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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0년 전의 연인

2009.10.31 01:1010.31





lunabell.netlunabell@hanmail.net
추선비, [50년 전의 연인] : 여왕 같은 언어를 탐하다


 추선비의 언어는 단호하다. 타협이 없다. 그녀(나는 여성형 대명사 ‘그녀’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의 언표와 세계는 한 치의 용납 없이 여성성에서 출발하므로)의 언어는 관능적이고 주관적인 비유로 가득하지만, 그 비유들은 당신이 멋대로 이입하거나 멋대로 눈물짓거나 멋대로 힐난할 수 있는 사적 감정의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녀는 말한다. 당신과 내가 만난다는 것을. 왜 만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왜 서로 사랑하는가를. 어떤 식으로 사랑하는가를. 어떻게 혼자가 되는지를. 이는 누구나 겪고, 누구나 일기장에 끄적이며 쉬이 말할 수 있을 듯한 사적인 체험들의 결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 단단한 입술과 언어로 그 사건들을 헤아리는 순간 그 체험들은 강력한 보편성의 힘을 얻고 당신을 몰아붙인다. 저항할 수 없이 단단한 절망이다. 이 지점에 뭔가 다른 가능성을 들이밀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다. 나는 [50년 전의 연인](추선비, 환상문학웹진 거울, 2009년 3월)을 완독하고 망연하게 울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애도하는 것처럼 우두커니 우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추선비의 소설은 분명히 비극이다. 그러나 이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폭력적으로 눈물을 뽑아내는 진창 같은 고통이 아니다. 그녀의 언어에는 분명히 긍정이 있고, 미래가 있고, 슬픔을 위한 슬픔이 아니라 납득할 수밖에 없기에 받아들일 수도 있는 슬픔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는 불완전하게 열린 미래나 희망 같은 것이 아니라, 모두 이미 완결된 채 돌아가는 세계의 순환으로 다가온다. 이는 일차적으로 추선비가 작가로서 자신이 아는 바와 자신이 믿는 바에 책임을 다하고 철저하게 구도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성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충실하게 쓰인 세계에 부여된 의미와 위상 자체가 그렇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추선비의 언어는 ‘여왕’같다. 불완전하게 완결되어있는 여성적 제왕, 그 오만함은 내가 더럽힐 수 없는 것이겠으나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나는 그런 자세로 이 작품집에 대한 감상을 밝히지만 이는 독자에게 제시하는 독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는 목이 길다}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반드시 수반되는 이해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도 낯선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이는 때로는 사랑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나약함이나 외로움으로 닥쳐오곤 한다. 수열은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연정만을 사랑했다. 그 외의 모습은 알 수 없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연정이 자신을 눈동자에 담고 있지 않을 때, ‘혼자’ 낯선 세계에 따로 떨어져 있을 때, 그녀의 그런 모습은 수열에게 사랑 불가능한 타인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는 수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의 공포다. 바꾸어 말하면 연정을 눈동자에 담고 있지 않은 자기 자신이 연정에게 이해될 리가 없고, 이해될 필요가 없으며, 이해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열은 연정과 재회하면서 너무나도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변한 그녀의 모습 역시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수열이 지금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연정의 모습은 자신이 모르는 사진 속 연정의 모습과 그렇게 합일되지만, 동시에 이 합일의 순간은 행복한 일체감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괴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지금 눈 앞에 있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손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사람인데도, 내가 모르는 낯선 세계에 영영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함께 있어서 더 치명적인 고독 속에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그 세계에서, 수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는다.

 {50년 전의 연인}, {귀가}, {명예롭지 못한 소녀}는 같은 세계관 속에서 일어나는 뱀파이어 연작 소설이다. 살갗에 달라붙는 듯이 함축적이고 관능적인 단어의 향연과 매력적인 뱀파이어 인물들의 유혹은 독자를 깊이 빨아들인다. 세 작품 중에서도 {50년 전의 연인}과 {귀가}는 엘루네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다른 화자가 다른 관계를 맺는 이야기로, 한 짝이라고 할 만하다. 두 작품은 영생을 사는 뱀파이어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여,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어긋남을 극단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50년 전의 연인}에서 엘루네드는 인간 남자인 리온을 사랑했다. 그와 함께 살고 싶었기에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었고, 이는 다른 뱀파이어물에서 으레 나오는 연애담과 같은 배경이다. 그러나 50년이 지나 두 뱀파이어가 재회했을 때 엘루네드의 고백은 우리가 으레 알던 뱀파이어물과는 좀 다른 갈등을 터뜨린다. 리온은 절실한 게 없고, 주변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누군가를 딱히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거기에서 받을 상처를 감내할 수 없기에 도망치는,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드러낸다. 그와는 반대로 뱀파이어는 ‘극단으로 몰아붙여지’도록 무언가를 갈망할 수밖에 없기에, 엘루네드와 리온의 관계는 치명적으로 뒤틀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리온은 엘루네드에 의해 뱀파이어가 된 후에도 예전과 똑같이 엘루네드를,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다. 엘루네드는 그런 리온을 죽이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영생을 주는 것은 그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기 위해서여야 하지만, 여기서 엘루네드는 리온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데도 그를 살리기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할 수 없는데도 지속되는 사랑. 리온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엘루네드는 사라지고 없고, 기억을 하나하나 버려가는 리온은 혼자서 기억나지 않는 엘루네드의 공백을 느낀다. 그 마지막 장면의 고독은 막막할 정도이다.

 이러한 관계의 뒤틀림은 {귀가}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인간인 메릴은 엘루네드를 사랑하지만 인간으로 남아있고 싶어한다. 엘루네드는 메릴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는 속성 때문에 그를 곁에 둔다. 서로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욕망하지만, 욕망을 관철하는 순간 관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관계. 그 관계의 지속은 슬프고 고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관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답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엘루네드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메릴과 눈을 마주쳤다. 자신이 원하는 것. 맑고 짙은 호박색 눈. 메릴은 손을 들어올려 입가를 살짝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에 올라 엘루네드의 옆에서 달렸다.” - <귀가> 중

 마지막의 이 깔끔하고 아름다운 문장에는 눈이 녹는 늦겨울같이 시리지만 따뜻한 기운이 배어있다. 영원히 그녀는 그의 것이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녀의 곁에서 달리는 것이다.

 {명예롭지 못한 소녀}는 {노래하는 도시}와 함께 이 작품집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인물과 서사와 상징이 유기적으로 촘촘하게 얽혀있으면서도 이야기의 긴장감과 매력적인 문장을 잃지 않고 주제의식을 깊이있게 파고드는 이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배어나온다. 소설의 주요 화두인 ‘명예’는 사회적으로 고귀하다고 승인받는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결국 윤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명예롭지 못한 소녀, 즉 ‘처녀아이’는 남자들과 헤프게 잠자리를 갖는다고 인간 사회에서 천한 죄인으로 취급받지만, 그녀의 행동은 육욕이나 질시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령 천대받더라도 타인의 괴로움을 구원해주고자 하는 순박한 선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처녀아이가 아무리 선의와 도덕심과 측은지심으로 그렇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의의 수혜자인 남성 구성원도 그 선의의 피해자인 여성 구성원도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 명예가 없다면, 과연 그 행동은 선한 것인가? 도덕과 부도덕이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감에서 필요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입법 기준으로 판가름되지 않던가? 그러나 처녀아이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많은 사내가 처녀아이를 안고, 많은 계집이 처녀아이를 울려’도 되는 것인가? 처녀아이가 그러한 오욕과 비난과 박해를 감당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는 여러 소설과 설화에서 흔히 다뤄지는 ‘성스러운 창녀’ 모티프라고 할 수 있고, 그 자체로 명예와 불명예, 즉 윤리적인 가치의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1차적인 화소가 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주체는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인간적인 윤리의 고민의 당사자가 아닌 뱀파이어다. 2차적인 화소의 측면에서 ‘명예’란, 주인공 캐롤라인과 그녀가 따르는 주군 엘루네드가 속하는 뱀파이어 일족 클레이턴이 지키는 최우선의 가치이기도 하다. 클레이턴 일족이자 한 영지의 영주로서, 캐롤라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 명예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탐구해야 할 목적을 띠게 된다.

 “명예란 과연 어떻게 해야 지켜지는 것일까? 소문 없이 그저 고요할 때? 공포와 위엄으로 내리누를 때?” - <명예롭지 못한 소녀> 중

 엘루네드의 이 물음은 캐롤라인의 행적과 소설 전체를 추동하는 질문으로 작용한다. 뱀파이어의 사회가 갖는 윤리와 인간의 사회가 갖는 윤리는 다르지만, 이 두 사회는 주종관계로 한 세상에 얽혀서 구성되어있어 반드시 그 두 윤리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시점이 발생한다. 캐롤라인이 자신이 다스리는 인간 영지민들을 자주 붙들어 피를 마심으로써 인간 사회의 질서는 교란되고, 캐롤라인에게 흡혈당한 뒤 캐롤라인을 욕망하게 된 사내는 아내와 가정을 방기한 채 순진한 처녀아이를 대리만족으로 범하며, 처녀아이는 어리석은 창녀로 낙인찍힌다. 이 순환관계 속에서 캐롤라인은 처녀아이를 자신의 대녀로 삼아 클레이턴의 이름을 내리고 명예를 지켜주고자 한다. 엘루네드가 일족의 지도자의 이름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일족을 속박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명예와 권한을 드러냈듯이, 캐롤라인은 처녀아이에게 엘루네드라는 이름을 내리고 그 아이의 결단과 행동을 속박하지 않음으로써 명예를 지키고, 동시에 아이를 권속 삼은 자신의 명예도 영지민들에게 드러내고자 했다. 아이가 박해받지 않도록 하려 했다.
 그런데 처녀아이는 자신에게 흡혈당하기를 욕망하는 사내를 위안하기 위해 사내의 피를 빨아준다. 인간이었을 때 하던 행실을 뱀파이어로서 행하면서, 처녀아이의 흡혈 행위는 이 지점에서 기존 뱀파이어의 욕망과 충동의 기제와는 전혀 다른 지점으로 부상한다. 처녀아이는 피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죽어가면서도, 갈증을 느끼는 캐롤라인에게 피를 나누어주고 싶어하는 선의를 끝까지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모욕당해서도, 응징당해서도, 괴롭힘당해서도 아닌, 뱀파이어가 된 몸으로 피가 맞지 않아서 죽어간다. 캐롤라인은 처녀아이의 선의의 수혜자로서 아이가 가진 피와 이름이 모두 그 아이의 권한임을 선언한다.

 {사랑의 기쁨}{투명한 뱀}은 {명예롭지 못한 소녀}와 비슷하게 윤리의 문제를 다루지만, 다른 각도로 조명한다.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질서는 상징계의 질서로, 이 질서에서 금지된 욕망 하에 개인이 맛볼 수밖에 없는 결핍과 아픔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의 기쁨}은 한 편의 아름다운 불륜 소설이다. 금지된 사랑의 죄의식과 수치, 그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배어나오는 아름다움과 애틋함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사회가 소돔과도 같은 혼란에서 새로이 건립한 엄격한 율법과 도덕의 개척 사회라는 데에서 더욱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주인공 인애가 금지된 남성을 사랑한다는 일탈적 행위는, 엄격한 남성적 질서가 자리잡은 개척 사회 너머에 존재하는 삭막하고 혼돈스러운 황무지에 대한 아름다운 가능성을 꿈꾸는 불가능성과 맞물려 있다. {사랑의 기쁨}이 훌륭한 불륜 소설인 이유는 이러한 명쾌한 구성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물이 자신의 죄를 뉘우침으로써 질서에 굴복하지도 않고, 질서를 부정함으로써 유아적인 퇴행을 보이지도 않으며, 징벌을 받지 않고 얼렁뚱땅 용서를 받음으로써 독자를 기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1인칭 고백체로 담담하고도 진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인애는, 자신의 행위가 어떤 죄악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 응당의 혹독한 징벌을 받아들이기에, 정직하다.

 {사랑의 기쁨}이 상징계의 질서에서 상상계를 희구하는 이야기라면, {투명한 뱀}은 상징계로 진입하는 데에서 겪는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울고 있었다.” 라는 단순한 두 마디가 담고 있는 무게는 어마어마하다. 이 질서에서 우리가 저지르고 또 응징받는 행동은, 그 자체로 잘못된 죄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뱀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반짝이더라도,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 존재이더라도, 우리는 그 뱀을 누군가와 공유해서도 안 되고 인정받을 수도 없으며, 이제부터 그것은 실현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채 평생 은밀한 고독으로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과거의 가능성으로 남아버린다. 그 날카로운 금기의 아픔이 짧지만 강렬하게 나타나는 단편이다.

 {너와 내가 묶인 것}은 가상 세계의 규칙과 설정이 작품 자체의 개인사적인 영역과 주제의식과 긴밀히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집에서 가장 본격적인 판타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마법사에게는 누구나 ‘묶인 영혼’이 있다. 묶인 영혼이란 마법의 법칙에 따라 운용되는 이 세계가 공적으로 승인하는 절대적인 관계성을 가리킨다. 평생의 친구, 평생의 가족. 개인의 독자성을 뛰어넘어서 자아와 타아의 구분을 무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짝. 이는 당사자들에게 행복한 영원성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세계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관계성의 모순과 비극은 또다시 재현되며, 묶인 영혼이라는 장치는 그 관계를 더욱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 주인공 샤오나이는 마녀들의 수장이고, 그녀의 묶인 영혼은 한 왕국의 공주다. 두 존재자는 서로 견제하고 공조하는 두 사회를 대표하고 수렴해야 하고, 이러한 책임을 진 개인들이 만난 순간 그들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다. 이는 저 유명한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한 개인 뿐아니라 두 개인들의 관계 역시 사회적인 질서 속에서 위치와 역할이 규정지어질 수밖에 없다는 원형적인 현실을 그대로 상징한다. 그러나 {너와 내가 묶인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과 출발 지점이 다르다.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이 원수지간이 아니라, 서로 협조해야만 하는 관계였다면 두 주인공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너와 내가 묶인 것}에서, 공주는 일국의 공주라는 위치가 부여하는 역할을 부정하고 깨부수고 뛰쳐나가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고 싶어한다. 세계의 강제와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정체성을, 자유를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공주가 욕망하는 ‘자신다움’이란 그녀가 공주이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고, 세계가 공주에게 요구하는 공주라는 신분에서 벗어나는 순간 공주는(그리고 공주의 욕망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공주가 욕망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자기 부정이므로, 공주의 욕망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존재적인 모순이다.
 이는 공주의 묶인 영혼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유를 꿈꾸는 공주에게, 개인적이고 내밀한 관계의 영역에까지 ‘묶인 영혼’이라는 세계의 질서가 개입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공주는 묶인 영혼인 샤오나이를 부인하고 미워한다. 샤오나이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몸부림친다. 그러나 공주가 원하는 것은 공주가 일국의 공주가 아니게 되는 순간 불가능해지듯이, 공주가 원하는 사랑은 샤오나이가 부재하는 순간 불가능해진다. 동시에, 샤오나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공주가 원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이 세계이지만, 바로 이 세계 때문에 욕망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샤오나이는 공주의 욕망의 근원이며 욕망이 충족되기 위한 조건이지만, 샤오나이의 존재 때문에 욕망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공주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증오밖에 없다.
 이렇게 벗어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관계의 비극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겪는 관계의 비극과 그대로 닮아 있다. 우리는 결핍을 채우고 싶어서 말을 하지만, 다름아닌 그 말하는 행위 때문에 결핍이 생기지 않던가. 우리는 고독을 이겨내려고 누군가를 원하고 사랑하지만, 누군가를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독해지지 않던가. 이 끝없는 비극이 담담하게 서술되는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숨이 막혀올 정도이다. 샤오나이는 묶인 영혼인 그녀가 그녀답게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기를, 샤오나이 때문에 공주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는 공주 역시 바라는 바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샤오나이가 공주의 욕망을 인정하는 행위는 공주의 욕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공주는 샤오나이라는 세계에서 부정당하는 개인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런다고 해서 묶인 영혼이 묶인 영혼이 아니게 될 수는 없다는 점이고, 서로를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고, 이 고통스러운 부정과 욕망의 연속은 두 사람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끝은 파국이다. 샤오나이는 공주를 죽임으로써 고통스러운 욕망의 사슬을 끊고, 이로써 그들이 발 딛고 있던 마녀들의 사회와 왕국의 사회의 관계라는 세계 자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샤오나이는 그렇게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자신의 욕망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묶인 것}은 훌륭하게 음화된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집 전체에서 가장 잔혹한 비극이었다.

 {옛날옛날옛날에}는 {너와 내가 묶인 것}과 다른 의미에서 판타지 소설답다. 이 소설의 배경, 설정, 문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합의한 판타지 소설의 문법에서 크게 비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고전 설화와 무협 소설의 세계, 매력적으로 구성되고 배치된 인물들의 도식은, 이 작품집에서 독자가 가장 편하게 이입하고 즐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 작품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점은 역시나 일반적이고 범용한 판타지 소설과는 차별되어 있다. 우선적으로 특기할 만한 부분이라면 여성 인물의 표현이다. 순이나 현감 부인과 같은 여성 인물들은 매우 능동적이고, 씩씩하며, 남성 인물을 구하고 그들의 곤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성적으로 억압적인 조선 시대라는 배경에서 이러한 여성성은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역시 여성인 ‘스님’은 실은 용이 되고자 하는 이무기인데, 그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목숨을 천 개 먹는다는 욕망에 충실하는 것과, 그러한 욕망을 억누르고 백 년 동안 절제하는 것, 그중 어느 쪽이 구원을 안겨줄 것인가? 답은 그 둘 다 아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그러한 욕망-충동과 억압-절제 사이에서 윤리적인 고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데에서 가능한 것이다. 안정적이고 탄탄한 구성과 호흡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노래하는 도시}는 마지막 순서답게 가장 탁월하고, 강력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배경은로봇이 핸드폰처럼 상품화되어 소비되는 근미래의 서울. 쓸모가 없어져 주인에게서 폐기 처리된 로봇들 중, 처분되지 않고 빠져나와 불법적으로 삶을 영위해가는 버려진 로봇들의 이야기다. 인간 주인의 밑에서 주인이 명령하는 프로그램을 수행하며 자기 역할을 살아가는 로봇들은 완벽해보인다. 여기서 인간과 로봇의 관계는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에서의 신과 인간의 관계와 같다. 로봇이 살아가야 할 삶은 인간에 의해 명확하고도 행복하게 규정되어있고,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승인받고, 여기에는 그 어떤 괴리도 회의도 결핍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낙원이 어떠했는지 기억할 수 없고 단지 상상할 수만 있듯이, 이 작품에서도 우리가 읽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낙원에서 추방된, 버려진 로봇들의 삶일 뿐이다. 버려진 로봇들은 잔혹한 우연성의 세계에 던져져 있다. ‘어떤 프로그래머가 장난 삼아 만든 유틸리티’를 이식한 로봇들은 불완전하다. 주인과 함께 있었을 시절, 잡무를 처리하거나, 아이들을 돌보거나,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서빙을 하거나 하면서 완전한 정체성을 누리며 살아갔을 것과는 달리, 그들은 이제 본연의 능력도 그러한 능력을 승인받을 기제도 상실한 채로 생존을 최우선으로 한 제한적인 기능만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신이 인간을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흙을 빚어 만들었듯, 이곳의 로봇도 인간을 닮아있다. 로봇은 인간이 가르쳐준 대로 한숨을 짓고, 눈물도 흘리고, 기쁠 때는 웃기도 한다. 인간이 각 유형의 로봇을 만들면서 목표하고 적용했던 기능도 일부적으로는 탑재되어 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추방당한 이 로봇들에게 남아있는 그것은 불완전한 흔적일 뿐이다. 버림받았다는 연속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철저한 버림받음. 다시는 그 품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당신이 시작해야 하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 이 불완전한 세계에 노출된 고독한 자아이다. 그 품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죽음으로밖에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똑딱은 죽는다. 노래하기를 갈망하던 로봇인 똑딱은 이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버림받은 로봇을 표상한다. 악보도 탑재되어있고 음악을 듣고 헤아릴 수도 있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노래부를 수가 없는 상황에서 노래와 관련된 모든 지식과 이성과 열정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예 그런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 전면적인 백치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결락감이다. 이는 실체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면서도 사물을 제한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성만은 부여받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불완전함이다.그러나 인간은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라도 있다. 로봇은 자기 파괴를 수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조차 없다. 최후의 결정권조차 없는 주체의 분열이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상태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똑딱은, 자신을 돌보아주던 다른 로봇인 펭귄에게 부탁해 등을 밀쳐짐으로써 도로의 차에 몸을 받히고 온 몸이 부서져가는 방식으로 노래를 부른다.
똑딱을 떠민 로봇은 본래 보육 로봇으로 생산되었던 기종인 펭귄이다. 펭귄은 보육 로봇으로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길거리에 버려진 로봇들에게 유틸리티를 이식하고, 주워서, 살아갈 수 있게 돌보아준다. 그러나 똑딱은 자신이 죽더라도 노래부를 수 있기를 원하는 자신의 갈망을 막으려 하는 펭귄을 부정한다. 자신에게 부모의 역할을 하려는 펭귄의 정체성을 부인해버린다. 펭귄은 똑딱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밀어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스스로 똑딱을 잃어버림으로써-‘버림’으로써- 보육 로봇으로서 누군가를 주워서 키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충족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펭귄은 자신이 돌보던 또다른 아이, 인라인을 버리고 홀로 떠난다.
 인라인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버려진 로봇들의 사회에서 붙여진 이름은 인라인이고, 기종은 요나858이다. 그는 소설에서 대부분 요나858이라는 3인칭 고유명사로 서술되는데, 똑딱과 펭귄과 함께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독자에게 그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해간다. 마침내 펭귄에게 버림받았을 때, 요나858은 본격적으로 자신을 ‘나’라는 1인칭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붙인 기종명에서 벗어나 자신을 천명하는 이 서술적 기법은 그 자체로 상상계에서 분열된 주체가 주체성을 새로이 정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자, 추선비가 언어와 의미를 노련하게 사용할 줄 아는 작가라는 사실을 대변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기 인식이란 지금 처한 이 세계의 자신을 정립할 수 있을 때부터 시작한다. 펭귄에게 또 다시 버림받음으로써 자신이 주인에게서 버림받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주인에게 배웠던 ‘울음’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순간은, ‘나’로 홀로 서서 다른 버림받은 누군가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이 역설의 순간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나’는 불완전한 우연성으로 가득한 세계가, 도시가, 삶을 노래하는 풍경을 목도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버려진 로봇에게 유틸리티를 이식해주는데, 이 로봇은 죽음으로써 노래하는 법을 똑딱에게 알려주었고 펭귄에게서 똑딱을 결과적으로 빼앗아가버린 로봇 아프리카다. 그는 로봇들을 문자 그대로의 죽음충동으로 이끄는 실재계의 침범으로만 보였는데, 주체성을 정립한 ‘나’ 앞에서 아프리카는 상징계의 질서 속에 버려진 또 다른 로봇으로 새롭게 인식되는 것이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너를 위해 쓸 수 있는 건 비록 네 기능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건 생각만큼 두렵지는 않아……. 너도 언젠가는…… 너 같은 눈을 한 로봇들을 만나면 네가 받은 유틸리티를 넣어주게 될 거야. 비록 그것이, 어떤 프로그래머가 장난삼아 만든 코드라고 한대도 그것이, 너 같은 로봇들한테는 매우 큰 것이 된다는 걸, 너는 알게 될 거고 전해주게 될 거야, 그러니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 <노래하는 도시> 중

 펭귄이 언젠가 ‘나’를 거두면서 했던 이야기의 울림은 ‘나’가 아프리카를 거두면서 비로소 제대로 이해된다. 우리가 이 삶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무리 불완전하고 아프고 사소하더라도 우리에게 가치롭다는 것을, 진정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란,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 세계를 살아가자고, 살아가달라고, 손을 내밀고 일으켜줄 수 있을 때인 것이다.

 독자로서도, 같은 글을 쓰는 작가로서도, [50년 전의 연인]과 같이 아름다운 언어를 읽는 경험은 몹시 기쁜 일이다. 때로 추선비는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설명해버리려고 하기도 하고({그녀는 목이 길다}, {50년 전의 연인}에서 특히 그렇다) 더욱 치밀한 구성과 치열한 주제의식이 아쉬운({명예롭지 못한 소녀}, {사랑의 기쁨}이 특히 그렇다) 맛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분명히 충실하고, 흔히 보기 어려운 이 충실함이라는 미덕은 이후 더욱 굉장한 작품을 반드시 낳을 작가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한국 환상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독창적이고 섬세한 소설이라고, 독자들에게 서슴없이 추천하기에도 충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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