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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폭발

2008.11.05 21:0911.05

【명사】Black dwarf : 검은 난쟁이

1. 원초의 거인 이미르의 시체에서 태어난 구더기들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검은 난쟁이들,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지만, 손재주가 뛰어나며 햇빛을 받으면 돌이 되기에 지하에 살면서 밤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2. 탄광에 살며 노동일을 하는 어린 아이들을 빗대는 속어.
낮에는 햇빛이 비추지 않는 깊숙한 지하갱도에서 일을 하고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난쟁이에 빗대었다.







Prelude.

A. K. A. Chaos iz..



네 번째, 폭발
(부제 : 검은 난쟁이)









「배가 고파.」

소년이 텅 빈 배를 움켜쥐었지만, 뱃속에서 울리는 메아리를 틀어막아봤자 투덜거림은 온 몸으로 기어 나온다.
잠시 깜깜한 어둠속을 기어 다니던 굶주림도, 어둠 속으로 사정없이 떨어지는 곡괭이소리에 산산조각 나 버린다.

「배고파. 힘이 없어.」

소년이 그렇게 말했지만, 숨 막히게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대신 자욱이 날리는 석탄가루가 소년의 입과 코를 막는다. 좁은 곳에서 기침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
소년은 옷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너덜너덜해진 옷 틈새로 석탄가루는 계속 소년의 호흡기를 괴롭힌다.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흐릿하게 흔들리는 램프 빛에 소년의 눈동자는 그보다 더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그 앞, 희미한 불빛과 어둠에 섞여 소년 또래의 몸집을 가진 그림자가 묵묵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다.
작지만 다부지게 생긴 몸집, 그가 휘두르는 곡괭이 끝이 어둠을 헤치고, 작은 공간에 석탄가루를 흩뿌려놓았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좁은 공간을 꽉 채운 어둠과 석탄가루에 검댕이가 되어, 원래 색깔을 잊어버린 듯하다.

「얼마나 됐을까?」

소년의 질문에, 검은 그림자는 곡괭이를 휘둘러 석탄가루가 흠뻑 묻은 짧은 대답만을 파내었다.

「아직 멀었어.」

그는 썩어가는 기둥에 걸린 램프를 가리켰다. 흐릿하게 보이는 램프는 환하진 않지만 제 몸만큼은 비출 수 있었다.
소년은 낮은 천장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허리를 최대한 숙이며 램프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제 눈앞도 겨우 밝힐 만큼의 불빛의 밝기에 비해, 아직도 기름은 허리춤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소년은 그 작은 손에 쥐어졌던 무거운 곡괭이를 놓고, 어딘지도 모를 어둠 속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아마 바지에 검댕이가 묻어 더러워지겠지만, 이미 소년의 온 몸은 땀과 석탄가루로 범벅이 된지 오래다.

「배고파.」

소년은 온 몸으로 말했다. 쭈그려 비틀린 뱃속의 투정이 좁은 공간 속에 한층 더 크고 긴 메아리를 남겼다.
하지만 그림자는 묵묵히 곡괭이를 집어 들고는, 힘차게 바닥에 뾰족한 끝을 내리쳐 바닥을 헤집어놓을 뿐이었다.

「말을 안 하면 덜 배고파져. 그리고 일을 안 하면 내일은 더 배고파질 거야.」

야속한 곡괭이질이 어둠 속을 쪼아 내리고, 공간에는 날카로운 메아리가 석탄가루와 함께 퍼져나갔다.
소년은 매캐한 가루가 목을 또다시 간질이지 않을까, 옷소매로 입을 막은 채 곡괭이질을 다시 이어갔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둘은 한참동안 곡괭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날카로운 소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무거운 곡괭이를 잡은 소년의 손은 아무 말이 없다. 자루를 굳게 쥔 손이 바닥을 한없이 파헤칠 뿐이다.
가는 팔뚝에 알알이 맺힌 땀방울이 반짝이고, 사방으로 날리는 석탄가루가 온 몸에 자욱하게 내려앉는다.

어둠이 깊숙한 너머에서,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차 온다.」

그림자의 말에 소년은 잠시 곡괭이를 손에서 놓고, 어둠 너머에서 내려온 빈 수레 안에 든 삽을 집어 들었다.
퍼낸 석탄들은 어둠 속에서 잠시 검게 반짝였지만, 수레 안으로 굴러 떨어질 때엔 짙은 가루만을 날릴 뿐이다.

잠시 후, 소년이 파낸 석탄으로 가득 찬 수레가 어두운 갱도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그제야 소년은 주저앉아 이마에 잔뜩 묻은 땀을 손으로 쓸어내었다.
손바닥에 검은 물이 번졌지만, 소년은 옷소매에 그것을 대충 닦아내고는 램프에 눈을 돌렸다.
기둥에 걸린 빛은 아직도 흐릿하게 흔들리고, 램프 안의 기름 또한 허리춤에서 아주 약간 수그러들었을 뿐이다.

소년이 다시 곡괭이를 잡았다.
석탄가루가 뿌옇게 사방을 덮어, 흔들리던 램프 빛이 더욱 흐려졌다.




밖으로 나올 때, 매번 소년이 접하는 색은 황금빛보다는 은빛, 하얀 하늘보다는 검은 어둠에 가깝다.
소년은 구멍이 뚫린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감독관에게 받은 일당도 금빛보다는 은빛이다.
한 숨을 지을 만큼의 액수이지만, 소년은 투덜대지 않고 조심스럽게 일당을 그나마 성한 다른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저 멀리서 소년과 같은 처지의 '검은 난쟁이'들이 걸어가고 있다. 그들도 검게 변한 얼굴로 은빛을 받았을 것이다.

정말 그 말대로, 석탄과 가스로 뒤덮인 검은 지하탄광에는 얼핏 난쟁이로 착각할 만큼의 작은 아이들밖에 없다.
어른들이 말하는 '검은 난쟁이'들은 햇빛을 못 보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실 소년도 빛보다는 어둠이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난쟁이들의 석탄가루에 찌든 피부를 살짝 긁어내면 달빛보다 더 창백한 피부가 몰골을 드러내곤 하였다.

또, 지하갱도는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더럽고 습하다. 그 때문에 통로에 어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감독관을 향해 벌린 앙상한 손바닥에 떨어지는 달빛의 무게도 한 몫 한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다.
햇빛을 보면서 커야 할 아이들은 햇빛이 지고 난 후에야 바깥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기억 속에 햇빛은 언제부터 사그라졌는지를 천천히 세 보려고 했지만, 얼마 못 가 셈을 포기해버렸다.


검은 난쟁이들의 행렬은 그 수가 조금 줄긴 했지만, 대부분이 호프집 앞까지 걸음을 쉬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서 씻지도 못한 검은 아이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광경은 꽤 낮선 풍경이 아니다.
호프집 주인은 벌써 맥주 통 하나를 창고에서 내어 영업 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이고, 아주머니도 청소를 끝낸 듯 했다.
하지만 조금 후면 주인은 다른 맥주 통을 꺼내느라 힘들어 할 것이고, 아주머니도 이곳저곳 묻은 석탄 때를 벗겨내기에 바쁠 것이다.

바깥에선 펌프 삐걱대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몇 겹으로 검게 묻은 석탄 때는 쉽게 닦여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애들은 바깥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주점에는 일부 영악하거나 씻기 싫어하는 애들만이 남아있다.
조금 영약하고, 씻기 싫어하는 편에 속하는 소년은 가장 구석자리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차가운 맥주 한잔이 탁자 위에 놓여졌다.

「수고했어.」

소년은 고개를 들었고, 탁자 건너편에서 방금 다 마신 맥주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친구를 발견했다.
탄광에서 방금 나온 산발머리엔 여전히 석탄가루가 묻어, 머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질 것 같다.
꾀죄죄한 옷에도 몇 겹으로 쌓인 석탄 때는 쉽게 벗겨질 것 같지 않았지만, 이 친구가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배고프지? 내가 살게.」

녀석은 매번 넉살 좋게 떠들어대었지만, 결국 돈을 내는 것은 소년 자신이었다.
그가 탄광 하루 일당으로는 어림도 없을 메뉴를 부르려는 것을 막고, 평소처럼 소년은 빵과 묽은 수프를 더 주문했다.
잠시 후 탁자 위에 작은 빵과 수프, 그리고 반쯤 채워진 맥주잔이 놓이고, 소년은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입에 대었다.

「여기 수프는 너무 맛없어. 끓는 물에다 가죽장화 하나를 처넣어 만든 것 같아.」
「대신 싸잖아. 맛있는 수프를 먹으려면 시내 깊숙이 들어가야 할 거야.」

이 친구는 탄광 안에서는 묵묵히 일만 하지만, 밖에만 나오면 끝도 없이 시끄러워지는 이상한 녀석이다.
바깥 공기가 녀석을 흥분시키는 걸까, 안에서 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녀석은 수다쟁이처럼 끝없이 지껄인다.
무슨 괴상한 반박을 듣기 전에, 소년은 빵을 작게 떼어 뭔가 떠들어대려는 친구 놈의 입에 쑤셔 넣었다.
녀석은 돌도 이보다 부드럽겠다며 투덜대었지만, 잠시 후 우물거리며 돌보다 딱딱할 거라는 빵을 잘도 씹어 넘겼다.

「그거 알아?」

녀석이 또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프를 입에 가져다댔다.

「검은 난쟁이 이야기 있잖아.」
「어른들이 우리한테 붙인 별명이잖아.」
「아니, 그거 말고.」

녀석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그래서 잠시 허공으로 날린 석탄가루들은 바닥에 수북이 떨어졌다.

「진짜로 검은 난쟁이들이 살고 있대. 본 사람도 있다고 그러더라.」
「거짓말이지.」
「아니야. 우리가 캐고 있는 석탄이 사실은 난쟁이들이래. 그 사람들은 햇빛을 보면 돌이 된다고 하잖아?」

녀석은 공상을 유난히도 좋아한다. 아마 저번엔 동굴에 산다는 거대한 산양 이야기였지.
바다에 잠긴 탑에 사는 인간 모습의 변신괴물도 있었고, 천년을 살았다는 흑백의 마녀도 언젠가 이야기했던가?

「어른들이 왜 저 깊숙한 곳에 우리를 보내는지 알아? 땅 깊숙한 곳에는 검은 난쟁이들이 살았다는 나라가 있는데..」
「그런 건 다 바보들이나 믿었던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라고.」

소년은 단번에 친구의 말을 끊어버리고, 반쯤 찬 맥주를 입에 가져다대었다.
김이 좀 빠져 맛이 좋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한 입에 마른 목을 채울 수는 있었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니가 지금껏 말한 영웅이나 그런 난쟁이들이 있다면, 왜 그렇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건데?」
「어른들은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거든. 그래서 우리가 못 보게 숨기고는 하는 거야.」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 녀석이 떠들어대는 사이 빵은 다 사라졌고, 수프그릇도 깔끔히 비워졌다.
하지만 이 녀석의 빛나는 두 눈은 아무리 입으로 퍼내도 비워지지 않을 공상으로 가득 찬 듯이 보인다.
그래봤자 후식거리도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이야기, 소년은 뒤돌아서며 말했다.

「니가 말한 것의 반만 있어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할거야, 우리가 여기서 묽은 수프와 딱딱한 빵을 먹는 일은 없을 거고.」

소년은 호프집 밖의 문을 열었고, 그의 등 뒤에선 아직도 다 비우지 못한 공상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나중에 검은 난쟁이들의 나라를 찾아내도 넌 안 보여줄 거야.」




평소 같은 어느 날, 소년이 다시 그 녀석을 보게 된 것은 비교적 깊지 않은 탄광의 입구쯤에서였다.
감독관의 채찍질과 발길질 속에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이리저리 차이고 굴러다니는 것은 분명히 그 녀석이었다.
주변에는 감히 말리려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성난 감독관의 채찍과 발길질은 점점 강도를 높여갔다.

「이 새끼야, 뭘 훔쳐갔는지 당장 불지 못해?」
「..뭐하는 거 에요?」

소년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녀석은 바닥에 웅크리는 것으로 감독관의 성난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전부이다.
날카로운 소리가 갱도 어둠 속으로 빠르게 소용돌이치고, 그 사이로 녀석의 신음이 작게 바닥을 기어 다닐 뿐이다.

「거리에서 굴러다니던 애새끼 주워 일 시켰더니, 여기서 도둑질을 해?」

소년은 감독관의 발길질을 피해 그에게 다가갔고, 녀석이 웅크린 품 안에 무언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녀석의 웅크린 모습은 마치 그것을 온 몸으로 지켜내려는 듯이, 어떤 공격에도 아무 움직임이 없다.
아무리 감독관이 채찍질을 하고 발로 차고 들어내려 해도, 소년은 품속에 든 것을 지키는 굳건한 요새가 되어있었다.

결국, 지친 감독관이 채찍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석탄가루 섞인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폭풍 전 고요처럼, 그 후 들린 감독관의 말 한마디는 어두운 공기 대신 소년의 마음을 처참히 찢어놓는다.

「좋다. 이제 더 이상 나오지 마라. 돈도 안 줄 테니 어디 길거리에서 그 도둑질 실력 한번 뽐내봐라.」

매정한 한 마디가 끝나고, 감독관은 뒤돌아섰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감독관의 눈매가 그렇게 날카로운 적은 없었다.
구경하던 모든 아이들은 매서운 감독관의 눈길을 피해 자신의 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황을 정리한 후에, 감독관도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앙상한 손목을 보게 되었다.
상처로 물들어 부들부들 떠는 작은 손은, 힘없이 뻗어 감독관의 바지자락에 걸려 축 늘어져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곡괭이를 쥐었을 때처럼, 바지자락을 단단하게 붙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부르튼 피가 석탄가루와 섞여 검붉게 변한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왜 그랬어?」

소년의 질문에도, 녀석은 히죽 웃기만 했다.

「도대체 뭘 훔쳤는데?」

녀석은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호프집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 둘을 보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안심한 그는 탁자 사이로 누더기 옷을 슬쩍 들어보였다.
얇은 옷 사이로 슬그머니 보이는 윤곽은 두개의 길고 둥근 막대기이고, 아래쪽으로 보이는 두개의 심지.
녀석이 보여준 대략적인 형상에서 떠 올릴 수 있는 것은 하나, 하지만 소년은 잠시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야만 했다.

「..그런 걸 왜 훔친 거야?」
「전에 말했잖아. 깊숙한 곳엔 난쟁이의 나라가 있다고.」

미쳤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검은 난쟁이들의 나라로 가기 위해 폭약을 훔쳤다고?

「진짜 있더라도 너무 위험해. 갱도가 무너져버리면 어떻게 할 건데?」
「난쟁이들에게 부탁해서 갱도를 다시 세워달라고 하면 돼. 녀석들은 손재주의 달인이거든.」
「사람은? 니 말대로 갱도는 다시 세울 수 있어도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할 건데?」

너무도 위험하고 무모한 생각을, 녀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밤에 할 거야. 난쟁이들을 부르면 바깥에 나와서 신나게 같이 놀 거야.」

오, 이런 젠장. 그런 방법이 있었군.
아무도 없는 밤에 갱도에서 폭약을 터트려, 혼자 깔려선 아무도 구해줄 사람 없이 죽어가는 것이 이놈의 계획이군.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물론 양 손이 아닌 녀석의 움푹 패인 볼에 맞부딪히도록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리고 너무 위험해.」
「넌 난쟁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잖아.」

당연하지. 하지만 그런 걸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맥주를 된통 쳐 마신 사람들뿐이야.
왠지 많이 마시더라니, 아무래도 어젯밤 마신 맥주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구나.

「거짓말이 아니야. 그 곳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감독관도 없고, 숨에 섞여 목을 따갑게 찌르는 석탄가루도 없을 거야. 검고 작은, 귀여운 난쟁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릴 테고, 햇빛만큼 찬란한 집을 지어놓고 우리를 기다릴 거야.」

햇빛이라, 기억 속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제는 생소해진 황금빛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녀석이 생각하는 난쟁이의 나라는 정말 아름다운 곳일지도 몰라. 소년은 잠시 그 환상 속에 빠져 있었다.
젠장, 나도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 이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은 이미 빠져 버린 지 오래고.

「난장이들은 정말 있어. 난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그 날 밤, 소년은 꿈을 꾸었다.
황금빛이 찬란한 궁전 앞에서, 수많은 검은 난쟁이들이 자신을 맞아주는 꿈을.

그 곳에는 가죽장화로 끓인 수프와 김빠진 맥주는 없고, 대신 따뜻한 수프와 달콤하고 부드러운 케이크가 있을 거야.
검은 난쟁이들이 정성스레 소년의 때를 벗겨주고, 다 헤진 옷이 아니라 멋지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겠지.
그리고 태양 빛 찬란한 아래서 모두 같이 손을 잡고 노는 거야. 춤추는 산들바람과, 내 마음을 만지며.
아! 나는 살 거야.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가는 거야.


 콰앙!




광경은 처참하다.
괴성과 함께 밤하늘을 뒤흔들었던 탄광은 아침이 되자 제일 먼저 잔혹한 검은 구름을 토해내었다.
자욱한 안개를 걷어낸 후, 램프를 들고 들어가자 상황은 더욱 끔찍한 모습으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엄청난 폭발의 흔적으로 한쪽 갱도는 완전히 입구가 막혀있었고, 다른 쪽의 상황도 무시 못 할 정도였다.
다행히 모두 일을 끝마친 밤에 일어난 사고라 사상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추측성 발언과 함께.

모두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일은 평소와 같이 진행되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무너진 갱도에서 작업을 하기로 되어있던 아이들의 구역이 조금 바뀌었다는 것과.
구역 당 사람 수의 증가, 산소 부족과 평소보다 석탄가루가 더 짙게 깔리어 아이들이 더 자주 기침을 해 대었던 것.
또 감독관이 아주 분개한 표정으로 소년의 뺨을 거세게 후려친 것. 그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날이 지나갔다.


'검은 난쟁이'에 대한 꿈도 소년의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여전히 소년이 먹는 것은 돌만큼 딱딱한 빵과 가죽장화를 넣어 만든 수프, 밋밋한 맥주뿐이었다.
다만 평소보다 더욱 많이 먹게 된 맥주 때문에, 소년은 일을 할 때마다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왔다.
어느 날은 받은 일당을 맛없는 음식 대신 맥주로 머리끝까지 채운 적도 있었다. 그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날이 지나갔다.



어느 달빛이 환하게 차가운 밤, 소년은 익숙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날 따라 넓어보였던 탄광 앞, 수많은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돌면서 춤을 추고 있다.
하얀 달빛에 비춰 반짝이는 검은 피부, 그것은 석탄 때가 몇 겹으로 묻어 까무잡잡해진 것이 절대 아니었다.
둥글게, 서로 손을 잡고 도는 그 모습이 어릴 적에나 믿었던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그 모습 그대로이다.

소년이 감은 눈을 천천히 떴을 때, 소년의 눈앞엔 그가 가장 익숙해 있었고, 보고 싶었고, 그리워했고,
하지만 잊어버렸고, 무시했고, 믿지 않으려 했던 그 녀석이 다른 난쟁이들과 함께 서 있었다.

소년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달빛에 얼어버린 입술이 쉽게 말을 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대신 녀석의 손이 가만히 소년의 입술을 눌렀다.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녀석의 손가락 끝에서 멈추었다.
소년의 녀석은 아직도 다 비우지 못한 환상의 눈동자를 열어, 소년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그 눈동자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지만 황금처럼 아름다운 궁전과, 어둠처럼 검지만 그 무엇보다 때를 타지 않은 새하얀 피부.

소년은 조심스럽게 입을 떼어 물었다.

「결국 찾은 거야?」

녀석은 살며시 고개를 돌렸고, 그 뒤에는 언제 다가왔을 작고 귀여운 난쟁이들이 소년을 보고 있었다.
모습은 다 달랐지만, 모두 너무 까맣고 작은, 하지만 귀여운 얼굴. 그리고 녀석과 같이 빛나는 두 눈동자.
달빛 아래 가장 아름다운, 하얀 달빛과 검은 난쟁이들의 모습. 소년은 감탄을 내질렀다.
손을 뻗었고, 보드라운 피부가 느껴졌다. 소년의 눈에서도 아름다움에 감동한 감탄이 새어나왔다.
그 눈물이 얼굴의 석탄 때와 섞여 더러워지지만 달빛은 그마저도 하얗게 물들이고.




소년은 사라진 환영 속에 서 있었다.
넓은 탄광 앞일뿐이고, 야속하게 차가운 달빛뿐이다. 눈물은 더러웠고, 닦아내자 더 더러워질 뿐이다.
난쟁이들은 사라지고, 황금의 궁전도, 아름다운 눈동자도, 잊어버렸던 녀석도 그렇게 사라졌다.

소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맥주를 잔뜩 들이켰던 온 몸은 속에서 비명과 욕지거리를 지르며 제 말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이 안 듣는 다리를 손으로 일으키며,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얼굴을 마구 때려가며.
소년은 필사적으로, 맥주에 절여져 망가져 있던 기억과 감각을 모두 되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리고, 지독한 두통과 함께 떠올려 낸 소년의 흔적은 상당히 시리고 차가운 것들뿐이다.
이제는 텅 빈 주머니, 시리도록 차갑기만 한 달빛이 비추는 길에 소년의 발자국은 이제 없고.
옆구리에 아직도 남아있을 커다란 멍과 튼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피가 소년을 아프게 한다.

소년은 탄광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것은 소년에겐 검은 아가리를 쳐들고 아이들을 먹어치우는 짐승처럼 보일 뿐이다.
검은 난장이가 살았다는 행복의 나라도, 소년이 살았던 기억의 흔적도, 하다못해 손끝에 떨어진 은전의 무게도.
뼈도 살도 꿈도 다 먹어치우고 짐승같이 검은 살을 찌운, 그래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포식자 같은.

소년은 중얼거렸다.

「나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품에 손을 넣었다. 얇은 옷 사이, 품에 슬그머니 보이는 윤곽은 두개의 길고 둥근 막대기,
아래쪽으로 보이는 심지 하나. 소년은 그것을 빼 들고, 부러진 성냥 하나를 주워, 불을 붙였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심지는 빠르게 타들어갔다. 소년은 그 것을 입구 앞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달빛만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괴성이 다시 한 번 밤하늘을, 그리고 온 세상을,
소년이 가지지 못했던 모든 세상과, 환상까지 모두 뒤집어놓았다.



탄광의 입구는 완전히 무너져, 원래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있었다.
소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폭발이 주위의 공기를 황금빛 불꽃들로 물들여놓았다.
조금 숨이 막혔다. 목을 찌르는 석탄가루 때문이 아니라 소년이 숨 쉴 공기조차 빼앗아가는 불꽃 때문에.

소년은 고개를 들어, 불꽃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뜨거운 불꽃에 갈라진 석탄 때가 마른 껍질처럼 쩍쩍 갈라졌고, 껍질을 벗긴 피부는 홍조를 띄어 붉고 아름다웠다.
소년은 문득 자신의 머리카락이 타고 있다 생각하였다. 마치 폭발처럼 한순간에 모습을 드러낸 소년의 색.
어둠과 석탄 때에 색을 잃었던 산발의 머리카락이, 폭발과 함께 누구보다 강렬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소년의 머리칼은 마치, 폭발하는 불꽃처럼 숨을 태우며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붉은 빛에 소년은 잠시 넋을 잃었다.

아, 너의 머리카락은 이런 색깔이었구나.



검은 난장이가 사라진 곳에, 누구보다 붉게 타오른 소년이 이곳에 있다.
입을 다문 포식자의 침묵 앞에, 아름다운 꿈과 환상을 가슴에 품고, 소년은 그 자리를 떠났다.
황금빛 궁전 대신 소년이 가슴에 품은 황금과 환상.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소년도 잘 모른다.
어쩌면 차가운 달빛에 취기가 식어버릴 때, 소년의 폭발하던 불꽃도 사그라질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밤의 환상이, 그리고 소년의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환상과 꿈이 있는,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입을 다문 밤.
소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Chaos 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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