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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만코마는 별들 중에

2019.09.30 23:5909.30

만코마는 별들 중에

정대영

0.

우주에서는 무엇보다 절약이다. 간신히 동사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유지 중인 싸늘한 실내 온도와 간신히 결핍을 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흐르는 실내 산소 농도 탓에 몽롱하게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으며, 중력 생성을 멈추고 완전히 무중력 상태인 조종석 위에 몸을 둥글게 말아 둥둥 뜬 채로, 만코마는은 조종간 오른편에 위치한 보조 모니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전력 모드로 진입한 보조 모니터 위에는 단조로운 하얀 폰트의 타임 카운터가 쉬지 않고 0을 향해 흘러가는 중이었다. 앞으로 7초, 6초, 5초, 4초, 3초, 2초, 1초, 그리고 하얀 폰트의 타임 카운트는 0이 되어 멈추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만코마는은 살짝 눈을 감았다. 이제 아우터 핸즈가 주최하는 관계자 전용 특수플래닛 크랙 경매의 입찰 기한이 끝나고, 그 결과가 이종 물질 통신으로 이쪽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나름 빈틈없는 준비를 한 경매 입찰이었다. 개인 용역 사업자로서 거대 플래닛 크랙 업체 아우터 핸즈의 운송 하청을 몇 번이고 우수한 실적으로 마무리 짓고, 개인 사업자로서는 가장 높은 협력 관계자 B 등급을 획득한 뒤, 아우터 핸즈의 협력 관계자 특수 경매 입찰권을, 그것도 우선 입찰권을 사용해서 참가한 행성 입찰이었다.

거기다 가장 인기 있는 플래닛 크랙 카테고리가 아닌 가장 인기 없는 회수 카테고리를 택해서 3개의 행성에 분산 입찰했으니, 아무리 운이 좋지 않더라도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을 터였다. 아니, 건져야만 했다. 다시 한 번 삶의 질을 한 단계 올릴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 티이익.

눈을 감고 있으니 모니터의 화면이 전력을 받아 밝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요 105년 사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기를! 속으로 그렇게 빈 만코마는은 숨을 훅 들이 마시며 살짝 눈을 떴다.

[아우터 핸즈 978-10732년 제 7회 특수 경매 입찰 결과 알림]

사업자명: 아우터 핸즈

사업자 등록 번호: 731R-6E661B33IRT979H

입찰자명: 만코마는

입찰자 관계 정보: B등급 아우터 핸즈 운송 부문 외주 우선 계약 고려 대상자

입찰 번호: OHNFEM-11892212, 유찰, 상세 정보는 파일 참조

입찰 번호: OHNFEM-12281819, 낙찰, 상세 정보는 파일 참조

입찰 번호: OHNFEM-12290013, 낙찰, 상세 정보는 파일 참조

이 데이터는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으로 978-10732년 289일 40시 31분경에 발송되었습니다.

아우터 핸즈 입찰 사업본부

모니터에 떠오른 알림에는 낙찰이 2건, 유찰이 1건이었다. 만코마는은 마른 입맛을 다시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쭉 뻗으며, 왼쪽 팔에 차고 있는 손목 패드를 두드려 산소 농도와 조종석 내부 온도를 외우주 통합 우주국의 건강 유지 권고치로 되돌렸다. 조종석 벽 안쪽에서 진동음이 울리더니 곧 뜨끈한 바람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닷새만에 느끼는 따스한 실내 공기— 숨을 길게 들이마신 만코마는은 두 팔을 뻗어 조종석의 어깨 시트를 짚고는 몸을 슬쩍 천정을 향해 밀어 올렸다. 천정에 붙박이 형태로 설치된 작은 보조 냉동고까지 날아오른 만코마는은 능숙하게 냉동고의 문을 열고 낙찰 기념으로 준비해둔 음식과 물을 꺼내어 한 손으로 품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벽에서 천정으로 이어지는 작은 손잡이를 따라 훑으며 흘러내리듯 벽을 타고 복원기가 있는 쪽으로 내려섰다.

조종석 왼편에 역시 붙박이로 설치해둔 복원기의 문을 열고 음식 상자와 물통을 넣고, 복원 버튼을 누른 만코마는은 작은 한숨과 함께 오른 손을 들어 왼팔의 손목 패드를 두드렸다.

“쯧.”

유찰 기록을 바라본 만코마는은 마른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하네, 진짜.”

아우터 핸즈는 무려 행성계 단위를 다루는 초거대 플래닛 크랙 회사다. 외우주 통합 관리국에서 행성계 단위로 채굴권을 사들인 뒤, 최소 지름 5만km 이상의 행성을 부숴서 채굴하고, 남는 행성은 계약 채굴 용역 사업체들에게 팔아서 이문을 챙긴다. 그리고 용역 사업체들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버려지는 지름 1만km 이하의 행성들은, 만코마는 같은 개인 용역 사업자들에게 팔아서 이문을 챙긴다.

그쯤 되면 개인 용역 사업자들의 손에 도달하는 행성 매물은 채산성이 지극히 떨어지는 것 들 뿐이다. 아예 부셔서 갈아 버린 뒤 채로 걸러도 입찰액에 상당하는 수익이 있을까 말까 알 수도 없는 행성이, 내정 가격 미달로 유찰이라니— 도대체 얼마에 팔려고 했던 걸까?

입찰 번호: OHNFEM-12281819, 낙찰, 상세 정보는 파일 참조

하지만, 그래도 속이 쓰리지는 않았다. 사실 만코마는이 가장 절실하게 노렸던 행성은 무사히 낙찰 받았으니까. 만코마는은 낙찰 받은 두 번째 항목의 입찰 번호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OHNFEM-12281819, 행성 번호는 FEM-3319, 이번 아우터 핸즈의 행성계 크랙 사업에 참여하고 있을 때, 광석을 나르며 틈틈이 스캔 해 두었던 행성 중 하나다. 단순 스캔만으로도 굉장히 오래전 인류가 살았던 도시의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었던, 지름 1만1천km정도의 작은 행성이었다.

[OHNFEM-12281819]

낙찰자 정보: 만코마는, 개인사업자, B등급 아우터 핸즈 우선 계약 고려 대상자.

상품 정보: FEM-3319, 상세 정보는 아우터 핸즈 데이터 베이스에서 구입 바람.

낙찰일자: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10732년 289일.

낙찰형태: 행성을 분쇄하지 않는 형태의 채굴 계약

낙찰가: 331만 플래티넘(입금 확인 완료)

채굴 기간: 낙찰 일자로부터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으로 1년간 독점 채굴

복원기가 완료 알림을 울린다. 만코마는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복원기를 열어 음식 박스와 물통을 들고서 한 팔로 벽을 짚고, 조종석을 향해 몸을 밀어냈다. 차분하게 조종석으로 날아들어 몸을 비틀어 가볍게 자리에 앉은 뒤, 왼쪽 팔걸이의 홀더에 음식 상자와 물통을 고정시키고, 조종간의 모니터를 눌러 중력 메뉴를 불러온다.

스캔에 따르면 FEM-3319의 중력값은 3.98이었다. 만코마는은 중력 메뉴의 중력값을 3.98에 맞추고는 중력 생성 기능을 실행시켰다. 곧 우주선 선체 전채에 커다란 소리가 울리더니, 만코마는의 엉덩이가 꾹 조종석 위로 내려 앉았다.

“음….”

대부분의 시간을 인체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최저 중력값 2.42의 인공 중력 속에서 사는 만코마는에게 있어서는 조금 무거운 느낌이 드는 중력값이었다.

“그래도 뭐, 이정도면 양호하지.”

두꺼운 활동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활동복 구동에 들어가는 연료 값을 아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만코마는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홀더에 꼽아 둔 물통을 집어 들었다. 진짜 물과 98.7% 동일한 재구성 음료— 문득 물통 위에 붙어있는 문구를 읽은 만코마는은 잠시 망설이다 물통의 입구를 열고 입에 물었다. 시원한 물이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98.7%- 외우주 통합 관리국이 정한 최저한의 재구성 비율이다. 그 진짜 물이라는 기준은 만코마는이 속한 외우주 67RD에서 아주 멀리,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특정할 수 없는 지구라는 행성의 물이라고 했다. 물 이외에도 거의 모든 기준이 그랬다.

음식 상자에도 진짜 프라임 소고기 스테이크와 98.7% 동일한 재구성 프라임 소고기 스테이크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로는 지구에 사는 소고기라는 생명체를 죽여서 그 살점을 구운 음식이라고 하지만, 외우주에서는 단백질과 기타 영양소의 구성 성분을 조합하여 만들어낼 뿐이다.

어차피 98.7%면 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수십 만년도 전에 진짜 소고기가 큰 돈이 되리라는 생각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지구로 가서 소고기며 돼지고기며 하는 동물을 외우주로 데려왔던 사람이 있었는데, 가지고 오는 수 만년 사이에 재구성 기술이 등장하면서 망해버리는 바람에 데려왔던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어느 행성에 방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참, 나 좀 봐.”

물통의 뚜껑을 닫고 내려놓은 만코마는은 입에 머금었던 진짜 물과 98.7% 똑 같은 재구성 물을 삼키고는 손목 패드로 시선을 옮겼다.

아우터 핸즈에서 판매한다는 행성 FEM-3319의 정보는 아마도 추정되는 행성 자원의 종류와 양, 그리고 스캔 한 번만 하면 알 수 있는 기초 정보들이 전부일 것이 뻔했다.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살 필요는 없다. 우주에서 절약은 절대적인 가치다. 만코마는은 외주 작업 중에 틈틈이 스캔하고, 또 광전자 정보망에서 따로 끌어 모은 FEM-3319의 데이터를 손목 패드의 화면으로 불러냈다.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역사 데이터 베이스 유지 기한을 넘긴 탓에 최소한의 정보만 남아있는 FEM-3319의 역사는 손목 패드에서 단 두 번만 스크롤하면 끝이 보일 정도로 간단했다.

약 7천 2백년 전에 자신들을 Ocus814 행성계에서 출발한 제 517차 이민자이라 칭하는 약 5만명의 사람들이 외우주 67RD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은 이민자들의 요청에 따라 긴급 이민 프로토콜을 발동하였고, 행성인으로 살고 싶다는 이민자들과 협의를 통하여 거주 적합 행성으로 준비해 두었던 FEM-3319를 제공했다.

허나 새로운 행성을 받은 이주민들은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이 요구하는 자급자족 프로토콜을 불성실하게 이행하는 태도를 보였고, 결국 100년 후에 통합 관리국의 지원이 끊기자 FEM-3319의 가용 자원 중 47% 정도를 허락도 없이 채굴해 챙기고서는 다른 외우주를 향해 떠나 버렸다. 그 중에서 외우주 67RD에 남기로 결정한 2천 3백명은 이미 개척된 행성에 분산 수용되었고 이후, FEM-3319는 완전 무인 행성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가, 7천여년이 지난 후에 아우터 핸즈의 행성계 크랙 사업 대상으로 지정되었고, 만코마는에게 팔리게 되었다.

자급자족 프로토콜을 불성실하게 이행하는 태도라고 하면, 보통은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도움에 의지하고 자립할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FEM-3319에 정착했던 이민자들은 그 반대였다. 가급적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도움이나 보급을 받지 않는 대신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고, 이런 폐쇄적인 태도는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이념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빈번한 마찰을 빚다가 결국 이민자들이 다른 외우주의 인류 정부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만코마는에게 바로 이 기록이 다른 어떤 정보보다도 중요했다. 지금으로부터 2백년전 즈음, 내우주 67RD 행성계에서 갑작스레 유물 수집이 유행하면서 먼 과거에 살던 사람들이 남긴 물건들이 비싼 값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초신성의 감마선 광풍처럼 몰아치던 유물 수집 유행은 비록 50여년만에 식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 열기 뒤에는 적지 않은 마니아들이 남았고, 덕분에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면 비싼 가격에 거래할 수 있었다. 만코마는도 유행이 몰아치던 시기에 살짝 큰 돈을 벌었고, 낡은 우주선을 팔아 버리고 나름 괜찮은 다목적 화물선도 구입하고, 좋은 장비들을 손에 넣었다.

그런 고가에 팔아 치울 수 있는 유물을 찾는 수많은 경쟁자들이 무려 다른 외우주에서 찾아온 이민자의 기록이 남아 있는 FEM-3319를 모를 리는 없겠지만, 겨우 100년 남짓한 거주 기록에 별 것 없으리라는 추측이 있었는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유물을 찾기 위해 입찰을 하거나 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만코마는에게는 나름의 자신이 있었다. 아직 가설에 불과하지만, FEM-3319야 말로 마니아들이 원하는 희귀한 유물들이 존재할 확률이 높았다. 혹시 없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지금의 유물 수집 시장은 마니아와 초보자로 나뉘는 극단적인 시장이니, 비싼 것이 없더라도 작은 것부터 이것저것 양껏 사들이는 초보자들에게 이것저것 팔아 치우면 적자는 나지 않을 것이다.

“좋았어.”

예감은 차고 넘칠 정도로 좋다. 만코마는은 네이게이터 패널을 조작하여 FEM-3319로 목적지를 맞춘 뒤, 자동 비행을 설정했다. 곧 우주선 선체가 살짝 떨리더니 낮은 점화음과 함께 비행 시작을 알리는 화면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여기서 FEM-3319까지는 최고 속도로 73시간 정도— 그동안 적당히 중력 값 3.98에 몸을 맞춰 둬야 한다.

일단 잘 먹고, 몸을 다지자. 만코마는은 그런 생각과 함께 트레이에 고정해둔 음식 박스를 손에 들었다. 박스 포장을 뜯고, 진짜 소고기 프라임 스테이크와 98.7% 동일한 재구성 프라임 스테이크를 같이 들어있는 세라믹 나이프로 잘라 한 점 입에 넣는다. 100%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 입안 가득히 퍼진다.

1.

중력 값 3.98이 짓누르는 무게 속에 몸을 움직이는데 무리가 없고, 자려고 누워도 가슴이 눌려 숨을 쉬기 힘들다는 느낌이 없어질 무렵은, FEM-3319를 향해 출발한 지 이미 105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고, 다목적 중대형 화물선 ‘밀레나 2호’가 FEM-3319에 도착해 궤도를 두 바퀴 반 돈 시점이었다.

평소보다 거의 2배 정도 무거운 중력에 적응하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서두르다 봉변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클론 재생성이라도 하게 된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 낭비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이 제시하는 ‘중력값 적응 판단 체조’를 마친 만코마는은 이제 그리 가쁘지 않은 숨을 내쉬며 조종석에 앉아 물통 속의 재구성 물을 한껏 들이 마셨다. 달아오른 몸이 서늘하게 가라 앉길 기다린 만코마는은 여유 있는 손놀림으로 조종간 너머 메인 모니터 위로 FEM-3319의 근거리 스캔 정보를 띄웠다.

추산하기를 최대 인구 5만명이 살았다던 FEM-3319지만, 7천 2백여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체의 징후는 당연하지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의 흔적이란 행성 위도 40, 경도 70 부근을 기준으로 커다란 도시의 흔적과 그 주변에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이민자 현지 적응 지침에 따라 작은 도시 몇 개를 짓는 척하다가 그만 둔 흔적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밖에는 산소도 충분하고, C등급 이상의 위험도를 지닌 육식 동물도 거의 없을 만큼 안전한 자연 환경에, 지각도 안정을 찾아 변동 확률도 한없이 0에 가까운 행성이었다.

만코마는은 착륙 위치를 커다란 도시의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커다란 광장 같은 곳으로 설정하고는, 잠시 조종간을 매만지며 망설이다 결국 오토 파일럿 기능을 작동시켰다. 직접 조종간을 잡아 본 적이 너무 오래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동 착륙 비행에는 저항감이 남아 있었다.

유물 수집 광풍이 불던 시절, 뜻밖의 대박으로 얻은 1억 2천만 플레티나를 쏟아 부어 손에 넣은 이 B+급 중형 선박 ‘밀레나 2호’는 외우주 67RD 최신 기술 격차 수준이 겨우 5백여년도 되지 않는 최신 기술로 건조된 다목적 채굴선이었다.

어머니에게 물려 받았던, 무려 5천7백년 전에 건조되었던 ‘밀레나 1호기’와는 크기부터 남달랐고, 탑재된 기술 수준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예를 들면, ‘밀레나 1호기’의 오토 파일럿 기능은 실행시켜도 항상 조종석에 앉아 조종간을 잡고 수동으로 보조를 해야 했지만, ‘밀레나 2호기’는 반대로 수동으로 조종간을 잡아도 오토 파일럿의 보조 기능이 쉬지 않고 운전을 도와줄 정도였다.

게다가 외우주 67RD 최신 기술 격차가 겨우 5백여년 정도라, 제조사가 아직도 경영 중이고, 덕분에 부품을 구하기도, 제작 의뢰하기도 쉽고, 보험료도 정말 저렴했다. 1억 2천만 플레티나를 입금하던 날은 온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벌벌 떨리는 기분이었지만, 정말로 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이착륙을 시도할 때마다 들었다.

- 오토 파일럿 착륙 기능 시동

- 목표지 FEM-3319 40-70

- 착륙 완료까지 앞으로 17분.

낮은 진동과 함께 다목적 화물선의 엔진이 울리고, 곧 선내 내부 중력과는 다른 중력이 체굴선 자체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만코마는은 손에 쥐고 있던 물통의 뚜겅을 닫고 홀더에 내려놓은 다음, 조종석 팔걸이의 버튼을 눌러 착륙용 벨트를 불러내 둘렀다.

- 대기권 진입 개시.

음성 알림과 함께 만코마는은 꾹 두 눈을 감았다. 대기권에 돌입하는 순간에도 ‘밀레나 2호’는 조용했다. 압축열로 표면이 달아오르는 소리도 나지 않고, 흐르는 대기를 가르며 나아가는 진동도 없다. 그저 조종간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내는 작은 소리만이 날 뿐이다. 중력 값 3.98이나 되는 행성의 대기권에 진입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편안함에 만코마는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순간, 무언가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밀레나 2호’가 허공으로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 대류권 진입.

곧바로 화물선 기체가 소리를 울리며 흔들렸지만, 난기류에 휘말리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착륙 비행 중에는 늘 눈을 감고 있느라 직접 본적은 한 번도 없지만, ‘밀레나 2호’가 저항력을 늘리기 위해 돌기 같은 날개를 여러 개 펼치고, 공기 흐름을 역이용하는 수십 개 터빈 뚜껑을 여는 진동이었다. 그렇게 소리와 진동이 멎자 곧 선내 인공 중력을 발생시키는데 쓰이던 제 153세대형 이온 엔진의 출력을 조금씩 양력 생성으로 전환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터운 벽을 지닌 선체 내부에 앉아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행성 FEM-3919의 중력이 점차 약하게 줄어들고, 마치 우주 정거장의 주차용 유도 중력에 잡혀 끌려가는 듯한, 그런 은근한 느낌으로 변한다.

- 고도 8km.

- 선체 상태 안정화, 기내 활동 가능.

- 2분 30초 후 지면 도달 예정

기내 활동이 가능하다는 알림을 들었지만, 만코마는은 눈을 감은 채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밀레나 2호’의 성능에 의심을 품지는 않지만— 어머니와 같이 살던 시절에, ‘밀레나 1호’가 착륙 중에 대류권의 대형 난기류에 휘말리면서 겪었던 공포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밀레나 2호’를 구입하기 전에는 매번 반쯤 울상이 되어 오토 파일럿 기능이 있으나 마나 한 ‘밀레나 1호’를 수동으로 조종하며 착륙을 해야 했다.

덕분에 이제는 설사 잠이 들더라도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체굴선에 타고 있어도, 여전히 심장이 뛰고 식은 땀이 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한 번은 이 증상을 고쳐 보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긴 하지만,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에서 이착륙 공포증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뻔한 증상에 대하여 제시하는 해결법은, 그저 단기간에 이착륙을 열심히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듯 싶었다.

- 지면 도달 12초 전.

그리고 완만하게 내려 가던 기체가 살짝 위로 뜨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곧 둔중한 소리와 함께 멎는다.

- 지면 도달

- 착륙 프로세스 완료

- 이후 이온 에너지를 이륙용 축전지 충전으로 전환합니다.

- 현지 시간으로 12.7시간 충전 후 통상 이륙 가능, 사흘 후 긴급 이륙이 가능합니다.

착륙 안내 음성을 들은 만코마는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만코마는은 조종석 팔걸이의 버튼을 눌러 착륙용 벨트를 풀고는, 일단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뛰는 심장이 잦아 들기를 기다린다. 그래도 ‘밀레나 2호’를 구입한 뒤로는 이착륙 뒤에 자신을 추스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밀레나 1호’ 시절에는 이착륙 동안 얻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땀에 흠뻑 젖어 떨리는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조종석 옆의 작은 간이 침대로 기어갈 힘도 없어 그 조그마한 조정석에 꼬박 한 나절을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할 정도였다.

지금은 그래도 스트레스도 적고, 식은 땀이 살짝 머리를 적실 뿐이다. 숨을 고른 만코마는은 홀더에 놓아둔 물통을 들고 남아 있는 재구성 물을 한 번에 쭉 들이 마신 뒤, 조종석에서 일어섰다.

“좋아.”

자기 자신을 응원하듯이 중얼거리면서,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음을 옮긴다. 조종석 바로 뒤 편 바닥에 위치한 리프트 위에 서서 패달 버튼을 연달아 눌러 환경 적응실을 목적지로 설정하자, 작은 소음과 함께 리프트가 가라 앉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기체 밖으로 나서는 것도 오랜만이다— 만코마는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리프트에 서서 흘러가는 어둔 통로 벽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체 밖으로 나가본 것이 3년 전이고, 우주 유영이 아니라 행성 표면에 두 발로 내려서는 것은 160년 정도 만이었다. 예전에는 행성 표면 채굴을 주업으로 삼았던 영세한 채굴업자인 어머니를 따라 30년에 두 번은 꼭 행성에 내려 시간을 보내고는 했었다.

- 환경 적응실 도착.

손목 패드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고, 어둔 벽면이 밀려 올라가면서 밝은 환경 적응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외부로 향하는 탑승구와 바로 연결된 공간— 리프트가 바닥에 고정되길 기다린 만코마는은 적응실의 한 켠에 작게 위치한 창문으로 다가섰다.

이주민들이 버리고 간 지 7천여년이나 지난 거대 도시의 풍경은, 다행히도 도시 모양의 숲이 아니라 인공적인 도시의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만코마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주민들이 떠나면서 도시를 파괴하거나 했다는 기록은 없었고,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도 따로 철거 처리를 실행한 기록도 없었다. 도시를 유지 보수하는 관리 드론은 7천년전에도 있었으니 도시 에너지원만 충분하다면— 최소한의 관리는 되어 있으리라는 만코마는의 예상은 다행히 맞아 들은 셈이었다.

“다행이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만코마는은 곧바로 작은 창 아래 놓인 패널에 손을 올렸다. 일단은 드론을 풀어 정밀 스캔과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다. 스캔 범위를 도시로 한정하고, 인간이 아닌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존재의 즉각적 배제 설정을 마친 뒤 배치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화물선의 수납 모듈에서 드론들이 날아올라 도시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이 작은 창 너머로 보였다. 곧바로 패널을 조작해 환경 적응 기능을 실행시킨 만코마는은 곧바로 환경 적응실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 현재 신체 상태를 스캔 후 실시간 체크를 실행합니다.

- 1단계 환경 적응이 완료될 때까지 적응실 중앙에서 1m 이상 벗어나지 말아주십시오.

곧 벽면에 위치한 스캐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만코마는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 외부 공기 스캔 결과, 사람에게 적합한 대기로 판정되었습니다.

- 지금부터 외부 공기를 적응실로 주입합니다.

- 의료국의 추천 방식을 따라 3분 단위로 농도를 5퍼센트씩 높입니다.

- 몸에 이상이 느껴질 경우, 벽면에 위치한 응급 상자에서 적합한 앰플을 찾아 주사하십시오.

- 몸에 이상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안내 음성이 나오면 지시에 따라 적합한 앰플을 주사하십시오.

- 외부 공기 주입까지 앞으로 5초, 4초, 3초…

공기가 순환하는 소리가 들리자, 만코마는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착륙과 마찬가지로 ‘밀레나 2호’의 환경 적응 시설도 만코마는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밀레나 1호’ 시절에는 스캔 정보만을 믿고 지면으로 나선 뒤에 혹시 모를 신체적 이변이 있을까 한참을 우주선 곁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무거운 응급 상자를 늘 지니고 다녀야 했다.

곧 조금이지만, 눅눅하고 소독약 냄새가 나는 기체 내부 공기 속으로 시원한 자연의 공기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98.7%도 아니고, 재사용하는 것도 아닌, 100%의 행성 공기다. 아무리 들이 마셔도 질리지 않는 그 공기를, 만코마는은 쉬지 않고 들이 마시고, 내쉬었다.

2.

환경 적응은, 가슴을 부둥켜 쥐고 응급 상자로 달려가는 일 없이 무사히 끝났다. 만코마는은 적응실의 AI가 조합해주는 임시 백신 앰플을 왼팔에 주사하고, 마지막으로 파상풍 앰플을 탐사 가방에 챙겨 넣고 출입구로 향했다.

FEM-3319는 외우주 통합 관리국이 선정한 거주 적합 행성이다. 별도의 활동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안전한 행성— 출입문 앞에 선 만코마는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하선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커다란 출입문이 앞으로 쓰러지고, 마침내 FEM-3319의 거대 도시가 만코마는의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허.”

커다랗고 고요한 도시를 바라본 만코마는은 짧은 감탄사를 뱉으며 천천히 화물선에서 걸어 내려와 도시의 광장으로 내려섰다. 7천년전의 도시 관리 드론들이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도시의 도로와 건물들은 그래도 식물에 엉망으로 삼켜지거나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7천년 전 당시 드론은 정말로 단순한 구조였으니 오히려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던 덕인지도 모른다. 만코마는은 자신만의 논리를 이리저리 떠올리며, 거대 도시의 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밀레나 2호’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호위 드론 2기가 만코마는의 머리 위로 따라붙었다.

광장에서 벗어나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대로로 접어든 만코마는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목 패드를 들여다보았다. 정찰을 나간 드론들이 스캔한 유물 목록들이 벌써 하나 둘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대박이라고 할 만한 품목이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 도시를 겨우 열 대의 수송 드론으로 스캔하려면 나흘은 걸리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에 거대 도시 주변에 건축되다 멈춘 작은 도시들까지 생각하면, 대박이 아니어도 중박 정도는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작은 도시들까지 감안하면 스캔 완료까지는 대략 엿새 정도가 걸릴 것이다.

만코마는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동위 원소 측정 안경을 꺼내어 썼다. 만코마는이 소유한 물건 중에 나름 가장 최신예 기술로 제작된 물건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의 동위 원소 현황을 계산하는 특수 카메라를 달고 있는 동위 원소 측정 안경은, 눈앞에 놓인 반감기와 풍화 등을 거치며 닳아버려 원형을 알 수 없는 물건이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는 밋밋하게 주저 앉은 풍경이 과거에는 얼마나 절경이었는지, 그런 과거를 비추어 준다는 컨셉의 물건이었다.

나름 흥미로운 컨셉의 물건이었지만, 이미 없어진 물상의 일부분에 기대어 원래 모습을 추정하는 기술은 아무리 고도의 알고리즘을 사용하더라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발매한지 30여년도 지나지 않아 사장된 제품이었다. 그러나 이 비싸고 형편없는 성능의 안경은 만코마는에게 딱 필요한 만큼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물상의 원래 모습을 추정하기에는 형편없는 물건이라도 거의 다 바래거나 씻겨 나간 안료 그림이나 문자를 찾아내는데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그 지구라는 시대에서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처음 그대로의 용도로 남아 있는 지구의 유산은 안료가 거의 유일했다. 아무리 디스플레이 패널이 발달하고, 홀로그램 기술이 발달해도, 안료를 이용해 무언가를 그리거나 표면 위에 표식을 남기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예술이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 영역부터 디스플레이 패널이나 홀로그램의 사용이 어려운 작업 구역에 남기는 표시까지— 만코마는 역시 수없이 사용했고, 사용하고 있었다.

이 동위 원소 측정 안경은 그런 안료를 추적하는데 딱 좋은 도구였다. 반감기 붕괴가 심하다면 적어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시각적 복원이 가능했고, 조금이라도 원소가 남아 있다면 색까지 시각적 복원이 가능했다.

“어디 보자.”

동위 원소 측정 안경을 쓴 채로 거리의 건물들을 둘러보던 만코마는의 시야로, 이제는 색이 바랜 건물과 도로의 색감이 비교적 진하게 복원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부서지거나 무너진 곳, 그리고 덩굴 식물이나 키 큰 잡초에 가려진 부분은 엉망으로 표시되기는 했지만, 만코마는이 찾고자 하는 것은 예전 그대로의 도시 모습이 아니었다.

-육백칠십팔-삼천육백십이년 십구일 이십일시까지 퇴거 예정

-육백칠십팔-삼천육백십이년 이십일 한시 퇴거 완료 확인

한참을 걷던 만코마는은 마침내 빌딩형 주거지의 벽면에 숨어있던 문자를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민자들이 FEM-3319를 떠나갈 때, 구획이나 퇴거 순서를 계획하면서 패널이나 홀로그램 대신 물감을 써서 건물에 커다랗게 남긴 글귀다. 일단 시작이 좋다, 정말 좋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만코마는은 서둘러 벽면에 글귀가 써진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라도, 특히 오래전 사람들일수록 무언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성향이 강했다. 따라서 이곳에 살고 있던 이민자들 역시 무언가 남겼을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누구가 여기에 있었다— 같은 감상도 뭣도 아닌 글귀라도 벽에 휘갈기고 떠났을 확률이 높다. 만코마는이 정말로 찾는 글귀 역시 그런 흔적들 사이에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건물 입구로 들어선 만코마는은 행성 건물과 같이 지면에 의지하는 건물 특유의 건축 양식— 계단을 찾아 걸어 오르며 벽을 훑었다. 굳이 샅샅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수많은 글귀가 안경 속으로 떠올랐다. 역시나 대부분은 누가 언제부터 어디까지 살았다는, 알리고 싶은 대상도 없고 누가 읽을 확률도 없는 그런 글귀들이었다.

“후.”

3.89의 높은 중력값과 싸우며, 익숙하지 않은 계단을 힘들게 끝까지 오른 만코마는은 마침내 건물의 옥상에 도달했다. 망가진 문을 호위 드론의 레이저 커터로 잘라내고, 옥상 정원으로 걸어 나온 만코마는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주무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행성 지면을 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글귀를 적는 곳은 대부분은 이런 곳이었다.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굳이 적을 필요도 없고 전할 상대도 없는 정보를 한아름 남기며 뿌듯함을 느끼거나 한다.

만코마는의 어머니— 밀레나 역시 만코마는을 데리고 굳이 이런 곳에서 불을 피우고 밤을 보내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행성 지면 위에 사는 사람들처럼 여기에 밀레나가 왔다 간다는 글귀를 적거나 했다.

“좋아, 그러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친 만코마는은 숨을 한껏 들이마신 뒤, 천천히 옥상을 훑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안전한 우주 여행을 기원하는 글귀, 고인들을 추모하는 글귀, 우주로 뛰어드는 것을 불안해하는 글귀,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한 독백 같은 글귀, 수많은 글귀가 옥상 바닥과 난간에 수도 없이 적혀 있었다.

만코마는은 입을 꾹 다문채로 천천히 그리고 끈기 있게 널려 있는 글귀들을 읽어 나갔다. 난간 끝에서 난간 끝까지, 바닥 이쪽에서 저쪽까지 오로지 찾는 단어 하나를 바라며 혹시나 지나칠까 주의를 기울여 읽었지만, 옥상의 마지막 구석까지 살펴도 찾던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맥이 풀린 만코마는은 옥상 바닥을 향해 한참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회수 작업의 성공을 보장하는 단어 하나, FEM-3319라면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실망감에 젖은 만코마는은 힘든 허리와 다리를 달래기 위해 난간에 엎드리듯이 기대어 섰다. 어느새 살짝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 그리고 옅은 붉은 색이 되기 시작한 햇살이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건물들 위로 드리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만코마는은 문득 건너 편 건물에 시선이 멎었다.

만코마는을 향해 높은 옆구리를 드러낸 건물의 외벽에는 한참을 찾던 글귀가 덩굴 줄기들도 가리지 못할 만큼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 우리, 다시 지구로!

간결하고 강렬한 글귀에 이끌려 만코마는은 자신도 모르게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성공적인 이민을 도우려는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원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고, 행성 개척 프로토콜을 따르는 둥 마는 둥 하다 고작 100년만에 슬쩍 챙길 것만 챙겨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만코마는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바로 지구로 향하는 지구주의자들이었다.

지구는, 이제는 지구라고 기록된 행성이 너무 많아서 어떤 지구가 정말 지구인지도 알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혹자는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하는, 언젠가 어디에 있기는 있었다는 인류의 고향 행성이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라는 동물이 땅 위를 걷고, 닭고기라는 알을 낳는 조류가 하늘을 날고, 물이 넉넉해서 술과 콜라를 빚어 마실 수 있는 풍족한 자연 환경을 지니고, 사람들은 유전 조작을 통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크리스천이라는 종족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되살아 나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부디스트라는 종족으로 나뉘어 살았다던가.

그렇게 풍족하고 영원한 고향을 바라며, 그 많고 많은 지구들 중 자신들의 이념과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진짜 지구를 하나 정해 그 행성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바로 지구주의자들이다. 쉼없이 떠나고 떠나서 이제 외우주 67RD에 지구주의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먼 옛날에는 수 십만 단위의 지구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구라고 믿는 행성을 향해 떠나는 일이 꽤 있었다. 만코마는의 어머니, 밀레나 역시 그런 지구주의자 부모의 아래에서 태어나 살다가, 귀향길에 오르지 않고 외우주에 남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지구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구가 정말로 존재하고, 마침내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그 믿음의 근거가 되어줄 수 있는 물증이다. 이를테면, 아주 오래전 지구의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물들도 그 중 하나다.

그런 유물 외에도, 지구주의자들은 지구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약속과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화폐 개념을 굳이 물리적인 종이와 금속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행위에 집착하여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니, 지구주의자들이 살던 행성이라면 귀한 유물을 구할 확률이 높다. 유물을 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그들만의 화폐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발굴이다. 유물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지구주의자들이 남기고 떠난 물리적인 화폐로 서로 거래하는 놀이도 환율까지 적용해 가며 환전까지 할 만큼 성행한다고 하니, 나름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꼭 화폐가 아니더라도, 그림 작품이나, 음악 작품을 구할 수 있다면 적잖은 돈이 된다.

“좋아, 좋아.”

맞은 편 건물의 벽면에 커다랗게 쓰여진, 지구주의자의 글귀를 바라보면서 만코마는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발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물론 단지 지구주의자들의 글귀를 발견했다는 것만으로 그런 확신이 든 것은 아니다. 스캔과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이 행성에서 살았던 지구주의자들이 어떤 집단이었는지 나름 가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구주의자들이 그 집단 마다 다른 지구를 가지는 것처럼, 지구주의자들은 집단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생활 양식과 방법론을 가지곤 했다. 물리 화폐와 예술 이외에 지구주의자들의 가장 확실한 공통점은 번식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번식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느리고 불확실한 위험이 많은 직접 인심을 통한 번식을 고집하는 것이 지구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생활 양식 중 하나였다.

반대로 집단마다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은 역시 크리스천 종족과 부디스트 종족에 대한 믿음이었다. 크리스천 종족의 이야기처럼 단일 개체의 생명을 영원하게 지속시키는 기술은 인간의 생체 구조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또 부디스트 종족의 이야기처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재생성 되는 기술 역시 시도는 되고 있어도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클론 재생성 기술이 보편화 된 것이 겨우 10만년 전인데, 얼마나 과거였는지 추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먼 과거의 지구에 그런 기술이 있을 수 없다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각 지구주의자 집단의 성향에 따라 두 종족의 이야기를 모두 믿는 집단부터, 어느 한쪽만을 믿는 집단, 그리고 두 종족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는 집단으로 나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크리스천과 부디스트 종족과 영생 기술은 실존하지만, 지구를 버리고 나온 인류는 이 엄청난 기술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지구로 돌아가야만 지구를 버린 죄를 씻게 되고, 지구로 도착한 자는 그 선조들까지 지구에서 부활하여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믿음이 주류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었지만, 지구주의자의 딸로 태어났던 만코마는의 어머니, 밀레나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지구 구원설을 정말로 믿으며 살았다고 했다.

아무튼, 그런 각 집단의 믿음에 따라서 집단의 크기나 우주를 여행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었다. 가장 유물을 기대할 수 없는 집단은, 바로 얼토당토않은 믿음을 고수하는 집단으로 냉동 수면조차 지구의 섭리를 외면하는 짓이기 때문에 지구에 귀환하여 은혜를 입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실시간으로 우주에서 생활을 영위하며 항해하는 1만명 이하의 소규모 지구주의자 집단이다. 대형 수송선 1~3척 단위로 이동하며, 머릿수가 적은 만큼 넉넉한 화물 공간을 활용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지니고 다녔다. 따라서 자취와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유물은 고사하고, 다녀간 곳에는 무너진 건물만이 남을 뿐이다.

반대로 큰 기대를 할 수 있는 집단은 어떤 믿음을 가졌든 대략 5~10만명 사이의 집단이었다. 머릿수가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량의 수면 포드를 사용하여 항해하는 경우가 많았고, 돈이 차고 넘치는 지구주의자들의 집단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형 수송선 5~8척에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해야 했다. 또 머릿수가 많은 만큼, 필요한 자원을 재충전하고 채비를 재정비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행성에 머무는 기간도 몇 백 년을 넘기는 경우가 흔했고, 화물 공간도 넉넉하지 못하기 일쑤라 남기고 가는 것도 많았다.

이 FEM-3319에 머물렀던 지구주의자들의 숫자는 5만명이라고 했다. 스캔에 따르면, 수송선들이 머물렀던 것 같은 착륙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많아야 5척에서 6척 정도의 대형 수송선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거기다 도착했을 때는 5만명이지만, 1백여년을 머물면서 인구가 늘었으니 6척의 수송선으로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정말 중요한 유물이나 큰 의미를 지니는 화물 외에는 전부 버리고 갔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어찌 되었든, 예상이 맞아 떨어져서 다행이다. 자세를 바로잡은 만코마는은 동위 원소 분석 안경을 벗고, 메고 온 캠프 배낭을 풀러 옥상 바닥에 내려놓았다. 만코마는이 아직 어릴 적, 어머니 밀레나는 안전한 행성에 도착하면 꼭 화물선 밖에서 직접 불을 피우고, 그 행성에서 사는 동물들을 잡아 그 고기를 요리해 먹고는 했다. 원소 구조상 안전하다고는 해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그런 요리를, 어머니 밀레나는 지구주의자 특유의 현지 조달 음식이라는 풍습이라고 했지만, 만코마는은 질색하고는 했다.

이제는 무얼 어떻게 먹던 만코마는의 마음대로다. 만코마는은 캠프 배낭에서 가구 큐브를 꺼내어 옥상 바닥 위에 가만히 내려 놓았다. 주먹 만한 가구 큐브는 만코마는이 발로 살짝 건드리자 마자 얇은 금속관의 다발로 흩어지고 부풀어 오르며 안락 의자의 모습을 갖췄다.

오랜만에 꺼내 보는 안락 의자가 별 이상 없음을 확인한 만코마는은 이어서 전파 난로와 작은 테이블 큐브를 꺼내고는 마지막으로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 기초 성분을 준수하는 발효주를 꺼내 들고 안락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음식은 어머니와 맞지 않았지만, 밤이 되어 차갑게 식은 신선한 행성 지면의 공기와 열에 아홉은 죽음이 전부인 우주가 거짓말처럼 아름답게만 보이는 밤하늘만큼은 어머니 밀레나와 만코마는, 둘 모두가 거리낌없이 좋아했다.

석양의 붉은 빛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공기는 식고 밤하늘은 아름다운 별들로 빛날 것이고, 어쩌면 플래닛 크랙으로 산산조각난 커다란 행성들의 잔해가 보일 수도 있다.

발효주의 뚜껑을 딴 만코마는은 고개를 돌려 건너편 건물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동위 원소 체크 안경을 벗고 바라보는 건너편 건물의 외벽에는 아무런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만코마는은 발효주가 든 음료통을 건너편 건물 외벽으로 향한 뒤 가볍게 들어 올리며 읊조렸다.

“지구로.”

아무튼 아무런 악감정도 필요 없는 사이가 아닌가. 그들이 무사히 믿는 지구에 도착했기를, 98.7%의 재구성이 아닌 100% 지구산 소고기와 돼지 고기를, 술과 콜라를 마음껏 즐겼기를, 어머니 밀레나에게 배운 대로 기원을 마친 만코마는은 음료통을 입에 물고 발효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속으로 시원하게 밀려 들어온 발효주가 곧 뜨끈한 기운이 되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오늘 너무 걷고, 계단도 너무 많이 올랐고, 쉬지 않고 이 넓은 옥상을 허리를 굽힌 채 구석구석 걸어 다녔다. 이러다 쓰러지겠네. 만코마는은 얼른 안락 의자에 반쯤 걸터앉은 몸을 완전히 의자 위로 끌여 올렸다. 그 짧은 사이에 온몸으로 퍼지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만코마는은 결국 발효주가 든 음료통을 그대로 옥상 바닥에 떨구고는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3.

기대했던 유물은 수색을 시작한 지 사흘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흘째 아침에 일어난 만코마는은 손목 패드로 스캔 정보를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안락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밤새 7번 드론이 발견한 것은 버려진 금고였다.

스캔 정보에 따르면, 도저히 금고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른 금속 소재에 그나마도 보안의 의미가 없는 윈시적인 다이얼 형식의 도어락으로 구성된 금고였고, 그 안쪽에는 지구주의자들 특유의 물리적 화폐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 금속 화폐들은 서로 들러붙었고, 지폐 대부분은 소실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수량만큼은 충분하게 남아 있었다.

이 정도 상태와 수량의 물리적 화폐 유물이라면, 그대로 내다 팔아도 내우주의 돈 많은 유물 마니아들이 사다가 직접 복원하기에 무리가 없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어설프게 복원을 시도 했다가 오히려 제값을 받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 가만히 팔기만해도—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적어도 1~2천만 플래티나의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98.7% 재구성 음식물을 양껏 사다 먹으며 10년을 버틸 수 있는 금액이다.

곧바로 드론에게 금고 회수 명령을 내린 만코마는은 안락 의자의 오른쪽 다리를 발로 두드려 큐브 형태로 되돌린 다음, 곧바로 난로와 테이블도 큐브로 되돌려 캠프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수색을 계속했지만,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지쳐 곯아 떨어졌었는데, 어쩐지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런 엄청난 수확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아마도 유물 수집 광풍이 불던 2백여년 전, 첫 대박을 건진 이후로 처음일지도 모른다.

들뜬 기분으로 캠프 배낭을 둘러멘 만코마는은 짧게 기지개를 켠 뒤, 곧바로 옥상 출입구로 향했다. 만코마는에게는 유물 회수 작업에 반드시 지키는 철칙이 있었다. 바로 드론의 스캔만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두 발로 찾아 다니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 것이다. 드론의 스캔 AI가 아무리 발달한다 한들 어디까지나 정해진 데이터 베이스에 의존하여 스캔 대상을 판별할 뿐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같은 나무라도 그냥 나무 조각과 나무로 만든 조각상에 대한 심미적인 구분은 불가능하다. 이번에 찾아낸 금고 역시 가공된 흔적이 있는 오래된 금속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가 되었을 뿐이지, 그것이 금고 구실도 못할 다이얼 방식의 도어락을 지니고 있다 거나,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금속 화폐라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니, 심미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더라도, 사람이 직접 다닌다면 혹시 모를 발견을 할 수 있는 확률은 분명히 존재했다. 엄청난 수입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쉬운 대로 챙길 수 있는 부수입 정도는 올릴 수 있다. 정말로 아쉬운 정도의 수입이라는 점이 슬프긴 하지만.

계단을 내려 직접 탐색 8번째 건물을 나선 만코마는은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직접 탐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대하지 않는 자세다. 발견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돈이 걸린 일에 그런 자세를 취하기란 쉽지 않지만, 지구주의자들의 화폐가 잔뜩 들어있는 금고를 건진 지금부터는 정말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탐색을 다닐 수 있다.

아무런 정보나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있을 것 같은 건물을 판단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되고, 힘든 고민 끝에 기껏 고른 건물을 뒤져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상하는 일 없이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이제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끌리는 대로 탐색을 해도 그만이다. 특이하게 생긴 건물 위주로 탐색해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난 뒤 얼마나 걸었을까— 주거 건물과 작은 공방 같은 건물이 교차하는 행렬이 뚝 끊기더니 넓은 공터와 함께 커다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기에는 좀 뜬금없다 싶은, 격납고나 항만 창고같은 커다란 건물이었다. 만코마는은 망설임없이 창고 같은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건물의 입구는 3~4미터 정도로 높았지만, 문은 그대로 사라지고 없었다. 만코마는은 조심스럽게 입구로 다가가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우주선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천정 아래, 통짜로 뚫린 넓은 건물 안은 잡동사니의 흔적들을 빼면 황량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창고로 쓰이다가, 지구주의자들이 떠날 때 모든 걸 가져간 모양이었다. 실망스럽기는 해도, 재빠르게 한 눈에 확인이 가능했으니, 시간 낭비가 없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 만코마는의 눈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음?”

광활한 창고의 안쪽에 마치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만코마는은 입구에 선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인간처럼 보이는 형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 그늘진 곳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사람의 형태가 똑똑히 보였다. 만약 사람의 시신이라면 저렇게 온전하게 사람 모습으로 굳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대체적으로 외모는 사람을 기본으로 하고, 감성과 이성 역시 사람에 근접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로봇이지만, 여러 사고가 터질 때마다 감성과 이성이 금지되거나 또 시간이 흘러 다시 탑재되거나 하는 역사를 반복하는 존재다.

지금 만코마는의 시대에는 감성과 이성을 철저히 배제한 안드로이드의 시대로, 그나마도 특수한 유희용을 제외하면 사람의 모습을 본 딴 안드로이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만코마는은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결국 안드로이드를 확인하기로 했다. 혹시나 희귀 모델이거나, 아니면 지구주의자들이 부족한 기술력을 끌어 모아 만든 오리지널 모델이라면, 적어도 물값이라도 벌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목 패드의 설정을 만져 호위 드론의 경계 모드를 최고 레벨로 끌어올린 만코마는은 숨을 길게 들이 마시고, 창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구주의자들의 안드로이드가 혹시라도 무기를 탑재하고, 대기 모드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걱정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정말로 원시적인 형태의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곧 사라져 버렸다.

머리 부분부터 사람을 흉내내는 일은 고사하고, 눈을 대신하는 렌즈를 위한 커다란 구멍이 뚫린 철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감출 계획도 없었는지 훤하게 드러난 각 관절 부분의 투박한 구조를 보았을 때, 아마도 짐을 나르거나 하는 간단한 하역 작업용 안드로이드 같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위험 요소는, 그래도 인간보다는 월등할 힘으로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경우 정도였지만, 7천여년이나 한 자리에 멈춰 있었다면 아마 움직이려는 순간 굳어 있던 관절이 무리한 움직임으로 다 부숴질 것이 뻔했고, 그나마도 만코마는을 호위하는 호위 드론이 더 빠르게 반응하여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었다.

“우와.”

그렇게 자신감을 찾고서 한달음에 안드로이드에게 다가선 만코마는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렀다. 정말로 원시적인 안드로이드였다. 아마도 외우주 67RD에서는 일부러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을 만큼 낡은 기술로 만든 안드로이드— 어쩌면 간단한 AI조차 없이 수동으로 조종하지 않았을까 싶은 외형이었다.

커다란 렌즈 하나가 이목구비의 전부인 얼굴 덮개의 입부분에는 작은 구멍들이 무수하게 뚫려 있었고, 그 아래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었다. 얼굴 아래 목을 비롯한 각종 관절 부분들은 아무런 보호 패드도 없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몸과 등이나 다리, 그리고 양팔에 붙어있는 보호 패드는 그저 내부 관절과 동력계를 대충 가리는 역할에 그치고 있었다. 딱 봐도 지구주의자들이 아주 오랫동안 고쳐 쓰다가 버리고 간 안드로이드였다.

하지만 엉성한 완성도 보다 만코마는의 흥미를 끄는 점은, 이 안드로이드가 자리한 위치였다. 지구주의자들이 놓고 간 안드로이드는 혹시나 천정이 무너져 깔릴 것을 피하려는 듯 이미 무너진 천정 근처에, 그것도 떨어질 파편이 거의 없을 골조만 남은 천정 바로 아래를 살짝 벗어나, 가능한 햇살이 들지 않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세도 신경이 쓰였다. 보통, 이런 산업용 안드로이드는 전원이 한계에 달하면, 출하 상태의 웅크린 자세를 취하기 마련인데, 이 안드로이드의 전원 종료 자세는 마치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도 보였고,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도 보였다.

거기다 안드로이드 주변에는 수명을 다하고 멈추고 내려 앉은 서너 대의 원시 드론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래도 꽤 오랫동안 보수 관리를 받았을 확률이 있었다. 지구주의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리고 간 안드로이드가, 드론의 관리를 받았다고? 도대체 왜? 만코마는은 고개를 기울이며, 앉아 있는 안드로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음.”

외곽 우주 67RD를 떠난 지구주의자들의 오리지널 안드로이드다. 너무나 원시적인 기술 수준과 디자인 수준이기 때문에 공학적인 가치도 미학적인 가치조차 거의 없다. 그나마 특이하다는 점만 보고 일단 사들이고 보는 마니아들에게 적당한 가격으로 넘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98.7% 재구성 물을 살 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상시에 마실 표준 합성 음료 한 통 정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음.”

하지만, 궁금하다. 만코마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통이라면 저기 구석이나 복도 한가운데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채 누워 있어야 하는 이 원시적인 안드로이드가 어째서 이렇게 자리를 고르고 골라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지 궁금했다.

실로 오랜만에 궁금해도 괜찮은 영역이다. 외우주에는 궁금해도 궁금하면 안되는 것들 뿐이다. 이를테면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진입을 막은 안전해 보이는 행성계나, 위험하지 않은데도 합성이 금지된 합금이나 원소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열람이 금지된 데이터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 버림받은 안드로이드는, 그리고 이미 7천여년전에 떠나버린 지구주의자들은 궁금해도 괜찮다.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어머니, 밀레나에게서 물려받은 강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유전자가 기운을 내며 들썩이고, 물리 화폐를 가득 담은 금고라는 유물을 건진 뒤의 넉넉함이 궁금함을 더욱 부풀렸다.

“이런 시칸다.”

조그맣게 욕설을 중얼거린 만코마는은 결국 손목 패드를 조작해 도시를 탐색 중인 드론 1기를 화물선으로 돌려보내 공구 박스를 가져오도록 조작했다. 우주에서 마음 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비밀은 얼마 없다. 그깟 표준 합성 음료 한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동안 궁금할 것도 없거나, 궁금하면 안되는 것 사이에서 심심하게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 다소곳하게 앉은 안드로이드를 들여다보기로 마음을 정한 만코마는은 캠프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고는, 안드로이드의 맞은 편에 털썩 주저 앉아 먼지가 앉은 안드로이드의 렌즈를 바라보며 속으로 속삭였다. 이렇게 정한 거, 기왕이면 기 막히는 비밀이나, 사연이나 아무튼 뭐라도 하나 나에게 주렴.

4.

근본을 알 수 없는 원시적인 기계를 들여다보는 건, 항상 의외성이 있어 재미있기 마련이다. 스캔 손전등으로 안드로이드를 몇 번이나 둘러보며, 3D 홀로그램 모델을 완성한 만코마는은 안락 의자에 누워 안드로이드의 구조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용케 만들었다 싶은 안드로이드였다. 내부 코드야 어떻게 짰는지 알 수는 없지만, 머리 부분의 CPU는 원시 드론들의 CPU를 병렬과 직렬로 여러 개 짝을 지어 임시방편으로 구성한 모습이었고, 메모리는 다른 규격과 용도의 칩을 온갖 기판 위에 올려 짜깁은 모양이었다.

관절 구동계마다 하나에서 두개 정도 장착된 CPU들은 안드로이드의 척추에 해당하는 파이프에 위치한 CPU들로 이어졌고, 파이프에 척추 연골 마냥 들러 붙어있는 CPU들은 다시 가슴에 위치한 메모리 칩들을 지나, 머리 쪽의 CPU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연산의 하청의 하청을 반복하는 구조다— 만코마는은 피식 웃으며, 홀로그램 모델을 계속해서 살폈다. 원시적인 안드로이드라 간단한 구조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들여다보니 누더기도 이런 누더기가 없었다. 이래서야 하루에 한 번은 고장이 나도 신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구동 계열 역시 나중에 추가한 것이 분명한 모터와 실린더들이 관절 부위와 프레임에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손때가 묻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임시방편을 위한 임시방편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과거의 유산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지구주의자들이 미련없이 두고 간 이유를 알만 했다.

키득키득 웃으며, 안드로이드의 구조 홀로그램 모델을 들여다보던 만코마는은 한참만에 안락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구경은 할 만큼 했고, 이제는 이 망가진 안드로이드를 부팅이 가능한 정도까지는 수리할 때다.

“일단은….”

가장 먼저 수리해야 하는 부품은 역시 안드로이드의 ‘눈’이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안드로이드의 눈은 이미지 처리와 투사 프로젝트 기능을 동시에 갖춘 소켓형 복합 렌즈였다. 살펴보니 렌즈를 구성하는 유리 성분은 흘러내려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고, 갈라진 틈으로 들어간 먼지가 이미지 센서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정도면 수리 보다는 아예 새로 만드는 게 편하다.

만코마는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안드로이드의 눈— 렌즈통을 잡았다. 어차피 새로 만들어야 하니 렌즈가 부서지는 건 상관없지만, 끝부분이 부러져 안쪽 소켓에 찌꺼기가 남거나, 아니면 소켓이 기판 째로 뜯겨 나오면 일이 늘어난다. 만코마는은 입술을 꼭 다물고는, 마치 정밀한 강도 테스트라도 하는 것처럼 렌즈를 아주 조금씩 힘을 주어 당기고 조금 쉬었다가 당기기를 반복했다. 다행히도 곧 렌즈가 으스러지거나, 소켓이 부러지거나 하는 일 없이 낡은 금속과 낡은 금속이 부대끼는 소리와 함께 렌즈가 훅 분리되어 튀어나왔다.

“좋았어.”

소켓 끝부분이 깔끔하게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만코마는은 스캔 손전등을 들어 꼼꼼하게 렌즈를 스캔했다. 그리고 손목 패드에 흘러 들어온 구조 데이터와 원소 데이터를 드론을 시켜 가져온 포터블 물질 프린터로 옮겼다.

이정도로 원시적인 구조와 보편적인 원소로 이루어진 렌즈 정도는 보정 기능을 사용하면 포터블 물질 프린터로도 정확히 98.7%까지는 문제없을 것이다. 프린팅 작업을 개시한 만코마는은 곧바로 손전등을 들고 휑하니 자리가 나버린 안드로이드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의 소켓과 기판은 아쉽게도 형태만 남고 배선판은 벗겨지거나 녹아내려 완전히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만코마는은 혀를 차고는 스캔 손전등을 안드로이드의 얼굴 안으로 밀어 넣고는 스캔을 계속했다.

물리적으로 두뇌를 재현한 것 같이 한데 켜켜이 쌓인 기판에 꽂힌 구조의 CPU와 메모리 칩들은 몇 개만 빼면 큰 손상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기판의 금속들은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였지만, 어차피 전원을 연결하고 데이터를 주고받을 길만 만들어주면 그만이니, 그 정도면 나도 전도체 스프레이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일단 렌즈만 갈아 끼우고 한 번 부팅을 해보고, 안되면 하나씩 추가해서 수리해보자. 만코마는은 먼저 안드로이드의 머리 속 기판 위에 나노 전도체 액체를 분사하고는 그 사이에 완성된 새로운 렌즈 부품을 포터블 물질 프린터에서 꺼내어 조심스럽게 안드로이드의 머리 속으로 밀어 넣었다.

빼낼 때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밀어 넣은 렌즈가 소켓과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맞물리자, 만코마는은 바닥에 준비해 두었던 전원 큐브를 들어 안드로이드의 머리 위에 올려 놓았다. 주로 전원 케이블을 사용하기 곤란한 우주 유영 작업시에 사용하는 최대 1.5m 반경, 최고 900 와트의 전자기장을 형성하는 전원 큐브다. 이제 부팅 준비는 끝이다.

“자….”

한숨을 돌린 만코마는은 어느새 이마에 맺힌 식은 땀을 살짝 닦아낸 다음, 손목 패드로 전원 큐브를 작동시켰다. 반경은 딱 안드로이드 머리가 들어갈 정도로 조절하고, 일단은 15와트 정도로 제한하고 전원이 들어오는지 확인했다.

15와트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만코마는은 다시 전원 큐브의 와트를 45로 올리고 안드로이드의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만코마는은 이번에는 와트를 130으로 크게 올렸다.

그러자, 검게 물들어 있던 안드로이드의 렌즈 안쪽에서 붉은 빛이 일어나더니 곧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부팅의 신호— 만코마는은 침을 삼키며 렌즈 안쪽에서 점멸하는 붉은 빛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디 에러나, 고장으로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렌즈 안쪽에 가라 앉아있던 붉은 빛이 부풀어 오르며 마치 사람의 눈동자처럼 위로 떠올라 커다랗게 부푼다.

“안녕?”

시스템 부팅이 끝나고, 조리개를 여러 번 조절한 뒤에 자리를 찾은 안드로이드의 눈동자를 향해 만코마는은 가만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렌즈 아래, 안드로이드의 붉은 전도체 눈동자가 만코마는을 향하더니 그대로 멈춘다. 만코마는을 향해 멈춰서는 한참이나 변화가 없던 안드로이드의 눈에 혹시 CPU나 메모리 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철컥하고 셔터를 닫더니, 곧 빠른 속도로 셔터를 열고 닫기 시작했다.

“왜 이래?”

돌연한 셔터의 움직임에 당황한 만코마는은 혹시 모를 불안감에 두어 걸음 물러섰다. 멈추지 않는, 격렬한 셔터의 움직임과 소리— 만코마는은 호위 드론에게 공격을 명령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살짝 자세를 낮춘 채 안드로이드를 주시했다.

철컥거리는 셔터의 움직임은 아무리 기다려도 멈추지 않았다. 놀란 마음을 겨우 추스른 만코마는은 문득 안드로이드 렌즈의 셔터 움직임과 소리가 규칙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제서야 각인 교육으로 배운 모스 부호가 떠올랐다. 당장 경황이 없어 읽고 해석할 여력은 없었지만, 아무튼 어떤 의미가 담긴 신호가 반복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안드로이드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

들리지 않겠지만, 안드로이드에게 짧게 말한 만코마는은 전원 큐브를 끄고는 서둘러 조금 전 스캔 해 둔 홀로그램 모델을 손목 패드 위로 띄워 올렸다. 스피커는 평범한 안드로이드 답게 얼굴의 반절을 차지하는 렌즈 아래에 달려 있었지만, 소리를 수집하는 마이크는 커다란 것이 사람으로 치면 명치 부분에 하나, 보조하는 역할의 작은 마이크가 이마 부분에 붙어 있었다.

우주에서는 무엇보다 절약이다. 그것이 물질이든, 아니면 시간이든 마찬가지다. 입 부분의 스피커는 그렇다 치더라도, 명치에 붙은 마이크가 문제다. 운이 나쁘면 안드로이드의 몸통까지 손을 보아야 할 수 있다. 머리에 붙은 보조 마이크는 주변 사물과의 거리를 계산하기 위한 반향음이나 다른 부속적인 소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특수 마이크 같았다.

한참을 홀로그램 모델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만코마는은 문득 안드로이드의 뒷머리에 붙어 있는 스피커를 발견했다. 음성이 아닌 시스템 관련 알람을 재생하는 보조 스피커에는 좌우 양쪽에 사용하지 않는 소형 마이크가 붙어 있었다.

잘하면 싸게 해결할 수 있겠다— 만코마는은 얼른 물질 프린터에 보조 스피커의 설계 정보를 넘기고는, 스캔 손전등의 꼬리 부분에 달린 만능 드라이버로 안드로이드의 뒤통수 커버를 분리했다. 커버 아래에 완전히 기능을 잃을 정도로 녹아내려, 숫제 기판 위에 눌러 붙은 내린 보조 스피커가 보였다.

만코마는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낡은 보조 스피커를 교체하는 방법을 포기하고는, 차라리 새로 만든 보조 스피커를 그 위에 얹고 나노 전도체 스프레이를 뿌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회수해서 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쁘게 고쳐서 재사용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놈의 안드로이드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니까, 흘러가도 날아가도 원하는 궤도에만 안착하면 그만이라는 옛말처럼,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재구성 완료를 알리는 포터블 물질 프린터의 알람에 손을 뻗어 재구성한 보조 스피커를 집어 든 만코마는은 일단 보조 스피커 후면에 있는 마이크 스위치를 올린 뒤, 생각을 바꿔 안드로이드의 안면 커버의 입 쪽에 붙였다. 아무래도 보조 스피커는 소리가 작을 수밖에 없고, 보조 마이크의 집음 능력도 낮을 수밖에 없다. 만약 본래 설계 그대로 뒤통수에 보조 스피커를 장착하면, 뒤통수 쪽에 서야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기계와 대화하더라도 사람의 모습을 띄고 있는 이상, 뒤통수 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피하고 싶었다. 만코마는은 물질 프린터에서 가장 싸구려 전원 데이터 케이블을 두 가닥 재구성시켜, 보조 스피커와 안쪽 기판에 연결하고는 다시 전원 큐브를 작동시켰다.

다시 한 번, 렌즈 깊숙한 곳에서 붉은 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부터 부팅이구나— 만코마는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안드로이드 앞에 섰다. 한참을 깜빡이던 붉은 빛이 다시 눈동자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고, 다시 안쪽에서 훅 떠올라 렌즈 바로 아래까지 오자, 입 부분에 붙었던 스피커에서 부팅 완료를 알리는 알람이 짧게 울렸다. 제발, 살아 있는 스피커를 찾아서 활용하는 정도의 AI는 갖추고 있기를. 만코마는이 속으로 간절하게 빌며 기다리자, 마침내 보조 스피커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TYQ-113호기, 부팅 완료.”

됐다! 만코마는은 주먹을 꽉 주며 씩 웃었다.

“안녕.”

“당신은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회수 담당자이신가요?”

인사를 건네자 마자, 안드로이드의 붉은 눈동자가 만코마는을 향하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만코마는은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머리만 살아있는 안드로이드다. 대답에 따라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조치해 두었더라도 문제없다. 이를테면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공무원이 아니면 영토를 침범한 적으로 간주하도록 프로그래밍 해두었다고 하더라도 간신히 살려 놓은 머리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간단하게 대답한 만코마는은 가만히 안드로이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작동을 중지합니다.”

그러자 돌연히 작동 중지를 알린 안드로이드의 붉은 눈동자가 줄어들더니 렌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곧 시스템 종료를 알리는 부저가 보조 스피커에서 짧게 재생되고, 안드로이드는 그대로 작동을 멈춰 버렸다.

“이런 시칸다….”

만코마는은 전원이 꺼진 안드로이드 앞에 서서, 다시 긴 부팅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마를 짚으며 욕설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5.

만코마는은 다시 한 번 전력 큐브를 전원을 끊었다가 다시 연결하고, 안드로이드의 렌즈 깊숙한 곳에서 붉은 빛이 점멸하는 것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 한참만에 붉은 빛이 눈동자처럼 부풀어 오르며 렌즈까지 떠오르고, 셔터가 몇 번 깜빡이고, 입에 붙은 스피커에서 부팅 완료를 알리는 효과음이 울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아까 들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은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회수반이십니까?”

단순히 메모리 쪽에 문제가 있어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오래전 안드로이드라 대상을 구별하여 기억하는 알고리즘이 없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TYQ-113이라는 안드로이드는 만코마는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혹시라도 조금 전의 나를 알아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체적으로 전원을 내리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만코마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바라보는 안드로이드의 붉은 눈동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러자 이번에는 전원이 꺼지는 대신, 안드로이드의 렌즈 셔터가 바쁘게 깜빡인다. 정보를 읽어 들이거나, 아니면 처리하는 중이라는 일종의 표현 같았다. 만약 안드로이드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CPU도 메모리 칩도 얼마나 정상인지, 얼마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기다릴 수 밖에.

“메시지를 전달 드립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셔터의 움직임이 멎더니, 보조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해당 메시지는 임무 수행에 필요한 메모리를 확보하기 위해 녹화 영상에서 추출된 문자 데이터로 전환되었으며, 이를 음성 소프트로 재생 드림을 미리 고지 드립니다.”

짧게 정리하자면, 여러가지 이유로 메모리 칩에 데이터를 저장할 여유가 없어지자, 기존의 녹화 영상에서 음성 데이터를 용량이 몇 만분의 1정도로 줄어드는 텍스트로 작성한 뒤, 그 텍스트를 내장된 음성 소프트로 읽어준다는 것 같았다.

“이주력, 백년, 삼개월, 십이일차, 녹화 주체는 이도지나사라하.”

이도지나사라하— 지구주의자들의 이름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만코마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메세지를 수취하시는 외우주 육십칠인가? 칠십육인가? 아무튼 외우주 통합 관리국에서 안드로이드를 회수하러 오시는 분께 남깁니다.”

사람다운 문장이, 안드로이드의 음성으로 또박또박 흘러나온다. 조금 어색하지만, 7천여전, 게다가 지구주의자들의 사투리와 억양이 담뿍 들어간 실제 음성으로 듣는 것보다는 바로 듣고 이해하기는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정이 있어 지급받은 외우주 육십칠? 칠십육?RD 통합 관리국의 안드로이드를 데려 갑니다. 대신, 여기 이 안드로이드를 납부하겠습니다. 이 메시지가 전달되는 즉시, 전달받으신 분께 이 안드로이드의 소유권을 이전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녹음된 전언이나 당연하기는 하지만, 일방적인 이야기가 끝나버리고 음성이 뚝 멎는다. 만코마는은 이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안드로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드로이드의 소유권 이전— 어떤 수순으로 소유권을 이전 받는다는 건지 경험이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공무원증을 보여주기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벌써 소유권을 이전 받은 건가?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안드로이드가 셔터조차 움직이지 않자, 만코마는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그제서야, 안드로이드의 붉은 눈동자가 셔터를 깜빡인다.

“안녕, 하십니까.”

한 마디를 나누려고 해도, 안드로이드에게는 만코마는의 언어와 지구주의자들의 언어 간의 차이를 해석하고 유사성을 따져 조합하는데 3~4초의 간격이 필요한 듯싶었다. 그래도 7 천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서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소유권 이전은 완료된 거야?”

만코마는의 질문에 셔터가 다시 한 번 바쁘게 움직인다.

“아직 수행 중인 기존 임무가 있어 소유권 이전이 불가능 합니다.”

“임무가 남아 있다고? 어떤 임무인데?”

안드로이드가 이번에는 좀 더 길게 셔터를 깜빡인다.

“임무 배당일,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3561년 151일.”

“임무 하달자, 이도사하지라하.”

이 안드로이드를 대납하겠다고 말하던 지구주의자와는 미묘하게 다른 이름이었다.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예상치 못한 임무 내용에 만코마는은 고개를 기울였다. 지구주의자들은 이름만 아니라, 성격도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참 모를 임무였다.

“임무 기한, 설정 기록이 없음.”

마무리까지 화려하구나. 만코마는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임무 완료 조건은?”

안드로이드의 셔터가 다시 쉼없이 철컥거리며 닫혔다가 열린다.

“자체 판단 불가능.”

그 임무가 완료되지 못하고, 그래서 소유권 이전을 받을 수 없다면, 비소유권자로서 안드로이드의 내부 데이터를 요청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제한된 권한으로 안드로이드와 씨름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전원을 내리고 메모리 칩을 다 떼어내 데이터를 카피한 다음, 해석하고 분류하는 편이 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얻어낸 데이터에서 혹시 지구주의자들의 일상을 찍은 동영상이나, 지구주의자가 부른 노래가 녹음이라도 되어 있다면, 인 더 아우터 같은 데이터 공유 사이트에 올리면 소소한 화제거리가 되고, 그렇게 되면 광고 수익이라도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주의자들의 노래만큼 고정 소비자가 있는 데이터도 따로 없으니까 말이다.

“임무 완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지? 소유권 이전을 받게 되는 내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 소유권자는 떠나버리고 없고, 지금 그나마 가장 소유권자에 가까운 건 나 같은데 말이지.”

만코마는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안드로이드에게 억지를 부렸다. 만약 데이터 접속 권한을 받을 수 없다면, 그냥 빠르게 포기하고 메모리 스캔을 해버리자. 데이터 해석과 분류가 귀찮기는 해도, 괜찮은 소일거리다. 드론들이 부속 도시 스캔을 마칠 때까지, 퍼즐 맞추기 하는 기분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자체 판단 불가, 소유권 이전 대상의 판단에 맡김.”

스스로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안드로이드에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외우주의 안드로이드라면, 단숨에 거부당할 논리다. 설마 이곳에 살던 지구주의자들에게는 융통성이 있는 AI를 만들 알고리즘 기술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이런 억지가 통할 정도로 알고리즘이 허술한 걸까? 만코마는은 일단 다른 생각을 밀어 놓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얼른 대답했다.

“나는 내게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 안드로이드의 렌즈 눈동자가 깜빡인다. 만코마는은 숨을 죽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임무 완료 판단을 위한 각종 정보 접근 권한 설정 완료.”

만코마는은 살짝 웃으며, 안락 의자를 끌어와 안드로이드의 맞은 편에 앉았다.

“좋아, 그럼 그 이도… 잊지 말라는 임무에 대한 자료를 보여줄 수 있어?”

지구주의자들의 이름은 도저히 외울 수가 없다. 안드로이드가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다 대답을 내놓는다.

“출력 방법 검토 완료. 하나, 음성 출력. 둘, 투사 출력.”

“기다려봐.”

만코마는은 얼른 옆에 세워놓은 포터블 물질 프린터를 조작에 널찍하고 얇은 검은 철판을 하나 뽑아 들었다.

“여기에 투사해봐.”

그러자 안드로이드의 눈— 붉은 빛을 내뿜는 렌즈가 점차 밝아지며, 눈동자가 붉은 색에서 하얀색으로, 투사 모드로 변한다. 만코마는은 혹시 모를 전력 부족에 대비해 안드로이드 머리위에 얹어 놓은 전력 큐브의 전력을 30와트 높였다. 투사를 하다 전력이 부족해 전원이 꺼지기라도 하면 다시 부팅을 한 세월 기다려야 할 텐데,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안드로이드의 머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들고 있던 검은 철판 위에 하얀 문자들이 투사되기 시작했다.

[임무 로그#001]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3561년 151일.

- 작은 주인 이도사하지라하로부터 임무 하달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 임무 수행 내역, 이도사하지라하의 정보 저장 수행.

철판 위에 흐르는 문자— 음성도 영상도 없이 그저 문자의 나열에 만코마는은 살짝 실망했지만, 문득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내밀어 이도사하지라하의 정보 저장 수행-이라 적힌 문장 부위를 살짝 누르듯 검은 철판을 두들겨 보았다. 그러자, 다행히 손가락 추적 기능은 붙어 있는지 곧바로 반응이 왔다.

- 이도사하지라하의 정보 저장 내역(978-3561년 151일)

> 이도사하지라하의 영상 촬영: 1173분/32개 파일

> 이도사하지라하의 기록 수집: 8922자/121개 파일

> 이도사하지라하의 스켄 자료: 요청에 따라 3단 스켄 완료.

의외로 많은 양의 자료에 만코마는은 씩 웃었다. 그러면, 일단 영상부터 확인해 볼까. 만코마는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내밀어 영상 촬영 문자를 살짝 눌렀다 땠다.

- 링크 소실, 자료 위치 및 자료 파일 화인 불가.

실망스러운 알림에 만코마는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 너무 기대가 컸나. 그럼 스켄 자료는 보나마나 소실되고 없겠구나. 실망을 주워 삼킨 만코마는은 차라리 문자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이번에는 기록 수집쪽으로 손가락을 눌렀다 땐다.

- 3개의 파일 확인, 118개의 파일 링크 소실, 자료 위치 및 파일 확인 불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작 파일 3개라니.

“하나씩 띄워봐.”

한숨을 내쉰 만코마는은 가만히 명령을 내렸다.

- 이도사하지라하 생체 기록

나이: 12살

성별: 미정

혈액형: B_Fgh_플러스

키: 151

신체 치수: 가슴 90, 허리 78, 엉덩이 85, 등길이 56, 머리둘레 81

체중: 62

가족 직위: 이도지나사라하와 김사가라키다 사이의 자손

가내 직위: 작은 주인, 3순위.

유전 특성: 홍채 이색증(우측 흑색, 좌측 백색), 모발 혈관증, 고밀도 골조직

가문 정보: 지구, 섹터 51 종족 특성 유지 의무 가문.

생체 기록을 잠시 훑어보던 만코마는은 곧 흥미를 잃었다. 이렇다하게 특별한 기록은 없었다. 지구주의자들 답게 나이에 비해 키도 작고, 사이즈도 작고, 골밀도가 높아서 체중만 체적에 비해 높다. 흑과 백의 홍채 이색증이야 지주구의자들의 트레이드 마크이고, 머리카락까지 혈관이 생성되는 모발 혈관증이 좀 눈에 띄기는 하지만, 그렇게 드문 증세도 아니고, 몇 달에 한 번씩 머리카락을 바싹 말린 뒤 자르면 우주에서 생활하는데 크게 불편할 것도 없다. 작은 주인이라는 표현은, 부부가 이 안드로이드의 소유자이지만, 자식에 해당하는 이도사하지라하에게도 어느 정도 안드로이드를 조작할 권리를 설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다음 문서”

스크롤을 멈춘 만코마는은 곧 바로 다음 문서를 호출했다.

- 이도사하지라하 자아 기록, 인터뷰

(원본 978-3561년 151일, 영상과 함께 녹음)

(문자로 사본 제작, 978-3672년 21일, 정확도 98.7% 부합)

『안녕, 나는 이도사하지라하. 자아 기록을 남기는 이유? 우리 로비가 나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자아 기록을 남겨. 일단 널 두고 가서 미안해, 로비. 나로서는 엄마 아빠의 선택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네. 음, 그리고 나는 자아 기록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제대로 기록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난 로비를 두고 떠나는게 너무 슬프고, 미안하니까, 로비가 날 잊지 않을 수 있게 열심히 해볼게. 』

음성 데이터를 일부러 문자로 변환한 문서다. 어째서? 만코마는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일단은 문서를 마저 읽어 내렸다. 그나저나 12살 꼬마에게 자아 기록이라니, 보통은 죽기로 마음먹거나, 또는 클론 부활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을 때,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나 상태에서 감상에 담뿍 젖어 남기는 메시지다. 그런 메시지를 겨우 12살 꼬마가 남기다니.

『수행중인 임무? 나는, 지구로 가야해. 지구에 도착할 수 없을 경우에는, 나와 유사한 계열의 유전 정보를 지닌 짝을 찾아서, 자손을 남기고, 자손이 지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거야. 만약 지구에 도착하면, 지구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임무야.

지금 상황은, 이제 일곱 시간 뒤면 우리는 다시 우주로 나가서 지구로 간데. 잘은 모르지만, 외우주 사람들이 지원을 끊겠다고 했나 봐. 엄마 아빠만이 아니라 모두 화가 난 것 같은데, 다행히 다시 여행을 떠날 만한 자원은 있다고 들은 것 같아.

알리고 싶은 사람? 채널 넘버? 수신 넘버? 그런 건 없어, 이건 비밀이거든. 로비와 나만의 비밀이야, 알았지?

유품이 뭐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거? 음, 나는 남길게 없는데, 꼭 뭔가 남겨야 하는거야? 남기지 않아도 돼? 그러면 남길 게 없어. 0.2 플레티나가 있긴 하지만, 나중에 필요할 거 같아서 일단은 남기지 않을래.

자아 기록을 찾은 사람에게 전할 말? 내 자아 기록을 누가 찾는데? 왜? 외우주 육십칠RD 통합 관리국 사람? 그 사람이 로비의 새 주인이 되는 거야? 그런 거 싫은데. 나, 이거 안할래. 안할거야.』

두 번째 문서도 끝난다. 유추해보건데, 이 안드로이드를 애지중지하던 지구주의자 소녀가 지구로 향하는 항해를 떠날 때가 와서, 안드로이드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자신이 떠나도 절대 잊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작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정보를 남기기 위해 영상과 사진도 찍고, 작은 주인의 자아 기록을 남겨두려 했던 것이리라.

“다음.”

- 이도사하지라하 긴급 기록

(원본 978-3561년 151일, 통신 기록)

(문자로 사본 제작, 978-3672년 21일, 정확도 98.7% 부합)

『로비! 나야, 이도사하지라하! 있잖아, 유가바수다 아저씨가 어디에도 안갈거래! 그래서 아저씨한테 로비랑 같이 있어 달라고 했어! 아저씨는 삼번가 쇼핑몰에서 머물거래! 삼번가 쇼핑몰 이층에 있는 커피샵에 있을 거랬어! 로비도 혼자서는 힘들 테니까, 유가바수다 아저씨랑 같이 있으면 좋을거 같아! 그러니까, 오늘 저녁까지는 삼번가 쇼핑몰 이층에 가서 아저씨랑 만나. 아저씨말 잘 듣구, 그리고 나 잊지마, 나도 잊지 않을 거니까. 데려가지 못해서 미안해. 그럼 끌게, 아빠가 불러!』

짧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통신 내용을 들어보면 먼 옛날 작은 주인과 막상막하로 이상한 이름의 지구주의자가 남아서 이 안드로이드와 시간을 보냈을 확률이 높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뉘앙스로 보아하니 지구주의자를 포기하고 외우주 RD67로 귀화한 것도 아니고, 이 행성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인 것도 같았다.

일단, 내일도 심심하지는 않겠군. 3번가 쇼핑몰이 과연 어디인지 찾아서, 유가어쩌구라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이 도시를 걸어 다니다 보면, 또 하루가 가겠지.

“닫고, 다음 로그.”

임무 로그#002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3624년 378일.

- 시스템 오류, 장치 고장 감지.

- 오류, 고장 내역:

> 저장 장치의 데이터 캐시 삭제 오류 발생(211일차)

> 저장 장치의 데이터 과부하, 용량 부족 발생.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 대응 방안:

> 이도사하지라하의 영상, 화질 변경, 24K에서 12K.

역시, 그래서 영상이 다 삭제되고 없는 거구나. 만코마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모리에 쓸데없는 캐시 데이터를 삭제 처리하는 알고리즘이 오류를 일으키고, 처음에는 화질을 줄이고, 그 다음에는 아마 중요도에 따라 영상을 삭제하거나 하는 식으로 대응을 하다가, 마침내 내용을 문자화 하고 삭제하면서 영상이 남지 않게 되었을 확률이 높다.

“다음.”

임무 로그#003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3724년 62일.

- 시스템 오류, 장치 고장 감지.

- 오류, 고장 내역:

> 저장 장치의 데이터 과부하, 용량 부족 발생.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 대응 방안:

> 이도사하지라하의 영상, 화질 변경, 12K에서 4K.

“다음”

임무 로그#004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3794년 3일.

- 시스템 오류, 장치 고장 감지.

- 오류, 고장 내역:

> 저장 장치의 데이터 과부하, 용량 부족 발생.

> 이도사하지라하의 영상, 유의미한 화질 유지 불가능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 대응 방안:

> 영상 주요 장면을 캡쳐, 사진으로 보관.

> 이도사하지라하의 전신 위주로 각 영상 파일에서 10매씩 추출

“다음”

임무 로그#005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4011년 177일.

- 시스템 오류, 장치 고장 감지.

- 오류, 고장 내역:

> 저장 장치의 데이터 과부하, 용량 부족 발생.

> 이도사하지라하의 사진, 총 320매 전체 보관 불가능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 대응 방안:

> 이도사하지라하의 사진, 각 영상 파일에서 5매로 분량 축소

“다음”

임무 로그#006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4151년 297일.

- 시스템 오류, 장치 고장 감지.

- 오류, 고장 내역:

> 저장 장치의 데이터 과부하, 용량 부족 발생.

> 이도사하지라하의 사진 보관 불가능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 대응 방안:

> 이도사하지라하의 사진, 아스키 문자화 저장.

“다음.”

임무 로그#007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4151년 299일.

- 예측 시스템 권고

> 관리 가능한 용량의 지속적 감소로 이도사하지라하의 임무 한계 도달 경고.

> 기체 노후로 인한 심각한 고장으로 정지 가능성 경고

> 대안 도출 필요.

- 대안

> 메모리 칩 3F으로 남아있는 모든 이도사하지라하의 데이터 카피

> 수리 드론 해킹 후 메모리 칩 3F 와 연결을 물리적으로 차단하여 캐시 데이터 축적 차단.

> 수리 드론 해킹 후, TYQ-113 최우선 유지 대상으로 선정

> 자연 환경의 영향을 가장 오래 피할 수 있는 곳에서 기체 정지.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잊지 않기 위해서, 사라져가는 기억을 옮겨 놓고 자신조차 두 번 다시 볼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은 과연 잊지 않는 것일까. 접속할 수는 없지만, 기억을 틀림없이 그 몸체 어딘가 보관해 두는 방법은, 안드로이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물리적으로도, 전자기적으로도 잊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까.

“다음.”

임무 로그#008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4152년 12일.

- 예측 시스템 권고

> 기체 정지 위험도 치명적 레벨에 도달

> 수리에 동원 가능한 드론 없음

> 대안 도출 필요.

- 대안

> 이동 가능한 범위 내 자연 환경의 영향을 가장 오래 피할 수 있는 곳에서 기체 정지.

- 임무 내용, 이도사하지라하를 잊지 마라.

“다음”

임무 로그#008

- 외곽 우주 67RD 구역 시간 978-4152년 13일.

- 대안 실행.

“다음.”

“임무 로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여기에 앉아서 스스로를 정지시켰구나. 만코마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가상한 노력이었다. 이런 구닥다리 몸체로 7천년을 용케 버텼다니— 스스로가 그 이…어쩌구하는 지구주의자 소녀였다면 꼭 껴안아 주면서 임무는 애저녁에 완수했다고 말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제 이 안드로이드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끝이다. 영상도 없고, 음성도 없고, 남아 있는 것은 얼마되지 않는 임무 로그뿐이다. 원한다면 안드로이드의 전원을 내리고, 몸체 어디에인가 있을 T3 메모리를 찾아 데이터를 가피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을 때울 대안은 하나 있었다.

“혹시, 그 유가…바수..다. 유가바수다에 대한 데이터는 없어?”

만코마는의 질문에 안드로이드가 잠시 눈을 깜빡거린다. 작은 주인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자아 기록 인터뷰부터 몸체를 건사하기 위한 대안까지—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TYQ-113이다. 그러니, 유가바수다라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잘 들으라는 작은 주인의 부탁 또한 그대로 따랐을 것이고, 혹시 그렇다면 뭔가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체 발견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자 전언, 1건.”

역시! 마치 보물 지도를 발견한 듯한 기분에 만코마는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읽어줘.”

“51.4769˚N, 0.0005˚W”

전언은 무척이나 간결한 행성 좌표였다. 아마도 그곳에 무언가를 남겨놓았다는 신호임에 틀림없었다. 만코마는은 얼른 손목 패드로 해당 좌표를 검색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제서야 문득 창고 건물의 무너진 천정으로 보이는 바깥 하늘이 어느새 어둑하게 저물었음을 눈치챘다. 아쉽지만, 다음 수색은 한숨 자고 떠나야할 것 같았다.

“수고, 이제 쉬어도 돼.”

검은 철판을 바닥에 내려놓고, 안락 의자에 똑바로 앉아 등을 길게 눕히며 안드로이드에게 가볍게 말을 던지자, 안드로이드의 눈이 다시 붉게 돌아오더니, 셔터를 깜빡였다.

“임무는 완수되었습니까?”

안드로이드의 눈이, 만코마는을 가만히 바라본다. 무기질 구성체에 의미와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유기질 생명체의 멍청한 습관이다— 외우주 67RD 인류라면 누구나 지겹도록 들었을 그 주의사항이 만코마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멍청한 습관을 이겨내는 인류는 아마 아무도 없다. 도구에, 화물선에, 아니면 장신구 같은 허무맹랑한 것에도 의미를 두고 소중하게 여긴다. 심지어는 야생의 동물조차 버려진 기계들을 친구나 어미로 여기고 따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유기질 생명체는 무기질 구성체에 어쩔 수 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만코마는은 자꾸만 떠오르는 감상적인 생각을 털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TYQ-113의 모습은 어쩐지 지쳐 보이고 무언가 결론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임무를 완수했다고 대답한다 하더라도, TYQ-113이 7천년만의 임수 완수에 환호를 올리거나 또는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할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아직 완수를 하지 못했다고 대답한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슬퍼할 리도 없다. 모두 만코마는 혼자서 부여하는 의미일 뿐이다.

“그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떤 대답을 내놓기 이전에 만코마는에게 판단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점이다. 만코마는은 이 안드로이드의 이전 주인이 다음 소유권자로 지목한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공무원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한 마디 보탤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이라도 할 수 있는 지구주의자 조차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저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일개 국민으로서 회수되지 못한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의 자산을 발견했음을 관리국에 알리는 방법이 제일 올바른 선택일지도 모른다. 신고가 접수 된다면, 사안의 경중을 따져보아 늦어도 천 년에서 천 오백 년 뒤에는 사안 심사에 들어갈 것이고, 통합 관리국의 가치 계산법에 따라, 아마도 이 안드로이드의 예상 가치는 아예 없거나, 거래 최소 단위인 0.0013 플래티넘도 넘지 못할 테니 회수 포기 판단을 받고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결국은 어느 지구주의자 소녀의 잊고 싶지 않은 친구 ‘로비’, TYQ-113, 지구주의자들의 안드로이드는 기한도 없는 임무를 영원히 수행하면서, 이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것이다.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기다려 줄래?”

망설임 끝에 만코마는은 답을 미뤘다. 그러자, 전원 내림을 알리는 효과음과 함께, 안드로이드의 붉은 눈이 렌즈 안쪽으로 숨어버리고, 곧 셔터도 닫혔다. 전원이 끊긴 안드로이드의 모습은 곧바로 거짓말처럼 그저 물건으로 보였다.

6.

손목 패드로 확인한 행성 FEM-3319의 51.4769˚N, 0.0005˚W 위치는 하필이면 도시에서 멀리 벗어난 산맥의 허리 부분이었다. 캠핑 배낭을 챙겨 메고 나와 건물 사이를 거닐던 만코마는은 상상 밖의 좌표 정보에 가만히 멈춰 서고 말았다.

차라리 좌표 정보만 남아 있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마음 한 켠에 떠올리며 혹시나 싶어 행성 스캔 데이터를 확대해 살펴보았지만, 51.4769˚N, 0.0005˚W에는 분명히 인위적으로 정비된 공간과 두 개의 건축물이 있었다.

설마 중력 강도가 3.98 이 넘는 행성의 산을 오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만코마는은 혀를 찼다. 1억 2천만 플래티넘을 주고 산 화물선 ‘밀레나2호’는 중력값 12까지 문제없이 대응할 수 있는 뛰어난 중력 탈출 능력과 착륙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반대로 아무리 중력값이 낮은 환경이라도 행성의 내부 대기를 비행하는 능력은 없었다.

굳이 ‘밀레나 2호’를 이용하자면 다시 우주로 올라간 뒤에 해당 좌표로 착륙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러자면 지금 도시 곳곳을 수색하며 유품을 찾고 있는 드론들의 작업을 중단하고 다시 수납해야 하는 수고와 시간 낭비를 해야 한다. 거기에 착륙 중 발생하는 충격과 열이 지면과 숲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알 수가 없다. 땅이 무너지거나, 산불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남아 있던 유물을 그대로 잃어버릴 수 있다. 또 유물을 발견해 무사히 손에 넣더라도, 도시에 위치한 유물을 운송하려면 다시 도시로 화물선의 위치를 옮겨야 한다. 소비해야 할 시간과 자원이 너무 늘어난다. 우주에서는 무엇보다 절약이다.

이번에 돈을 좀 벌면, 정말로 대기권 비행용 호버 드론을 꼭 사야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만코마는은 한참을 미적거리다 캠프 배낭을 고쳐 메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을 타는 것은 딱 질색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원 스캔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은 너무 지루했다. 건물들을 하나씩 수색하며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모두 다 비슷하게 생긴 구조의 건물들을 몇 번이고 들고나다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더군다나 걸으면서 하는 직접 수색 작업은 애초부터 수익을 기대하지 않는 작업이다. 그러니, 재미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니, 51.4769˚N, 0.0005˚W에 있는 건물은 도저히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다. 다 똑같이 생긴 건물을 의미도 없이 반복해서 수색하는 것보다, 혹시 모를 유물을 건질 확률이 그나마 있을 뿐만 아니라, 설사 유물이 없다고 하더라도 안드로이드 발견에서 이어지는, 유가바수다라는 지구주의자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걸어가기 불가능한 거리도 아니다. 반 나절에서 한 나절 정도를 꼬박 열심히 걷는다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지구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는 우주에 살고, 다시 우주 항해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행성의 중력 위에서 사는 지구주의자들은, 무중력 상태에서 평생을 사는 우주인들의 신체적 약점과 행성의 중력에 의지해 평생을 사는 행성인들의 신체적 약점을 두루두루 가지고 있고, 또 두 약점의 합병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도시에서 멀리 나가지는 못한 것 같았다.

거대 도로의 외곽으로 나와 도로 경계선을 넘어 숲으로 걸어 들어간 만코마는은 얼마 걷지 않아 우거진 나무와 수풀 사이에 비교적 평탄한 경사로를 발견하고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무와 풀로 뒤덮이긴 했지만, 명백하게 평탄하게 다듬어진 인공적인 길이 보였다. 폭이 약 10미터 정도 되는, 나무 뿌리만 피하면 걸려 넘어질 것이 없는 편한 등산길이 저 멀리,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설마 거기로 건물 자제를 어깨에 지고 가진 않았겠지. 뭔가로 길을 닦고 나르고 했을 것이다. 만코마는은 쉬지 않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나무와 풀로 뒤덮인 경사로를 걷기 시작했다.

“후우.”

사방에 가득차는 진한 풀 냄새, 그리고 수많은 나무와 풀이 만들어내는 귀를 간지럽히는 고요함은 오랜만이기는 해도 여전히 익숙했다. 어머니 밀레나와 살던 시절에, 행성에 착륙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은 숲을 거닐거나, 사막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거나, 바다로 나가 떠다니거나 했던 덕분이다. 그러다 보니 만코마는 자신도 행성에 착륙하면 꼭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고, 실제로 여기저기를 쏘다니곤 했다.

다만, 모험의 말동무였던 어머니, 밀레나는 이제 곁에 없다. 캠핑 배낭 속에도, 무거운 고체 연료나 불편한 조리 기구는 없고, 숲 한가운데에서도 편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온갖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나 나나….”

어머니와 자연 속을 걸으며 수백 번 나누었던 이야기를 매번 반복하다가 그래도 나눌 이야기가 떨어지면, 어머니가 먼저 흥얼거리던 노래도 이제는 혼자서 흥얼거린다. 어머니가 흥얼거리던 노래는 전부 서너 곡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두 어머니가 어릴 때 배웠던 지구주의자들의 노래였기 때문에 통합 관리국의 표준 언어 각인 교육을 받은 만코마는의 귀에 그나마 편하게 들리는 노래는 단 한 곡 뿐이었다.

“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나나…”

멜로디는 있어도, 가사는 얼마 없는 노래— 어머니는 어릴 적 귀동냥으로 배웠고 그나마도 머리가 굵어진 후에는 노래와 상관없는, 사냥하는 일을 맡은 가문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고 했다. 또 지구주의자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뒤로는, 외우주 67RD 공용어를 각인 교육으로 배우고, 공용어만 쓰며 생활하다 보니 이젠 제대로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도 했다.

“나나, 나나나, 만코마는 별들 중에, 나나나, 나나, 만코마는 별들 중에.”

어머니가 가장 자주 흥얼거렸고, 만코마는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노래는, 만코마는의 이름이 들어있는 노래였다. 만코마는은 발음만 알고,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성인이 된 이후에 각인 교육으로 언어를 배운 탓에 기존의 언어— 지구주의자의 언어 능력을 꽤 많이 잃어버린 어머니 밀레나는, 어쨌든 좋은 뜻이 두 번 반복되는 이름이라고 했다.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나 나나….”

하도 듣다 보니 가끔씩은 지겹다고 느끼기도 했던 노래를, 그것도 제목도, 가사의 의미도 모르는 노래를 스스로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그건 아마도 만코마는의 유전자 속에도 아주 조금이지만 지구의 유전자가 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외우주 통합 관리국이 통일성을 잃어가는 인류의 유전자 진화와 분기를 파악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수많은 우주 인간들을 같은 뿌리를 가진 인류로 구분하는 기준 중에 하나로 ‘인류는 목적과 용도가 따로 없는 노래를 한다’는 항목을 넣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지구에서 시작된 존재들은 아무튼 노래를 부른다. 짝을 찾거나, 영토를 알리거나, 동료에게 뭔가를 알리는 등의 목적은 하나도 없는 그런 노래를 부른다.

“나나, 나나나, 만코마는 별들 중에, 나나나, 나나, 만코마는 별들 중에.”

사실 용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뭐든 달래는 용도, 지루함을 달래거나, 힘든 순간을 달래거나, 아무튼 무엇이라도 하나 더 있어야 할 때,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그럴 때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용도가.

“흠.”

어느 사이, 주변이 어두워진 것을 깨달은 만코마는은 걸음을 멈췄다. 두 다리가 저리고, 온몸이 땀에 푹 젖을 때까지 걷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만코마는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별들이 살짝 보이기 시작하는 밤하늘을 바라본 만코마는은 잠시 망설이다 일단 걸음을 멈추고 캠핑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오랜만이다. 그러니 숲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안락의자와 기둥 모양의 난로, 그리고 98.7% 복원값의 재구성 커피와 닭고기 가슴살 스테이크, 그리고 설사 육식 동물이 튀어나와도 A등급의 유해 동물까지는 0.02초 안에 제압이 가능한 든든한 호위 드론이 무려 2기— 안락 의자에 편하게 누워 앉은 만코마는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는 다르다. 옛날에는 고체 연료로 불을 피우고, 걷는 동안 팔 아프게 모아 들고 온 장작들을 불 속으로 하나 둘 던져 넣어 불을 살리고, 만약 오는 길에 사냥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를 열매나 풀을 불안에 떨면서 먹은 뒤에, 혹시 육식 동물이라도 튀어 나올까 구형 라이플을 옆에 두고, 지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천 위에 누워 선잠을 자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도 없다. 어머니가 없는데도, 둘이서 나란히 앉아 불을 쬐던 시절처럼 난로의 왼편에 자리 잡은 만코마는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 키며, 문득 모닥불 오른편에 앉아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항상 웃는 얼굴로 불을 바라보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날은 기적처럼 평온하게 착륙하고, 숲에 들어서자 마자 맛 좋은 식량도 확보하고, 날씨까지 선선하던 운 좋은 날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앉은 모닥불 곁에서 늘 같은 얼굴로 불을 뒤적이던 어머니 밀레나가 말했다.

『나 클론 DB 파기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죽으면 끝이야. 』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에 생각이 멈춰버렸던 느낌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왜? 이제 돈이 없어? 』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묻자, 어머니는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은 죽더라도 클론 회사들의 보험만 들어 놓았다면, 그리고 비용을 지불할 잔고가 통장에 남아 있다면 몇 번이고 재생성 할 수 있다. 아니, 당장 통장에 잔고가 없더라도 클론 회사에게 부채를 얻어 재생성 할 수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회사의 서비스에 따라서, 또 본인의 의향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의 재생성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사는데 지쳐서 이번에 죽으면 100년정도 뒤에 재생성 하겠다 거나, 무언가 범우주적이고 범인류적 대사건이 일어나면 확인하기 위해 그때를 노려 재생성 하거나. 하지만 그것도 재생성을 실행할 클론 DB가 없으면 그대로 끝이다. 재생성을 할지 말지 고민조차 불가능하다.

『이제 슬슬 때가 됐다 싶어서.』

『때가 되다니?』

여전히 웃는 얼굴로 긴 나뭇가지를 들어 불을 뒤적이며, 어머니는 대답했다.

『내가 몇 년을 살았는지 아니? 세어보니까 벌써 사천 년을 살았더라.』

어머니, 밀레나의 계산은 늘 이런 식이었다. 정확히는 3941년이다. 4천 년이라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차이가 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소수점 차이만으로도 목숨이 오가는 우주에서는 결코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알지, 아직 그렇게 오래 살지도 않았잖아?』

어머니의 위험천만한 숫자 감각에 한 마디하고 싶은 기분을 눌러 참으며, 만코마는은 점잖게 되물었다. 오래 살지 않았다는 말은 그저 단순한 개인적인 감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 3941년은 외우주에서 오래 살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도 않아.』

그래도 어머니의 반응은 변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다고 정해 놓고, 바꿀 마음이 없는 것처럼— 만코마는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이야기를 증명할 숫자를 건져 올렸다.

『4천 살은 외우주 인구 중에 어린 편에 속하는데? 하위 4.71901%에 들어가.』

만코마는의 데이터에 근거한 대답에 어머니 밀레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야 통계적으로 보면 그렇겠지. 그런데, 각인 교육에 그런 것도 들어있디? 별 걸 다 교육하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어머니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해도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거나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설득하기에는 수치나 사실보다는 차라리 제발 죽지 말라고 울면서 떼를 쓰는 편이 더 효과가 있으리라— 만코마는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괴었다.

『그러면, 왜 죽으려는 거야?』

태어나서 같이 살기 시작한지 7~8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어머니는 늘 만코마는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뜯어 말리고 싶은 행동을 하고는 했다. 그 날도 그랬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런 일을 하도 많이 겪다 보니 이내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 어쩌면 또 내키는 대로 일을 저질렀을 뿐이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혼자서 아니다 싶어 져서 없던 일로 할지도 모른다. 지난 7~8백년 동안, 늘 그랬다.

그런 만코마는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 밀레나가 문득 긴 미소를 지으며 숨을 들이 마셨다.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리라는 신호였다.

『내가 지구주의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건 전에 이야기했지?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내가 태어난 종파는 구원이 오직 지구에 있다고 믿었고, 그 구원을 얻기 위해 종파 구성원 모두가 그 삶을 지구로 가는데 온전히 바쳐야 한다고 믿었어.

아마 내 생각에 수많은 지구주의 종파들 중에 가장 엄격한 교리를 가진 종파였을 거야. 클론 재생성은 지옥에 떨어질 죄이고, 번식 역시 남녀가 짝을 지어 직접 임신해야만 했고, 재생 식품을 입에 대는 것도 절대 금지에, 항해 중에 냉동 수면을 취하는 것도 불경하다고 금할 정도였지. 아무튼 지구주의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모든 덕목을 빠짐없이 갖춘 종파였어.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잘 버티면서 자랐다 싶네. 아무튼 나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외우주 사십칠GE의 어떤 행성에서 우리 종파의 고행 정비 기간이 백이십 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태어났어. 지구주의자들에게 있어 고행 정비 기간이란, 항해 중에 이종 물질 탱크를 충전할 필요가 생기거나, 비축해둔 식량이나 금속, 화학 물질 같은 필요 자원이 일정량 이하로 떨어지거나, 또 무슨 사고가 있어서 인구수가 급속하게 줄거나 하면, 항해를 멈추고 주변 행성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기간이야. 경우에 따라 좀 차이는 나지만, 짧으면 백오십년 정도에서 길면 삼사백년까지 걸린다더라.

우리 부모님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는 수렵반 소속이셨어. 그러니까 나도 당연히 수렵반의 일원이 될 운명이었지. 어릴 적에 학교에서 어린이 공통 교양 교육을 받던 때는 마냥 노래를 부르는 게 좋아서 예술반에 속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미래를 종파 지도자들이 정해주는 게 지구주의자의 삶이니까, 결국 부모님의 임무를 상속받기 위해서 수렵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

어린이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곧바로 라이플을 다루는 법부터, 동물을 추적하고 유인하는 법, 협동으로 사냥하는 법,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구분하는 법, 산속을 안전하게 거니는 법, 그리고 맹수에 대비하는 법… 뭐 그런 걸 배우면서 산을 타고, 숲을 거닐었지.

그래도 그때는 주변 모두가 배운 대로 자라고, 하라는 대로 살았기 때문에 나 혼자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슬프거나, 부조리함에 분노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 게다가 사냥이 생각보다 적성에 맞기도 했고, 같은 수렵반 사람들과 같이 고생하면서 유대감도 쌓으며 충실감을 느낄 수도 있었지. 또 무엇보다 종파 구성원들의 먹거리를 마련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스스로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꽤 높았거든.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 후대는 언젠가 우주로 나가서 지구로 간다는데 정작 나는 이 행성 위에서 살다 죽고 끝나겠구나 하는 점이었지.

가끔 높은 산으로 사냥을 나가게 되면, 높은 곳에서 멀리 선착장에 착륙해 있는 우리 종파의 수송선들을 바라다보고는 했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선도선 ‘저크시스’는 멀리서 봐도 정말로 멋있었는데, 그 커다란 선체 위로 정비반들이 불꽃을 튀기면서 수선 작업을 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때마다 나도 우주에 나가보고 싶다— 그 신기하다는 알큐비에레 비행을 경험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에 빠지고는 했지.

뭐, 때때로 그런 구경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어긋나는 일 없이 열심히 살았어. 정말 열심히 살았지. 열 일곱에 작은 수렵팀을 이끌게 된 후부터는 정말 단 한 번도 수렵을 빠진 적도 없었고, 할당량을 넘긴 적은 많아도 채우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러다 내가 스물 아홉이 되던 해, 우리 집안이 속해 있던 영토에 이상한 행성 풍토병이 돌았어. 그냥 독감 같은 병이 아니라 사람이 우르르 죽어 나갈 만큼 독한 병이었는데, 우리 종파가 가진 의료 기술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 지도자들은 인구수가 지나치게 주는 일을 막기 위해서 우리 집안이 속해 있던 영토를 폐쇄했지.

우리 종파는 우주에서 죽더라도, 후세가 지구에 도달하는 그 날, 구원받음으로 모두가 지구에서 부활한다고 믿는 부류였으니까, 큰 난리가 나지는 않았지. 우리 가문 사람들은 정말로 신기할 정도로 지도자들의 판단을 순순히 받아들여서 폐쇄된 영토 안에서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렸어.

그렇게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을 묻어 드리고 몇일 지나지 않아서 나도 행성 풍토병에 걸렸어. 죽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던 그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죽기 전에 우주에 한 번 나가보고 싶다고 말이야. 마침 조금 있으면, 외우주 사십칠GE 통합 관리국에서 정기 연락편이 도착할 시점이기도 했고, 그 연락선에 숨어 들어서 죽더라도 우주 구경하다가 우주에서 죽자는 생각을 했어.

전염병으로 죽어 가고 있던 탓인지, 내가 뭘 어떻게 해서 그 연락선으로 숨어 드는데 성공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아무튼 연락선에 숨어드는데 성공은 했지. 기침을 참으면서 화물칸에 숨어 있다가, 이륙을 시작하는 느낌을 받자 마자 이제 걸을 힘도 없는 몸으로 바닥을 기어서, 피를 줄줄 토하면서 화물칸 구석에 있는 손바닥 만한 창문으로 향했어. 제발, 죽기 전에 창문을 내다볼 수 있게 해달라고, 크리스천과 부디스트께 절박하게 기도를 올렸던 게 기억나.

그렇게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창문에 닿았지. 조그마한 창문으로 연락선이 떠오르며 지면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것이 보였어. 내가 스물 아홉 해를 살았던 곳이 점점 빠르게 멀어지고, 그렇게 커다랗던 선도선 ‘저크시스’까지 점점 더 멀어지면서 조그마하게 보이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펑펑 쏟아 지더라. 평생 살다가 죽어야 했던 행성을 드디어 벗어난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내가 드디어 죽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또 우주를 보고 죽기는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아.

그렇게 터진 눈물을 닦으면서, 조그만 창밖으로 보이는 우주를 조금이라도 오래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화물칸 확인을 하러 들어온 공무원이 날 발견하고 달려오더라. 그 놀란 얼굴 하며, 커다란 목소리 하며, 아무튼 나를 막 다그쳤는데, 나는 행성 풍토병으로 죽기 직전이었던 데다가, 우리 종파는 우주 공용어와 유사성이 이십오 퍼센트 이하인 크리올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때는 그 공무원이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는 줄만 알았지. 사람이 죽고 전염성까지 있는 병에 걸린 사람이 허락도 없이 몰래 승선을 했으니까. 그래서 일단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는데, 공무원이 들고 있던 홀로그램 패드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내 앞에 내밀더라. 읽을 수 없는 글 아래에 버튼이 하나 있었는데, 죽어가는 중이라 어쩐지 그게 내가 죽으면 시체를 소각하고 버리는데 동의하겠느냐— 그런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주 한 번 보겠다고, 허락도 없이 남의 우주선에 전염병을 달고 올라탔는데, 무슨 염치가 있어서 거절할 수 있겠니. 거기다 평생 소원도 이뤘는데, 죽은 다음에야 시체를 우주에 그냥 던져 버리던 태워 버리던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서 그냥 그 버튼을 클릭했는데, 공무원이 곧바로 허리춤에서 앰플 주사기를 꺼내더라. 순간, 나를 지체없이 처리하려는 줄 알았어. 피하고 싶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지. 병에 걸린 주제에 몰래 숨어들어서 미안하긴 한데, 죽을 때까지는 우주 좀 보게 해주지, 너무 박하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공무원이 꺼내든 앰플 주사기가 딱 관자놀이에 닿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

그런데 눈을 떠보니까 푹신한 침대 위더라. 놀란 숨을 몰아 쉬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한쪽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고, 하늘까지 둥글게 말아지는 지면, 그리고 하늘에는 거꾸로 선 건물들이 보이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내가 태어난 행성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지. 나는 외우주 사십칠GE 통합 관리국의 거대한 콜로니 병원에 멀쩡히 살아 누워 있었던 거야.

알고 보니 연락선에서 만났던 그 공무원은 나에게 살고 싶으면 망명을 하라는 말을 했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동의 버튼을 눌렀던 거지. 그렇게 얼떨결에 외우주 사십칠GE에 망명 신청을 해버린 덕분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사이 치료도 받았고, 싸구려이긴 해도 무료 클론 재생성DB 등록도 받았고, 우주 인류 공용어 각인 교육도 받은 상태로 깨어 났어.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외우주 사십칠GE 시민으로 되살아났다는 사실이 놀랍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일은 없었어. 배운 대로 살기는 했지만, 배운 대로 믿지는 않았으니까. 죽어야 나중에 지구에서 부활할 수 있는데! 하는 고민은 일절 들지 않았지. 어차피 지구주의자의 나는 풍토병에 걸린 시점에서 죽어버린 거니까, 이제부터는 외우주 인류로서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자고 마음 먹었어.

망명자 지원 프로토콜 정책에 따라 마지막으로 지원받은 건, 일자리였어. 내 첫 직업은 외우주 사십칠GE의 육번 콜로니 상하수 관리소 청소부였을 거야. 청소부라고 해도 지구주의자들의 청소부와는 달라서 내가 청소 도구를 들고 다니며 쓰레기를 치우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어. 그냥 시간에 맞춰 지정된 청소 로봇을 작동시키고, 다시 회수하고, 퇴근 전에 청소 로봇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수리를 보낼 것이 있으면 수리를 보내는 게 전부였는데, 지구주의자 시절에 하던 사냥 보다 한없이 단조로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새롭고 모든 것이 즐거웠어.

출퇴근 시간에 콜로니의 거대한 전자기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우주 공간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고, 오가는 길에 오히려 지구주의자 시절에는 먹어볼 수 없었던 재구성 된 지구 음식들을 하나 둘 사서 먹어보는 재미도 있었고, 조그마하지만 지구주의자의 수송선보다 훨씬 정교한 것 같은 청소 로봇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웠지.

그렇게 적지만 꾸준하게 일하면서 플래티넘을 벌다가, 늙어 죽은 뒤에 처음으로 클론 재생성도 해보기도 했어. 첫 클론 재생성은 외우주 사십칠 통합 관리국이 무료로 등록해줬던 공기업에서 했었는데, 합성 탱크의 배양액 속에서 재생성하는 방식이었어. 눈을 뜨자 마자 폐와 위속에 가득 찬 배양액을 토하고, 또 피부도 물에 불어서 막 일어나고… 너무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만 나. 오죽하면 외우주 사십칠GE 시민이 된 뒤에 처음으로 병가를 썼다니까. 너는 내가 너무 비싼 클론 재생성 서비스만 사용한다고 뭐라고 하는데, 너도 그걸 겪어 봤다면 나처럼 됐을 거야.

아무튼, 그 육번 콜로니에서만 칠팔백 년을 살았던 것 같아. 열심히 플래티넘을 모아서, 좀 더 좋은 각인 교육을 받고, 그 교육을 통해서 더 좋은 직장을 얻고, 수입을 늘려서 집도 사고, 유명한 휴양지로 여행도 다니기도 했지. 그러다 슬슬 지겨워진다 싶을 즈음에 번 돈을 몽땅 들고, 알큐비에레 비행선을 타고 다른 외우주로 이주를 했지. 그렇게 여기저기 외우주를 옮길 때마다 직업도, 사는 방식도 완전히 바꾸며 살았어. 어디에서는 장사도 해보고, 또 선박 건조업에 참가도 해보고, 개척 중인 외우주 백십칠TA에서는 배운 사냥 기술을 살려서 개척군 용병도 해보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원없이 하면서 살았지.

그러다 여기 외우주 육십칠RD에 정착한 것이 천년 전이야. 그동안 참 난리통 같은 삶을 몰아치듯 살았으니까, 이제는 조금 담백하고 소박하게 살아볼까 싶어서 단순 화물 운송업을 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여기에 와서 오십년 정도 지났나 싶을 때, 그 일이 터졌어.

어느 날, 클론 재생성으로 눈을 떴어. 클론 재생성 자체야 별로 놀랄 일은 아니지만, 기록을 확인해보니 이전 클론 재생성에서 겨우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거기다 내가 죽은 곳이 우주 한가운데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어. 일단 노화로 죽은 게 아니라면, 사실상 사고사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 사고 장소가 우주 한가운데라면 혹시라도 밀레나 일호가 유실되었을까 걱정이었지.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 차 한잔을 마시고, 서둘러서 회수 시설로 안내를 받았어. 응? 그래서 내가 비싼 클론 재생성 서비스를 사용하는 거야. 돈은 그런데 쓰려고 버는 거지.

아무튼 회수 시설에 도착해보니, 다행히 밀레나 일호는 아무런 손상도 없어 보였어. 선체 스캔 결과에서도 결함은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안심하고 올라타보니, 조종실에 내 시체가 쓰러져 있더라. 오른 손에는 수리용 대못 공구를 꼭 쥐고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커다란 못이 딱 꽃혀 있는 모습이 누가 어떻게 봐도 자살이었지.

삼천 년을 넘게 살면서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어. 내가 자살을 했다니, 믿어 지지가 않더라. 내가 자살을 해야 할 이유가 있기나 한가? 아니, 클론 재생성으로 자살 자체가 의미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해를 한 거지? 혹시나 싶어 자살자들이 남기기 마련이라는 자아 기록이라도 있을까 싶어 찾아봤지만 그런 기록은 없었어. 그게 아니면 돈 문제라도 생겼나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결국은 삼천 년이 넘도록 살아왔는데, 어쩌다 한 번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렇게 시체를 정리하고, 밀레나 일호도 다시 깨끗하게 정비하고 다시 살기 시작했는데— 오십년 정도 지나서 또 자살을 한 거야. 여전히 이유도 알 수가 없었고. 그 뒤로 서너 번 더 자살을 했는데, 이유를 모르겠으니 정말 미칠 것 같더라.

그래서 일단 나 스스로를 감시하기 시작했어. 하루를 마무리할 때, 그리고 생각이 날 때마다 내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서 자아 기록을 꼼꼼히 남기고, 감시 카메라를 달아서 녹화까지 하기 시작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이유를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어. 그래도 다음 자살을 실행에 옮기는 장면은 찍을 수 있었지.

또 새롭게 자살하던 날, 멍하니 조종석에 앉아 있던 내가 지구어로 한 마디 중얼거렸어.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네.

분명히 내가 어렸을 적에 쓰던 지구어였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정말 당황스러운 기분이었지. 아마 그동안 외우주 공용어의 각인 교육을 몇 번이고 받은 탓이 가장 컸을 거야. 각인 교육이라는 게 말이 좋아 교육이지 그냥 뇌 속에 정보를 세겨 넣는 거니까, 외우주 섹터를 옮겨 다닐 때마다 받은 언어 관련 각인 교육만 여서 일곱번 되었으니, 가장 아래 있는 지구어는 아예 다 지워진 거겠지.

급한대로 번역기를 사용해보긴 했는데, 제대로 된 번역은 얻을 수가 없었어. 내가 배운 우리 종파의 지구어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우리 종파가 속해 있던 외우주 섹터의 통합 공용어의 크리올어였는데, 어떤 번역기를 가져오더라도 올바른 뜻을 유추하긴 힘들었을 거야.

아무튼 통합 관리국의 인증까지 받은 번역 서비스로 추측해 본 그 한 마디 내용은, 지금부터는 매우 끝이 온다-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었어. 나도 몰라. 결과값은 여러가지 있긴 했지. 지금부터는 매우 끝이 온다-가 가장 높은 정확도라고 내놓은 대답이었어. 그거 말고도, 지금이라면 매우 끝이 온다, 지금부터는 진실되게 끝과 같다, 지금이라면 올바르게 끝과 같다-처럼 리스트는 끝이 없었는데, 문제는 뭐 하나 알아먹을 수 있는 번역이 없었다는 거지. 다들 비슷하기는 해도, 문장들을 서로 비교해가며 유추해 보려고 해도 기댈 대가 하나 없었고, 무엇보다 아예 틀린 번역일 가능성도 있었고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뜬금없이 알아먹을 수 없는 지구어로 한 마디를 중얼거린 다음에는 감시 카메라를 꺼버리고 자살을 하더라고. 그렇다고 카메라에 찍힌 내 표정과 행동에 평소와 다른 점이 있지도 않았어. 얼굴은 평온했고, 움직임도 자연스러웠지. 차라리 어딘가 홀린 듯 눈이 풀려 있다 거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뻣뻣한 움직임이라도 보였다면, 해당 좌표에서 이상한 전파를 맞아서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하고 찾아보기라도 했을 텐데, 알아들을 수 없는 지구어 한 마디 외에는 소득이 없었어.

결국에는 그저 지구주의자 시절, 체험으로 배운 지식 위에 전자기적인 각인 교육을 여러 번 받은 탓에 어딘가 고장이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었는데, 병원에서 풀 스캔을 받아봐도 문제 있는 곳은 없었어. 그렇게 거의 유일한 가설이 부정 당하고, 다시 상심에 빠져 있는데 문득 외우주로 망명한 수많은 지구주의자들 중에 나만 이러는가-하는 생각이 들더라. 혹시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거나, 겪었던 망명자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에 미친듯이 정보를 찾기 시작했어.

난생 처음으로 지구주의자들의 정보를 찾으면서, 정말 많은 충격을 받았지. 지구주의자들이 각자의 종파에 따라 서로 다른 행성을 지구라고 믿는다는 것도, 지구주의자이면서도 크리스천과 부디스트를 둘 중 한쪽만 믿거나, 아예 둘 다 믿지 않는 종파가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어. 자살 문제와는 별개로, 왜 진작에 이런 재미있는 정보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재미있었지.

망명자 수가 얼마나 되나 알아보니, 망명자 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적어지면서, 칠천 년 전부터는 거의 끊긴 상태였어. 사실 떠날 지구주의자들은 다 떠난 것도 사실이니까, 신기한 일은 아니었지. 신기한 건, 망명자들의 끝이었지. 대부분의 망명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모이게 되고, 모여서는 다시 지구를 향해 떠났더라. 아니면, 범죄자가 되어서 추적을 피해 다니고 있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연락이 끊기거나.

결론만 말하자면, 외우주 육십칠 RD에서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망명자는 단 다섯 명이었어. 나, 그리고 카스란테 콜로니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부부 두 사람, 나처럼 떠돌아다니는 운송 상인 한 명, 그리고 통합 공무원에서 공무원으로 일 하는 사람 한 명,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였는데, 나만 빼고는 다들 일만 년 이상 산 사람들이더라. 그렇게 내가 제일 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드디어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들었어.

모두 나보다 세 배 이상은 산 사람들이니까, 나 같은 경우를 겪었을 가능성도 있었고,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라도 있을 가능성이 높았지. 그래서 일단은 꼭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어. 그 중에서 가장 만나기 쉬운 사람은 역시 공무원이 된 망명자였는데, 통합 관리국 공무원은 정책에 따라 직위와 직장까지는 공개가 되어 있었으니까 찾기도 쉬웠지.

마음이 급하다 보니 무작정 그 망명자가 일한다는 통합 관리국의 콜로니로 향했어. 아마 하급 법원에서 일하고 있었을 거야. 콜로니에 도착하니 마침 아침이라, 숙소를 잡지도 않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하급 법원으로 갔지. 그만큼 절박했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아. 딱히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맴돌더라.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하급 법원 건물로 뛰듯이 걸어 들어 갔어. 당연하지만, 하급 법원은 사회 상호 교류 유지 법안이 없었다면 사람을 고용할 필요도 없이,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능 중시형 관공서다 보니, 이른 아침의 방문객은 나 하나뿐이었지. 내가 급한 마음으로 기세 좋게 걸어 들어가니 데스크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공무원들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던 게 기억나. 누구에게 직접 민원이라도 넣으려고 왔나— 걱정하는 눈치들이었지만, 내가 향한 곳은 안쪽에 위치한 보안 데스크였어. 보안 데스크에는 경비복을 입은 마흔 줄 정도의 남성이 서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망명자였지. 가슴깨의 홀로그램 명찰에 ‘란’이라고 찾던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란에게, 나는 무작정 내가 망명자라는 사실과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니 시간을 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 대신 비싼 점심을 사겠다고 했지. 놀란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은 란이 문득 평온한 얼굴로 돌아오더니, 자기 자신이 망명자였었다는 사실도 까먹고 있었다면서 살짝 웃더라.

- 같은 망명자를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한 2~3천년 정도 된 거 같은데….

순간 모를 위화감을 느꼈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중력값이 높은 행성에서 태어난 덕분에 외우주 평균보다 작은 키부터, 살짝 어두운 얼굴 피부색,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가 이 사람이 분명 지구주의자 망명자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어쩐지 지구주의자라고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 그럼, 11시 45분에 28-1구역에 있는 지구나무집에서 뵙죠.

- 정말 고마워요, 그럼 있다가 이십팔 다시 일 구역에서 뵈어요.

그래도 다짜고짜 찾아왔는데도 같은 망명자라며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더라. 위화감이고 나발이고, 바라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약속대로 재생성한 지구 음식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에서 란과 만났어.

- 이 콜로니에서 제일 괜찮은 지구 음식 전문점이에요. 900년 이상 되었을 걸요?

식당으로 들어와 맞은 편 의자에 편하게 앉은 란이, 그래서 궁금한 게 무어냐고 묻더군. 뜸을 들일 것도 없이 바로 물었지. 그냥 바로 물었지. 내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주기적으로 자살을 하고 있는데, 혹시 그런 경험을 했거나, 다른 지구주의자 망명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느냐고 말이야. 질문을 들은 란이 별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하더라.

- 아, 그런 자살이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입을 연 란이 설명하길, 그건 망명자가 지구주의자에서 외우주 인류로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자신도 그런 과정을 겪었고, 그때 정말 당황스럽기도 했고, 돈도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었다고 하더군. 직장에서 자살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웃더라.

- 저 같은 경우는, 가만 있어보자…. 적어도 61회는 자살 했을 거에요.

- 육십 일회나요? 그렇게 많이 자살해야 끝나나요?

외우주 인류로 완성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더 신경 쓰이는 건 자살 횟수였어. 육십 일회나 그 이상을 자살해야 이 현상이 진정 된다는 이야기인데,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란이 고개를 가로저었어. 다행이었지.

- 아뇨, 저도 잘 몰라서 그랬던 거에요. 이 시기에는 자살하자 마자 클론 DB를 업데이트 하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빨리 빨리 진행이 되니까요. 제가 61회를 재생성하긴 했지만, 앞에 30~40회는 아무 의미 없는 재생성이었거든요. 타이밍만 잘 맞추면 30회 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요?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이었어. 빨리 진행이 된다는 건 뭐고, 또 끝난다는 건 뭔지 알 수가 없었지.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더니, 란이 자리에서 살짝 일어서서는 갑자기 손을 들어 자기 사타구니를 꾹 눌러 보이는 거야. 외우주 사람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난 시간이 지났어도 아무래도 바탕이 지구주의자였으니 살짝 불편하기는 했지. 그런데, 란이 다시 연거푸 사타구니를 눌러 보이는 거야. 화를 내야 하나 망설이는데 문득 깨달았지.

너도 지구주의자와 외우주 인류의 가장 큰 신체적인 차이가 뭔지 알지? 그래, 생식기의 유무야. 외우주 인류는 성인이 되면 생식기가 퇴화되어 사라지잖니. 그런데, 란의 생식기가 퇴화되고 없더라고, 지구주의자 출신 망명자인데.

란이 말하길, 시술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어. 어느 날부터 정기적으로 자살을 하기 시작했는데, 반복하는 동안, 생식기가 조금씩 퇴화하더니 결국 사라져 버렸다더군. 그리고, 그 후로는 자살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걱정하지 말라더라. 자기가 아는 사람들도 그랬다면서.

- 여기서 좀 떨어진 콜로니에 망명자 부부가 있는데, 그 사람들도 그랬어요.

드디어 이 반복되는 자살의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후련하기 보다는 소름이 돋더라. 처음 인사를 나누는 순간 란에게 느꼈던 감정— 어쩐지 지구주의자 같지 않다는 느낌의 정체를 알 것 같았어. 그때 란이 말했어. 온전한 외우주 인류가 되는데 굉장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제 마음도 편하고, 자살도 하지 않고, 필요도 없는 생식기 때문에 불편했던 점도 사라지고 정말 홀가분하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구주의자로서의 란은 사라지고 없었던 거지.

식사를 마친 뒤에 곧바로 식당을 나와 택시를 타고 콜로니 선착장으로 향했어. 보통 콜로니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여기저기 둘러보는 습관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눈물이 나더라. 지금부터는 매우 끝이 온다— 제대로 해석도 불가능했던 그 번역문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지. 지구주의자인 내가 끝난다는 뜻임에 틀림 없었어. 잘은 모르겠지만, 그걸 느낀 나는 내가 아니게 될까 봐 두려워서 자살을 했던 거야.

지구주의자 출신이라서, 영원히 지구주의자여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문제는 이대로 라면 나도 란처럼 완벽한 외우주 인류가 될 거고, 그러면 지구주의자로서의 나는 조금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는 거지.

그렇게 되는 원리는 모르겠어. 아까 이야기했지만, 아마도 각인 교육 탓인거 같아. 알겠지만, 각인 교육이라는 게 뭘 배우는데 빠르고 편하긴 하지만, 뇌에 정보를 직접 새겨 넣는 방식이잖니. 무슨 차이냐고? 자아 형성에 큰 차이가 있지. 보통 배움은 자아 형성과 연결되기 마련이야. 이를테면, 나는 숫자를 배울 때 지구주의자 방식으로 배웠어. 내가 배운 셈은 과일의 갯수나, 사냥한 동물의 마릿수와 연결되고, 또 수렵을 위한 라이플의 탄알 개수나 사냥터와의 거리… 그렇게 행성의 삶과 직결되지. 그러니까 자아와 숫자, 셈이 하나로 엉켜 있는 거야.

하지만, 각인 교육은 다르지. 내가 알기로 각인 교육은 외우주 통합 관리국에서 연구를 통해서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새겨 넣는 방식이야. 이를테면 숫자나 셈에 대한 지식은 공통 화폐인 플래티넘을 기준으로 각인되지. 외우주 출신의 사람들은 모두 플래티넘을 기준으로 숫자를 파악하고, 셈을 한다는 이야기야. 너도 그렇지 않니?

그러니까 외우주 사람들은 지식과 자아 형성이 별개로 이뤄져. 내 경우에는 화물선 조종을 배운다고 할 때, 실제로 운전해 보면서 지식과 경험을 동시에 쌓겠지만, 외우주 사람들은 각인 교육으로 얻은 지식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실제로 운전해 보면서 지식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좁혀가는 거야. 결과는 같겠지만, 과정은 전혀 틀리지.

나는 이미 지구주의자로서 자아가 형성된 뒤에 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시민 각인 교육을 한 번 받았고, 그 다음에는 지식을 관련 부위에 각인하는 형식의 교육을 여러 번 받았지. 아마도 거기에 문제가 있을 거야. 내 뇌에 존재하는 지구주의자일 때 경험으로 얻은 자아로 형성된 지식과 각인 교육으로 새로 얻은 자아 없는 지식이 충돌하기도 할 것이고, 그 각인 교육으로 얻은 자아 없는 지식을 경험으로 소화 하려다 보니, 뇌를 포함해서 신체 구성이 외우주 인류 쪽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았어.

내 생각이 맞던 틀리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또 그깟 생식기가 사라지건 말건 그것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지. 지구주의자인 내가 사라져 버린다는 거, 그게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어. 어떻게 해야 날 지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떠올린 게….

바로 너였단다.』

7.

클론 재생성 기술의 대중화는, 생식기가 퇴화할 만큼 외우주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외우주의 인구수를 일정 수치에 영원히 고정시켰다. 그렇게 지난 6만년 동안, 외우주의 인구수는 늘어야 할 만큼 주는 일도 없었고, 줄어야 할 만큼 늘지도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가 정말로 죽어서 사라지길 원하거나, 또는 굳이 낳아서 늘리길 원하는 일은 극히 드물고도 특수한 경우에 속했고, 그런 특수한 경우는 외우주 통합 관리국이 민감하고 치밀하게 통제하는 영역이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만코마는을 낳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문을 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먼저 아이를 낳으려는 이유에 대해 인터뷰를 몇 번이고 거쳐야 했고, 기관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양육 계획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반려 받고 수정하고 다시 제출하기를 반복해야 했고, 그 다음으로 양육 관련 교육을 이수하여 자격을 얻은 뒤에 양육 책임 각서까지 쓴 다음, 마지막으로 계획을 충족할 수 있는 양육 자금 예치를 끝마쳐야 아이를 낳아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그렇게 어머니가 만코마는을 낳기 위한 허가에 받는데 들어간 시간이 25년이었다.

그렇게 지난한 세월을 거쳐 허가를 받은 뒤에는, 그저 돈과 시간만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통합 관리국에서 번식 절차를 밟는 동안 미리 찾아 놓은 공여자의 DNA를 들고, 고전적인 물질 배양 방식을 고집하는 번식 회사를 찾아 만코마는을 의뢰했다. 그리고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만코마는이 태어난 뒤에 배달을 받는 대신, 직접 회사 로비를 찾아가 만코마는을 품에 안았다.

『지구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배 아프게 낳은 자식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렇게 고생해가며 낳은 자식이라서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뜻이야. 하지만 꼭 배가 아프지 않더라도 소중하더라.』

어머니의 양육 계획은 시작부터 지구주의자다운 면모가 있었다. 보통 1개월이면 끝나는 고속 배양을 마다하고, 실제 지구주의자들의 평균 임신 기간인 10개월로 배양 기간을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안전한 3~4살 상태의 아이가 아니라 갓난 아기를 원했다.

『처음으로 내 품에 널 받아 든 순간을 아직도 기억해. 따뜻하고, 가볍고, 작은 숨소리도, 자고 있던 얼굴도.』

한참동안, 모닥불만 바라보던 어머니 밀레나가 겨우 고개를 돌려 만코마는을 마주 봤다.

『아무튼 단지 내 자살을 막아 보려고 널 낳았다고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만코마는은 픽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해본적도 없었다. 심지어 자아를 잃을 위기에 몰려 만코마는을 낳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금방 듣고도, 어쩐지-라거나,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짚이는 구석 역시 없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함께 한 7~8백년은, 그저 평범했다. 항상 좋고,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적어도 어머니가 만코마는에게 무슨 용도나 목적 의식을 품은 일은 없었다고, 만코마는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었다.

『알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외우주 47GE를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방랑을 멈춘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통합 관리국에 제출한 계획대로 만코마는이 생식기 퇴화를 마치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좋아하는 여행을 멈추고 콜로니에 정착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는 항상 만코마는의 곁에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식사도, 운동도, 산책도, 놀이도 함께 했고, 잠들기 전에는 어머니가 들려주는 신기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도 있었다. 형편이 되는 한도 내에서 배우고 싶은 교육은 전부 받게 해주었고, 해보고 싶은 일도 해보면서 지냈다. 유일한 흠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늘 되 뇌이던 또래 친구가 없다는 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아쉬움이었고, 만코마는은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다. 거기다 외우주 67RD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는 1년에 3만명 남짓이었고, 어린 아이들끼리의 교류는 인류의 피상적 교류 방지 법안에서 제외된 부분이라 어쩔 수 없기도 했다.

그렇게 부족하지 않은 유년기를 거쳐, 생식기 퇴화기를 맞이한 만코마는은 육아 현황 관리국에서 나온 공무원이 희망 진로에 대해 묻자 아무런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대부분의 신생아들이 그렇듯이 어머니를 따라 가업을 함께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나는 엄마에게 어땠어?』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밀레나가 어떤 동기로 만코마는을 낳았다 하더라도, 만코마는에게 있어서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만코마는은 어머니에게 어떤 딸이었을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어머니 밀레나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건….』

한참이나 말없이 만코마는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모닥불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불쏘시개로 불을 뒤적인다.

『널 만나고부터 다시 사는 재미를 찾았지.』

모닥불의 빛을 받아 노을 빛깔로 일렁이는 얼굴로, 어머니 밀레나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하루하루가 정신을 못 차리게 재미있었거든. 뭐든 처음은 재미있다고 해도, 너는 정말로 지루할 틈이 없는 아이였지. 매일 잠깐 눈을 뗀 사이에도 자라나더라. 앉아 있지도 못하더니, 일어나 앉아서 배밀기를 하고, 그 다음에는 기어 다니기 시작하고, 짚고 일어서고, 그리고 걷고, 말을 하고 날 부르고, 웃고 울고…. 자살할 틈을 주지 않았지. 그러더니 금새 어른이 되어서는 날 따라 화물 운송을 하겠다고 하더라. 같이 다니다가 클론 재생성을 하고 눈을 떴더니, 나보다 늙은 널 마주했던 기억도 나네. 자매처럼 보이는 나이일 때도 있었고….』

이야기를 늘어놓던 어머니가 문득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신다. 그러고 보니 지난 7백여년간의 추억 속에, 어머니가 자살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같이 살면서 엄마가 자살하는 걸 본 적이 없네.』

그러자 어머니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자살은 안했지만, 너한테 서너 번 죽어 보긴 했지. 』

『2번이야. 』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어머니에게 만코마는은 샐쭉거리며 답했다. 절대로 다투거나, 원한을 품었다 거나 하는 험한 이유로 발생한 일은 아니다. 아직 밀레나 1호의 운전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 어머니 밀레나의 클론이 담겨오는 배달 포드를 그만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부숴버렸을 뿐이다. 두 번 연속으로 일을 저지른 건 스스로 생각해도 좀 아니긴 했지만, 화물선 조종은 각인 교육만 받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어머니가 곁에 없는 상황에서 홀로 운전한 탓도 있었다.

『그래, 그것도 나름 괜찮은 일이지. 덕분에 화물선 운전도 더 잘하게 됐잖니. 』

어머니, 밀레나는 그동안 수천번은 나누었을 농담을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마무리하고는 한참을 크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춘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이제는 때가 된 거 같아.』

『뭐가?』

『죽을 때 말이다.』

『꼭 그래야 돼?』

멀리 두고, 멀리 두어 버렸다는 사실조차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어머니를 향해 만코마는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지난 칠백 년 동안, 자살하지 않게 된 게 아니야. 참을 수 있었던 거지. 가만히 앉아 있는데, 순간 울컥하고 자살 충동이 일곤 했어. 다행히 널 보면, 널 생각하면 충동이 잦아 들어서 버틸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나랑 있으면 자살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거 잖아.』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만코마는에게 어머니,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자살을 참을 수 있게 된 거지, 자아가 죽어 가는 건 막을 수가 없었어.』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그 자아가 죽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자아가 죽는다는 이야기, 무슨 어린 감수성에 젖어서 할 말이 아닌가. 차라리 뇌세포가 죽어 간다면 이해하려고 해보겠지만, 아무런 물증도 없는 그저 그런 것 같다는 느낌에 죽음을 결심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우리 같이 우주로 나가기로 정하면서, 일을 나눠서 맡았지?』

같이 우주로 나가서 운송업을 하겠다는 만코마는에게, 어머니는 동업자로서 일을 맡겼다. 만코마는은 주로 세금이나, 거래 업무, 운송 계획과 같은 업무를 맡고, 어머니는 밀레나 1호의 운전이나 수리를 맡았다.

『그게 뭐?』

『사실은 자살 충동을 촉발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냈거든.』

『세금 계산이 자살 충동을 일으킨다고?』

문득 예상이 되면서도, 어쩐지 엉뚱한 질문을 해버린다. 어머니는, 잠깐 말이 없다가 만코마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숫자가 계기였지. 뭐든 숫자를 생각하고, 좀 길게 복잡한 셈을 하다 보면 갑자기 머리 속이 엉망이 되면서, 죽고 싶어 지더라. 똑 같은 숫자라도, 네가 말하는 999와 내가 말하는 구백 구십 구는 무언가 달라. 머릿속 어딘가 충돌이 생겨서 그렇게 된 거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렇게 숫자를 셈하다 보면 자살하게 되더라고. 요전에 뭔가 좀 부탁하려고 했더니, 네가 자고 있었거든. 모처럼 푹 자고 있는 것 같길래 깨우기도 뭐하고 해서 무심결에 내가 하지, 뭐— 하고 생각하고 조종석에 앉아서 궤도 계산을 한참 하고 있다가, 문득 깨달은 거야. 이렇게 몇 시간 동안 계산을 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더라.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

만코마는을 바라보던 어머니, 밀레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순간 흐려지고, 눈물을 길게 흘린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어릴 적, 다친 만코마는을 붙잡고 어쩔 줄 모르던 때 이후로, 아마도 몇 백년 만에 보는 눈물이다.

『언젠가는 이 넓은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구석구석 즐기고 싶던 때가 있었어.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클론 재생성을 관두고 죽는다는 생각 따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하지만, 그게 내가 아니면 무슨 소용이니. 나는 내가 아닌 나로 사는 건 정말 싫어. 죽는 것보다도 더.』

어쩐지 모르게 어머니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아니, 외면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어머니가 죽겠다고 내린 결정을 피할 수 없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온 거야. 우연처럼 우주로 나오는 소원을 이루더니, 아무 노력도 없이 삼천구백 년을 더 살면서 온갖 재미있는 경험은 다 겪었지. 여기서 더 바라면 욕심이다 싶기도 해. 이제는 잘 마무리하는 것만 남은 거지.』

결국에는 만코마는도 시선이 뜨겁게 달아올라 버렸다. 보이는 모든 것이 번지더니, 아래로, 흘러내린다.

『마무리는 어떻게 하는 건데?』

이제는 눈물을 눈가에 담은 채로, 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널 놓아 줘야지.』

『날 혼자 두는 게 마무리야?』

결국은 감춰 두고 싶었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 버리고 만다. 혼자가 된다는 것, 그것이 싫고 무서웠다. 어머니는 그저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그럼, 너는 나랑 언제까지 살 생각이었니? 사실은 이 행성이 아니라 다른 행성에 가보고 싶었다거나. 화물 수송 말고 다른 직업을 가져보고 싶다거나? 그래서 언젠가는 꼭 독립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니? 언제까지고 내 옆에 있을 생각이었어?』

『다들 그러잖아.』

외우주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들은 대개 부모의 직업을 따르는 삶을 산다. 외우주에서 스스로를 여러 명 만드는 것은 법으로 절대 금지다. 그러니 부지런하게 사업을 하다가, 확장이 필요해지면 아이를 낳아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의 직업이 싫다고 하더라도, 외우주의 인구는 그렇게 늘지도 않고, 그렇게 줄지도 않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는 거의 없다.

통합 관리국의 관공서에서 마지막으로 일자리가 났던 것도 6천여년 전에 한 곳 있었을 뿐이고, 빈자리가 많이 나는 일자리는 주로 작업자가 클론 재생성을 할 돈이 없어 빈 자리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위험하고 낮은 자리가 전부다.

그렇게 거의 모든 신생아들은 각인 교육부터 부모가 원하는 교육만을 받고, 자라는 환경에서 익숙해지는 것도 부모의 직업이라, 어지간히 부모와의 사이가 틀어지거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가 주는 직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아니야, 내가 널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러니. 화물선 한 척 더 몰기 위해서, 그런 의도로 널 낳은 게 아니란 말이야.』

알고 있었다. 만코마는은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하기로 정했다고 말했을 때, 잠시 동요하던 어머니의 표정을 실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맞닥뜨린 마냥 동요하던 몸짓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난 어떡해? 혼자 되면 뭘 해야돼?』

수많은 것들을 각인 교육으로 배우고 익혔지만, 혼자가 되는 것도, 살면서 무얼 해야 하는지 알아 내는 방법도 배운 적이 없었다.

『모르지.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살아온 게 아니야. 그냥 그때 그때 닥쳐온 상황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거야. 우연히 부모님을 일찍 잃었고, 그러다 보니 절대 불가능했던 선택을 할 수 있어서, 우주로 나와서 어쩌다 외우주 망명자가 되고, 우연히 여기에 와서 널 낳았지. 그러니까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 결국 너도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될 테니까.』

어느 사이, 눈물을 멈춘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풍토병은 아니지만, 나도 죽을 병에 걸린 셈 아니겠니.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우연으로라도 살 길을 찾게 될거야.』

부인할 수 없는 대답에, 만코마는은 슬쩍 눈길을 어머니에게서 하늘로 돌렸다.

『그러면, 한 3~4천년 확 쉬어 버리는 건 어때? 내가 어쨌든 해결책을 찾아볼 수도 있잖아.』

『그럼 너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 하염없이 날 기다리며 살 거 아니니.』

어머니는, 마음먹은 일은 절대 굽히거나 바꾸지 않는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만코마는이 넌지시 건네는 제안을, 담담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나는 네 지구가 될 생각이 없단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렇게 어머니는 어느 날 문득 만코마는에게 이별을 고했다.

8.

잠에서 깨고 보니, 어느 사이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만코마는은 긴 한숨을 내쉰 뒤, 어제의 긴 산행으로 쑤시는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접이식 의자부터 난로까지 모두 큐브로 되돌려 배낭에 담고, 어제 조금 남겨둔 물을 담은 텀블러를 들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어머니, 밀레나를 떠올렸던 탓일까. 평소에는 꾸지 않던 꿈을, 어머니 밀레나와 작별하던 날의 꿈을 꾸었다.

더 이상 선내 유영마저 힘들만큼 나이가 든 어머니가 문득 몇 일 신세를 지겠다고 하더니 그대로 앓아 누웠다. 만코마는은 침대에 누운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어느 행성의 모닥불 앞에서 죽겠노라고 이야기를 나눈 지 20여년이 흘렀어도, 스스로가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얼 해도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죽어가는 중에 애써 농담을 건낼 정도였다.

『나 자살을 왜 하는지 전혀 모를 때 말이다. 혹시, 어쩌면 우리 종파가 지구에 도착해서 구원이 실현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어. 나도 지구에서 부활해야 하는데, 멀쩡히 살아 있으니 죽게 만드는게 아닌가 하고. 그러니까, 어쩌면 그게 정말이라면 내가 깔끔하게 죽는 거 포기하고, 부활해서 널 만나러 다시 올 게.』

그 농담에 기대어 잠깐 웃었던 것도 같다. 재미가 있어서 라기보다는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희망에 기댄 웃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뒤에는 농담은 물론이고 짧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게 된 어머니 밀레나는 결국 앓아 누운 지 열흘이 되던 날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우는 건 당연한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조종석을 봐도 눈물이 나오고, 어머니가 만코마는을 위해 냉동고에 숨겨놓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발견하고 울고, 이제 한 사람이 누워도 좁은 침대에 누워서도 울고, 깨어나서 혼자가 되어도 울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확정하기 위해서 외우주 통합 관리국에서 장례 처리선이 도착하고, 혹시 모를 신분 위장이나 신분 판매를 방지하기 위해 관리자 입회를 통하여 어머니의 시신을 원자 분해하던 순간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눈물이 멈춘 것은 장례식이 끝나고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깬 후였다. 겨우 눈물이 멎은 뒤에 만코마는이 처음 한 일은, 클론 DB의 갱신이었다. 도저히 같은 과정을 다시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를 만큼 울고 나면, 그러면 점차 식을 거야. 난 이제 부모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이 나질 않아. 조금만 참으면 된다.』

다행히, 어머니가 남긴 이야기 그대로 만코마는은 곧 혼자라는 사실에 적응할 수 있었다. 가끔씩 없는 사람을 향해 말을 걸거나 하는 일도 줄었고, 화상 데이터가 없으면 어머니 밀레나의 얼굴은 흐릿했고, 목소리도 말투 외에는 떠올리기 힘들었다.

다만, 어머니 밀레나가 이야기했던, 알아서 찾게 될 거라는 하고 싶은 일은 시간이 흘러도 딱히 떠오르거나 하진 않았다. 운 좋게 목돈을 벌어 밀레나 2호를 구입하면서, 운송에서 채굴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말했던 하루 하루가 신나는 경험 같지는 않았다.

“….”

그런 생각과 함께 얼마나 걸었을까, 하늘에 옅은 저녁 노을이 질 무렵— 평탄한 산길 끝에 마침내 작은 주거 지역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역을 정사각형으로 가두는 무릎보다 낮은 벽, 그리고 아치 모양이었을 것처럼 보이는 입구 구조물의 잔재, 그리고 입구를 지난 안쪽에 정사각형의 넓은 공간과 그 구석에는 키 작은 거주용 건물이 두 채 있었다. 위성 사진으로 본 그대로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낮은 벽과 안쪽 바닥을 가득 메운 하얀 타일의 바닥이었다. 7천년이면, 비바람과 반감기를 거치며 닳고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부분이 보여야 할 텐데, 거의 대부분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벽과 바닥의 타일에는 모를 문자들이 빼곡하게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조금이지만 배워 놓은 지구어 지식으로 단어 하나 알 수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암호문인 듯 싶었다. 만코마는은 손목 패드로 드론을 조작하여 문자를 스캔해 보았지만, 역시 어디에도 맞아 들어가는 기록은 없었다.

산등성이의 작은 평지에 뜬금없이 지어진 시설이다. 비바람 맞기에도 딱 좋고, 온갖 풀나무에 둘러 쌓이기도 딱 좋은 곳이건만, 시설은 7천년이 넘도록 멀쩡하고, 심지어는 음각 문자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지면을 다질 때부터 온갖 특수 처리를 거친 뒤에 특수한 소재로 건축했음을 짐작케 했다.

설마 군용은 아니겠지— 만코마는은 곁에서 날고 있는 호위 드론 한 쌍을 최고 성능을 내도록 설정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구 안쪽으로 한 발 내딛었다. 부츠 아래로 밟히는 타일의 딱딱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잠깐 움츠렸던 만코마는은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호위 드론을 흘끔 바라보고는, 긴 숨을 한 번 내쉰 뒤 안쪽에 서있는 건물을 향했다.

다행히 건물 바로 앞에 도달할 때까지 별다른 일— 방어용 터렛이나 드론이 튀어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오른쪽 건물 앞에 도착한 만코마는은 슬쩍 외관을 훑어보았다. 낮은 벽과 바닥 타일과 마찬가지로 알아먹을 수 없는 문자가 건물 외벽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다만 사람 둘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넓이의 문 위에는 아무런 문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문에는 왜 아무것도 쓰지 않은 걸까. 만코마는은 문으로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대고 길게 쓰다듬어 보았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장갑 아래로 미묘하게 느낄 수 있는 묘한 에너지 흐름에 기대어 판단해 볼 때, 아마도 꽤 고급 소재인 카타니움 금속을 이용해 만든 것 같았다.

“허.”

카타니움은 플라티나 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꽤 돈이 되는 금속이다. 구조가 치밀하고, 녹슬지도 않고, 에너지 흐름과 파장을 잘 가두는 성질을 지닌 한없이 오래가는 금속으로 주로 1만년 이상의 수명이 담보 되어야 하는 이종 물질 탱크에 쓰였다. 이 특수한 금속 위에 음각으로 무언가를 새기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니, 뭔가 적을 엄두가 나지 않았으리라. 아무튼 이건 떼어가도 되겠네— 뜻밖의 발견에 감탄사를 뱉은 만코마는은 문에서 물러나 조그마한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기 시작했다.

외우주 67RD 통합 관리국이 제공하는 개인용 거주 시설을 적절하게 재활용한 건물이었다. 살짝 보이는 건물 옥상에는 송풍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태양을 향한 방향에 위치한 작은 창문가에는 역시 카타니움 소재처럼 보이는 금속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모를 암호문이 빼곡하게 새겨진 건물의 벽도 조금 전에 봤던 낮은 벽과 바닥 타일처럼, 정확히 어떤 소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실된 부분은 고사하고 표면 균열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건물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문 앞에 선 만코마는은 먼저 슬쩍 단단한 카타니움 소재의 문을 밀어보았지만, 역시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위 드론에게 붙어 있는 무기라면 문을 부수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단단한 금속을 부수려면 시간도 시간대로 들고, 유실될 금속양을 생각하면 너무 아깝기도 했다. 남은 방법은 건물 벽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뿐이지만,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상황에서 마음 편하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열리지 않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만코마는은 문득 문 옆에 위치한 스위치를 발견하고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들어 아무 기대없이 꾹 눌렀다.

“어?”

그러자, 절대 움직일 리 없는 문이 낮은 소리를 내며 양 옆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7천여년을 방치되어 있던 구동 장치가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만코마는은 놀란 마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아주 느리기는 해도, 문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보통 지구주의자들의 기술은 당연하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외우주 인류에 비하여 한참이나 뒤쳐지기 마련이다. 그나마도 이곳에 남아있는 지구주의자들의 유산은 지금으로부터 7천여년전의 기술로 만들었을 테니, 실질적으로 거의 9천년 정도는 뒤쳐진 기술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문이야 카타니움 금속으로 주조했으니 긴 시간동안 멀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구동 기관까지 이렇게 멀쩡할 수는 없다. 만약 구동 기관에 들어가는 부품까지 카타니움을 사용했다면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 있지만, 카타니움은 무척이나 드물고 값비싼 금속이다. 그런 비싼 금속으로 구동 기관같이 저급한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재력은, 아마도 외우주에도 없다. 하물며 목적지가 확실하다는 점만 빼면 그저 난민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지구주의자들에게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시설을 가둔 낮은 벽부터, 바닥을 빼곡하게 매운 타일, 그리고 건물 외벽의 상태도 지나치게 깨끗했다. 7천여년이라는 세월동안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청소를 몇 개월 정도 하지 않은 정도로 보이는 건,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소재도 그렇게 특별한 종류는 아니었고, 별도의 처리를 한 것 같지도 않았다.

“….”

어느새 문은 다 열리고, 건물 안쪽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정사각형에서 벗어난 직사각형의 건물 안쪽에는 살짝 보랏빛이 도는 그늘이 지고 있었다. 수상한 느낌— 만코마는은 호위 드론으로 다시 한 번 주변을 스캔했지만, 위험 요소는 감지되지 않았다. 만코마는은 보랏빛 그림자가 드리운 건물 안쪽 공간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수색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성격은, 아마도 어머니 밀레나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리라.

자신의 무모함에 혀를 차면서, 만코마는은 활짝 열린 문으로 먼저 상체만 살짝 기울여 들이밀었다. 어두운 보랏빛 그림자가 드리운 건물 안에는 빛을 받아 현란하게 빛을 발하는 먼지들과 먼지에 덮인 가구들이 보였다. 아마도 유가바수다라는 사람이 이곳에 머물며 살던 흔적인 듯 싶었다. 싸구려 소재로 만든 것 같은 가구들은 그 위에 쌓인 먼지만 아니라면 방금까지 누가 사용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여전히 갖추고 있었다. 갑자기 유가바수다라는 남성까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만 같은 풍경을, 만코마는은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미이라는 없어서 다행이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만코마는은 안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빼내어 왼쪽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울리는 타일을 밟으며 선 왼쪽 건물의 문 역시 카타니움 소재의 미닫이 문이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문 옆에 위치한 스위치를 누르자,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움직임이 둔하기는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이 끝까지 열리는 문— 역시 빛을 받아 현란하게 춤추는 먼지가 가득한 왼쪽 건물 안쪽에는 오른쪽 건물과는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아….”

아쉬운 기분으로 건물 안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려던 만코마는은 문득 텅 빈 공간의 바닥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발견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그 커다란 박스는, 7천여년 전은 물론 지금까지도 저렴한 가격에 판매 중인 데이터 블랙 박스였다. 데이터를 그저 오랫동안 유지하는데 목적을 둔, 무겁고 단단한 디스크 박스다.

“….”

발견 자체는 흥미로워도, 신경 쓰이는 건 안에 들어있는 데이터다. 저 안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데이터는 아마도 유가바수다라는 사람이 남긴 유언이다. 아마도 홀로 남은 자신의 상황이나 생각 등을 하염없이 담은, 그런 자신만의 감정이 담긴 그런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큰 가치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 한가운데 가만히 놓인 데이터 블랙 박스를 한참 바라보던 만코마는은 문득 진하게 드리우기 시작한 석양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쓸데없이 크고 무거운 데이터 블랙 박스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어차피 도시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자기로 하고, 남은 시간 동안 한 번 해석이나 해보자. 자기연민에 가득 찬 유언이라면 꺼버리고 바로 자버리면 될 테니까.

9.

아, 안녕하신가요? 지구 회귀자 이민김유가 가문의 771대손 유가바수다입니다.

데이터를 재생하자 마자 화면 안으로 조금 긴장한 표정의 남성이 나타나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어색하지만 어떻게 배웠나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외우주 통합 관리국에서 지원하는 공통 지구어로 인사를 건넨 남성이 일단 말을 멈추고 어색하게 웃는다.

지구주의자 특유의 유전병으로 피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붉게 빛이 나고, 좌우 눈동자 색이 다른 그린 듯한 지구주의자 남성이었다. 나이는 어림 잡아 마흔 정도— 하지만 지구주의자 답지 않게 어딘가 편안하고 느긋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코마는은 안락 의자에 기대어 진짜 물과 똑같은 98.7% 재생 커피를 반모금 입에 머금고는 남성— 유가바수다의 다음 이야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먼저, 이건 일기가 아닙니다. 유언 같은 것도 아니고요. 목적이 있어서 만드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뭔가 보물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지도 않겠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만코마는은 그래도 자기연민에 가득 찬 유언이나 자아 기록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입에 머금었던 따뜻한 커피를 꿀꺽 삼켰다.

일단, 이 데이터는 외곽 우주 육십칠RD 구역, 구백칠십팔년-삼천사백육십일년부터 구백칠십팔년-삼천오백육십이년까지 이 행성에 거주했던 지구 회귀자 이민김유가 가문의 후손들을 위해 남기는 영상입니다. 혹시 이민김유가 가문의 후손이 아니신 분이 이 영상을 보고 계시다면, 보시는 건 상관없지만, 블랙박스는 제자리에 놓아 두셨으면 합니다.

후손들? 만코마는은 유가바수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가 버리고 간 이 행성에 후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저는 우리 지구 회귀자 이민김유가 가문의 후손들이 지구에 도달 했다고 믿어요. 지금이 우리 가문이 회귀 항해를 개시한지 딱 일천 칠백년 흐른 시점인데, 순조롭게 항해 중이라면 이제 지구 도착까지는 한 이천 삼백년 정도 남았겠죠? 아마 가는 동안, 좀 더 나은 기술을 받아 들이고 하다 보면 더 빠르게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이민김유가 가문의 지구는, 생각보다 가까운 우주 행성계에 있는 듯 싶었다. 만약 그들의 예상대로 항해를 했다면 지금으로부터 4천 7백년 전 즈음에는 그들의 지구에 도달 했으리라.

나도 가고 싶었어요, 지구. 우리 인류가 시작된 곳이라니, 선조들의 세상이 궁금하기도 하고.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선대의 사람까지 부활시킨다던 엄청난 건물들도 보고 싶고.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하고, 선대의 사람까지 부활시키는 건물—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민김유가 가문의 지구주의자들은 오직 크리스천을 믿는 사람들인 듯 싶었다. 부디스트도 있었다면, 아마도 때가 오면 절이라는 시설로 찾아가 선대의 부활을 시도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욕심이 많아서 말이죠. 가는 길에 죽는 여행은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지구에 도착하기 앞으로 백 년 정도 남았다면, 이 악물고 버텨볼까 싶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사천년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우주인들처럼 사는 건 좀 아니다 싶기도 하고요. 말이 좋아 클론 재생성이니 해도 결국 난 죽고, 내가 아닌 내가 내 자리를 대신할 뿐이 잖아요.

그리고, 클론 재생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지구주의자 다웠다.

물론 지구로 가는 길에 함께 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 하고 싶었어요. 딱 그 뿐이에요.

유가바수다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구도, 부활도 믿지 않아요.

돌연한 고백이었다. 어머니, 밀레나 같은 지구주의자가 또 있었구나. 만코마는은 이제 혼자 남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텐데, 자신의 발언에 잔뜩 긴장한 표정의 유가바수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우리 지구 회귀자 가문이 지구와 지구를 오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구라고 지목한 ZPEEW-오백일번 행성부터 그 행성으로 가는 길목까지, 언제적 기록인지 모를 문헌에서 찾아낸 거잖아요. 여기 FEM-삼천삼백십구 행성도 마찬가지구요. 물론 일이 터져서 일찍 떠나기는 했지만 말이죠.

긴장한 표정으로 불경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유가바수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우리 지구 회귀자들은 몇 십 만년 동안, ZPEEW-오백일번에 도착해서는 외우주 이백칠KKW의 RTO-이십구번 행성을 지구라고 생각하고 출발하고, RTO-이십구번 행성에 도착해서는 다시 ZPEEW-오백일번을 지구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만코마는이 어머니 밀레나의 영향으로 알게 된 지구에 대한 지구주의자들의 태도는 믿거나, 반만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이렇게 지구주의자들의 착각으로 두 개의 지구를 왕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그냥 내 생각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여기 FEM-삼천삼백십구에서 난 증거를 찾아 냈어요. 남길 잘한 거죠.

말을 마친 유가바수다가 화면 밖으로 모습을 감춘다. 이제 화면에는 지금 만코마는이 앉아 쉬고 있는 시설이 보인다. 이 시설이 증거라고?

묻고 싶어요. ZPEEW-오백일번 행성을 떠나고 얼마만에 여기 FEM-삼천삼백십구 행성에 도착했나요? 아마 삼천년 정도 걸렸겠죠? 아니, ZPEEW-오백일번에 도착한 우리 가문이 지구를 향해 떠나기 전에 얼마나 머물렀나요? 만년? 이만년? 십만년 단위일 수도 있겠네요.

유가바수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장담할 수 있어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서 이곳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십 만년은 이 모습 그대로 일 거에요.

확신에 찬 목소리는 정말로 만코마는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고, 그것이 어떻게 증거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설 전체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마냥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정말이었다.

일단 방법부터 알려 둘게요. 혹시 숙소에 있는 문을 보고 눈치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시설은 알큐비에레 엔진, 정확히는 그 안에 들어있던 이종 물질 탱크를 분해해서 만들었어요.

해괴한 교리와 생활방식, 그리고 유전병을 제외하고, 지구주의자를 대표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알큐비에레 비행일 것이다. 우주선의 주변 시공간을 왜곡하는 방법으로 우주를 가로지르는 알큐비에레 비행은 70만년 전에 개발된 항법이지만, 이후로 새롭게 개발되는 항법은 없었을 정도로 인류가 이룩한 우주 항해 기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 1광년이라는 거리를 나흘만에 주파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1광년을 이동하는데 약 6개월이 걸리는 알큐비에레 비행은, 일단 무엇보다 이종 물질을 연료로 쓰는 만큼,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외우주 인류의 통합 관리국도 겨우 몇 대만을 운영하고, 상용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도 외우주 섹터당 셋이면 많은 축에 속했다.

그렇게 제작부터 운영까지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 알큐비에레 엔진이 바로 지구주의자들의 시작점이었다. 같은 교리를 믿는 지구주의자들이 서로 모여 수많은 세대를 거쳐가며 자금을 모아 알큐비에레 엔진을 건조하고, 다시 또 자금을 모아 이종 물질 탱크를 마련하고, 그 다음으로 씨앗이 될 이종 물질을 구입하고, 마지막으로 마침내 이민용 수송선을 필요한 만큼 구입하고 나서야 겨우 출발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나마도 이종 물질이 농도가 짙은 곳으로 모여드는 성질을 지닌 덕에 이종 물질 탱크에 씨앗이 될 수 있는 소량의 이종 물질을 넣어두고 기다리기만 하면, 이자가 불어나듯 늘어나기에 망정이지 만약 특수한 공정을 거쳐 생성하는 것 외에는 손에 넣을 도리가 없는 물질이었다면, 외우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구로 출발한 지구주의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을 것이다.

여기에 홀로 남아서 여기저기 탐험을 다니다가, 버려진 알큐비에레 엔진을 하나 발견했어요. 이 블랙 박스에도 남겨뒀지만, 여기 사진이 있어요.

화면으로 숲 한가운데 버려진 알큐비에레 엔진을 찍은 화상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둘러보니, 일련 번호가 있었는데 내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거의 육만년 정도 전에 만들어진 엔진이더군요. 그런데 보세요. 습한 숲 속에서 녹 하나 슬지 않은 모습이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화상이 바뀐다. 이번에는 크게 갈라진 공모양의 탱크였다. 갈라진 틈 사이로 카타니움 금속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걸로 문을 만들었구나— 만코마는은 슬쩍 시설 안쪽의 두 건물을 바라보았다.

엔진 안쪽에 있던 이종 물질 탱크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보다 먼저 여기에 왔던 지구 회귀자들에게 뭔가 일이 생겨서 이종 물질 탱크가 부서지고 말았고, 그래서 엔진을 버리고 간 것 같았죠.

다음으로, 이종 물질 탱크의 코어라고 할 수 있는 씨앗 유닛이 보인다. 딱 사람만한 크기의 원통형 탱크 유닛 속에는 주변보다 높은 이종 물질 농도를 만들기 위해 강력한 이종 물질인 허수 물질이 꽉 들어차 있다. 그러면, 가만 놓아두기만 해도 이종 물질들이 곁으로 모여들고, 모여 들어 이종 물질 탱크를 채운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코어 유닛까지 버리고 갔더군요. 그리고 덕분에 의문이 풀렸어요. 어떻게 육만년이라는 시간 동안 엔진이, 탱크가 녹 하나 슬지 않고 버티고 있었는지.

슬며시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멀쩡하게 남아 있던 코어 유닛, 그리고 내부를 드러낸 이종 물질 탱크— 그렇다면 코어 유닛으로 몰려들었던 이종 물질들은, 탱크 안에 머물지 못하고 주변으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 코어 유닛으로 몰려든 이종 물질들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면서 시간의 흐름을 상쇄한다는 결론을 얻었죠. 아니, 시간의 흐름을 상쇄한다는 이야기는 그냥 제 나름대로의 추측일 뿐이에요. 확실한 건 이 코어 유닛의 근처에는 모든 것이 멈춘 듯이 유지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테스트도 여러 번 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화상이 사라지고, 다시 시설의 모습이 화면을 메운다. 그리고 화면 바깥쪽에서 유가바수다의 손이 불쑥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 사실을 발견하자 마자, 이 곳을 짓기로 마음 먹었죠. 지금 보이는 마당 가운데 코어 유닛을 설치해 뒀으니 적어도 육만년은 버틸 수 있을거에요. 영향 범위도 계측해서….

유가바수다의 이야기를 듣다 재생을 멈춘 만코마는은 의자에서 일어나 시설 마당의 중앙으로 향했다. 마당 중앙에는 방금 사진으로 본 이종 물질 탱크의 코어 유닛과 똑 같은 모습의 둥그런 원형 뚜껑이 놓여 있었다. 이게 코어 유닛일 줄이야. 유가바수다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한 만코마는은 다시 의자로 향했다.

영향 범위도 계측해서 그 안에 시설을 지었으니까, 아마 멀쩡하게 남아서 여러분을 만날 수 있겠죠.

화면 안으로 유가바수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도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익숙해진 탓인지 표정이 한결 자연스럽고, 또 편안해 보였다.

이제 왜 내가 우리 지구 회귀자들이 두 개의 지구를 오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설명 드릴게요. 이 시설을 짓는데 사용한 알큐비에레 엔진과 이종 물질 탱크가 증거에요. 이 우주에서 알큐비에레 항해를 하다 말고 행성에 내려 앉는 건 오직 지구 회귀자들뿐이죠. 보통 외우주 인류라면 고장이 났다고 해도 우주에서 인양을 받아서 수리를 받거나 할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이 알큐비에레 엔진을 버리고 간 건 지구 회귀자들일 거에요. 그리고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지구 회귀 항해도에 FEM-삼천삼색십구 행성을 거쳐가는 거점으로 삼은 지구 회귀 가문은 우리들 가문이 유일하니까,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 버리고 간 거겠죠.

침착하게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인 유가바수다는 지체없이 다른 손가락 하나를 더 세워 보였다.

둘째로, 우리 가문에 있는 지구 ZPEEW-오백일번 행성을 향하는 항해도에 FEM-삼천삼백십구 행성이 등록되어 있는 건, 아마도 육만년 전에 여기에 도착한 선조들이 남긴 정보일 거에요. 지금 이 데이터 블랙 박스를 발견한 우리 가문의 후손들은 혹시 RTO-이십구번 행성을 지구라 생각하고 향하고 있지 않나요? 항해도에서 FEM-삼천삼백십구 행성이 쉬어 갈 곳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여기에 내린 거겠죠? 그건 사실 쉬어갈 곳이라는 지정이 아니라, RTO-이십구번 행성에서 출발한 우리 가문이 지구라고 믿는 ZPEEW-오백일번 행성을 향하던 도중에 머물렀다는 기록이에요.

그럴 듯 하면서도, 어쩐지 억지스러운 주장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피력한 유가바수다는 들어올렸던 손을 거두고, 뒤로 돌아 시설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 시설을 지은 거에요. 보면 알겠지만, 벽에도, 바닥 타일에도, 저기 숙소 건물 외벽에도 우리 가문의 암호 프로토콜로 증거를 새겨 두었어요. 이 데이터 블랙 박스가 혹시 망가지더라도 내가 속했던 시대의 가문이 여기 FEM-삼천삼백십구 행성에 머물다 떠났다는 증거가 남도록 말이죠. 정확히는 RTO-이십구번 행성을 떠나 ZPEEW-오백일번 행성으로 가던 지구 회귀자 이민김유가 가문이 여기서 백년 정도 머물렀다는 사실을 여기 남겨 뒀어요. 내 역작이죠. 이 데이터 블랙 박스가 멀쩡히 남아 있다면, 수많은 증거가 디스크 안에 남아 있을 거에요. 사진도 있고, 영상도 있고, 남길 수 있는 자료들도 꽉꽉 채워 놓았어요.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뭘 먹고 뭘 하고 몇 시에 잤는지, 무슨 행사가 언제 있었고 어떻게 치뤘는지…. 사소한 것부터 나름 커다란 사건들까지 다 확인할 수 있을 거에요.

길게 말을 늘어놓은 유가바수다가 문득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화면을 향해 돌아섰다.

혹시 지구가 있다는 증거를 원했다면 미안해요. 나도 늘 그런 증거가 있으면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거든요. 정말 지구가 존재 한다는 작은 증거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고행 준비 기간이 그렇게 까지 허무하지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던 유가바수다가 말끝을 흐리더니 문득 고개를 숙인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남기는 증거가 새로운 지구를 찾아 가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네요. 제가 원하는 바는 그게 아니긴 하지만.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가바수다는, 한참 만에 긴 숨을 들이마시고는 머리를 세웠다.

그래도 이제 우리 가문이 지구로 간다고 ZPEEW-오백일번 행성과 RTO-이십구번 행성을 몇 만년에 걸쳐 오가는 건 그만 둘 수 있겠죠. 뭐, 그조차도 말릴 수 없다면,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겠고.

담담한 표정으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투로 말을 마친 유가바수다는 홀가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난 이제 쉴 거에요. 혹시 더 좋은 증거가 있지 않을까 숲을 거닐겠지만,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목적이니까, 예전처럼 눈에 불을 켜고 찾지는 않겠죠. 언제쯤 후손들이 이 행성을 찾아올 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저녁에 죽고 없을 겁니다. 내 시신도 증거로 써볼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어쩐지 내키질 않아요. 이 시설에 죽으면 그래도 미이라가 되어서 남고, 남들이 내 시체를 구경하는 광경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아서… 아마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죽어 사라지겠죠.

멋적게 웃은 유가바수다가 화면 바깥을 향해 손을 뻗는다.

어떤 결론을 내리던 간에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요, 우리 이민가유가 가문 여러분. 개인적으로는 이제 지구말고 다른 목표를 찾았으면 좋겠지만, 여러분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건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린 거니까요. 여러분이 원했던 증거를 남긴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만.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남긴 유가바수다가 문득 멈추더니, 화면을 바라본다.

참, 깜빡했는데, 이걸 발견한 후손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혹시 가문 데이터에서 예술 영역을 맡아보던 이씨 가문 정보를 찾을 수 있다면, ‘이도사하지라하’라는 선조가 있는 이씨 가문의 후손에게 전해주세요. 지금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어서 내버려두고 있는데, 나중에 여기 건물 안에 옮겨 둘 예정인 안드로이드…. TYQ로 시작하는 일련 번호를 지닌 안드로이드가 한 대 있을 거에요. 내가 알기로 ‘이도사하지라하’양이 남긴 유품입니다. 가문 예술 영역 담당자 분들 중에 이씨 가문의 후손이 아직 계시다면, 회수하시길 권할 게요. 그럼 정말 갑니다.

그리고 짧은 비프음과 함께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만코마는은 포터블 모니터에게서 고개를 돌려, 이제 어둑한 밤에 잠긴 시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앞으로 이 별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유가바수다는 결국 안드로이드 TYQ-119를 이곳으로 옮겨 놓기 전에 죽었구나 하는 것이었고, 이래서는 그의 후손들이 안드로이드를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었다.

10.

이온 엔진이 낮은 소음을 울리고, 추력이 발생하면서 잠깐 몸이 무겁게 가라 앉다가 곧 밀려 올라온다. 중력 3.98에서 해방된 덕분인지 어쩐지 온몸의 관절과 관절 사이가 살짝 가렵기도 했다.

- 이륙 완료까지 7분 24초.

- 추력 안정, 지금부터 선내 활동이 가능합니다.

잔잔한 바람 소리만이 남고, 집중해야 겨우 느낄 수 있는 진동이 이제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리지만, 만코마는은 조종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편을 택했다. 다만, 이번에는 눈을 뜨고 조종간의 모니터에 비추는, 멀어지는 FEM-3919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지면과 도시의 모습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곧 구름 아래로 가려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후우.”

지면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만코마는은 한숨을 내쉬며 미련없이 눈을 감았다. 결국 유가바수다가 지었다는 시설에서 카타니움을 채취하지는 못했다. FEM-3919의 자원 회수 권리를 사들이긴 했지만, 어쨌든 주인이 명백한 물건에 손을 댈 마음이 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다만, 수색 사흘 째에 찾은 금고는 화물칸에 실었는데, 안드로이드 TYQ-119를 유가바수다의 시설에 증거로 옮겨 놓은 삯으로 칠 셈이었다. 유가바수다가 후손에게 남기려는 건 온갖 수단으로 시설에 남겨 놓은 증거였으니까, 가장 큰 돈이 될 만한 코어 유닛도 그대로 남겨 놓고 왔으니, 양심면에 있어서도 크게 걸릴 것은 없었다.

- 이륙 완료까지 2분 52초.

이륙이 끝나면, 기념으로 남아 있는 진짜 소고기 프라임 스테이크와 98.7% 동일한 재구성 프라임 스테이크를 복원해 먹자— 중력권 비행으로 불안한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만코마는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문득, 지구에 다녀오는 동안 재구성 기술이 발달해 버리는 바람에 기껏 소중하게 데려온 소고기와 돼지 고기를 방목해야 했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재구성 기술이 외우주 전체를 집어 삼키던 시기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결국 방목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이라면 소고기와 돼지 고기라는 동물이 한껏 들어차 있을 그 행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가동할 필요도 없이 그냥 산채로 잡아 호사가들에게 팔아 치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외우주 전설 같은 그 이야기가 진실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서도.

“자아 기록 기능 실행.”

눈을 꽉 감은 채로, 신음 소리를 흘리듯이 만코마는이 제어 시스템을 향해 입을 연다.

- 자아 기록 녹음 기능을 실행 합니다. 녹음을 끝내실 때는 기록 끝 또는 기록 종료라는 명령어를 사용해 주세요. 또는 기록을 완료하는 의미의 문장을 말씀하셔도 98.7% 확률로 인식 가능합니다.

시스템 안내 메시지를 들은 만코마는은 이륙으로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달래 가며, 충동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남겼다.

“오늘부터 나는, 소고기와 돼지 고기가, 닭고기가 방목되었다는 행성을 찾는 걸 하나의 목표로 잡기로 했다! 기록 끝!”

기록을 남기는 말은 이륙으로 긴장된 마음 탓에 점차 목소리는 커지고 속도는 빨라진다. 결국 기록 종료를 알리는 명령어는 무슨 맹세라도 하는 마냥 크고 짧게 외침이 된다.

- 자아 기록 녹음 기능을 종료합니다.

짧은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오는 순간, 모든 것이 위로 붕 떠오른다.

- 이륙 완료, FEM-3919의 위성 궤도에 도달, 별도의 조작이 있을 때까지 대기합니다.

언제쯤에야 이착륙 공포증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만코마는은 혀를 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조종간 너머, 널찍한 항해 모니터 패널 위로 FEM-3919 행성의 모습과 멀리 플레닛 크랙을 당한 거대 행성들의 잔해들이, 그리고 더 먼 곳으로 수많은 별들이 보였다.

긴 숨을 들이킨 만코마는은 조종석의 벨트를 풀고, 천정의 보조 냉장고를 향해 몸을 밀어 올렸다. 겨우 엿새 동안의 중력 생활이었는데도, 무중력에 어울리지 않게 힘을 너무 준 탓에 빠르게 올라간 머리가 쿵-하고 천정에 부딪힌다. 머리를 울리는 통증— 소리 죽여 욕설을 내뱉은 만코마는은 보조 냉장고를 열고 안쪽의 음식 상자를 꺼내 들었다.

‘진짜 소고기 프라임 스테이크와 98.7% 동일한 재구성 소고기 프라임 스테이크’

금박으로 적힌 문장을 가만히 읽은 만코마는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복원기를 향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살아있는 소고기를 찾는 다니, 어머니가 들으면 뭐라고 할까. 웃어 넘길까,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핀잔을 줄까. 저 많고 많은 별들 중에 만코마는을 기다리는 안드로이드도, 찾아올 후손은 없다지만, 찾아가 보고 싶은 것이 생겼으니 나름 괜찮은 생각이라 해주지 않을까. 만코마는은 복원기의 작은 창 안쪽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진짜 소고기 프라임 스테이크와 98.7% 동일한 재구성 소고기 프라임 스테이크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Fin

Ps. 10년만이 아니라 구년 구개월만입니다.

정대영

정대영(k2fnts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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