 나온다. 그리고 청포로 2824에서 다인식당 반대 방향으로 불과 백 미터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청포로61길. 시외7구 배달 구역인 인간리 매실이라는 마을이다.

주부길은 매실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주부길은 이 지점까지 오면 아주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이상 늘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는다. 시간은 보통 열한시에서 열한시 삼십분 사이. 이곳이 배달 도중 휴식을 취하는 첫 번째 장소다.

집배원은 저마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처럼 배달 구역 내에 휴식 장소 몇 군데를 정해 놓고 있다. 누가 정해준 건 아니고, 배달을 하다 보면 잠깐 한숨 돌리면서 쉬기에 적합한 곳을 스스로 찾게 된다.

주부길은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오늘은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오늘도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사기로 하고 잠깐의 휴식을 끝냈다. 화요일이라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시간은 열한시 삼십분이 조금 넘었다.

화요일 치고는 인간리 매실까지 빨리 왔지만, 아까 인간리 마을이장 집 앞에서 돼지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오분 정도는 시간을 단축했을지 모른다.

주부길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둘러 매실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편물이 온 네 군데 집에 들러 배달을 마친 뒤 곧장 면소재지로 향했다.

수살면 면소재지가 있는 수살리는 주부길의 사수 윤명회와 삼남매의 아버지 S가 번갈아가면서 담당한다. 그리고 바로 옆 마을인 수살2리는 현재 주부길이 담당하고 있다.

원래는 수살2리도 수살리와 함께 시외1구 구역이었지만, 시외1구에 면소재지도 있다 보니 가구 수도 많고 해서 다른 구역보다 힘들다는 얘기가 자주 나왔다. 그래서 수살2리를 떼어내 시외7구에 포함시켰다.

현재 수살2리는 시외1구가 아니라 주부길 담당 구역인 시외7구에 속해 있다.

주부길은 면소재지를 가로질러 수확로 3073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수확로 3073이 편의점이었다.

수살면 면소재지에 브랜드 편의점은 이곳 수확로 3073 하나다. 그리고 개인 편의점이 하나, 작은 슈퍼마켓이 둘 있다. 규모 면에서 차이는 나지만 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나로마트가 하나 있고. 그래서 주부길은 도시락을 살 때면 늘 수확로 3073을 이용한다.

수확로 3073은 수살면에서는 매우 젊은 축에 속하는 30대 부부가 운영한다. 원래 수살면 면소재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중 가장 젊은 부부는 청포로 3125 행랑채 식당 주인이었지만, 수확로 3073에 편의점이 들어오면서 그 타이틀을 뺏겼다.

편의점 주인 최현성은 30대 후반, 아내 강선영은 30대 중반이다. 둘은 사는 집도 주부길이 담당하는 시외7구에 있다. 수살면 상황리에 있는 상황교회 아래다. 상황3길 53. 그곳에서 최현성은 아내 강선영과 강선영의 아버지 그러니까 최현성한테는 장인인 강상민과 함께 산다. 그리고 발바리 종류인 흰색 강아지도 한 마리 있고.

60대 초반인 강상민은 노란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 수살면과 오덕면, 한마면 일대에서 유일하게 목격되는 노란색 스포츠카가 강상민의 차다. 게다가 취미는 동력 장치가 달린 모터 패러글라이딩. 가끔 편의점 옆 빈 가게에 세워져 있는 모터 패러글라이딩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은 모터 패러글라이딩이 안 보였다.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질풍면에 있는 비명산 언덕으로 모터 패러글라이딩을 타러 갔을지도 모른다.

주부길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서 도시락과 구운계란을 하나 샀다. 그걸 카운터에 올려놓자, 편의점 안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강선영이 뛰어나왔다.

“어머, 죄송해요. 상품 발주 좀 하느라 집배원님 오신 거 못 봤어요.”

강선영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다. 입도 크고, 코도 크고, 눈도 크다. 키도 크다.

이 시간에는 대부분 남편 최현성이 편의점을 지키고 있지만, 오늘은 남편 대신 강선영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강선영님이 계시네요. 남편 분은 어디 가셨어요?”

상품 발주 때문에 바쁠 것 같아서 얼른 계산만 하고 나오려고 했지만, 그래도 안부인사 정도는 하는 게 서로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아서 주부길은 남편 최현성의 안부를 물었다.

강선영은 스캐너로 상품 바코드를 찍으면서 대답했다.

“네, 오늘 대전 갔어요. 전에 저희가 대전 살았거든요. 그때 현성씨 다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요. 건축 설계 쪽 일을 했었는데요, 바쁜 일이 있어서 뭘 좀 도와달라고 했나 봐요.”

“아 네, 그럼 오늘 혼자 좀 힘드시겠어요.”

“훗, 어쩔 수 없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강선영은 상품을 봉투에 담다 말고 느닷없이 주부길을 향해 주먹까지 불끈 쥐어보였다.

강선영의 반응에 주부길도 얼떨결에 따라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열심히 해주세요, 훗. 그럼 전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주부길은 강선영한테 도시락을 받아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야외에서 도시락 먹기 좋은 날씨라고 중얼거렸다.

주부길은 도시락을 오토바이 적재함에 넣으려고 적재함을 정리하다가 그제야 등기우편물 묶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오곡주유소에서부터 이곳 편의점까지 오는 동안 한 시간 넘게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등기우편물을 한 통도 배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등기우편물뿐만이 아니라 택배도 없었다. 물론 그런 날이 있다. 어떤 날은 한 시간이 아니라 두세 시간 동안 등기우편물 온 집이 단 한 군데도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 분명히 오곡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만 해도 인간리에 등기 한 통 온 거 있으니까 잊지 말자고 중얼거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주부길은 불안한 마음에 등기우편물 묶음을 들어, 맨 위에 있는 등기우편물의 주소를 확인했다.

청포로62길 89. 수취인 장미옥.

인간리에 사는 85세 장미옥한테 온 등기우편물이었다. 마을회관 다음 다음 집.

주부길은 이미 국방부 유해발국감식단에서 보낸 소식지를 배달하기 위해 조금 전 그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집 마당에서 낡은 군복을 입고 있는 유기명도 보았고. 하지만 그때는 장미옥한테 등기우편물이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소식지만 배달하고 나왔다.

왜 그랬지. 왜 잊고 있었지.

왜 잊고 있었는지는 주부길도 모른다. 아마 마을회관에 있는 우체통 수집편찰을 할 때부터 풍기던 돼지의 배설물, 겁에 질려 쏟아내던 돼지의 배설물 냄새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냄새 때문에 단 몇 초라도 빨리 인간리를 벗어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등기우편물 온 걸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주부길은 천천히 장미옥한테 온 등기우편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발신인을 확인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

주부길은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등기우편물을 적재함에 던져넣고 서둘러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집배원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시속 95키로가 넘게 몰았다. 스로틀이 고장 날 정도로 세게 감았다. 끝까지 감아서 더 이상 감기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스로틀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오토바이 내팽개치고 돌연변이 능력을 이용해 힘차게 도약해서 단 한 번에 청포로62길 89까지 가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려고 계속 계속 스로틀만 감았다.

집배원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평지에서도 속도가 시속 95키로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스로틀을 감았다. 오곡주유소에서 어느새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엄범대가 주부길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무시하고 스로틀을 감았다. 청포로 2920 지점에서 왼쪽으로 진입해 마을길인 청포로62길을 달리면서도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계속 스로틀을 감았다. 도중에 청포로62길 21 이명진이 과수원에서 주부길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도 같았지만, 주부길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스로틀을 감았다. 그리고 마을회관 바로 전에 왼쪽으로 거의 90도 각도로 꺾어지는 청포로62길을 오토바이 레이서처럼 오토바이와 몸을 왼쪽으로 쓰러질 듯 기울이면서 스무스하게 통과했다. 속도도 직선 코스를 달리던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청포로62길 88을 지나 맞은편에 있는 89호 마당으로 진입했다. 집 마당을 거의 시속 60키로로 진입한 셈이었다. 그리고 곧장 급정거했다.

오토바이 급정거에 매번 평상에 걸터앉아 힘없이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기만 하던 유기명이 화들짝 놀라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주부길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려 곧장 현관문을 열고 장미옥을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장미옥 할머니!”

주부길의 숨넘어갈 듯한 소리에 방 안에서 기척이 들렸다.

“누구세요?”

그러면서 천천히 방 문이 열렸다.

다행히 장미옥은 마을회관에서 일찍 돌아온 모양이었다. 집에 없으면 돌연변이 능력이라도 발동해 번개 같은 속도로 마을회관으로 달려갈 작정이었다. 그 수고를 덜어서 주부길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아, 집에 계셨네요. 저 우체국 집배원이에요.”

“어, 우체부 양반이시네.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온 소식지는 내가 들고 왔는데, 뭐 또 우편물 온 거라도 있어요?”

장미옥은 85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말투나 걸음걸이나 몸짓이나 옷차림에서 조심스러움이 전해진다. 움직임이 신중하고, 주부길한테 절대 말을 놓는 법도 없다. 그래서 주부길도 장미옥 앞에서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게 된다.

수살우체국에 다니면서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주부길은 얼른 신발부터 벗었다.

“할머니, 나오지 말고 그냥 거기 계세요. 할머니한테 뭐 온 게 있어서요. 거기 그냥 계세요. 제가 들어갈게요.”

주부길은 거의 뛰다시피 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신발 한 짝은 마당 끝 텃밭까지 날아갔다.

그런 주부길을 보면서 장미옥은 말없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주부길이 방으로 들어와 앉을 때까지 문 옆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앉은 주부길이 장미옥을 올려다보았다.

장미옥도 주부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몸 때문에 자꾸만 얼굴도 흔들려서 주부길의 시선이 비껴갔다.

“할머니, 앉으세요.”

주부길의 말에 장미옥이 입을 벙긋거렸다. 아마 “네”라고 대답하려 했으리라. 하지만 목이 메어서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장미옥이 자리에 앉자, 그제야 주부길이 손에 쥐고 있던 걸 장미옥한테 건넸다.

장미옥이 천천히 등기우편물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발신인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소리 내서 읽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

장미옥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혔다. ‘국방부’까지 읽었을 때부터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걸 참으려고 참으려고 눈동자가 쏟아질 정도로 눈에 힘을 줘서 발신인을 끝까지 소리 내 읽었다. 그러고는 눈물 떨어지는 시간조차 아까운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편물을 뜯었다.

주부길은 우편물을 뜯는 장미옥의 동작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봉투에 들어 있던 A4 용지 몇 장을 손에 쥐고 읽던 장미옥이 마지막 한 장을 읽다가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참으려고 애쓰지도 않고 눈물을 닦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가끔 깊게 한숨을 토해내고, 가끔 코를 훌쩍 들이켜고, 그리고 계속 눈물을 쏟아냈다. 소리 내 우는 게 더 속이 시원하련만, 장미옥은 끝끝내 소리 내 울지 않았다. 바닥에 두 손을 짚은 채 말없이 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오분이 흘렀는지 십분이 흘렀는지 모른다. 장미옥이 손에 쥐고 있던 A4 용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주부길은 장미옥이 내려놓은 A4 용지를 쳐다보았다. A4 용지 사이로 맨 마지막 종이에 인쇄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故유기명 이등중사(23세) 유해 최종 수습

그 글자 밑에 똑같은 글자가 또 한 번 인쇄되어 있었다.

故유기명 이등중사(23세) 유해 최종 수습

주부길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서 등기우편물을 보냈을 때 유기명의 유해를 수습한 거라고 생각했다. 미리 그렇게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유해를 최종 수습했다는 글자를 보는 순간 주부길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주부길은 조금이라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장미옥이 바라보고 있는 사진에 시선을 돌렸다. 그 사진 속에는 23세 앳된 모습의 유기명이 낡은 군복을 입고서 거수경례 자세로 늠름하게 서 있었다.

“군에 있을 때 저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만날 수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요. 일부러 저렇게 늠름한 모습의 사진까지 같이 보내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걱정 안 할 거라고 답장을 했지요. 돌아올 거 뻔히 아는데 왜 걱정을 하냐고……. 그때 내가 열아홉이었는데, 우리 영감은 스물셋. 그런데 육십육년 만에 돌아왔네요.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돌아왔어요. 옛날 모습 그대로, 스물세 살 때 모습 그대로 돌아왔어요. 돌아와줘서, 고맙지요. …….”

장미옥은 다시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이제는 소리 내 울 법도 한데 여전히 소리를 삼킨 채 울었다.

어느 틈에 왔는지 낡은 군복 차림의 스물세 살 유기명이 방 앞에 서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 그대로 늠름한 모습 그대로 방 앞에 서서 장미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부길은 말없이 일어섰다.

장미옥한테 등기우편물을 전달했으니 업무용 PDA에 서명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서명 좀 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귀신인 유기명한테 대신 서명을 부탁할 수도 없고.

주부길은 장미옥을 향해 소리 없이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도대체 신발 한 짝이 왜 여기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텃밭에 떨어진 신발을 주워서 신었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막 올라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유기명이 주부길을 불렀다.

“집배원님!”

목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

주부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기명의 모습을 보며 입을 한번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하지만 또렷하게 말을 했다.

“저한테 왜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유기명이 현관문 앞에 서서 주부길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 늠름한 모습으로.

그러면서 또 한번 낮고 또렷하게 말했다.

“빨리 달려와 주셨잖아요. 누구보다 빨리 달려와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집배원님.”

유기명의 말에 주부길이 또 한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실 건가요?”

주부길의 말에 유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젠 가도 될 것 같아요. 가야지요. 제가 있어야 할 곳도 아닌데, 너무 오래 있었어요.”

유기명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주부길이 먼저 거수경례를 했다. 아주 늠름하게 했다.

“나라를 위해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부길의 말에 유기명도 다시 한번 거수경례를 했다.

잠시 뒤,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경건한 분위기 사이로 주부길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주부길이 처음에는 업무용 PDA에서 울리는 소리인 줄 알고, 서둘러 거수경례 자세를 풀고는 PDA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기명이 속삭이듯 주부길을 불렀다.

“집배원님, 여기 바지요, 휴대폰!”

유기명이 손가락으로 자기 바지주머니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제야 주부길이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고타래한테 걸려온 전화였다. 이번에는 웬일로 본인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주부길은 유기명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고타래, 넌 꼭 이런 경건한 순간에 전화를 하더라.”

“아 미안, 그럼 끊을게.”

고타래는 아직도 주부길이 덕담재2안길 99 이장준 사건 때문에 화가 안 풀린 줄 알고, 무서워서 얼른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뭘 끊어 끊기는. 이미 경건한 순간 다 망쳐놓고는.”

“아 그랬구나, 미안. 그럼 어떻게 하지. 끊지 말아야겠다, 그치 부길아?”

고타래는 주부길의 말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 고타래의 모습이 눈에 선한지, 주부길이 낮게 한숨을 쉬면서 휴대폰을 헬멧과 얼굴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면 휴대폰을 손으로 쥐지 않고도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동시에 주부길은 유기명에게 인사를 하며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유기명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주부길을 배웅했다.

“왜 전화했는데? 바쁘니까 용건이나 빨리 말해.”

주부길이 탄 오토바이가 청포로62길 89 마당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참고>

故유기명 이등중사는 1951년 3월 21일 21세 나이로 입대했다. 그리고 23세 때인 1953년 7월 10일, 현재 화살머리고지의 옛 행정지명인 강원 철원 내문면 하덕검리에서 전사했다.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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