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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타로카드 22제

2010.01.29 22:5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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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로(Tarot)는 15세기 중반부터 유럽 각국에서 카드게임에 사용되었던 특별한 형태의 카드 패를 가리킨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신비주의자나 오컬트 연구자들에 의해 사람의 영혼이 지닌 속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알려주는 점술 도구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점술의 전통이 고대 이집트나 유대의 카발라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주장하지만 18세기 이전에도 그러한 전통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어쨌거나 유럽 이외의 지역,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타로 카드라고 하면 대부분 점술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타로 덱 중 하나인 라이더 웨이트 타로 덱(Rider-Waite tarot deck)의 메이저 아르카나(Major Arcana) 카드 중 일부.

 본서는 그러한 타로 카드 중에서 메이저 아르카나에 속하는 총 22장의 카드를 소재로, 각각의 카드에 부여된 상징을 모티브로 하여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필진 22명이 저마다 독립된 단편 소설을 집필하는 식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대부분 다른 곳에 발표되지 않은 신작을 채택하였으며 배정된 작가들의 사정에 따라 카드를 서로 바꾸거나 아예 작가 자체가 교체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의 자체제작 단편집들과 달리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 만큼 책의 분량도 다른 단편집들과는 수준이 다른 6백여 쪽의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며, 제작에 얽힌 편집인의 감회도 남다를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분량에 비해 가격도 착하다. 경제위기의 한파 때문에 돈 한푼 갖고도 벌벌 떠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는 이 점이 특히 중요하지 않을까.) 독서에 불편을 느끼는 시각장애인 독자를 위해 특수한 음성 바코드를 페이지별로 수록했다는 점도 특징.

 수록된 작품들은 소재, 분량, 장르, 분위기 등등 여러 가지 면에서 천차만별이며 작가의 관심사나 필력에 따라 글의 수준이나 매력 포인트도 매우 다양하다. 독자는 이야기마다 바뀌는 주인공들과 함께 여러 가지 세계를 여행하며 인생의 온갖 측면을 체험할 수 있다. 전란이 끊이지 않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때의 안식을 느낄 수도 있고({황금 비단}),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사소한 것에서 승리의 기쁨을 느끼는 기묘한 체험을 할 수도 있으며({우아하고 치졸한 승리의 발견}), 결혼을 앞둔 남자의 불안감과 언젠가 만났던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인 심리를 짚어볼 수도 있고({이상형의 여자}), 의인화된 곤충들이 모여 사는 중세풍 사회에서 벌어진 암살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갈 수도 있으며({누구의 포크인가}), 첫사랑과의 간절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 국내를 방문한 외국 원수를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청년의 기막힌 사연에 귀기울이기도 한다({왕}).

 그걸로 끝이 아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현자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어린이의 시점을 넘나들며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는 인생의 순환을 깨닫는가 하면({노인과 소년}), 인간적인 따스함을 갈구하면서도 만족스런 관계를 찾지 못하는 여성의 고독을 맛볼 수도 있고({나만의 연인}),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운하를 파는 독재자와 그에 대해 점점 회의를 느끼게 되는 신하의 속 터지는 블랙코미디를 보며 현실의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며({위대한 수습}), 햇살처럼 빛나는 갈기를 지닌 사자와 그 힘을 억누르기 위해 눈을 떠야만 하는 소녀를 지켜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현기증에 시달리기도 한다({갈기}). 여기에 예를 든 이야기들 외에도 그 두 배의 분량에 달하는 중ㆍ단편들이 릴레이처럼 이어지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과 사색과 정서를 무지개빛처럼 쏟아낸다. 이 책은 그야말로 이야기들로 이어진 ‘글의 만화경’인 동시에 여러 작가들의 서로 다른 시선을 극명하게 대조하면서 보여주는 ‘언어의 스펙트럼’이라 할 만하다. 광학적인 비유가 와 닿지 않는다면, ‘간식으로 뭘 고를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만드는 초콜렛 상자’같은 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일련의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놓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본서에서는 일종의 기묘한 통일성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각각의 이야기가 마구잡이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각 타로 카드의 상징과 이미지에 맞춰 집필된 이야기들이 카드 덱 배열 순서에 맞춰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 앞에는 모티브가 된 카드와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해설하는 1쪽짜리 칼럼들이 실려 있어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주제를 제시하는 동시에 그 분위기나 결말을 짐작하게끔 유도하면서 독자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마치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음악회나 복수의 전시실로 나누어진 미술전을 잘 짜여진 프로그램과 친절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편안하게 감상하듯이, 독자는 타로 카드의 길안내를 받으며 각각의 이야기를 돌아보고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이 같은 순진무구함에서 시작하여 인생의 상승과 추락을 경험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끝에 무(無)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예비하는 장대한 순환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펼쳐지는 셈인데, 이러한 인생의 여행길을 구성하는 각각의 이야기들은 엄연히 서로 독립된 구조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더 큰 그림을 이루는 여러 개의 퍼즐 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타로카드 22제].

 만약 엄청난 분량에 기가 질렸거나 취향이 명확하게 자리잡힌 경우라면 관심 가는 이야기부터 먼저 읽는 것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카드 순서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은 뒤에 전체의 여정을 조용히 되돌아보고 나서 마음에 드는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본서에 실린 모든 작품이 다 눈이 번쩍 뜨이는 명작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퀄리티에 상관 없이 독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도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카드 순서대로 전체를 돌아본 뒤 그 이미지들이 하나로 얽혀서 빚어내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마음 속에 떠올리는 즐거움은 다른 어느 것에도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각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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