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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비평 출판사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계속된 출판 불황 속에서 문제집, 수험서를 제외한 일반 단행본 부문 중 가장 잘 나가는 분야를 들라면 직장인 처세술 도서와 함께 아동 및 청소년 도서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영향인지 언어영역 대비니 논술용이니 하는 명목으로 고전 명작들을 재간하거나 요약해서 소개하는 참고서풍의 소설집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 마디로 노골적인 상술의 발로일 뿐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창비는 최근 신인상 수상작을 비롯한 완전 신작만으로 이루어진 창비청소년문학 레이블을 선보이더니 지속적으로 신작을 내놓고 있다. 여기까지는 예상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한국 SF의 대명사 박상준의 기획으로 국내 작가들의 신작을 실은 SF 단편집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김보영 외, 창비, 2007)를 내더니 이제는 정소연 번역으로 해외의 최신(원서가 2004년 출간이니 이 정도면 비교적 최신이라 할 수 있다) SF와 판타지 단편집을 낸 것이다.
 이에 질세라 아동도서 전문이었던 비룡소도 청소년 도서로 영역을 확장하며 블루픽션, 오랑우탄 클럽, 까멜레옹 등 다양한 레이블을 통해 온다 리쿠, 하야미네 카오루 등 장르작가들의 작품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해리 포터 붐'으로 대표되는, 장르소설이 청소년에게 끼치는 파급력과 영향력에 주목하여, 독서로의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장르소설을 청소년 문학이라는 접근성이 용이한 영역을 통해 내부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청소년 소설 레이블로 소개된 장르소설의 적어도 절반 정도는 그대로 성인용으로 내놓아도 무방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선보인 [다른 늑대도 있다]와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필립 K. 딕 외, 패트릭 닐슨 헤이든 엮음, 정소연 옮김, 창비, 2009년 12월)도 이른바 영어덜트 계층을 위해 만든 선집이지만 작가의 면면이나 작품의 내용을 봐도 특별히 청소년을 고려했거나 청소년이 주인공이어야만 한다는 제약이 느껴지진 않는다. 몇몇 글 외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썼음이 확연한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와는 거의 반대라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국내에 출간된 장르소설 단편집 중 비교할 만한 대상이 있다면 [원더 월드 그린북/레드북](닐 게이먼 외, 테리 윈들링 엮음, 송경아 · 정소연 옮김, 북스피어, 2007년 6월)을 들 수 있겠다. 양쪽 모두 청소년층을 겨냥한 단편집이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원더 월드가 동화를 원작으로 삼거나 패러디 등 소재로 활용한 신작 단편집이라면 이 두 권은 편집자가 기존 출간된 작품 가운데 청소년층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작품을 고른 리프린트 앤솔로지로 발표폭이 거의 20년에 걸쳐져 있는 관계로 참여 작가들도 다른 일반 장르소설 선집에 밀리지 않을 뿐더러 비교적 최근 데뷔하여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 위주로 이루어져 있어 현대 장르소설의 경향과 흐름을 알기 위해서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청소년용으로 나왔지만 결코 유치하거나 동화풍, 교훈적인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기존 장르소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신작 단편집이 나왔다고 생각하면 되고(레이블은 잊어라), 청소년이나 장르소설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접근하기 쉬운 장르소설 입문서가 나온 셈이다. 자칫 양쪽 모두에게 외면 받을 수 있는 위태로운 위치에 있는 단편집이지만, 이왕이면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관심을 받기를 바란다.


기사도 / 닐 게이먼

 소박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현대 판타지로 분위기나 문체 등에서 레이 브래드버리를 연상시킨다. 이상하게도 자자한 명성에 비해 국내에 번역된 작품마다 기대 이하였던 닐 게이먼의 단편 중에서는 괜찮은 편. 아마도 게이먼은 장편이 능한 작가인 듯 하다.

다른 늑대도 있다 / 해리 터틀도브

 피해자, 차별받는 소수자로서의 늑대인간을 그렸지만 새로운 해석이나 참신한 아이디어는 없고 또 다른 소수자인 유대인과의 짧은 만남도 아무런 의미나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두 종족(?)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생길 조짐도 가능성도 보이질 않았으니, 이 이야기는 그냥 해프닝으로 끝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차별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으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라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리자와 크레이지 워터 맨 / 앤디 던컨

 도시괴담이 될 수도 있는 소재를 아름다운 회상으로 풀어내었다. 그리운 과거를 로맨틱하게 그려내어 특히 미국의 근대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에게 이국적이고 독특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 / 셔우드 스미스

 이계로 떠나는 아이들의 부모 시선에서 그린 이야기. 보통 청소년 소설이라면 아이들이 이계에서 펼치는 활약상을 그리기 마련인데, 작가는 보란 듯이 그런 흐름을 뒤집어준다. 아이들이 SF/판타지만 읽는다고 걱정인 부모들에게 권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땅의 뼈 / 어슐러 K. 르 귄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보자면 척박한 장르소설 번역 현황을 생각해보면 드문 케이스인, 중복 수록작. 르 귄의 어스시 단편집에도 실려 있다. 다행히 번역자가 다르지만 원문이 같은 이상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스시 연작으로 중요 인물인 오지언이 나오긴 하지만 어스시와 오지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어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독립된 내용이다. 하지만 알고 읽는 편이 훨씬 낫다.

해트랙 강 / 올슨 스콧 카드

 장편의 서두라는 느낌. 영웅 설화에서 '기이한 출생'에 해당하는 분량으로 본문이라 할 수 있는 뒷부분에 대한 소개 혹은 홍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역자 해설을 보면 본작에서 막 태어난 앨빈 메이커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다수 나온 모양이지만 국내에 번역 출간될지 여부는 정해지지 않은 듯 하여 아쉬울 뿐이다. 따라서 독립된 단편으로서 높게 평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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