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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뒤섞여 있다. 기자들은 대개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지진이 할퀴고 간 아이티의 현장을 설명했다. ‘순간’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빗나갔더라면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자연재해 앞에서, 삶과 죽음이 이마를 맞대었다.
 이것은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니다. 당장 대한민국도 지반의 몸부림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아니라던가.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뿐만이 아니다. 여러 해 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재잘대며 등교하던 여학생들은 한강을 가로지르던 다리와 함께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쇼핑 나온 사람들과 물건 팔던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파묻혀 버렸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잠을 자던 어린아이들은 매캐한 연기 속에서 쓰러지고 결국 완전히 타버렸다. 한 달에 90만 원도 안 되는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늦은 시각까지 열심히 일하다 귀가하던 직장인 여성은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되고, 시험시간에 쓸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을 사러 가던 고교생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대형 트럭에 치인다. 소위 말하는 묻지마식 범죄에 휘말릴 수도 있고,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테러에 휩쓸릴 수도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석유를 뿌릴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이 칼을 들고 덤빌 수도 있다. 안전지대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우연과 순간이 휘두르는 거대한 칼날 앞에서, 우리는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도망치기도 하지만,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아기는 방 속을 들여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 김광균, {은수저}, [문학], 1946


 죽은 아기가 열어서 방 속을 들여다보고 도로 닫는 들창만큼이나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얄팍하다. ‘다만 여기는 / 열매가 떨어지면 /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박목월, {하관}, [난(蘭)·기타], 1959)’ 일 뿐이지만, 우연과 순간의 칼날 앞에서 모든 일상이 깨지고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7월의 사람들 (박해로)}은 바로 이러한 순간과 우연에 의해 개개인의 일상이 뒤집히고 비일상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삶을 살던 누군가의 일상은,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깨뜨린다. 그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그 공간과 관련이 있거나, 우연히 영문도 모른 채 그 사건에 개입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비일상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만다.
 지극히 비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일상에서 경험한 어려움과 상처를 이겨낼 용기와 소중한 인연을 얻은 누군가도 있지만, 동시에 큰 상처를 입거나 죽은 사람도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특별히 선량한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 또한 그래 마땅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일상적인 그 사건이 그들을 덮쳤던 바로 그 순간의 우연처럼, 삶과 죽음은 극명하게 갈렸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때, 세 사람의 젊은이가 오랜 시간 매몰되어 있던 중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들을 향한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대단했다. 전 국민이 가슴을 졸였던 사건이었고, 이제는 더 이상의 생존자가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사건을 둘러싸고 있던 시점이었기에, 그들의 생환은 대단히 희망적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언론은 그들이 남달리 성실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착한 젊은이였다는 사실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마치 착하게 산 사람들은 반드시 복을 받기에 그 세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인 양 말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사이에는 들창 하나 정도의 간격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우연과 순간의 지배를 받는다. 분홍색 외벽의 잔해가 녹아서 굳은 아이스크림처럼 버무려진 그 끔찍한 참사의 현장 속에서 살아 나오지 못한 이들은 과연 성실하지 않았던 것인가.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았던 것인가. 살아 돌아온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모두 저마다의 길을 열심히 걷는 사람들이었다. 일상을 무너뜨리는 그 짧은 순간과 우연이 무시무시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붕괴 (권정은)} 역시 {7월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순간의 우연에 의해 일상이 깨어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건물 붕괴 사고. 이러한 사건에 휘말리느냐 휘말리지 않느냐는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무너진 건물 잔해와 함께 추락하고, 깨어진 콘크리트 더미에 깔리는 것이다. 사고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두려운 상황 속에서 깊이 의지하고 믿어왔던 존재가 그동안 번번이 자신의 평온하던 일상을 깨뜨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떠할 것인가. 자신에 대한 미묘한 감정으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빼앗아 없애는 친구와 그때마다 깨어지는 일상, 그리고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비일상마저 익숙한 일상이 되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순간 느끼게 되는 공포와 분노가 얼마나 클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친구에게 살해당하고, 부모에게 살해당하고, 자식에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신문 사회면에 종종 실린다.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남의 일’이라고 여긴다. 실제로도 남의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어머나, 세상에…….”를 연발할 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순간까지, 과연 그 누가 “나는 절대 그런 식으로 믿음을 배신당하지 않을 거야.”하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사람 일도, 사람 속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한 치 앞도 모두 물러 다 안다면 (김국환, {타타타}, 1993년 3월)’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무도 모른다. 며느리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을 지 알 수 없다. 가까운 사람도 믿을 수 없다. 동시에,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이 {붕괴}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사람의 기억은 객관적인 사건 그대로를 기억하지 않는다. 애초에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일 수 없는 탓도 있겠지만, 기억이라는 것 또한 매 순간순간 왜곡되고 소실되고 첨가된다. 기억을 하는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보처리이론에서도 인간의 장기기억에 대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증거는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하나 이상 운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요즈음, 지인들의 블로그나 전혀 낯모르는 누군가의 블로그를 방문하다 보면 자신이 피해를 입은 일에 대해 푸념 조로 이야기하는 투의 글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구입한 물건에 대한 환불요청이 거절당했다든지, 애인이나 배우자와 다투었다든지, 친구가 섭섭하게 했다든지 하는 이야기 등, 그 사연은 다양하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준 일에 대해 반성하며 남긴 흔적보다, 자신이 피해를 받은 일에 대해 토로하듯 남긴 흔적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누구나 언제나 일생 동안 겪는 모든 상황에서 피해자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언제나 일생 동안 겪는 모든 상황에서 가해자일 수는 없다. 매 순간순간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가해와 피해를 고루 반복한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과 기억은 대체로 피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합리화’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해행위를 하면서도 그동안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피해를 생각하면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람, 결코 적지 않다.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으며, 또한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정신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고들 하는 일부 사람들만이 지닌 심리적 작용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조금씩 마음속에 갈무리하고 있고, 그렇기에 옆 친구를 시샘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내뱉고도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다. 이 미묘한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과연 어느 쪽을 더 많이 닮았는지, 어느 쪽의 심리에 더욱 많이 공감하게 되는지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한다.
 가해와 피해의 문제에 대해 고찰하게 하고, 동시에 자신이 감정적으로 더 공감하게 되는 인물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주는 다른 작품으로는 {숏컷 (박애진)}을 들 수 있다. 대인관계는 어렵다. 직장 스트레스의 원인에 대해 설문조사를 할 때면 늘 대다수의 직장인이 ‘직장 내 대인관계’를 꼽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만큼 어렵다. 사람이라는 유기체를 상대하는 만큼, 확실히 대인관계는 어렵다. 일은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아무리 잘 모르는 분야와 관련 깊은 어려운 업무라고 해도 해낼 수 있다. 대체로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난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사랑을 준다고 해서 준 만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신뢰를 준다고 해서 딱 그만큼의 신뢰를 얻는 것도 아니다. 회사 사람들과 잘 지내보고자 애쓰지만, 그들이 그만큼 자신의 노력에 응하고 받아주지 않으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잘 지내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크게 상처받지도 않는다.
 직장 내에서 사람 간에 벌어지는 자잘한 문제가 윤배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이끌고 간다. 누구에게나 존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회사 내의 윤배는 성조차도 자주 혼동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는 매 순간순간 피해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고, 또 다른 동료들에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면서도 합리화한다. 그런 윤배는 자신이 집에 감금해 둔 영진에게 철저히 지배당한다.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기에. 자신의 고민에 해답이나 조언을 제시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기에. 감정을 격한 방법으로 표출하기에 앞서 실습해 볼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기에. 어리광이라도 부려 볼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기에. 지배하고 억압해 볼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기에. 윤배는 지하실에 묶어둔 영진을 풀어줄 수 없을 정도로 지배당한다. 그리고 그 관계가 짙어지는 동안,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지하실에 감금하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지하실에 감금당하는 그 지독한 비일상이 차차 일상으로 자리 잡아간다. 상황과 환경에 물들어가는 인간처럼 일상이 된 비일상은, 그렇게 또 다른 비일상을 향해 나아간다.
 비일상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모습은 {우리는 미쳐간다 (강지영)}의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한 사람의 죽음, 또 한 사람의 죽음, 또 한 사람의 죽음……. 돈에 대한 집착과 삶에 대한 욕구가 비윤리적인 범죄 행위를 통해 누군가의, 다른 누군가의 일상생활을 뒤집어버린다. 일상이 비일상으로 뒤집히는 가장 극단적인 예는 죽음이다. 죽지 않은 사람의 처지에서는 일상 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많은 비일상적인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죽게 되는 그 당사자의 처지에서는 그 자체로 모든 일상이 종결지어져 버린다. 그 누구에게도 강제로 다른 누군가의 일상을 완전히 끝장내버릴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 인간의 윤리의식이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집착은 이 모든 윤리를 깨뜨려버린다. 집착이 지나치면 짐승이 된다고 하던가, 조용한 하대리에서 짐승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인다. 호랑이인지 사자인지, 독사인지 전갈인지 모를 그것에게 물려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누군가와 그 살육의 한 가운데에서 그만 단단하게 올가미에 걸려버리는 누군가, 죽은 누군가, 살아남은 누군가, 살해당한 누군가, 살인을 저지른 누군가……. 이들의 기묘하게 돌아버린 관계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더 나아가 읽는 이와 읽는 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신뢰라는 것이 어쩌면 집착 앞에서 끊어져 버릴 만큼 가느다란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한다.
 집착에 빠져 짐승이 되어버린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은 {키다리 아저씨 (정지원)}와 {그림자놀이 (류승현)}이다.
 한 여자 대학생이 ‘키 180cm 안 되는 남자’를 ‘루저’로 지칭한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 {키다리 아저씨}에는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 짐승이 된 남자는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자의 키가 150센티미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268쪽)”, “남자는 키가 190은 되는 게 좋은 것 같아. (268쪽)” 말하자면 키 190cm가 안 되는 남자와 키 150cm가 넘는 여자는 루저(?)인 셈이다. 뭔가를 덧붙여 키를 더 키우거나 다리를 잘라 키를 줄여야 하는.  
 예쁜 여자와 키 큰 남자를 찾는 분위기 속에서, 예쁘지 않은 여자와 키 크지 않은 남자는 어딘가 소외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 언론은 오래전부터 ‘외모지상주의’라고 지칭하며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는데, 사실 언론에서 말하는 ‘외모지상주의’는 어느 정도 부풀려진 감이 있다. 몇 해 전 ‘얼짱’이라는 말이 TV나 인터넷을 통해 빈번히 오르내리던 시기에도 일부 언론은 얼짱 사이트에 게시된 ‘강도 얼짱’ 게시물과 그 아래에 달린 ‘예쁘니까 용서한다’, ‘나한테 오면 내가 숨겨준다’, ‘예쁜데 잡히지 마라’는 식의 내용이 담긴 댓글을 지적하며 “외모지상주의가 윤리의식마저 무너뜨리고 있다”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터넷을 통한 일종의 놀이를 두고 지나치게 과잉 분석을 한 측면이 있다. 가영은 말한다. “기자들의 낚시질에 놀아나면 진짜로 계속 애인 못 만들 수가 있어. (291쪽)” 가영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라는 것은 부풀려진 감이 있다. 누구든 말한다. 예쁘면 좋지. 키 크면 좋지. 하지만, 이것은 입버릇이고, 또한 ‘좋은 사람’이 예쁘거나 키가 크면 더 좋다는 의미일 뿐, 오로지 외모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언론은 ‘루저 파문’을 계기 삼아, 또다시 여성들을 상대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성들의 키가 어느 정도인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시도해 ‘키가 180cm에 미치지 않는 남성’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타고난 외모라는 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고 현대 의학의 힘으로 어느 정도 바꿀 수는 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누군가의 외모에 대한 평가나 비판, 놀림은 좋지 않다. 당사자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언론에 의해 과잉해석 되고 감정적으로 더욱 부풀려진 면이 있기는 하지만, {키다리 아저씨}는 독자로 하여금 혹시나 누군가에게 외모를 근거로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그 말이 아무리 별 뜻 없는 농담으로, 혹은 적당히 대충 둘러댄 것에 불과하다 해도, 그 말에 상처받은 누군가는, 그 말을 뱉은 누군가나 혹은 다른 누군가의 일상을 깨뜨려 그들을 불구로 만들거나, 생명활동을 정지시키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림자놀이}는 어느 특정 한 사람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으로 짐승이 되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집착을 하다 보면 자연히 감시에 대한 욕구도 파생되기 마련이다. 늘 궁금하다. 이 시각에는 어디서 무엇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 그리고 과학기술은 인간의 그러한 욕구를 풀어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냈다. 감시카메라, 그리고 도청장치라고 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자신이 위치하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그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다. 무서운 세상이다.
 서울 시민이라면 하루 동안 대략 17회가량 CCTV에 찍힌다고 한다. 게다가 휴대전화의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다니게 되었다. 파놉티콘의 감시탑이 호주머니마다 하나씩 들어 있는 셈이다. 여차 하다가는 한순간에 ‘개똥녀’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사람들은 파놉티콘의 죄수처럼 살게 되었다.
 만약 자신의 집안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그것이 잡아낸 장면이 누군가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CCTV의 사각지대를 찾아내어 최대한 피해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파놉티콘의 감기지 않는 눈을 향해 쇠망치를 들이대거나 두꺼운 천을 씌워 자신의 모습을 찍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대응 방식이 있겠지만, 분명한 점은 그것이 어딘가로 계속해서 영상을 전송하는 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집 안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집안에서도 화장을 지우지 못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코딱지도 마음대로 필 수 없을 것이다. CCTV가 그 영상을 누군가에게 전송하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해도, 사람은 CCTV 앞에서 자신을 통제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 감시의 눈초리가 오래전부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민정은 커다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안전지대는 없다. CCTV와 도청장치가 존재하는 한, 감시의 눈초리는 누군가를 찾아갈 것이고, 모두가 저마다 휴대전화라는 감시탑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한 일상생활은 파놉티콘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림자놀이}가 독자로 하여금 한 개인의 공간 속에 침투해서 아무도 모르게 그 공간의 주인을 응시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의식하도록 한다면, {위험한 오해 (방세현)}는 같은 공간 안에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존재가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일깨운다.
 언젠가 한 외국인이 찍은 동영상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 집에서 사람이 활동하고 있을 때에는 숨어 있다가, 그 사람이 외출하거나 잠이 들었을 때 나와서 음식을 훔쳐 먹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해당 동영상에는 벽장 속에서 숨어 지내는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동영상이 조작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매우 소름끼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가전제품을 포장하는 박스 따위를 밀어 넣어 두는 창고 속에 어느 누군가가 들어와 그 자리를 자신의 가옥으로 선정할 수도 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몸을 씻고 소파에 앉아 한참 재미나게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커튼 뒤에서 낯선 사람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위험한 오해}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어딘가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전개되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집이란 곳은 대다수의 사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공간이기에, 집에만 있으면 모든 사고와 범죄의 위험도 사라질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집이라는 공간에서도 언제든지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집안에서 모든 경계를 풀어버리는 사람들을 향해 ‘세상에 안전지대는 없다’라며 경고한다. 그렇다. 이 세상에 안전지대란 없다. 지금 몸을 담그고 숨을 쉬는 그 공간 안에 어떤 위험 요소가 자신과 나란히 숨을 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위험요소가 사람이든 아니든 말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왔던 친구나 가까운 사촌이, 혹은 자기 자신이 어느 날 아침 살인미수 혐의를 달고 경찰서로 연행될 수도 있다. 함께한 시간만큼 믿음이 깊어져 온 연인이나 배우자가 준 음식 속에 독극물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칼을 꺼내 들 수도 있다.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정중하게 담뱃불을 꺼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상대방이 불붙은 담배의 끝을 자신의 눈에 들이댈 수도 있다.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낯선 사람이 그 안에서 뛰쳐나올 수도 있다. 가족 간의 오붓한 여행을 꿈꾸며 탑승한 비행기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을 수도 있다.
 지진이나 화산폭발, 해일 등 자연재해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되는 곳이나, 전쟁, 테러 등의 이유로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곳 등을 위험지대, 혹은 위험지역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곳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일까? 사실 사람 사는 곳은 다 위험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도 위험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그 성격이 다르다. 사람 하나하나 마다 제각각 의지가 있고 욕망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얽히는 과정 속에서 피해의식이 싹트기 시작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도 나타난다. 믿음이 생기고 불신이 싹튼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도 하고, 지배당하기도 한다. 집착이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기도 한다. 욕망을 통제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하려는 사람도 있다. 또 그 욕망을 해소하는 방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현되어 흘러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의지를 발산하는 흐름 속에 말려들게 될지 말려들지 않을지 조차 예측할 수 없다. 일상과 비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일상을 깨뜨렸던 그 비일상이 일상의 자리를 차지하다가 어느 날 날아온 또 다른 비일상에 얻어맞고 그대로 물러나 버린다. 위험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바로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이기에 위험하다. 여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과 마찬가지로 우연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기에 더욱 위험하다. 한강 다리가 무너질 때 함께 추락한 사람들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낯모르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강간살해당한 여자들 또한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에 휘말린 사람들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무시무시한 우연이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들며 한순간에 일상이 끝장날 수도 있다. 당장 일상이 깨어지지는 않더라도 우연이 빚은 인연으로 말미암은 결과가 치명적일 수도 있다. 앞날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은 단 1초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1초 뒤의 자신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생명활동을 계속하고 있을지 조차도 알 수 없다. 한 치 앞도 모두 물러 다 알 수는 없는 것이 미래이기에, 미래는 늘 어떤 두려움과 함께 움직인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작은 우연 하나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이렇게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신문이나 뉴스에서 접하는 사고나 사건이 혹시라도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두려워한다.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듯한 이야기 속의 사건과 사고는 어딘가 먼 나라 일처럼 느껴진다. 다른 세상을 배경으로 삼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속 흉악한 마법사나 거대한 괴물은 두려움을 빚어내지 못한다. 그들의 악행으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의 슬픔에는 절실하게 공감하고, 악한 존재로 말미암아 발생한 재앙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기심에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 마법사와 괴물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악한 존재’가 상징하는 현실 속의 다른 존재나 정치-사회적 시스템을, 혹은 악한 존재와 유사한 성향이 있는 일상 속 누군가를 떠올릴 때에야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가까이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행에 피해를 입는 것은 자기의 일이 아닌 이야기 속 남의 일이며, 이야기 속 그들이 현실에 등장하는 ‘환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남의 일로 남을 테니 말이다.
 반대로 자신이 늘 접하고 소통하며 살아가는 세상과 똑 닮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시무시한 사건과 사고는 그 일이 언제든지 자신에게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줄거리 자체는 물론이고, 개인의 평안한 일상을 침해하는 무언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품게 된다. 언제든지 그와 비슷한 사건에 자신이 말려들 수 있기에. 사람 사는 세상에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이것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전설을 모은 어린이용 괴담집에 “그 무섭고 잔인한 그것은 아직도 어딘가에서 피를 갈구하며 희생자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와 같은 문장이 첨가되는 까닭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 “그리하여 그 무시무시한 존재는 사라지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와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를 지을 때와는 달리, 그때까지 읽었던 이야기가 훨씬 무섭고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글을 읽는 소년 혹은 소녀로 하여금 ‘언제든지 자신도 그 전설과 같은 사건에 말려들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완벽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애써 이야기를 장황하게 꾸며대지 않는다. 상대의 머릿속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만 심어줄 수 있다면, 그 나머지 부분은 상대가 알아서 채워낸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거짓말쟁이이다. 똑같은 전설을 다루는 괴담집이라도 엮은이의 역량에 따라 독자에게 닿는 공보의 깊이가 다른 것처럼, 독자에게 ‘내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 ‘거짓말’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진다.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2]에 실린 단편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언제든지 휩쓸릴 수 있는 사건에 대해 밀도 있게 전개한 일곱 명의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거짓말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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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우 10.04.17 03:43 댓글 수정 삭제
    헐 상당히 방대한 리뷰네요 ㅡ0ㅡ 읽느냐고 눈빠지는줄알았습니다 ㅋㅋㅋ
    정말 잘쓰셧어요 잘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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