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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
 라이트 노벨(light novel)―――이하 ‘라노베’―――이라는 건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기존의 SF나 판타지 장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종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SF, 판타지, 추리, 호러 등의 기존 장르 소설들도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진중하게 다루기보다는 그 내부의 특정한 코드와 별개의 서사 형태를 가지고서 독자와 소통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가볍다’는 평을 피해가기 힘들지만―――물론 가볍다고 해서 나쁘거나 못 쓴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라노베는 기존의 장르 소설들과 구분되는 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발달된 미디어의 혜택을 입고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매체에 친숙한 젊은 세대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고 있으며, 직관적인 인물 조형이나 삽화의 적극적인 사용 등 소설이면서도 시각적인 요소를 상당히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팔리는 상품으로서의 소설’이라는 대전제 하에, 책이 팔리지 않을 경우 언제든 출판을 중단하고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한 권으로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결되는 형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팔리는 상품으로서의 소설’이라는 게 라노베라는 경향의 중요한 정체성이다.

 90년 대 말 이후 시장에서 장르 소설(특히 판타지와 무협지)의 절대적 점유 비율은 크게 상승했지만, 경기 불황과 더불어 도서 대여점이 범람하면서 출판사와 작가에게 돌아가는 실질적인 소득은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에 있었다. 독자층으로부터의 수요 자체는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여점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장질서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던 출판사들은, 판형을 작게 하고 가격을 내리는 대신 물량을 줄이고 장르를 다각화하는 일본 라노베 시장의 출판 전략을 도입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시드노벨과 젬스노벨이 한국의 라노베 브랜드로 문을 열었고, 일본 라노베 작품들이 대규모로 라이센스되어 국내에 들어오는 한편 기존의 시장질서 체제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국내 작가들도 이 브랜드들을 통해 작품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가시나무 광대]를 통해 소수이지만 충실도가 높은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 송성준의 [안테노라 사이크]가 젬스노벨에서 나왔다―――2009년 11월 현재 젬스노벨은 다른 라노베 브랜드인 제이노블에 합병되어 있다.


▲ 대표적인 국내 라이트노벨 브랜드, 시드노벨과 제이노블.


 本-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만한 요소는 작가의 충실한 자료조사다. 평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많이 보지 않는 데다 그에서 문법을 차용해 온 라노베도 거의 읽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다른 작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금껏 접한 기존 장르 소설 중 이보다 더 방대한 자료와 소재를 적극적으로 끌어다 쓴 작품은 이우혁 작가의 [퇴마록] 정도다. 특히 현대 화기와 군사 전술 분야에 대해 대단히 충실한 묘사가 되어 있다. 물론 이 작품은 마법이나 초능력, 초과학이 전면에 부각되는 액션물이며, 그러한 소재를 다룸에 있어 ‘얼마나 현실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 내에서 그런 것들이 어째서 이 현대 지구에서 모순 없이 존재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기능하며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지나칠 만큼 꼼꼼하게 설명함으로써―――후술하겠지만 이 꼼꼼함은 이 작품의 단점이기도 하다―――설득력을 부여한다.

 픽션의 리얼리티는 감상자를 둘러 싼 현실 자체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창작자가 임의로 해석하고 정의내린 세계의 리얼리티이다. 게다가 라노베의 배경 세계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에서 표현되는 현실을 모델로 하고 있기에 기존 장르 소설들의 배경 세계보다 훨씬 집중되고 특화되어 있기도 하다. 송성준은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외계인의 기술을 열화복원해서 만든 파괴광선총을 쏴대는 특수요원과의 대결’, ‘현실과 대칭을 이루면서도 보통 사람들은 인식하지도 물리적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인 안테노라’ 같은 것을 훌륭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들은, 대단히 ‘리얼’해 보인다. 송성준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작가다.



▲ [안테노라 사이크] 1권 발매 전 광고의 일부. 소설로 쓰여진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이 만들어내는 ‘리얼’한 ‘가짜’.

 두 번째로 주목할 요소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팔리는 상품이어야 한다는 걸 대전제로 두고 있는 라노베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매력적이냐에 대한 것이며, 라노베의 특성 상 이러한 ‘인물의 매력’이라는 요소 역시도 다른 장르 소설과는 약간 다른 코드를 갖고 있다―――이러한 코드들 간의 공통된 요소를 일컬어 ‘모에(萌) 요소’라고 칭하나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요소는 아니기에 이에 관해서는 차후 별도의 글을 통해 해설한다.

 주인공인 지효성의 경우에는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강력한 비밀 조직인 ‘회사’에서 희귀 재능이나 특수 유전자를 지닌 인간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시설에서 기억을 잃은 채 잠들어 있다가 히로인인 요세와 그녀가 데려 온 용병들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설정이다. 소년 만화의 왕도적인 전개인 보이 밋 걸(boy meet girl)이라는 기본 바탕에 충실하면서도 효성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기억상실이라는 설정과 맞물려 이는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효성은 독자의 일인칭적 감정이입을 중시하면서도 삼인칭적인 관점에서의 매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라노베의 주인공답게 ‘준수한 용모’ + ‘기본적으로는 온화한 성품이나 강단 있고 단호한 면도 있음’ + ‘강력한 힘과 잠재력을 갖고 있으나 기억 상실로 인해 그 대부분의 능력을 잃은 상태’라는 익숙한 설정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타 라노베의 주인공들과 효성이라는 인물을 구분 짓는 독특한 요소는 그의 기억상실이 단순히 인물의 신비성을 강조하는 선에서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의 정체성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구해주고 이름을 가르쳐 줬으며 처음으로 인간의 온기를 느끼게 해 준 요세에 대해 단순한 연애 감정 이상의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효성에게 있어 요세는 은인인 동시에 낯설고 거친 세계에 던져진 자신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 있는 동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초반의 효성은 여러 모로 요세에게 의존하는 다소 심약한 면이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강해지고자 노력하며, 이러한 면은 작가의 충실한 묘사에 힘입어 남성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독자가 보기에도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10대 내지 20대 남성이며, 그들의 대리만족을 위해 주로 여성 인물들의 조형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는 라노베의 특성 상 이것은 상당히 커다란 강점이다.

 한편 이 작품의 히로인에 해당하는 요세의 경우에는 그 정체가 후반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3인칭 시점의 소설이긴 하지만 사건 전개가 대부분 효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과거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겉으로 어떻게 보이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의존해야 한다. 작가는 이러한 난점을 오히려 인물의 신비성을 강조하고, 요세라는 인물의 중요한 특성인 ‘가까이 다가왔다 싶으면 멀어지고, 멀리 두자니 너무도 매혹적인 소녀’라는 면모를 극대화시키는 데 이용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여성 인물은 지나치게 성녀화되거나 신비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감정을 이입할 여지가 적은 타자가 되어 버리는 위험성이 있으나 역시 작가는 뛰어난 전투 능력은 물론 일면적으로는 그저 ‘천사 같아 보이는’ 이 인물이 거칠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자리를 매김 하는지―――성녀와 같은 순수성과 마녀와 같은 잔혹성이 어떤 형태로 공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밀도 있는 묘사를 통해 이러한 위험을 피해 간다. 이러한 밀도와 깊이는 작가 송성준의 역량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숙련된 작가답게 송성준은 이 둘의 관계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아직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효성과, 그를 구해낸 요세가 머무르는 곳은 미국의 슬럼가다. 자본주의와 그에 기생하는 폭력성의 그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도시 뒷골목의 묘사나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갱 조직 등의 면면은 둘을 둘러싼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적대적인지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제시해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이후 등장하는 다른 적들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인상을 강화시키는 밑밥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 외에도 초자연적인 괴물들에 대항해 평온하고 안전한 보통 인간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거대 조직인 ‘옵스(Ops)’의 멤버들과 같은 이들도 눈에 띈다. 이들은 조직의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특수한 힘을 가진 효성이나 요세와 같은 인물에 대해 적대적이며 1권에서의 중요한 적대 세력이지만―――물론 1권에서 효성이 마지막으로 상대하는 ‘최종 보스’는 다른 존재긴 하지만 그것은 효성의 개인적인 영역이며 그의 홀로서기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큰 맥락에서 봤을 때 1권 최대의 적대 세력은 역시 옵스라고 볼 수 있다―――, 그들 내부의 유대라거나 나름의 신념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매력적인 악당이며 무게감 있는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 낸다. 특히 작품 중후반부에서 요세와 격돌하는 인물인, 옵스의 전투 부대 리더 최순일 같은 경우에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1권 마지막에야 비로소 홀로서기에 성공한 효성과 대비되는 뚜렷한 자기 긍정과 확고한 목적의식은 독자로 하여금 “순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외전이 보고 싶어, 옵스 설립 초기 시절을 배경으로!”라는 욕구가 절로 샘솟게 만든다.

 물론 탄탄한 설정과 매력적인 인물들, 밀도 있고 박력 넘치는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단점도 존재한다. 첫 번째 문제는, 내용상의 전개에 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미국 LA로 1권의 공간적 배경을 취하고 있으며, 효성과 요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현지 갱 조직과 둘을 추적해 오는 ‘회사’, 이유는 다르지만 역시 둘을 추적해 제압 내지 제거하려고 하는 옵스가 순차적으로 등장하며 스케일을 키워가는 형태를 취한다. 그 과정에 있어서 초과학과 마법, 요세가 사용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추측은 할 수 있다―――이나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공간인―――배경은 아니지만―――대칭인식 세계 안테노라 등 독자의 흥미를 돋울 만한 소재들은 잔뜩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성의 과거나 요세의 진정한 목적 등 정말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답이 나와 있지 않다. 매 권마다 자기완결적인 서사 체계를 가짐으로써 독자가 부담 없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라노베의 중요한 정의에서 일탈해 있다는 이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는 비교적 사소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후술할 세 번째 문제와 맞물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단점이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지나치리만큼 빡빡한 묘사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플러스 요소가 된 부분이지만 라노베는 본질적으로 ‘각 잡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지향점으로 하며, 본 소설의 전개와는 그다지 큰 상관도 없는 무기 묘사나 각종 군사용어들이 다수 등장하는 것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염증을 내게 할 소지가 있다. 물론 작가는 결코 설정을 남발하지 않으며, 마치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려 벽을 세우듯이 그러한 소소한 요소들을 이용해 소설 속의 리얼리티를 충실히 쌓아 올리는 수단의 일환으로 그런 방식을 취한 걸로 보인다. 그러나 라노베는 독자에게 성실성을 요구하지 않으며, 독자가 불성실하게 읽더라도 그건 전적으로 작가 탓이다.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라노베는 본질 상 그런 경향이 특히 더 하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이며 이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은 다름 아니라 ‘책이 너무 늦게 나온다’는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게 재작년인 2007년 12월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소식이 거의 없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반응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환호하면서 2권을 기다리겠다고 하다가도 너무 늦게 나오는 다음 권으로 인해 결국 기대를 접었다는 독자들이 여럿 보인다. 라노베는 만화책을 읽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으로 가볍게 접근하는 매체이며, 이렇게 늦게 책이 나와서는 아무래도 흐름이 끊기게 된다. 독자를 기다리게 하다못해 결국 지치게 만든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結-
 이 소설, [안테노라 사이크]는 라노베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문외한이 읽기에도 제법 괜찮게 잘 쓰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서점에서 손이 가지 않게 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출판사 측에서도 홍보 요소로 삼은,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툼한 분량은 개인적으로야 가격 대 분량비가 좋다고 기뻐할 만한 요소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편하게 집어들 수 있는 요소는 아니다. 책의 두께에 비해 적은 삽화도 한 몫 한다. 그러나 작가의 성실함이 행간에서 올올이 배어나오는 치밀한 묘사와, 중간 중간 적절한 완급을 두면서도 전체적인 긴장감이 일관되게 유지되는 구성 능력, 누구 하나에게도 지나치게 무게추가 쏠리지 않으면서도 저마다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인물들,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갈등들의 배치는 상당히 훌륭하다고 평할 수 있다.



▲ [안테노라 사이크] 1권 발매 전 광고의 일부. 홍보에 이용되기도 한 500페이지의 분량은 독자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라노베는 몇 백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는 아우라를 갖는 예술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읽은 그때에 ‘가볍게 독자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오락 거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러한 면에 있어서 평균 이상의 성취를 이룬, 꽤나 재미있는 준작이다. 일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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