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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

2009.10.31 01:1510.31





rosebird.egloos.commaskduke@hotmail.com
 지금 제 앞에 책 한권이 놓여 있습니다. 웅진의 임프린트 브랜드 시작에서 내놓은 두 번째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이지요. 제목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뒤에 숫자 2가 붙었을 뿐이에요. 기대할 이유도 없었고 실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되도록 많은 수의 장르소설의 출간, 그리고 무엇보다 양질의 작품을 써내는 국내 작가를 내놓는 일이에요. 응모와 심사를 거쳐 유명 편집자의 손길을 통해 걸러진 선집이라는 것은 여전히 소원하기만 한 듯합니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이 그러한 과정들을 모두 생략해버려도 좋을 만큼 만족스러운 재미를 준다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독자들이 순전히 재미 목적으로 책을 사는 것은 아니지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르소설의 출간은 팬덤 사람들에게 어떤 의무감을 부여했습니다. 출판사로 하여금 망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일단 판매량부터 늘려주고 시장 활성에 기여하자는 것이었지요. 지금은 사정이 많아 나아진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판매대에 놓인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2를 집어 들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우선 작가의 이름부터 보게 될 것입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스타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장르소설 작가들이 목록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 선두에는 배명훈, 김이환, 김보영 등이 있을 것이고요. 이런 작업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작가들 또한 이름이 낯익습니다. 그리고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어째서인지 이해는 가는 이상민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보입니다.

 사실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를 그 이름만 듣고서 범위를 짐작해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사실상 특정한 분류 기준에 따른 선집이 아닌 출판사 입장에서는 작가들을 섭외하는 것이 우선적이었을 것이라고 봐요. 그러한 이유에서 창작집단 또는 이름난 개인에게 의뢰/제의가 들어갔을 테고 이 와중에 작품들이 추려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이들 작가에게는 제약이 없습니다. 환상문학이니까 무엇이든 본인이 기호에 맞는 작품들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써내면 됩니다. 그러면 개별 작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강지영의 {브라보, 청춘!}은 비교적 현실적으로 시작합니다. 한심한 청춘을 살아가는 남자가 겪는 현재의 갈등을 미래의 자신과 맞닥뜨리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 것인데요. 비교적 현실적이면서 단순하고, 사실상 어떤 낯섦을 기대하기에는 익숙한 상황을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짧다고만 할 수 있는 소설 한 편을 거의 입담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배명훈의 {얼굴이 커졌다} 또한 현실에 적을 두고 있지만 내용은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럽습니다. 유머라면 유머라고 할 수 있는 상황들이 꽤나 현실적인 남녀관계와 맞물려 진행되어가지요. 개인이 겪는 사건이 외부에까지 확대되지만, 결국은 개인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환상이라는 말보다 오히려 해학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은림의 {낙오자}의 초반은 어쩐지 이마 이치코의 단편만화 {침묵}([외딴 섬의 아가씨], 이마 이치코, 대원씨아이, 2002년 5월)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낯선 세계를 설득력 있는 캐릭터들이 보완합니다. 그리고 비교적 여기저기 집어넣은 장치들이 상징적으로 잘 기능하고 있고요. 부족 혹은 집단에게 어떠한 시험이 놓여 있고 그것을 치루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시험에서 낙오자와 합격자가 갈라지고 언제나 낙오자는 집단에서 소외당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험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의심해볼만한 것이고, 게다가 금기시되는 것 또한 많습니다. 때문에 반항하는 선례가 이미 있었던 것이고 그에게는 낙오자라 단순히 치부하기에는 너무 비밀이 많고 호기심을 자아냅니다. 두 집단이 어떠한 과거를 계기로 서로 차단하고 아이를 필요로 할 때만 서로 만나 씨앗을 나눕니다. 꽤나 오래된 전통인 것처럼요. 그러나 아무리 성별을 구분해 살고 있다고는 하나 어떻게 남녀가 만나 사건 없이 끝날 수 있겠습니까. 소설 속 대화로 미루어볼 때 이들에게도 미적 감각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화해를 모색하기보다 극단적인 결말로 처리하면서 어쩌면 주인공 메이든은 입시시험이 주는 과중한 부담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수험생처럼도 보입니다.

 김이환의 {버지니아 울프는 없었다}는 단편선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환상적이라는 측면에 부합된다고 봅니다. 현실이 기이한 체험과 접목하는 부분이 굉장히 매혹적이면서 기괴합니다. 작가가 이계를 묘사할 때, 이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환상문학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계에서 인물들의 출생은 대부분 현지인들이지요. 때문에 현실의 관점이 적용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계는 경이롭기까지 하지요. 우리가 다른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할 수 있는 결심은 흔히 두 가지로 나타날 텐데요. 가느냐, 남느냐.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구멍 속 이계에 대한 경외감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지요. 이와아키 히토시의 [칠석의 나라](이와아키 히토시, 학산문화사, 1999년 2월) 또한 마찬가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곳’은 인류의 무한한 상상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미지의 영역일 필요가 있지요.

 김주영의 {지구의 중력은 안녕하시니?}는 멀리 나아가지 않는 소박함을 보여줍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모임을 구성해 외계인처럼 굴다가 결국 현실에 부딪쳐 스스로 와해를 겪는 과정을 담았지요. 다만 진짜 외계인들은 특별한 임무나 욕심 따위도 없습니다. 심지어 공간적으로 볼 때 지구에서 멀리 벗어나지도 못해요. 언제나 친숙한 달과 자전거, 그리고 전화기를 벗 삼아 비교적 낭만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임태운의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은 필자 자신이 이전에 임태운의 전자책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임태운, 환상문학웹진 거울, 2009년 4월) 리뷰에서 동일작품에 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권민정의 {나하의 거울}은 금을 타는 명인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일일이 여러 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다가 채해라는 인물만은 유독 자세히 다루면서 예술이란 것이 어째서 빠져들면 위험한 것인지 독자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지요. 이 이야기는 꽤나 구전에 가깝고 설득력 있는 필치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실재하는 두 인물은 가만히 있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신들의 계보를 타고 오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어떤 운명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합니다.

 김지현의 {방문자}에서 주인공 안드레아 신부의 어린 시절 소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그냥 무책임한 거잖아요! 그렇다면 필자도 이 소설이 결말을 처리한 방식에 대해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방문자의 소재가 현실을 기반으로 씌어졌더라면 꽤 기괴스러운 괴기문학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요일 밤에 찾아오는 이에게 방문을 열어주면 죽음을 맞는다. 괜찮지요. 그러나 인물들이 결국 너무 쉽게 방문을 열고 맙니다. 율리아나 수녀는 그렇다 치더라도 안드레아 신부는 성경 내용에 의존하고 기도에 힘을 얻더니 스스로 뛰어들어요. 필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궁금증도 채워주지 못하지요. 주인공은 자신이 겪는 체험에 대해 전혀 독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지원의 {시간을 팝니다}는 독자가 아닌 청자를 상대로 합니다. 독자를 임의로 청자로 상정하고 발화 방식을 채택한 것이지요. 이러한 소설은 읽기에 편하고 비교적 긴장감을 풀어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감이 없는 것은 곤란해요. 화자는 바로 시간을 사고파는 장사치이거고, 그는 자신의 사업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거든요. 이러한 설명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들을 어떻게 풀어주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화자 스스로 자문자답하면서 마치 변명하는 자신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살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기꾼의 기질이 농후하지요. 이 소설은 사람들의 탐욕을 풍자하고 시간의 가치에 대해 역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건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중요 인물들의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전체 수록작들 중에서도 비교적 소품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김두흠의 {1억 원}이요? 이 작품은 상상이자 망상이지 환상을 다루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일확천금을 얻게 되었을 경우 사람들이 하는 상상이 오히려 이 작품의 주인공보다 더 짜임새 있고 스펙타클하면 했지 이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액수가 적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최근 10억이라는 최신 개봉작조차 설득력 없다는 판국에 인생을 걸기에는 대가가 너무 적다고 여겨집니다. 게다가 엄청난 부자는 1억 원을 흘려도 좀스럽다고 알려질까 창피해 신고조차 못할 거라니요?

 이수현의 {쓰레기들의 왕}은 왕이 되기 위한 시험을 앞둔 인간이라기보다 쓰레기들로 불리는 자들의 집합소 4구역의 수장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타락한 도시의 지하미궁, 고대유적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종족과, 모험심 넘치는 학자 등이 등장하지요. 사실 지하종족과, 괴물에 관한 묘사, 그리고 이들이 겪는 행동 등은 이미 익숙합니다. 그리고 깊게 파고들면 방대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이 단편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이 왕이 되고자 하는 이유여야 할 텐데요. 이 또한 왕에 대해 품고 있는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풀어놓은 정보들을 대부분 해결하지 않고 끝내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양미현의 {파랑새}는 천사로 불렸으며 결국은 스스로 악마의 모델이 되기를 자처했던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대화가의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이 둘레를 이루고 있지요. 소년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저주를 타고 났고요. 그러나 소년은 끝내 자신이 받았던 수많은 사랑들을 저버리지 못합니다. 문제는 제목이겠지요. 기존의 동화책 파랑새가 갖고 있던 의미가 깨지고 엉뚱하게 한 인물의 진술에만 의존한 제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민의 {댁의 아내는 안녕하십니까?}는 어쩐지 제목만 봐서는 의처증을 다루는 듯하지요. 내용과 관련해서도 썩 좋은 제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 또한 화자가 청자를 마련해놓고 들려주기 방식을 택해 진행하고 있지요. 그러나 내용은 단순합니다. 주기적으로 사라지고는 했던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알고 보니 생간을 먹는 여우였고 정체 모를 남자에게 퇴치되었다는 것이지요. 누가 봐도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는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저 정체 모를 남자에게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주인공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 역시 지나치게 순진합니다. 이러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는 것도 그렇거니와, 주인공 역시 남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멋대로 해버리고는 지나치게 굳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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