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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pena9.egloos.com)


 롯데월드 어드벤쳐의 자이로드롭이 새로 설치되어 한창 인기를 끌 무렵, 꽤나 신빙성을 가진 소문 하나가 나돌았다. 자이로드롭이 맨 위까지 올라가서 빙빙 돌다가 떨어지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때 어떤 머리가 긴 여자가 중심의 기둥에 머리가 걸렸고, 다음 순간 무서운 속도로 낙하할 때 끝내 그 머리가 빠지지 않아 얼굴가죽이 휙 벗겨졌다.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여자는 면피가 벗겨진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옆에 있던 남자친구는 그 모습을 보고 미쳐버렸다고 한다. 상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보이기에, 여론에서는 다루지 않았음에도 이런 소문은 통신과 입소문을 통해 번져나갔다. 그것을 찍은 사진이라는 시뻘건 사진이 통신에 돌아다녔고, 필자 또한 정확히 그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이상한 사진을 받아서 본 적이 있다. 다들 그거 보고 나면 밥맛이 떨어진다고 하여 주저주저하다가 보았건만,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시뻘건 얼굴만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약간 징그럽기는 했다. 빨간 속에 벌레가 꿈틀거리는 듯한 형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사진까지 돌아다니면서 진짜라고 선전하고 다녔던 그 충격적인 사건은 결국 거짓이라고 밝혀진 것으로 기억한다. 정확히 어떻게 밝혀진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세의 전설이란 책을 소개하려는데 어째서 이런 이야기부터 하느냐고? 간단하지 않은가. 중세의 전설은 바로 이런 성격의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환타지 소재로 충분히 쓰일 만한, 또한 이미 많은 문학이나 흥미 위주의 기사에서 다루었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책에 쓰인 이야기들은 중세 서양인들이 널리 믿었고, 어디에서 정확히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럽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종류를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우선 이 책의 목차만 봐도 지금의 우리들도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빌헬름 텔과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탄호이저의 배경이 된 비너스의 산, 여러 가지 동화와 마더구스에서 등장하는 달에 사는 사람, 용을 죽였다는 성 게오르기우스, 주인을 구했는데 술취한 주인에게 죽은 개의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빌헬름 텔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동화로 많이 읽히지만 사실은 중세에 떠도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보면 거의가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의 범주를 대충 나누어 보자면 대략 세 가지가 되겠다.
 첫 번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나 일화에 관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예수 보고 빨리 가라고 외치며 능멸했던 자가 있는데, 그는 그에 대한 대가로 세상 끝날까지 죽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또,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는 단지 로마의 형구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옛날부터 의미를 가진 상징이었다고 바꾸기도 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금속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고 하는데 샤미르라고 하는 이상한 벌레의 힘을 빌어서 이룬 기적이라고 한다.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서 신비롭고 흥미로운 일설이 자라나고, 그것이 힘을 얻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세에는 여러 가지 의미로 기독교의 시대라기보다는 성인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멀리 있는 신보다는 가까이 있는 존재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성인 숭배는 이전에 있던 이교도 신앙을 흡수하면서(즉 이교도의 축제를 어떤 성인의 기념일로 바꾸는 방식 등으로) 더욱 더 많이 퍼졌다. 이 책에는 그 중에서도 가상의 성인 내지는 유명한 성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용을 잡았다고 여겨지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만 천 명의 처녀를 데리고 나라를 위해 사악한 군주와 결혼한 성 우르술라의 이야기, 성 패트릭이 본 연옥의 이야기가 있다.
 세 번째는 그 외의 기독교에 관련된 주제를 가진 이야기들이다. 성직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로 사악한 주교 하토의 이야기와 적그리스도를 낳은 여자 교황의 이야기가 있다. 믿음으로 기적을 이루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로, 순교의 시대에 잠들어서 기독교의 시대에 눈을 뜬 에베소의 잠자는 자 일곱명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중세 내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에덴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또 악마와 계약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달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행복의 섬, 주인을 구한 개 이야기, 빌헬름 텔과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꼬리 달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특히 범인을 찾을 수 있다는 점막대기에 대한 이야기는 범죄소설이자 심령소설을 방불케 한다. 또한 중세의 전설을 통틀어 가장 불가사의 백과와 유사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전설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두말 할 것 없이 그렇다. 중세의 전설을 읽다 보면 많은 소재가 기독교에서 왔고, 많은 이교도적 소재가 기독교적으로 채색되었지만, 밑바닥에 깔리는 사상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는 기독교의 사회라는 것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지 의심하게 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전설이라는 것을 지식층과 하층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보다 그들간의 갭이 적었을 거라는 짐작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 리뷰는 역사잡지에 쓰는 리뷰가 아니고, 이 정도로 쓸 실력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억지로 연결하려면 뭔들 못하겠냐만, 사실 필자는 역사에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이 책에 기대한다. 환타지는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거라고 한다. 이미 있던 세계관을 가져다 쓴다고 해도 작가는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새로 그려내야 한다. 혹은 손에 잡힐 듯 그려내야 한다. 그것을 성공하지 못하면 모든 인물이 목적도 없고 이 세계에서 태어나서 얻은 것은 물질적인 것밖에 없는, 평면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한 세계관에 여러 나라가 있는데,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하필 그 나라에서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아예 그 세계에서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세계에 태어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라가 있는 이유는 물건 구하기 쉬운 나라와 험한 지형과 신전이 있을 법한 곳이 필요하기 때문인가? 세계는 그저 무대인가? 현재의 우리에게 있어서도 정말 그런가? 세계는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사람의 머리 속에 박히게 되는 법이고, 사람은 그러한 여러 층의 세계로 이루어진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조금이나마 실현해내지 못하면 입체적인 캐릭터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 신화 정도만 구색 맞춰서 만들지 말고, 그 대륙의 사람들은 어떤 전설을 믿고 어떤 이야기를 무서워하고 혹은 좋아하면서 사는지도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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