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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페이지 터너의 원조

 아이작 아시모프의 에세이 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선형 옮김, 오멜라스(웅진), 2008년 11월) 수록). 그가 로버트 하인라인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얘기하며 퇴고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자 하인라인 자신은 (퇴고 같은 과정 없이) 한 번만에 쓴다고 응수했다고 한다.
 두 사람 다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쓴 세대의 작가로, 곧바로 편하게 수정이 가능한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 세대에 비하면 글을 고치기가 힘들었다는 점을 고려해도(어떤 면에서는 원고지나 공책에 손으로 쓰는 것보다 타이프라이터 쪽이 수정이 힘들다), 하인라인에게 글쓰기의 재능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작품 [여름으로 가는 문]도 하인라인 전성기의 대표작인데, 13일만에 쓰고 별다른 퇴고도 없이 바로 출간했다고 한다. 과연 그렇구나 싶을 정도로, 술술 쓰인 만큼 술술 읽힌다. 책의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금방 빨려들어 빠르게 읽힌다는 의미로 영미권에서 쓰는 '페이지 터너(원래는 피아노 연주자를 위해 악보의 페이지를 넘겨주는 사람이란 의미)'라는 낱말은 현대의 작가들 중 스티븐 킹, 마이클 크라이튼, 딘 쿤츠 등의 작품에 주로 쓰이는데 이 페이지 터너의 원조격이 하인라인이 아닐까 싶다.

 그 대신 SF의 설정에 대한 무게감은 적어서 가사노동 로봇, 냉동 수면, 시간여행 등 SF의 소도구가 많이 등장하고 있으나 이야기의 흥미를 위한 장치 정도로만 다루며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나라에 출간된 하인라인의 작품 중에서는 [은하를 넘어서](로버트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한뜻, 1996년 1월)와 가장 비슷하다. 이전 리뷰에서도 언급했듯, 어렵지도 유치하지도 않으면서 재미있는 SF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부분도 그렇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상대적으로 사변에 중점을 둔 [낯선 땅 이방인](로버트 하인라인 지음, 장호연 옮김, GONZO(마티), 2008년 6월)과 장대함과 거창함에 압도된 [므두셀라의 아이들](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김창규 옮김, 오멜라스(웅진), 2009년 4월)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읽는 재미가 떨어지고(거대 연작의 일부 에피소드에 가까운 위치라는 점도 하나의 한계일 것이다), 재미와 SF다움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갖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황금가지, 2009년 4월)이 하인라인의 최고작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 공돌이의 로망

 본작의 주인공 댄 데이비스는 엔지니어, 이른바 공돌이(친근하고 코믹한 이미지를 위해 썼으며, 비하하고자 하는 의미로 쓴 낱말은 아님)의 이상적인 화신과 같은 인물이다.
 이에 대해서 블로거로도 유명한 오픈소스 프로그래머 코가이 단(小飼 弾)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본작의 서평을 통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댄 데이비스의 실존 모델이 소설 이후 등장했다. 그는 집에서 뚝딱거리며 발명을 시작했고, 스스로 만든 발명품을 바탕으로 회사를 차렸다. 그의 제품은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고, 수많은 이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는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고 마는데, 그럼에도 그는 발명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돌아와 기울어져 가던 회사를 일으켜 세우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가 말한 댄 데이비스는 바로 애플 컴퓨터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를 가리킨다. 스티브 잡스가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과 존경을 받는, 공돌이의 이상형임을 생각하면 댄 데이비스가 사랑받는 이유도 짐작이 가능하다.

 그가 가사도우미 등의 발명품을 만든 건 돈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에 편리를 주기 위해서였고, 돈이나 명예는 그에 따라붙는 부산물 정도로만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일반인의 발명에 대한 선입관과는 달리 기존에 존재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혹은 제대로 쓰이지 않은 기술들을 찾아내어 이를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공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렇듯 최신 기술이 아닌 기존의 기술을 활용한 가까운 예는 닌텐도DS를 들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NDS는 터치스크린, CPU 등 거의 모든 부품이 최신형도 아니고 고가의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게임의 재미를 제시하였기에 많은 사랑을 받았고 비슷한 시기에 최신 기술과 최고의 성능으로 무장하고 등장한 게임기 PSP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이렇듯 댄의 이념은 애플과 닌텐도라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라 불리는 기업에게로 이어지고 있으니 공학도 출신 작가 하인라인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댄은 굉장히 진보적이고 기술에 대한 낙관론을 가진 사람이다. 냉동 수면을 통해 적응하기 힘든 30년 후의 미래로 가서 고생을 겪지만 그래도 더 많은 발전을 이루어낸 미래 세상이 더 마음에 든다며 결국 원래 살던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미래로 가서 사는 쪽을 선택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에 엔지니어들이 동의의 박수를 보냈음은 분명하다.
 테드 창이 한국 강연을 통해 '판타지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결국 평화롭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므로 보수적이며, SF는 변화는 돌이킬 수 없으며 이러한 변화가 사회나 세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그려내므로 진보적'이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댄 데이비스야 말로 SF의 상징과도 같다. 특히 자신의 업적이 미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공돌이의 로망을 이루어낸 인물인 것이다.

 3. 미소녀 모에! 오타쿠의 로망

 본작은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 SF로써는 이례적일 정도의 스테디셀러이고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일본 위키백과에 따르면 해외 SF장편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상위권에 들며 1위를 할 때도 있는 장기 인기작이라고 한다.
 우연찮게도, 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2009년에 신역판이 출간되었다. 역자도 바뀐 새로운 번역은 용어를 현대적으로 바꾸거나[가사 도우미(Hired Girl)가 문화여중기(文化女中機)에서 청소 걸(おそうじガール)로 바뀌는 등], 초역이 나올 당시(1963년)엔 낯선 개념이던 주식회사에 대해 설명한 상세한 주석은 삭제되는 등 최신 독자에게 맞게 다듬어 졌다고 한다.
 일본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력도 만만치 않아, 가수 야마시타 타츠로(山下達郎)와 사쿠라이 히데토시(桜井秀俊)가 각자 여름으로 가는 문(夏への扉)이라는 제목의,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가 여름의 문(夏の扉)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다. 만화가 타케미야 케이코(竹宮恵子), 나기사 아키라(ナギサアキラ),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도 동명의 만화를 발표했고, 아나운서 마츠이 미도리(松井みどり)의 논픽션 제목으로 인용되기도 했으며, 와카키 미오(若木未生)는 아예 일본어 번역판과 동명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제목의 느낌이 좋아서 차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야마시타 타츠로의 곡은 소설의 인명을 인용하는 등 오마주임을 드러내었다. 또한 비록 만화의 내용은 원작과 관련이 없지만 타케미야 케이코는 대표작 [테라로…], [나를 달까지 데려다 줘] 등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만화이고, 어슐러 르 귄의 헤인 시리즈의 일본어판 삽화를 그리는 등 SF에 정통한 만화가이므로 제목을 따온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가, 를 생각해보면 결국 본작의 독특한 로맨스를 들 수밖에 없다. 괴로운 현실에서 탈출하여 미래로 도피한 후, 자신만을 기다리는 여인과의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 구조도 그렇고, 그 여인이 어린 소녀라는 점도 미소녀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 특히 좋아할 만한 부분이 아닐까.
 본작의 히로인 프레데리카는 오타쿠 서브컬처의 미소녀 속성에서 말하는 이른바 로리 소녀이고, 소꿉친구 계열에 속한다. [은하를 넘어서]의 피위가 약간 새침데기(츤데레)라면 리키는 순종적인 소꿉친구 타입이다. 이 소꿉친구가 '미소녀 모에(萌え)'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설정의 하나인데, 미소녀 게임 등의 매체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때 주인공과 이미 아는 사이임은 물론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갖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만나고 사귀고 상대를 알아가는 '번거로운'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당연히 '공략'하기도 가장 편한 대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인간관계를 어려워하거나 기피 혹은 거부하는 오타쿠들을 위한 미소녀 매체에서 소꿉친구가 아주 간편하게 널리 쓰이고 있음이 이해가 가는데, 프레데리카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어려서 착하고 순수함은 물론이고 순종적이다(다른 남자를 알지 못한 채 자신만을 바라본다). 거의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꾸밈없는 호감을 보여준다. 그러니 좋아하지 않을 오타쿠가 있겠는가. 다만 나이 차이가 심하게 많이 난다는 점이 걸리는데, 일본 만화라면 그대로 맺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인라인은 미국 작가답게 시간 여행을 통해 나이 차이를 적절하게 줄여서(그래도 열 살 정도 차이 난다!)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 시간 동안 리키의 마음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점도(그 사이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을 가능성은 충분한데도 말이다) 특히 순애를 좋아하는 오타쿠의 기호에 맞는다.
 사실 미소녀 모에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다룰 주제가 아닌지라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또한 미소녀만이 아니라 이 소설이 '고양이 모에!'라는 점도 일본에서의 인기 요인이다. 실제로 고양이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은 각별하여 고양이를 소재로 한 소설, 만화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통계적인 근거는 없지만 고양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일본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한국에선 주로 무섭고 기분 나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과 정반대로, 마네키네코(招き猫)부터 시작된 일본 전통적인 고양이에 대한 우호적인 풍습의 결과인 듯 하다.

 4. 결론

 미래와 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 기존의 기술을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발명 이념, 사람의 편리를 위해 발명을 한다는 이상과 같은 엔지니어의 로망과,
 순수한 미소녀와의 사랑을 이루어낸다는 오타쿠의 로망과,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피력한 애묘인의 로망.
 이들이 본작을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듯 문 저편의 여름은 희망과 낙관, 그리고 로망으로 반짝이는 세상인 것이다. 야마시타 타츠로가 노래했듯이 말이다(그 노래는 아래에 소개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유튜브 링크를 통해 청취하시기를 바람).

[참고문헌]
http://en.wikipedia.org/wiki/The_Door_into_Summer
http://ja.wikipedia.org/wiki/夏への扉
http://blog.livedoor.jp/dankogai/archives/51265089.html

[보너스]
http://www.youtube.com/watch?v=pcqAkQf-Vxw




夏への扉 - 山下達郎
여름으로 가는 문 - 야마시타 타츠로
作詞:吉田美奈子 / 作曲:山下達郎
작사 : 요시다 미나코 / 작곡 : 야마시타 타츠로

ひとつでも信じてる
事さえあれば
扉はきっと見つかるさ
단 하나라도 믿는 마음이 있다면 문은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もしか君今すぐに
連れて行けなくても
涙を流す事はない
혹시라도 너를 지금 당장 데리고 갈 수 없더라도
눈물 흘릴 일은 없을 거야

僕は未来を創り出してる
過去へと向かいさかのぼる
そしてピートと連れ立って
君を迎えに戻るだろう
나는 미래를 만들어 낼 과거를 향해 거슬로 올라가
거기서 피트를 데리고 와서 너를 맞으러 돌아올 테니

だから リッキーティッキータビー
その日まで おやすみ
그러니 리키 티키 태비
그 날까지 잘 자렴

あきらめてしまうには
まだ早過ぎる
扉の鍵を見つけよう
포기하기엔 아직 일러
문의 열쇠를 찾아내자

もしか君今ここで
やり直せなくても
淋しく生きる事はない
만약 지금 여기서 바로잡지 못한다 해도
네가 쓸쓸하게 살아갈 일은 없을 거야

僕は過去から幸せをもち
未来へ向かい眠るのさ
そしてピートと永遠の
夏への扉開け放とう
나는 과거에서 행복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잠들 거야
그리고 피트와 영원한 여름으로 가는 문을 열어둘 테니

だから リッキーティッキータビー
その日まで おやすみ
그러니 리키 티키 태비
그 날까지 잘 자렴

心には冬景色
輝く夏をつかまえよう
마음은 겨울 풍경
반짝이는 여름을 붙잡자

だから リッキーティッキータビー
その日まで リッキーティッキータビー
その日まで リッキーティッキータビー
その日まで おやすみ
그러니 리키 티키 태비
그 날까지 리키 티키 태비
그 날까지 리키 티키 태비
그 날까지 잘 자렴

リッキーティッキータビー
その日まで おやすみ
리키 티키 태비
그 날까지 잘 자렴


댓글 1
  • No Profile
    잠본이 10.02.15 23:21 댓글 수정 삭제
    역시 섬나라人들의 덕심은 놀랍군요. 저 내용으로 노래까지 만들줄이야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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