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8.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안락함을 느꼈다.
한 십분 쯤 지난 것일까? 그녀는 눈을 붙이기 위해 뒤로 젖혔던 의자를 바로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 켜진 스탠드는 따뜻한 빛을 띠었고 그 위에 걸린 그림은 언제나처럼 포근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이 작은 연구실 책상에서 항상 편안함을 느끼곤 했는데, 그것이 저 그림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억 년 전 석탄기의 고대식물 원시림이 섬세하게 그려진 일러스트는 언제나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저 거대한 양치류와 석송, 원시 나자식물 너머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니 사람은 아예 없을 것이다. 인간이란 종은 한참 뒤에나 등장하게 되니까······. 인간이 존재하지 않던 그 시절이 보다 평화로운지도 몰라. 느린 시간들 속에서, 풍성한 고대식물들과 그 위를 나른하게 기어 다닐 거대한 파충류들과 메가라크네와 같은 거대한 곤충들. 신이 진짜로 꾸미고 싶었던 세계는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순간이 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평화가 사라지고 미친 인간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 많은 이들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인간들 자신이다.

그녀는 으스스함을 느끼며 야근 때나 걸치던 니트를 여미며 왼팔을 쓰다듬었다. 소매를 걷어 보니 붕대 위에 피가 약간 배어있었다.

흉터가 남진 않겠지? 당분간은 반팔은 못 입겠네.

피식, 웃음이 배어나왔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나 하다니. 그녀는 스탠드 밝기를 낮추고 창가로 가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연구단지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캄캄했고, 연구소를 포함한 세 블록이 모두 불이 나간 상태였다. 여덟시 경에 발전소 내 비상전력이 들어온 것으로 보아 이 일대를 관장하는 발전소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폭도들이 발전소를 파괴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불 꺼진 블록 너머로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도시 안쪽엔 불이 살아 있었다.

저곳에 가면 온전한 사람들이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숨어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러기를 바랐고, 날이 밝으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대책 없이 숨어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이 되자 그들은 그 수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연구단지 앞 어둠 속에서는 지금도 폭도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어둠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밀려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빛이 새나가지 않게 커튼을 닫으면서 진이와 승목 씨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들을 살펴봐야지. 그녀는 연구실을 나가 류박사 방으로 갔다.

그녀가 속한 ‘화분(花粉) 연구분과’ 장인 류박사 방엔 푹신한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 진이와 승목 씨가 쉬고 있었다.

승목 씨는 ‘미생물(微生物) 연구분과’ 연구원이었는데, 그녀가 진이를 데리고 연구소 건물로 들어왔을 땐 그는 이미 패닉 상태였다. 폭도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로비에 숨어있던 그는 그녀가 부르자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고, 그녀가 다가가자 벽에 머리를 박으며 자해를 했었다. 마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공포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옆구리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맛보았고, 이성을 잃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그 두려움과 공포가 그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다.

긴 소파에 누워 있는 승목 씨는 옆구리의 출혈은 멎었지만 지금은 아예 의식이 없었다. 불규칙적으로 가는 숨을 한 번씩 쉴 뿐이었다. 오히려 다행인지도 몰랐다. 의식이 없는 동안은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진이를 살펴보았다. 류박사의 개인 안마용 의자에 누운 진이는 잠든 것을 보고 나갔었는데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좀 괜찮은 거야, 진이야?”

진이가 힘없이 눈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추워, 언니······ 너무 추워.”

“조금만 참아, 곧 도와줄 사람들이 올 거야.”

확신 없는 얼굴로 위로하자 진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도, 그렇게 말했잖아. 낮에도······.”

그녀는 죄책감이 들었다. 희망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해야만 하는 죄책감. 그러나 그것을 계속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자······. 아침이 되면 분명 사람들이 올 거야.”

진이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진이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이성을 놓아버린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정신이 돌아온 것 처럼 보였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놀라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아래층에서 들려왔고,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였다.

현관 유리문이 깨진 걸까? 그렇다면, 폭도들이 다시 몰려온 것이다!

그녀는 진이를 돌아보았다. 눈을 감은 진이는 가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잘못 들은 걸까? 내가 긴장을 한 탓에······?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틀림없다. 아래층 출구를 모두 잠갔고 현관 앞에는 로비의 벤치들을 쌓아놨었다. 그것들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진이는 여전히 듣지 못한 것 같았고, 그녀는 다시 밀려드는 두려움 속에서 중얼거렸다.

침착해, 침착하라고! 그들이 이층으로 올라오게 하면 안 돼······ 그럼 움직일 수 없는 진이와 승목 씨가 위험해져!

그녀는 숨을 고르며 일어나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가한 고생물연구소의 연구분과장의 사무실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골프백이 있었다. 그녀는 수요일마다 연구소장과 골프장을 찾는 류박사의 행실을 비난하는 쪽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가 고마웠다. 그녀는 골프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복도를 나가 잠시 어둠 속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는 연구소 안이었지만 그들은 폭도들이었다. 미친 폭도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침착해야 한다.


조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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