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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4

2009.10.31 01:1910.31





cybragon@naver.com
 공포의 계절인 여름을 맞이해 출간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4권은, 개성적인 10명의 작가들의 오싹하지만 쭈뼛할 정도는 아닌 작품 10개를 모아놓았다.
 이미 납량 특집을 찾을 계절은 지났지만, 으시시한 공포를 즐기는데 계절이 따로 있으랴. 늦가을에 목덜미를 스치는 싸늘한 귀기 역시 한여름 밤의 공동묘지의 도깨비불만큼이나 오싹할 것이다.

 이 책의 작품들은 젊은 작가의 작품들답게 대체로 참신한 소재, 혹은 제재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한 변주를 통해 작가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인터넷과 익명으로 대표되는 군중들의 책임의 부재에 대한 비판이다. 고전 공포 소설에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이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연, 혹은 곤경에 빠지게 하는 반동 인물이 되어 하나하나의 인물로서 자리매김했다면, 이 책의 작품들에서는 조연들이 개별적인 인물이기보다는 뭉뚱그려진 배경에 가까운 역할을 부여 받고, 주인공을 가두는 절망의 벽이 되어 버리거나, 심지어 그 자체로서 해악을 끼치는 공포의 주체 역할을 한다. 이런 경향은 {플루토의 후예}나 {배수관은 알고 있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이며, 몇몇 작품들에서는 아예 작품 전체에 걸쳐 드러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인터넷의 복제/전파의 용이성이라든가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 등 요즘의 사회 현상을 잘 반영한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애초부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현대 사회의 몰인격적 현상을 공포의 소재로서 사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키우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감정 몰입을 중시하는 다른 공포 소설들과는 달리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강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문학은 현실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공포 소설 본연의 순수한 가치로 재단했을 때, 이 책의 작품들은 가을밤 형광등 아래서 가슴 졸여가며 읽기에 충분히 으슬으슬하긴 하되,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내 것인지 귀신의 것인지 모를 만큼 정신 없이 빠져들 정도는 아니다. 10개의 글 중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준수한 작품들만 모여 있지만, 반대로 보면 또 그렇게 튀거나 강렬한 작품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새롭긴 하지만 기발하진 않으며, 섬찟하긴 하지만 모골을 송연케 하는 긴장감도 없다.
 소재가 참신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문체나 문장 구조나 기승전결의 서술 형식에도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우수한 편인데 왜 이렇게 짜릿한 느낌이 없는 걸까.
 나에게는 그 이유가, 이 문학적으로 모범적인 작품들이 공포 소설이 가져야 할 장르적 특성 중 한두 가지를 빠뜨렸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공포 소설은 내적 정합성, 현실성, 예측 불가능성의 세 가지 요소를 필히 가져야 한다. 이 중 하나만 빠져도 공포 소설 특유의 재미는 급감하게 되며, 둘 이상 빠지게 되면 이미 공포 소설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내적 정합성이란 소설 안의 인물 사건, 배경에 논리적 허점이 없이 하나의 잘 짜인 틀 안에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소위 말하는 ‘리얼리티’가 여기에 해당한다. 졸라 짱 센 투명 드래곤이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죽이다가 귀찮아서 그냥 사라진다고 해 봤자, 책을 읽는 독자가 공포감을 느낄 리가 없다. 다행히도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탄탄한 기본기를 자랑하니만큼 이 내적 정합성에는 거의 문제가 없는데, 그에 비해 다른 두 가지는 요소는 충분히 표현해내고 있지 못하다.

 현실성이란 단순히 캐릭터가 생동감 있고 사건 전개가 논리적이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적 정합성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성이란 말 그대로 현실적인 느낌, 즉 소설의 무대가 바로 우리 자신이 살아 숨쉬는 현실과 동일한 시공간이라는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능력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액자 바깥에서 구경하는 관객이 아닌 주인공과 함께 호흡하는 행위자로서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훌륭한 소설에서 느끼는 몰입감과는 다른 것인데, 일반 소설에서 독자는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 인물들의 감정과 사고에 공감해야 하지만 공포 소설에서는 그보다는 주인공에게 공포를 주는 공포 주체에게 공포감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이 공포 주체에게 느끼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주인공을 거치지 않은 채 공포 주체로부터 직접 느끼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사건을 이끌어가기 위한 주체일 뿐, 그 주인공이 공포 주체에 느끼는 감정은 부가적인 것이다. 종합적으로 독자의 공포를 고조시키는 방편 중 하나이기에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리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현실성은 SF나 판타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공포소설에서는 필수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괴물](The Host, 2006)의 돌연변이 괴물이 한강변이 아닌 미들어쓰의 안두인 대하에서 설치고 다녔다면, 독자들 (혹은 관객들)은 그다지 공포를 못 느꼈을 것이다. 다른 예로 히치콕의 [새](The Birds, 1963)들이 미국 시골집이 아니라 우주 탐험선을 둘러싸고 적대적인 시선을 보낸다면, 영화는 갑자기 공포물이 아니라 모험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현실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대 배경이 진짜 지도에 있는 견고한 위치가 아니라 독자의 머릿속에 있는 아득한 상상의 세계가 되면서, 독자가 공포를 주는 괴물을 직접 맞대하고 쫓기는 게 아니라 괴물에게 쫓기는 주인공을 안전한 저 멀리 어딘가에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적 거리감은 생동감 있는 묘사로 일부 상쇄해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시각 차이까지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참여한 작가 대부분이 판타지/SF 소설 쪽으로도 일가견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현실성이 유독 많이 부족한 작품이 많이 눈에 띈다. {첫 출근},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 {더블}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소설은 근본적으로 공포 소설이 아니라 공포를 테마로 한 환상 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긴 하지만, 공포 장르 안에서도 좀 별개의 하위 장르로 취급 받는 좀비 소설이라 역시 현실성이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이런 작품들은 아무래도 글 자체의 우수성에 비해 공포 소설로서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된다.

 그 다음 요소인 예측 불가능성은, 공포 주체가 주인공, 혹은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논리적 전개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내적 정합성과 일치하지 않아 보이지만, 바로 그런 불일치에서 공포가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포는 근본적으로 미지의 것으로부터 나오며, 그것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깨뜨리게 될 때 극대화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현실성과 내적 정합성, 즉 독자가 속한 세계와 그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이고, 독자는 거기에 적응해 있는 자신의 상태에서 안정감을 가진다. 그리고 그걸 때려 부수는 예측 불가능성에 의해 불안감을 느끼고 공포에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은 작품 안에서 내적 정합성을 위협하는 괴물, 즉 공포 주체만이 가지는 고유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하수구 속에서 숨어 다니며 술 취한 사람을 습격하는 악어는 공포감을 부여함에도 9서클 마법을 쓰고 크롸롸롸 울부짖는 드래곤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공포감을 주지 못한다. 하수구 속의 악어가 불을 뿜고 번개를 부르는 드래곤보다 덜 위협적임은 당연지사. 하지만 독자가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전자 쪽이다. 하수구의 악어는 도시 생활의 일상을 깨뜨리는 위협이지만, 드래곤은 그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수구 속에 존재할 리 없는 악어가 존재한다는 불합리, 그 불합리 때문에 그 악어가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왜 사람을 노리는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에 의해 공포는 유발된다.
  {도둑놈의갈고리}와 {플루토의 후예}, {불귀},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는 바로 그런 면에서 공포 유발에 실패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초반에 공포 주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으며, 그 덕분에 일찍 드러난 공포 주체는 그 자신의 내적 정합성을 맞추기 위해 불확실성을 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독자는 소설 초중반에서 이미 전개와 결말이 어떻게 될지 쉽게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제 글을 읽어가면서 그 예측을 확인하는 작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긴장감의 해이는 수많은 공포 장르 작품들이 너무나 쉽게 빠지는 함정이어서, 일종의 클리셰에 가까울 정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패턴화된 문제이니만큼 그 해결책도 이미 개발되어 역시 클리셰화 했는데, 막판의 반전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부터 공포 주체를 드러내는 작품들은 거의 항상 그것을 뒤엎는 반전을 결말에서 넣어서 분위기 전환을 유도하며,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록 잘 짜여진 스토리 텔링이라 하더라도 공포물로서는 B급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영화 ‘불가사리’ 같은 경우가 전형적인 예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 짤막한 평을 해 보기로 하자.

 먼저 장은호의 {첫 출근}은 단편화/고립화 된 현대 사회의 비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여 훌륭한 사회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었지만, 사이코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극단적인 배경 설정으로 인해 현실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영화 [큐브](Cube, 1997)가 그랬듯이 비현실적 배경을 잔인한 묘사로 보충하려고 했지만, 문자 매체인 소설에서 그런 시도는 아무래도 덜 성공적일 수 밖에 없다.

 김종일의 {도둑놈의갈고리}는 인터넷 시대를 잘 반영한 작품으로서, 역시 사회 비판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술이 평이하고 반복적인데다가 너무 뻔한 전개에 비해 마지막 반전에 힘이 부족해서 공포물로서의 가치는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다.

 이종호의 {플루토의 후예}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고전적인 공포물의 충실한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콕 집어서 흉내 내거나 따라 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마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 그만큼 고전적인 공포물 구성 방식과 닮아있다. 어떻게 보면 정석에 가까워 한 여름 밤 친구들끼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얘기해줄 일화로 손색이 없긴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특징도 없다. 이 역시 반전이 있지만, 작품에 대한 인상을 바꿀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다.

 황태환의 {폭주}는 굳이 콕 찍어서 얘기하자면 공포물이라기보다 재난물에 가깝다. 인재도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역시 인터넷과 무개념 청소년이라는 현대 사회상을 주오 제재로 썼으며, 그 발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밀고 가서 훌륭하게 완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의 반전… 이랄까 결말은 피 튀기는 묘사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유머 감각을 느끼게 한다.

 우명희의 {불귀}는 공포보다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강조하고 있어 전통적인 순수 소설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정작 중요한 공포 주체는 불확실하다기보다 뜬금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반 이후에 긴장감이 죽어버린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좀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묘사가 아쉽다.

 유선형의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 역시 {첫 출근}과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럽게 고정된 배경 안에서 인물만이 움직이는 사이코드라마 같은 방식이다. 하지만 좀 더 직선적이고, 몽환적이고, 쉽게 예측 가능한 제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더 단순하고 밋밋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배경이 도축장인 만큼 잔인한 묘사가 조금 더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 공포소설로서의 상대적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민호의 {더블}은 전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 아이디어는 훌륭하지만, {폭주}와 같은 강렬한 묘사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구성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아쉬운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 외에 단점이라고 하기 애매한 단점을 찾는다면, 원전이 된 전설 자체가 이미 주제가 가지는 공포성으로 유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현대적 (미래적?) 해석판인 이 작품은 오히려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김유라 {배심원}도 {폭주}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세대를 비판한 작품. 특이하게도 막판이 아니라 전개 부분에서 반전이 들어가며, 그 뒤에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흐름을 따른다. 이 흐름을 너무나 뻔하게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될 수 밖에 없는 무력함을 강조한 것이 장점. 그러나 개인적으로 주인공의 자의식 과잉에 감정 이입이 잘 안 되는 성격이기 때문에, 작품성에 비해 재미가 없었던 편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작품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였지만.

 권정은의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는 외양으로는 흔한 좀비물 중 하나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가족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에 길들여진 개인과 가족의 야만에 대한 무력함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역시 사회 비판적인 주제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비극이 예정되어 있는 작품.

 전건우의 {배수관은 알고 있다}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공포물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는 소설이다. 시류를 따르는 소재도, 새로운 사회 현상도 담아내지 않고, 그저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에만 치중한다. 따라서 읽고 나면 크게 감명이 남는다거나 하는 부분은 없지만, 대신 공포물로서의 감정 이입에는 확실히 성공하고 있다.

 이렇게 10편 모두 장점도 많고 일부 아쉬움도 있지만, 공포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본다면 오히려 한 단계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는 수작이다. 그 외에 수록된 작품들의 수준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골고루 높다는 것도 종합된 한 권의 책으로서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무더운 여름 밤이 아니라 청량한 가을 저녁에도 편하게 펼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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