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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파워스의『캐리비안의 해적-낯선 조류(On stranger tides)』에 관하여


▲ 한국에서도 흥행한 해적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3편의 포스터.

  1. 들어가는 글
  한국의 장르 시장에서 해적 소설은 그다지 친숙한 편이 아니다. 일제 강점과 독립, 6.25와 군사 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현대사는 문단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혹독한 현실 속에서 한국 문단은 리얼리즘에 대한 확고한 천착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자연히 한국 문단은 SF나 판타지, 호러, 추리 등의 장르 문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겼고 그러한 흐름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SF 같은 경우에는 과학 입국이라는 기치 하에 80년대부터 청소년 대상 과학 잡지에서 영미권 작가들의 몇몇 단편들이 근근하게나마 소개되어 왔고, 판타지도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대 히트를 친 이후로 어느 정도 고유한 시장을 구축하게 되었지만-여러 모로 불안정하고 기성 문단으로부터의 괄시도 여전할망정- 해적 소설처럼 장르 내에서도 극히 특화된 서사 형태를 갖춘 작품들은 거의 국내에 소개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것은 해적이라는 소재가 현대의 한국 독자들에게 생소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한국은 조선 시대 이래 ‘야만적인 왜구들이 어민을 수탈하기에 목사 XX가 조정의 명으로 수군을 이끌고 나가 토벌했다’는 식의 실록 속 한 문장으로 모든 게 정리가 되는 ‘통치자 중심의 역사 기록’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유교적 사관에 기반을 둔 역사 기록은 하층민들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느꼈던 불안과 공포의 실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며, 소설의 창작자들이 전적으로 문자를 알고 있는 사대부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해적을 주제로 한 한국의 고전 문학은 존재하지 못했다-물론 하층민들 사이에서 구비 문학 형태로 전래되어 온 것들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의 범주에 속할 뿐 소설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화를 거치고, 미국과 유럽, 중국과 일본을 이어 한국이 세계 10위 권 내에 드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현대까지 이어졌다. 한국의 장르 소설 시장에서 바다와 해적을 중심적인 주제로 놓고서도 일정 이상의 성취를 이루고 대중적 인기도 끌었다고 할 만한 작품은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가 유일하며, 한국의 작품을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에게 있어 어느 정도 친숙한 해적 소설은 기껏해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이나 제임스 매튜 베리의 『피터 팬』정도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 삼성 출판사 출간한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의 『보물섬』

  그러나 여전히 해적이라는 주제는 매력적이다. 인간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존재이며, 동서를 막론하고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 바다는 공통적으로 신비와 불가해의 상징이었다. 바다, 혹은 ‘고여 있는 거대한 물’의 이미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원형의 이미지였으며 멸망 이후 다음 재생의 주기가 돌아오기까지 세상이 취하는 모습이기도 했다-수메르 신화와 유태 신화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대홍수와 관련된 전승 등-. 그리고 해적은 땅이 아니라 바다에 터전을 두는 이들이며, 땅에 매여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과는 달리 언제고 마음이 내키면 배를 타고서 수평선 너머로 훌쩍 떠나 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자들로 여겨지곤 했다. 뭍에 사는 이들은 마치 정주민들이 유목민들에 대해 으레 갖곤 하는 것과 비슷한 성격의 판타지를 형성해 해적들에게 그를 덧 씌웠고, 뭍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관습과 법칙’에 묶인 자신들의 억눌린 욕구를 해적들에게 투사하곤 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해적의 실상은 자신들이 속한 삶의 공간인 바다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질시와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비참한 것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러한 낭만은 수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바다와 육지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해적의 기묘한 정체성은 그들을 수많은 신비와 미신의 장막으로 휘감았고 이것은 해적의 황금시대로 불린 1690년부터 1730년에 절정에 달했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 바르톨로뮤 로버츠, 윌리엄 키드 등의 전설적인 해적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고, 이 무렵은 르네상스 시절과도 겹쳤다. 르네상스는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신 중심의 사고방식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이행하던 무렵이며 이성과 합리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싹이 돋은 시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이들의 정신 기저에 깔려 있는 신비와 미지에 대한 경외와 희구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인 특이성이 해적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묘한 아우라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러한 매혹은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팀 파워스의 이 소설 『캐리비안의 해적-낯선 조류』에서도 두드러진다.


▲ 팀 파워스의 『캐리비안의 해적-낯선 조류(On stranger tides)』 원서 표지

  2. 작품에 관하여
  이 작품은 해적들의 황금시대가 끝나기 직전을 배경으로, 가난한 인형술사를 아버지로 둔 주인공 존 섄더낵이 우연한 기회로 아버지가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재산을 노린 삼촌의 음모로 인해 아버지가 그를 알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유산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보시피러스 카마이클 호를 타고서는 자메이카로 향하던 도중 악명 높은 해적인 검은 수염의 공격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검은 수염이 이 배를 공격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으며, 《자유의지의 옹호》라는, 홉스를 반박한 책으로 이름을 날린 석학-그러나 아내 마거릿을 잃은 뒤 어딘가 이상해져서 기괴한 연구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존과 함께 이 배에 타고 있던- 벤자민 허우드와 공모한 결과였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그러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견해를 가지고 은밀히 협력했으며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보내고 있을망정 육지 사회의 테두리에 속해 있던 존은 급격히 해적들의 세계로 휩쓸리게 된다. 죽음을 택할 것이냐 해적이 될 것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존은 후자를 선택하고, 존 섄디로 이름을 고치고서는 인형극을 이용한 해적들의 오락 담당 겸 요리사로 일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전형적인 해적 소설의 구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갑작스레 타고 있던 배가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비일상의 나락으로 추락한 주인공과 신비한 미녀, 그리고 악마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잔인무도한 해적과 그들 모두를 둘러싼 알 수 없는 음모. 그러나 이 작품에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생전 내내 악명을 떨쳤던 대해적 검은 수염이 부두교의 흑마법을 이용해서 불사성을 획득하려고 했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검은 수염은 자신의 그 수염에 폭약을 터뜨리는 데 쓰는 도화선을 꽃고 다니기도 했으며, 후대의 창작자들이 그에게 악마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며 여기에 불을 붙이기도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이유를 자신에게 달라붙은 악령들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술적인 조치로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주술적 요소는 무지한 뱃사람들의 미신이나 촌뜨기들의 환상이 아니며, 엄연히 실존하는 객관적 대상이다. 이 작품에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제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진짜’ 마법사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마법의 힘은 명확한 한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초자연적 요소들은 특정한 인물들의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서사구조 상의 근본적인 핵심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치로 쓰인다. 후술하겠지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마법’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소설의 근본적인 주제와 직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요소는 작가 팀 파워스의 충실한 고증이다. 이 작품의 초반에는 새로이 바하마 총독으로 부임한 우즈 로저스가 해적들에 대한 사면을 선포했으며, 많은 해적들이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고 했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해운업자 가문에서 태어난 우즈 로저스는 영국의 사략선장으로 프랑스 선박들을 약탈하다가 이득을 얻기 위해 태평양으로 시야를 돌렸다. 케이프 혼과 남미를 거쳐 서쪽으로 계속 항해한 그는 세계를 일주하고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 모험을 통해 그는 거액을 벌고 여행기도 출판했으나 이후 재산 운용에서의 실패로 인해 파산했다가 영국 정부의 배려로 1717년 바하마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당시까지 바하마 일대와 뉴 프로비던스 섬은 악명 높던 무법자들의 왕국이었지만, 연안의 국가들이 점차 강해지고 체계화되면서 해적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감소하고 있었고 이것은 곧 야만과 무도함- 그리고 그때까지 세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신비와 불가해함이 조직화되고 문명화된 사회의 틀 속에 편입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많은 해적들이 사면을 받아 들였고, 그중 적지 않은 수가 다시 해적 행위에 손을 댔다가 잡혀 교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또 다른 탁월한 점은 나름의 계산을 바탕으로 해 그러한 ‘관대한 조치’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그런 역사적 사실과 가상을 상당히 훌륭하게 한 데 엮고 있다는 점이다. 작중에서 존을 도와준 해적 선장 필립 데이비스는 그렇게 말한다. “대서양 저 멀리의 모든 왕과 상인들은 여기 새로운 땅들과 그만 관계를 끊으려 할 수도 있어. 저들에게는 유럽과 아시아가 아직도 중요한 체스 판이거든. 저들은 이 신세계를 두 가지 관점으로밖엔 보지 못해. 빠르고 쉬운 수익원, 그리고 범죄자들의 하치장. 그 정도만 해도 뿌린 노력에 비하면 상당한 소득이라고 생각할걸. 아주 거저먹는 셈이니까. 그리고 아마 로저스도 여기 와보면, 저 반대쪽 세상의 작고 추운 섬을 통치하는 남자가 발급한 사면장 따위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면장 덕을 볼 일도 없단 걸 알게 될지 모르지.”  
  작품 중반, 유럽으로 대표되는 문명과 질서와 신대륙으로 대표되는 미지와 신비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마법이 미신에서 벗어나 실체를 갖는 장소인 ‘젊음의 샘’에 도착한 이후 서사는 급전한다. 팀 파워스는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기서 악령이나 주문 같은 것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며 그것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꿔 놓는지에 대해 다소 지루할 정도의 분량을 할애하며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다소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구성상 지금까지 벤자민 허우드와 검은 수염이라는 두 축으로 나뉘어 진행되던 복잡다단한 음모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기에 독자는 그러한 환상적이고 느릿느릿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서는 거대한 힘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감각을 받으며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져 진행되던 요소들이 서로 얽혀 커다란 그림을 그려나가고, 그 그림들이 퍼즐 조각처럼 다른 그림들과 맞물리는 순간은 이 작품 전반에 걸쳐 몇 번이나 등장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 그림들은 보다 더 큰 오브제를 구성하며 다른 큰 오브제와 결합해 가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독자들은 쾌감의 향상을 느낀다. 이런 정교한 구성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매력을 느낀 부분은 다른 지점에 있다. 마법이라는 초자연적 요소가 서사 진행의 근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팀 파워스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마법을 비롯한 초자연적인 요소들은 유럽에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사멸해 버렸지만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신대륙에서는 여전히 건재하며, 특히 ‘젊음의 샘’과 같은 장소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극도로 희미해지며 그 힘이 최대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설 중반에서 벤자민 허우드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는 세계를 설명할 때는 뉴턴 역학이 유용하오. 모든 작용에는 크기는 같지만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따르고, 등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닌 한 계속 같은 속도로 움직이려 하니 말이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아주 사소한 사건을 아주 심하다 싶을 정도까지 꼬치꼬치 캔다면, 그러니까 그런 사건들을 정신병원에 끌려가기 딱 좋을 정도로 꼼꼼히, 또 불필요할 만큼 강박적으로 상세하게 다룬다면… 현실에 대한 뉴턴의 기계적인 설명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거요. 매우 작은 범위의 공간이나 시간에는 불확실성의 요소, 정의의 불분명성이 존재하니까. 우리가 진리라 믿는 것은 반숙한 계란처럼 약하디 약하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거요. 일반적으로 우리 세계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없소. 음… 사람들이 보통 확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디서건 대체로 통하는 데다 뉴턴의 편에 설 때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말이오. 하지만 여기서는 확률이 한결같지 않소. 이곳의 확률은 양극화되어 있지. 그래도 전체 값은 같소. 이 땅에는 유연성도 불확실성도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 이곳 공기 중에는 아까 질문에 대답해 준 존재와 유사한 것이 아주 많다오.…”
  유럽으로 대표되는 이성과 합리와, 신대륙으로 대표되는 신비와 환상이라는 이 대립 구도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바로 철기 문명이다. 중세 유럽 설화에서 철, 특히 한철(Cold iron)은 요정이나 늑대 인간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쫓아내거나 죽이는데 특별한 효과가 있는 걸로 흔히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철이 마법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에 대해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 포도주 어떻게 만드는지도 알지? 왜 어떤 포도주는 유난히 달달한지 알아?” “알코올이 강화되어서 그렇지. 포도주에 브랜디를 섞어 발효를 중단시키면 안에 당분이 남는데 그러면 모든 당분이 알코올로 변하지 않으니까.” “잘 아는군, 맞아. 브랜디가 발효를 중단시켜. 그럼 당분이 남지, 응. 하지만 그 당분은 이제 알콜로 변하는 게 불가능해져. 그럼 모든 걸 중단시키는 이 물질은, 브랜디는 뭐지?” “음, 그건 증류한 포도주지.” “맞았어. 발효로 만들어진 건 더 이상의 발효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브랜디가 발효에 영향을 끼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차가운 철, 단단한 철도 마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말인 거지?”…(중략)… “그래서 구세계에서 철이 도구와 무기의 재료로 널리 쓰이게 되면서 마법이 대부분 사라진 거로군.”
  철이 마법과 마법적 존재에 대해 유효하다는 이 설정은 작품 후반의 전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작품상에서 직접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의 여지를 가능하게 한다. 고대 잉카 문명은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놀라운 토목 기술과 세련된 사회 구조를 이룩한 우수한 문명이었지만, 철과 말의 사용법을 몰랐기에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체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철제 무기로 무장한 기병들에 의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어쩌면 고대 잉카의 지배층이었던 태양신 인티의 사제들은 사실 마법사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마법의 힘으로 그토록 우수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침략자들이 마법과는 상극인 철로 된 장비를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이러한 상상은 영국이 설립한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유럽 열강들의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신대륙을 수십 개의 식민지로 찢어 놓게 된다는 역사적 사실, 이 작품 초반부터 계속 여러 인물들에 의해 언급되는 ‘해적들의 시대는 곧 끝날 것이다’라는 화두와 더불어 독자에게 말할 수 없이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애잔함은, 인간이 가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라는 19세기 계몽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광기와 불합리로 가득 찬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알고 있는 현대인이 독자이기에 한층 더 하다.

  3. 나오는 글
  물론 이 소설도 흠을 잡으려면 못 잡을 건 없다. 실제 역사 속에서 악명을 떨친 여성 해적인 앤 보니와 메리 리드는 무자비한 악당들이기도 했지만 당시 시대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사회적인 족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던-그 수단이 해적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정의 여지가 없을망정-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여성 해적이나, 다른 여성 인물들은 너무 평면적이고 매력이 없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작가의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관점도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여전히 매력적인 것은, 구세계와 신세계가 충돌하던 역사적인 격동기를 배경으로 해서 해적이라는 뭍에도 바다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을 통해, 이성과 합리라는 철과 신비와 환상이라는 마법- 그 문명과 주술 사이의 위태로운 흔들림을 탁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곧 개봉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4편의 원작 소설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고서, 상당히 재미있고 짜임새 있게 잘 쓰여진 한 편의 훌륭한 장르 소설로만 읽더라도 이 작품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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