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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불사조의 검

2009.11.28 02:1411.28





pilza2.compilza2@gmail.com
 1. 양해의 말씀
 
 이 소설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양해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우선, 이 책은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이지만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작품은 단 하나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책은 영미권의 히로익 판타지 걸작선이지만, 일본인 편집자가 작품을 선정하고 번역한 일본어판이라는 점이다.
 이 글을 접한 이들이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쉽게 구해서 읽어볼 수 없다는 점과 영어로 된 글을 일본어로 읽었기에 작품의 이해가 모자랄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사항에 대한 사과를 드린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을 선별한 것은 예전에도 본 필자가 [톨킨의 환상 서가]의 리뷰나 러브크래프트, 조지 맥도널드 등의 작가에 대해 말할 때 빼놓지 않는 언급인, 대한민국에는 장르소설이 체계적으로 소개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물론 모든 소설장르를 시대순 혹은 작가순으로 번역 출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기 작가와 작품 위주로 소개된 후 그에 영향을 주거나 받은 작품들이 속속 번역되고 또한 그에 영향 받은 작품이 등장하는 순서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장르의 규모가 커지면 깊이도 깊어져야 하는데 양적 팽창에만 집중한 나머지 장르의 고전이나 기원에 해당하는 작품에 대한 소개가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상업적 성과를 기대하려면 인기 작가, 수상작, 최신 작품 위주로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도 아쉬움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가까운 나라이지만 출판 규모는 우리의 열 배를 웃도는 출판대국 일본의 사례와의 비교도 겸해서 미국 소설의 일본어 번역본을 소개하는 의미를 덧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어 번역본이라고 해도 SF, 판타지 등 장르의 역사와 규모는 우리보다 앞서 있고 소개된 외국 작가도 훨씬 많다(오직 무협만이 일본에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본서의 편역자 나카무라 토오루는 다수의 SF, 판타지, 호러 등을 번역하고 해설을 썼으며 에드먼드 해밀턴, 앨프리드 베스터, 타니스 리, 아서 C. 클라크의 일본 오리지널 단편집을 편집했으며 호러 SF 단편집과 야마기시 마코토(그렉 이건의 전담 번역자로 유명)와 공동으로 [20세기 SF] 시리즈(전 6권)를 편역한 장르소설계의 실력자이다.
 개인적으로 SF매거진 등에서 익히 접한 그의 번역과 해설문을 통해 믿음을 갖고 있기에 번역의 질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작품의 선정도 영미권의 히로익 판타지를 다룬 어떤 선집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2. 히로익 판타지(Heroic Fantasy)
 
 히로익 판타지는 하이 판타지 장르를 양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대한 조류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서브장르이다.
 판타지 소설을 거칠게 둘로 나누자면 하이 판타지와 로 판타지로 나눌 수 있고, 하이 판타지 장르는 에픽 판타지와 히로익 판타지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 경계와 틈새에 무수히 많은 서브장르들이 공존하고 있겠으나, 에픽과 히로익을 나누는 큰 차이라고 한다면 이야기의 중심이 세계냐 인물이냐로 볼 수 있겠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펼쳐지는 인물군상극을 그리는 쪽이 에픽 판타지(대표적인 예시는 J.R.R.톨킨의 [반지의 제왕])이고, 주인공의 모험활극에 집중하는 쪽은 히로익 판타지(대표적인 예는 로버트 E. 하워드의 야만인 코난 시리즈)이다.
 
 이런 히로익 판타지라는 낱말은 스프레이그 드 캠프가 자신이 편집한 단편집의 부제로 썼던 것이 최초라고 하며 본서에서도 해설을 통해 이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작가보다 편집자로 더 활약한 드 캠프를 꼽을 정도이다.
 그런 드 캠프는 스스로 히로익 판타지를 ‘과학과 기술이 아닌 마법이 발달한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싸움과 모험 이야기’로 정의하고 있으며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아름다우며, 인생이 모험으로 가득한 명쾌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세금이나 공공의료 따위의 문제는 없는 현실도피의 세계다’라고 말하고 있어 철저히 대중의 쾌락을 위해 만들어진 장르임을 천명하고 있다.
 
 장르의 기원은 1930년 미국의 잡지 [위어드 테일즈]를 통해 시작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판타지 소설을 만들어낸 선구자 로드 던세이니, 데이빗 린제이 등의 영국 작가와 해거드, 버로우즈와 같은 미국 작가의 모험소설로부터 골고루 영향을 받고 동료 작가 러브크래프트와의 교류와 자극으로 창작열을 불태운 로버트 E. 하워드의 대표작 야만인 코난 시리즈가 이 서브장르의 비조라 할 수 있다.
 이후 나온 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로 여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하워드와 동시대 혹은 사망 직후 등장한 다음 세대의 작가군으로 히로익 판타지 장르를 정립한 주역들이라 할 수 있다.
 히로익 판타지는 그 성격상 하나(혹은 한 팀)의 주인공이 활약하는 장편 혹은 연작 단편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서의 수록작도 두 작품 외에는 다 연작 단편 중의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장하는 영웅들은 야만인 코난, 여전사 지렐, 레이노르 왕자, 파프드와 그레이 마우저, 재주꾼 쿠겔, 멜비보네의 엘릭이다(이들에 대한 소개는 개별 작품과 겸한다).
 
 3. 개별 작품 소개
 
 작가와 작품 대부분이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기에 리뷰라기보다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것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는데 내용(특히 결말)을 전부 말하면 언젠가 번역 소개되었을 때 느낄 재미가 떨어지므로 그 점은 유의했음을 알려드린다.
 
 사크노스 외에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채 / 로드 던세이니
 
마을에 공포를 불러일으킨 사악한 마법사 가즈낙. 그와 그의 성채에 맞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크노스라는 이름의 검 뿐이다. 영주의 아들 레오스릭은 사크노스를 얻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데, 검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사라가브베러그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힘든 싸움 끝에 사크노스를 손에 넣은 레오스릭은 단신으로 가즈낙의 성채로 쳐들어간다. 처음엔 그를 보고 다들 비웃지만, 그가 든 것이 사크노스임을 알아보고는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간다. 마침내 가즈낙과 대적하게 된 레오스릭. 둘은 검을 들고 맞서는데…….

 본 필자가 기회가 될 때마다 언급하고 칭송하는 작가 로드 던세이니. 현대적 의미에서의 ‘판타지 소설’을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판타지를 쓰는 작가들조차 그의 글을 읽어보기는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영웅신화의 일부분과도 같은 이야기로, 결말은 예상대로 영웅의 고난 극복과 승리를 그리고 있지만, 작가가 덧붙인 모든 것이 꿈이거나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말미는 소설과 신화의 경계를 누빈 작가의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불사조의 검 / 로버트 E. 하워드
 
깊은 밤 첨탑에 모인 자들은 국왕 코난의 암살을 모의한다. 혈혈단신으로 국왕에 오른 코난은 그 자신을 기준으로 보면 입지전적 성공담이지만, 그 나라의 세도가들이 볼 때는 외지에서 온 오랑캐가 왕위를 찬탈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유시인 리날도와 마법사 토트 아몬을 끌어들여 코난을 죽이려 하는데, 코난의 꿈에 나타난 고대의 현자는 위험을 경고하고 검신에 불사조를 새겨준다. 마침내 반란자와 이계에서 소환된 마수가 코난을 습격하고, 코난은 검 한 자루로 이에 맞선다.

 수록작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으로 베가북스에서 나온 [야만인 코난] 1권에 ‘칼날 위의 불사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야만인 코난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첫작이지만, 읽기 전 예상과는 반대로 이미 왕이 된 코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후에 창작된 코난 시리즈가 대부분 왕이 되기 전에 펼친 코난의 젊은 시절 모험담을 그리고 있음을 생각하면 특이한 구성인데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어 궁금하다.
 
 헬즈가르드 / C.L. 무어
 
조이리의 영주 지렐은 라이벌과도 같은 존재인 갈롯의 영주 기에게 인질로 잡힌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헬즈가르드 성으로 향한다. 성주 안드레드의 사후 200년간 방치된 고성 안에 숨겨져 있다는 보물을 찾아오면 주민과 교환해주겠다는 것. 하지만 막상 가본 헬즈가르드에는 새로운 성주와 그 식솔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경계하면서도 지렐을 손님으로 받아들인다. 성주 아라릭과 그 가족에게서 어딘가 이상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느낀 지렐은, 성을 몰래 조사하려다 생명체와 같이 움직이는 돌풍의 습격을 받는다. 그 정체는 죽은 성주 안드레드의 유령?

 이 작품은 히로익 판타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여전사인 지렐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의 마지막 단편이다. 작가 C.L. 무어는 데뷔 때부터 [위어드 테일즈] 편집진이 의도적으로 이름을 약어로 표기하여 본의 아니게 성별을 숨기고 활동한 여성작가이다(본명은 캐서린 루실 무어). 이 사실을 모른 채 팬레터를 보낸 동료 작가 헨리 커트너와 교류를 시작하여 결국 결혼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주인공이 여성이기에 가능한 플롯과 묘사가 있어, 지렐 시리즈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단편이다. 지렐 시리즈는 1970년대에 불어온 페미니즘 판타지 소설 붐의 선구자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여성을 관능적으로만 그리기 쉬운 히로익 판타지의 초기에 이러한 강인한 여전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창작시기상 마지막 단편일 뿐이지, 내용적으로 지렐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시리즈라고 해봤자 전부 단편 6편으로 책 1권 분량에 불과하기 때문에 언젠가 번역 출간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여성 작가가 쓴 섹시한 여전사의 모험담을, 남성 독자라면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오버월드 / 잭 밴스
 
잔꾀를 써서 마법사 이우카우누의 보물을 슬쩍 하려다가 정통으로 걸린 쿠겔은 그의 명령으로 어느 산꼭대기의 마을로 가게 된다. 용서해주는 대신 그곳에 있는 보라색 구슬을 가져오라는 것. 그곳은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아래 마을 사람들이 힘들게 농사와 낚시 등으로 먹을 것을 구해 위쪽 마을에 바치고 있었다. 보라색 유리눈을 가진 위쪽 마을 주민들은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으며 그들 중 누군가가 죽으면 아랫마을의 연장자가 보라색 눈을 이어받는 식으로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눈을 얻기 위해 마을 사람으로 분장한 쿠겔은 자신이 후계자 부백이라고 속여 눈을 이식받으려 한다. 하지만 한쪽 눈을 받았을 때 진짜 부백이 나타나 소란이 일어나고 결국 분쟁을 싫어한 장로가 눈을 하나씩 나누어 가지도록 했다. 쿠겔은 보라색 눈을 통해 본 마을은 화려한 궁전이요 자신과 주민들은 왕족과 같이 보이고 먹는 음식이 매우 맛있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죽여 남은 눈을 차지하려는 부백의 추적이 다가와 쿠겔은 오래 머물 수 없음을 실감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이 천계(오버월드)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본작은 잔꾀와 입담이 뛰어난 재주꾼 쿠겔을 주인공으로 한 쿠겔 사가의 첫작으로 악마 왕자 시리즈로 유명한 SF,판타지계의 거두 잭 밴스의 2차세계 다잉어스(Dying Earth)를 무대로 하고 있다. 장편 [오버월드의 눈]으로 개작되기도 했다.
 판타지 세계관의 소설이지만 머나먼 미래의 지구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눈에 의해 보이는 풍경이 바뀐다는 일종의 증강현실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SF 느낌이 나기도 한다. 다만 마법의 구슬이라는 표현도 있고 시각만이 아니라 미각 등 모든 감각이 바뀐다는 점에서 판타지에 가깝기는 하다. 또한 착취자와 자신도 착취자가 되기 위해 고난을 감내하는 노동자, 그리고 이를 유지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그린 현실풍자물이기도 하다.
 확실히 히로익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검술이나 마법이 아닌 입담과 지혜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이야기는 이채롭고 재미있다. 덕분에 무거울 수 있는 소재도 한결 코믹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잭 밴스는 휴고상 수상작 [드래곤 마스터즈]와 악마 왕자 시리즈밖에 몰랐고 본서로 쿠겔에 대해 처음 알았는데 생각보다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라 마음에 들었다. 다만 앞서 말한 작품들도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과연 쿠겔 사가가 번역될런지, 기대할 수도 없을 것 같아 씁쓸하다.
 
 비취상(像)의 눈 / 마이클 무어콕
 
동료 문글럼과 함께 여행하다가 신생 왕국에 도달한 엘릭은 우연히 아반 공작을 만나 그의 권유로 멜비보네의 고대 도시로 보물을 찾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곳에는 혼돈의 공작 아리오크의 비취상과 보석으로 만든 눈이 있다는 것.
 긴 항해 끝에 도착한 정글에는 파충류 전사들이 습격해오고, 겨우 도착한 폐허에는 비취상(像)은 있으나 눈은 없었다. 적의 공격은 이어지고, 도망가다 미로와 같은 공간에 갇히고 만 엘릭. 그곳에서 돌연 조우한 인물 에레코제는 그에게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가중 하나인 마이클 무어콕. 본작은 그의 대표작인 영원한 전사(Eternal Champion) 시리즈의 하나로 멜비보네 최후의 황제 엘릭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같은 영원한 전사이며 첫 번째 시리즈의 주인공인 에레코제가 카메오로 출연하는데, 아쉽게도 이 시리즈의 다른 글을 읽은 적이 없어서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는 관계로 궁금함만 더할 뿐이었다.
 영원한 전사 시리즈는 언젠가 어디선가 번역 출간된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인데, 더블 마이클(무어콕과 스완윅……을 본 필자가 멋대로 합쳐서 부르는 별칭)은 팬덤의 명성과는 달리 제대로 번역 출간된 작품이 거의 없어서 아쉽다. 그나마 스완윅은 단편이라면 이런저런 SF단편집에 수록되었지만 무어콕은 그렇지 못한데, 대표작이 대하 장편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분량이 많아서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인 듯 싶지만 120권이 넘는다는 [구인 사가](쿠리모토 카오루, 대원씨아이, 2009년 9월)도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참고문헌]
 본서의 해설문 - 히로익 판타지의 원점 / 나카무라 토오루(中村融)
 위키 백과의 히로익 판타지 항목(영어, 일어)
 http://en.wikipedia.org/wiki/Heroic_fantasy
 http://ja.wikipedia.org/wiki/ヒロイック・ファンタジ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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