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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자료가 필요해서,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서, 배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심심해서일 때도 많다. 주로 심심할 때 소설을 본다. 가볍고 즐겁고 읽은 후 잠깐 신나는 경험을 했던 것처럼 상쾌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그런 소설을 읽는다.
 안 그래도 사는 게 어렵고 고단한데 굳이 힘든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 어두운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다. 꼭 무거운 이야기여야 한다면 개그가 섞여서 마음에 어둠이 남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고 해서 있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치매에 걸려도 자식의 끼니는 챙기는 어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잠시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해서 당장 내가 외면해버린 아우의 고통스러운 시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방문}, 내 뒤를 따라다니는 죽은 아이의 발자국{아이를 안고 있었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내가 살아가는 한 계속 내 발목을 붙들 것이고 나는 아주 잠시 그것들을 잊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비겁하고, 핏줄의 짐에서 도망쳤고, 꿈을 잊었고, 악의로 가득 찼으며 용기조차 없다.
 나는 형제의 고통을 외면했다. 폭력에 시달린 내 고통을 끌어안고 내 삶을 찾아가겠노라 발버둥치는 동안, 내 아우는 아버지와의 고통스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어갔다. {방문}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다. 충격과 공포, 이윽고 동정심마저 지나간 뒤 내게 남은 건 '공포와 혐오감' 뿐이었다. 살아있는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려고 노력하는 나에게 그것이 왔다. 묵직하고 따뜻한 손길이 남기고 간, 끈끈하고 검붉은 액체가 묻은 소줏잔이 있었다.  아버지의 손길이 남아있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도망쳤던 사실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도망쳤다고 해서 아버지의 손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얼굴}

 나는 먹이를 지켜보았다. 먹이가 부서지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게 된 채 먹이의 남자를 죽이고 먹이를 지켜보았다.{비 오는 날} 그 뿐인가, 나는 친구를 위로하러 가서 친구의 딸을 겁간하지 않았던가.{그녀의 웃음소리}

 나는 도우려는 이유를 고백하고, 최후의 순간 도망쳤다.
 한 번 연애가 모욕으로 무너진 후에,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남자를 만났을 때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미 한 번 무너졌는데도 그 손을 잡은 건 다친 얼굴 때문이었을까, 알게 된 남자의 비밀 때문이었을까, 연애가 이해할 수 없는 사태 때문에 깨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 역시 타인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방인의 삶에 지쳐있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이유에서든 결국 그 일들은 재난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잡았던 손을 놓고 '떠났던 인생으로 돌아갔다'. {귀향}

 나는 왜 그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는지 모른다. 왜 그 여자 때문에 내 아내와 아이가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왜 계속 아기가 내게 안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을 지언정, 나는 계속 아기를 안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나는 형수를 죽이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죽이고 형을 죽인 채 도망치려 했다. {기내안전수칙}

 나는 어느 외로운 죽음과 단절을 떠올리면서 울었다. 어디에도 '사연 없는 집은 없다.' 그리고 사연 없는 사람도 없다. 사연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 집의, 누군가의 역사가 된다. 내 할머니의 이야기는 내게로 전해졌고, 나는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을 보며 '불멸의 한 조각'을 보았다. 나는 '할머니의 피 묻고 굳은 입술이 떠오를 때마다 혼자 울'면서 연대기의 조각을 읽고 나의 언어로 다시 짜맞추었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나는 '이제는 오래 되어 모두 잊었다'고 말하며 '보고 싶을 겁니다' 속삭이는 남자의 존재를 바꾸어놓았다. 나는 욕망을 잊었다고 말하며 남자의 폭력과 광기를 즐겼다. {어두운 입맞춤}

 이 저열한 나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해도, 타인에게 잠시 털어놓고 기대더라도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외롭고 슬프다. 잠시의 온기가 지나가면 추위가 한층 기승을 부리듯 어둠이 가슴에 스밀 뿐이다. 이 어둠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 '일부인 자기 자신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여기에서, 이 고통 속에서 비로소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고 불안한 현재를 이어갈' 수 있는 나를 본다. 고통이 갈 길을 보여준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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