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3.
샌드위치는 꽤 훌륭한 물건이었으나 음료수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애플 사이다는 너무 달아 혀가 아렸다. 어쨌든 배는 가득 찼고, 슬슬 잠이 왔다. 마침 두 사람이 엉덩이를 붙인 곳도 침대여서 유혹은 은근하면서 꾸준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준식이었다.

  "그런데 왜 왔어? 또 뭐 부탁할 거 있어?"
  "아냐. 믿을지 모르겠지만......"

순형은 모자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긁적거렸다.

  "나 사실 흥신소 소장 아니다. 난 마법사야. 그 왜 반지의 제왕 같은 데
  에서 나오는 직업 있잖아. 불도 쏘고, 사람도 저주하고."
  "아, 그랬군."

뭔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직업이 어딨냐고, 혹시 카드 알아맞히기나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마술사를 잘못 말한 게 아니냐고 따져야 할 것 같았다.
서른이나 된 남자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 갈 곳은 단 하나, 병원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순형은 의심할 필요 없는 마법사였다.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속에 한 번 자리 잡은 확신은 다른 생각을 모두 밀어 버렸다.
갑자기 송곳 같은 두통이 준식을 덮쳤다. 국지적, 국소적으로 몰아치는 두통이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욱씬거리는 왼쪽 머리의 통증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순형이 말했다.

  "마침 정체를 밝힌 김에 친구 소원 하나 들어주려고 찾아왔지. 마법사는
  거의 모든 걸 할 수 있거든. 괜찮겠지?"
  "응. 좋지. 뭔데?"
  "넌 한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어. 그 여자는 창녀야. 아름다운 창녀. 그
  런데 네가 요즘 경호하는 조직의 두목이 그녀를 눈독들이기 시작했어.
  놈은 상어 같은 작자여서 한번 물면 삼킬 때까지 놓지 않아. 고로 정말
  오랜만에 품은 감정은 물거품이 될 거야."

내 현재 동향하며, 일거리, 사랑의 마음 등 그걸 다 어떻게 아냐고 따져야 옳았
다. 그러나 뭐에 홀린 것처럼 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형이 하는 것은 뭐든지
당연했고, 응당 그가 그래야 할 일이었다.
두통. 두통. 점에서 면으로 번지는 두통. 평범한 두통이 아니라 누구에게 머리를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것 같은 거대한 해일. 생각을 침몰시키고 생존자마저 싸그리 먹어치우는 광란의 바다.
바다는 곧 머리를 집어삼키고 목덜미, 어깨, 등, 옆구리를 휘저었다. 온몸이 타는 듯했다.
동시에 준식은 무척 피곤했다. 하고 싶은 것은 죽은 듯이 잠자는 것. 몸에 경련이 일 때까지 꼼짝 않고 드러눕는 것.  

  "고로 해결책은 하나야. 두목도 죽이고, 그 근처에 얼쩡거리던 조직의 핵
  심 인원 전부를 죽이면 돼. 쉽지?"
  "응, 그래."
  "그런데 넌 그렇게 하기가 힘들어. 일반인이니까. 게다가 죄를 지으면 일
  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녀와 행복하게 살긴 글렀지. 하지만 친구가 좋다는
  게 뭐야. 내가 다 해 줄게."
  "정말?"
  "그럼. 자, 여기에 서명만 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한다."

순형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품속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펜도 함께. 문서는 빽빽한 세부 조항이 있는 물건이었다. 수십 개의 항이 있고,
그 항마다 또 다른 단서 조항들이 꼬리를 이었다. 대체 한 장에 어쩌자고 이렇게
깨알같이 글자를 박아넣었담? 준식은 한숨을 쉬고, 읽기를 포기했다. 순형은 마법사니까, 내 친구이니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두통 속에 언뜻 시계를 봤다. 시계는 어느새 12시를 가리켰다. 순형을 집으로 들였을 때가 확실친 않지만 여섯 시에서 10분 모자랐던 시간. 그러니까 대충 자신도 모르는 새 여섯 시간이나 가 있었다. ......설마. 시계가 고장난 모양이었다. 세상에 두 사람이 전혀 모르게 여섯 시간이나 갈 일은 없다.  
아니, 그것보다 아무리 악당이라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에 아무렇지 않게 동의하는 것부터가 비정상적이었다.  
이상한 것투성이었지만 어쨌든 준식은 펜을 집었다. 평범한 모나미 볼펜 같던 이 물건은 준식이 집자마자 꼬리 부분에서 날카로운 촉수가 솟았다. 촉수 끝에는 바늘이 달려 있었는데 이놈이 단박에 손등에 꽂혔다. 그리고 움찔거리더니 다시 들어갔다.
당연한 것처럼 볼펜에선 잉크 대신 그의 피가 나왔다.

  "묘한 물건이네."
  "미안, 아팠어?"
  "좀 따끔했어."

순형은 귀여운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으로 준식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깨를
두드렸다. 멋진 결단이었다는 말에 준식은 별로 힘든 일은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거사일은 오늘 저녁 7시였다. 순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준식이 속한 경호회사
사람들을 무조건 외부로 내몰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일 순 없잖아.“
  "그렇지."

준식은 그건 알아서 하겠노라고 장담했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순형의 말처럼 모두가 죽는다면 동료들은 그 뒤에 엄청난 조직이 숨어 있을 거라고 믿고, 그 조직과 연계가 있는 듯한 자신을 책망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목숨을 건진 데 감사를 표할지도 몰랐다.
순형은 오후 여섯 시 45분까지는 해산을 완료하라고 신신당부하고는 집을 나섰다. 준식은 그를 건성으로 배웅한 다음 서둘러 침대에 몸을 던졌다. 출근 알람을 맞춰 놓는 것을 잊을 정도로 수면 욕구는 저항하지 못할 만큼 급하게 다가왔다.
준식은 누운 지 10초 만에 잠들었다.



4.
여섯 시간 전. 즉 오전 다섯 시 50분.

  "나 사실 흥신소 소장 아니다. 난 마법사야. 그 왜 반지의 제왕 같은 데
  에서 나오는 직업 있잖아. 불도 쏘고, 사람도 저주하고."
  "엉? 사무소 때려치웠어? 왜? 그리고 마술 배운다고?"

마법사와 마술사는 다르고, 말투 자체도 원래의 직장을 부인하는 투였지만 준식
의 상식은 이 모든 차이를 무시했다. 그는 카드 마술, 사람 가르는 마술, 불 마술
등을 떠올렸다. 갑자기 뭐하려고 진로를 바꿨을까? 언제는 흥신소가 엿보기 취미
가 있는 자신에게 딱 맞는다고 시시덕거리던 놈이 말이다. 표정에서 읽었는지 순
형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마술사지. 훈련된 눈속임이야. 내가 말하는 마법은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기운이나 다른 차원의 주민들과 계약을 맺어 힘을
  빌리는 행위를 뜻해."

이건 또 무슨 소리?
일상생활에서는 절대로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에 준식은 깜짝 놀랐다.
준식은 깜짝 놀라 유치원에서 같은 여자애를 좋아하던 덕에 친해져 오늘까지 인연이 이어진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농담? 아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봐서는 그는 자신이 마법사임을 확신하고, 이를 알리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럼 미친 건가?
준식은 그가 근간에 정신이 돌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있었나 되짚어 보았다. 얼마 전 회에 소주를 먹으면서 중소기업 사장의 불륜을 조사한다고 했다. 그 전에는 삼류 연극배우의 불륜. 그 전에는......

  "못 믿나 본데."
  "아니, 아니."

어째야 하나.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준식은 30년 동안 살면서 이런 경우는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역시 30년 동안 한번도 겪지 못한 감정이었다.

  "휴우, 못 믿는 거야. 그렇지?"
  "아니, 그게."
  "하긴. 나 같아도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예전에 알고 있는 준식은 준식이
  아니고 다른 준식이 준식이라오.' 하고 말하면 믿어지지가 않을 거야."

말투 보면 미친놈은 아닌데.

  "좋아. 이럴 땐 그저 실증이 최고다, 그치? 백 번 말해 봐야 다 소용 없
  고 한 번 보여 주는 게 짱이지."
  "그렇겠지."
  "바로 이런 거야."

준식은 눈을 의심했다. 갑자기 순형의 키가 3미터, 아니 4미터 높아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아까의 붙임성 있는 얼굴에서 잔뜩 일그러져 비열하고, 음흉하고, 잔뜩 굶주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몸에서 무언가 부풀어 오르더니 가죽주머니에 급하게 바람이 들어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몸피가 잔뜩 커졌다. 순형은 옆으로, 옆으로 늘어났다.

  “세상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순형을 올려다보는 준식은 순식간에 서른 살의 건장한 경호원에서 허약하고, 어른의 호의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꼬마애가 된 기분이었다.  
이치를 따져서 순형이 키가 늘어났다면 천장에 닿아야 한다. 집에서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높이가 낮아서 불평불만하던 구조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순형을 따라 알아서 천장도 높아진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격무 후 피곤한 가운데 꾸는 백일몽 같은 거. 혼란스럽고, 어느 정도는 겁에 질린 준식의 마음을 아는지 순형이 크게 웃었다.

“새끼! 좀 쫄 만하지! 마법사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게 쉬운 게 아니야! 자! 일루 와!”

순형의 눈이 밤에 짐승에게서 보이는 듯한 빛을 뿜었다. 이어서 가죽이 크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애써 불린 몸피가 순식간에 뒤부터 찢어졌다. 아프지도 않는지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킬킬거렸다.
선풍기에 매단 형광 발처럼 가죽이 펄럭거리면서 뒤로 무언가를 쏟아내었다. 찢어지면서 튀어나온 것은 살점이나 피가 아니라 뜻밖에도 공간이었다. 공간은 처음엔 점처럼 튀어나와 하나씩 박히더니 나중에는 큰 조각들이 연거푸 쏟아졌다. 그것들이 하나하나 공중에 들러붙을 때마다 현실은 사라지고 어둠이, 비일상이 구체화되었다. 조각천 꿰매기 같던 변화는 곧 넓고, 어두운 언덕과 왼쪽에 군락을 이룬 물푸레나무숲이 보이는 광경으로 탈바꿈했다. 이 모든 것을 언덕 저편에 둥실 뜬 보름달이 비춰 주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순형의 뒤에는 4단 옷장의 2단 부분과 방문, 그리고 마루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준식은 시험 삼아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당장 등 뒤에는 침대와 커튼으로 한 번 거른 아침 햇살이 그대로였다.
준식은 무어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이젠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해도 말의 형태가 되지 못했다. 이미 상황은 그의 손을 떠난 후였다.
순형이 계속해서 음산하게 웃는 가운데, 물푸레나무숲에서 어두운 그림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여덟에서 멈춘 그 그림자들은 뺑글뺑글 돌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준식은 처음에 어린애들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들은 체구가 작은 이들이었다. 고깔모자와 간단한 형태의 조끼, 그리고 끝단이 헤어진 바지, 마무리로 긴 코가 인상적인 장화까지 모두가 같은 형태의 복장을 입은 집단이었다.
그들은 연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다가왔는데 밝은 달빛 가운데 그들의 옷 색깔이 녹색 일색임을 구별할 수 있는 거리, 즉 2미터 이내에 들어와서야 중얼거림이 노래인 것을 알아차렸다.

- 연회에 가려고 굴뚝을 타고 나왔어요.
   씹할 것, 씹할 것.
   우리는 춤을 춰요. 춤을 춰요.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그레이 스틸이 왔네.
   씹할 것. 대체 이번엔 뭘 가져가려나?
   저 새낀 죽지도 않아. 뒈지지도 않아.
   인간 세상에는 말이지. 전쟁이라는 게 있지 않았나?
   독살이라는 게 있지 않았나?
   좀 죽었으면 좋겠어.
   내장을 쏟고, 뇌수를 바닥에 뿌리면 기분이 좋을 텐데.

어린이의 키에 어른의 얼굴을 가진 그들은 표독스러운 태도로 노래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저 친구들을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지. 내 친구들, 엘프야.”
  “누가 친구야!”

여덟 명 중 유일하게 턱에 수염이 난 자가 소리쳤다. 처음으로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본 즉시 준식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절대로 일반적인 의미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몬드 형 눈은 눈썹 부분까지 치켜 올라갔다. 그런데 그 눈은 형광 녹색이었다. 흰자위가 전혀 없는 형광 녹색이 번뜩거리면서 준식과 순형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위압적인데 안면을 온통 일그러뜨린 상태에서 벌어진 입 안에는 영화 속 흡혈귀만큼 긴 송곳니가 있었다. 온통 치석과 치태가 껴서 누런 이빨이 송곳니만 빛나는 형국이었다.
순형이 말했다.

  “허어, 너무 박하게 굴지 마라. 내가 화나려고 그러잖아.”
  “......그래. 용건이 뭐야?”
  “내 친구에게 내가 마법사라는 걸 보여주려고.”
  “하, 그런 사소한.”

수염 엘프가 웃자 나머지도 따라 웃었다.

  “아, 맞다. 여기에 온 김에 저번에 맡긴 것 좀 물어보자. 다 됐냐?”

순형의 질문에 엘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서툰 거짓말을 그대로 드러냈다. 준식은 자신의 다섯 살짜리 조카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순형은 절망적인 태도로 고개를 저으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꼭 관을 봐야 곡을 하는 놈들이 있어요. 안 그러냐, 준식아?”
  “응? 아, 으응.”

준식은 그가 등을 돌린 사이 보게 된 광경에 정신을 팔려 신음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순형의 등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안에서는 어둡고 혼탁한 커피에 시럽을 쏟았을 때처럼 어두운 기포를 배경으로 하얀 기포 같은 것이 반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러나 암흑은 커피가 아니었고, 기포도 시럽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고 깊은 그 무엇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동굴보다 더욱 깊고, 음습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그 무엇도 믿는 법 없이, 사랑하는 법 없이 사는 곳. 억지로 눈을 떼기까지 준식은 무엇에 홀린 듯 30년 동안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불행과 슬픔을 떠올렸다. 29, 28, 27, 26세...... 1년씩 뒤로 돌아가는 이 여행에서 준식은 어느새 잊어버렸던 옛 기억마저 낱낱이 확인하고, 곱씹고, 괴로워하고, 당사자들을 미워하거나 자기자신을 책망하는 수순을 역으로 밟아야 했다.
퇴행이 17세쯤 되었을 때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들렸다. 마음과 뇌를 한꺼번에 찢는 듯한 첨예한 소리에 준식은 정신을 차리고, 상처뿐인 회상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염 엘프가 외쳤다.  

“가져온다고요! 가져와! 젠장, 그것 좀 내려놓으쇼!”
“지랄.”

순형은 작은 단도를 손에 들고서 여덟 명의 엘프들을 압박하는 중이었다. 가끔 장난삼아서 찌르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말이다. 슬쩍 봐도 순형의 단도는 많이 써서 끝이 닳은 은제 과도 같은, 볼품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엘프들의 꼬락서니는 어떠한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도망은 가야겠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그물이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못 벗어난 채 순형을 중심으로 태양계처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레이 스틸! 빨리 거두쇼!”
“흥, 내 맘이지.”
“제발......”

결국 엘프들이 울기 시작했다. 볼에 무언가를 잔뜩 문 어린애가 징징대는 것처럼 볼품없고 짜증나는 울음이었다. 형광 녹색 눈에서 나온 눈물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번쩍거리는 녹색 얼룩을 선명히 남겼다.
순형은 만족스러운 태도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신중한 태도로 칼을 갈무리했다. 그러자마자 엘프들은 뒤도 안 보고 처음 왔던 방향으로 도망갔다. 식상한 관용구인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이라는 말이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참으로 적확하구나 하고 준식은 나름 감탄했다.
순형과 단둘이 있는 동안, 엘프들이 순형이 원하는 것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당연히 궁금한 것이 많은 준식이었다.
준식은 입을 열었다가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 입술도 침으로 축였다.

  “언제부터야?”
  “뭐가.”
  “마법사.”
  “난 태어날 때부터 마법사였어.”
  
말도 안 된다고 반문하려다가 그만뒀다. 아까도 마법사란 건 없었다고, 친구가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결과는?
준식은 다른 궁금증이나 해소해야겠다 싶었다.

  “그 칼은 뭐야?”
  “맹약의 과, 최초의 철기. 네크로노미콘을 제본한 도, 그레이 스틸.”
  “아까 쟤네들이 자꾸 부르던데 네 진짜 이름이 아니었어?”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소유자의 자아를 바꾸고, 결정하는 사물이 있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준식은 더 물어봤자 헛수고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너...... 진짜 친구 맞아?”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나 이제 네가 진짜 그거라는 걸 믿거든. 그렇다면 말이지.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 기억도...... 무슨 소리인지 알지?”

준식은 최선을 다해서 쥐어짜듯 말을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계속 작아져서 그때마다 아예 포기하고 싶었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세상에는 들을 필요가 없는 진실도 있는 법이다.
순형은 한참 동안 준식을 바라보았다. 몇 번 힐끔거리며 시선을 살피던 준식은 곧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시장통에 널린 고등어를 보는 주부의 눈이 그럴까, 죽어가는 동물을 보는 콘돌이 그럴까. 먹이 이외의 효용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눈이었다. 삼겹살을 먹으면서 돼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치킨을 뜯으면서 그 닭의 생활을 되짚어 보는가? 아무 말 없었건만 준식은 대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선명한 굉음으로 대답을 들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순형은 인간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간에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는 생물은 아니었다.
준식이 그만 봐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기 직전에 마침 저 멀리서 빛덩어리를 든 엘프가 나타났다. 고휘도 LED램프를 켠 듯한 밝기여서 수염 엘프의 찡그린 얼굴이 멀리에서도 선명히 드러났다.
순형이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고, 동시에 준식을 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그는 땀을 닦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기괴한 외모 탓에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는데 이제는 해방을 가져온 엘프의 출현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엘프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순형이 가까워지자마자 물건을 던지듯 건넸다. 순형과 한시라도 더 오래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순형은 이때마저도 야비하면서 짓궂은 장난을 쳤다. 받을 듯 말 듯 약올리면서 엘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가 정도 이상으로 접근할 때마다 엘프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처럼 서너 번 놀림감이 되었을 때.

  “허어......”

수염 엘프는 혀를 차면서 준식에게 물건을 건넸다. 빛덩어리가 엘프에게서 그에게로 옮겨 갔다. 워낙 강렬한 빛이어서 준식의 주위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뜨거울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카드를 건넨 수염 엘프는 굉장한 속도로 멀어졌다.  
빛을 뿜는 물건은 두툼한 카드다발이었다. 순하고 거칠지 않은 지질이 호감을 주었고, 왠지 뒤섞고, 돌리고, 겹치고 싶게 만들었다. 곧 그의 손을 통해 따뜻하고 친근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는 느낌 같은 안온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준식은 왠지 순형에게 이 보물을 주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순형이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자 강한 반동과 함께 빛에 싸인 카드가 공중을 날아 손에 안겼다.  
집에서 같이 잘 놀던 여자친구가 급한 일 때문에 갑자기 떠난 듯한 서운한 느낌을 받으며 준식이 물었다.

  “그건 뭐야?”
  “새로 쓸 무기야.”
  “무기?”
  “참 궁금한 게 많구먼. 곤란한 성격이야. 이런 말도 못 들어봤냐? 호기심이 김준식을 죽인다.”

이름을 발음할 때 순형이 스타카토로 딱딱 끊어 말했다. 준식은 놀란 얼굴을 애써 무표정으로 관리하며 되받아쳤다.

  “고양이겠지.”
  “반격이 어설퍼.”

순형이 카드를 안 든 쪽으로 손가락을 퉁겼다. 공간이 열렸던 것과는 반대로 점점이 흩어지다가 순형의 뻥 뚫린 공간으로 모두 수납되었다. 분해되는 숲과 언덕의 광경을 보면서 준식은 잠시 저 뒤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애초의 현실, 그러니까 준식의 방 안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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