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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티루스 (kasolathy@naver.com)



 「자네, 총보다 무서운 게 뭔지 아나? 그건 바로 사람이야.」
――― 영화 [화려한 휴가] 中 흥수

 영화 [화려한 휴가](May 18, 2007)에서 흥수는 말한다. 사람이 총보다 무섭다고. 한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꽃보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총보다 무서운 존재라고도 하는 사람. 사람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
 일본 KOEI 사(社)의 게임 [진삼국무쌍] 시리즈를 플레이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라모드(XTREME MODE)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무장(武將)을 선택해 살아남은 채로 종료 버튼을 누를 때까지, 혹은 전투 중에 사망할 때까지 끝없이 서바이벌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수라모드에서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장을 자신의 부장으로 얻을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각각의 무장마다 고유의 선악(善惡) 패러미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납치하거나 백성을 공격하거나 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를 때면 부장으로 따라다니는 마초가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동탁이 제법이라며 즐거워하는 대사를 볼 수도 있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세계이기에 이들 캐릭터의 ‘본성’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부여’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 속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인간은 과연 선한가 악한가. 그보다 앞서,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선과 악에 대해 정의를 내렸는데 대체로 국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선(善) : 「명사」 (1)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음. 또는 그런 것.
                        (2) 『철학』 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
악(惡) : 「명사」 (1)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 나쁨. 또는 그런 것.
                        (2) 『철학』 도덕률이나 양심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中

 [루시퍼 이펙트]는 선악의 개념에 쿠피디타스(cupiditas)와 카리타스(caritas)를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쿠피디타스란 물욕이나 권력욕 등을 포괄하는 탐욕을 의미하고, 카리타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서도 존귀하게 여기지만 또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는 관점을 뜻한다. 선과 악의 개념을 쿠피디타스와 카리타스로 설명한다면 도덕과 양심을 무시한 채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욕심을 채우는 ‘쿠피디타스에 충실한 행동’은 곧 악이라고 볼 수 있고, 인간의 존엄과 관계 속의 인간을 인정하며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기반으로 한 도덕적 행위는 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지만 이외수 씨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이외수, 해냄, 2007년 12월)에 나오는 “나쁜 사람은 곧 나뿐인 사람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쿠피디티스와 카리타스를 이용한 설명 또한 대단히 그럴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삼국무쌍]과 다름없는 ‘누군가의 창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조금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본래 생득적(生得的)으로 지니는 성질이 있든 없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과거 수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더 나아가서는 그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가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논의했다. 그리고 그 탐구와 논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라는 데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는가! (이사야 14:12)」

 루시퍼(light bearer)는 본래 ‘빛을 가져오는 존재’를 의미한다. 성경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또다시 그 번역본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경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수용 과정에서 조금씩 의미의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루시퍼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필립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는 [루시퍼 이펙트]를 통해 루시퍼는 본래 신이 가장 사랑했던 천사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선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흔히 “천사 같다.”라고 한다. 그런데 ‘천사표’를 붙인 선량한 사람이 어느 순간 늑대․이리․승냥이의 탈을 쓰고 변신해서 악랄한 행동을 한다. 마치 루시퍼처럼.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하는가. 필립 짐바르도의 [루시퍼 이펙트]는 이러한 질문을 표지에 내걸고 있다.
 상황 이론은 말한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사람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 생각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有機體)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인간이 빚어낸 사회나 제도를 비롯한 각종 ‘시스템’ 역시 유기체로 간주한다. 유기체는 단순한 ‘투입->산출’, ‘자극->반응’의 공식을 적용해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유기체가 생득적이든 획득적이든 유기체 고유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얼마든지 다른 유기체나 자신을 둘러싼 시스템 유기체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두고 “외향적이다”, “내성적이다” 등의 말로 그 성격을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든 외향적이고, 또 어떠한 상황에서든 내성적이기만 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ABO식 혈액형에 관한 성격 분석 이론이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넘효과(Barnum effect) 때문이라지 않던가. 주변 사람들과 있을 때 곧잘 우스갯소리를 해서 남을 즐겁게 하고 언제나 그 자리를 유쾌하게 빛내는 사람이라도 낯선 환경에서는 움츠러들 수 있다. 또 언제나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해서 행동하는 사람이라도 감정이 앞서는 상황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한다. 현상학적 성격 이론만 하더라도 한 개인을 어떤 유형에 배타적으로 분류하려는 유형론(類型論)이나 여러 상황을 통해 계속해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행동 경향이 성격을 형성한다고 보는 특성론(特性論)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과 지각, 현재의 관계, 유기체로서의 인간 개개인의 직접적인 경험과 인식 등이 성격을 구성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격에 대해 ‘성격은 환경에 대한 개인의 독특한 적응행동을 결정하는 심리․물리적 체계들의 역동적 조직’이라고 정의한 올포트(Allport) 역시 ‘특성이라는 개념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성격을 유형으로 분류하는’ 전통적 접근을 배격했다. 올포트에 따르면 개인은 여러 가지 종류의 성격 특성을 모두 다 소유하고 있는데, 다만 어떤 특성을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만 다르다고 한다. 그는 또한 성격에 대해 여러 가지 특성들이 한 개체 내에서 통합되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조직으로 보기도 했다. 이렇듯 전통적인 특성-유형론의 관점과는 달리 사람의 성격은 특정 유형으로 고정할 수 없으며, ‘한 개인에게서 언제나 항상 한결같이 나타나는 행동 양식’이라는 것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한 번쯤 의심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상황에 따라 그저 수동적으로 변하는 존재인가. 같은 상황에 부닥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모두 같은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다. 생득적으로 지니는 본성 때문인지, 후천적으로 형성하는 성격 때문인지, 자신이 정립한 윤리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보이는 공통적인 행동 양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루시퍼 이펙트]는 상황에 따라 선악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중에서도 선량하던 사람들이 악랄한 행동을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루시퍼로 변하도록 이끄는 까닭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루시퍼 이펙트의 씨앗이 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본래 ‘반사회적 행동’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한 ‘모의 교도소 실험’이었는데, 1971년 7월에 시작한 이 실험은 1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피험자들 사이에서 가학 및 피학 행동이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피험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 교도관과 수감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실험의 초기에는 누가 교도관이 되었든, 누가 수감자가 되었든 관계없을 만큼 동질적인 실험 참가자들이었지만, 그들 각자에게 교도관 혹은 수감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순간부터 이들에게는 권력의 차이가 발생했다. 통제하는 이과 통제받는 이. 통제받는 이가 사라지면 통제하는 이의 힘도 사라지지만, 어찌 되었든 통제받는 ‘대상’이 존재하는 한 통제하는 ‘주체’의 힘은 커진다. 특히 통제하는 존재가 통제받는 존재보다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는 것이 많은 경우라면 그 ‘힘’은 극대화된다. 아는 것이 힘이라지 않던가.
 처음 모의 교도소로 들어온 수감자들은 교도관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처음 동질적이었던 교도관과 수감자 집단은 상대의 몸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게다가 수감자들은 화장실에 갈 때조차 눈을 가린 채 교도관의 안내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처한 상황 속에서 교도관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아는 입장이 되었다. 이렇게 권력의 추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교도관 역할을 담당한 이들은 수감자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가혹행위는 ‘인간’의 창의력(創意力)과 결합하며 점차 다양한 형태로 ‘인간’을 고문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 누구도 적극적인 반발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가학행위를 당하는 수감자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저항하고자 한 사람들 또한 있었으나 그들의 저항은 대단히 개별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교도관 중에서도 몇몇 교도관의 가학행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는 사람뿐이었다. 그들 대다수는 폭력 앞에서 침묵할 뿐이었다. 필립 짐바르도는 그러한 실험 참가자들의 모습을 ‘행동하지 않는 악’이라고 지칭한다. 이 행동하지 않는 악의 모습은 학교 교실 속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점심시간. 한 학생이 혼자 밥을 먹고 있다. 그런 그 아이에게 같은 반 학생 하나가 다가간다. “너 체육복 있지? 나 체육복 안 갖고 왔거든. 다음 시간에 써야 하니까 빌려갈게.” 책상 옆에 걸려 있던 체육복을 들고 가버리는 급우. 같은 반이기에 그 학생 역시 다음 시간에 체육복을 입어야 한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수군거리기만 할 뿐, 나서서 체육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생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다.」

 같은 반 학생에게서 체육복을 강탈하는 학생이 보인 행동은 악하다. 정말 체육복이 필요해서였든 가학적 즐거움을 충족하기 위해서였든 타인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 ‘나뿐인 행동’을 했으므로 그 학생의 행동은 악하다. 그렇다면 피해 학생을 비롯한 다른 나머지 학생들을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필립 짐바르도의 견해를 빌리자면, 이 또한 ‘악’이다. 행동하지 않는 악. 비열하고 이기적인 악에 맞서지 않고 그저 침묵하고 방관할 뿐인 사람들 또한 ‘루시퍼 이펙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저런 끔찍한 짓을 할 수가 있지?”
 신문이나 TV를 통해 흉악범죄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중얼댄다. 또한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논하면서도 말한다.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하다니. 시키는 놈도 웃기고 시킨다고 하는 놈들도 웃기다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나라면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그런 나쁜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필립 짐바르도는 이러한 사고를 지닌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자신은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는 그러한 환상에 자기중심적 편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기중심적 편견이 아무리 굳은 믿음을 닮았다고 해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낯설고 비일상적이라면 그 믿음이 환상처럼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실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실험 대상자들은 인성검사 결과 모두 평균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교도소라는 낯선 환경에 던져지자 평소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다. 물론 그 당시에 행해졌던 인성검사의 각종 타당도가 제대로 검증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낯설고 비일상적 환경에 처한 사람은 익숙한 환경 속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낯선 환경 속에서 변해버린 피험자들을 관찰한 필립 짐바르도는 이러한 실험 결과를 토대로 썩은 사과(문제 있는 개개인)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썩은 상자(잘못된 상황)의 강력한 영향으로 인간의 성격이 변화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바로 이 주장이 [루시퍼 이펙트]의 핵심이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문학사상사, 1999년 8월) 속 엄석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힘에 기대어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는 끝내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작품 속에서 엄석대가 보인 행동은 그의 개인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것인가? 무언가 범죄를 저지르고 잡혀가는 모습을 본다면 언뜻 그러한 것 같다. 꼭 범죄자가 될성부른 나무 엄석대이기에 떡잎 시절부터 못된 행각을 벌이는 듯하다. 그 성향이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마치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석대의 뒤에는 썩은 상자가 있었다. 엄석대가 그 ‘상자’에 들어가기 전까지 싱싱했는지 썩어 문드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엄석대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묵인하는 담임교사와 어떻게 해서든 그와 친해져서 권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사회적 승인 등을 바탕으로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그리고 엄석대 이외의 다른 여러 아이들 또한 상황의 영향에 휘둘려 움직인다. 엄석대가 교실 내에서 권력을 쥐고 있을 때에는 엄석대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데에 한몫했던 아이들이 엄석대의 권력이 무너지던 순간에는 가장 맹렬하게 엄석대를 비난했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 뒤에도 그런 분위기를 주도한 담임교사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사회적 승인, 새로운 질서 내로 편입되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필립 짐바르도는 썩은 사과를 만드는 썩은 상자의 구성 요소로 이러한 사회적 승인과 집단 소속에 대한 욕구, 지도력 없는 상급자, 집단 정체성 등을 꼽고 있다. 그러한 여러 썩은 요소들 가운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대상에 대한 적대적 상상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비인간화이다.

 「사랑하는 청년 학도 여러분! 무자비한 공산 괴뢰군은 우리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대전까지 침략의 총칼을 뻗쳤습니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피 끓는 애국 학도 여러분! 분연히 일어나 총을 잡읍시다! 다 같이 전선으로 나가 괴뢰도당을 쳐부수고 조국 대한을 지킵시다.」
 「이제 곧 며칠 뒤면 우리 인민 해방군이 항도 부산을 점령하게 될 것입네다. 사랑하는 국군 동지 여러분, 이 땅에 미군 오랑캐를 몰아내고 우리와 함께 조국 통일의 대과업에 동참합세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을 생각하십시오. 과연 누굴 위해 꽃다운 청춘을 버리시려는 겁매까?」
―――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中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TaeGukGi: Brotherhood Of War, 2003)는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전쟁이라는 낯선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총질하기도 하고 혹은 더욱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서로가 상대를 향해 공산 괴뢰군이네, 미군 오랑캐네 하며 비인간화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싸운다. 이념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싸운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곡식을 배급받아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의 생을 연명하기 위해 그대로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총살당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런 이들의 모습 사이사이로 나오는 국군과 인민군의 선전과 선동이 섬뜩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각하, 목숨만은 구해 주십시오. 사상이 뭔지 이데올로기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입니다. 바보 같은 여자입니다. 그저 바보같이 한 남자를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입니다. 사랑이 시킨 일을 사람이 어찌 피해갈 수 있습니까, 각하.」
――― 드라마 [서울, 1945] 中 동우

 간첩으로 남한에 침입했다가 총상을 입은 옛 연인 운혁을 38선 이북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적발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약혼녀 해경에 대해, 동우는 당시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며 선처를 호소한다. 사상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해경은 모른다.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해경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이념이 유입되고 그에 휘말려 월북했던 옛 연인의 목숨이었다. 그러나 그런 해경이 38년 이남에서는 간첩이 되고 38선 이북에서는 인민영웅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했을 때에는 그들의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가 된다.

 「무엇을 때려 부수는지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도수장 안으로 나는 쑥 들어섰다. 밝은 데 있다 갑자기 들어갔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나는 우선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전에 확 끼얹어 오는 이상한 냄새에 코를 벌름했다. 숨을 들이쉴 수 없을 만큼 느끼하고 역겨운 피 냄새였다. 그러자 컴컴하던 도수장 안이 조금 밝아지며, 우선 내 눈에 들어찬 것은 추서방의 말처럼 내가 실신하기에 족할 만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외삼촌이나 아버지는 28년 전에 죽고, 그 무리들의 이론적인 지도자였던 배도수씨는 지금 펄펄 살아 대한민국 땅을 딛고 내 앞에 앉아 있다는 이 현실을 다 제가끔 타고난 팔자소관으로 미루어 버리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글은 기성명만 알면 족하다느니,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니라, 하며 껑충거렸던 아버지와 외삼촌이 거창한 사상 문제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비극 중의 희극이요, 희극이라기엔 너무나 비극적인 종말이었다.」
――― 김원일, 소설 [노을] 中

 없어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정치 이념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가른다. 이념을 근거로 상대를 죽여도 되는 존재, 죽여 마땅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 사람을 죽인다.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용되기도 하고, 이념에 조작 당한 사고로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가 하면, 이념을 빌미 삼아 평소 악감정이 있던 ‘남’을 해치기도 한다. 누가 누군가를 해치는 개별 행동 양상보다 무서운 것은 그 행동을 조작하는 사상과 이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개개인 대부분은 정치가 무엇인지, 이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그것으로 세상을 움직이고자 하는 누군가는 있다. 그런 그들이 이념을 내세우고 사상을 전파하며 ‘적’으로 규정하고 적대적 상상력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개개인의 사고를 움직이는 셈이다. 인간이 구성한 사회가 움직이는 데에 있어 이러한 조작(?)이 어느 정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사고’마저도 누군가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면 끔찍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존재는 시스템과 정치 구조,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몇몇 소수의 의도에 따라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일까? 물론 필립 짐바르도의 생각처럼, 사람은 언제든지 악마가 되어버릴 수 있다. 썩은 상자 속에서 썩어버릴 수 있다. 교도소나 전쟁으로 요약되는 낯설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 뿐만이 아니라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지 루시퍼가 된다. 낯설고 특수한 상황마저도 일상으로 바꾸는 ‘시간’ 앞에서조차 루시퍼는 얼마든지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한다. 누구나 악랄한 행동을 할 수 있기에 또한 악은 평범하다.
 그런데 필립 짐바르도는 또한 루시퍼가 되어버리는 사람만큼이나 그 악한 마음과 상황을 이겨내려는 선량한 영웅 역시 지극히 평범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유기체다. 유기체이기에, 마찬가지로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고 그 과정에서 루시퍼 이펙트에 휘말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한 유기체이기에 얼마든지 루시퍼의 유혹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다.
 필립 짐바르도는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인식하고 그 상황을 깨뜨리고자 맞서는 사람을 ‘평범한 영웅’이라 지칭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자신에게 실험을 중지할 것을 요청한 크리스티나 매슬랙과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포로 학대 사진을 세상에 공개한 조 다비, 2차 세계 대전 당시 학살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도운 여러 사람을 꼽았다. 썩은 상자 내부에서 썩어들어가기를, 혹은 적대적 상상력에 잠식되기를 거부한 이들은 그릇된 사회 유기체에 저항한 개인 유기체들이기에 저자의 말대로 ‘평범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모습은 ‘악’을 행하고도 “어쩔 수 없었다.”라며 합리화하는 사람들에게, ‘루시퍼 이펙트’는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루시퍼 이펙트를 통해 악의 속성을 이해하고 경계하는 양심적인 유기체로 거듭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루시퍼 이펙트를 이겨내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상황과 시스템의 꼭두각시놀음’ 속에서 인간 본연의 가치와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있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게 항상 옳은 것은 아니오. 남들이 증오하는 것이 항상 당신에게 그릇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오. 또한, 현재의 증오가 미래의 증오가 되지도 않을 것이오.」
――― 안영기, 게임 [또 다른 지식의 성전] 中 알비레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듣고 있는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이것은 선과 악에 관한 탐구에서만 유효한 질문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다. 과연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온전히 나 자신의 감각과 사고에 의해 지각되는 것인지.
 상황과 시스템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 속에서 움직이는 개별 유기체들과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인이 상황 및 시스템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상황이나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많다. 특히 거대한 사회구조는 개개인의 존엄성을 위협하기도 한다. [루시퍼 이펙트]는 선량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도록 이끄는 상황과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상황과 시스템 속에서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상황과 시스템에 저항하고 양심을 지키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악한 행동을 설명하고자 하는 서적은 많다. 경우에 따라 “정말 맞는 소리”라고 여겨지는 주장도 있고 “꼭 그렇지만은 않은 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주장도 있다. 어떤 사상과 이론인들 모든 경우에 100% 들어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루시퍼 이펙트]에서 제시하고 있는 ‘루시퍼 이펙트’ 또한 그러하고, 이미 ‘루시퍼 이펙트’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서적도 출간되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서적처럼 악의 실체에 근접하고자 탐구했으나 탐구만으로는 악의 발생이나 그로 말미암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루시퍼 이펙트]에는 독자의 흥미를 잡아끄는 면이 있다. 바로 인간의 악한 행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상황과 시스템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관한 내용이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상황 및 시스템과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저승사자 입술색 같다고 느껴지는 검은 갈색 립스틱을 바른 얼굴이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이던 시절이 있었고, 사회에 대해 덮어놓고 비판부터 하는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라면 무조건 음악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반공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북한 사람은 늑대 얼굴에 빨간 눈을 하고 있다고 믿던 시절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루시퍼 이펙트]를 읽은 독자라면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듯싶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가. 지금 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혹시 상황과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구조가 내 사고를 틀어쥔 채 조작하는 것은 아닌가. 나의 삶이 그렇게 조작 당하는 아닌가. 나는 과연 지금까지 나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왔는가. 앞으로도 인간으로서, 생명체로서 내가 지니는 이 소중한 존엄성을 잘 지켜낼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 [루시퍼 이펙트]는 그런 세상 속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악’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있으며, 단순히 그 실체를 규명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 자신이 현재 개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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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9.11.25 21:54 댓글 수정 삭제
    전부터 관심 있던 책이었는데 시간 내 읽어봐야 겠군요, 자세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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