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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행운의 동위원소 下

2008.08.15 12:1108.15

#11 장르문학갤에 올라온 글

제목:
집적기를 사용하는 안티집적기 회원. lol
작성자: HAL                 날짜: 2020 - 01 - 01

위에 올린 짤방은 오늘 뉴스 캡쳐 화면임.
체크해놓은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안티집적기 카페 회원인 이동섭 씨.
양복 마의 안쪽으로 행운집적기를 착용하고 계심.
ㅋㅋㅋ 현성 New WoF 모델인 듯.


 


Galactica         뭐야, 안티할꺼면 지부터 쓰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님?
urka                 ㅋㅋ ㅂㅅ.
bulgogi            생긴 걸 보니 참 오덕스럽다.
LordOfLight    원래 우리 사회 기득권층은 말 다르고 행동 다른 데는 익숙하니까.
C3PO               말들이 좀 심한 것 같은데. 아무리 안티라도 죄다 집적기를 쓰는데 혼자
                           안 쓰는 건 말이 안 되잖아.
JG2                  C3PO// 주장에는 자기 실천이 선행되어야 설득력이 있는 것임. 그리고 
                           집적기를 반대하는 것부터가 에러.
C3PO               JG2// 그렇긴 한데,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경쟁을 중시하는 합리주
                           의자들이라면, 스스로 경쟁에 도태될 행동을 택할 것 같진 않은데. 그리 
                           일관성 없는 행동은 아닌 듯.
Pineapple        집적기 반대하는 것부터가 에러2.
C3PO               뭐, 집적기가 분명히 좋은 효과를 가져오긴 했고 나도 딱히 그걸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집적기로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 입장에선 좀 그렇지 않
                           을까도 싶은데…… 수능파동 때 집적기를 쓰지 않은 학생들도 그렇고.
JG2                  하지만 지금처럼 모두가 집적기를 쓰는 상황에서는 결국 모두가 똑같은 
                           출발점을 갖는 거잖아?
Holyfield          빨갱이 새끼들.
C3PO            JG2// 흠. 그런가?
bicentenial         아, ㅅㅂ 어려워. 어쨌든 난 계속 쓸 거임.
Pineapple        ㄴ 중딩은 꺼져. 그리고 중간에 n 두 개야.
bicentenial         ㄴ 님부터 꺼지삼.
Athlon9G          나도 부분적으로는 집적기를 좀 신중히 봐야 한다고 생각해. 사회 변화
                           라는 것이 단순한 게 아니잖아. 변수도 많고. 지금은 좋은 점만 보여도 나
                           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고.
bicentennial       솔까말 여기서 주절주절 떠드는 사람 중에 집적기 안 쓸 사람 있음?


 


 


#12 위키피디아 코리아 검색자료: 야구 파동과 수능 파동.

야구 파동(野球 波動)


 2015년 말. 대한민국에서 야구 경기에서의 행운집적기 사용 때문에 벌어진 행운에 대한 사회적 논란. '행운집적기 파동' 의 대표적 사례 중의 하나이다. '수능 파동'과 함께 행운집적기의 사용 효과에 대한 대중적 인지의 기폭제가 되었다.

 2015년 9월 30일. 한 프로야구 팬이 2015년 시즌의 통계 결과를 추려 각 선수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각 선수의 행운집적기 사용 흔적을 사진들에서 추려냄으로써 이를 인터넷에 올렸다. (<U>원문보기</U>). 처음, 야구팬들만을 중심으로 떠돌던 이 이야기는 이후 사회적 격론을 일으켰는데, 중요한 쟁점은 '그것이 과연 행운집적기에 의한 효과인가?'와 '기존에 이미 징크스가 많던 스포츠 경기에서 행운집적기의 사용을 그르다 할 수 있는 것인가?'였다. 당시에는 행운집적기와 야구 성적의 유의적 상관관계를 밝혀낼 만한 통계학적 발전이 이뤄지지 않아 행운집적기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고가의 부적 상품'에 가까웠고, 결국 이 격론은 야구 선수들이 사용하는 부적이나 경기 날 착용하는 부인들의 속옷과 다를 것이 없다는 KBO의 결론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로 행운 및 행운집적기 사용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야기됐다.

 이후 수능 파동에서 행운집적기가 유의적 통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밝혀졌지만, KBO는 "아직 명백히 밝혀진 것이 아니며 소문에 의거해 한번 정한 원칙을 손쉽게 철회할 수는 없다"며 기존의 방침을 고수하였다.


 


 


수능 파동(修能 波動)

 2015년 말. 대입 수학능력고사에서 강남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불합리한 성적 변동'이 제기되며 벌어진 사회적 논란. '행운집적기 파동'의 대표적 사례.

 주로 수험생들의 온라인 상 네트워크를 통해 '수능에서 평소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많다. 이 학생들은 대부분 행운집적기를 사용한 학생들.'이라는 소문이 번져나가며 사회적 공론이 형성되자 교육과학기술부는 강남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고등학교 3년간의 모의고사 성적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개별 학생의 행운집적기의 사용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할만한 성적 변동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대규모적인 부정이 이뤄진 것이 아닌가에 대한 대대적 조사에 돌입. 조사 과정에서 성적 변동이 컸던 많은 강남권 수험생들 대부분이 행운집적기를 사용하였음이 밝혀졌는데, 이 수능 파동은 야구 파동으로 대중에 심어진 믿음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능 파동의 중요한 쟁점은 기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고가의 행운집적기라는 장벽에 의해 행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13 어느 카페에서:

 "커피 맛이 내게는 좀 쓴 데." 상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책 옆으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차라리 다른 걸 주문할 걸 그랬나 봐."

 "넌 어떻게 몇 년을 그렇게 한결 같니? 그러게 평소 문화생활을 좀 했어야지. 난 너희 학교 근처의 커피숍이라 네 맛과 취향이 등록되어 있을 줄 알았지 뭐야. 요즘 세상에 커피 안 마시는 인간이 어디 있어?"

 마주 앉은 영선은 핀잔과 함께 그의 앞으로 크림과 설탕을 밀어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흘긋 상대의 주머니에 꽂힌 행운집적기에 가 있었다.


 


 "스위치를 켜두지 않았네?"

 "깜빡깜빡한다니까. 이걸 켜뒀으면 첫 주문이라 해도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택했겠지?"

 "그야 알 수 없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영선을 보며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차피 갈래를 지나 지나간 일인가."

 "갈래?"

 "말 그대로. 선택의 갈래. 나에게 속한 수많은 빈위 중의 선택적인 발현이지. 다른 선택안과는 결코 겹쳐질 수 없는. 그리하여 되돌릴 수 없는." 작고 긴 행운집적기를 꺼낸 그는 스위치를 켜고서 다시 주머니에 꽂아두었다. "아무튼, 이 물건 참 신통방통한 물건이야."

 "그래 신통방통한지도 6년이 넘었지. 이젠 뭐가 발견되거나 발명되어도 다들 그러려니 할 정도잖아. 아무도 신기하게 생각 안 해."

 "너도?"

 "나도."

 영선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상현이 입술을 말아 올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행운집적기라는 거. 정말 간단한 물건이 아닌데."

 "칭찬으로 듣는다?"

 "뭐, 칭찬이긴 칭찬이지. 네가 받았던 성과급만으로 칭찬이 부족했다면 기꺼이."

 영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업 연구소에서 WoF를 개발하고 야구 파동에, 수능 파동에……. 중국산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야 세월 좋았지. 그녀는 공연히 심술궂게 퉁을 놓았다.

 "하긴, 집적기 덕분에 너 같은 인문학자들도 밥 먹고 사는 거 아니겠니?"

 "통계학자들이 그렇게들 말하니 아마 맞는 말일 거야."

 상현은 자신의 잔에 크림과 설탕을 부었다.

 "헌데, 내가 생각하는 집적기의 놀라운 점은 나 같은 인문학자들도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든 일 뿐만이 아니야. 행운집적기는 일종의 부활장치였거든."

 뭔 시답잖은 얘기를 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려고 날 불러낸 거니? 그러나 영선은 얘기를 재촉하듯 슬며시 웃으며 상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얘기해봐."

 "보편적 가치의 부활. 그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소피스트들의 사조 속에서도 굳건히 토대를 마련한 거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적 권위를 얻었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토머스 홉스에게 도전을 받았고 니체와 프로이트의 경시를 받으며 비트겐슈타인에게 일침을 맞았어. 물론,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같은 대가들의 열변에도 이 세상은 착실히 보편적 진리와 가치를 대체로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렀고."

 "한국어로."

 "그래. 결론을 말하자면 행운집적기는 정해진 가치를 구분하고 있다는 거야. 우리가 이 집적기를 켰을 때, 이 장치는 그 사람에게 호의적인 결과에 일조해. 그 사람에게 있어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가치가 구분되는 거고 사회의 차원에서는 대승적으로 평등이라는 가치를 구분해내는 거지. 난 화학자는 아니지만 기존의 원소들이라는 것이 가치판단적인 물질이었니? 원소에는 가치를 판단할 뇌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들에게 가치가 있다면 플러스와 마이너스뿐일 걸?"

 말을 거드는 영선의 추임새에 상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헌데 아니었어. 126번 원소를 봐.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있다는 탑쿼크라던가 그 작용이 일으키는 조화는 잘 몰라. 하지만, 이 원소가 뚜렷한 가치의 질서 안에서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는 건 알지. 2012년의 발견은 원희선 연구원의 노벨상 수상 연설대로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버린 셈이야. 여전히 상대성은 존재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의 회의주의에는 금이 가버렸다고. 그리고 난 여기에서 작은 불안을 느껴."

 "이를테면?"

 "아주 간단한 얘기야."

 상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의 표지를 톡톡 두들겼다. 저자의 명성 덕에 베스트셀러가 된 『트리알츠의 연금술사』였다.

 "인류가 찾은 126번 원소, 탑쿼크라는 제 6의 쿼크를 지닌 이 원소가 인간의 가치로 판단할 수 있는 '행운'이라면, 이 세상에는 인류가 찾아낼 수 있는 '불행'이나 '운명' 따위의 다른 가치 역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그 모두가 이 원소를 아우르는 미리 예정된 질서이자 운명은 아닐까? 우연인 행운도 이제는 필연이 되고 말았잖아. 126번 원소 속에 자리 잡은 수많은 빈위들은 이미 예정된 질서에 따라 그들을 행운과 평등으로 이끌어내는 것일지 몰라. 덕분에 불가지론자인 나로서는 그간의 불경함으로 더욱 불안해지고 마는 것이고."


 


 


#14 - 『트리알츠의 연금술사』 미공개 설정집 中:

 동위원소


 라인슈타인의 단자 이론이 널리 알려진 후, 화학이라는 신학문은 트리알츠에서 형이상학적 논리와 결합한 채 연구되고 정리되었다. 연금술사들과 마법사들은 화학적인 원리나 세상을 관통하는 힘을 빌려 상당히 많은 물질적 원소들과 비물질적 원소들을 구분해냈는데, 이들이 정리하던 주기율표가 뜻밖에 큰 변화를 맞은 것은 종교 국가인 렐릭스의 한 신학자가 비밀스런 연구를 통해 '동위원소'의 개념을 발표하면서였다.


 


 동위원소가 존재하는 이유는 렐릭스에서는 명확했고 트리알츠에서는 불명확했다. 렐릭스의 신학자들은 동위원소의 존재를 슐레리 신이 세운 복잡하고 오묘한 질서를 완성하기 위한 규칙 가운데 하나로 보았지만, 트리알츠의 키미스트들은 동위원소가 존재하는 이유를 현재의 지식수준으로 밝혀내는 것이 무리라고 보았다. 표면적으로 이 관점의 차이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렐릭스의 신학자들이었다.

 슐레리 신이 세운 질서에 의해, 세상의 모든 원소의 질량은 가장 가벼운 첫 원소를 기준으로 정수로 증가해야 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믿음이었고, 이는 과거 트리알츠의 키미스트들이 주기율표를 작성하여 뭉개어 놓은 바 있었다. - 그들의 주기율표상에서 정수적인 질량 증가는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개념하에 서로 다른 칸에 놓여있던 동위 원소들이 하나의 칸으로 모여들자 결과적으로는 슐레릭 신학자들의 믿음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들이 더불어 발견한 것은 대개 한 원소의 동위원소들이 자연상태에서 일정한 비율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으며, 이러한 규칙들은 물론 비물질적 원소들에도 동일하게 통용되고 있었다. 결국 세상은 사유로 접근할 수 있는 정교한 질서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15 - '대체로 행운':

 늦은 시각. 상현은 불콰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그의 입에서는 잔뜩 술 냄새가 풍겼다.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 밖으로 나서던 이웃의 젊은 여자는 상현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 집 안으로 돌아갔다. 평소에도 서먹서먹한 사이였지만 늘 차분하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이웃집 여자를 더욱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행운집적기를 착용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상현의 상의 주머니 안에서는 집적기의 전원등이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다. 물론, 전원이 꺼져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집적기가 발전시킨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시스템 덕인지, 일반의 믿음과는 달리 잠시간의 미사용으로 돌이킬 수 없는 파탄과 불행을 겪는 일은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상현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곤 웃었다. 두 달치 월급의 가치를 지닌 작은 상자가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던져진다. 신발을 벗은 그는 비척이며 거실의 컴퓨터로 다가섰고, 전자 반지를 착용한 뒤 검지를 곧게 펴 흔들었다. 컴퓨터의 부팅 신호. 공학 기술의 발달로 부팅은 1.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 든 아버지도, 상현 자신도 가끔씩 감탄하는 일이다.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며 알림 벨이 울렸다. 모니터 상단의 홀로그램 투사 장치는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들을 출력했다. 가장 최근 메시지는 동생이 두어 시간 전에 남긴 것이었다.

 '형, 프러포즈는 잘 됐어? (from 박상진)'

 잘 됐느냐고? 상현은 주저 없이 삭제 명령을 내리고는 인터넷의 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 외롭게 표류하던 해파리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포스트의 제목은 '우리는 신께서 예정하신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그의 긴 뜰채가 좀처럼 사람의 관심을 못 받던 이 불쌍한 해파리를 건져 올린다.

 지금의 시대에는 종말론도 종교도 모두 낡은 것이 되어 있었다. 어디 인문학 강좌에서나 찾아볼 법한 그런 얘기들. 관심을 둘 이가 많진 않을 것이다. 상현으로 말하자면 최근부터 보편적 진리에 대해 의심을 시작한 인문학자였지만 - 어찌 되었건 그는 여전히 불가지론자였다. 더욱이 종말에 관한 얘기는 그 자체로 불쾌하고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울적한 기분이 그의 관심을 집요하게 끌어당겼고, 그는 어느덧 정신을 다잡고 포스팅 된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인류의 선택 이래로 준비된 거예요.

 처음은 에덴동산의 선악과였지요. 뱀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이브는 지혜의 과실을 취했어요.

 그리고 트로이의 사과가 찾아왔어요. 파리스와 헬렌을 이어준 이 로맨틱한 사과는 고대 역사에서 가장 크고 끔찍한 전쟁을 유발했습니다.

 세 번째는 뉴턴의 사과. 뉴턴은 독실한 신자였고 평생에 걸쳐 계시록의 종말 일을 계산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밝혀낸 인력의 원리는 천체의 운행뿐만이 아니라 분자와 원자를 해명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어요. 사실 만유인력의 바탕을 제공한 케플러부터가 신의 질서를 찾아 헤매던 독실한 신자였지요.

 네 번째는 원희선 연구원의 사과입니다. 그가 발견하고 규명한 126번 원소. 혹은 단자. 헌데, 단자론의 라이프니츠 역시 독실한 신자였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의 단자는 세상이 신의 질서 아래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도구였대요.

 이제 보세요.

 행운집적기로 인해 사람들은 종교와 신앙을 멀리하지요. 이건 아이러니에요. 오히려 행운집적기가 그 분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우연은 사라지고 운명과 질서가 자리를 잡았지요. 이제 저는 신께서 실재하심을 믿습니다. 행운집적기로 이제 세상에는 주님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운행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지혜의 과실을 취한 이래 시작된 거예요. 유대인이 수천 년간 광야를 떠돌았듯, 인류는 에덴에서 추방되어 지금까지 광야를 떠돌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셨고 언젠가는 광야를 떠도는 고통을 거두리라 약조하셨어요. 우리에게 짊어진 무거운 원죄를 거두고 우리 인류의 안식을 약속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를 위한 매 과정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원죄를 기억하라며 늘 사과를 곁에 두셨습니다.

 인류는 큰 전쟁을 배웠습니다. 사라예보의 총탄 하나는 복습의 효과를 낳았고, 그 전쟁의 결과는 다시 보다 큰 전쟁을 낳았죠. 그로인해 원자의 이용법 개발이 가속화 되었고, 그렇게 발전한 기술은 126번 원소의 발견을 낳았으며, 126번 원소의 발견은 행운집적기를 탄생시켰고……. 그리하여 행운집적기는 우리를 주님의 질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삶으로 밀어 넣고 말았지요.

 여러분은 마야의 달력이 2012년에 끝난다는 것을 아시나요? 2012년은 126번 원소가 발견되고 화학적 성질이 규명된 해입니다. 우리 인류가 신에게 마지막 한 걸음을 다가선 바로 그 해이지요. 이 모든 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녀요. 이 모든 건 주님이 세우신 정교한 계획이었던 겁니다. 2012년 이래로 인류는 예정된 운명을,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지요!

 내일에 당장 우리의 역사가 끝난다 할지라도 놀라지 않으렵니다. 저는 그저 조용히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어요.」

 포스팅 된 글의 조회 수나 평균 조회 시간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읽은 이도 얼마 없었을 뿐더러 개중에 이 두서 없는 글을 끝까지 읽은 사람 또한 드물다는 뜻이었다. 이를 반증하듯 포스트에는 세 개의 댓글만이 초라하게 달려있었다.

urka             이 시대에도 여전히 개독은 답이 없네요. 열심히 사과 농사나 지으세요.
HAL              재미있네. 아포칼립스 소설인가? 다음 편은 어디 있음? ㅋㅋ
hobit            인간이 사라지는 게 지구의 입장에서는 행운일지도 모르지요. 멸망이 온다 
                    해도 여전히 신이 아니라 행운집적기의 힘인 것 같아요.

 비아냥거림 혹은 시니컬한 댓글들을 읽으며 상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행운집적기가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이라고 이리들 요란 법석인가. - '신통방통한 물건'이라던 오후의 평가는, 그가 행운집적기를 켜둔 채 영선에게 프러포즈를 하던 그 시점에까지만 유효한 것이었다.

 영선이 조그만 상자를 앞에 둔 채, 동그랗게 토끼 눈을 하고는 말없이 앉아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끔찍한 침묵과 기다림 속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126번 원소에게 뚜렷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있어 포스트 모더니즘의 회의주의에 금이 가고, 예정된 운명의 그림자가 세상에 드리운다는 네 얘기가 내게 결혼을 해달라는 이야기로 귀결되어 놀랐어."

 차분한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은 반지함의 뚜껑을 닫았다. 반지 함이 상현의 앞으로 돌아왔다.

 "아직 난 결혼 같은 걸 생각해본 적이 없고 널 상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어. 물론, 좀 더 생각은 해볼게. 하지만, 거절로 알아둬도 무관할 거야."

 차라리 행운집적기를 꺼놓은 채로 프러포즈를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여전히 그녀는 거절했을까? 과거로 돌아가 볼 길은 없었고 다른 선택을 생각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그는 이미 갈래를 지나쳤고 상현의 프러포즈라는 빈위와 영선의 거절이라는 빈위는 서로에게 맞물려 발현된 후였다. 무엇보다 행운집적기를 껐을 때의 결과가 켰을 때의 그것보다 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 일이 결국엔 다 이런 식이겠지. 그 잘난 지니계수는 0으로 치달을지언정 평생 0이 될 일은 없을 것이고, 승률이 1:1이 된들 어차피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는 거야. 결국, 집적기는 '대체로 다행'인 것일 뿐, '언제나 다행'인 것은 아닌 셈이지. 사람의 의식 구조는 바뀌지도 않았는데 뭐가 진정한 혁명이람. 슈뢰딩거가 상자 속에 가둔 고양이는 집적기 덕분에 대부분 살아남겠지만, 여전히 죽은 녀석은 존재할 걸? 나만 봐도 그래. 난 0이 될 수 없는 지니계수이고, 1:1 승률의 패자이며, 자신을 사고한 슈뢰딩거에게 원망 어린 눈길을 비추는, 한 마리 죽은 고양일 뿐이잖아! 행운집적기의 시대에도 여전히 야누스의 반면(半面)은 따라오는 거라고. 설마하니 내 집적기만 불행집적기라도 되는 거야?

 슬며시 취기가 다시 올라오자, 상현은 가만히 어질해지는 머리를 받쳤다. 뭐, 그래도 이게 예정된 질서라 한다면 거절당한 프러포즈에 위안이 될 수는 있겠네.

 그가 실연에 괴로워하는 사이, 저 네트워크 너머의 누군가는 차분히 이 글을 읽고서 네 번째 코멘트를 입력하고 있었다.


 


 


#16 - 2027년. 산업건설교통교육과학기술인적자원부의 제 3차관실.

 차관은 소파에 앉아 비서가 내온 차를 마시며 잠시 주어진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조금 후면 긴급면담을 청한 세 사람의 불청객이 찾아들 테지만, 겨우 10분을 기다린다 하여 이 평온한 세상이 멸망할 리는 없었다.


 


 그는 7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차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과거의 기준으로는 몹시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가난한 가정 형편과 멋진 성공담이 있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이도 차관은 몹시 행복했고 더불어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편하고 좋은 세상에, 달리 할 일도 많지 않은 고위 관료라니! 그에게 근심이 하나 있다면 그건 실업자로 지내는 아들 녀석 내외겠지만, 이런 자리에 있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고 덕분에 나이 또래보다 젊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마련이다.

 "노파심이예요, 아버지. 그리고 그까짓 일자리, 원하면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걸요."

 아들 녀석이 하던 말이다. 하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들 요즘 세상에 실업자가 무슨 대수람.

 찻잔이 비어갈 무렵, 비서가 인터폰으로 세 사람의 당도를 알렸다. 기계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건만, 발달한 음향 시스템 덕분에 오래전과 같은 냉랭함이나 차가운 느낌이 없었다. 세상은 사소한 부분까지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들어오라고 해."

 차관은 편안히 형상 기억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비서가 세 사람을 안내해 들어왔고 대신 빈 찻잔을 내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차관님." 찻잔을 대신한 세 관료가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소파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 긴급 면담을 청한 이유가 뭔가?"

 차관의 물음에 그들은 우선 소파 앞에 놓인 탁자의 작은 기계에 지문을 인식시켰다. 탁자의 유리판 디스플레이에 준비한 자료를 출력하려는 것이다. 차관은 유리판에 투사된 두 개의 보고서 표지를 살피며 말했다. 탁자의 유리판은 무광택 모드로 입자 전환을 한 후여서 밝은 조명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읽는데는 달리 불편함이 없었다.

 "아, 이 쪽의 연구 주제는 기억이 나는군. 제법 오래전 외부에 연구 용역을 맡기기로 했던 것이 아닌가? 겉치레 연구용이었지만."

 "맞습니다."

 "보고가 생각보다 많이 늦었는데?"

 연구 용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즈음이니 늦긴 많이 늦은 셈이다. 차관과 가까이 앉은 남자가 깍지 낀 손을 비볐다. 차관보다 나이는 조금 어렸지만 꽤나 유능한 사람이었고, 학술연구정책실의 실장직을 맡고 있던 이였다. 차관은 그에게 힐책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오해가 있을까 저어하며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는데, 주저하는 실장을 대신해 인문사회연구과의 김 과장이 답을 하였다.

 "전에도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만, 겉치레 연구라고는 해도 아시다시피 요즘은 용역을 의뢰할 의욕적인 연구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발주가 늦어졌고 결과 보고도 늦은 겁니다."

 그런 보고가 있었던가. 뭐, 아무려면 어떤가.

 "그래, 어디보자. 누가 연구를 맡은 건가? 결국 인목대의 정 교수가 연구를 맡았군. 이 사람은 나도 아네. 착실하고 깐깐한 사람이지. 이쪽 보고서는……. 이건 국원련에서 올라온 보고서로군? 제출일이 며칠 전인데. 이 두 보고서 간에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

 이에 실장이 제 두 손을 꼬옥하고 맞잡았다..

 "제자리가 두 보고서를 함께 접하는 자리지 않습니까, 차관님. 우연찮게 두 보고서의 제출 시기가 비슷해 연달아 읽던 차에 탐탁찮은 생각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탐탁찮은 생각이라?"

 2018년 이후로 그리 중대하거나 위급한 사안이 없었고 이런 자리에 있는 한은 앞으로도 그런 편이 나았다. 때문에 차관의 기분이 공연히 불편해졌고, 관료 생활을 오래해 왔던 실장의 태도 또한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음, 우선 종합 보고서의 개괄을 읽어보시겠습니까?"

 사회 분야와 기초과학 분야의 보고서를 종합할 일이란 게 대관절 무엇인지. 차관은 실장이 신속히 테이블의 유리판 위로 출력한 종합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출력된 내용의 첫 문단을 넘기기도 전에 차관의 입에서는 대뜸 탄성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국원련에서 코리듐 310 생성에 성공했나?"

 그러나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차관은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이런 심각한 표정들 하며! 누구 하나 이 놀랍고 멋진 보고에 기대감이나 기쁨을 드러내지 않는군.

 "이건 코리듐 312의 발견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잖은가? 이중마법 수의 원소를 찾아낸 것이 아닌가 말이야? 행운의 동위원소를……. 아니, 국원련의 제출 일자는 며칠 전인데 왜 이제야 보고하는 겐가!"

 닦달하는 듯한 차관의 태도에 실장은 눈치만 살피며 안절부절했다. 김 과장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개괄을 마저 읽어보십시오, 차관님."

 언뜻 불경하게 들리는 이 언사에 차관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강 부총리의 말마따나 요즘의 젊은 관료들은 부모의 품에서 자유분방하고 풍요롭게 자란 까닭인지, 좀처럼 위계질서라는 관료 사회의 중요한 미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요지부동하는 김 과장의 진지한 모습에 무어라 토를 달기도 모한지라 차관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탁자의 디스플레이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간의 침묵 후, 보고서의 개괄을 모두 읽은 차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코리듐 312의 역할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내용인가?"

 "그렇습니다."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김 과장의 보고부터 들어보십시오."

 김 과장이 실장의 말을 받아 재깍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제가 맡은 보고서는 올해 초에 의뢰했던, 2015년 이후의 실업률에 관한 연구 용역의 결과물입니다. 연구를 담당한 정 교수는 보고서에서 2015년 이후 실업률의 세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2020년을 기점으로 실업률이 유례없이 증가하고 있고, 둘째로는 20대와 30대의 실업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셋째로 자발적 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20년 이전과 비교해 유례없이 크다는 점입니다."

 김 과장이 탁자의 유리판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움직이자 관련된 통계 자료들이 출력되었다. 차관은 자료들을 살피며 과장의 이어지는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정 교수는 이런 높은 실업률 가운데도 지니계수가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산업 전반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루고 있음을 함께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

 "그건 사회 일반에서도 인식하고 있는 바가 아닌가?" 차관은 복수를 하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행운집적기가 사회 보장제도를 강화시켜 실업급여로도 별 차이 없이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으니 자발적 실업률이 높은 것이고, 그럼에도 산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집적기로 말미암은 기술 발달로 인력이 많이 필요치 않은 까닭이지. 이십 대와 삼십 대의 실업률이 유독 높은 건, 집적기의 과도기 이전을 살아온 사십대 이후와는 직업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고 말일세. 우리가 이 연구 용역을 겉치레라고 한 것도 모두가 대강 다 아는 내용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일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나?"

 당장 스스로도 그런 아들이 있는 차관이었다. 이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별 위험한 내용이 아닌 듯 했을뿐더러 심지어는 일말의 감명조차 받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습니다, 차관님.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다음 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장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긴장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 교수는 아직 유의할만한 수준의 통계 근거가 나오진 않았지만, 이런 산업 전반의 성장률이 한계적으로 차감되는 징조가 있는 듯 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있는 듯하다.'고? 설마하니 정 교수 같은 사람이 그런 식의 보고서를 썼다는 것인가.

 "그 애매모호한 말은 뭔가? 게다가 통계적 근거가 없다면 그건 그저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가 아닌가?"

 "그래서 정 교수도 별도로 언급을 해둔 것 같습니다."

 차관이 그 점을 지적하고 나서자 김 과장은 서둘러 해당 부분을 출력시켜 보여주었다. 차관은 그중 내용 일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음. '개인적으로는 행운집적기에 의한 사회 발전에 한계가 있거나 어떤 부작용이 있지 않을지 우려된다.', '나태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이건 차라리 십 년 전에나 벌어졌던 케케묵은 논쟁 같은데!"

 그러자 실장이 슬쩍 자신의 이마에 손을 비볐다.

 "그런데 차관님. 이번에는 문제가 좀 다릅니다."

 실장이 탁자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려들자 눈길을 받은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대 후반 즈음의 이 여성은 - 차관의 신통찮은 기억이 맞는다면 - 공채를 통해 임용된 미래원천기술과장이었다.

 "차관님, 이것은 국원련에서 올라온 코리듐 310 관련 항목입니다. 보고서에 적혀있듯 코리듐 310은 원자 가속기에서 생성된 것이 아닙니다."

 "가속기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다?"

 "네, 주기적으로 관찰하던 행운집적기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기술과장은 다소곳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답했다.

 "아시다시피 동위원소 간의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까닭이지요. 행운집적기에 코리듐 312와 함께 집적된 겁니다. 지금까지 코리듐 310의 자연적 존재 여부 자체가 불확실했는데, 코리듐 312처럼 우주선(線)을 통해 생성되어 극미량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럼 우리 집적기에 이미 코리듐 310이 함께 집적되고 있었단 얘기로군. 어떻게 지금까지 그걸 모를 수가 있었나?"

 "말씀드렸다시피 코리듐 312에 비해 대단히 적은 양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원련에서는 코리듐 310이 312와 1대 10억 이하의 비율로 존재하고 있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100억 이하일지도 모르죠."

 그리고 실장이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코리듐 310의 반감기입니다. 반감기가 길다보니 상대적으로 생멸주기가 빠른 312에 비해 누적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세계에 존재하는 집적기의 수나 집적되는 행운 원소의 양을 따져보면 확률적으로는 미약한 수준에 지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310이 집적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건가? 혹시 행운의 동위원소라면 그 성질도 비슷하진 않을까? 반감기가 긴 행운 원소라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을텐데."

 이에 다시 기술과장이 나섰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하지만 우라늄만 봐도 중성자 세 개 차이로 활용 폭이 달라져요. 기존 원소와 개념이 다른 코리듐이라면 310과 312의 차이가 무시 못할 수준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왠지 오싹한 말이었다. 차관은 마음을 추스르며 점차 복잡해지는 보고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 일은 그저 가능성을 제기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제 3차관직을 맡은 이래 집적기가 이룬 안정된 사회에서 겪게 된 가장 중대하고 위급한 문제인 셈이었다. 그에겐 이런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는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음. 여보게, 실장. 설마, 한계차감적인 발전의 징조니 나태의 만연이니 하는 입증되지도 않은 문제들이, 마찬가지로 입증되지 않은 310의 성질이 원인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겐가? 그건 근거가 없을 뿐더러 단지 행운 자체의 영향일 수도 있잖은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한계차감적 발전이나 나태의 만연을 규명할 충분한 연구가 이뤄질 환경이 아닙니다. 특히, 문명사회의 사람들이 누구나 행운집적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큰 문제이지요. 결국 집적기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 하나도 전 인류에 파급될 수 있다는 얘기잖습니까? 물론, 310의 양이 적어 연구의 가능성 자체가 불분명하긴 합니다만, 어찌되었건 정식 보고나 일반에의 발표 전, 관련된 연구의 진행이 필요하진 않을지 차관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제 아래 과장들도 동의를 하더군요."

 차관은 말없이 탁자를 내려보았다. 실장은 이마에 손을 비볐고, 다소곳이 앉은 기술과장과 인문사회과장은 그런 차관과 실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차관이 고개를 들고 실장에게 물었다.

 "만약에 말일세. 연구를 진행하게 되어 코리듐 310이 312와는 성질이 전혀 다르고, 썩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말이야. 아니면 설령 입증을 하지 못한 채로 남는다 해도. 지금 우리의 기술로 집적기에서 성질이 불분명한 동위원소들을 배제하는 방법은 없겠나?"

 기술 과장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그 부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학계 종사자들에게 문의해보았습니다. 해당 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응용한 집적과 원소를 분리하는 기술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 하더군요. 집적기 덕분에 많은 과학적, 공학적 발견과 발명이 있었지만, 아직 동위원소의 분리 기술은 개인이 휴대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시키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행운집적기를 금지하는 방법은 가능한 건가?"

 이쯤 되면 그들의 소관이 아니겠지만, 인문사회과장은 이미 생각해본 것이 있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차관에게 답했다.

 "만약 연구를 진행한다면 310에 관한 다양한 경우의 대응 시나리오를 작성하며 고려될 사항일 겁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결과에 부정적입니다. 2020년 이후로는 개인이 행운집적기를 제작하는 사례도 적잖습니다. 필수재로 분류된, 간단한 제작 원리의 물품을 통제하는 일이 결코 쉽진 않을 겁니다."

 "흠." 차관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생각을 좀 해봐야 할 일인 것 같군. 당장 나부터가 확신이 서질 않는데 이렇다 할 근거도 없이 연구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예산을 편성하기란 쉽지 않네. 제대로 된 보고서가 선결되어야 해."

 이어지는 대화는 지지부진했지만 그는 결국 세 사람에게 관련 연구 진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라 지시를 내렸다. 실장과 과장들이 무거운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선 뒤, 차관은 무거운 표정으로 창가에 섰다. 만약 코리듐 310이 생각보다 불량한 원소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내 아들자식 실업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건가?

 고개를 흔들던 그의 시선이 행운집적기에 닿았다. 초록색 전원 램프는 도깨비불이라도 된마냥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관은 책상으로 다가가 장치의 전원을 내렸지만, 우울하고 섬뜩한 기분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17 2030년 8월 22일. 네트워크 뉴스 종합.


 



행운집적기 금지 법안 국회 부결. (제2보)

"(서울=연합언론) 정민욱 기자 = 국회 사무처 공보관은 이날 오전 본회의에 상정된 "행운집적기 금지 법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음을 밝혔다. 이 법안은 입법 예고 후 지난 한 달간 전국민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켜왔다. 집권 여당인 한국공화당은 부결 후 대변인 성명을 통해…"

 행운집적기 금지 법안 국회 부결 (제1보)
 행운집적기 금지 법안 반대 촛불 시위. 오늘로 30일째.
 코리듐 310에 관한 산업건설교통교육과학기술부 내부 문건 공개.
 [과학칼럼] 코리듐 310은 무엇인가?


<SPAN style="FONT-SIZE: 100%; COLOR: #333399">[이슈] 한국공화당, 법안 제출한 고현진 국회의원에 탈당 권유.
[경제] IMF, "사상 최대 실업률 불구 한국 경제 성장률 6.6% 전망."
[경제] KDI "2030년에도 지니계수는 여전히 감소. 경제 문제 없다."
[국제] 아프가니스탄의 중소기업에서 3세대 수소전지 개발 성공.
</SPAN>


 


 


#18 2030년 8월 29일. 코리안 시사 웹진의 인터뷰 기사 中

(2030년 9월자 코리안 시사 웹진의 고현진 의원 인터뷰 기사에서 몇 가지 문답을 정리해보았다. 코리안 시사 웹진에 연결하면 전체 인터뷰를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최근 한국공화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의원이 되셨습니다. 당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서운한 감정이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진즉에 각오한 일이라 원망이 크진 않습니다. 행운집적기 금지 법안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은 0.5%에도 미치지 못했고, 행운집적기 금지 법안에 대한 공식적인 당론도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애당초 본회의에 상정된 것을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부결이 뻔한 법안을 상정하는 것은 정치적 쇼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95% 이상의 국민과 등을 돌릴 정치적 선택을 할 정치인은 없습니다. 정치적 쇼라기보다는 정치적 자살이라 불러야지요. 제가 본회의에 이 안건을 상정한 것은 행운집적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건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제 소신의 선택이었어요.

 그렇다면, 의원님께서도 기본적으로는 행운집적기의 금지 법안에는 반대하신다는 뜻입니까?
 (고 의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반대를 하면서 상정을 했을 리가 있습니까? 전 금지 법안에 기본적으로 찬성합니다. 우리 사회는 분명히 정체하고 있습니다. 자발적인 장기 실업률에서 보듯 나태가 만연했고, 성장률은 차후 감소할 겁니다. 지금의 높은 성장률이 간신히 지탱되어온 것은 연장된 평균 수명 덕분에 경제 활동에 대한 관념이 투철한 고령 인구 비율의 감소 속도가 느렸던 덕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일부 연구 결과에서는 성장률의 극적인 감소에도 플러스 성장을 지속할 것이며, 마이너스 성장과 같은 퇴보는 없을 거라 말합니다.
 인류에게는 정체가 곧 퇴보 아닙니까?

…(중략)…

 행운집적기의 혁명이 실패했다는 기고문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주로 저나 제 의견을 싫어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회자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기고한 글에서 인류의 중요한 본성들이 변화하지 않았으므로 혁명은 실패했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반대로 행운집적기가 인간의 불필요한 경쟁욕구를 제거하고 모두가 공화 발전하는 무혈의 혁명을 이룩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는 잠시 웃었다.) 불필요한 경쟁욕구라. 전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경쟁욕구란 정말로 불필요한 것인지 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기르는 개와 고양이를 생각해봅시다. 개들은 때때로 시끄럽게 짖어대고, 고양이는 발정이 나면 여럿이 모여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의 생식능력이나 발성능력을 제거하지요. 이것이 우리 인간에겐 일종의 악덕인 까닭인데, 정말로 그러한가요? 그것이 두 종을 특징짓는 하나의 개성이진 않겠습니까? (그가 말을 쉬었으므로 기자가 다음 질문을 꺼내려 했지만, 그는 기자를 만류하고서 말을 이었다.)

 경쟁이 제거된 자리에 남은 게 뭡니까? 경쟁은 반만 제거되었어요. 남들보다 나아지고 싶다는 그 발전적 경쟁의 욕구만 제거되었다고요. 물론, 남은 것을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럼 남은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경쟁에의 욕구라 착각하는 질투심이지요. 남들이 나보다 나아져선 안 된다는 그 천박한 감정 말입니다. 그건 경쟁도 평등도 아니에요. 행운집적기가 아직 수정하지 못한 인간의 탐욕스런 본성입니다.

 물론, 한 개의 불행 때문에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999,999,999개의 행운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국민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집적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저변에는 저 질투심도 있는 겁니다. 집적기를 실질적으로 금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만에 하나라도 사용을 하지 못하게 되면 사용을 하는 사람보다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거죠. 당연히 사용을 하는 사람은 부당하게 더 큰 이익을 보는 것이고. 이건 경제학의 오래된 이론에도 있어요. 게임이론이라는 것이죠. 서로 격리되어 심문을 받는 두 사람의 공모자가, 함께 범행을 부인하면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옴에도 자신에게만 유리한 이기적 선택을 하여 함께 가장 나쁜 결과를 낸다는 것이지요.

 헌데, 행운집적기가 가져온 상황은 더욱 안 좋아요. 그나마 합의가 된다고 해도 과거의 불합리한 경쟁으로 회귀하기는커녕, 과거보다 더 불합리한 경쟁 상태에 처할 가능성만 커지는 거지요. 일부만 집적기를 사용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2015년 수능 파동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중략)…

 혹자는 의원님의 걱정을 기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 개의 불행을 피하고자 수많은 행운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설령 불행이 축적되어 여파가 커진다 할지라도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굳이 그것을 포기해야 할 의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유토피아에 접근하고 있고 유토피아에 이르러 정체하는 것은 완성을 달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인가요? 그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완성은 마치 고전 경제학의 균형점 도달과 비슷한 것 같군요. 헌데, 고전 경제학에서의 균형점이라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적일 뿐입니다. 인류는 조건과 상황을 개선할 능력이 있지요. 그런데 행운집적기로 급속히 균형점에 도달하고 이만하면 충분하다 말한다면…….

 우리의 과거를 봅시다. 행운이라는 것은 그저 우연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이 집적기라는 물건이 변수로도 취급되지 않던 것을 필연적이고 기본적인 상수로 바꿔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집적기에 매여 버렸습니다.

 도대체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디에 갔답니까? 요즘 사람들은 집적기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허파로 숨을 쉬는 것처럼 집적기를 사용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란 말이지요! 게다가 뭔가를 이룩하면 집적기가 이룩한 것이고, 뭔가 좋은 선택을 하면 집적기의 도움이지요. 모든 것은 신의 역사이고, 신의 도움이다! 여기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집적기로 바꿔 보십시오. 기껏 르네상스네! 종교개혁이네. 절대적 초월자와 맹신으로부터 어렵게 벗어난 인류가 이제는 집적기로 눈을 가리고 암흑에 뛰어들겠다는 겁니까? 자신을 예정된 운명에 맡기겠다고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던 그는 여기에서 말을 멈추고 물을 마셨다.)

 흠, 감정이 격해져 비유가 좀 지나쳤던 것 같군요.

 인터뷰 시간이 거의 다 된 듯한데 합리성에 대한 물음에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일정에 여유가 없어서요.

 인간의 나태와 질투 때문인지. 혹은 두 원소의 성질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그저 제가 비관적인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다수의 행운을 하나의 불행이 압도하는 듯이 보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상황과 통계 수치들은 정체에 가까운 느릿한 발전을 예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참으로 고약한 일이지요. 그게 혹은 멸망이 아닐런지.

 때문에, 사람들이 집적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법안도 부결되었지만, 경고는 해야겠습니다.

 끝없는 이기심과 경쟁에의 욕구, 불평등의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사자는 괴물을 피해 나긋나긋한 유토피아로 달아났지요. 거기에서는 이빨과 발톱이 필요 없어 사자는 그걸 다 뽑아버렸답니다. 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살육본능과 이기심이 남아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고는 평화로운 삶에 안주한 마냥 바보같이. 행복하게. 그게 자신의 진정한 죽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사자는 기쁘게 미소를 짓고 있더군요.


 


 


#19 #15에서 이어지는 네 번째 코멘트:


 
JOB11:7(*)         글쎄요. 누가 신의 뜻을 알겠습니까? 어쩌면 신께서는 슬슬 다섯 번째 사
                          과를 던질 때라 생각하실는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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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온전히 알겠느냐? (욥기 11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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