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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늦봄 어느 날

2019.11.01 00:0011.01

늦봄 어느날

갈원경

그건 어느 날 갑자기 거기에 있었다. 그런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도 끝내고 과일을 들고 와서 편안하게 TV 앞에 앉았을 때, 거실 앞을 길게 다 채우는 장식장 한쪽 끝, 다육식물의 조그만 화분이 놓여있는 그곳에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뭘까. 회색의 도자기 화분, 정말은 플라스틱으로 된 모형일지도 모른다 싶을 만큼 몇 달째 아무 변화도 없는 다육식물. 실수로 떨어뜨려 이가 나간 부분을 안 보이도록 숨겨둔 화분받침대. 무엇이 위화감의 원인일까 싶어 가까이 가 보니, 거기에는 먼지처럼, 이 계절에 늘 날리는 송화 가루처럼, 노랗게 뭉쳐진 것이 다육식물 이파리 사이에 있었다. 벚꽃이 지고 황사가 올 즈음이면 늘 날리는 송화 가루였다. K는 먼지떨이를 들고 와서 그걸 떨어버리려고 했지만 노란 그것은 먼지떨이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다가, 힘껏 휘두르자 바람과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서는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벌레 같은 게 아닐까 한참 들여다보아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K는 결벽증처럼 집안 곳곳을 정리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공기청정기를 틀었다. 설사 송화 가루라고 해도 더 무여졌을 때 버리면 되겠지. 알러지가 심한 Y가 보면 기겁할 일이지만 K는 먼지떨이를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그냥 자리로 돌아왔다. 제철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오렌지를 깎아 입안에 집어넣다보니 어느새 TV속 사람들의 웅변이 재미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Y는 그 다음날 집에 왔다. 학회를 다녀온다고 했지만 음식이 안 맞았는지 무슨 알러지가 도지기라도 했는지 얼굴이 해쓱했다. 일주일 동안 청소를 하긴 한 거냐, 집에 들어오자마자 기침을 해 대던 Y는 오자마자 일주일치 세탁물을 돌려놓고는 집 구석구석을 청소하느라 분주했다. Y가 K와 부딪히는 건 늘 청소 때문이었다. Y는 부모님은 K가 Y와 함께 살겠다고 했을 때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는데, K의 부모님이 털털한 K가 Y와 함께 살면 좀 깔끔함을 배울 거라고 반색하신 것과는 정 반대였다. Y 때문에 K는 집먼지 알러지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Y 때문에 K는 음식 중에 양파가 들어가는 게 그렇게 많다는 걸 알았다. Y는 한 달 방세도 넘는 돈으로 독일제 청소기를 사서 매일 집을 청소했다.

저녁에 찜닭 먹자. Y가 말했다. 어디서 시킬까? 대갓집. 거기 양파 안 쓰니까. 그럼 내가 밥 안칠게. 배달이 도착하고 밥솥이 잘 저어달라는 소리를 내보낼 즈음에 빨래도 끝났다. K는 Y가 빨래를 너는 동안 밥을 차렸다.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Y의 얼굴이 밝았다. 오늘은 공기가 좋아. 빨래 잘 마르겠다. 매운 찜닭을 Y는 정성껏 발라먹었다. Y는 다리를 싫어하고 가슴살을 좋아하며 K는 가슴살을 싫어하고 닭다리를 사랑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 못하던 것을 둘은 별 일 없이 할 수 있었다. 양파만 없으면 Y는 K가 한 음식을 뭐든 잘 먹었다. K는 양파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양파가 없으면 안 되는 음식은 밖에서 먹고 오면 되었다. K는 설거지를 하면서 Y가 소파 위를 찍찍이로 미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설거지가 끝나고 K가 소파로 가자 Y는 잠들어 있었다. TV에서는 40대 독신이 여행지에서 침구를 찍찍이 테이프로 미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아이구, 저건 세탁 다 한 건데 왜 저런대. 별난 사람도 다 있네.”

“저는 안 그래요. 전 내 집만 깨끗하면 돼서, 밖에서 아무리 지저분한 데서 자더라도 집에 와서 깨끗하게 씻고 빨래하면 돼요.”

Y가 보면 잔뜩 인상을 쓰고 채널을 돌렸을 것이다. K는 TV 볼륨을 조금 낮추고 Y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TV속 사람은 음식 냄새가 싫어서 집에 가스레인지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엔 참 별 사람이 다 있구나.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고 끓이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화학작용인데. 요즘 같은 계절에는 맛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둥글게 썬 오징어를 무와 같이 조려내면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이 무와 어우러져 별미다. 모서리를 깎아 썰어서 물에 담가 전분을 빼고 비슷하게 깎은 당근과 연근을 함께 조려내면 서로 다른 식감이 입안에서 춤을 추는 재미가 있다. 버섯과 고기와 당근을 다져서 가지 사이에 넣고 튀기면, 초간장 살짝 찍어 입안에서 땅의 힘이 하나가 된 걸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음식을 만드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울리는 접시에 담아내는 것도, 다른 음식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것도. Y가 일찍 찜닭 이야기를 해 줬다면 Y가 좋아하는 당면과 깻잎을 충분히 넣어서 맵싸한 찜닭을 만들어 주었을 텐데. 하지만 오늘은 밥이 아주 잘 되었고, 그래서 Y는 더 맛있게 찜닭을 먹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K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은 편집자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여행도 즐기지 않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이 취미인 K는 좀처럼 바깥으로 나올 일이 없었다. 출판사와의 일도 대부분 메일로 진행했지만 오늘은 계약서에 날인을 하는 날이었다. 도장을 찍고 우편물이 왔다갔다 하는 것보다는 만난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나았다. 계약서 내용은 이미 확인했지만 혹시라도 오늘 만난 자리에서 계약 내용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계약서에 작성한 내용도 변경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 마당에 날인하기 전의 계약서 내용이 바뀔 위험은 얼마든지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드문 일도 아니다.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근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 출판사 근처 커피숍에 약속시간보다 10분쯤 일찍 도착했을 때는 이미 편집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일찍 오셨네요.”

“멀리서 오시는데 제가 먼저 와 있어야죠. 오느라 한참 걸리셨죠?”

편집자가 반갑게 일어나 맞았다.

새로 맡은 작품은 미국에서는 꽤 마니아를 확보한 청소년 소설이었다. 번역가가 직접 이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고 출판사에 제안을 했다고 했다. 해리포터 때만큼은 아니어도 영미의 SF 작품에 대한 수요층은 있으니 그 층을 밀자는 것이었다. 지금 영화 판권 계약도 끝난 생태라 책이 나올 때쯤 영화의 출연 배우라도 미리 공개된다면 구매층은 훨씬 넓어지지 않겠냐는 게 출판사의 말이었다. 그런 것은 K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지만. 책에 실리는 건 원작자와 번역자 뿐, 자신 같은 외주교열자의 이름은 책에 남지 않는다. 책이 잘 팔리면 작가에게 좋을 것이고 번역가도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하나 추가되겠지만 출판사나 번역가를 찾아서 책을 읽는 독자는 있을지 몰라도 교열자를 찾는 사람은 없다.

“잘 확인해 보세요. 도장 찍으시기 전에.”

편집자가 웃으며 계약서를 건넸다. 원고료를 정산하는 것은 마감일로부터 한 달 이내, 수정이 완료된 때로 한다. 만약 출판일 연기 등의 사유로 인하여 추가 수정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갑을은 상호 협의를 통하여 일정을 조정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추가 수정에 대한 고료는 기존 고료와 별도로 한다.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문구 때문이었다. 가장 최근의 교열은 손에 꼽을 만큼 괴로웠다. 처음에 번역문을 받고 한 달의 기간 안에 단행본 세 권 분량의 교정 교열을 하기로 계약했지만 출판이 연기되면서 지급이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석 달이나 지나 출판 예고가 뜬다 싶더니 갑자기 책에 등장하는 고유명사 표기를 모두 수정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사이에 편집자가 두 번 바뀌었다. 계약서에는 출판일에 지급이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었다. 번역가가 원문의 독음 그대로 번역한 명사를 우리말식으로 모두 바꾸는 데 꽤 시간이 걸렸고 결국에는 예정된 한 달이 아니라 6개월이 지난 후에 첫 고료를 받을 수 있었다. 출판사 사정상 일시금 지급이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한 달 후 나머지 돈을 받을 때까지 K는 수입이 없는 상태로 급한 일을 몇 개나 추가해야 했다. 그 즈음에 인스타그램에서 해당 작품의 번역가가 출판사에서 교정한답시고 자기 문장을 죄다 망가뜨려 놓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보았다. 번역가의 고료는 이미 7개월 전에 완납되었다는 것도 거길 통해 알았다. 원고료는 벌써 한참 전에 다 받았지만 이 책이 잘 안 팔리면 그건 100% 출판사 탓이라고 적어놓은 글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재미있는 책이었고 출판사에서는 그 책의 다음 시리즈도 맡아 주지 않겠느냐 연락이 왔지만 K는 일정상 어렵다고 거절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고료가 늦어지는 바람에 급하게 받은 일들이 계속 연속적으로 들어왔고 큰 일을 맡을 여지가 없었다.

“여기 고료 말인데요.”

편집자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난 번 메일로 마감을 일주일 당겨 주면 좋겠다고 했을 때는 그러자고 했지만, 미팅 당일에 고료를 조정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교정 교열을 하면서 출판사와 선이 생기면 전공을 살려 번역으로 옮겨 갈 수 있을 거라는 처음의 기대는 이제 사라진지 오래였다. 세상 모든 업종이 그렇듯이 출판 경기는 매년 더 나빠졌다. 꾸준히 일감이 들어오는 것만 해도 어디냐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기간이 많이 조정되었으니까 매당 고료를 조정하는 게 좋겠다는 말씀이 계셨거든요. 원래 장당 고료에서 이렇게 조정해서, 그럼 번역문 기준 분량으로 계산하면 최종 고료가 이렇게 되네요.”

편집자는 웃으며 계약서를 가리켰다. 한 달의 마감. 일주일이 당겨졌으니 약 25%는 기간이 짧아진 셈이지만, 그렇다고 20% 고료를 더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K는 얼떨떨하게 수정된 고료를 보았다. 총액으로도 꽤 큰 변화가 생겼다.

“사실 지난 번 작품 때도 늘 마감을 촉박하게 해서 부탁드리는데 잘 지켜 주셔서, 이제는 이 액수로 하는 게 맞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벌써 저희랑 네 번째 작품이잖아요.”

출판사는 자기들과 첫 계약이라고 가격을 후려치고는 다음 작품이 되어도 고료를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첫 계약으로 끝나는 출판사도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다음 작품을 줄 생각을 하지 않는 출판사를 보고 자신의 작업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대부분의 일을 내부 교열로 돌리거나 아니면 처음 교열을 시작하는 사람으로 외주를 넘긴다고 했다. 대부분의 업종이 그렇듯 늘 비용의 문제였다. 지난번에 이 출판사와 작업한 책이 꽤 잘 팔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는데. 도장을 찍으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편집자와 헤어지고 K는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왔으니 초미세먼지 수치가 높다곤 해도 뿌옇지 않은 하늘을 볼 겸 버스를 타고 조금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스크를 끼고 이어폰을 꽂은 채 K는 버스 뒷자리 창가에 앉아서 나지막한 출판단지의 건물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꽤 유명한 출판사 마크가 보이는 건물들도 있었지만 이 지역에는 거의 높은 건물이 없었다. 버스가 조금 더 달려 IT 관련 회사들이 모인 지역으로 넘어가자 방금과는 전혀 다른 도시인 듯 높게 솟은 건물이 시선을 채웠다.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건물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주변의 건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TV에서 나오는 회사원처럼 양복과 와이셔츠 차림의 사람도 있긴 했지만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어도 티셔츠나 점퍼에 청바지 차림의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청년들이 황급하게 식당 앞에 줄을 서고, 줄서지 않은 식당으로 옮겨갔다. Y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도 이 근처였지만 버스가 그 앞을 지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전 세계가 모두 내가 만든 세계 속에서 모험을 하게 할 거야. 듣는 사람이 더 쑥스러워 질 정도의 말을 Y에게 들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부모님의 반대로 전문계 고등학교로 가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Y는 정말 분한 표정이었다. K는 Y가 하는 말의 절반 정도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Y는 유독 K에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넌 참 재미없게 사는구나. Y가 그렇게 말하자 K의 세계는 갑자기 매우 재미없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와서 빼곡하게 노트 정리를 하고 급식에 뭐가 나오는지 매일 아침 별로 바뀌지도 않는 메뉴를 확인하고 들뜨고 역사 시간이 있어서 기뻐하고 미술 시간이 없어서 기뻐했던 K의 세계는 갑자기 지독하게 재미없는 것이 되었다. 2학년이 되어 K는 문과로 Y는 이과로 가면서 반이 바뀌었지만 Y는 종종 K의 교실에 왔다. 아니 매일 K의 교실에 왔다. K는 Y의 어려운 이야기를 더 안 듣기 위해서 자기가 읽는 책을 빌려주었고 Y는 지금껏 누구와도 다르게 책 표지를 접지도 않고 띠지를 구기지도 않은 채로 책을 돌려주었다. 재미있더라. 너 그건 읽어봤어? 아직 안 읽어봤어? 왜? 야 그 책을 좋아하면 당연히 그것도 읽어야지. 뭐가 더 좋고 뭐가 덜 좋은 게 어디 있어 다른 책인데. 나한테 있는데 빌려줄까? 다음 날 Y는 새 책처럼 깨끗한 책을 K에게 주었고 K는 다음날 다 읽은 책을 Y에게 돌려주었다. 둘은 책 취향이 비슷했고, 책을 다루는 방식이 비슷했다. 기숙사가 있으면 좋겠다. 어느 날 Y가 말했다. 집이 싫으냐고 묻자 집에서 밥을 먹는 게 싫다고 했다. 왜 집에서 먹는 게 싫은데. 엄마가 자꾸 양파를 먹으래, 난 양파가 싫은데. 왜 싫은데? 양파를 먹으면 목이 아프잖아. 양파를 먹는데 왜 목이 아파? 목이 아프잖아, 붓고. 너 그거 알러지잖아. 양파 알러지도 있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너 먼지 알러지도 있다며. 양파 알러지도 있는 거 아닐까. 그 주말에 Y는 병원에 가서 알러지 면역 반응 검사를 받았고, 급식 영양사는 양파가 들어간 음식을 매번 Y에게 알려주게 되었다. 세상을 재미없게 살던 K는 처음 자기 책을 편하게 빌려줄 사람이 생겼고 Y는 매번 편식이라고 혼나던 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Y는 성적이 좋았다. 특히 화학과 물리는 한 번도 만점을 놓친 적이 없었다. Y의 중학교 동기가 Y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과학고를 준비했었다는 걸 이야기해 주었다. 영재학교 시험을 치러 갔는데 불합격했다고, 그 순간부터 뭐가 바뀐 건지 갑자기 공부에 손을 놓아버렸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설이며 영화에 빠지더니 안하던 게임도 시작했다고 했다.

“울 엄마 같으면 난리도 아니었을걸. 근데 저 집 부모님도 대단해. 저 녀석 전교 1등에서 한중간까지 떨어져서 담임 쌤이 불렀거든. 그런데 오셔서는 Y가 늦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네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하겠지요. 친구들과는 잘 지낸다니 안심했습니다. 내가 교무실 청소당번이었잖냐. 딱 저랬다니까. 완전 멋지지 않냐?”

완전 멋진 부모님도 Y가 전문계 고등학교에 간다고 하는 것은 말렸다는 게 이상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다양한 길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러시더라. Y는 덤덤하게 내게 그렇게 말했다. 부모님 말대로 Y는 중학교 3학년 때 원래 위치만큼은 아니어도 성적이 올랐고 고등학교에 온 뒤에도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도무지 과학이 외계어처럼 느껴졌던 K는 Y에게 과학 질문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Y가 가르치는 일에는 지독하게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K도 Y도 계열을 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3학년 때 완전 멋진 부모님은 Y의 진학 문제로 한 번 더 학교를 찾았다. 이번에도 Y의 선택은 극단적이었지만 다행히 대학원서는 한 장만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Y는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 하나와 다른 사람들이 권하는 대학 다섯 개를 골라 수시 원서를 넣었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 하나를 제외한 다섯 개 대학에 합격했다. 등록을 하지 않더라도 그 해 정시 입시에 응시할 수는 없었지만 Y는 태연했다. 너도 내가 남들 다 가고 싶어 하는 대학 붙어서 좋겠다고 생각해? Y의 물음에 K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 안 돼서 속상한 건 아냐. 거기 어차피 정시로는 뽑지도 않아. 거기가 아니면 다 똑같으니까. 다른 데 졸업해도 못 할 일은 아니니까. 부모님은 뭐라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원서 넣은 걸로 됐으니까 어디 갈지는 내가 알아서 정하래. 여전히 멋진 부모님이시다. 내 눈에는 네 부모님이 더 멋져. K의 부모님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K가 네 군데의 대학을 골랐고 부모님은 사람들이 줄줄 외곤 하는 대학 순위조차 모르는 분들이어서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말에 그저 안심했다. 경영학과에 가라는 흔한 말도 하지 않았다. K가 수학을 못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K의 부모님은 K가 합격한 대학의 등록금이 다른 학교의 반도 안 된다는 것에 만족했고, 그 대학의 문과 계열 학생들 상당수가 그러는 것처럼 K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묻지 않았고 따라서 K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K와 Y는 가끔씩 만났다. K는 다른 동기들이나 선배 후배들이 일찌감치 취업 준비를 할 때에도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공을 좋아했다. 그 언어로 된 소설들을 남들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소설 이야기를 Y에게 몇 번인가 했을 때 Y가 말했다. 너도 번역 하지 그래. 너 소설 좋아하잖아. 그런 건 관심 없어? K는 자기가 읽은 좋은 소설을 번역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번역을 하려고 하니 중요한 건 영어 실력이 아니라 국어 실력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즐겁게 읽었어도 우리말로 옮겨놓은 글은 그 맛이 나지 않았다. 2학년부터 국문학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교수들은 K가 경영학이나 경제학이나 행정학을 복수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무원 준비를 할 거라고 생각했고 K는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Y는 공모전에서 몇 번인가 작은 상을 받긴 했지만 목표하는 성과는 얻지 못했으며 전공 교수들은 Y에게 취업 대신 진학을 권했다. K는 4학년이 되어서야 취업 생각을 했고 몇 군데 출판사에 원서를 넣었지만 예상대로 불합격했다. Y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둘은 4월에 만났다. 뭐 하고 지내냐. 알바 시작했어. 번역 하는 거야? 아니 교정. 그게 뭐야? 맞춤법이나 문장도 보고 문맥도 보고 해서 전체적으로 글 맥락을 맞추는 거. 출판사에서 하는 거 아니야? 출판사에서도 하지만 외주로도 해. 나는 외주 받아서 하는 거. 어떻게 하게 된 건데? 아는 선배가 출판사에 있었어. 급하게 도와 달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어쩌다보니. 둘은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하다가 갑자기 지하철 막차가 끊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일어났다. 반대방향 환승으로 길이 나뉘기 직전에 Y가 말했다. 우리 같이 살래?

시내로 들어서서 K는 버스를 갈아탔다. 환승 버스는 한참을 달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타는 경로로 향했다. 체크무늬와 단색이 조화로운 교복 두 학교와 예전부터 본 것 같은 짙은 감색의 교복 두 학교가 탔다가 내렸다. 이 버스의 별명은 팔학군이었다. 매년 서울대를 두 자리 숫자로 보낸다는 학교들이 이 노선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K와 Y가 다닌 학교 역시 이 노선 안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학교는 아니었다. 저 교복의 학교들은 모두 두 사람이 다닌 학교와 묶이는 것을 싫어했다. 다른 학교들과 달리 K의 모교는 임대아파트와 주공아파트와 브랜드아파트가 같은 거리에 있는 곳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다른 학교와 학군도 달랐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같은 교복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K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벌써 알았다. 겉으로 보이는 천도 자세히 보면 달랐지만 가장 다른 건 안감이었다. 짙은 갈색에 금사가 간간이 섞인 안감의 교복은 다른 교복 값과는 앞자리 숫자가 달랐다. 다른 교복은 모 함유량이 얼마라고들 했지만 그 교복은 캐시미어 함유량을 이야기했다. 그 다음 교복도 그 다음 교복도 다들 안감이 달랐다. 가장 학생들이 기피하는 건 짙은 감색의 안감이었다. 입학식에 서 있을 때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하복으로 갈아입을 때쯤에는 의자에 닿는 엉덩이 부분이나 등 부분에 광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복은 더 많이 달랐다. 어깨와 겨드랑이 부분에 땀을 흡수해서 발산한다는 망사 안감이 붙어 있는 것부터 겉으로 보기엔 같아 보이는데 소재가 달라서 통기성이 좋다는 것까지. 학생들은 그것만으로도 계급을 나누는 데 부족함이 있다고 여겨서 또 가방이며 신발로 순위를 매겼다. 대놓고 같은 계급의 아이들끼리 어울리는 건 촌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그 외에도 다양한 점수를 매길 줄 알았다. 성적, 운동, 외모, 집안. 그 모든 것이 상류에 속하는 사람도 그 모든 것이 하류에 속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 그 학교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저 혹시 ...K 아니에요?”

버스 손잡이를 잡고 힐끔힐끔 K를 쳐다보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누구였더라. 금방 같은 대학 국문과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맞아요. M 선배 맞죠?”

“오랜만이야, 잘 지내?”

“응, 진짜 오랜만이네요. 선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퇴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옷차림도 회사원으로 보기엔 애매한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M은 국문과 복수전공을 할 때 종종 같은 수업을 들은 복학생이었다. 희곡을 쓴다고 했었다. 몇 번인가 자기가 쓴 희곡을 보여준 적도 있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없었다.

“이 근처에 학원에 있어. 다음 정류장에, 알지? OO 논술학원. 거기서 애들 가르쳐. 넌?”

“난 집에서 일해서. 잠깐 사람 만났다가 들어가는 길이에요.”

M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K는 거기 자기 번호를 눌렀다. M이 전화기를 도로 가지고 갔다가 이내 K의 전화가 울렸다.

“지금은 수업이라 이야기를 못하겠고, 다음에 보자. 진짜 만나서 반갑다.”

“응, 그래요 선배. 또 봐요.”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K는 버스에서 내려서 손을 흔드는 M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수업시간에 K가 갖고 있던 소설책을 빌려달라고 했던 M은 이틀 뒤에 책표지를 꾹꾹 눌러 접혀진 책으로 돌려주었다. 고등학교 때보다 감정을 감추는 법을 더 익힌 K는 아무 내색하지 않고 책을 받았다. 그 뒤로 한 번도 소설책을 들고 수업에 간 적이 없었지만 M은 복학생이어서 동기가 아무도 없어서 그랬는지 K에게 말을 자주 걸었다. 연극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흥분하며 말하는 그가 졸업 후에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K는 자연스럽게 그를 잊었다.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그를 만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대학로에 새로운 연극은 너무 많았고 K는 대학로 무대 위의 배우들을 보는 것보다 소설 속의 사람들을 보는 것을 더 즐기는 사람이었다. K는 핸드폰에 들어온 M의 번호를 ‘국문과 M선배’라고 입력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 Y는 자기가 한 말 대로 잠들어 있었다. 시차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른다. Y가 다녀온 나라는 우리나라와 여덟 시간의 차이가 난다고 했다. 빠르다고 했던가 느리다고 했던가. Y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청소를 시작했다. 다육식물 위의 노란 뭉치는 어제보다 커진 것인지 작아진 것인지 알 수 없는 크기로 그대로 거기 있었다. Y는 K가 나가고 나서 곧바로 청소를 했을 터였다. Y의 강력한 독일제 청소기에도 꿋꿋하게 빨려 들어가지 않고 살아남은 노란 것을 어쩐지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K는 꼭 짠 깨끗한 물걸레로 TV며 소파를 모두 닦으면서도 화분은 닦지 않았다. 분명히 아침에도 청소를 한 것 같은데 바닥에도 소파에도 먼지는 묻어났다. 어디서 이렇게 먼지가 들어올까. 공기청정기를 돌리면서 창문은 닫아 둔 상태인데도 먼지는 계속해서 쌓였다.

M선배와 Y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Y와 만나기로 했던 돼지갈비 전문식당에 M선배가 불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K 친구구나! 얘가 참 괜찮은 애지. 서비스 많이 줄게! 맥주 한 병 갖다드릴게. 운전 안 하지?”

“저 술 안 마셔요.”

“아 그래? 할 수 없지 그럼 고기 많이 줄게. 이야기 많이 하고 가!”

3인분을 시켰는데 서비스가 3인분 쯤 더 왔다. 반찬은 그릇이 비워진다 싶으면 곧바로 새 그릇이 왔다. Y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고기가 다 비워지자 곧장 일어났다.

“또 와!”

손까지 흔들어 보이는 M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Y는 가게가 있는 길모퉁이를 돌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나를 노려보았다. 저 사람이랑 친해? 어, 아. 친하다고까지 할 건 아닌데 내가 복수전공 하니까, 국문과 선배야. 그런데 왜 나한테까지 반말해? 미안해, 저 선배가 복학해서 친구가 별로 없어서, 너한테도 잘 해주려고 그런 걸 거야. 잘 해주려고 하면 반말해? 그리고 네가 왜 사과해. 저 사람이 잘못했는데. 그 뒤로 Y는 그 거리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M선배는 두어 번 Y의 안부를 물었지만 이내 Y의 이름을 잊어버렸고 그러다 선배가 졸업하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는 닭갈비집, 호프집으로 바뀌었다가 커피전문점이 되었다. 개업기념 플래카드가 다 바래기도 전에 다른 가게가 되기도 했다. Y는 한 번도 M선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늘 선배를 만난 것을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청소를 끝내고 K는 냉장고에서 감자를 꺼내 깎기 시작했다. Y가 좋아하는 감자조림을 만들 생각이었다. 함께 일본에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조식 뷔페에서 먹은 뒤로 Y는 이 감자조림을 잊을 만하면 찾았다. 감자와 당근과 얇게 썬 쇠고기와 곤약을 간장과 청주에 설탕을 조금 넣고 졸인 수수한 반찬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가정의 맛이라고들 하는 모양이었다. 자극적인 음식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음식을 더 좋아하지도 않는 Y가 유독 감자조림만은 종종 먹고 싶다고 해서 K는 인터넷을 뒤져서 감자조림을 만드는 법을 찾았다. 둥글게 깎은 감자와 당근과 쇠고기의 달짝지근한 맛이 K입에도 잘 맞았다. 조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면서 달큰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자 부스스 Y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너 좋아하는 감자조림. 곤약 많이 넣지. 응 많이 넣었어. 햇감자가 나왔더라, 감자가 참 좋아. 밥 먹고 들어오는 줄 알았어. 점심 때 약속인데 저녁까지 먹을 일이 뭐 있어. 일은 잘 하고 왔어? 응, 생각보다 고료가 더 들어올 것 같아. 잘 됐네. 응. 감자에 충분히 양념이 배어들게 뚜껑을 덮어두고 K는 Y를 돌아보았다. 썬크림을 잘 바르고 다니라고 했는데도 턱에 알러지가 올라왔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럿이 간 자리니까 틈틈이 썬크림 챙기기가 쉽지 않았겠지. 심하게 발진이 올라오진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거지는 Y가 했다. TV에서는 며칠 전 그 방송의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K는 Y가 보기 전에 채널을 돌렸다. 산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삼일을 보내는 방송이 보였다. 참 별난 사람 많아. 설거지를 끝낸 Y가 K옆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 사람은 김치도 담고 반찬도 잘 만드네. 이 사람도 아파서 산에 갔대? 글쎄 모르지, 나도 방금 보기 시작했는걸. 세상에 별난 사람 참 많지. 그러게 말이야. 넌 저런 데서 살 수 있겠어? 넌? 난 햇빛 때문에라도 안 될 것 같아. 그러네. 난 인터넷이 안 되면 일을 못 하니까 안 되겠다. 그럼 우리는 그냥 도시에서 살아야겠네. 그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졸음이 쏟아졌다. 피곤해 보여 잠깐 눈 붙여. 응 조금만 잘게.

K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무언가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아예 소파 팔걸이에 기대서 잠들어 있었다. 불 꺼진 거실에는 맞은 편 아파트의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웅웅 진동을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급히 손을 뻗었다. 이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아까 등록한 M선배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M선배가 아니라 익숙한, 얼른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네, K입니다. 전화거신 분은 누구신가요?”

“K……? 아, K! 나, 기억 안 나니? 국문과 S. 우리 같이 창작 수업 들었었는데.”

“아…, 기억나. 어. 그런데 어쩐 일이야? 이거 K선배 번호 아니야?”

거실에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S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K가 대답했다.

“…K선배가, 발견됐어. 내가 제일 먼저 찾아서. 이 번호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한테 전화 건 거야.”

“……발견됐다고?”

“……숨 거둔 지 삼일쯤 됐다나봐. 지금 와 줄 수 있어? 선배 부모님들도 지금 오고 계셔. 선배랑 연락 끊어진지 오래 돼서, 뭐든 실마리가 될 걸 찾고 있는데.”

정신없는 목소리였다. 삼일 전에 숨을 거뒀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 오후에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논술학원에서 강사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거리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신림동에서 선배가 왜. 전화기 너머에서는 S가 M선배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희곡을 쓰던 선배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조만간 자기 시나리오의 영화가 개봉할 거라고 아는 후배들에게 연락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로는 그렇게 서글서글하게 웃던 M선배는 볼 때마다 점점 야위어 갔다고. 만나는 후배들이며 선배들이 어떻게든 밥을 사 먹이고 싶어지는 그런 얼굴이었다고 했다.

K는 거실에 불을 켰다. 한가운데 전구 세 개 중에 하나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그랬지만 좀처럼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아서 그대로 둔 채였다. 오늘 전구를 새로 사 올 걸 그랬다. 아니, 일단 옷을 입고 신림동으로 가야 할까. 무엇부터 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K는 갑자기 집 안이 숨이 막히는 것같이 느껴져서 베란다 쪽을 향했다. 거실 앞 긴 장식장 한쪽 끝, 회색 도자기 화분의 다육식물에 시선이 닿았다. 이파리 사이에 동그랗게 뭉쳐져 있던 노란 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K는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돌아가는 공기청정기 모터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들려 손에 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출판사 번호였다.

<메일로 수정 사항 보냈습니다. 빠른 확인 부탁드립니다.>

핸드폰을 조금만 만지면 오늘이 며칠인지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침실 문을 열면 Y가 있을 것이다. 현관문에는 Y의 신발이 놓여 있을 것이다.

딱 열 두 시간만 자면 좋겠다. 출시까지 일주일 남았으니까 끝나고 나랑 하루 종일 자 버리자. 네 마감도 그쯤이지? 응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그래, 보고싶다. 조금만 더 힘내. 전화기 너머로 Y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게 언제였지.

“잠든 줄 알았어요. 수면실에서 너무 좋은 표정으로 누워 있어서. 일주일을 거의 철야했으니까. 그렇게 잠이 모자랐는데 계속 위에서는 일정 독촉을 해대니까 버틸 수가 없었을 거예요.”

Y의 회사 직원이 말했다. 아니, Y는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 Y는 대학원 한 학기를 남기고 있었다. 학위를 받든 받지 못하든 이번에는 꼭 원하는 종류의 회사에 취업할 거라고 그랬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K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저 벽 너머에서 Y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다시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Y가 좋아하는 걸 만들 것이다. Y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K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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